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석의 문장 2 - 자유롭고 행복한 글쓰기란 무엇일까 한국어 글쓰기 강좌 2
고종석 지음 / 알마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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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 고집이 외로움을 부추기고, 내 거칠음이 고립의 집이다!


제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글을 쓰고 나면, 어찌 그리 쓸쓸한지 목울대가 움찔하다. , 언제부터 글에 의지하게 되었을까? 자의로 타의로 밖으로만 떠돌았고, 소중한 일상의 궤도를 이탈한 채 허우적대기 일쑤였다. 길을 몰라 표독스럽게 세상을 노려보기만 하다가, 미련하게 타협하는 방법이 읽고 쓰는 것이다. 그렇게 읽고쓴다는 것은 내 생존력의 근기가 되었다. 몇 줄이라도 끄적이고 나면 뭔가 안전영역에 들어온 것 같은 심정에 빠지게 된다. 이것은 이겨내야 할 병이다. 실뿌리라도 이 땅에 내리고자 한다면 일어나 섞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또다시 쓰고 읽어야 한다. 위로하는 글이 아니라 확장하는 글을 써야 한다. 호흡을 섞을 여백이 있는 글을 써야 한다. 그 글은 내 것이고 내 것이 아니어야 한다. 글에 누군가의 호흡이 얹어진다면, 그것이 조롱이든 호감이든, 외롭지는 않을 것이다.


며칠이고 몇 주고 마음으로만 쓰다가 정작 워드파일로 옮기기 시작하면 한두 시간이면 충분하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긴 글도 어렵고, 작고 세밀한 결을 만들기도 쉽지 않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생각의 줄기가 아니다. (두려움없이) 헤쳐가는 꿈만 꾸다 늙어 간다.



2. 말투를 바꾸면 사고방식이 또 생활이 변하고 운명이 다른 길을 찾게 될까?


『고종석의 문장』이라면 국어의 현재성을 경험하기에 모자라지 않은 선택일 것이다. '모자라지''부족하지''충분한'을 넣어 읽어본다. 그래도 여전히 처음 선택이 맘에 든다. 이게 문제일거다. 나를 고집하면 나밖에 없다. '충분한'을 넣지 못하나? 고치고 고쳐 이렇게 다시 쓴다.『고종석의 문장』은 전략적인 글쓰기를 하는 사람들에게 유용하다.


글쓰기 지침서를 애써 외면하던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말초적인 계기는 중학교 때다. 젊고 건강한 국어교사는 교과서의 시와 문장을 자주 외우고 읽게 했다. 표준말과 좋은 글의 표본이 담긴 책이 교과서인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런데 나는, 슬프다고 해석해 준 시에서 슬픔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고민을 소리내 질문하고야 말았다.  그가 여중생을 두들겨 팬 것은 처음이었을거다. 초여름 짧은 소매 옷, 드러난 목덜미와 어깨는 시뻘겋게 변했는데, (그에게 호감이 있었던) 내 맘은 더했다. 6교시까지 벌을 서면서도, 내 맘은 슬프지 않은데 모르는 건 질문하라고 했으면서…라고 중얼거렸다. 나는 반성을 모르는 아이였다.


또 다른 계기는 “글쓰기”론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90년대 초쯤부터 글짓기를 글쓰기로 자연스럽게 바꿔 부르게 된 것이다. 글쓰기는 “참삶을 가꾸는” 것이며, 우리말과 글을 되살리는, 겨레의 생명을 살리는 것이었다. 반면 글짓기는 구태의연하고 작위적인 국어순화운동과도 같았다. 삶을 바꾸는 글쓰기 운동은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신문, 텔레비전, 동화, 소설을 뒤집고 찾아, 오염된 우리말과 글에 바른 표현을 찾아주었다. 음식점 차림표에 이르기까지 생활 전반에서 겨레 살리기는 계속되었다.


지난 국어시간을 생각하면 환호할 일이었지만, 내게 그 운동은 또다른 반항심만 부추겼다. 사회적 반응이 커질수록 말의 소외와 역차별이 생기는 것을 목격한 것이다. 오염된 말이 지정되었고, 바른말이 눈앞에 있는 데도, 자기 말을 여전히 고집하는 사람은 눈에 거슬려보이고, 바르고 고운말을 배우지 못한 사람에게 품위는 없어보이게 된다. 계급 언어가 생기고 문화적 차이가 생긴다. 이런 개인성 혹은 정체성이 불안의 요소가 된다.


내가 벌을 받고 뉘우칠 줄 아는 아이였다면, 좋은 글을 외우고 상냥하고 예의바른 말을 건네는 아이였다면 사회가 원하는 체제로 편입되기 쉬웠을까, 자신을 낮추고 가슴 속에 스승을 기꺼이 모시며, 조직의 일원이 되는 것에 부족함이 없었을까. 그럴 것이다.

누구와 말을 주고받느냐에 따라, 어떤 상황에서 발화가 되었느냐에 따라, 말은 일정한 방향을 갖고 비슷하게 반응한다. 교과서 시에 의문을 품었다. 국어교사의 해석에 이의를 제기했다. 국어교사가 질문을 기꺼이 수용하지 않았다. 그 체벌을 수용하지 않았다. 교과서를 싫어하지만 시험을 위해 이용만 했다. 처음 시작이 부정이었다.  그 기운이 바뀌지 않고 흐르고 있다. 


의문을 지울 것, 이의가 있더라도 유예시킬 것, 거부당함을 반성할 것



3. 『고종석의 문장』을 어떻게 읽고 있는가?


고종석 씨는 아름답고 명료해야 좋은 글이라고 말한다. 한밤중에 읽을 때는 집중하기 어려웠는데, 한숨 자고 난 뒤 읽으니 한결 낫다. 간결하게 설명하고 예를 들어 응용력을 키워주는 책이다 보니 밤보다 아침에 어울린다. 그의 단련된 글쓰기는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다. 이 책에서도 막힘이 없다. 엄청난 양의 지식도 조직되고 정리된 창고에서 자동추출되어 나오듯 끊임없다. 은유와 환유의 설명도 귀에 걸리는 것 없이 술술 넘어간다. 풍부한 어휘력과 유연한 구성력이 장점이다.


