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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ripke1)命名과 필연


   1) (原註) 일부 학자들은 고유명에 관한 Kripke의 관점 배후에 있는 핵심 착상이, 본디는 양상논리(樣相論理)modal logic에 대한 Ruth Barcan Marcus의 선구적인 작업에서 유래하였다고 주장한다. 이번 역사적 사항참조.



필연성, 가능성, 가능세계 개념에 대한 기초사항

 

2+2=4라는 것은 필연적(必然的)으로 참necessary truth인 듯하다. 그것은 거짓일 수 없기could not have been false 때문이다. 모든 것은 자신과 동일하다는 것, xy보다 크고 yz보다 크다면 xz보다 크다는 것 등도 필연적인 참의 사례들인 듯하다.

우리는 아이스크림이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하지만 아이스크림이 존재하지 않는 게 사실이었을 수도 있다might have been the case는 의미에서, 아이스크림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가능하다[가능적(可能的)이다]possible. 아이스크림은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아이스크림이 존재한다는 것은 참이긴 하지만 필연적으로 참이지는 않다.

필연성necessity과 가능성possibility이란 무엇인가? 당면 목적상 우리는 가장 편리한 수단으로서 가능세계(可能世界)possible world에 입각한 필연성/가능성 해석을 가정하고자 한다(가능세계 개념이 주는 기이함과 생소함에 대해서는 잠시 뒤 고찰해볼 것이다). 필연적으로 참인necessarily true 명제란 세계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참인true no matter what 명제이다. 그것은 거짓일 수 없다could not. 필연적으로 참인 명제는 세계가 어떻게 되든지 참일 것이다. 간단히 말해 필연적으로 참인 명제는 모든 가능세계에서 참이다true in every possible world. 마찬가지로, 가능적으로 참인possibly true 명제란 사실이었을 수도 있는might have been the case 명제 혹은 사실인is the case 명제이다. 간단히 말해 가능적으로 참인 명제는 적어도 하나의 가능세계에서[혹은 어떤 가능세계에서] 참이다true in some possible world. 이에 필연적/가능적인 명제의 진리-조건을 다음과 같이 규정할 수 있다:

 

한 명제는 모든 가능세계에서 참일 경우 필연적이다.

한 명제는 적어도 하나의 가능세계에서 참일 경우 가능적이다.

 

이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한 명제가 필연적이라면 그것은 사소하게 가능적인 셈이다. [모든 가능세계에서 참이라는 것은 적어도 하나의 가능세계에서 참임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실세계the actual world 역시 가능세계들 중의 하나이므로, 한 명제가 현실세계에서 참이라면 사소하게 적어도 하나의 가능세계에서 참이다. 현실세계란 사물들이 실제로 존재하는 방식the way things actually are이다.

p가 가능적이지만 필연적이지는 않은 명제라면, P우연적(偶然的)이다contingent. 아이스크림이 존재한다는 명제처럼, 필연적이지는 않지만 현실세계에서 참인 명제는 우연적인 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가능하다필연적이다라는 단어가 항상 이런 식으로 쓰이지는 않으며, 특히나 철학 외부에서는 이런 식으로 거의 쓰이지 않는다. 그렇기에 우리가 논의하는 영역을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 지금 우리는 철학에서 통상 형이상학적 양상성(樣相性)metaphysical modality이라 칭해지는 개념에 대해 말하고 있다. 여기서 논의되고 있는 가능성/필연성/우연성 등은 인식론적(認識論的)epistemological 개념이 아니라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metaphysical 개념이다. 한 명제가 가능적이라고 말할 때 우리가 의미하는 바는 그것이 참이다 혹은 참일 수 있었다는 것이지, ‘나는 그것이 참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예를 들면 우리는 지구에서 가장 높은 산이 타히티에 있지 않다는 것을 확실히with certainty 알고 있다. 하지만 형이상학적인 관점에서는 그러했을 수도 있다. 어떤 가능세계에서는 지구에서 가장 높은 산이 타히티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구에서 가장 높은 산이 타히티에 있다는 명제가 사실이 아님을 알긴 하지만, 형이상학적으로 그 명제는 사실이었을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은 필연적이다라는 말로써 우리는 그것은 확실하다certain를 의미하지 않는다. 물론 철학 밖의 일상적인 대화에서 우리는 은 필연적이지 않다[반드시 하지는 않다]’는 말을 그것이 사실인지 확신할 수는 없다는 의미로 종종 사용하지만, 이는 여기서 우리가 염두에 두고 있는 의미가 아니다. 이러한 의미차이는 일부 필연적 참의 경우 확실하게 알려져 있지는 않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분명하게 납득할 수 있다. 예컨대 수학적으로 참인 명제들은 통상 필연적으로 참인 것으로 받아들여지지만, [Goldbach의 추측과 같이] 참인지 여부를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는 수학적 명제들이 분명 존재한다.

전통적으로 필연성 및 우연성과 각기 유사한 인식론적 개념들로는 선험성a priori후험성a posteriori/경험성the empirical을 들 수 있다. 전자는 경험과 독립적으로 알려질 수 있는 것이고 후자는 경험을 통해서만 알려질 수 있는 것이다. 선험성과 밀접하게 연관된 개념은 생각가능성[상상가능성]conceivability으로서, 이는 대강 말하자면 선험적으로 배제되지는 않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한 명제 p의 부정이 생각가능하다면 p가 선험적으로 배제되지는 않는 것이므로, 결국p는 선험적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가령 아이스크림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상상가능하므로 아이스크림은 존재한다는 선험적이지 않다. 반면 2+24라는 것은 생각할 수조차 없는바 선험적으로 배제되므로, ‘2+2=4’는 선험적이다.)]

편의를 위해 필연성/가능성을 나타내는 데에 다음과 같은 기호들이 도입될 것이다:

 

‘Nec (p) [p]’‘p라는 것은 필연적이다it is necessary that p로 읽는다.

‘Pos (p) [p]’‘p라는 것은 가능적이다로 읽는다.

 

기호 ‘Nec[]’이라든가 자연언어 라는 것은 필연적이다등의 표현들은, ‘라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와 같은 문장 연산자(문장 연결사)이다. 하지만 라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와 다르게, ‘Nec’진리-함수적이지 않다. 다르게 말하면 2에서 도입된 의미에서 -외연적인 즉 내포적인 연산자이다. 왜냐하면 다음과 같은 형식을 갖는 문장의 경우

 

Nec (p)

 

문장 전체의 진리치는 p의 진리치에 의해 결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가령 ‘Nec (지구는 둥글다)’의 진리치는 지구가 실제로 둥글다는 사실만으로는 결정되지 않는다. [이 양상문이 참이기 위해서는 모든 가능세계에서 지구가 둥글어야 하는데, 어떤 가능세계에서는 지구가 둥글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Nec’은 다음 문장들에서 나타나는 진리-함수적인 문장 연산자들과는 성질이 다르다:

 

p라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p 그리고 q

p 또는 q

 

이 문장들의 경우, 문장 전체의 진리치는 그것을 구성하는 각 요소문장들의 진리치에 의해, 즉 첫 번째 문장은 p의 진리치에 의해, 나머지 두 문장은 pq 각각의 진리치에 의해 진리-함수적으로 결정된다.

필연성/가능성은 일반적으로 상호-정의가능한inter-definable 것으로 간주된다. 즉 두 개념은 다음과 같이 서로에 대한 정의항으로 쓰일 수 있다:

 

한 명제는 그 부정이 가능하지 않은 경우 그리고 오직 그 경우에 필연적이다.

[p ↔ ∼◇∼p]

한 명제는 그 부정이 필연적이지 않은 경우 그리고 오직 그 경우에 가능적이다.

[p ↔ ∼□∼p]

 

그런데 (현실이-아닌non-actual) 가능세계란 도대체 무엇인가? 가능세계란 David Lewis가 주장했듯이 현실세계와 시간적-공간적으로 연속되어있지 않다는 점만을 제외하고는 현실세계와 유사한 세계인가? 아니면 물질적구체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추상적인 것으로서 현실세계와 전연 판이한 것인가? 아니면 우리는 가능세계라는 표현을 단지 하나의 이론적인 발견의 수단으로서as an heuristic, 즉 실제로 존재하지는 않는 하나의 말하기 방식manner of speaking으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는 형이상학적인 문제들이기에 양상성과 연관된 우리의 언어철학적 논의에서 이러한 의문들에 대해 크게 유념할 필요는 없으며, 하나의 가능세계란 단순히 사물들이 존재할 수 있었던 /그랬을 수 있었던 하나의 방식이라고 이해해도 무방하다. 혹여 가능세계라는 단어에 수반되는 공상과학적인 어감이 꺼림칙하게 느껴진다면, 가능세계를 가능상황possible situation 내지 사실적 환경counterfactual circumstance 등으로 칭할 수도 있다(물론 후자의 경우, 현실에 존재하는 사실은 사실--하는contrary-to-fact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현실세계를 사실적 환경이라 칭할 수는 없다는 데에 유의해야 한다). 어쨌든 가능세계가 풍기는 공상과학적인 느낌은, 사물들이 존재했을 수도 있는 방식에 관해 우리가 일상적으로도 종종 말한다는 비근한 사실을 생각해보면 다소 경감될 것이다.2)


2) (原註) 혹여 이마저도 만족스럽지 않다면 최후의 방법으로서 가능적으로/필연적으로라는 부사를 원초적인primitive 것으로, 즉 엄밀히 말해 세계나 상황 등의 측면에서는 설명될 수 없는 기초개념으로 간주할 수도 있다.


우리는 임의의 세계 즉 사물들이 존재했을 수 있는 임의의 방식과 임의의 명제를 취해, 그 명제가 그 세계에서 참인지 물을 수 있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한 명제의 진리치는 명시된 특정 조건들이 성립하는 임의의 세계에 따라 물어질 수 있다. 이는 마음을 의미한다: 여차여차한 가능적인 환경들을 생각해보자. 이 명제는 그러한 조건 하에서 참이겠는가?

가능세계 의미론은 필연적/우연적이다등의 표현을 해석할 수 있게 해줄 뿐만 아니라, 사실적 조건문counterfactual conditional(가정법적 조건문subjunctive conditional)에 대한 해석 역시 용이하게 해준다. 다음 문장을 보자:

 

만약 Jones가 안전벨트를 매고 있었더라면, 교통사고에서 살아남았을 것이다.

If Jones had been wearing a seat belt, he would have survived the collision.

 

보통 이런 식의 조건문을 말하는 것은 전건이 실제로는 거짓인 경우에만, 즉 이 사례에서는 Jones가 실제로는 안전벨트를 매지 않았던 경우에만 적절한 것으로 여겨지고는 한다. 그렇기에 이러한 조건문을 진리-함수적인 실질적 조건문material conditional으로 해석할 경우 자동적으로 참인 것으로 판명되어버린다. 이는 위 문장의 후건이 부정된 다음 문장 역시 마찬가지이다:

 

만약 Jones가 안전벨트를 매고 있었더라면, 교통사고에서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If Jones had been wearing a seat belt, he would not have survived the collision.

 

두 문장의 진리치가 결정되는 방식이 이렇게 직관적인 이유는, ‘로 표현되는 실질 조건문의 진리표에 따르면 전건이 거짓일 경우 실질 조건문 전체는 [후건의 진리치와 무관하게] 항상 참이기 때문이다. 이럴진대 [이 문장이 진리-함수적으로 해석되는 한] 우리는 Jones가 안전벨트를 매고 있었더라면, 교통사고에서 살아남았으리라는 것이 참인지를 도대체 어떻게 결정할 수 있겠는가?3)


3) 직설법적 조건문indicative conditional과 가정법적 조건문은 우리말에서는 잘 구분되지 않지만 영어에서는 시제상 비교적 뚜렷하게 구분된다. 보통 직설법적 조건문은 전건이 실제로 참일 경우 후건이 참이라는 단순한 가정을 주장하는 경우에 말해진다. 예컨대 다음문장


만약 OswaldKennedy를 쏘지 않은 거라면, 다른 누군가가 쏜 셈이다.
If Oswald did not shoot Kennedy, than someone else did.

, Kennedy가 죽은 것이 확실한 상황이므로 Oswald가 쏘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다른 누군가가 쐈던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는 별 무리 없이 참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반면 다음 문장

만약 OswaldKennedy를 쏘지 않았더라면, 다른 누군가가 쐈을 것이다.
If Oswald had not shoot Kennedy, than someone else would have.

, 실제로는 OswaldKennedy를 쏘았다는 것은 알지만, 그 사실과 반대되는 가정을 해보았을 때 후건이 성립할 것이라는 추측이다. Kennedy 암살에 관한 음모론을 믿는 사람이 아닌 바에야, 보통은 거짓이라 여겨지는 가정이다. 보통 직설법적 조건문은 이미 일어난 일이거나 불가능하지 않은(혹은 불가능하지 않다고 화자가 판단하거나 최소한 불가능 여부가 확실치 않은) 경우에 사용되고, 가정법적 조건문은 일어난 사실과 반대이거나 일어날 확률이 희박하다고 화자가 판단하는 경우에 사용된다. 가정법적 조건문의 경우가 사실적인 가정을 하는 경우와 관련된다. 반사실적 조건문은 일반적인 조건문과 달리 진리-함수적이므로 이런 조건문의 진위를 결정하기 위해 가능세계 의미론이 적용된다.” (미우라 도시히코(三浦俊彦), 가능세계의 철학, 박철은 , 그린비, 2011, 24, 譯註1).)


[이러한 조건문들을 진리-함수적으로가 아니라 가능세계의 측면에서 양상적으로 해석한다면] 이 문제는 다음과 같이 쉽게 해결된다: 실제 사실과는 다르게, 교통사고가 발생할 당시 Jones가 안전벨트를 매고 있었다는 바로 그 점만을 제외하고는, 현실세계와 모든 점에서 유사한 하나의 가능세계를 떠올려보자. 간단히 말해 [사실에 하도록 전건이 성립한다는 점만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현실세계와 최대한 유사하도록 유지시킨다. David Lewis가 말하였듯이, 이는 사실적 조건문의 전건이 성립하되 현실세계와 최근접한nearest/가장 유사한closest 가능세계이다. 그 세계에서 Jones는 살아남았겠는가? 이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다면 우리가 고려하던 사실적 조건문 전체는 참이며, 그렇지 않다면 거짓이다.

 

 

기술주의 패러다임

 

FregeRussell 모두 고유명에 대한 기술주의적 이론descriptivist theory of proper name을 견지하였다고 할 수 있다. 두 사람 모두 ‘Aristoteles’라든가 ‘Madonna’와 같은 통상적인 고유명ordinary proper name이 사용되거나 이해되는 각 경우마다, 그 이름을 통해 화자가 의미하는 내용 내지 청자가 이해하는 내용은 한정 기술구에 의해 표현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4) 이런 의미에서 (통상적) 고유명은 한정 기술구와 엄밀하게 동등하다. 다르게 말해 고유명은 한정 기술구가 축약된abbreviate 것 내지 한정 기술구에 대한 약칭shorthand으로서 기능한다고 할 수 있다. 이제 Beethoven이 다음 문장을 읽는다고 해보자:


4) (原註) Frege가 고유명에 대해 기술주의 이론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라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내 관점에서는 그러하다. 다만 이는 Kripke의 관점과 연관되는 한 그다지 중요한 사안이 아니다. 이번 에서 살펴볼 Kripke의 공격은 고유명에 대한 기술주의적 관점을 누가 견지했는가와 무관하게 그 이론 자체를 겨냥하기 때문이다.

     

Mozart는 죽었다.

 

이 문장을 읽고 이해했을 때 Beethoven이 파악하는 내용은, 기술주의 관점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것이 된다: Don Giovanni의 작곡가the composer of Don Giovanni는 죽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렇게 이해한 시점의 Beethoven에게 다음 두 문장은 동의적이다. 즉 적어도 그 시점에 이 두 문장은 동일한 명제를 표현한다:

 

Mozart는 죽었다.

Don Giovanni의 작곡가는 죽었다.

 

물론 RussellFregeDon Giovanni의 작곡가와 같은 한정 기술구의 의미론적 역할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설명한다. Frege는 한정 기술구가 그것을 만족하는 대상을 지시하는refer 역할을 하는바 진정한 단칭용어genuine singular term라 생각한다. 반면 한정 기술구에 대한 Russell의 맥락적 정의방식에 따르면 정관사 the정확히 하나의를 의미하는바 한정 기술구는 양화사를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되며, 따라서 엄밀히 말해 대상을 지시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차이점은 중요한 사안이 아니다. 요점은 고유명에 대한 기술주의 패러다임이 다음 물음에 답하고자 제시된 이론이라는 점이다: 우리가 한 이름을 통해 대상에 관해 말할 때 그 이름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요인은 무엇인가? Kripke에 따르면 기술주의 패러다임은 이 물음에 잘못된 답을 제시하고 있으며, 특히 이번 에서 도입된 양상성 개념의 측면에서 심각한 난점을 지니고 있다.

 

 

고유명에 대한 기술주의 패러다임에 대한 Kripke의 반박

 

당신이 앞 Beethoven처럼 특정 시점에 ‘Mozart’Don Giovanni의 작곡가로만 이해하고 있다 해보자. 이 경우 당신은 다음 문장을 분석적인 것으로, 즉 그 의미에 의해서 참인 것(분석성 개념에 관해서는 緖論, ‘8개의 예비사항’, 8번 항목 참조)으로 이해할 것이다:

 

(1) Mozart = Don Giovanni의 작곡가

 

이 문장이 실제로 분석적인 것으로 이해된다면 다음 두 문장과 엄밀하게 동의적인 셈이다:

 

(2) Don Giovanni의 작곡가 = Don Giovanni의 작곡가

(3) Mozart = Mozart

 

Kripke의 지적에 따르면, 모든 분석적 참은 필연적 참이므로, 기술주의 패러다임에 따라 (1)이 분석적으로 참이라면 동시에 필연적으로도 참이어야 한다.5) 게다가 (2)(3)이 선험적이며 (1)은 양자와 동일한 명제를 표현하기 때문에, (1)은 선험적이기도 해야만 한다.6)


5) (原註) [모든 분석적 참이 필연적 참이기도 하다는 논제에 대해 미리 언급할 사항이 있다.] David Kaplan은 주장하길, 예컨대 나는 여기에 있다와 같은 문장은, 언어적 규약에 따르면 그 문장에 대한 어떤 발화(發話)utterance든 거짓일 수 없기에 분석적으로 참이지만, 그 문장에 의해 표현되는 명제는 우연적으로만 참이라고 말한다. 가령 Kapkan이 웸블리 경기장에서 나는 여기에 있다고 말한다면, 그 발화는 Kaplan은 웸블리 경기장에 있다는 명제를 표현한다. 그런데 Kaplan이 그 시점에 웸블리 경기장에 있다는 것이 필연적으로 참은 아니다. 그는 다른 곳에 있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6장에서 더욱 상세히 살펴보게 될 것이다.

6) (原註) 사실 이 점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만약 Mozart가 아예 태어나지도 않았더라면, ‘Mozart = Mozart’는 참된 명제를 표현할 수조차 없지 않겠는가?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Mozart = Mozart’가 논리적으로 참인 동어반복 문장이긴 하지만, 혹여 Mozart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다면 그 문장에 대해 인식론적 관점에서 선험적으로 참이라 말하는 것이 과연 적절한지가 문제시될 수 있는 것이다.] 이에 우리는 혹여 Mozart가 존재하지 않더라도 ‘Mozart = Mozart’가 참이라는 단순한 입장을 고수하고자 한다. 아니면 이 동일성 문장을 만약 Mozart가 존재한다면, Mozart = Mozart’라고 고쳐 쓸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3) 역시 만약 Don Giovanni의 작곡가가 존재한다면, Don Giovanni의 작곡가 = Don Giovanni의 작곡가로 고쳐 쓸 수 있다. 다만 이러한 세부사항은 작금의 논의를 필요 이상으로 복잡하게 만들기에 차치해둔다.


이제 문제는 분명해졌다. Kripke의 고찰에 따르면 (1)은 필연적 참이 아니다. Mozart가 위대한 그 오페라를 작곡하지 않았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실제로는 Mozart가 그 곡을 쓰긴 하였다. 하지만 그가 성악곡에는 관심하지 않아 기악곡만을 작곡했을 수도 있고, 혹은 어린 시절 마차 사고를 당해 작곡 활동을 아예 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요컨대 (1)이 거짓인 가능세계가 존재한다.

(1)은 선험적이지도 않다. (1)이 참이라는 사실은 경험적 지식에 속하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1)이 참임을 확실히 알고 있긴 하지만 그것이 거짓이라고 의심하는 일은 충분히 가능하다. 다시 말해 우리는 (1)이 참임을 입증해주는 좋은 증거를 갖고 있긴 하지만, (3)이 참임을 아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즉 선험적으로] (1)이 참임을 아는 것은 아니다. (1)이 거짓이라는 것은 생각가능하다conceivable[선험적으로 배제되지 않는다]. 따라서 (1)(3)은 각기 다른 인지적 가치를 지니며, 그에 따라 각기 다른 명제를 표현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Frege가 소박한 의미론을 논박하기 위해 사용했던 바와 동일한 종류의 논증인 인지적 가치로부터의 논증이, Frege가 소박한 의미론의 대안으로서 제시한 기술주의적 이론[-지시 구분 이론]을 역으로 논박하는 데에 다시 활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1)은 분석적이지도 않다. (1)이 참임은 그 문장을 구성하는 단어들의 의미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1)(2)(3)과 달리, 다른 예시를 들자면 모든 사각형은 네 변을 갖고 있다와 달리, 사소하게 참인 것은 아니다.

