엘렌느는
남편에게 살해당했다.
철학자,
구조주의 마르크스주의자,
푸코와 데리다의 스승이기도 했던
루이 알튀세르가 아내를 살해했다.
그리고 모두에게 알려진 바대로,
정신착란을 이유로 면소판결을
받았다.
알튀세르는 안정을 찾은 후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를 통해 자신을 해명한다.
그는
매력적인 사상가다.
마르크스를 비판적으로
독해하면서도 열렬히 지지하는 알튀세르는,
인간주의와 역사주의를
통해 맑시즘을 수용하는 것을 거부한다.
그가 구조주의자라고
불리는 이유는 경험주의에 기반한 인식론을 부정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론을 아무리
그럴듯하게 논증해봐도 문제 설정 단계에서부터,
선행하는 개념들과
언어를 써야 하기 때문에,
여전히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보는 것이다.
더불어 사회 속에
존재하는 “인간 개체를 행위자actor로
보기보다는,
구조를 구성하는
층위들을 반영하는 대리자agent로
본다”는 점에서 독특하고 친근하다.
한때 자본가에
대항하는 노동자라는 경제결정론적 해석이 안겨주었던,
그 남루하고
인지부조화적인 현실인식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다고
환호했던 것도 알튀세르와 같은 사상가들 덕분이었다.
그의
살인죄는 더이상 논란의 대상이 되지 않는 듯하다.
현대사상가로서
알튀세르의 정신이 여전히 논쟁적이며,
꾸준히 거론되어
왔다는 점과는 사뭇 다르다.
천재의 광기로
일어난 해프닝이라 말할 일은 분명 아닌데도…,
사람과 그의 생生을
기억하는 바람직한 방법을 찾아야 할 필요를 느낀다.
그가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에서 자신의 행위에 대해,
정신분석자의 입장이
되어 해석했을 때,
묵직한 불쾌함을
느낀 것이 원인일 수도 있다.
또,
알튀세르의 뛰어난
후기 사유,
마주침-우발성의
유물론이 나올 수 있었던 것도 그 고통을 관통했기에
가능했다고 말하는 것조차 공연한 치장으로 느껴졌다.
항변할 권리를
요구하는 죄인과,
말할 권리를 영원히
박탈당한 피해자의 들리지 않는 외침에 주목하자면,
객관성이라는 것이
결코 양쪽 입장을 모두 공평하게 듣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명확하다.
알튀세르는
친구들을 위해서,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 이 책을 쓰고 있음을 말하며,
독자에게 “용서해주길
바란다”고 덧붙인다.
세상에 이해 못할
일은 없다.
이해하기 싫은 일이
많고,
오해와 이해가 같은
말인지도 모르고 읊을 뿐이다.
아마도 사람들은 내가 그런 행위를 저지르고
또 그 행위에 대해 내려진,
그리고 자연스러운 표현에 따르자면
내가 혜택을 입었다고 하는 그 면소 판결을 받고서도
침묵을 감수하지 않는 것에 대해 충격적이라 여길
것이다.
그러나 내가 만약 그런 특전을 누리지 않았더라면
나는 법정에 출두해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출두해야 했다면 나는
답변해야 했을 것이다.
이 책은 그랬을 경우 내가 해야
했을 답변이다.
그리고 내가 요구하는 것은 단지
사람들이 내게 그것을 허락하는 것이다.
그 당시라면 내게 하나의 의무가
될 수 있었을 일을 지금 할 수 있도록 허락하는 것이다.
물론,
나는 내가 여기서
하고자 하는 답변이,
실제로 행해지지
않았던 법정 출두의 규정에도,
그 형식에도 맞지
않는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법정 출두와 그 규정과 형식의 부재,
영원히 끝나버린
그 부재가, 도리어
내가 지금 이야기하려는 것을 더욱더 대중의 자유로운
평가 앞에 제시하게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어쨌든 나는 그렇기를
바란다. 하나의
불안을 가라앉히기 위해 한없이 다른 불안들을 무릅쓰기까지
하려는 것이 내 운명이다.
(밑줄은 내가 강조한
것임.)
알튀세르는
무책임 상태에 처한 자신의 처지를 달가워하지 않았던
것일까?
책임상태에서는
가능했을 형식,
면소판결로
영원히 불가능해진,
그 어떤 형식을
위해 불안을 무릅쓰고 있다고 한다.
소송절차에
따라 공개 심리를 열게 되고,
검찰이 개입하고,
스스로를
해명하는 피의자가 되었다면,
그는 어떤
해명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을까?
그 해명에
따라 (대중의)
판결은 또
어떻게 달라졌을까?
아마도 이런
대목에서 말하는 가능성이지 않았을까?
“범인은
일정한
징역형에 처해지며,
그럴 경우 그
범인은 사회에 대한 자신의 부채를 지불한다고,
따라서 자신의
범죄에서 '벗어난다'고
'간주되는'
것이다.”
그는
끔찍한 경험을 했다.
그렇지만 나는 그가 겪은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밑줄을 그어 밝힌 구절,
“여기서 내가 하고자 하는
답변”이라는 표현에 집착하고 있다.
그는 법인격을 완전히 빼앗긴
처참함에 저항해야 했으므로 마냥 침묵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암흑
속에서 빛을 찾아 헤매는,
기한도 없이 무거운 묘석에 짓눌려
있었던 충격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싶었을 것이다.