고종석의 문장 읽기는 진행 중이다. “논리를 확장”해가라는 지침을 읽고 내 습관을 돌아본다. 피천득의 인연과 같은 미셀러니(몇십 년만에 다시 듣는 용어다)는 한번 싫으면 영원히 그렇다는 걸 확인해준다. 안에서 부르는 이름- 엔도님,  바깥에서 부르는 이름- 엑소님과 같은 고유명사 얘기도 재미났다. 양주동 씨의 『문주 반생기』는 함께 읽어보고 싶다.


동의하고 수용하는 법을 통해 확장하는 것을 연습해야 한다. 어떻게 가능할지 아직 갈피를 잡지 못한다. 독해력이 문제일까? 고종석 씨는 좋은 글의 표본으로 김현 씨의 <'말들의 풍경'을 시작하며>를 한 줄씩 읽어가며 해설해 준다. 이해하고 시선을 맞추려고 노력하지만 애처롭게 어긋난다. 그의 주장은 아래와 같다.


이렇게 <'말들의 풍경'을 시작하며>란 글을 한번 읽어봤습니다. 이 짧은 글에서 필자가 주장하는 건 '말들의 풍경은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고 한 사람이 보기에도 또 다르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다 변화하기 때문이다. 실체라는 건 없다. 있는 건 흔적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은 불교에서 익숙하죠. 세상에 완전히 분별되는 것은 없다. 고정돼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김현 선생 자신이 평생 교적을 두었던 기독교의 세계관과는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김현 선생은 이 글에서 자신의 논리를 찬찬히 차곡차곡 쌓아 올립니다. '말들은 저마다 자기의 풍경을 갖고 있다'라는 말부터 시작해서, 그 풍경이 다른데 왜 다른지 설명하고, 그러면서 말들의 흔적까지 빨아들일 수 있는 블랙홀은 없다고 주장한 다음, 결국 맨 끝에서 너와 나는 구별지을 수 없다는 말을 던집니다. 조금씩 조금씩 논리를 쌓아나가고 있어요.

그리고 예컨대 '기름물감의 계속되는 덧칠처럼'이라든가 '빛의 움직임에 따라 물의 색깔이 변하듯'과 같은 비유는 정말 탁월하죠. 눈이 시릴 정도로 아름답습니다.

제 생각에 아름답고 명료한 글의 한 예가 이 글이 아닌가 싶어 여러분과 함께 읽어봤습니다. (『고종석의 문장』中)


내 식으로 요약한 것은 이렇다. “나와 너가 말을 주고받고 있다. 말들의 풍경은 이중적이고 중첩되어 늘 이동한다. 변화가 본질이다. 영원한 것이 없기 때문에 흔적일 뿐이라는 것이다. 말들의 풍경이 변하는 것은 욕망의 노회한 전략의 결과다. 억압된 충동의 흔적이다. 개인성도 없다. 너와 내가 나눈 것은 흔적이다. 네가 강력히 주장할수록 흔적으로만 존재한다. 나도 그렇다.”


아름답게 느껴야 하는데, 어쩌면 좋은가. 한 문장 안에 같은 단어와 뜻이 반복되는게 못마땅하다.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개념들의 행진이 거북하다.


풍경은 그것 자체가 마치 기름물감의 계속적인 덧칠처럼 사람들이 부여하는 의미로 덧칠되며, 그 풍경을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의 움직임에 따라 마치 빛의 움직임에 따라 물의 색깔이 변하듯 변한다. 풍경은 수직적인 의미의 중첩이며, 수평적인 의미의 이동이다. 그 중첩과 이동을 낳는 것은 사람의 욕망이다. 욕망은 언제나 왜곡되게 자신을 표현하며, 그 왜곡을 낳는 것은 억압된 충동이다.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본능적인 충동이 모든 변화를 낳는다. 본질은 없고, 있는 것은 변화하는 본질이다. 아니 변화가 본질이다. (김현의 <'말들의 풍경'을 시작하며> )


아름다움을 못 느끼겠다면 명료함이라도 확인해야겠다. 추론해 보자. 풍경이 덧칠되고 변한다고 하는 것은 말하는 주체를 초월한 시각이다. 듣는 주체도 아니다. (말하고 있는 사람이 갑자기 논조도, 의미도 바꿔가며 장면을 연출하겠는가?)  3의 시선으로서 풍경을 끌고 오는 것이다. 말하는 사람도 아니고 듣는 사람도 아니고 해석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빛의 움직임에 따라 물의 색깔이 변하듯 변한다”고 한다. 빛의 색깔이 변하는 것이지 물의 성질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빛과 물의 관계는 확실하지만 화자와 해석자의 관계는 어떤가. 풍경이 인격이 된 이상(해석자도 말하는 주체이기 때문에)  즉시즉시 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풍경이란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과 같은, 관조하는 시선으로 느껴진다. 불안하다


어떻게 읽어 들어가야 아름답고 명료하다고 느낄 수 있을까. 더 노력하자. 그래, 작가의 시점으로 보자구. 어떤 작가가 글을 발표한다. 사람들은 저마다 요란하게 논평하고, 이리저리 글을 해부한다. 배설하듯 쏟아내는 일련의 비평들이 어느 정도 가라앉고 나면 글은 초라하게 흔적만 남긴다. 욕망의 찌꺼기로 재조합된 요상한 형태의 글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작가는 애초 글을 통해 자신을 드러냈지만 이제 그마저도 확신하지 못한다. 글도 흔적이고 비평도 흔적이며 작가도 흔적이다.



4. 아무래도 어렵다


"아름답고 명료한"을 찾지 못하고 또 날이 샜다. 좋은 글이란 그저 '마음에 흡족한'의 다른 표현일 수도 있다. 권위를 인정하고 그렇다고 일단 믿고 봐야 하는데, 그런 모습은 영 내가 아니다. 고집과 거칠음을 어찌 대면할 것인지 모르겠다.


말은 고정되지 않은 것이다. 누가 다루는지에 따라 해석이 다를 수 있다. 같은 말이라도 다정하게 설레게 다가올 수도 있고 혐오에 빠지게 할 수도 있다. 대화로 오가는 의미도 종결되지 않고 대화 후에까지 다른 의미를 덧붙일 수 있다.