이상 Kripke의 세 가지 논박을 정리해보자: 기술주의 이론은 (1)과 같이 () 우연적으로만 참인 명제가 필연적으로 참이라는 잘못된 함축을 갖는바 형이상학적 관점에서 잘못되었다. () 후험적(경험적)인 명제가 선험적이라는 잘못된 함축을 갖는바 인식론적 관점에서 잘못되었다. () 종합적인 명제가 분석적이라는 잘못된 함축을 갖는바 의미론적 관점에서 잘못되었다.

이외에도 Kripke는 다음과 같은 네 번째 반박도 제시한다: 당신은 ‘Josef Haydn’Mozart와 비슷한 시대에 살았던 작곡가의 이름이라는 사실만을 알고 있을 뿐, 그 이상은 그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다고 해보자. 그가 작곡한 작품의 곡명조차 단 한 가지도 모른다. 간단하게 말해 당신은 대상을 개별화(個別化)하는 기술구individuating description, 즉 세계의 다른 대상들로부터 이름 ‘Josef Haydn’의 담지자를 짚어내게끔 하여 주는 기술구를 일절 갖고 있지 않다. 그렇기에 당신은 다음과 같은 형식을 지닌 그 어떤 문장도 형성해낼 수 없다:

 

Josef Haydn = F

 

다르게 말해 당신은 이러한 형식의 그 어떤 문장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거나, 적어도 이러한 문장이 참이라고 믿지 않는다. 이러한 실정에서 기술주의 이론이 참이라면, 설사 ‘Josef Haydn’이라는 이름을 사용한다 하더라도 당신은 Haydn을 결코 성공적으로 지시할 수 없다. 당신이 ‘Josef Haydn은 작곡가였다고 말하거나 생각하더라도, Josef Haydn에 대해 무언가를 성공적으로 말하거나 생각할 수조자 없다는 것이다! 이는 분명 잘못되었다. 당신은 분명 Haydn에 대한 약간의 정보를, Mozart와 비슷한 시대에 살았던 작곡가였다는 사실만큼은 분명 알고 있다.

앞 단락에 제시된 마지막 네 번째 논증을 기술주의에 반대하는 무지(無知)로부터의 논변argument from ignorance이라 칭해볼 수 있겠다. 이는 다음과 같은 오류(誤謬)로부터의 논변argument from error과 밀접히 연관되어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GeorgeDante에 대해 아는 사실이라곤 그가 신곡의 저자라는 점뿐이라고 해보자. 이 경우 기술주의에 따르면 ‘Dante = 신곡의 저자George에게 분석적이다. 그런데 역사를 통해 세간에 알려진 바와는 달리 신곡의 실제 저자가 초라한 무명작가였던 Adriano라는 사람이었다고 해보자. Adriano신곡을 아무도 몰래 혼자 조용히 완성해내었지만, 이 사실을 알게 된 Dante가 그를 교살하고 그 위대한 작품의 명성을 가로채었던 것이다. 이 경우 기술주의 이론은 George가 이해한 바와 마찬가지로 ‘Dante신곡을 썼다가 잘못된 사람에 대해 참이라는 잘못된 결론을 내리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기이하고 가상적인 상황에서조차도 ‘Dante’의 지시체는 Adriano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Dante이다. (1) ‘Mozart = Don Giovanni의 작곡가와 같은 명제가 우연적이고 경험적이라는 사실은, 이번 단락에서 살펴본 바와 같은 사례에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렇게 무지 및 오류로부터의 두 논변이 보여주듯이, 고유명을 통해 대상을 지시하는 것이 대상을 식별해주는 기술구identifying description를 통해 대상을 짚어내는 있는 능력에 의존한다는 기술주의적인 가정은 전적으로 잘못되었다. 우리는 그러한 기술구를 일절 갖고 있지 않더라도 고유명을 사용하여 그 이름의 대상에 대해 성공적으로 무언가를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대상에 대한 개별화/식별 기술구는 고유명을 통해 대상을 지시하는 데 대한 필요조건이 아니다.]

이러한 일련의 논증들을 통해 도출된 결론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고유명은 직접적으로 지시하는 표현directly referring expression이다(다만 David Kaplan은 정확히 이것이 Kripke의 결론은 아니라고 해석한다). 다시 말해 고유명은 Frege의 뜻(대상의 제시방식)과 같은 대상에 대한 모종의 개념적 표상(表象)conceptual representation을 통해 대상을 지시하지는 않는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고유명은 뜻 없이 오로지 지시만을 갖는다. J. S. Mill의 용어법을 따라 말해보자면 고유명은 그 지시체를 외포denote하기만 할 뿐 별도의 개념적 내용을 내포connote하지는 않는다. 이런 식의 -Frege주의적 노선은 종종 직접지시이론direct reference theory이라 칭해진다. (역설적이게도 직접지시론은 고유명에 대한 ‘Russell주의적Russellian이론이라 불리기도 한다. 직접지시론은 고유명에 대한 Russell의 관점, 즉 고유명이 실은 대상에 대한 개념적 내용을 표현하는 한정 기술구가 위장된 형태라는 Russell의 관점을 부정하긴 하지만, Frege의 뜻 개념을 거부하고 모든 언어표현의 의미가 지시라는 소박한 의미론을 고수하고자 한 Russell의 핵심 기조만큼은 계승하기 때문이다.)

 

 

고정 지시어

 

전술했듯이 우연적으로 참인 문장이란 현실세계에서는 참이지만 어떤 -현실 가능세계에서는 거짓인 문장이다. 가령 ‘1965Beatles의 음반 판매량은 Rolling Stones보다 많다는 현실세계에서 참이지만, 어떤 -현실 가능세계에서는 거짓이다.7) 반면 필연적으로 참인 문장은 모든 가능세계에서 참이다.


7) (原註) 이런 의미에서 이란 명제와 세계 간 성립하는 관계이다. 다만 이라는 단어는 대체로 현실세계에서 참현실적으로 참actually true의 의미로 사용된다.


이렇게 어떤 문장들은 세계에 따라 각기 다른 진리치를 갖는 반면 어떤 문장들은 모든 세계에 걸쳐 동일한 진리치를 갖는 것과 유사하게, 어떤 단칭용어들은 우리가 어떤 세계에 관해 말하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사물들을 지시하는 반면 어떤 단칭용어들은 모든 세계에 걸쳐 동일한 지시체를 갖는다. 다음 두 단칭용어를 보자:

 

(4) 화성의 위성의 개수.

(5) 3보다 작은 양의 정수의 개수.

 

여기서 산술학의 진리는 필연적으로 참이라 해보자. 위 두 표현은 모두 수 2를 지시한다. 주지하다시피 화성의 위성은 PhobosDeimos 두 개이다. 그런데 두 표현이 -지시적인 이유는 현실세계에서 달을 공전하는 위성이 두 개이기 때문이다. 만약 사태가 현실과 달랐더라면, 화성은 둘보다 많거나 적은 위성을 갖고 있었을 수도 있다. 따라서 현실세계와는 다른 가능세계의 측면에서 보자면 (4)2가 아닌 다른 수를 지시한다. 즉 특정 사실적 환경에서는 화성의 위성이 네 개이거나 다섯 개였을 수도 있다. 반면 (5)그 어떤 가능적인 상황을 생각해보더라도 동일한 수를 지시한다. 3보다 작은 양의 정수가 정확히 두 개 뿐이라는 것은 필연적으로 참이기 때문에, (5)는 모든 가능세계에서 동일한 대상을 지시한다.

(5)와 같이 여러 세계들에 걸쳐서도 동일한 지시체를 갖는 단칭용어를 Kripke고정 지시어rigid designator라 칭하였다. 반면 (4)-고정적non-rigid이다(또는 유연하다flaccid’).

주의할 사항이 있다; ‘3보다 작은 양의 정수의 개수라는 단어는 물론 지금과 다르게 사용되었을 수도 있다. 자연언어의 역사가 지금과 달랐더라면 그 단어가 다른 의미를 지녔을 수도 있다. 그 경우 (5)는 다른 대상을 지칭했을 것이다. 이와 동일한 의미에서 문장 총각은 미혼이다역시 지금 의미하는 바와는 다른 것을 의미했을 수도 있다. 만일 총각고슴도치를 의미하고 은 미혼이다은 털이 없다를 의미한다면, 그 문장은 고슴도치는 털이 없다는 거짓 명제를 표현할 것이다. 하지만 총각은 미혼이다가 필연적 참인지 여부에 관해 물을 때 우리가 진정 의도하는 바는, 그 문장의 의미가 주어져 있을 경우 그 문장이 거짓이 되는 세계가 존재하는지 여부를 묻는 것이다. [다르게 말해 문장의 양상성에 관한 물음은, 문장이 어떤 명제를 표현했을 수 있겠느냐 하는 의미론적인 사안에 관련된 물음이 아니라, 이미 특정 명제를 표현하고 있는 문장이 어떤 세계에서 어떤 진리치를 가졌겠느냐 하는 형이상학적인 사안에 관련된 물음이다. 사실적인 의미론적 가정에 따라 한 문장이 각기 다른 명제들을 임의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그 명제들은 당연히 제각기 다른(혹은 동일한) 진리치를 갖게 될 것인바 그러한 양상적 진리치는 매우 사소하고 임의적인 방식으로 달라질/동일해질 것이다. 이렇듯 문장이 다른 명제를 표현할 것이라 가정함에 따라 달라지는/같아지는 식의 양상적 진리치는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다. 한 명제를 표현하는 문장이 세계에 따라 달리 갖게 되는 종류의 양상적 진리치가 우리의 관심사이다.] 총각이 미혼이라는 명제는 거짓이었을 수 있겠는가? 물론 그 답은 아니오이다. ‘총각은 미혼이다미혼 남성은 미혼이다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5)가 고정 지시어인지 여부를 물을 때 우리가 진정 묻고 있는 바는, 그 단어의 의미가 주어져 있을 경우 그 단어가 수 2가 아닌 다른 대상을 지시하는 세계가 존재하는지 여부이다. 산술의 진리가 필연적으로 참이라는 앞선 가정을 고려하였을 때 그 답은 아니오이다.

이번에는 다음 두 표현을 생각해보자:

 

(6) Nixon.

(7) 미국의 37대 대통령.

 

실제 미국의 37대 대통령은 Nixon이다. Nixon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미국의 37대 대통령인 그러한 세계가 존재하는가? 그렇다. 이렇듯 한정 기술구 형태의 (7)은 세계에 따라 각기 다른 사람을 지시하므로 고정 지시어가 아니다. 이에 다음 문장은 참이다:

 

(8) 미국의 37대 대통령은 미국의 37대 대통령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이 문장이 말하고 있는 바는 다음과 같다: (실제로) 미국의 37대 대통령인 사람 즉 Nixon을 생각해보라. 그 사람이 미국의 37대 대통령이 아닌 가능세계가 존재하는가? 그렇다.

 

그렇다면 (6)은 어떠한가? 여기서 고유명 (6)의 지시체인 그 사람 Nixon 자체에 대해 생각해보라. Nixon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Nixon인 그러한 세계가 존재하는가? 당연히 그렇지 않다! 그 어떤 가능세계에서도 NixonNixon이다. 그러니 다음 문장은 명백히 거짓이다:

 

(9) NixonNixon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우리는 Nixon을 취하여 그가 Nixon이 아닌 가능세계를 찾아낼 수는 없다. 현실세계의 그 사람 NixonNixon이 아닌 가능세계란 없다. 그 사람이 그 사람이 아닌 가능세계란 없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고유명 ‘Nixon’이 고정 지시어라는 점이다: ‘Nixon’은 모든 가능세계에서 동일한 대상을 지시한다. 이에 (9)와 같은 형식의 문장은 다음과 같이 한 용어의 고정성 여부를 검사하는 문장함수로 사용될 수 있다:

 

만약 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의 두 공란에 임의의 한 용어를 대입한 결과 문장 전체가 거짓일 경우 그 용어는 고정적이며, 그렇지 않을 경우 -고정적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Nixon’이라는 이름은 지금과 다르게 사용되었을 수도 있다. 즉 현실에서 ‘Nixon’이라 불리는 바로 그 사람 Nixon‘Nixon’이라고 불리지 않았을 수도 있다. Nixon을 부르는 이름이 ‘Nixon’이 아닌 가능세계가 존재한다. ‘Nixon’이 고정 지시어라고 말할 때 우리는 이러한 명백한 사실을 부정하고 있는 게 아니다. 고유명이 고정 지시어라는 아이디어의 요지는, 현실세계의 우리가 ‘Nixon’을 관습적인 의미로 사용할 경우라면, 다른 어떤 가능세계 내지 상상가능한 상황에 대해 말하더라도 동일한 사람인 Nixon에 대해, 즉 현실적으로 ‘Nixon’이라 불리는 바로 그 사람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번 절에서 살펴본바 고정 지시어에 대한 Kripke의 생각을 요약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a) 진정한 고유명은 모두 고정 지시어이다(반면 (5) ‘3보다 적은 양의 정수의 개수사례가 보여주듯이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즉 모든 고정 지시어가 진정한 고유명 형태인 것은 아니다]).

(b) 진정한 고유명은 모두 직접 지시한다refer directly.

(c) 직접 지시하는 표현은 모두 고정 지시어이지만, 모든 고정 지시어가 직접 지시하는 것은 아니다(이 역시 (5)의 사례에서 알 수 있다).8)

 

8) (a)(b)(c)로부터 도출된다. 모든 고유명이 직접지시표현이고 모든 직접지시표현이 고정 지시어라면, 모든 고유명은 고정 지시어이다(Aristoteles 정언논리학의 1-AAA식인 소위 Barbara 형식에 해당). 이에서 알 수 있듯이 외연적 측면에서 말하자면 고유명의 외연이 가장 좁고 고정 지시어의 외연이 가장 넓으며, 개념적인 내포의 측면에서 말하자면 고유명 개념은 고정 지시어 개념을 함축하되 그 역은 아니다. 고유명과 직접지시표현 간의 정확한 포함관계는 지금까지의 논의만으로는 불분명하다.


 

지시 고정하기: 인과의 사슬

 

Kripke의 평가대로 기술주의 이론이 틀린 이론이라 하자. 그렇다면 어떤 지시이론reference theory이 참이겠는가? 만약 당신이 Haydn을 짚어내게끔 해 줄 여하한 기술구를 알지 못한다 해도 ‘Josef Haydn’이라는 이름만으로 Haydn을 성공적으로 지시할 수 있다면, 이는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이에 대해 Kripke는 여직껏 아무도 그러한 답변을 제시하지 않은 것이 이상하게 여겨질 만큼 단순하고도 상식에 부합하는 설명을 내놓는다. 다시 ‘Haydn’ 사례로 돌아가보자. 이름 ‘Haydn’을 사용 할 때 당신은 암묵적으로 다음과 같은 의도를 갖고 있는 셈이다: ‘“Haydn”을 통해 나는 다른 사람들이 그 이름으로 의미하는 바를 의미한다.’ 여기서 다른 사람들이란 당신에게 ‘Haydn’이라는 이름을 말해 준 사람들, 예컨대 당신 주변의 친구들, 책이나 잡지의 저술가들, 인터넷에 글을 올리는 사람들, 라디오나 텔레비전에 출연하는 사람들 등을 일컫는다. 편의를 위해 그러한 사람들 전부를 대표하는 한 인물 A를 상정하자. A‘Haydn’을 통해 누구를 의미하는가? A 역시 다른 누군가인 B로부터 그 이름을 듣고 나서는, ‘“Haydn”을 통해 나는 다른 사람들이 그 이름으로 의미하는 바를 의미한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B‘Haydn’을 통해 누구를 의미하는가? B 역시 C로부터 그 이름을 들었을 것이며, CD에게서 들었을 것이며 등등 이렇게 계속된다. 요컨대 ‘Haydn’을 사용하는 사람들 간에는 당신에 이르기까지의 역사적인 사슬historical chain이 얽혀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그 사슬이 이어진 방향을 당신에서 시작하여 추적해 간다면 어디에 이르겠는가? 아마 최종적으로는 Haydn을 실제로 알았던 사람들, 그를 직접 보아서in person 알았던 사람들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 사람들은 한 남성 내지 한 어린 아이를 소개받으면서 얘가 바로 Haydn이에요라는 말을 들었을 것이다. 이름 ‘Haydn’최초로 사용한 사람은 그의 부모이다. 그의 부모는 까르륵거리며 웃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자식을 보며 애 이름은 “Josef”라고 합시다하고 말했을 것이다. 부계 성을 따른다는 사회적 관습에 따라 그 아이의 이름은 ‘Josef Haydn’이 된다. 이것이 Haydn에 대한 명명식(命名式)dubbing/ceremony of naming의 현장이다. 그 시점 이후로 부모는 그 아이를 지시하고자 하는 의도로 그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한다. 부모로부터 그 이름을 듣게 된 사람들은 그 부부가 지시하는 아이를 지시하기 위해 역시 그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을 것이며, 그렇게 ‘Josef Haydn’의 사용에 관한 역사적인 사슬이 시작된다. 종종 활용되는 경제학적인 비유를 들어 말해보자면, Haydn의 부모는 이름을-사용하는 관행name-using practice에서 ‘Josef Haydn’생산자producer이며, 그 이름을 전해들은 사람들은 소비자consumer인 셈이다.

이 이론의 장점은, ‘Josef Haydn’으로 칭해지는 사람이 누구인지 설사 정확히 모른다 하더라도, 그 이름을 사용함으로써 다른 이가 아닌 바로 그 작곡가를 성공적으로 지시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설명해낸다는 점이다. 당신이 그 이름을 통해 누구를 지시하느냐 하는 사안은, 그 이름과 얽힌 어떠한 의사소통에 참여하고자 (암묵적으로) 의도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으로 설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지시 고정하기: 기술구

 

[고유명을 사용할 때 기술구를 경유하여 대상을 지시하는 게 아니라 대상을 직접 지시한다고 해서,] 우리가 기술구의 사용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있다고 할 수 있는가? [앞 절에서 말한바 고유명을 사용할 때 암묵적으로 떠올리는] ‘다른 사람들이 이름 N을 통해 지시하는 바로 그 사람이라는 표현 역시 기술구가 아닌가? 물론 그렇다. 하지만 그 기술구가 이름 N의미를 부여give the meaning하지는 않는다. [고유명을 사용할 때 그러한 기술구가 개입된다고 해도] 기술구 이론에 대한 Kripke의 반박논증은 여전히 주효하다. Haydn이 그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점은 Haydn에 대한 우연적인 사실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이 “Josef Haydn”을 통해 지시하는 그 사람이라는 기술구 역시 Haydn과 우연히 결부되었을 뿐, ‘Josef Haydn’에 의미를 주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앞서와 마찬가지로 당신이 이름 ‘Josef Haydn’A로부터 듣게 되었다 가정한 뒤, 다음 문장을 생각해보자:

 

(10) Josef Haydn = A‘Josef Haydn’을 통해 지시하는 그 사람

 

이 문장은 참이며, 따라서 두 단칭용어 ‘Josef Haydn’‘A“Josef Haydn”을 통해 지시하는 그 사람은 사실상 동일한 지시체를 갖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두 표현의 의미가 동일한 것은 아니다. 두 표현은 전연 동등equivalent하지 않은바, 필연적으로 동등하지도 않으며 인식론적으로 동등하지도 않으며 개념적으로 동등하지도 않다. Frege의 용어를 빌려 말하자면 두 표현의 인지적 가치는 다르다. Haydn‘Josef Haydn’으로 불리지 않는 가능세계에서라면 (10)은 거짓이다. 그러한 세계에서는 A‘Josef Haydn’을 통해 Josef Haydn을 지시한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Kripke에 따르면 ‘A“Josef Haydn”을 통해 지시하는 그 사람과 같은 식의 기술구는 이름에 의미를 주는 것이 아니라 이름의 지시를 고정fix the reference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거칠게 말하자면 Frege(Russell)는 언어-사용자language-user의 마음속에 이름의 지시체를 고정하고자 하는 의도intention가 있어서, 그 의도의 내용content of that intention이 이름의 의미를 구성한다고 주장하였다. Kripke가 보기에 결정적인 문제점은 두 번째 주장이다. 이름의 지시를 고정하는 것이 반드시 이름의 의미 내지 이름의 인지적 가치를 결정하는 것과 연관되어야 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하나의 기술구가 이름의 지시를 고정하는 데에 사용될 수는 있겠으나, 그렇다고 하여 그 기술구가 축약된 것이 이름은 아니다.

Kripke의 생각을 이에서 더 밀고 나가볼 수도 있다. 한 언어-사용자가 어떤 이름을 성공적으로 사용하는 경우, 그 사람은 이름의 지시를 고정하고자 하는 의도를 반드시 가져야만 하는가? [즉 이름의 지시체를 고정하고자 하는 의도는 이름의 성공적인 사용에 대한 필요조건인가?] 그렇지 않다! 표현될 수 있는 모종의 인지적 가치를 이름이 반드시 지녀야만 한다는 생각을 일단 폐기하고 나면, 우리가 관심하는 사안은 오로지 이름이 무엇을 지시하는가일 뿐이라는 점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지시이론에서 우리가 필요한 전부란 어떤 사실이 이름의 지시체를 결정해주느냐에 관한 이론이다. 그리고 화자의 마음속 명백한 의도라는 것이 그러한 사실에 반드시 포함되어야만 한다고 가정할 필요는 없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한 쌍의 의미론적 규칙을 상정할 수 있다:

 

1   A가 어떤 주어진 대상을 이름 NN으로 명명한다면, NN을 사용할 때 ANN을 통해 그 A대상을 지시한다.

2   C가 이름 NNB로부터 들었고 CNN을 사용한다면, BNN을 통해 무엇을 지시하 든 C 역시 NN을 통해 그것을 지시한다.

 

이러한 의미론적 규칙 내지 규약은 (설사 화자가 그 규칙을 명시적으로 정식화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화자가 한 이름을 통해 지시하는 바를 결정한다.