급성이기는 하지만 일시적인
상태에 그치는 '광기'와
숙명 같은 '정신병'을
전혀 구별하지도 않은 채,
언론들이 부추기는
대로 일반 여론은 미치광이를 단번에 정신병자로
간주하는데, 그때
정신병자라는 의미는 평생 병자를,
결과적으로 평생
강제 수용되어야 하고 결국 그렇게 되고 마는 자,
즉 독일
언론에서 정확히 지적했듯이 '죽은
목숨'을
의미하고 있다.
(…)
정신병원 고독과
침묵 속에서, 묘석
아래에서 그 병자는 자신을 찾아오지 않는 자에게는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 2년
전부터 정신병원에서 나온 상태지만 내 이름을 아는
사람들에게 나는 한 사람의 실종자인 것이다.
죽지도 살아 있지도
않고 아직 매장되지는 않았으나,
광기를 지적하기에
매우 적절한 푸코의 표현대로 '활동이
없는' 자다.
즉 실종자다.
알튀세르는
자신의 살인장면을 직접 표현하는 것을 자제하고,
즉각적으로 보이지
않지만 그 상황으로 이어진 전체적 상황을,
혹은 존재방식을
설명하기 위해,
출생에서부터 분석적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어떻게 행동했고,
무슨 생각들을
했으며,
“내 뜻에 따른
것은 아니지만 내가 되어버린” 알튀세르의 모든 것을
담고자 한다.
많이
알려진 것처럼 그는 어린 시절 어머니가 사랑했던
남자-죽은
삼촌으로 살아야 했다고 한다.
자기 자신으로
살고도 싶고,
어머니의 사랑을
얻고도 싶은,
양가 감정에 사로잡혀
끝없이 갈등해야 했다는 것이다.
파국에 대한 두려움,
우울증에 시달려야
했었고,
불안 속 자기파괴의
과정에서 아내를 살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제3자의
입장으로 (자신에
대해)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고,
대조한 알튀세르는
비판적으로 고백하고,
자신을 드러내고,
타인에게 자신을
알린다.
주변 인물들로부터
정보를 얻고,
전문가에게 문의하며,
신문 기사를 조사하고,
이데올로기 국가장치들이
끼친 영향을 분석 • 평가한다.
일기나 회상록에서
멈추지 않고,
법적이고,
제도적인,
정신분석학적인,
이데올로기적인
문제들을,
그의 경험을 매개로
설명하려 한다.
누구나
몇 번쯤은 속내를 드러내고 싶다는 열망을 가질 것이다.
곰곰 생각해보면,
그럴 때의 속내란,
억울함을 공표하거나
죄책감을 씻는 쪽으로 향해지기가 쉽다.
그렇다면 이 책을
적고 있는 알튀세르의 “답변”이라는 표현은 어떤가.
누군가 묻고 있다는
것이다.
비평이라는
(이데올로기적)
시선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변명도 아니고,
항변도 아니다.
답변이다.
냉정하게 들리는
것이 왜인가.
답변이라니. 누구에게, 무엇에 대해?
알튀세르는
자신의 생을,
개인적 관계와
일상을,
세계에 노출함으로써
역사의 무대에서 검증받고자 했다.
피해자 엘렌느,
그리고 그 사건으로
인해 고통받는 당사자들에게 답변하는 것이 아니다.
이 자서전-답변서는
한 사람의 生을 구체적으로 담고 있다.
빛나는 순간이
영원으로 향하는 길에는 해석자가 항상 존재하는 것처럼, 비극의 순간이 영원에 이르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분석자가 되려 한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이 자신의 삶에
늘 정당성을 입힐 수 있는 것도,
세상 누구보다
자신만큼 자신의 삶을 잘 분석하고 해석할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해는 대개 오해와 비슷하다.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을,
온전히 혹은 객관적으로
알 수는 없다.
나는 너 그리고
세계와 섞여 존재하는 것이기에 소용없는 일이다.
그래서 알튀세르는
일기도 회상록도 아닌 글을 쓰고 싶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자기중심적이고 방어적인 속성은 없앨 수 없겠지만,
사회적 공간으로
나온 이상 감당해야 할 무수한 뒷말,
저항,
욕,
폐기처분의 위험을
안으면서,
무언가를 입증하고자
했다.
사회적
공간에서,
개인을
떠난 지점을 만들어 분석하고 해석하는 일은 철저할수록
좋다.
사회적
가치와 의미는 늘 일정한 목적과 방향성을 갖고 있다.
이
책의 의미는 이미 사회적이다.
알튀세르가
정신분석자의 위치에서 자신을 해명한 일이 (여전히)
부자연스럽지만,
나는
계속 반복해서 말하며 믿으려 하고 있다.
누구나에게
말할 권리가 있다고.
그
권리란 내가 좋을 때,
인정할
수 있는 상황에서만 적용 가능한 것이 아니라고 말이다.
우리는
그 공간과 성격을 고려해서 듣고 사회적 가치와 의미를
발견하고 전달해야 한다.
말할
권리를 행사하는 사람들은,
그
권리를 행사하는 수많은 타자의 음성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반복하면
할수록 슬프다.
믿으려
하면 할수록 고통스럽다.
내용도
형식도 갖지 못하고 묵묵히 견디다
떠나간 이들,
아무
것도 없이 살다가,
흔적없이
사라진 그들의 침묵이 오래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 가슴
답답하다.
현실에서
말할 권리는 생존권과 연결되어 작동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