말의 실체는 없지만 있다. 말 이후에 말 이전과 다른 지점이 물리적으로 생성되기 때문이다. 말들은 형체가 없지만 강한 물리력이 있어 구조적이기 때문이다. 말들은, 일상의 대화는 그저 흐르지만- 일상의 총체- 삶을 이룬다. 흔적이 아니고, 각기 다른 장면의 연속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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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 해방 70주년 전날, 독일 총리가 “나치 만행을 기억하는 건 독일()의 영원한 책임”이라고 말했습니다. 국내 주요 언론은 너나할 것 없이 올바른 역사관을 가진 메르켈에게 호의를 표현합니다. 아베 총리의 행보와 비교되다 보니 찬사는 더 커지고 울림이 있습니다. 정치적으로 적절한 말일텐데 아직까지도 그 말의 한기를 떨쳐버리기 어렵습니다. 말의 한기寒氣!


영원히, 끝나지 않는, 책임을 어떻게 질 수 있다는 것일까요. 독일과 독일인에게 (영원히) 각인되고 있는 것은 만행의 기억일까요, 그 이후의 책임일까요. 사죄하고, 배상하고, 전범들을 추적하고 심판대에 세우는 것은 분명히 책임 있는 태도입니다. 지금 독일의 모습을 보십시오. 전쟁을 일으키고 잔인한 학살을 자행했던 범죄국가의 이미지는 희미해졌습니다. 유럽의 강대국으로 우뚝 서 있습니다. 나치의 후손이라는 편견으로 차별받지 않습니다. '메르켈의 말'과 같은 정치적 사회적 노력이 있었기에, 보다 중요하게는 경제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어쩌면 아우슈비츠는 달라진 세상을 입증해주는 사건일 수도 있겠습니다. 지금 아우슈비츠를 말한다는 것은 반인륜적 범죄의 전말을 드러냈고 처벌했다는 확인이기도 하니까요. 어떤 부분에서는 그렇습니다. 아우슈비츠를 가능하게 했던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문제, 그리고 광기를 의식하지 못하게, 잔혹한 전말을 희석시켰던 관료적 이행()들이 수많은 조사와 연구를 통해 밝혀진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생각들도 여전합니다. 도대체 아우슈비츠의 진실을 밝힌다는 것은 무엇이었는가? 사건은 세밀하게 묘사되었지만 정작 증언할 사람의 대다수는 죽음으로만 말합니다. 사건 이전과 사건 이후- 어떤 지점이 변화했는가? 참혹한 범죄에 동조하고 침묵하며 회피해야 했던 비겁함 - 그것들을 가능하게 했던 인간의 두려움, 욕심, 맹목, 의도적인 어리석음과 복종의 문제는 어떠한가요. 도덕적 잣대를 무력화시킬 생존의 조건들은 나아졌나요. 우리가 밝힌 것은 무엇이고 덮힌 것은 무엇입니까?


아우슈비츠 생존자 프리모 레비의 책을 읽다가 “그때 이후, 불확실한 시간에 고통은 되돌아온다……”는 구절에서 느꼈던 말의 열기를 기억합니다. 한참을 서성였던 그 구절은 새뮤얼 콜리지의 「늙은 뱃사람의 노래」에서 인용된 것입니다.


늙은 뱃사람은 결혼식 연회에서 자신의 얘기를 들려줍니다. 그는 노련한 선원이었지만, 십자궁으로 알바트로스(길조吉鳥, 신천웅)를 죽인 일로 동료 선원들의 비난의 대상이 되었답니다. 항해 중 고난을 겪게 되자 그를 탓하며, 동료들은 그의 목에 죽은 새를 걸어주며 저주를 부른 원흉으로 취급합니다. 그리고 …… 배 안에 그를 제외한 모든 생명체에 죽음이 찾아옵니다. 홀로 살아남은 그는 자책하며 비탄에 차서 (차라리 죽음을 원하는 기도로) 간구하며 바다 위를 떠돕니다. 그가 찾아낸 구원은 황금빛으로 빛나던 물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구조된 후에도 그는 평생 정착하지 못합니다. 배 위의 시간처럼 떠돌 뿐입니다. 고통은 자주 찾아오고, 그는 그 모든 이야기를 노래하듯 토해내야만 편안해질 수 있습니다. (강박적으로 자신의 죄지음을 밝히려 하는 인상입니다.)


시에 문외한으로서는 콜리지의 시심詩心을 정확히 알 수가 없었습니다. 짐작할 뿐입니다. 생명에 대한 희열로 삶의 고통을 치환하려는 늙은 뱃사람의 노래는 자칫 상투적일 수 있겠지만, 삶의 어느 시간, 예상치 못했던 순간에 불쑥 - 다시 되돌아오는 고통을 고백함으로써 강렬한 보편 감정에 이르게 합니다.


발목을 잡는 것은 '불확실한 시간''되돌아오는 고통'입니다. 고통의 사건과 시간은 지나갔지만 고통으로 되돌아오게 -잡아끄는 힘들이 있습니다. 한번도 사라진 적이 없었던 것처럼 다시 출현합니다. 사건 이후 정지되기도 하고 지워지기도 하며 유혹의 시간을 누려 놓고도, 아닌 것처럼 온 정신을 그곳으로 이끕니다.


늙은 뱃사람은 명백한 그의 과실로 인해, 마치 메시아를 죽인 원흉이 되어 속죄하듯이, 구원을 위해 떠돌았다고 하지만, 프리모 레비의 방황은 어디에서 시작되었던 것일까요. 세계인은 피해자들의 평온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으며 위로했습니다. …… 그런데 프리모 레비는 여전히 고통의 시간으로 되돌아옵니다.


자신이 내던져진 세계는 물론 끔찍한 것이었지만 해독 불가능한 것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 세계는 그 어떤 모델에도 부합하지 않는 것이었고, 적은 주변에도 있었지만 내부에도 있었다. “우리”라는 말은 그 경계를 잃었고, 대립하는 자들이 두편으로 나뉜 게 아니었다. 하나의 경계선이 아니라 여러 개의 복잡한 경계선들, 곧 우리들 각자의 사이에 하나씩 놓인 수많은 경계선들을 볼 수 있었다. 우리는 적어도 불행을 함께하는 동료들의 연대감을 기대하면서 수용소에 입소했지만 몇몇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바라던 동맹은 없었다. 반면에 수천 개의 봉인된 단자單子들만이 있을 뿐이었고 이 단자들 사이에는 필사적이고 은밀하고 지속적인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프리모 레비,『가라앉은 자 구조된 자』 中)


구조된 자, 레비의 증언은 희생자와 박해자라는 이분법적인 영역 - 단순화의 욕구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끌려온 수인들의 운명은, (나치의) 특권을 방어하기 위해 (한정적) 특권을 양도받은 동료 수인들로 인해 혼란스러워졌습니다. 관리자 포로가 생긴 것입니다. 레비는 나치의 가장 악마적인 범죄는 수인들로 '특수처리반'을 조직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피해자로 끌려와 '특수 처리반'으로서 관리를 맡게 된 이들은 동료 수인들을 벌거벗기고, 가스실로 끌고 가면서도 질서를 유지시키는, 이후 화장로에서 소각하는 과정까지 담당했습니다. 그 임무를 강제받은 수인들의 운명은 곧바로 정해졌다고 합니다. 받아들이지 못하고 저항하다 죽음을 당하거나 순응하거나 했던 것입니다.