지시-고정reference-fixing 절차가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알고 나면, 고유명의 지시체가 Frege Russell이 생각한 바와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는 방식으로 고정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예를 들어 어떤 옷가게 점원은 가게에 자주 와서 탈의실에서 옷들을 한참 동안 입어보기만 하는 한 손님을 지시하기 위해 굼벵이 아가씨라는 이름을 사용하겠다고 약정(約定)stipulate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경우 점원은 그 이름의 지시체를 단지 명시하고 있을 뿐, ‘굼벵이 아가씨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점원은 굼벵이 아가씨라는 이름과 탈의실에서 옷들을 한참 동안 입어보기만 하는 그 손님이라는 한정 기술구가 동의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후자와 다르게 전자는 고정 지시어이다. 점원은 이러한 약정을 활용하여 , 오늘은 굼벵이 아가씨가 쇼핑하러 오지 않았음 좋겠다!’ 하고 말할 수는 있다. 다만 그러한 약정을 하고 그것을 아무리 자주 활용하더라도, 그 점원은 다음 문장이 명백히 우연적으로만 참이라 생각하지 그 어떤 의미에서도 필연적이라고는 여기지 않을 것이다:

 

(11) 굼벵이 아가씨 = 탈의실에서 옷들을 한참 동안 입어보기만 하는 그 손님

 

이렇듯 한정 기술구는 이름의 지시를 고정하는 데에 사용될 수 있다. 그렇기에 [고유명의 지시를 고정하는 데에] ‘Josef Haydn’ 사례에서 보았던 바와 같은 명명식이 반드시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이름의 지시를 고정하는 데에 활용될 경우의 기술구는 [마치 대상에 이목을 끌기 위해 동원되는 손가락이나 지휘봉처럼] 대상을 가리키는-장치[(손가락이 실제적물리적으로 대상을 가키리는 것과 유사하게 대상을 언어적으로 가리키는 장치)]의 역할을 수행하는 셈이다.

 

그런데 고유명에 대한 Kripke의 그림에 문제를 일으키는 사례들이 있다: 첫 번째로, 어떤 이름의 경우엔 기술주의 이론에 더 잘 부합한다. 대부분 사람들은 그리스의 역사 이전 시대의 실제 사실이 어떠하였든 간에 이름 ‘Homer’가 지금도 그러하듯이 애초에 IliadOdyssey의 저자라는 한정 기술구를 의미하는 것으로 의도된 이름이라 생각할 것이다. 앞서 고찰했던 사례들과 달리, 그 기술구는 단지 ‘Homer’라는 이름의 지시를 고정하기 위해서만 동원되지는 않았던 것이다. ‘토막 살인마 JackJack the Ripper’9) 역시 이와 마찬가지로서, 이 이름 내지 별칭은 누군지를 특정할 수 없는 살인사건의 범인에 적용될 법한 특정 기술구가 단지 축약된 것일 뿐이다. 그렇기에 토막 살인마 Jack은 토막 살인마 Jack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말은 전연 이상하지만은 않은 듯하다. ‘Nixon’은 진정한 고유명이기에 NixonNixon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명백히 거짓인바 앞서 살펴본 고정성 검사를 통과하는 반면, ‘토막 살인마 Jack’화이트채플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인 그 사람과 같은 한정 기술구의 축약일 뿐이기에 고정성 검사를 통과하지 못하는 것이다.


9) 1988년 영국 이스트엔드 지역의 윤락가 화이트채플에서 일어났던 미제사건의 범인에게 붙여진 별명. 우리말의 김철수와 같이 아무개를 의미하는 범용한 이름 ‘Jack’, 발견된 시신 다섯 구 대부분이 처참히 훼손된 상태였기에 갈가리 찢는 사람이라는 의미의 ‘ripper’가 활용되어 이러한 별명이 붙었다.


두 번째로, 우리는 슈퍼맨이라든가 ‘Santa Claus’와 같은 소위 허구적 실체fictional entity를 지칭하는 고유명에 관해서는 아직 살펴보지 않았다. 그러한 이름들은 단지 지시하도록 가장(假裝)pretended to refer것일 뿐, 실제로 무언가를 지시하지는 않는 듯하다.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이름들이 단순히 무의미한 것만은 아니기에, 허구적 고유명의 의미를 설명하는 데에는 그 지시체로 의도된 허구적 대상이 만족할 법한 모종의 기술구가 개입되어야 한다.

물론 이러한 문제들이 Kripke의 이론에 대한 진정한 반례인지 여부는 따져볼 여지가 있다. Kripke의 주장을 통상적인 사례에 속하는 고유명으로 한정하여, 즉 앞서 고정 지시어말미에 있는 박스에서 언급된바 진정한 고유명에만 한정하여 그러한 이름들의 경우엔 기술주의 이론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해석해볼 수 있으며, 이는 기술주의 이론에 부합하는 이름이 일절 없다는 주장과는 다르다. 하지만 이렇게 해석하여도 Kripke 이론에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는 사례가 Gareth Evans에 의해 제시되었다.10) 알려진 바에 따르면 Madagascar 섬은 본디 그렇게 불리지 않았다고 한다. ‘Madagascar’는 원래 아프리카에 있는 한 해안가의 일부를 일컫는 명칭이었는데, 유럽의 탐험가들 및 지도 제작자들의 착오로 인해 그 해안가의 앞바다에 있는 거대한 섬의 이름으로 잘못 전이되어버렸다는 것이다. ‘Homer’ 사례와는 다르게 이번 사례의 경우 ‘Madagascar’는 기술구가 축약된 이름이라 여겨지지는 않는다. ‘Madagascar’는 진정한 고유명으로서 분명 Kripke가 제시한 논증들이 적용되는 종류의 이름이다. 이와 유사하면서도 미묘하게 다른 사례들은 얼마든지 많이 제시될 수 있겠으나 여하간 그 모든 사례들의 공통점은, 한 이름을 현재 사용하는 사람들이 지칭하는 대상과 최초에 그 이름을 생산한 사람들이 본디 지칭했던 대상이 다를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례들을 정확히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는 앞선 두 사례와는 달리 Kripke 이론에 대해 명백하고 심각한 문제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 어떤 해결책이 되었든, 언어 공동체 내에 이어져 온 역사적 사슬이 예상치 못하게 어그러질disrupted 수 있다는 사실, 즉 이름이 사용되어온 역사적 사슬의 한 지점에서 이름과 그 지시체에 대한 잘못된 정보misinformation가 퍼질 수 있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10) (原註) 이 사례 및 여타 예시들에 관해서는 G. Evans, 이름에 대한 인과이론The Causal Theory of Names(G. Evans 選集, 옥스퍼드: 옥스퍼드대학교출판부, 1985, 1-24쪽에 수록) 참조. 본문에 제시된 ‘Madagascar’ 사례는 11쪽에 제시되어 있다.


 

FregeRussell에서부터 계속되는 문제들

 

Russell은 통상적인 고유명이 진정한 고유명은 아니라고 믿었다. 통상적인 고유명은 단지 한정 기술구가 축약된 것이며, 그의 이론에 따르면 한정 기술구는 단칭용어가 아니라 양화사이다. 오직 감각-자료(및 자아)를 지시하는 이름만이 논리적 고유명이다. Frege와 달리 Russell의 관점에서 논리적 고유명은 아무런 기술적 내용을 지니지 않는다. Frege가 말한바 지시체의 결정 규칙 및 지시체의 현상방식 따위를 표현하지 않는다.

이런 연유로 직접지시론은 Russell주의적이라 칭해진다. 직접지시론은 고유명이 기술적 내용을 갖는지 여부의 문제에 대해 Frege에 반대하고 Russell에 동의하기 때문이다. 직접지시론의 관점에서도 고유명은 아무런 기술적 내용을 지니지 않는다. 하지만 직접지시론은 통상적인 고유명이 진정한 고유명 즉 논리적 고유명임을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Russell과 관점을 달리한다.

통상적 고유명에 대한 Frege Russell의 기술주의 관점에 반대하는 Kripke의 논증은 매우 강력하다. 그런데 Frege로 하여금 뜻 이론을 정립하도록 추동하고, Russell로 하여금 직접대면된 항목만이 논리적 고유명의 지시체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을 견지하도록 만들었던 인식론적 이유들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예컨대 직접지시론자들은 다음과 같은 가능성을 어떻게 설명해낼 수 있겠는가?:

 

Hesperus = Phosphorus.

JohnHesperus가 행성이라고 믿는다.

JohnPhosphorus가 생성이라고 믿지 않는다.

 

Kripke의 관점에서 보자면 ‘Hesperus’‘Phosphorus’는 어쨌든 동일한 의미를 지니며, 따라서 동일한 인지적 내용을 갖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리고 그 경우 위의 세 문장은 분명 동시에 참일 수 없다.

뿐만 아니라 ‘Vulcan’과 같이 비존재에 대한 이름과 얽힌 문제는 직접지시론의 관점에서 어떻게 처리될 수 있겠는가? 분명 ‘Vulcan’은 단순한 허구적 이름이 아니며 통상적인 고유명으로서 진지하게 의도된 이름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지시체를 갖고 있지 않기에 Kripke‘Vulcan’과 같은 이름이 무의미하다는 잘못된 답변을 내놓을 수밖에 없는 듯하다. [이는 2에서 살펴본바 지시와 의미를 동일시하는 소박한 지시론이 봉착하는 것으로 Frege가 진단했던 바로 그 문제로서, 소박한 의미론의 기본 원리를 그대로 고수하는 직접지시론 역시 이 문제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 ‘Vulcan’‘Nessie’는 공허한 단칭용어이기에 직접지시론의 관점에서는 동일하게 무의미하며, 따라서 ‘Vulcan은 뜨겁다‘Nessie는 뜨겁다가 동의적 문장이라는 잘못된 판결을 내릴 수밖에 없다.]

직접지시론의 관점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세 가지 가능한 선택지가 있는 듯하다. 첫 번째는 기술주의적 관점과 직접지시론적 관점을 적절하게 통합하는 것으로서, 언어의 인지적 차원에 대해서는 FregeRussell이 발전시킨 설명을 받아들이되, Kripke가 지시 및 필연성에 관해 지적한 사실들 역시 수용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Kripke의 논증을 다시 논박하는 것이다. 세 번째는 Kripke의 논증을 전적으로 수용하고 Frege반대하는 것으로서, 언어표현의 지시에 관한 문제와 인지적 차원에 관한 문제를 날카롭게 구분한 뒤, 언어철학적으로 개입해야 할 유일한 문제로서 전자에 대해서는 Kripke의 이론을 받아들이고, 후자는 인식론, 심리철학, 심리학 등의 문제로 남겨놓는 것이다. 우리는 8에서 이 문제를 다시 상세히 살펴보게 될 것이다.

 

 

추가적인 논의: 내포 의미론

 

미국의 44대 대통령은 미국의 첫 흑인 대통령이었다. ‘미국의 44대 대통령미국의 첫 흑인 대통령이라는 두 기술구는 동일한 개체를 짚어내지만, 동일한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는 두 기술구가 동일한 대상을 필연적으로 짚어내지는 않는다는 사실에 반영되어 있다. 다른 가능세계에서는 미국의 42대 대통령이 미국의 첫 흑인 대통령이다.

박쥐는 날 수 있는 유일한 포유류이다(날다람쥐는 나는 게 아니라 활공할 뿐이라고 가정하자).따라서 두 술어 ‘𝛼는 박쥐이다‘𝛼는 날 수 있는 포유류이다-외연적이다. 즉 박쥐의 집합은 날 수 있는 포유류의 집합과 정확히 동일하다. 하지만 두 술어는 분명 동의적이지 않다. 두 술어표현의 의미는 다르다. 이는 현실세계에서 박쥐의 집합과 날 수 있는 포유류의 집합이 정확히 동일하긴 하지만, 두 집합이 일지하지 않는 다른 가능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반영되어 있다. 어떤 가능세계에는 두 술어 중 하나만을 만족하는 생물들이 존재한다.

이러한 대응성에 주목한 많은 철학자들은 언어표현의 의미가 이런 식의 가능세계에 따른 작동방식behaviour across possible world 즉 언어표현의 양상적특질‘modal’ feature과 부합해야 된다는 생각을 제시해왔다. 모든 언어표현은 하나의 내포(內包)intension를 가지며, 이 내포는 각 가능세계에 따라 그 세계에서의 한 외연(外延)extension을 결정한다. [다르게 말하면 언어표현의 내포는 가능세계로부터 외연을 사상하는 함수이다.] 예를 들어 미국의 첫 흑인 대통령의 내포는 현실세계에서 Barack Obama를 그 외연으로 결정하지만, 다른 가능세계에서는 Jesse Jackson, 또 다른 가능세계에서는 또 다른 대상을 그 외연으로서 결정한다. ‘𝛼는 날 수 있는 포유류이다의 내포는 현실세계에서 ‘𝛼는 박쥐이다와 동일한 외연을 결정하지만, 다른 가능세계에서는 가령 날아다니는 웜뱃의 집합과 같은 다른 외연을 결정한다.

이와 유사하게, 우리는 명제를 문장 전체의 내포와 동일시해볼 수 있다. 1이후로 우리는 명제를 그것을 표현하는 문장과 유사한 구조를 갖는 추상적인 대상으로 가정해왔다. 이제 이러한 명제개념 대신, 명제를 문장 및 발화의 맥락context of utterance으로부터 그 문장이 (주어진 그 발화의 맥락에 따라) 참인 세계들의 집합을 사상하는 함수(函數)function로 생각해볼 수 있다. 문장의 내포는 각 세계에 따라 그 문장의 진리치를 결정한다. 예를 들어 현실세계에서 ‘Barack Obama는 미국의 44대 대통령이다의 진리치는 ‘VoltaireCandide를 저술했다의 진리치와 같다. 하지만 이는 현실세계에서만 성립할 뿐, 다른 가능세계에서 두 문장의 진리치는 다르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의미는 문장이 보이는 양상적 작동방식modal behaviour의 측면에서,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모든 언어표현이 보이는 양상적 작동방식의 측면에서 탐구되어야 한다. 이러한 아이디어는 문장의 뜻을 문장의 진리-조건으로(일반적으로 말하자면 모든 언어표현의 뜻을 그 표현의 지시-결정조건으로) 특징지은 Frege의 생각과 잘 부합한다. 즉 문장의 뜻이 곧 문장의 진리-조건이라는 말은, 문장의 내포가 곧 문장이 참이 되는 환경들의 집합이라는 말과 같다.

이러한 소위 내포 의미론intensional semantics 및 그 다양한 변형태들은 지난 60여년간 의미를 해명하는 데 대한 가장 유력한 접근방식이었다. 이 이론은 매우 직관적이다. ‘은 빨갛다라는 단어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현실세계에서 무엇이 빨간 것으로 간주되는지 알아야 할 뿐만 아니라, 대안적인 상황 즉 다른 가능세계에서는 무엇이 빨간 것으로 간주될 것인지 역시 알아야 한다. 언어표현들 간 의미의 차이를 확실하게 판명해내는 가장 신뢰할 만하면서도 익숙한 방식은 다음과 같은 가상적인 추론을 진행해보는 것이다: 현실세계에서는 임의의 언어표현 AB의 외연이 일치하긴 하지만, 양자가 갈라지는 다른 가능한 상황이 존재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AB의 의미는 다르다.

하지만 그 은 참이 아니라는 데에 내포 의미론의 난점이 있다. AB의 외연이 모든 가능세계에서 일치한다고 해도, 양자의 인지적 가치가 항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2+2=4’모든 캥거루는 캥거루이다와 같이 AB그 자체로 필연적 참이라면, 두 문장의 진리치는 모든 가능세계에서 일치하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두 문장의 의미가 같다고 여겨지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요컨대 내포적 동등성intensional equivalence은 인지적 동등성congnitive equivalence을 함축하지 않는다. [즉 임의의 두 언어표현의 내포가 모든 가능세계에서 동일한 외연을 결정한다 해도, 두 표현의 의미가 동일하다고는 할 수 없는 사례가 존재한다.] 술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서, 필연적으로 동일한 외연을 갖지만 인지적으로 동등하지 않은 술어들이 존재한다. 예컨대 ‘𝛼는 둥근 사각형이다‘𝛼는 동물들이 존재하기 이전에 존재했던 동물이다는 모든 가능세계에서 집합empty/null set을 그 외연으로 갖는바 필연적으로 -외연적이지만, 양자의 의미는 분명 다르다. 단칭용어의 경우엔 방금 언급되었던 두 술어로 구성된 한정 기술구를 예로 들 수 있겠다. 둥근 사각형동물들이 존재하기 이전에 존재했던 동물은 모든 가능세계에서 아무것도 지칭하지 않는바 내포적으로 동등하지만, 인지적으로도 동등하지는 않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멀게는 1940년대 후반 Frege 철학에 토대를 두었던 R. CarnapAlonzo Church를 위시하여, 작금의 철학자들로는 Richard Mongtague, David Kaplan, David Lewis, Robert Stalnaker `에 이르기까지, 많은 인물들에 의해 다양한 접근법과 해결책들이 제시되어왔다. 초기의 접근법은 문장의 구성적 구조compositional structure에 호소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둥근 사각형동물들이 존재하기 이전에 존재했던 동물은 필연적으로 동일한 외연을 갖긴 하지만, 동등한 내포를 지닌 구성 부분들에 의해 동일한 방식으로 구성되어있지는 않다. 간단히 말해 두 표현은 동의성에 대해 Carnap이 요구한 내포적 동형성intensional isomorphism을 띠지 않는다. Carnap의 내포적 동형성 조건에 따르면 동의적인 문장들 즉 인지적으로 동등한 문장들은 내포적으로 동등intensionally isomorphic해야 하는바, 동일한 내포를 갖는 구성 부분들에 의해 동일한 방식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Carnap의 이론 및 내포 의미론과 연관된 여타 이론들은 여기서 상세히 살펴보기에는 너무 복잡한 주제이다. 뿐만 아니라 고전적인 의미론 분야에서 FregeRussell의 이론마냥, 내포 의미론 분야에서 독보적으로 우월하고 지배적인 위상을 갖는 하나의 이론은 아직 없는 실정이다. 다만 여기서는 언어표현의 양상적 작용방식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성공적인 의미론에 대한 충분조건은 아닐지라도 필요조건이라고 가정해보고자 한다. 그 어떤 형태가 되었든 의미에 관한 이론은 한 문장이 복수의 가능세계들을 걸쳐서 갖는 진리-조건에 대해 올바른 답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역사적 사항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유명한 철학자들(특히 HumeAyer)은 선험성 후험성(또는 경험성), 필연성 우연성, 분석성 종합성이라는 세 가지 개념쌍에 대해 각 쌍을 이루는 항목들이 서로 나란히 가는 개념들이라는 점을 이의 없이 받아들였다. 뿐만 아니라 첫 번째와 두 번째 개념쌍은 세 번째 것으로 환원되거나 그에 의해 설명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선험적 지식이 어떻게 가능한지 설명하기 위해 별도의 기이한 인식론적 능력이 요구될 필요는 없으며, 필연적 참이라는 개념에는 아무런 불가사의함도 없다. 양자는 모두 의미론적 측면에서, 즉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의 측면에서 남김없이 설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전통철학에서 형이상학적으로 혹은 인식론적으로 실질적인 문제인 것처럼 보였던 사안들이 실제로는 단지 언어와 관련된 사안인바 진지한 해결책이 필요한 심각한 문제는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다. 앞서 4에서 살펴보았듯이 1920년대 후반부터 1950년대에 이르기까지 논리실증주의자들은, FregeRussell이 체계화한 강력한 새로운 논리학으로 무장한 채, 이렇듯 선험성과 필연성을 분석성으로 환원하는 관점을 발전시켰으며, 이러한 작업을 통해 형이상학을 제거하고 인식론을 명료화하고자 도모하였다. Carnap세계의 논리적 구조(19671928)경험주의, 의미론, 존재론(1950: 의미와 필연성: 의미론 및 양상논리 연구(1956)에 수록), 그리고 Ayer언어, 진리, 논리(1936, 개정판은 1946년에 출간)는 이러한 관점을 천명한 영향력 있는 저서들이었다.

한편 Kripke1971년에 논문 동일성과 필연성Identity and Necessity을 발표하였으며, 그의 이름과 이론을 널리 알리게 된 명저 命名과 필연Naming and Necessity1980년에 출간되었다. (사실 이 저서는 본디 Donald DavidsonGilbert Harman이 편집하여 1972년에 출간한 자연언어의 의미론Semantics of Natural Language에 수록된 것이 첫 공식 출판이었다.) 거기서 KripkeCarnapAyer에 반대하여 위의 세 개념쌍을 확연하게 구분하는 논증을 펼치면서, 선험적(후험적)이면서 필연적인 명제 및 선험적이면서 우연적인 명제의 사례들을 제시하였다. Kripke의 관점은 언어철학 분야뿐만 아니라 인식론, 형이상학, 과학철학 등의 분야에도 막대한 영향력을 끼쳤다. 일반적으로 Kripke의 관점은 Carnap을 위시한 논리실증주의의 대두 이후 거의 사장되다시피 하였던 형이상학을 부활 및 해방시킨 것으로 평가된다. Kripke의 저서가 출간된 이후로 철학자들은, 형이상학이 단지 우리의 개념에 암묵적으로 포함되어있는 분석적인 것[(즉 실질적 지식이 아니라 개념 내지 언어에 관한 것)]일 뿐이라는 협소한 단서조항을 받아들이지 않고도, 형이상학적 이론들을 마음껏 발전시킬 수 있게 되었다.