다른 수인들의 형편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특권을 얻은 포로들은 라거에서 다양한 일들을 집행함으로써 나치 체제에 편입되었습니다. 통역관, 경비원, 검사원에서부터 작업장과 막사를 관리했던 카포, 행정 사무원, 처벌 감방 교도관까지……그들 중 일부는 거칠고 오만방자했지만 적으로 느끼지는 않았던 부류도 있었고, 동료 수인들을 가차없이 죽이는 잔혹행위를 마음대로 저지르는 카포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아우슈비츠에서 레비가 발견해낸 것, 이 전대미문의 발견은 책임의 확립과는 전혀 무관한 영역과 관련된 것이다. 이 영역 속에서 레비는 새로운 윤리()적 요소라고 할 만한 것을 분리해낼 수 있었다. 레비는 그것을 '회색지대'라고 부르고 있다. 그것은 “피해자와 가해자를 연결하는 긴 사슬”이 느슨해져 피억압자가 억압자가 되고 또 가해자가 피해자로 나타나는 그러한 지대이다. 선과 악이, 그리고 그것들과 함께 전래의 윤리()를 구성하는 모든 재료들이 용융점에 이르는, 부단한 회색의 연금술 말이다. (조르주 아감벤,『아우슈비츠의 남은 자들』中)


레비는 권력층의 폭이 좁을수록 카포들과 같은 조력자가 필요하다고 지적합니다. 또 억압이 거셀수록 기꺼이 권력에 협력하려는 의향이 확산된다고 강조하면서 도덕적 판단을 하지 말 것을 주장합니다. 맞는 말 같기도 하면서 아니기도 합니다. 라거에서 몇 만, 몇십 만의 희생자들을 무력하게 만든 것은 절대악이 분명 아닙니다. 그렇지만 부모와 자식이, 친구와 동료가 눈앞에서 죽어가지만 저항하지 못했던 것을 설명하기란 그리 어렵지도 않습니다. 레비의 주장대로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 심판과 무관한 일인지 확실치 않습니다. 다시 한번 레비의 말을 확인해 봅니다.


반복하지만 그 누구도 그들을 심판할 권한은 없다고 나는 믿는다. 라거에서의 경험을 한 사람도 그렇고,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나는 누구든지 감히 심판을 하고자 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 솔직하게 추론적 실험을 해봐라고 권하고 싶다. 할 수 있다면 수개월을, 수 년을 게토에서 만성적 배고픔과 피로, 혼잡한 난리통과 굴욕감에 시달렸다고 상상해보라. 자신의 주위에서 한 사람 한 사람씩 소중한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 소식을 받거나 보내지도 못한 채 세상에서 잘려져 나갔다고 상상해보라. 결국에는 화물열차와 객차마다 80명씩, 100명씩 실려 무턱대고 미지의 곳으로 며칠 밤낮을 잠도 못자고 여행한다고 상상해보라. 여기서 가혹하면서도 정확히 어떤 임무가 그에게 제안된다. 아니 부과된다. 그리고 그 대가로 그에게 생존이 제공된다. 내가 보기에는 바로 이것이 진정한 베필노트슈란트, ''명령에 따른 강제 상태'이다. ~ 자기 자신의 행동을 예측하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나는 '화장터의 까마귀들'에 대한 이야기를 연민과 준엄함을 동시에 가지고 성찰해보기를 요청한다. 그러나 그들에 대한 판단은 유보해두자. (프리모 레비,『가라앉은 자 구조된 자』 中)


레비의 고통에 깊은 연민을 느끼면서도 그의 결론에 쉽게 이르지는 못합니다. 생명의 보존은 본능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뛰어넘는 힘도 본능일 것입니다. 나치에 저항했던 레지스탕스들은 유럽 각지에 퍼져 있습니다. 유대인 탈출을 돕다 죽어간 유럽인의 모습이 정상인의 모습으로 비춰지는 것은 역사라는 교육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보다 자연스런 생존기제로서 협력과 희생이 필요하다는 본능 때문이기도 합니다.


회색지대를 곤혹스러운 인간의 문제로 끌어올리는 일은 본질을 가리기 쉽습니다. 본질을 드러내는 일은 법적 도덕적 영역에서만 진행되는 것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민족국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라고 강요하는 "나치의 아름다운 말"이 독이듯이, 회색지대를 인정하고 인간의 깊은 곳을 들여다 보자는 것도 같은 범주라고 여겨진다면 억지스러울까요?


사건 이후 수용소는 없어졌지만 나치가 되고픈 자들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들은 (공식적으로) 소수에 불과하지만 카포, 회색지대인들은 도처에 존재합니다. 오히려 더 당당해진 모습입니다. 그들의 임무는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나치가 폭력의 계보를 만들어냈다고 한다면 카포의 계보는 누구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야 할까요. 카포의 뿌리도 그리고 판단 유보된 회색지대인들도 모두 나치에서 연유한다고 말하면 될까요?


회색지대를 인정하고 판단을 유보한다고 해서 나치가 줄어드는 것도, 카포의 증가세를 막을 수도 없을 것입니다. (현실)사회가 선과 악, 그리고 연결 고리 -회색지대로 구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메르켈이 선의 진영인지 악의 진영인지 회색지대에 걸쳐 있는지 누가 대답해 줄 수 있습니까. 이스라엘이 (혹은 이슬람이) 희생자인지 가해자인지, 폭군인지 수인인지, 그 사슬 중간에 있는지 누가 말하고 있습니까?


독을 품은 삶의 결은 '아름다운' 말들과 함께 옵니다. 곁에 서서 또아리를 틀고 함께 갑니다. 구조적 문제에 덧붙여 개인의 책임을 강조하면서 누군가의 고통의 시간과 죽음을 눈감고 용인합니다.