인류 지성사의 위대한 변화들에서 으레 그러했듯이, Kripke는 이러한 혁명적 전환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낸 유일한 인물이었다. 물론 그 외에도 David Kaplan, Peter Geach, Keith Donnellan, Hilary Putnam 등의 인물들이 1960년대에 소위 새로운 지시이론new theory of reference에 관해 많은 수의 저술을 남겼다. 이 이론의 핵심 착상은 Ruth Barcan Marcus1947년부터 발표하기 시작한 양상논리(樣相論理)modal logic에 관한 저술들에서 처음 제시되었던바, Marcus는 이름을 기술적이지 않은[기술적 내용을 갖지 않는] “이름표descriptionless “tag”로서 특성화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전해지는 전설적인 사건은 1962년에 열린 보스톤 과학철학 학술회Boston Colloquium for Philosophy of science에서 있었던 만남이다. 거기서 Barcan Marcus는 그녀의 1961년 논문 양상적과 내포적 언어Modalities and Intensional Languages의 결론을 발표하였다. 청중에는 W. V. QuineAlfred Tarski 같은 쟁쟁한 원로급 철학자들 사이에 젊은 Kripke도 있었는데, 열여덟 나이였던 1959년에 양상논리에 관해 발표했던 매우 중요한 글 한편을 통해 Kripke는 당시 이미 유명해져 있었다. 그날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누가 무엇을 얼마나 이해했는지, 그리고 Kripke가 거기서 듣게 된 것들을 얼마나 간직하게 되었는지 등에 대해서는 쟁론이 분분하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Barcan Marcus가 직접 지시론의 핵심 착상을 최초로 발견해낸 것이 맞을진대, 그녀는 그 아이디어가 함축하는 바를 Kripke만큼 날카롭고 철저하게 파헤치지는 못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번 의 요약

 

이번 장에서 우리가 염두에 두었던 의미의 가능성은 형이상학적인 개념이다. 어떤 명제 p가 가능하다[가능적이다]는 말은. 설사 실제로는 p가 사실이 아니고 p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알려져 있다 해도, p였을 수도 있다는 말과 같다. 이런 의미에서 고대 그리스인들은 핵무기를 개발하였다는 명제는 실제로는 참이 아니지만 가능한 명제이다. 가능성과 필연성은 다음과 같이 상호-정의가능하다: p의 부정이 필연적이지 않다면 p는 가능적이며[∼□∼p → ◇p], p의 부정이 가능적이지 않다면 p는 필연적이다[∼◇∼p → □p]. [이러한 양상성 개념을 의미론적으로 해석하는 데에 활용되는] 가능세계라는 개념은 [그와 연관된 형이상학적 문제를 차치한다면] 최소한 이론적 발견에 유용한 수단으로서, 단순하게 생각해 사물들이 존재할 수 있었던 하나의 방식이라 할 수 있다.

FregeRussell은 크게 보자면 고유명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술주의적 관점을 견지하였던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임의의 통상적인 고유명 N에 대해, N이 사용되거나 이해되는 매 경우마다 그 이름은 F 형식의 한정 기술구를 의미한다. 이에 대해 Kripke는 최소한 다음과 같은 네 가지의 반론을 제시한다: (1) N이 그 F를 의미한다면 N이 그 F라는 것은 필연적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이는 참이 아니다. (2) N이 그 F를 의미한다면 N이 그 F라는 것은 선험적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이는 참이 아니다. (3) N이 그 F를 의미한다면 N이 그 F라는 것은 분석적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이는 참이 아니다. (4) ‘N = F’(여기서 F는 그 자체로는 언어적 조건이 아니다) 형식의 아무런 명제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더라도 N이 포함된 문장을 이해하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이름의 지시체가 되는 대상을 기술하는 지식descriptive knowledge을 일절 갖고 있지 않더라도, 그 이름을 통해 대상을 무리 없이 지시할 수 있다.

이에 Kripke는 무엇이 지시를 결정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기술주의 이론의 대안으로서 다음과 같은 인과-역사적causal-history 이론을 제시한다: 이름 N을 사용할 때 나는 N을 통해 무엇을 지시하는가? 나는 그 이름을 나 이외의 다른 언어-사용자인 A에게 들어서 알고 있다. AN을 통해 무엇을 지시하였는가? A는 그 이름을 B에게 들어서 알고 있다. BN을 통해 무엇을 지시하였는가? 이렇게 인과적-역사적으로 이어진 이름 사용의 사슬을 역추적해 가면, 가령 이 대상을 “N”이라 일컫기로 하자와 같은 말을 통해 이뤄지는 명명식에 의해, 혹은 F“N”이라 일컫기로 하자와 같은 기술구의 활용에 의해, 이름 N의 지시체가 고정되었던 시점에 최종적으로 이르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후자의 경우 F’ 형식의 기술구가 단지 대상을 가리키기 위해서만 활용된다는 사실이다. 최초 지시-고정단계에서 도입된 기술구는 이름 ‘N’과 동의적인 것으로 이해될 수 없는바, 지시체를 고정하는 데에 기술구가 활용된다고 해서 ‘N’이 그 기술구에 의해 표현되는 여하한 개념적 내용을 지니게 되는 것은 아니다. 뿐만 아니라 이름을 통한 지시가 성공적인지 여부에 대한 기준은 사용자가 그 이름 사용과 얽힌 역사적 연쇄를 이해하고 있는지 여부와는 전연 무관하다. 즉 이름을 사용하기 위해 이름 사용의 연결고리가 어떤 경로를 거쳐 최초의 지시-고정행위reference-fixing act에까지 이어지는지를 속속들이 알고 있어야 할 필요는 없다.

Kripke가 말하는 고정 지시어란 (지시체가 되는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제외한) 모든 가능세계에서 항시 동일한 대상을 지시하는 용어이다. 고정 지시어가 아닌 용어들은 -고정 지시어 내지 유연한 지시어라 칭해진다. 고정 지시어의 사례로는 사각형의 변의 개수를 들 수 있으며, -고정 지시어의 사례로는 미국의 42대 대통령을 들 수 있다. Kripke에 따르면 통상적인 고유명은 모두 고정 지시어이다. 따라서 가령 ‘Charles Lutwidge Dodgson = Lewis Carroll’은 필연적으로 참인 반면, ‘Lewis Carroll = 이상한 나라의 Alice의 작가는 현실세계에서 참이긴 하지만 필연적으로 참인 것은 아니다. ‘Charles Lutwidge Dodgson Charles Lutwidge Dodgson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거짓인 반면, ‘이상한 나라의 Alice의 작가는 이상한 나라의 Alice를 저술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참이기 때문이다.

내포 의미론이란 가능성 개념을 통해 의미를 설명하고자 하는 의미론의 한 조류이다. 한 문장의 의미를 앎으로써 임의의 가능세계에서 그 문장이 참인지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는 착상을 통해, 많은 철학자들은 의미를 양상적 진리-조건modal truth-condition과 동일시하는 의미론을 정립하고자 시도하였다. 내포 의미론의 문제점은 한 문장이 모든 가능세계에서 갖는 진리치를 안다고 해서 그 문장의 의미를 아는 데에 충분하다고 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예컨대 필연적으로 참이거나 거짓인 문장들의 경우 모든 가능세계에서 동일한 진리치를 갖겠지만 그 의미는 분명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탐구문제

 

1. 고유명에 대한 기술주의 이론에 찬동하는 다음 주장에 대해 생각해보자: 이름 N에 대한 임의의 사용자가 제시할 수 있는 다음과 같은 기술구가 존재하며, 그 기술구는 올바른 대상을 지시한다: ‘언어 공동체가linguistic community 이름 N을 통해 실제로 지시하는 그 대상’. 기술주의 이론에 대한 Kripke의 네 가지 반론 각각을 이 주장에 적용하여 검토해보라. Kripke의 반론은 이 주장에도 주효한가? 혹시 이 주장에는 악순환이 포함되어있지는 않은가?


2. 대상을 지시하는 데에는 정말 아무런 개념적 자원도 필요하지 않은가? 대상에 대해 단순한 소음 이상의 유의미한 무언가를 말하기 위해서는 어떤 형태든지의 개념적 내용이 필요한 듯하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언어-사용자가 고유명을 사용함으로써 대상을 지시하기 위해 이해하거나 혹은 의도해야만 하는 개념적 내용이란 무엇이겠는가?


3. Smith 부인이 산부인과에서 한 아이를 출산하였다. 갓 태어난 꾸물대는 아기를 건네받은 그녀는 애 이름은 ‘Roger’로 할 거야하고 말한다. 얼마 후 아기는 몸무게가 재어지고 건강상태를 확인받은 후 깨끗이 씻기게 된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 과정에서 Smith 부인의 아기는 그 산부인과에서 비슷한 시간대에 출생한 ‘Sam’이라는 이름의 다른 아기와 실수로 바꿔치기 되어버린다. 이러한 엄청난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였다. 하여 본디 ‘Sam’이라고 이름 붙여졌던 아기는 Smith 부부 슬하에서 ‘Roger’라고 불리며 성장하게 된다. 그 아이의 이름은 무엇인가? 시간이 지나 산부인과에서 있었던 사건이 밝혀지게 된다면, 그 아이는 Roger가 아니라 다시 Sam이 되는 것인가?


4. 파리Paris에는 한때 1미터 길이의 궁극적인 기준으로 간주되었던 이른바 표준 미터자라는 금속 막대가 있다. 따라서 그 기준이 통용되던 당시에는 표준 미터자의 길이 = 1미터가 당연히 필연적인 참이라 여겨졌을 것이다. Kripke는 이에 반대한다. 이 사례에 관해 Wittgenstein이 언급했던 바와는 다르게, Kripke(특정 시점에) 표준 미터자의 길이가 1미터라는 명제가 선험적이면서 우연적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표준 미터자는 실제 그 막대의 길이보다 길거나 짧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특정 시점에) 표준 미터자의 길이는 1미터이다는 단지 ‘1미터의 지시를 고정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Kripke는 이러한 주장을 하였는가? 그의 주장은 과연 옳은가?


5. ‘눈은 하얗다눈은 하얗고 모든 캥거루는 캥거루이다를 생각해보자. 두 문장은 동일한 내포를 갖는가? 양자는 모든 가능세계에서 동일한 진리치를 갖지만, 직관적으로 생각했을 때 그 의미는 분명 다르다. 내포 의미론의 관점에서 이러한 직관에 부합하는 설명을 제시할 수 있겠는가?

 

 

주요 읽을거리

 

Kripke, S. (1980), 命名과 필연Naming and Neces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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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아트 - 인상주의부터 포스트모더니즘까지의 역사
한스 베르너 홀츠 바르트.라슬로 타셴 책임편집, 엄미정 외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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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 인상주의부터 동시대 포스트모더니즘까지의 미술사조 및 작품들을 다루고 있다. 각 장별로 현대미술사의 한 사조를 할애하되, 첫 글로 각 사조를 전반적으로 개괄하는 글을 배치하고 이후엔 그 사조에 속할 법한 작가 내지 작품들을, 복수의 저술가들이 하나씩 소개하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렇듯 구성이 특이하기에, 정석적인 미술사 서적으로 읽기엔 비교적 통일성이 부족하고, 개별 작가들 내지 사조들에 대한 해설서로 읽기엔 많이 빈약하지만, 현대미술사 및 미학이론에 다소 숙달해 있는 사람이라면 외려 그러한 점으로 인해 물러 앉아 가볍게 읽어나갈 수 있겠다. 개인적으로는, 한 사조 내에 속하는 것으로 평가되는 대표적인 작가들의 대표작들만을 대강 알고 있던 차에, 그에 비에 좀 더 넓으면서도 엷은 스펙트럼에 할당될 법한 작가 및 작품들(혹은 대표적 작가들의 작품이되 대표작이 아니라 덜 조명되어 온 마이너한 작품들)을 각 사조별로 접해볼 수 있어 신선하였다. 


 책을 사면 책과 분리되는 겉표지가 있을 경우 거추장스러워 으레 걷어내어 그냥 버리고는 하는데, 먼로가 붉게 웃고 있는 이 책은 겉표지를 버리고 나니 본 책몸의 양장 표지가 새하앴다. 그 흰 배경에 붉은 색으로 쓰인 '모던아트' 네 글자 디자인이 참 괜찮다 싶었는데, 아무래도 겉표지 없이 손때 묻혀가며 읽고 보니 이제는 책 모양새가 첫 샀을 때만큼은 영 꼴나지가 않는다. 혹여 책을 아껴 깔끔하게 읽어가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먼로의 얼굴을 절대 버리지 말기를, 혹여 나같이 귀치않아 버리더라도, 어디 편한 데 퍼질러 앉아서는 독서대에 놓은 채 얌전히 읽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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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증주의 : Ayer

 

1936년에 출간된 Ayer언어, 진리, 논리Language, Truth and Logic, Wittgenstein논고처럼 저자의 20대 시절에 쓰였으며, 역시 Wittgenstein의 저서와 마찬가지로 선대 철학자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지는 않은 저서이다. 그 책은 Witgenstein논고가 보여주는 깊이나 독창성, 논리적 명민함이라든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저술된 Carnap의 저서가 보여주는 엄격하고 지적인 정교함을 지니고 있지는 않지만, 고전적인 형태의 검증주의를 힘차고 당당한 어조로 표명한 저서로 여전히 평가된다(Ayer의 주요 착상들 대부분은 Carnap의 저서에서 본뜬 것이다. Carnap의 철학은 다음 절에서 다뤄진다). Carnap의 철학은 Ayer의 철학보다 더욱 추상적이고 난해하고 단일하게 규정하기 어려운 편이며, 두 인물의 이론적 동기 역시 현저히 다르다. 그렇기에, Ayer보다 Carnap이 시기상으로 좀 더 앞선 인물이긴 하지만, Carnap의 복잡한 이론을 살펴보기에 앞서 상대적으로 덜 추상적이고 실질적인 측면을 지닌 Ayer의 이론을 먼서 살펴보고자 한다. 비록 Ayer언어, 진리, 논리에 개진하였던 생각들을 말년에 철회하였지만, 지금도 그 책은 읽기에 평이하고 종종 흥미로운 면모를 보여준다. 책의 전체적인 기조는 명시적이면서도 설득력 있는 방식으로 BerkeleyHume의 철학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Michael Dummett, Crispin Wright, Simon Blackburn 등 비교적 최근의 인물들이 개진하는 관점을 예견하기도 한다.

논고에서 Wittgenstein은 언어가 사실을 묘사하는지 여부의 측면에서 뜻을-형성하는 언어의 한계를 설정하였다. 여기서 사실이란 대상들이 우연적이 방식으로 배열된 상태로서, 이러한 배열을 그리지못하는 언어는 무언가를 보여줄 수는 있어도 여하한 사실적인factual 것을 말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그림이론에는 인식론적인epistemological 제약사항이 없다. 즉 언어가 적절한 의미를 담지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아는 것 혹은 직접 대면한 것만을 말해야 한다거나, 말의 주제가 되는 사안에 대해 간접적인 방식으로라도 정신적으로 접촉해야 한다는 등의 구체적인 요구사항이 없다.

언어, 논리, 진리의 핵심 아이디어인 검증원리Verification Principle는 그러한 제한조건을 제시한다. 뿐만 아니라 이 원리는 그 배경이 되는 전통적인 철학적 관점과 합쳐짐으로써, 언어와 철학의 본성 및 한계에 대한 설득력 있는 그림을 제공한다. 그 철학적 배경이란 필연성necessity선험성을 분석성과 동일시하고, 분석적 진술을 경험에 의해서는 논박되지 않는 진술로 간주하는 관점이다. 분석적 진술이 경험에 의해 논박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단지 우리의 기호사용 방식에 대한 규약, 즉 기호를 특정 방식으로 사용하겠다는 결정을 기록하는데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분석적 진술의 예로 AyerWittgenstein이 제시한 항진명제라든가 형식적 참formal truth등을 제시하지만, 이것들을 명확히 정의하지는 않는다.) 분석적으로 참인 진술의 부정문은 자체-모순이다self-contradictory. 반면 분석적이지 않은 진술이란 경험적인 사실의 문제empirical matters of fact와 관련되는 진술로서, “개연적probable이지만 확실하지는 않은not certain 가설hypothesis이다. -분석적 진술이 개연적인 이유는 차차 드러날 것이다.

모든 가설들이 부합해야 하는 검증원리는 한 진술이결정적으로 검증가능conclusively verifiable해야 한다고 규정하지는 않고, 다만 진술의 참이나 거짓을 결정하는 데에는 가능적인possible 감각-경험이 연관되어야 한다고 규정한다. 이는 다음과 같은 약한 검증weak veritication을 표방한다: 한 진술은 경험이 그것을 개연적이게 만들 수 있는 경우약하게 검증가능하다. 반면 AyerErnst Mach가 표방한 바와 같은 초기 실증주의를, 모든 경험적 가설이 결정적으로 검증가능해야 한다고 규정하는 강한strong 검증주의와 동일시하며, 이러한 형태의 검증주의는 거부한다.

검증원리와 필연성-선험성-분석성 개념들 간 동일시에 의거하여 Ayer는 모든 지식이 경험적이거나 선험적인 것 둘 중 하나에만 속한다고 주장한다. 후자는 단지 본성상 언어적linguistic in character”(57)인 것으로서, 이를 통해 그가 의미하는 바는 선험적 지식이 언어적 사실에 관장 주장이라는 게 아니라 선험적 주장의 참이 분석적인 것으로서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Ayer사실의 문제matters of fact에 관한 것도 아니고 관념들 간의 관계relation of ideas에 관한 것도 아닌 진술들을 불덩이 속에 던져버려야 한다고 주장한 Hume의 인식론에 다소 동의한다. 또한 Ayer-형이상학적anti-metaphysical 철학을 표방한다는 점에서 SchlickCarnap에 동의하는바, 왜냐하면 어떤 의미에서 형이상학은 인간 경험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 경험적 가설의 영역을 넘어서는 것, 언어의 뜻에 의해 검증될 수는 없는 것들에 관해 무언가를 주장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에 전통적으로 주장되어온 초월적인 신의 존재, 감각-경험이 실재하지 않는다는 가능성, 물질적 대상들에게서 지각되는 성질들의 기저에 있지만 그것 자체는 필연적으로 지각불가능한 실체substance에 대한 관념 등의 형이상학적 대상들은 거부된다. 그러한 대상들이 존재하지 않는바 그에 대한 형이상학적 주장이 거짓이기 때문에 거부되는 게 아니라, 그러한 대상들에 관해 말하고자 하는 문장들이 아무런 뜻도 지니지 못하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감각가능한sensible 세계가 실재에 반하는 현상appearance의 세계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은, 유의미성에 대한 우리의 기준에 따르면 문자 그대로 터무니없는 헛소리일 뿐이다.”(39)

그렇다면 Ayer가 제시하는 바의 유의미성 기준criterion of significance을 충족하는 모든 언어는, 분석적이지 않다면 왜 단지 개연적이기만 한 것인가? [즉 모든 -분석적 진술, 실재 내지 사실의 문제에 관해 말하는 진술들이 확실하지는 않고 다만 개연적일 뿐인 이유는 무엇인가? 과학적으로 입증된 진술들은 세계에 관해 확실한 것들을 말하지 않는가?] 이러한 놀라운 주장에 대해 Ayer는 두 단계에 걸쳐 설명한다.

첫 번째로, Ayer가 생각하기에 철학이란 언어에 대한 논리적 명료화logical clarification 작업에 지나지 않기에, [새로운 지식의 발견이라는 측면에서는] 자연과학natural science과 더불어 조금도 경쟁하지 않는다. Ayer는 귀납원리Principle of Induction에 대해 Hume과 동일한 입장을 취한다. 거칠게 말해 귀납원리란, 충분한 수의 FG인 것으로 관찰된다면 모든 FG일 개연성이 있다는 것으로서, Hume에 따르면 이러한 귀납원리 자체가 [논리적으로는 정당화되지 않는] 경험적 일반화에 불과하다. 분명 귀납원리는 분석적으로 참이 아니며, 귀납원리를 받아들이는 것이 오류일 수도 있다. 관찰된 사례의 수가 매우 많기에 모든 FG라는 것이 아무리 높은 정도로 뒷받침된다 하더라도, 경우에 따라서는 G가 아닌 F가 존재하는 것은 분명 가능하다. Hume이 말했듯이 내년에는 나무들이 겨울에 잎사귀를 틔울지 모른다”. 하지만 이러한 한계점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상식과 더불어 잘 입증된 최선의 과학은 귀납에 높은 신뢰도를 부여한다. 귀납원리에 대해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할 수는 없으며, 이는 곧 귀납원리를 절대적으로 확신할 수는 없더라도 그것을 믿는 일이    합리적rational이라는 단어에 대한 정의의 문제matter of definition로서    합리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귀납원리는 우주에서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진 지점에 대해 추론하는 것과 시간적으로 멀리 떨어진 시점에 대해 추론하는 것을 허용해준다. 즉 우리는 공간적으로 우리 근처에 있는 실재를 조사한 뒤 모든 실재가 동일한 법칙에 따를 것이라는 점에 근거하여 아직 관찰되지 않은 실재 역시 우리가 관찰한 바와 비슷할 것이라 추론하며, 현재 및 가까운 과거를 조사한 뒤 모든 시점이 동일한 법칙에 따를 것이라는 점에 근거하여 먼 과거와 미래 역시 현재와 비슷할 것이라 추론한다. [여기서, 아직 관찰되지 않은 모든 것들이 이미 관찰된 바와 동일한 법칙을 따를 것이라는 우리의 기대가 바로 귀납원리가 개입되는 지점이다.]