절망의 날에 무기력한 순간에 어떤 모습으로 사건 속에 서 있게 될지 단언할 수 없습니다. 레비는 이에 대한 심판을 맡길 만한 인간의 법정을 알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유대인으로서 종교인으로서 그가 기댈 법은 신이겠지요. 하지만 독자로서 어떤 암시에 걸리고 맙니다. 그가 고통스러운 것은, 불확실한 시간에 되돌아오는 고통을 언급했던 것은 구조된 자 - 남겨진 자가 결백한 자는 아니라는 사실 때문이 아니었을까…하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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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차는 8시에 떠나네


카테리나행 기차는 비밀 임무를 지닌 한 청년을 싣고 떠나갑니다. 그녀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기차는 끊임없이 되돌아오지만 그/그녀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이제 밤은 없습니다. 그와 그녀의 밤은 없습니다. 그녀는 그를 부릅니다. 몸의 밤은 사라졌지만 기차와 함께 그리고 8시와 더불어 기억의 밤은 돌아옵니다. 숨결로, 슬픔을 넘은 결단으로, 헤어져야 만날 수 있는 시간을 노래합니다.


레지스탕스 청년은 뒷모습만 보인 채 떠나갑니다. 살포시 미소라도 지으며, 손 흔들며, 아쉬운 마지막 인사라도 나누면 좋으련만, 결코 얼굴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그가 카테리니 행 기차를 타는 순간, 등 뒤로 남겨지는 것은 친숙했던 생애이며 관계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마주해야 할 현실이란, 남겨진 자들의 일상을 구할, 피 흘리는 투쟁 뿐입니다. 

억압을 거부하고 자유를 위해 평생을 투쟁했던 테오도라키스의 감성이 단순하고 애절한 멜로디를 타고 흘러나옵니다. 




2. 쓰레기 시스템


서울시가 쓰레기 배출에 더 엄격한 룰을 적용하겠다고 합니다. 며칠 전, 위반시 100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부과하겠다는 안내장을 받았습니다. 꼼꼼하게 읽어보니 종이류, 비닐류 등의 재활용품이 종량제 쓰레기 봉투에 담겨 있을 경우 매립지에서 수거를 거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거부당한 쓰레기가 쌓이면 주거지역의 위생을 보장할 수 없게 되겠지요. 지방자치 단체로서는 강력한 감시체제를 통해 공공질서를 위반하는 개인들을 제재하겠다는 것입니다. 


백만원이라는 과태료의 크기에 놀라고, 분류배출의 방법을 잘못 알고 있었다는 것에 당혹감을 느꼈습니다. 예를 들자면, 빈 병이 아닌 유리의 경우 잘게 깨서 신문지에 싸서 생활용 종량제로 배출해야 한다고 알고 있었는데, 불연제 종량제 봉투를 따로 구매해서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입해야 할 봉투는 음식물, 생활용, 불연제, 세 종류이고, 재활용품을 위한 투명 비닐은 자주 쓰는 것만 해도 종이, 비닐, 플라스틱, 스티로폴, 빈 병 등 대여섯 종류입니다. 최소 8개의 비닐 봉투가 필요합니다.


불만들이 쏟아지는 것을 목격합니다. 강제성에 화내기도 하고, 코 푼 휴지는 종량제냐 재활용품이냐를 놓고 다투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문제는 명확합니다. 쓰레기를 분리배출 해야 한다는 것에 반대할 여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조정과 협력이 필요할 뿐입니다.  

에베레스트가 똥과 쓰레기로 골치 아프다고 합니다. 매년 수백 명의 등반가, 셀파 등이 버리고 가다보니, 썩지도 않을 얼음땅 밑에 수십 년 쌓여만 가는 것입니다. 최고의 산악 등반가들도 지고 내려와야 할 쓰레기의 무게가 천근만근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네팔 정부는 쓰레기 보증금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합니다. 등반 전 몇 천 달러를 예치하고, 하산 시 쓰레기 되가져오기를 할 경우 환급해준다는 것입니다. 산을 사랑하는 마음만으로는 지켜지지 않았던 질서가 보증금 제도에서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의 쓰레기 시스템은 쓰레기를 만들고 배출하는 데 별 제한을 가하고 있지 않습니다. 앞서 얘기한 대로 편의를 증진시켜 협력할 일만 남은 것입니다. 그렇지만 쓰레기 문제로도 혁명을 이끌 수 있다면 어떻습니까? 그럴 경우 시스템으로 접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협력과 제재가 아니라, 의식의 전환, 생활방식의 재창조, 가치관의 조정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쓰레기라는 기존 개념을 전도시킨다거나, 1인당 배출량을 엄격히 제한한다거나 하는 것들은 그 시작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자원 리사이클 문제가 아니라 경제 재분배의 문제가 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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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거 앨런 포 단편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08
에드거 앨런 포 지음, 전승희 옮김 / 민음사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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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간은 이 얼마나 복잡한 존재인가!

「붉은 죽음의 가면」, 에드거 앨런 포


당신이 살고 있는 마을에 전염병이 돌고 있다. “날카로운 고통과 현기증이 갑작스레 엄습하는 데 이어 엄청난 양의 피가 모공에서 흘러나오면서 피부가 썩어 들어가며”, 얼굴에 진홍색 얼룩이 생긴다. 발병에서 죽음까지 고작 삼십 분밖에 걸리지 않는 병이라면 당신은 어떻게 행동하겠는가? 프로스페로 왕이 택한 '붉은 죽음'을 피할 방법은 어쩌면 이상할 것이 없는 것이었다. 궁정의 기사와 귀부인 친구 천 명을 자신의 대사원으로 불러낸 것이다.


왕과 조신들은 일단 성안으로 들어간 뒤에, 육중한 망치와 용접 도구를 사용해 문의 자물쇠를 녹여 봉해 버렸다. 초대자들이 발작적인 절망이나 광포한 충동에 이끌려 밖으로 뛰쳐 나가거나 누군가 성안으로 뛰어 들어올 가능성을 완벽히 차단할 목적에서였다. 사원에는 식량이 충분히 비축되어 있었다. 그처럼 철통같이 방비했기 때문에 그들은 당연히 자신들이 전염병에서 완벽하게 격리되었다고 생각했다. 바깥 세상 사람들은 스스로 알아서 자신을 돌보면 될 일이었다. 당분간은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에 슬퍼하거나 생각하는 것조차 어리석은 일이라고 보아 마땅했다. 왕은 사람들에게 온갖 오락거리를 제공했다. 어릿광대, 즉흥시인, 발레 무희, 연주자 들이 대기하고 있었고, 미녀와 포도주도 있었다. 사원 안엔 이 모든 것과 안전이, 그리고 사원 밖엔 '붉은 죽음'이 있었다.


음악과 시가 흐르는 궁정은 벽을 사이에 두고 전혀 다른 세상을 보여줬다. 배고픔과 죽음의 공포가 흐르는 거리로부터 구원받은 것이다. 이제 초대받은 자들은 안도하며 풍요로움을 즐기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자물쇠를 녹인 사람도, 초대자를 선별한 사람도 왕이었으니, 굳이 성벽 밖의 통곡에 죄책감을 가질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세상 모든 불행을 구원할 방법이란 없지 않겠는가. 옆집의 불행은 안 된 일이지만, 모두 죽는 일도 없어야 한다. 포도주와 미녀를 즐기는 연회에서도 왕과 초대자들은 성벽 밖의 불행을 외면만 한 것은 아니었다. 아름답게 슬퍼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왕은 이 성대한 축제를 맞이하여 일곱 군데 방의 장식을 대부분 직접 진두지휘했다. 그리고 가장무도회 참석자들도 그의 취향을 고려해 가장할 인물의 성격을 정해야 했다. 반드시 괴상한 모습으로 가장하라는 지침이 하달되었고, 참석자들은 휘황찬란하고 번쩍번쩍하는, 그리고 자극적이면서도 비현실적인, 훗날 에르나니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모습으로 나타났다.……아름다운 모습, 음란한 모습, 괴상한 모습도 많았고, 끔찍한 모습도 여럿 있었으며, 혐오스러운 모습도 적지 않았다. 무도회장은 마치 수많은 환영들이 일곱 군데 방의 안팎을 둥둥 떠서 오가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들, 이 환영들이 각 방의 안팎을 비틀비틀 오가는 동안, 그들의 모습은 각 방의 색깔을 반사했고, 교향악단이 연주하는 환상적인 음악은 그들이 내딛는 발소리의 반향처럼 들렸다.


경쾌한 가면무도회의 열기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몇 달째 계속 진행되어도 지루해지는 법도 없었다. 향연은 끝없이 그들의 심장을 미치게 만들었다. 마지막 일곱 번째 방의 정적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 검은 방은 핏빛 창문과 벽시계로 군중을 위협했다. 벽시계의 타종 소리가 궁정에 울려 퍼질 때면, 음악은 멈췄고 춤도 정지된 채 불안감이 뒤덮였다. 군중은 짧은 시간이나마 깊은 명상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종소리는 허공에 오래 머물지 않는 법이다. 금새 음악은 이어지고 군중은 무도회를 즐겼다. 어느 밤 종소리가 들리고 그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아무리 방종한 인간이라도 심장 안에는 심금을 울리는 감정이 존재하는 법이다. 생사가 모두 놀이에 지나지 않는 완전히 타락한 사람에게도 농담거리로 삼을 수 없는 일이 있는 법이다. …… 그 사람은 키가 크고 훌쭉했는데,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온몸을 수의를 칭칭 동여매고 있었다. 얼굴을 가린 가면은 딱딱하게 굳은 시체의 표정과 너무나 똑같아서 아무리 꼼꼼히 뜯어봐도 그것이 가면임을 알아차리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 모인 향연 참석자들 모두가 지금까지 묘사한 그 모든 것을 용인하기까지는 아니더라도 참아 줄 수는 있었을지 모른다. 그 가장 무도자가 감히 붉은 죽음의 역병에 걸린 환자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않았더라면 말이다.


누가 감히 왕의 심기를 건드리려고 했을까. 왕은 분노로 그 자를 교수형에 처할 것을 명했지만, 침입자의 끔찍한 모습에 놀라고, 알 수 없는 경외의 감정에 사로잡힌 조신들은 명령을 따르지 못했다. 수치심에 휩싸인 왕이 직접 침입자를 처단하려 달려갔다. 그리고 비명소리가 들렸다. 그 자를 정면으로 마주한 왕은 칼을 휘두르지도 못했다. 순식간에 왕은 죽었다.


그러자 연회 참석자들이 역시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자 특유의 광적인 용기를 발휘하여 검은색 방으로 한달음에 달려가 그 가장 무도자를 사로잡았다. 하지만 그들은 곧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경악에 사로잡혀 흠칫 숨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칠흑빛 시계의 그림자 안에 미동도 없이 꼿꼿이 서 있던 그의 커다란 몸을 거칠게 붙잡은 순간, 그가 쓴 시체 같은 가면과 무덤에 바르는 회반죽 덩어리 같은 그의 몸 안에 아무런 실체도 들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붉은 죽음의 역병이 그들 사이에도 존재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그가 밤의 도둑처럼 그들을 찾아온 것이었다. 그리하여 향연에 참석한 사람들은 한 사람 두 사람씩 이 방 저 방을 피로 장식하며 쓰러졌고, 각자 특유의 절망적인 자세로 죽어 갔다. 칠흑빛 시계의 생명도 마지막 향연의 생명과 함께 사라졌다.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어둠과 종말을 부른 붉은 죽음조차도 (실체가) 없다. 가면 무도자는 가면을 쓰지도 않았다. 무도회 참석자 전원이 화려하고 기이한 가면으로 맨살을 숨긴 것과 반대로, 붉은 죽음은 아무 것도 없다, 가릴 것도 없다. 심지어 붉은 죽음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에드거 앨런 포의 「붉은 죽음의 가면」은 건조하고 기괴하다. 온 나라를 철저히 파괴한 붉은 죽음이 무엇인지 끝내 알지 못하게 가로 막는다. 유황과 불로 멸망당한 소돔과 고모라를 안타까워 하지 않는 것은, 그들이 큰 죄를 저질렀다는 설명 때문이었다. 죄악이나 탐욕으로 처벌받거나 살해당했다는 이야기는 잔혹 동화에도, 추리소설에도 넘치게 있다. 그러나 이 작품 속의 공멸은 별다른 이유가 없어 보인다. 자신만 살기 위해 울타리를 친 왕을 (법과 도덕으로) 처벌하려는 것인가. 문밖에 이른 죽음을 외면하고 여흥을 즐기는 군중에 내린 윤리적 단죄인가.