추가적으로, Ayer는 그 어떤 가설도 단독으로 검증되지는 않는다고 주장한다. 한 가설에 대한 입증confirmation은 언제나 다양한 여타 조건들, 예컨대 가설을 입증하는 데에 활용되는 실험장치의 작동방식이라든가, 계산에 활용되는 기초적인 기하학이나 일반적인 운동 법칙 등을 상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학적 주장의 입증에 대한 이러한 소위 전체론holism적인 관점은 프랑스의 과학철학자 Pierre Duhem(1867-1979)에 의해 처음 표명되었으며, 이후 QuineDuhem의 논제를 좀 더 다듬어, 한 과학적 진술을 시험test하는 데에 연루되는 것은 원리적으로 과학 전체(내지는 과학의 국소적인 부분이 아니라 거대한 부분)라고 주장하였다.

두 번째로, Ayer에 따르면 바로 지금 여기에서 관찰된 감각적 내용sensory content에 적용되는 진술이라 하더라도 절대적으로 수정 불가능incorrigible하다거나 절대적으로 확실하지 않다. 여기서 그의 주장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얌whiteness과 같은 하나의 감각sensation, 그 감각을 이것은 하얗다와 같이 기술하는 명제를 분명하게 구분해야 한다. Ayer는 감각 자체가 의심스럽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는 돌멩이가 의심스럽다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무의미한 말이기 때문이다. 돌멩이가 그러하듯이 감각 자체는 그냥 존재하는 것 혹은 그냥 발생하는 것이다. 반면 명제 내지 진술이 감각을 잘못 기술할mis-describe 가능성은 원리적으로 배제되지 않는다. 다른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우리는 하나의 감각을 무엇이라고 칭해야 하는지에 대해, 그것을 하얗다고 분류해야 할지 여부에 대해 실수할 수 있다.

따라서 그 어떤 경험적 주장도 절대적으로 확실하지는 않은 가설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 Ayer의 언어철학이 지닌 또 다른 면모와 그 위력을 추가적으로 살펴보자.

 

물질적 대상material object. Ayer는 근대 영국의 철학자이자 주교였던 George Berkeley (1685-1753)에게로 돌아가 그의 관념론idealism적 요소를 받아들인다. Berkeley의 관념론 논제에 따르면 탁자와 나무 등의 물질적 사물들로 이뤄진 것처럼 보이는 세계는 실제로는 정신 내의 관념들ideas in mind로만 구성되어있는바 실재는 정신적이다. 다만 AyerBerkeley의 관념론 전부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는 않고 그의 현상주의Phenomenalism를 받아들인다. 현상주의에 따르면 탁자나 나무 등의 실재는 탁자와 나무에 대한 감각가능한 경험sensible experience[즉 현상(現象)phenomenon]의 세계일 뿐이다. 예컨대 탁자는 감각가능한 개별자sensible particular들로 구성되어있으며, Ayer는 이를 감각 내용sense content이라 칭하였다. 하지만 Berkeley와 달리 Ayer는 감각-내용 자체는 내성introspection에 의해 드러나는 내적인 정신세계와 탁자나 나무 같은 외부 세계 그 어느 것에도 속하지 않는 중립적neutral인 것이라 생각하였다.

 내가 지각하고 있는 동안 탁자는, 좀 더 정확히 말해 탁자를 구성하는 부분들은, 감각-내용의 집합체로서 제시된다. 그럼 내가 (그리고 다른 아무도) 탁자를 지각하지 않을 때 탁자는 어떻게 될까? Berkeley는 내가 방을 떠나더라도 탁자는 여전히 다른 누군가에 의해 즉 신에 의해 지각되기에 여전히 존재한다고 가정하였다. 이에 비해 Ayer만약 내가 방에 돌아온다면 탁자를 지각할 것이라는 상식적인 믿음을 물질적 대상의 존재를 보증하는 원리로 상승시킨다. 잘 정립된 과학과 마찬가지로 상식은 그러한 믿음이 일반적으로 참임을 보증해준다. 따라서 탁자는, 그것을 구성하는 감각-내용이 발생하거나 혹은 특정 조건 하에서 발생할 수 있는 경우, 그리고 오직 그 경우에 존재한다.

 Ayer는 물질적 대상을 논리적 구성물[논리적으로 구성된 것]logical construction이라 칭하였다. 그리고 물질적 대상을 설명하기 위해 Russell의 맥락적 정의 즉 사용 내정의라는 방법을 차용한다(3, ‘한정 기술구 이론절 참조). 우선 그와 대비되는바 탁자에 대한 명시적 정의는, 임의의 감각 내용 A에 대해, ‘탁자 =df A’와 같은 식으로 주어진다. 하지만 탁자 자체가 감각내용과 동일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러한 명시적 정의는 거부된다. 감각 내용은 그것이 지각되는 찰나에만 존재하며 아무도 그것을 지각하지 않을 때는 존재하지 않는다. 반면 맥락적 정의는 한 용어를 포함하고 있는 임의의 문장 전체를 그것을 포함하지 않는 문장으로 번역하는 규칙을 제공한다. 그래서 탁자에 대한 맥락적 정의는 탁자는 인 경우 그리고 오직 그 경우에 G하다the table is G iff 와 같은 식으로 주어진다. 여기서 ‘G’의 자리는 책들로 뒤덮여있다내 방에 있다등의 술어로 채워지며, ‘로 표시된 공란은 당면 목적상 필요한 가정적인hypothetical 감각-내용을 기술하는 임의의 복합적인 기술구로 채워진다. 구체적인 예시를 들자면 내가 탁자를 바라본다면, 나는 여차저차한such-and-such 감각 내용을 경험할 것이다와 같은 식이 될 것이다.13)


13) (原註) 이러한 정의에 뭔가 문제가 있다고 여겨진다면 탐구문제 4를 참조할 것.

     

타인의 마음other mind. 만약 우리가 각자의 감각-내용에 대한 지식만을 갖고 있다면, 다른 사람의 감각-내용에 대해서는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타인의 감각-내용에 대한 인식이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다면 다른 사람 역시 나와 같은 의식적인conscious 존재라는 것, 나의 마음 이외의 다른 마음이 존재한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이 문제에 대해 AyerMill의 소위 유비에 의한 논증argument by analogy을 거부한다. 그 논증에 따르면 나의 신체와 타인의 신체에는 감지될 수 있는 유사성perceptible resemblance이 있으며, 이러한 유사성은내가 직접 관찰할 수는 없는 경험을 소유한 타인의 존재에 대한 믿음을 정당화한다justify.”(129) Ayer가 이 논증을 거부하는 강력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그 어떤 논증도 검증불가능한unverifiable 가설을 개연적인 것으로 만들 수는 없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그 어떤 관찰이든 타인의 마음의 존재에 대한 가설을 여하한 긍정적인 정도로도 뒷받침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타인의 마음에 대한 주장은 형이상학적인 것으로서 원리상 검증불가능한 성격의 것이다.]

 이에 Mill의 논증 대신 Ayer는 다음과 같이 마음에 대한 행동주의behaviourism적 관점을 취한다: 타인의 마음은 타인의 신체가 취하는 행동behaviour의 측면에서 (맥락적으로) 정의된다(그리고 타인의 신체는 특정한 물질적 대상으로서, 앞서 살펴본바 탁자에 대한 정의와 같이 현상주의적인 방식으로 정의된다). 물질적 대상의 존재와 타인의 마음의 존재 모두 일련의 적절한 감각-내용”(130)의 현실적인 혹은 가정적인 발생에 의해 동일한 방식으로 검증된다. 물론 이런 식의 정의는 매우 복잡할 것이다. 어쨌든 Ayer에 따르면 한 대상이 모든 측면에서 의식적인 것처럼 행동한다면 그것은 의식적이다. 그리고 Ayer이는 분석적인 명제”(130)라고 확언한다. 이러한 관점이 [직관적으로 생각하기에는 하나뿐인 것처럼 여겨지는] 의식적임consciousness이라는 개념을 1인칭적인 것과 3인칭적인 것으로 나누는 다소 기이한 이분법을 함축한다는 비판이 제기될 수 있겠지만, Ayer는 이에 개의치 않는다. 타인의 마음에 대한 행동주의적 정의 이외의 유일한 대안으로서는 형이상학적인것밖에 남지 않[으며 이는 결코 만족스런 선택지일 수 없]기 때문이다. “철학자는 과학적 절차에 의해 밝혀진 사실을 단지 명확하게 기술하는 데에 만족해야 한다. 만일 철학자가 과학적 사실을 [과학적으로 밝혀진 바 이상으로] 정당화justify하고자 한다면 자신이 논리적인spurious 문제에 연루되고 있음을 이내 알아차릴 것이다.”(98)

 

가치에 대한 진술statement of value. 가치에 대한 진술들에는 윤리학미학종교의 진술들이 포함된다. 윤리적 논의 및 이론에서 핵심적인 윤리적 진술들 일부는 ‘x는 최상의 행복을 야기한다등과 같이 외견상 사실적인[사실에 관한]facual 진술들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x는 좋다/나쁘다등과 같은 여타 진술들은 분명 가치에 관해 무언가를 말한다. 이러한 진술들은 그 참을 결정하는 데에 상상가능한 그 어떤 관찰도 적절하지 않다는 점에서 사실적이지 않은 진술이다. 그렇다고 가치에 관한 진술들이 분석적인 것도 아니다. 가치에 관한 언어는 적절한 명제를 표현하는 게 아니라 감정을 표현하는express emotion 기능을 갖는다. 그래서 가치진술을 이런 식으로 보는 관점은 정서주의emotivism라 불린다. 예를 들어 당신은 그 돈을 부당하게 갈취하였다는 윤리적 진술이 지닌 사실적 내용은 기실 당신은 그 돈을 취하였다일 뿐이다. 전자를 발화하는 사람은 그 말을 함으로써 그 돈을 취한 사건에 대한 자신의도덕적 반감이나 못마땅함을 단지 분명하게 피력하고 있을 뿐이다”(107).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감정을 표현하는 것과 감정을 지니고 있음을 진술하는 것 간의 구분이다. 나는 내가 느끼는 지루함을 표현하지 않은 채 그것을 말로 진술할 수도 있으며, 반면 그러한 말 없이 하품을 함으로써 나의 지루함을 표현할 수도 있다. 물론 늘어지는 어조로 아오 지루해 죽겠네하고 말함으로써, 나의 지루함을 표현하는 동시에 말할 수도 있다. 돈 갈취 사례의 경우 당신은 그 돈을 부당하게 갈취하였다고 말한 화자는, 자신이 도덕적으로 반감을 느끼는 상태에 있음을 진술하는 게 아니라 표현하고 있는 셈이다.

 의견충돌이 발생하는 대부분의 경우 그 충돌은 합리적인 논증을 통해 합의에 이를 수 있다(물론 그러한 합의가 일반적으로 그렇게 자주 일어나지는 않지만 말이다). 예컨대 절도는 대기업의 횡포에 저항하는 수단이 될 수 있으므로 나쁜 행위가 아니라 생각하는 사람은, 모든 점주가 대기업을 대표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됨으로써 생각을 바꾸도록 설득될 수 있다. 하지만 이와 다른 경우에는 명명백백한 사실에 호소한다고 해서 의견대립이 그리 쉽게 해소되지는 않는다. 그 경우 어느 편 의견이 옳으냐 묻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런 식의 의견대립이란 기실 논증에 의한 토론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서로 치고박는 싸움인 셈이다.

 

검증원리는 젊은 시절 Ayer의 철학의 기초를 이루는 것이었다. 그는 검증원리를 급진적 경험주의와 동일시하였다. 자연과학과 협업하는 언어철학 및 논리적 분석은 그의 철학의 근본 기조를 꼴짓는 핵심 표어였다. “철학은 x란 무엇인가 혹은x의 본성은 무엇인가와 같이 외견상 사실에 관한 물음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물음들로 가득하다. 그러한 물음들은 모두 맥락적인정의를 요하고 있을 뿐이다.”(59) “‘x의 본성이라는 어구는 ‘“x”라는 기호의 사용으로 대체된다.”(39)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문법의 속임수에 넘어가는 꼴이다.”(45) 이러한 관점은 Carnap이 제시한 실질화법material mode of speech형식화법formal mode of speech의 구분, 즉 기호를 사용하는 것과 기호를 언급하는 것 간의 구분과 유사하다. 진지하고 심오해 보이는 대부분의 철학적 문제들은 기실 두 화법 중 하나를 사용해야 할 곳에서 다른 것을 부적절하게 오용했기 때문에 빚어지는 착종에 불과하다.

 

[마지막으로 Ayer의 철학에 가해질 수 있는 비판 몇 가지를 살펴보자.] 실재를 특정 감각-내용과 동일시하는 Ayer의 인식론적 관점을 철저히 고수하자면 현대의 자연과학이 밝혀낸 많은 이론적 사실들이 거부될 위험에 처한다. 예컨대 쿼크처럼 우리의 직접적인 감각 능력의 범위를 벗어나는 대상이나 혹은 빅뱅처럼 원리상 우리가 지각할 수 없는 사건들을 과연 실재의 부분으로서 받아들여야 하는지 의문스러워지기 때문이다. Ayer는 현대에 이룩된 자연과학의 성과를 거부하고자 하지는 않기 때문에, 이 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소위 이론적 대상(이론상의 실체)theoretical object에 대해] 모종의 도구주의instrumentalism내지 허구주의fictionalism를 수용해야 할 듯하다. 이에 따르면 이론적 실체들은 감각가능하지 않기에 비록 경험적으로 실재하는empirically real 것으로서는 인정되지 않지만, 그것이 지니는 설명적 가치로 인해 우리가 받아들이는 과학적 그림의 일부로서는 인정되는바 비교적 낮은 지위의 존재를 부여받는다. 도구주의적 관점은 작금의 과학철학 논의에서도 지지되고 있으며 대표적인 인물로 Bas Van Frassen을 들 수 있다.

Ayer의 철학이 직면다는 또 다른 두 가지 중요한 문제는 소위 Frege-Geach 문제와 검증원리 자체의 지위에 관한 문제가 있다.

먼저 Frege-Geach 문제란 가치에 대한 정서주의와 연관되는 문제이다. 다음 논증을 보자: 절도가 나쁜 짓이라면 나는 내 모자를 먹을 것이다. 절도는 나쁘다. 따라서 나는 내 모자를 먹을 것이다. 그 누구든 이 논증을 이해할 것이며, 절도가 나쁜지 여부에 대해 특정 관점이나 태도를 취한다거나 특정 감정을 갖고 있지 않더라도 이 논증이 타당함을 받아들일 것이다. 하지만 그 경우 절도는 나쁘다는 문장이 단지 도덕적 반감을 표현하는 기능만을 수행한다고 할 수는 없다. 그 문장을 이해하기 위해 그러한 감정이 반드시 표현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뿐만 아니라 표준적인 논리학적 관점에 따르면 타당한 논증 형식이란 전제들이 일 경우 결론도 반드시 인 형식이다. 그런데 참이라는 속성을 지닐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명제이므로, 이 논증에서 절도는 나쁘다가 단지 감정을 표현하는 데에 그치는 것일 수는 없다. 달리 말해 그 문장 역시 진리치가 평가될 수 있는truth-evaluable 무언가를 의미해야만 한다. 즉 명제를 표현해야만 하는 것이다.14)


14) 제시된 논증을, 단순한 감정표현 기능을 갖는 문장이 전제로 나타나는 다음 논증과 비교해보라: 아오 젠장할이라면 나는 내 모자를 먹을 것이다. 아오 젠장할! 따라서 나는 내 모자를 먹을 것이다. 아무도 이것이 적절하고 유의미한 논증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첫 번째 전제의 전건과 두 번째 전제가 논증에 사용될 수 없는 무의미한 문장, 정확히 말해 진리치가 평가될 수 있는 적절한 명제를 표현하지 않는 문장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첫 번째 전제는 적형식도 아니다. 따라서 이 논증이 부적절한 것으로 거부된다면 형식상 이와 동일한 본문의 논증 역시 거부되어야 한다. 하지만 직관적으로 우리는 후자가 비록 그 내용상 기이하게 여겨지긴 하더라도 어쨌든 논증으로서는 형식상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렇듯 가치에 관한 진술 내지 문장을 감정표현 기능만을 갖는 것으로 간주하는 정서주의는, 감정을 표현하는 언어표현들이 논증에 사용되었을 때 그 종류에 따라 이러한 비대칭성이 발생하는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이 Frege-Geach 문제의 골자이다.


다음으로 검증원리 자체의 지위에 관한 문제는 매우 단순하면서도 포괄적이다. 여타 진술들과 마찬가지로 검증원리를 기술하는 진술 그 자체 역시 검증가능하거나 아니면 선험적이거나 둘 중 하나여야 한다. 전자라면 검증원리를 입증 및 반증disconfirm하는 관찰사례들이 각각 명시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도대체 어떠한 종류의 경험적 관찰이 검증원리를 입증하거나 반증할 수 있는지 불분명할 뿐더러, 설사 그것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이는 순환적인 것처럼 여겨진다. 뱀이 꼬리를 물고 있는 형국과도 같이 검증원리의 검증이 그 자체에 의해 이뤄지는 셈이다. 이번엔 검증원리 자체가 선험적이라 가정해보자. 그러면 검증원리 자체가 검증되어야 한다는 요구는 일단 면하게 된다. 하지만 검증원리를 기술하는 문장은 분명 모든 개는 -개가 아니다와 같이 항진명제 내지는 논리적 참의 형식을 지니고 있지도 않으며, ‘모든 총각은 미혼이다와 같이 분석적 진술의 형식을 지니고 있지도 않다. [검증원리에 나타나는 어휘들을 아무리 동의어들로 대체하더라도 논리적으로 참인 진술로 변환되지 않는다(緖論, ‘8개의 예비사항절에서 ‘8. 분석-종합 구분항목 참조).] 요컨대 검증원리는 [공허하거나 형식적이지만은 않은바] 언어와 세계 간 관계에 대해 무언가 실질적인substantive 사항을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이에 혹여 검증원리가 선험적이지만 분석적이지는 않은 진술, 선험적 종합진술이라 한다면 이는 Ayer 철학의 기본 토대와 배치된다.] 선험적 종합진술이란 없다는 것, 즉 선험적이되 항진명제도 아니고 논리적 참도 아니고 분석적이지도 않은 진술이란 없다는 것이 Ayer 이론의 골자이다. [그러므로 검증원리가 세계에 관한 사실적인 진술 즉 종합진술이라면 선험적일 수는 없으며, 따라서 검증가능해야 한다. 검증원리 자체가 검증불가능함은 앞서 밝혀졌다. 결국 검증원리는 검증가능하지도 않고 선험적이지도 않은 셈이다. 그리고 Ayer의 이론에 따르면 그러한 진술은 그저 무의미한 진술일 뿐이다. 이러한 결론이 도출되는 과정을 논증으로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1

검증원리가 유의미하다면 검증원리는 검증가능하거나 선험적이다.

Ayer의 이론

2

그런데 검증원리 자체는 검증가능하지 않다.

일반원리에 의해

3

따라서 검증원리는 선험적이다.

1, 2, 선언지 제거

4

검증원리가 선험적이라면 검증원리는 분석적이다.

Ayer의 이론

5

그런데 검증원리는 분석적이지 않다.

분석적의 정의해 의해

6

따라서 검증원리는 선험적이지 않다.

4, 5, 후건부정

7

검증원리는 검증가능하지도 않고 선험적이지도 않다.

 

3, 6, 연언도입

8

따라서 검증원리는 무의미하다.

 

1, 7, 후건부정

 

 

검증주의 : Carnap의 논리경험주의

 

Ayer의 저작은 시기적으로도 철학적으로도 Carnap의 저작과 상당히 겹친다. Carnap1891년생으로서 1910년생인 Ayer보다 나이가 많았으며, Carnap세계의 논리적 구조The Logical Structure of the World/Der Logische Aufbau der Welt1928년에 출간(1967년에 英譯)된 반면 Ayer언어, 논리, 진리1936년에 출간되었다. Carnap과학의 통일성The Unity of Science언어의 논리적 구문론The Logical Syntax of Language/Logische Syntax der Sprache1934년에 출간(후자는 1937년에 英譯)되었고, 이보다 긴 시험가능성과 의미Testability and Meaning1936년에 출간되었다. (이외에도 경험주의, 의미론, 존재론Empiricism, Semantics, Ontology(1950) 역시 우리에게 중요한 저서이다. 다른 에서는 의미론 서설Introduction to Semantics(1942) 의미와 필연성Meaning and Necessity(1947)도 잠시 살펴볼 기회가 있을 것이다.) Carnap은 분명 Ayer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Carnap은 소위 비엔나 학단Vienna Circle의 창립 멤버 중 하나였으며 Ayer는 그의 나이 스물두 살이던 1933년에 이 모임을 방문한 바 있다. (비엔나 학단은 앞서도 언급된 Morris Schlick을 위시하여, Herbert Feigl, Phillip Frank, Hans Hahn, Carl Gustav Hempel. Otto Neurath, Frederich Waismann 등 당시 유럽 학계에서 기라성 같았던 인물들로 구성된 어마어마한 집단이었다.) [이렇듯 두 인물의 겹치는 부분이 많긴 하지만,] 이번 절에서는 Ayer의 이론과 차별되는 Carnap 이론만의 핵심적인 측면을 부각시키기 위해, 두 인물의 철학 간 주요 차이점에 주로 주목하고자 한다. Carnap의 관점은 시기에 따라 복잡한 양상으로 변모 및 발전하였기에 Carnap이 전개한 언어철학의 전모를 속속들이 살펴보지는 않고, 다만 이번 장의 주제인 검증주의와 연관되는 측면들에만 초점을 맞출 것이다.