굳게 잠긴 성문도 뚫고, 왕의 통치도 무력화하는 붉은 죽음이 실체도 없이 떠돌고 있다면, 당신도 집 안팎을 뒤돌아 봐야 한다. 죽음의 종소리는 숨결이 되고, 가면도 없는 맨살 거죽이 피부가 되어 스르륵 다가오고 있는 붉은 죽음은 실체 없는 삶이다. 누군가는 저 깊은 내면에 잠들어 있는 붉은 죽음을 깨울 여흥을 마련할 것이다. 당신이 그 곳에 초대되든 그렇지 않든 붉은 죽음은 개의치 않을 것이다.


2.「재판관이 되거나 연출가가 되거나」


지난 번 글에서 법관과 연출가를 희망하는 현실을 문제삼았다. 이 둘의 위치는 다른 듯 보이지만, 되려고 하는 이유에서 닮았다. 누구의 잘못인지, 어떻게 되었어야 했는지에 관심이 많다. 또 일상이나 사물을 적절히 배치할 권력을 원한다. 갈등이 발생하는 일에, 불안이 야기되는 상황을 종결시키려고 모종의 행위를 고정시킨다. 상황과 행위의 적절성을 판단하고, 그 결과에 맞는 옷을 입어야만 한다.


'붉은'이라는 색감이 '죽음'을 과장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죽음의 본질은 '가면'조차 없는 허공이지 않은가. 죽음의 당사자가 아닌, 죽음을 관찰하는 자라면, 죽음에 이르지 않기를 열망하는 자라면, 과장(표현)도 할 것이고, 죽음에 가면을 씌우고도 싶을 것이다. 붉은 가면인가? 죽음의 가면인가?


삶이란 마냥 (고정된) 실체가 없는데도, 가면에 연결시켜 이해하고 싶어한다. 그것이 화려할수록 단단할 수록 정체성의 지옥에 빠져들게 되는데도, 저항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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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렌느는 남편에게 살해당했다. 철학자, 구조주의 마르크스주의자, 푸코와 데리다의 스승이기도 했던 루이 알튀세르가 아내를 살해했다. 그리고 모두에게 알려진 바대로, 정신착란을 이유로 면소판결을 받았다. 알튀세르는 안정을 찾은 후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를 통해 자신을 해명한다.


그는 매력적인 사상가다. 마르크스를 비판적으로 독해하면서도 열렬히 지지하는 알튀세르는, 인간주의와 역사주의를 통해 맑시즘을 수용하는 것을 거부한다. 그가 구조주의자라고 불리는 이유는 경험주의에 기반한 인식론을 부정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론을 아무리 그럴듯하게 논증해봐도 문제 설정 단계에서부터, 선행하는 개념들과 언어를 써야 하기 때문에, 여전히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보는 것이다. 더불어 사회 속에 존재하는 “인간 개체를 행위자actor로 보기보다는, 구조를 구성하는 층위들을 반영하는 대리자agent로 본다”는 점에서 독특하고 친근하다. 한때 자본가에 대항하는 노동자라는 경제결정론적 해석이 안겨주었던, 그 남루하고 인지부조화적인 현실인식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다고 환호했던 것도 알튀세르와 같은 사상가들 덕분이었다.


그의 살인죄는 더이상 논란의 대상이 되지 않는 듯하다. 현대사상가로서 알튀세르의 정신이 여전히 논쟁적이며, 꾸준히 거론되어 왔다는 점과는 사뭇 다르다. 천재의 광기로 일어난 해프닝이라 말할 일은 분명 아닌데도, 사람과 그의 생生을 기억하는 바람직한 방법을 찾아야 할 필요를 느낀다. 그가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에서 자신의 행위에 대해, 정신분석자의 입장이 되어 해석했을 때, 묵직한 불쾌함을 느낀 것이 원인일 수도 있다. , 알튀세르의 뛰어난 후기 사유, 마주침-우발성의 유물론이 나올 수 있었던 것도 그 고통을 관통했기에 가능했다고 말하는 것조차 공연한 치장으로 느껴졌다. 항변할 권리를 요구하는 죄인과, 말할 권리를 영원히 박탈당한 피해자의 들리지 않는 외침에 주목하자면, 객관성이라는 것이 결코 양쪽 입장을 모두 공평하게 듣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명확하다.


알튀세르는 친구들을 위해서,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 이 책을 쓰고 있음을 말하며, 독자에게 “용서해주길 바란다”고 덧붙인다. 세상에 이해 못할 일은 없다. 이해하기 싫은 일이 많고, 오해와 이해가 같은 말인지도 모르고 읊을 뿐이다.


아마도 사람들은 내가 그런 행위를 저지르고 또 그 행위에 대해 내려진, 그리고 자연스러운 표현에 따르자면 내가 혜택을 입었다고 하는 그 면소 판결을 받고서도 침묵을 감수하지 않는 것에 대해 충격적이라 여길 것이다.

그러나 내가 만약 그런 특전을 누리지 않았더라면 나는 법정에 출두해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출두해야 했다면 나는 답변해야 했을 것이다. 이 책은 그랬을 경우 내가 해야 했을 답변이다. 그리고 내가 요구하는 것은 단지 사람들이 내게 그것을 허락하는 것이다. 그 당시라면 내게 하나의 의무가 될 수 있었을 일을 지금 할 수 있도록 허락하는 것이다.

물론, 나는 내가 여기서 하고자 하는 답변, 실제로 행해지지 않았던 법정 출두의 규정에도, 그 형식에도 맞지 않는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법정 출두와 그 규정과 형식의 부재, 영원히 끝나버린 그 부재가, 도리어 내가 지금 이야기하려는 것을 더욱더 대중의 자유로운 평가 앞에 제시하게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어쨌든 나는 그렇기를 바란다. 하나의 불안을 가라앉히기 위해 한없이 다른 불안들을 무릅쓰기까지 하려는 것이 내 운명이다. (밑줄은 내가 강조한 것임.)