 

Ayer가 자연과학에 대한 존중과 형이상학에 대한 적대감을 비엔나 학단 및 Carnap으로부터 배운 게 아니라면, 그가 비엔나에 머무르는 동안 확고해진 두 경향은 Hume에게서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Carnap논리적 구문론의 서문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철학은 과학에 대한 논리학logic of science으로 대체될 것이다. 즉 과학에 대한 과학으로서, 과학의 개념 및 문장에 대한 논리적 분석으로 대체될 것이다. 과학에 대한 논리학이란 과학언어의 논리적 구문론에 대한 분석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Carnap, 1936, )

 

Carnap은 이러한 -형이상학적 관점을 다름 아닌 독일의 철학자 Martin Heidegger에게 적용하여 그가 구사하는 대부분의 문장들이 심각한 종류의 무의미한 문장들임을 보이고자 한다. 가령 Heidegger의 다음 문장을 보라:

 

탐구되어야 할 것은 오직 존재being일 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nothing. 단지 존재일 뿐 그 이상은 아무것도 아니다. 오로지 존재일 뿐 그것을 넘어서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이러한 the Nothing/: Das Nichits15)란 어떠한가? 16)는 단지 아님Not 즉 부정Negation이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하는가? 아니면 그 으로, 부정과 아님이 오로지 가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하는가? 우리는 다음과 같이 단언한다: 는 아님과 부정에 앞선다[보다 근원적이다]is prior to. 를 과연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를 어떻게 찾아내야 하는가? 우리는 를 이미 알고 있다. 불안anxiety/die Angst를 드러낸다reveal. 그것에 대해 우리가 불안해하고 그것 때문에 우리가 불안해하던 그것은 본래아무것도 아닌 것nothing이었다.17) 참으로 는 그 자체로 이미 드러나 있었다. 그렇다면 [다시 원래의 질문으로 돌아오자면] 는 어떠한가? 는 스스로 無化한다The Nothing itself nothnings/Das Nichts selbst nichtet.18)19)

(Carnap, [형이상학의 제거The Elimination of Metaphysics,] 1936, 69쪽에서 인용.)

 

15) 독일어 단어 ‘nichts’의 첫 철자를 대문자로 표기하여 名詞化Heidegger의 조어.

16) ‘Wie steht es um Dieses Nichts?’. 는 말 그대로 아무것도 아닌 것이기 때문에 란 무엇인가Was ist?’라 물을 수 없어 이런 식으로 물은 것이다.

* “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한 첫걸음부터가 이미 예사롭지 않다. 이 물음에서 우리는 애초부터 를 여차여차하게 있는 무엇으로서, 곧 존재자로서 간주하게 된다. 하지만 는 이러한 것과는 아주 다르다. 에 대한 물음, 란 무엇이며 어떻게 있는가라는 물음은, 물어지는 것을 본디의 그것과는 반대되는 것으로 바꿔버린다. 이 물음은 물어지는 대상을 그 자체로부터 빼앗아 버린다.” (Martin Heidegger,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Was ist Metaphysik?(1929), 최동희 , 삼성출판사, 1982, 75, 번역 일부 수정.)

17) Heidegger의 현존재(現存在)Dasein에 대한 실존론적 분석에 따르면, 현존재 즉 인간이 처하는 근본기분으로서의 불안은 공포와 달리 특정 대상에 대해 느끼는 기분이 아니다. 세계와 사물의 적나라한 존재 자체를 마주하여 그것들이 평소 지니고 있던 일상적인 의미가 탈색되고 그것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었음을 알게 될 때, 막연하게 섬뜩하다고 느끼는 기분이 바로 불안이다. 존재 일반의 일상적 의미가 미끄러져 달아나 버리는 이러한 사태가, 인용문의 마지막에 말해지는바 는 스스로 無化한다는 말의 의미이다. 無化작용은 존재자들에게 결부되었던 일상적 의미를 몰아냄으로써 모든 것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바꿔버리는 동시에, 그러한 일상적 의미를 탈각시킴으로써 외려 적나라하고 규정할 수 없는 존재 그 자체를 열어젖힌다.

* “불안은 공포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공포는 항상 어떤 일정한 무엇에 대한 공포이다. 그러나 불안은 이것 혹은 저것 때문에 느끼는 불안이 아니다. 불안 속에서 우리는 뭔가 꺼림칙하다[섬뜩하다]’고 말한다. 무엇이 사람에게 꺼림칙한지 뚜렷이 말할 수는 없다. 그저 전체적으로 사람에게 꺼림칙하다. [불안 속에서] 사물들은 밀려감으로써 도리어 우리에게 엄습해온다. 미끄러져 달아나는 전체로서의 존재자를 이와 같이 전체적으로 거부하며 지시하는 것이 의 본질 즉 無化작용Nichtung이다. 이는 존재자를 없애는 것도 아니고, 부정에서 유래하는 것도 아니다. 無化작용은 없앰이나 부정과 결부시켜 생각할 수 없다. 는 스스로 無化한다.” (M. Heidegger, 같은 책, 79-81.)

18) ‘nichts’動詞化Heidegger의 조어.

19) M. Heidegger, 같은 책, 74-81쪽에서 번역 참조.


CarnapHeidegger아무 것도 아님nothing이라는 용어를 특정 실체의 이름인 것처럼 오용하고 있다고 지적한다(Ayer언어, 논리, 진리44-5절에서 이러한 지적이 온당하다고 논평한다). FregeRussell의 양화논리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아무 것도 아님은 단칭용어가 아니라 모든 것everything과 같은 양화사라고 말할 것이다. [Heidegger가 하듯이] 탐구될 수 있는 본성을 지닌 특정 대상을 지시하는 표현이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Heidegger가 묻고자 하였던 형태의 문장들은 형이상학적이어서 검증불가능한 사이비-문장pseudo-sentence조차도 못되는 헛소리일 뿐이다. 논리적으로 올바르게 정립된logically well-behaved 언어에서는 그러한 문장이 구성될 수조차 없다.” (70)

구조가 목표하는 언어란 모든 무정의undefined 용어 내지 원초primituve 용어, 즉 논리상항(常項)logicla constant 이외의 모든 -논리적 표현non-logical expression들이 직접적으로 경험에 적용되는 언어이다. 따라서 직접적으로 경험을 기록하는 문장이 아닌 문장들은 다음 둘 중 하나에 속한다: (a) 정의에 의해 직접적으로 경험을 기술하는 문장으로 환원 가능한 문장, (b) 분석적 문장, 즉 오로지 논리적 규칙 및 (직접적이고 맥락적인) 정의에 의해서 참임이 증명 가능한 문장. 이것이 Carnap현상론적 환원주의Phenomenological Reductionism의 개요이다. 이 관점이 제시하는 이상적인 모델의 언어에서, 모든 유의미한 진술은 분석적인 것이거나, 그렇지 않다면 경험을 직접 기술하는 기초 어휘들로 구성된 (복합적일 수 있는) 진술로 원리상 환원 가능하다. 이에 Carnap은 이러한 관점을 논리경험주의Logical Empiricism라 명명하였다.

CarnapAyer에 비해 훨씬 엄밀하고 세심한 철학자이다(그는 Frege의 수리논리학을 수강한 몇 안되는 인물들 중 하나이다). 철학적 여정의 초기에는 주로 논리학 분야에서 작업하였으며 후기에는 확률론probability theory과 귀납원리에 관해 저술하였다. CarnapAyer가 철학적으로 유사했던 시기에 둘 사이에서 식별되는 가장 흥미로운 차이점은, Ayer가 자신의 철학을 언어 일반에 대해 참이라 생각한 반면 Carnap은 그렇지 않았다는 점이다. 앞서 우리는 Ayer의 검증원리가 그 원리 자체에 적용되었을 때 발생하는 문제점을 살펴보았다. [Ayer의 생각대로 검증원리가 모든 언어에 대한 일반적 진리라면 이 문제는 불가피하다.] 이 문제를 피하기 위해 CarnapAyer와 다른 노선을 취한다. 그는 검증 개념에 대해서는 Ayer와 유사한 관점을 견지하긴 하되, 검증원리의 지배를 받는 형식언어formal language[언어에 대한 일반모델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언어적 제안linguistic proposal으로 간주한다. Carnap(잠시 동안은) 이것이 받아들일 만한 제안이라고 생각하였지만, 검증원리에 위배되는 언어가 (무엇을 의미하든) 전적으로 인지적 의미를 결여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설사 검증원리에 부합하지 않는 언어라 하더라도,] 대안으로서 제안되는 언어에 대한 적절한 메타언어meta-language”, 즉 그 언어를 대상언어object-language로 삼아 대상언어가 구현하는 표현들에 관해 말하는 상위-언어가 정립될 수 있기만 하다면, 그 어떤 언어이든 자유롭게 탐구될 수 있다. 이러한 완화된 조건마저도 충족하지 못하는 언어는 형이상학적인 것으로서 거부된다. 이에 따라 Carnap은 다음과 같은 원칙을 제시한다:

 

관용의 원칙Principle of Tolerance: 최대한의 정밀성을 갖춘 이론적 주장을 개진하고자 한다면, 그 이론에 사용된 언어의 구문론을 명시하고 그 언어에서 분석적으로 참인 문장을 결정하는 규칙 및 추론관계에 관한 규칙을 명시하여야 한다. 하지만 하나의 언어를 선택하는 데 대해 이론적인 근거에서 비판할 수는 없다. [다르게 말하면 하나의 언어를 선택하는 것이 이론적으로 정당화될 수도 없다.]


따라서, 구조에서 Carnap은 기초용어들이 감각경험에 적용되는 언어를 제시하긴 하지만, 이는 그러한 언어만이 과학의 토대 역할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언어라는 생각에 이론적으로 개입하고 있는 것은 아님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Carnap은 이러한 태도원칙을 대부분의 철학적 문제들로 확대하여 적용한다. 이에 그는 관용의 원칙에 따른 두 가지 부수적인 귀결을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규약(規約)으로서의 논리학logic as convention. FregeRussell 모두 논리학 자체에 관해 혹은 논리적 진리의 본성에 관해 설득력 있는 설명을 제시하지는 못하였다. Wittgenstein(그리고 아마도 Ayer)는 이에 대한 나름대로의 답을 갖고 있었지만, Carnap은 그 중심에 붙박여 있는 형언불가능성(말해질 수 없음)ineffability이라는 처치곤란한 요소로 인해 Wittgenstein의 해답을 거부한다. Carnap의 답은 단순하면서도 급진적이다. 논리적 진리라는 개념 및 무엇에서 무엇이 따라나온다follow는 개념[즉 논리학에서의 귀결(歸結)concequence 개념]은 단순히 언어의 규칙(規則)rule일 뿐이다. 하나의 언어를 말한다는 것은 그 언어를 지배하는 논리적 규칙에 종속된다는 것과 같다. 예컨대 총각미혼 남성과 상호대체 가능하다는 규칙이라든가, P이면 Q이다와 P를 받아들일 경우 Q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규칙 등을 준수하는 것이 곧 언어를 사용하는 것인 셈이다. 논리학에 대한 물음은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언어의 규칙에 대한 물음이며, 그러한 사안은 Carnap이 말하는 뜻에서 모두 분석적인 것들이다. 무엇이 분석적인 것인가 하는 물음은 규약 내지 약정stipulation에 관한 문제이다. 우리는 목표하는 바에 따라 원하는 것이면 그 어떤 언어든지 선택할 수 있다. , 우리가 어떤 언어를 택하든, 그럼으로써 우리는 곧 그 언어를 지배하는 규칙들의 한 집합을 선택하는 셈이며, 그럼으로써 곧 하나의 논리학을 택하는 셈이다. 뿐만 아니라 모든 인지적 활동, 즉 이론적으로 유의미한 사고 활동은 언어를 통해서 이뤄져야만 한다. 따라서 모든 이론은 한 언어를 지배하는 규약들의 집합을 전제하고 있으며, 따라서 어떠한 추론의 연쇄가 타당한지를 결정하는 하나의 논리를 전제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의 언어를 택하는 것이 이론적으로 정당화될 수는 없다. 언어의 선택은 인지적인 사안이 아니라 실천적인practical 사안이다. 그렇다면 하나의 표상체계[즉 하나의 언어]system of representaion를 다른 표상체계로써 설명하는 것이 가능한 이유는 오로지 양 체계가 동일한 논리적 형식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며, 그 논리적 형식 자체는 [그 어떤 표상체계로도] 설명될 수 없다는 Wittgenstein의 주장은 어떻게 되는가? Carnap은 그런 식으로 설명의 영역을 벗어나는 것이란 없다고 단언한다. 각 표상체계들이 공유하는 논리적 형식 역시 메타언어로 진술될 수 있기 때문이다. 원리적으로 형언 불가능한ineffable in principle 것에 대한 주장은 분석적이지도 않고 검증될 수도 없는 무언가에 대한 형이상학적 주장으로서 일축될 뿐이다.

 

내적(內的) 물음과 외적(外的) 물음internal question and external question. 언어와 관련된 원칙인 관용의 원칙은, 주어진 한 이론이 어떤 실체에 개입(介入)commit to하고 있는지에 관해 묻는 존재론(存在論)ontology의 영역으로까지 확장된다. 예를 들어, 우리는 ‘1215 사이에는 소수(素數)prime number가 존재하는가?’, ‘창밖에 라일락이 피었나?’와 같은 존재적 물음existential question을 물을 수 있다. 하지만 이와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여 란 존재하는가?’, ‘물리적 대상physical object이란 존재하는가?’와 같이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 이런 식의 물음은 Carnap이 칭한바 내적 물음이나 외적 물음 둘 중 하나에 속할 것이다. 전자의 경우라면 답변은 그 물음이 속한 언어 자체에 관한 분석적 진술의 측면에서 제시될 수밖에 없으며, 이는 사실적인 내용을 지니지 않는바 사소하게 긍정적인trivially affirmative 답변일 뿐이다. 후자의 경우라면 답변은 수학적 언어라든가 물리학적 언어를 채택하는 데 대한 실용성(實用性)practticality의 측면에서 제시될 것이다. [요컨대 실체의 존재 여부를 묻는바 외견상 세계에 관한 물음인 것처럼 보이는 존재론적 물음은, 한 언어 내에서 특정 어휘가 쓰이는지 여부에 관해 묻는 내적 물음이든가, 아니면 특정 학문분야의 언어체계를 받아들일지 여부에 관해 묻는 외적 물음으로서, 본디는 세계가 아닌 언어에 관한 물음이라는 것이다.] 실질적인 사안에 관한 이론적인 물음들은 전부 내적 물음이다. 반면 자체라든가 물리적 대상 자체와 같이 무엇이 궁극적으로 존재하는지에 관해 묻는 전통적인 존재론은, [언어에 관해서가 아니라 세계에 관해 묻는 사실적인 물음으로 의도된바 내적/외적 물음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면,] Carnap이 보기에 사이비-학문pseudo-science일 뿐이다.

 

 

비엔나 학단과 프로토콜 논쟁.

 

논리실증주의 내지 논리경험주의는 추상적인 사조로서보다는 구체적인 역사적 운동movement으로서 묘사되곤 한다. 논리실증주의는 비엔나 학단이 모임을 가졌던 동명의 도시 비엔나에서 태동한 뒤 1929년에서 1935년까지 절정을 이루었다. 이 운동의 선구자격 인물들이라 할 수 있는 프랑스 철학자 Aguste Comte라든가 앞서 언급된 E. Mach 등은 이른바 실증주의(實證主義)Positivism형태의 철학을 옹호하였으며, 논리원자론을 정립 및 발전시키던 시기의 Russell은 논리실증주의가 표방한 핵심 착상들과 유사한 사유를 전개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실증주의neo-positivism로서의 본격적인 논리실증주의는 Wittgenstein1922년 저서 논고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비엔나 학단의 발흥에 이르러서야 고유한 철학적 운동으로 대두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앞서 우리는 이 운동에 속했던 AyerCarnap의 철학을 일부 논의하였으며, 비엔나 학단의 핵심 구성원이었던 M. Schlick, H. Feigl, P. Frank, C. G. Hempel, H. Hahn, F. Waismann, O. Neurath등이 언급된 바 있다. 전술하였듯 Ayer1933년에 비엔나 학단을 방문하였으며, 수 주간 프라하에 머물면서 Carnap에게 수학하고 그와 논쟁하면서 중대한 시기를 보내던 Quine 역시 같은 해에 비엔나 학단을 방문하였다(Quine의 철학에 대해서는 10장에서 살펴볼 것이다). 역사는 흘러 나치가 출범하고 오스트리아 합병이 이뤄짐에 따라 모임의 핵심 구성원들이 타국으로 망명하게 되면서 비엔나 학단은 1930년대 중반 즈음 사실상 해체되기에 이른다. Carnap을 포함한 많은 인물들이 미국으로 망명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논리실증주의 운동은 오스트리아와 유럽을 넘어 더욱 국제적인 철학적 사조로 발전하였다.

보통 논리실증주의는 철학에서의 모더니즘으로 여겨지고는 한다. Arnold Schönberg, Gustav Klimt, Alfred Loos 등 모더니즘 예술가들이 활동했던 도시를 중심으로 발흥하였다는 사실에 걸맞게, 논리실증주의는 종종 철학에서의 모더니즘적 운동으로 묘사된다. 비엔나 학단이 1929년 에 발표한 선언문은 현대 경험주의가 표방하는 근본 논제의 핵심은 종합적-분석적이면서 선험적인 지식의 가능성에 대한 부정이다라고 말한다. 특히 현대 경험주의는 (a) ‘형이상학을 인지적으로 무의미한cognitively meaningless 것으로서 제거하고자 하였으며, (b) 인식론 내지 지식론 분야에서는 모든 과학(학문)이 논리적으로 경험에 토대를 두고 있음을 보이고자 하였다. 물론 두 목표는 D. Hume의 철학에 따라 설정된 것이지만, 이 목표의 달성을 구체적으로 가능케 한 요인은 FregeRussell 등이 발전시킨 새로운 논리학이었다.

논리실증주의자들 모두는 다음과 같은 특정 도식이 경험과학의 정의특성defining feature이라는 데에 동의하였다: 하나의 이론은 ‘O1이라면 O2이다if O1 then O2형식의 진술들을 함축하는imply 이론적 진술들theoretical statements의 집합으로 구성되는바, 여기서 O1은 관찰적observational 혹은 실험적 환경experimental circumstance에 대한 진술(: ‘물체에 열이 가해진다’)이고 O2는 관찰가능한 결과observable result에 대한 진술(: ‘그 물체는 팽창한다’)이다. 그리고 O1O2에 의해 나타내어지는 경험적experiential 혹은 관찰적 토대observational foundation는 어떤 방식으로든 감각sense과 연계되어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 기초적인 진술basic statement이 세부적으로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지, 즉 그 진술의 정확한 형식과 내용은 무엇이며 과학이론 내의 여타 진술들이 이러한 기초진술들에 토대를 두고 있다are based upon는 말이 정확히 어떠한 의미인지 등에 대해 논리실증주의자들은 각기 현저히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소위 프로토콜(기초진술) 논쟁Protocol Debate와 관련하여 여기서는 Carnap, Neurath, Schlick이 각각 제시한 관점 세 가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Carnap. 프로토콜 진술에 대한 형식적인 개념은 과학에서 통상 사용되는바 경험적 관찰을 공식적으로 기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Carnap1931년의 글을 발전시킨 저서 과학의 통일성(1934)에서는 프로토콜 진술에 대한 바람직한 정의가 무엇인지 하는 문제에 비교적 덜 개입하는 자세를 취하였다. 하지만 1928년의 구조에서는 이러한 기초적 기록이라는 것을 하나의 감각적 상태 전체whole of one sensory state(Gestalt)에 대한 기록으로 간주하였으며, [이러한 덩어리로서의 감각적 상태를 분석하기 위해] 정교한 집합-이론적 수단을 활용하여 예컨대 노란색이 발생한다과 같이 감각질(感覺質)sensory quality을 가리키는 용어들을 유사성에 대한 상기(想起)recollection of similarity라는 술어를 사용해 정의하였다.

매우 대담하고 독보적이긴 하지만 여기서 이 이론을 상세하게 파고들 필요는 없다. Carnap의 요지는 프로토콜 진술이 직접적인 감각적 느낌immediate sensation들로 이뤄진 세계에 적용된다pertain to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방법론적 유아론(唯我論)methodological solipsism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이 [형이상학적 유아론이 아니라] 단지 방법론적일 뿐인 유아론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Carnap은 직접적인 감각적 느낌들로 이뤄진 사적인 세계가 우선적인 실제 세계라고 주장하지는 않으며, 임의의 그 어떤 언어에 대해서도 그것만이 올바른 단 하나의 언어라고 단정하지 않고 단지 하나의 언어적 제안일 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프로토콜 진술을 구성하는 감각-언어들을 유사성에 대한 상기를 통해 분석하는 Carnap의 전략 역시, 단 하나의 세계에 대한 단 하나의 참된 언어라기보다는 여러 언어적 제안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사적인 감각질-용어에 대한 이러한 정의를 토대 삼아 Carnap은 가령 내가-바라보는-커피잔coffee-cup-for-me과 같은 주관적 대상subjective object들을 정의하며. 다시 이를 토대로 일상적인 커피잔과 같은 상호-주관적inter-subjective 대상”(즉 공적(公的)인 대상public object)들을 정의한다.

Carnap의 관점은 매우 급격히 변하였는데, 1932년 후반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도식을 포기하고 프로토콜 진술이 직접적으로 적용되는 것은 [사적인 감각경험이 아니라 그 자체로 공적인] 물리적 대상physical object이라는 관점으로 돌아선다.

Neurath. Neurath에게 프로토콜 진술이란 일반적인 물리적 진술이되,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은 형태를 지니고 있다. 예시를 들면 다음과 같다: ‘3:17Otto에 의해 기록된 프로토콜: [3:16Otto는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3:15에 이 방에는 Otto에 의해 지각된 책상이 있었다)].’ 여기서 가장 안쪽의 소괄호 내부에 있는 문장은 기록자가 지녔던 지각내용content of a perception이라 할 수 있다. 그 다음 바깥쪽 대괄호 내의 [3:16]로 시작하는 내용은 그 시점에 기록자가 지녔던 생각이 언어화된verbalised 바를 표현하고 있으며, 가장 바깥쪽 문장은 과학적인 실험적 관찰을 공식적으로 기록하기 위해 기록자가 적은 내용을 추가적으로 명시하고 있다.

프로토콜 논쟁과 관련하여 Neurath를 추동시킨 전반적인 동기는, 그의 관점에서 보자면 모든 진술이 교정가능하다corrigible는 점이다. 여타 통상적인 진술들과 마찬가지로 프로토콜 역시 그것을 수용할지 여부에 대한 조건condition for acceptance들을 지니고 있다. Neurathe는 인상적인 한 구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과학의 출발점으로 삼을 수 있을 만큼 확정적인 순수 프로토콜 문장을 정립할 수 있는 방법이란 없다. 백지상태tabula rasa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망망대해에 떠 있는 배 위에서 그 배를 수리해야 하는 선원과도 같아, 항만의 건조(乾燥) 도크dry-dock에서 배를 해체하여 최상의 재료들로 재건할 수는 없는 처지에 있다.

(Neurath 201)

 

다시 말하자면 폐기처분될 운명은 프로토콜 문장에도 닥칠 수 있다”. 왜냐하면 철두철미하게 잘 지지되는 한 이론이 프로토콜과 상충할 경우라면 프로토콜 문장이 철회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Ayer 역시 이와 비슷한 신조를 옹호하였음을 앞서 살펴본 바 있다). 뿐만 아니라 폐기처분될 가능성은 경험적 문장의 본성에 속한다. 프로토콜 문장은 분석적이지 않으므로 반드시 검증가능해야 하며, 공허하고 형식적인 것에 그치지 않기 위해서는 거짓인 것으로 드러날 가능성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언어란 아무리 단순한 것이라 할지라도 어쨌든 물리적 세계physical world에 관한 언어이다. “모든 언어는 상호-주관적이며 따라서 타인과의 논쟁의 대상이 될 수 있다.

 

Schlick. 앞서 살펴본 인물들에 비해 연상이었던 Schlick이 프로토콜 논쟁에 관해 쓴 글은, 그다지 명료하지는 않지만 가장 예리한 관점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Schlik1936년에 나치 동조자였던 한 학생의 총격으로 암살되었는데,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그 학생은 Schlik-형이상학적 관점에 적대적이었다고도 하고 여학생들에 대한 질투심에 광분한 상태였다고도 한다.) Schlick의 판단에 따르면 프로토콜은 Neurath(와 후기의 Carnap)가 말했듯이 지식을 위한 확고한 토대역할을 할 수 없으며, 특히 진리를 판가름하는 척도가 될 수 없다. 프로토콜이라는 것이 Neurath가 기술하였듯 언제든 교정될 소지가 있다면, 최선의 이론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정립하기 위해 우리가 따라야 할 원리란 대체 무엇이겠는가? 그것이 경험과의 일치 여부일 수는 없다. 경험 역시 프로토콜과 마찬가지로 철회될 가능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최소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각각의 문장들의 참을 시험하는 것은 우리가 지닌 소위 여타 지식과의 정합성(整合性)coherence이다. 그런데 정합성이란 적어도 일관성(一貫性)consistency 내지 무모순성lack of contradiction과 같은 것으로서, 이는 진리에 대한 필요조건이긴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는 할 수 없다. 한 편의 동화가 아무런 모순이 없다고 해서 그것을 참이라 할 수는 없다. Schlick은 지적하기를, p는 내적으로 일관적인 한 이론 A를 구성하는 부분이고, p는 역시 내적으로 일관적인 다른 이론 B의 구성 부분일 수 있다. 이 경우 두 이론이 결합된 A&B는 분명 받아들여질 수 없음에도, 정합론(整合論)coherence theory이 말하는 대로 일관성이 진리에 대한 충분조건이라면 우리는 (p를 포함하는) A(p를 포함하는) B를 동시에 참인 것으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이에 Schlick은 프로토콜 문장이 적어도 Neurath의 의미에서 지식의 토대 역할을 할 수 없다고 결론짓는다. 대신에 그는 관찰문장observation sentence에 대해 다소 양면적Janus-faced인 개념을 제시한다. 관찰문장은 사적(私的)이며private, 직접적인 현재에 직접적으로 지각된 것들에 관계하며, ‘어떤 점에서는 전혀 기록될 수 없는것이다(여기서 Schlick은 인용부호를 주의 환기용scare quotes으로 사용해야만 했던 듯하다). 관찰문장은 심적(心的)상태mental state에 대한 기록이 아니라 심적상태 그 자체이다. 어떤 사람이 하나의 가설을 입증하기 위해 시험관을 유심히 관찰하며 무언가를 찾는 중이라 해보자. 이 상황에서 Schlick이 말하는 바의 관찰문장이란 어떤 만족감satisfaction, 그래, 바로 이거야!” 하는 말로 표출되는 모종의 느낌이 즉각 경험되는 바로 그 내적인 순간inner moment이라 할 수 있다. “최종성finality이라는 단어는 관찰문장의 기능을 특성화하는 데에 가장 부합하는 단어이다.”(Schlick 223).

Schlick에 따르면 이러한 관찰문장은 반드시 [‘이것, 저것, 여기, 지금등과 같은] 지표적(指標的)인 요소indexical element(Schlick은 이를 지시사(指示詞)demonstrative요소라 칭한다)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관찰문장이 프로토콜 문장일 수 없는 주된 이유이다. 지표사(指標詞)가 포함된 관찰문장으로서 비근한 예시를 들자면 지금 여기가 파랗네!’ 정도를 들 수 있다. 이에 대응될 법한 프로토콜 문장은 ‘Schlick은 시점 t에 파란색에 대한 감각을 경험하였다정도가 될 것이다. 후자는 [전자에 나타났던] ‘지금에 대응될 만한 지시사를 결여하고 있으며, 전자와 같은 관찰진술에서 나타나는 1인칭적인 직접성first-person immediacy을 결여하고 있다. 이는 일반적인 언어로 표현된 일반적인 진술로서, 상호-주관적으로 이해가능한 언어 즉 제3자의 관점에서도 이해될 수 있는 언어이다. 이에 비해 전자의 관찰진술은 사적이며, 그것이 말해진 당시 순간이 지나가면 그 의미 역시 퇴색된다. 관찰진술의 의미는 바로 그 순간에만존재한다. 따라서 관찰진술은 그 의미를 파악하면 그것만으로 그 진리 역시 파악하게 된다는 점에서 분석적 진술과 유사하다. 하지만 분석진술은 실재가 존재하는 방식에 관해서는 말해주는 바가 없는 공허한 것인 반면 관찰진술은 그에 관한 지식을 제공한다. (이러한 생각은 일견 기이하고 불분명해 보이지만 나름대로 설득력과 설명력을 지니고 있다. 일례로, Jerry Fodor가 주장한 바와 같이, 자연언어natural language의 기저에 있는 이른바 사고언어Language of Thought를 통해 정신적인 과정이 수행된다는 착상은, 작금의 인지과학cognitive science 분야에서 활발히 연구되고 있는 대표적인 연구 프로그램 중 하나이다.)

 

 

역사적 사항

 

여타 들과 달리 이번 의 내용은 비엔나를 주된 배경으로 여러 배우들에 의해 펼쳐진 한 편의 드라마처럼 진행되었다. 그렇기에 역사적 사항들에 대한 별도의 언급이 불필요하다고 여겨질지 모르겠다. 하지만 다음 두 가지 논평을 짧게 덧붙일 필요가 있다: 하나는 논리실증주의를 지나치게 단순화하여 일반화하는 관점이 지닌 위험성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번 에서 소개된 이야기의 여파에 관한 것이다.

 

현대 철학사를 돌이켜보건대, 1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1930년대 중반까지 중부 유럽에서 발흥했던 초기 분석철학에 대해, 과거에 보였던 순전한 철학적 흥분감이 사그라들고 초기 분석철학이 제시했던 새로운 철학적 지평이 서서히 무너져왔다는 작금의 일반화된 평가에는 다소 과장된 측면이 있다. 우선, 비엔나 뿐만 아니라 베를린, 체코 공화국, 폴란드는 물론이요, 심지어 중부 유럽이 아닌 스칸디나비아, 영국,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에서도, 활동적이고 지적으로 탁월하며 과학주의적으로 정향된 철학자들이 당시 다수 활동하고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철학 이외의(혹은 철학에 더하여) 자연과학이나 수학 분야에서 주로 훈련된 학자들이었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지녔던 기조는 -형이상학적이고 경험주의적이었으며, 넓게 보자면 주로 검증주의적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비엔나 학단 내부에마저 다양한 흐름과 영향이 존재했고, Albert Einstein[(그리고 Kurt Gödel)]과 같이 논리실증주의적 흐름의 주변부에만 머물렀던 특수한 인물들도 다수 있었다는 사실이다(지난 세기 초 실증주의가 달성했던 가장 위대한 업적 중 하나는 Schlick1915년 논문 상대성 이론의 철학적 의의The Philosophical Significance of the Principle of Relativity인데, 이 글은 Einstein과의 긴밀한 협조 하에 쓰였다). 정신-세계 간 관계에 대한 ‘Kant주의적Kantian그림이 상대성 이론에 의해 무너짐에 따라, 과학철학자들은 과학 및 학문에 대해 이전에 지녔던 도식을 철회하고, 규약주의적 관점을 토대로 과학이론의 과소결정성underdetermination 논제 및 검증주의에 대해 탐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에 대해 개별 철학자들이 제기했던 관점은 매우 다양하고 변화무쌍하다. 이러한 다채로운 사실들을 감안하건대, ‘논리실증주의가 지금은 완전히 사장된 통일적이고 단일한 관점을 취했다는 작금의 일반화된 평가는 사실과 매우 다르다. 이번 장에서 살펴본 프로토콜 문장에 관한 논쟁이 혹여 이러한 잘못된 인상을 심어주었다면, 독자들은 그것이 논리실증주의의 일반적이고 핵심적인 단 하나의 관심사가 전혀 아니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기 바란다.

 

비엔나 학단과 그를 중심으로 한 과학주의적 철학의 조류가 나치의 출범 및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유럽대륙에서 점차 사양길에 접어듦에 따라, 전술하였듯 그와 관련된 많은 인물들이 망명길에 올랐는데, 대부분은 미국으로 그리고 일부는 영국으로 이주하였다. 이들 중 거론될 만한 이름들로는, 이번 을 읽기 전부터 독자들에게 익숙했을 법한 Carnap을 위시하여, H. Feigl, Gustav Bergmann, P. Frank, F. Waismann, C. G. Hempel, 그리고 베를린의 과학철학자 Hans Reichenbach 등이 있다. 비엔나 학단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던 두 명의 거물급 논리학자로서, 체코 공화국의 브르노 출신이자 비엔나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Curt Gödel과 바르샤바의 Alfred Tarski 역시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이러한 인물들의 저술과 학계 활동이 없었다면, 미 대륙의 과학철학과 논리학은 현재의 모습으로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Wittgenstein은 당시 비엔나에서 철강사업으로 성공한 매우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1908년에 청년 Wittgenstein은 공학을 공부하기 위해 잉글랜드로 갔는데, [FregeRussell의 수학철학 저서를 접하게 된 뒤로] 머지않아 Russell을 찾아가 수학과 논리학을 사사하게 된다. RussellWittgenstein의 철학적 천재성을 즉각 알아차렸다. 당시 Russell 고유의 철학에서는 Wittgenstein의 영향을 감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미구에 Russell이 자신의 철학적 토대가 뒤흔들린다고 느꼈을 정도로, WittgensteinRussell에게 남긴 인상은 매우 강렬했다. 1913Wittgenstein은 철학적 작업에 몰두하기 위해 노르웨이로 갔다가, Waismann의 비평으로 인해 비엔나로 돌아오게 된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고국을 위해 자원입대하여 용감하게 복무하다가, 오스트리아의 패망으로 인해 포로로 수감되자 1919년에는 막대한 유산의 대부분을 형제자매들에게 모조리 나눠줘 버린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당시까지 살아있었던 형제자매들에게 나눠주었다. 1918년에 이르기까지 총 세 명의 형제가 자살했기 때문이다.) 1921(英譯本1922)논고가 출간되자 Wittgenstein은 철학의 모든 문제를 해결했다고 생각하여 철학계를 떠남과 동시에 비엔나 역시 떠나게 된다. 이후 어느 시골의 한 초등학교에서 보내던 교사생활이 다소 비극적으로 끝나고, Wittgenstein은 다시 비엔나와 철학계로 돌아온다. 비엔나를 떠난 뒤에도 그는 비엔나 학단의 몇몇 구성원들과 간간히 접촉해왔는데, 당시 비엔나 학단에게 Wittgenstein논고는 철학적인 바이블이나 마찬가지였다. 비엔나로 돌아온 직후 두어 해 동안 Wittgenstein이 집중했던 주된 과업은 누이 Margaret의 집을 설계하고 건축하는 일이었다(이 집은 현재 불가리아 대사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는 동안 케임브리지에 있던 Wittgenstein의 철학적 동료들은 그에게 잉글랜드로 돌아올 것을 거듭 촉구하였으며, 이에 Wittgenstein1929년에 잉글랜드로 건너가 케임브리지에서 교수생활을 시작한다. (이후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11역사적 사항참조)

 

앞서 언급했듯 1933년에 청년 Ayer가 비엔나를 방문했던 시기는 역시 청년기였던 Quine이 미국에서 비엔나를 방문했던 시기와 대강 일치하며, 이는 Quine이 프라하에서 Carnap에게 수학하던 시기이기도 하다(당시 Carnap은 프라하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Ayer처럼 Quine도 당시 비엔나에서 성행하던 논리실증주의 조류에 깊은 인상을 받았지만, Ayer언어, 논리, 진리가 출간되던 1936년에 Quine은 논문 규약에 의한 진리Truth by Convention을 발표하였다. 전자가 논리실증주의의 근본 기조와 핵심을 갈무리하여 설파하는 저술인 데 반해, 후자는 Carnap의 철학 및 그를 위시한 논리실증주의 전반에 날카롭게 대항하기 위한 것이었던바, 거기서 Quine은 규약에 의한 진리와 같은 것은 없으며 좀 더 협소하게 말하자면 규약이 논리학을 설명할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물론 실증주의가 형이상학으로부터 학문으로서의 지위를 박탈한 것이 올바른 처사였음을 Quine은 그 누구 못지않게 확신한다. 철학적 직관의 권위를 부정하고, 선험적이면서 종합적인 진리를 부정하며, 경험적 지식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실질적 지식도 있을 수 없다는 실증주의의 기본 주장에는 Quine 역시 철저히 동의한다. 하지만 그는 [논리실증주의가 형이상학을 제거하는 데에 전가의 보도마냥 휘두르는] 분석성이란 개념 자체를 매우 의심스런 눈초리로 보았으며, 이에 논리실증주의보다도 더욱 철저하고 급진적인 형태의 경험주의를 유명한 논문 경험주의의 두 독단Two Dogmas of Empiricism(1951)에서 처음 스케치한 뒤 이를 발전시켜나간다. 일부 학자들은 Quine20세기 후반기의 가장 중요한 철학자라고 평가한다. 그는 비록 엄밀한 의미에서의 실증주의자는 아니었지만, 자신이 견지했던 강력한 철학적 착상들의 많은 부분을 비엔나 학단 구성원들과 공유하였으며, 논리실증주의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고유의 철학적 기반을 다져갔다. Quine의 철학에 관해서는 10장에서 더욱 상세히 살펴볼 것이다.

 

 

이번 장의 요약

 

Russell은 판단의 참을 두 가지 실체와 연관시키는 대응론적 관점, 즉 명제와 세계 간 대응이라고 생각하는 직관적인 관점이 양자를 구분할 수 없게 만드는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고 제적한다. 이에 그는 명제라는 것을 아예 폐기하고, 판단 자체를 판단주체 및 이전 도식에서 명제의 구성요소였던 대상과 속성 내지 관계로 이뤄진 하나의 정신적 사실로 간주한다. 이러한 판단은 판단주체를 제외한 나머지 구성요소들이 이루고 있는 하나의 사실이 존재할 경우 그리고 그 경우에 참이다. 이에 대해 WittgensteinRussell의 판단론이 탁자, 펜 홀더, 책과 같이 특정 실체들의 단순한 모임이 왜 판단 불가능한 것인지를 설명해내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Wittgenstein은 다시 사실과 명제,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하나의 사실과 또 다른 하나의 사실로서의 명제라는 개념으로 돌아간다. 그에 따르면 명제란 추상적 실체가 아니라 그가 명제적 기호라고 칭한바 글로 쓰이거나 음성으로 발화된 문장 자체이다. 그림이 물감 자국들로 구성되는 것과 같이 명제적 기호는 특정 요소들 즉 대상을 나타내는 이름들로 구성되며, 하나의 그림이 정확한 그림일 경우 그려진 대상들이 존재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것과 같이, 명제는 참일 경우 이름들의 지시체들이 존재해야 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요컨대 명제는 실체들이 배열된 사실의 구체적인 구조를 문장이라는 추상적인 구조로 그려낸다는 점에서 하나의 언어적인 그림과 같다.] 이에 참이라는 것은 사실들 간의 대응, 즉 그리는 사실(명제)과 그려지는 사실 간의 대응으로 설명된다. 명제와 그림 간 결정적인 차이는, 후자가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구현해내는 바를 전자는 규약을 통해 추상적으로 수행한다는 점이다. 그림은 실재의 공간적 배치를 캔버스 위에 칠해진 물감자국들의 공간적 배치로 대신함으로써 사실을 구현해낸다면, 명제는 예컨대 술어의 용법에 대한 언어적 규약을 통해 사실이 배열된 방식을 보여준다. 명제적 기호와 그에 의해 그려지는 사실 간에는, 혹은 일반화하자면 모든 표상체계와 그 체계에 의해 표상되는 사실 간에는 논리적 형식이 공유되어야 한다. 논리적 형식은 그 어떤 표상체계에도 앞서 상정되어있는 것이기에, 논리적 형식 그 자체는 언어를 통해 설명될 수 없다[다르게 말하면 논리적 형식 자체는 그림으로 그려질 수 없다]. 이에 Wittgenstein은 논리적 형식 자체와 같이 그림이론이 말하는 방식으로 그려질 수 없는 것은 문자 그대로 말해질 수 없는 것이라 단언한다. 그러한 것은 하나의 특정 언어가 사용되는 과정에서 단지 보여질 수 있을 뿐이다. 논리적 형식뿐만 아니라 가치 및 철학 자체 역시 말해질 수 없는 것에 속한다.

 

Ayer는 철학적 여정에서 핵심적이었던 시기에 (약한) 검증원리를 표방하였다. 유의미한 명제 혹은 진술은 선험적인 것이거나, 아니면 가능한 관찰에 의해 그 참이 결정될 수 있는 것 둘 중 어느 하나에 속해야 한다(여기서 Ayer가 말하는 선험적인 명제란 단순한 동어반복이거나 분석적인 것으로서 경험적인 사안과는 무관한 명제이다). Ayer는 이러한 원리를 물리적 대상에 대한 설명, 타인의 정신, 가치에 관한 논의, 과거와 미래에 관한 귀납적 추론, 관념론 대 실재론 간 논쟁 등의 사례에 적용한다. 그 과정에서 Ayer가 취하는 일반적인 전략은, 현상을 설명하는 데에 우리가 상식적으로 혹은 과학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관찰증거를 발견하여 이를 그 현상을 정의하는 기준의 지위로 올려놓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Russell의 맥락적 정의방식이 핵심 역할을 담당한다. Ayer의 검증주의는 여러 문제점을 지니고 있지만 대표적인 두 가지를 꼽자면, 가치에 대한 정서주의 이론에 제기되는 소위 Frege-Geach 문제와, 검증원리에 따르면 검증원리 자체가 유의미하지 않다는 문제가 있다.