알튀세르는 무책임 상태에 처한 자신의 처지를 달가워하지 않았던 것일까? 책임상태에서는 가능했을 형식, 면소판결로 영원히 불가능해진, 그 어떤 형식을 위해 불안을 무릅쓰고 있다고 한다. 소송절차에 따라 공개 심리를 열게 되고, 검찰이 개입하고, 스스로를 해명하는 피의자가 되었다면, 그는 어떤 해명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을까? 그 해명에 따라 (대중의) 판결은 또 어떻게 달라졌을까? 아마도 이런 대목에서 말하는 가능성이지 않았을까? “범인은 일정한 징역형에 처해지며, 그럴 경우 그 범인은 사회에 대한 자신의 부채를 지불한다고, 따라서 자신의 범죄에서 '벗어난다''간주되는' 것이다.”


그는 끔찍한 경험을 했다. 그렇지만 나는 그가 겪은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밑줄을 그어 밝힌 구절, “여기서 내가 하고자 하는 답변”이라는 표현에 집착하고 있다. 그는 법인격을 완전히 빼앗긴 처참함에 저항해야 했으므로 마냥 침묵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암흑 속에서 빛을 찾아 헤매는, 기한도 없이 무거운 묘석에 짓눌려 있었던 충격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싶었을 것이다.


급성이기는 하지만 일시적인 상태에 그치는 '광기'와 숙명 같은 '정신병'을 전혀 구별하지도 않은 채, 언론들이 부추기는 대로 일반 여론은 미치광이를 단번에 정신병자로 간주하는데, 그때 정신병자라는 의미는 평생 병자를, 결과적으로 평생 강제 수용되어야 하고 결국 그렇게 되고 마는 자, 즉 독일 언론에서 정확히 지적했듯이 '죽은 목숨'을 의미하고 있다.

() 정신병원 고독과 침묵 속에서, 묘석 아래에서 그 병자는 자신을 찾아오지 않는 자에게는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 2년 전부터 정신병원에서 나온 상태지만 내 이름을 아는 사람들에게 나는 한 사람의 실종자인 것이다. 죽지도 살아 있지도 않고 아직 매장되지는 않았으나, 광기를 지적하기에 매우 적절한 푸코의 표현대로 '활동이 없는' 자다. 실종자.


알튀세르는 자신의 살인장면을 직접 표현하는 것을 자제하고, 즉각적으로 보이지 않지만 그 상황으로 이어진 전체적 상황을, 혹은 존재방식을 설명하기 위해, 출생에서부터 분석적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어떻게 행동했고, 무슨 생각들을 했으며, “내 뜻에 따른 것은 아니지만 내가 되어버린” 알튀세르의 모든 것을 담고자 한다


많이 알려진 것처럼 그는 어린 시절 어머니가 사랑했던 남자-죽은 삼촌으로 살아야 했다고 한다. 자기 자신으로 살고도 싶고, 어머니의 사랑을 얻고도 싶은, 양가 감정에 사로잡혀 끝없이 갈등해야 했다는 것이다. 파국에 대한 두려움, 우울증에 시달려야 했었고, 불안 속 자기파괴의 과정에서 아내를 살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3자의 입장으로 (자신에 대해)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고, 대조한 알튀세르는 비판적으로 고백하고, 자신을 드러내고, 타인에게 자신을 알린다. 주변 인물들로부터 정보를 얻고, 전문가에게 문의하며, 신문 기사를 조사하고, 이데올로기 국가장치들이 끼친 영향을 분석 평가한다. 일기나 회상록에서 멈추지 않고, 법적이고, 제도적인, 정신분석학적인, 이데올로기적인 문제들을, 그의 경험을 매개로 설명하려 한다.


누구나 몇 번쯤은 속내를 드러내고 싶다는 열망을 가질 것이다. 곰곰 생각해보면, 그럴 때의 속내란, 억울함을 공표하거나 죄책감을 씻는 쪽으로 향해지기가 쉽다. 그렇다면 이 책을 적고 있는 알튀세르의 “답변”이라는 표현은 어떤가. 누군가 묻고 있다는 것이다. 비평이라는 (이데올로기적) 시선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변명도 아니고, 항변도 아니다. 답변이다. 냉정하게 들리는 것이 왜인가. 답변이라니. 누구에게, 무엇에 대해?

알튀세르는 자신의 생을, 개인적 관계와 일상을, 세계에 노출함으로써 역사의 무대에서 검증받고자 했다. 피해자 엘렌느, 그리고 그 사건으로 인해 고통받는 당사자들에게 답변하는 것이 아니다.


이 자서전-답변서는 한 사람의 生을 구체적으로 담고 있다. 빛나는 순간이 영원으로 향하는 길에는 해석자가 항상 존재하는 것처럼, 비극의 순간이 영원에 이르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분석자가 되려 한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이 자신의 삶에 늘 정당성을 입힐 수 있는 것도, 세상 누구보다 자신만큼 자신의 삶을 잘 분석하고 해석할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해는 대개 오해와 비슷하다.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을, 온전히 혹은 객관적으로 알 수는 없다. 나는 너 그리고 세계와 섞여 존재하는 것이기에 소용없는 일이다. 그래서 알튀세르는 일기도 회상록도 아닌 글을 쓰고 싶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자기중심적이고 방어적인 속성은 없앨 수 없겠지만, 사회적 공간으로 나온 이상 감당해야 할 무수한 뒷말, 저항, , 폐기처분의 위험을 안으면서, 무언가를 입증하고자 했다. 사회적 공간에서, 개인을 떠난 지점을 만들어 분석하고 해석하는 일은 철저할수록 좋다. 사회적 가치와 의미는 늘 일정한 목적과 방향성을 갖고 있다. 이 책의 의미는 이미 사회적이다.


알튀세르가 정신분석자의 위치에서 자신을 해명한 일이 (여전히) 부자연스럽지만, 나는 계속 반복해서 말하며 믿으려 하고 있다. 누구나에게 말할 권리가 있다고. 그 권리란 내가 좋을 때, 인정할 수 있는 상황에서만 적용 가능한 것이 아니라고 말이다. 우리는 그 공간과 성격을 고려해서 듣고 사회적 가치와 의미를 발견하고 전달해야 한다.


말할 권리를 행사하는 사람들은, 그 권리를 행사하는 수많은 타자의 음성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반복하면 할수록 슬프다. 믿으려 하면 할수록 고통스럽다. 내용도 형식도 갖지 못하고 묵묵히 견디다 떠나간 이들, 아무 것도 없이 살다가, 흔적없이 사라진 그들의 침묵이 오래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 가슴 답답하다. 현실에서 말할 권리는 생존권과 연결되어 작동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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