 

형이상학에 대한 반감을 비롯하여 Ayer가 지녔던 아이디어 대부분은 Carnap에게서 유래한 것들이긴 하지만, CarnapAyer가 비형식적으로 기술한 착상들을 형식논리적으로 전개하면서 더욱 복잡하고 다층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Carnap은 검증원리를 모든 유의미한 사고를 지배하는 일반원리로서가 아니라 단지 특정 언어가 지닐 수 있는 하나의 특징으로 제시함으로써, 검증원리 가체가 검증 불가능하다는 문제를 피해간다. Carnap관용의 원칙에 따르면 한 언어체계 내에서의 귀결관계가 올바르게 정립되어있기만 하다면 당면 목적을 위해 그 어떤 형태의 언어든 구성하는 것이 허용된다. Carnap은 이 원칙에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항을 덧붙인다: (1) [언어가 실재를 그릴 수 있음은 언어적 규약에 따른 것이라는 Wittgenstein의 생각과 유사하게,] 논리적 진리 역시 단지 규약의 문제일 뿐인바, 어떤 문장이 분석적으로 참인지는 한 언어가 정립될 때 그 언어를 지배하는 규칙으로서 약정된다. (2) 탐구되는 물음들이 내적 물음인지 외적 물음인지 구분해야 한다. 가령 네 신발 안에 돌멩이가 있는가?”는 한 언어체계 내에서 묻고 답해질 수 있는 내적 물음이다. 반면 물리적 대상은 존재하는가?”[일견 내적 물음으로서 묻고 답해져야만 하는] 철학적인 존재 물음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를 한 언어를 채택해야할지 여부에 관해 묻는 외적 물음으로서 바라본다면 문제 해결이 더욱 수월해진다. 따라서 이 물음은 실제로는 지금 이 언어는 물리적 대상에 관한 용어들을 도입하고 있는가?’라는 물음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어떤 언어를 택하느냐 하는 것은 인지적인 문제가 아니라 실천적인 문제이다. 모든 인지적 활동은 반드시 하나의 언어 내에서 수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르게 말하면 한 언어를 채택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론적인지적인 정당화가 불가능하며, 단지 당면 목적에 비춘 실천적실용적인 근거만이 제시될 수 있을 뿐이다.] 언어-독립적인language-independent 혹은 언어-중립적인language-neutral 이론적 관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논리실증주의가 제시하는 과학적 도식을 다소 단순화하여 말해보자면, 모든 경험적 과학은 이 이론적 진술이 참이라면, 여차여차한 관찰적 환경이 조성될 경우 특정 관측 결과가 발생할 것이다라는 형태의 도식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 관측결과란 것은 정확히 무엇인가? 경험적인 관찰결과를 표현하는 표준형식은 무엇인가? 관찰자료라는 것은 물리적 대상사건항목들에 의해 구성되는가, 아니면 직접적인 감각경험에 의해 얻어진 것들로 구성되는가? 이 문제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참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딜레마dilemma이다: 한편으로 관찰진술이라는 것은 상호-주관적이어야 하는바 따라서 물리적이고 공적인 것이어야 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른 한편으로는 관찰진술은 과학 및 모든 지식의 토대 역할을 해야 하는바 따라서 직접적으로 감각적이고 사적인 것이어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이 비엔나 학단 구성원들 간에 벌어진 소위 프로토콜 논쟁의 핵심 쟁점으로서, 이에 대해 우리는 Carnap, Neurath, Schlick의 관점을 살펴보았다.

 

 

탐구문제

 

1. Wittgenstein그림이론은 명제를 명제 기호, 즉 언어적 관습에 따라 실제로 말해지거나 표기된 문장으로 간주하여 그것을 설명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명제에 대한 이런 식의 설명은, (a) 명제에서 관계의 방향 문제, 가령 ‘BradJanet에게 키스했다‘JanetBrad에게 키스했다가 어떻게 구분될 수 있는지를 정말로 해결해내는가? 해결한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결하는가? (b) “목록 문제”, 다르게 말하면 어떤 것이 적절하게 결합된 명제인지 설명하는 문제를 정말로 해결해내는가? 해결한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결하는가? (c) Frege의 말 개념 문제를 해결해내는가? 해결한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결하는가?


2. 만약 당신이 가치에 대한 Ayer의 정서주의 노선을 받아들인다면, ‘절도는 나쁜가?’라는 질문의 지위에 대해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아니면 다음과 같이 생각해보자: 당신은 절도가 나쁜 행위인지 여부에 대해 확신하고 있지 않다고 해보자. 당신은 다음 논증에 대해 생각해본다: 절도가 나쁘다면 나는 내 모자를 먹을 것이다. 절도는 나쁘다. 따라서 나는 내 모자를 먹을 것이다. 이 논증의 명백한 타당성을 당신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가능한 하나의 선택지는 다음과 같다: 논리학에서 핵심적인 것은 (서술적) 문장에 대한 수용acceptance이라는 일반개념이라고 가정해보자. 이에 따르면 한 논증을 통해 사실적 문장factual sentence(참인 것으로) 수용되든가 표현적 문장expressive sentence(지지될 만한 것으로) 수용되든가 둘 중 하나이다. 이에 따라 논증의 타당성을 판별하는 기준 역시 다음과 같이 변경된다: 전제가 수용된다면 결론은 반드시 수용되어야 한다. 이러한 고찰은 Frege-Geach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정말로 효험이 있는가, 아니면 단지 논증의 타당성 개념에 대한 말 바꾸기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3. 검증가능성 원리는 정말로 합리적인가? 합리적이라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검증원리를 지지하기 위해 경험적 전제를 지닌 논증을 제시할 수 있는가? 아니면 그 전제는 분석적인 것이어야 하는가? 검증원리는 그 자체에 적용되어도 좋은가? 아니면 검증원리 자체는 과학을 위한 언어게임language game”을 정의하는 종류에 속하는 언어로서 특별한 지위를 지니고 있[기에, 검증원리 자체를 스스로에게 적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는가?


4. Russell의 맥락적 정의방식의 근저에 있는 신조에 따르면, ‘FG하다가 참일 경우, F한 대상은 존재한다. ‘프랑스 왕은 키가 크다가 참이라면 프랑스의 왕은 실제로 존재한다. 맥락적 정의에 따르면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 그 대상이 존재하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Ayer는 엄밀히 말해 F한 대상이 존재하지 않을지라도, 말해지는 대상이 가령 탁자와 같은 논리적 구성체일 경우라면 그 탁자와 같이 F’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참인 문장을 말할 수 있는 것처럼 주장한다. 여차저차한 상황에 처한다면 갖게 될 특정 감각-경험이 그것을 보증하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가설적 감각-내용hypothetical sense-content이란 정확히 무엇인가? 그것은 가능적인possible 내용인가? 아니면 Ayer는 정의된 대상이 실제로는 논리적 허구logical fiction에 지나지 않게 되는 더욱 급진적인 스타일의 정의방식을 요구하고 있는 것인가?


5. 검증원리가 단지 하나의 가능한 언어적 제안일 따름이라는 Carnap의 관점은 그 원리의 진정한 정당화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6. NeurathSchlick 중 누구의 관점이 프로토콜 문장에 관한 논쟁을 더욱 잘 해결해내는가? Schlick의 관점은 진정 Neurath에 대항하는 것이라 할 수 있는가, 아닌가? 후대의 20세기 철학자들, 특히 미국의 철학자 Wilfred Sellars는 이른바 주어진 것[소여(所與)]the given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였는데20)(최근에는 John McdowellSellars의 이러한 노선에 가담하였다). 이는 프로토콜 논쟁에서 Schlick이 이론적으로 개입했던 핵심 개념이다. 지식의 참된 토대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Schlick은 그가 칭한바 관찰진술이 사적인 경험[(즉 주어진 것)]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통용하는 공적 언어에 의해서는 표현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하지만 그의 주장이 참이라면, 우리의 내적 경험은 공적인 언어 체계에 의해 표현된 일상적인 문장에 도대체 어떻게 통합될 수 있겠는가? 개개인의 사적인 경험과 공적인 일상언어가 과연 적절하게 연관될 수 있겠는가? 양자 간 관계는 적어도 논리적인 것이어야 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그 경우 사적 경험의 영역 역시 언어가 미치는 범위로부터 봉쇄되지 않는다. [다르게 말하면 CarnapNeurath가 비유적으로 역설하였듯이 우리는 우리가 타고 있는 언어라는 배를 떠날 수 없다.] 이러한 사항들을 고려하건대 SchlickNeurath(그리고 Sellars) 간의 논쟁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겠는가?

 

20) 아무리 원리적인 방식으로라도, 인지적 사실들이 현상적인 것[감각자료]이든 행동주의적인 것이든, 공적인 것이든 사적인 것이든 간에, -인지적 사실들을 통해 남김없이 분석될 수 있다는 생각은 (中略)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고 나는 믿는다.” (Wilfred Sellars, (19731956), 경험주의와 심리철학Empiricism and Philosophy of Mind: Stephen P. Schwartz, 분석철학의 역사: 러셀에서 롤스까지, 2017, 서광사, 225쪽에서 인용.)

* “Sellars의 기본 주장들 중 하나는, 감각자료 이론가들이 그들의 목적에 적합한 그 어떠한 [순수하고 투명한] 언어나 개념적 구조도 전혀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中略) 우리는 인식적으로 오염되지 않은 순수 자료의 원천에 접근하지 못한다. 우리가 가진 자료가 무엇이든 간에, 그것이 감각이든 여타의 것이든 간에,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무엇이 되었든 이미 이론 적재적인 것으로서 우리에게 나타난다.” (S. P. Schwartz, 같은 책, 225-6.)


     

주요 읽을거리

 

Ayer, A. J. (1946), 언어, 진리, 논리Language, truth and Logic.

비엔나 학단의 좀 더 다양한 구성원들에 관해서는 A. J. Ayer가 편집한 選集, 논리실증주의Logical Positivism(1959) 참조.

Carnap, R. (1928), 세계의 논리적 구조와 철학에서의 사이비 문제The Structure of the World and Pseudoproblems in Philosophy.

, (19561947), 의미와 필연성: 의미론 및 양상논리 연구Meaning and Necessity: a Study in Semantics and Modal Logic. Carnap의 논문 경험주의, 의미론, 존재론Empiricism, Semantics, Ontology이 포함되어 있다.

Russell, B. (1910), 직접대면에 의한 지식과 기술구에 의한 지식Knowledge by Acqauintance and Knowledge by Description, Aristoteles 학회지Proceedings of the Aristotelian Society, 11: 108-128쪽에 수록. Russell, B. (1918), 신비주의와 논리Mysticism and Logic, 152-67쪽에 再錄.

Wittgenstein, L. (1961), 논리-철학 논고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추가적인 읽을거리

 

Coffa, A. (1991), Kant에서 Carnap까지의 의미론적 전통: 비엔나 학단까지The Semantic Tradition from Kant to Carnap: to the Vienna Station. 논리실증주의의 의미론적 뿌리와 궤적을 철학사적으로 추적하고 있는 평이한 저서이다.

A. Richardson, T. Uebal , (2007), 케임브리지 입문서: 논리경험주의The Cambridge Companion to Logical Empiricism. 탁월한 학자들이 해당 주제에 관해 쓴 글들을 모은 권위 있는 개요서이다.

Uebel, T. (2007), 기로에 선 경험주의: 비엔나 학단의 프로토콜 문장 논쟁Empiricism at the Crossroads: The Vienna Circle's Protocol Sentence Debate. 프로토콜 논쟁과 연관된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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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Russell의 판단이론,

前期 Wittgenstein, 논리실증주의

 

FregeRussell은 논리학에 대한 작업을 통해 언어철학적 사유에 이르게 되었다. 특히 Frege는 지금도 기초논리학 강의에서 교수되는 진리-함수적 논리 및 양화논리의 창시자 혹은 발견자로 인정받는다. 이 새로운 논리학은 Aristoteles에 의해 창안되어 Frege 시대에 이르기까지 별다른 진전 없이 이어져 오던 전통적인 삼단논법적 논리학logic of syllogism를 뛰어넘는 것으로서, Aristoteles 논리학이 유일하게 다룰 수 있었던 형태의 정언명제, 즉 범주category 내지 1항 술어만이 나타나는 명제들을 다룰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임의의 1항 원자명제들이 결합된 복합명제 및 임의의 2항 이상 관계술어가 나타나는 명제들 역시 다룰 수 있는 강력한 논리학이었다.

논리학에 대한 FregeRussell의 관심은 궁극적으로 수학기초론foundations of mathematics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되었다. 둘 모두 순수수학의 명제가 논리학의 명제로 환원 가능하다는 논리주의 논제thesis of Logicism를 확고히 정립하길 원하였[으며, 그에 따라 수학의 모든 명제들이 환원될 수 있을 만큼 논리학을 강력한 체계로 강화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Frege는 이 작업을 본격적으로 개진한 저서 산수의 근본법칙11893년에 완성하였는데, Russell수학의 원리(1903)를 거의 완성해갈 무렵까지 Frege의 저서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미구에 Frege의 작업을 접하게 된 Russell수학의 원리가 출판되기 직전에 추가한 부록에서 Frege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으면서도 Frege의 체계에서 모순이 도출가능하다derivable는 결점을 지적하였으며, 이는 같은 해 Frege에게 보낸 유명한 서한에도 나타난다.

소위 Russell의 역설Russell’s paradox로 널리 알려진 이 문제는 다음과 같다: Frege의 체계에서 특히 공리Axiom에 따르면, 임의의 술어에 대해 그에 대응하는 하나의 집합set 내지 외연extension이 존재한다.1) 달리 말하면 모든 조건condition은 하나의 부류class를 결정한다. 이에 따르면 어떤 집합들은 그 집합 자신을 원소로 포함한다. [‘𝛼는 자신을 원소로 갖는다라는 술어에는 일단 아무런 문제가 없으며, 공리에 의해 그 술어에 대응하는 집합 즉 자신을 원소로 갖는 집합이 존재한다.] 가령 셋 이상의 원소를 갖는 집합들의 집합을 들 수 있다. [세상엔 셋 이상의 원소를 갖는 집합들이 당연히 적어도 셋 이상 있으며, 이런 집합들을 원소로 갖는 집합의 원소 역시 셋 이상이고, 따라서 그 집합은 자신을 원소로 갖는다.] 반면 이와는 다른 집합들은 자신을 원소로 포함하지 않는다. 가령 표범의 집합은 그 자체로는 표범이 아니기 때문에 자신을 원소로 갖지 않는다. 이제 은 자신을 원소로 갖지 않는 집합이다라는 술어를 생각해보자. 공리가 함축하는 바에 따르면 이 술어에 대해서도 그에 대응하는 하나의 집합, 즉 표범의 집합 등과 같이 자신을 원소로 갖지 않는 집합들로 이뤄진 집합이 존재한다. 이 집합을 ‘Russell 집합이라 부르자. Russell 집합은 자신을 원소로 포함하는가, 포함하지 않는가? Russell 집합이 자신의 원소라면, [Russell 집합의 정의에 따라] Russell 집합은 자신을 원소로 포함하지 않는다. Russell 집합이 자신의 원소가 아니라면, [역시 Russell 집합의 정의에 따라] Russell 집합은 자신을 원소로 포함한다. [간단히 말해 Russell 집합은 자신을 원소로 갖는 경우 그리고 오직 그 경우에 자신을 원소로 갖지 않는다.2)] 모순은 여기서 드러난다. 한 명제는 참이거나 거짓 둘 중 하나여야지 둘 다일 수는 없다. 하지만 Russell 집합 사례의 경우 ‘Russell 집합은 자신을 원소로 갖는다, 참이라면 거짓이고 거짓이라면 참이다. Frege의 체계 어딘가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1) (原註) 공리: F의 집합=G의 집합은 다음의 경우 그리고 오직 그 경우이다: 모든 x에 대해, xG인 경우 그리고 오직 그 경우에 xF이다. [(x(Fx)=x(Gx))(x)(FxGx)]

2) 이러한 결론의 도출과정을 형식적으로 좀 더 명료하게 보이자면 다음과 같다: “자신을 원소로 갖지 않는 집합을 A라 하자. 그러면 A는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A={x|xx}

이제 어떤 집합 𝛳가 집합 A의 원소라면, A의 정의에 의해 𝛳는 자신을 원소로 갖지 않는다. 이에 다음이 성립한다:

(𝛳A)(𝛳𝛳)

역으로 𝛳가 자신을 원소로 갖지 않는 집합이라면, A의 정의상 𝛳A의 원소이다. 이에 다음이 성립한다:

(𝛳𝛳)(𝛳A)

양자로부터 다음이 도출된다:

(*) (𝛳A)(𝛳𝛳)

그렇다면 A 자체는 자신을 원소로 갖는 집합인가, 그렇지 않은 집합인가? 전자 AA라면 (*)에 의해 AA이다. 역으로 후자 AA라면 (*)에 의해 AA이다. 따라서 모순이 발생한다.” (송하석, 거짓말쟁이 역설에 관한 탐구, 아카넷, 2019, 34-5.)


Russell로부터 모순을 전해 들은 Frege유일하게 가능한 것처럼 여겨졌던 산수의 토대가 완전히 무너져버린 듯하다고 답변하였다. 실제로도 Frege는 자신의 체계가 지닌 결함을 끝내 해결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Russell은 이에 굴하지 않고 Alfred North Whitehead와 함께 대작 수학원리1910, 1912, 1913년에 각각 출간하였다(중요한 것으로 평가받는 21927년에 출간되었다). 수학원리에 제시된 체계는 Frege의 작업보다 훨씬 정교하고 복잡하였지만, 순수수학이 일반적으로 논리학으로 환원가능reducible하며 따라서 순수수학의 진정한 주제가 논리학이라는 논리주의 논제를 정당화하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다.

FregeRussell은 새로이 고안된 강력한 논리학이 사고를 더욱 명료화함으로써 경험적 사실 및 여타 학문들에도 확대 적용될 수 있을 것이라 전망하였다. 다만 이러한 방향에서 실질적인 작업을 수행한 이는 Russell이었다. 철학의 문제들, 외부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식Our Knowledge of the External World, 논리원자론의 철학The Philosophy of Logical Atomism과 이를 확장시킨 논리원자론Logical Atomism등의 저서들을 통해, Russell은 우리의 모든 지식이 오로지 논리학 및 감각-경험sense-experience에 대한 지식에 기초하고 있다는 주장을 정립하고자 하였으며, 그러한 작업은 지식-주장knowledge-claim이 담긴 문장들에 대한 분석을 요하였다. 지식을 주장하는 문장들은 실제로 어떤 대상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인가? 지식-주장이 개입하고 있는 속성 내지 관계란 정확히 무엇인가?

1911년 비엔나의 스물두 살 청년이었던 Ludwig Wittgenstein은 그해 초 찾아갔던 Frege의 제안에 따라 Russell을 만나기 위해 케임브리지로 갔다.3) Wittgenstein을 만난 Russell은 머지않아 그를 열정적이고 심오하며 강렬하고 특출난, 내가 아는바 전통적으로 생각되어온 천재의 전형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이번 장의 중추라 할 수 있는 Wittgenstein 철학은 논리-철학 논고(1921)에 제시된 소위 前期 철학이다. 논고를 유명한 철학적 운동이었던 논리실증주의Logical Positivism와 함께 살펴보는 것은 세간에 퍼진 인식과 다르게 실제로는 다소 부적절할 수도 있지만, 양자 모두 1910년 직후 Russell의 관점으로부터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논고의 핵심 착상으로서 의미에 대한 그림 이론‘picture theory’ of meaning이라 일컬어지는 Wittgenstein의 관점은 Russell의 관점이 지닌 결점을 해결하고자 한 시도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자신의 이론이 지닌 결점을 극복하고자 Russell이 차후 제시한 더욱 복잡한 이론까지 살펴보지는 않을 것이며, 단지 Wittgenstein의 이론이 어떤 점에서 Russell의 것보다 우월하다고 여겨질 수 있는지를 이해하는 데에 충분한 정도에서 만족할 것이다.

 

3) Wittgenstein1908년부터 멘체스터에서 공학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당해 Russell수학의 원리를 접한 뒤로는 수학의 기초 및 Frege의 새로운 논리학에 대한 관심을 키워갔다. 그러다 1911년 여름방학이 끝날 무렵 철학책을 쓰겠다는 계획을 논의하기 위해 Frege를 찾아 예나로 갔으며, Frege의 권고로 그해 10Russell을 찾아 케임브리지로 갔다. 따라서 2역사적 사항에서 Wittgenstein“1912년에 Russell의 권고로 Frege를 방문했다는 저자의 서술은 (연도권고자방문 대상 모두) 착오인 듯하다.


 

명제, 사실, Russell의 판단이론

 

서론에서 살펴보았듯이 참과 거짓이란 명제가 갖는 특성이다. 참을 대응correspondence으로 가정하는 것, 특히 세계 또는 사물이 존재하는 방식the way that world is/things are과 명제 간의 대응으로 가정하는 것은 퍽 자연스러운 생각이다. 사물이 존재하는 방식이란 사실fact 또는 사태state of affairs라 할 수 있다. 예컨대 눈이 하얗다는 사실, 아스날이 2002년 영국 프리미어쉽에서 우승했다는 사실, 2+2=4라는 사실 등이 존재한다. 우리는 직관적으로 사실이란 실체들이 배열된 것configurations of entities이라 가정한다. 눈이 하얗다는 사실은 눈과 하얌whiteness이라는 속성으로 구성된다be composed of. 이 사실을 나타내는 단칭용어들로는 눈이 하얌을 갖는다는 것’, ‘눈이 하얗다는 것’, ‘눈이 하얗다는 사실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진리 대응론적 고찰에 따라 1장에서 원자명제의 진리-조건을 다음과 같이 정식화한 바 있다:

 

원자명제의 참에 대한 소박한 정의: 원자명제는 다음의 경우 그리고 오직 그 경우에 참이다: (i) 대상 o와 속성 p로 구성된 1항 원자명제이고, op를 갖는다는 사실이 존재하는 경우, (ii) 대상 o1o2 및 관계 R로 구성된 2항 원자명제이고, R(o1, o2)라는 사실(o1o2가 이 순서로 관계 R을 맺는다는 사실)이 존재하는 경우(3항 이상의 관계에 대해서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Russell은 이러한 진리 정의에 심각한 문제점이 있음을 지적한다(이러한 연유로 위의 정의에는 별표가 붙었다. 1, ‘원자문장의 참과 의미절 참조). 화성이 태양을 공전한다는 사실과 화성이 태양을 공전한다는 명제를 비교해보자. 위의 정의에 따르면 이 경우 사실과 명제 둘 다 화성, 𝛼𝛽를 공전한다는 관계, 태양이라는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된다. 그러니 양자 간에는 대체 어떤 차이가 있겠는가? 둘 사이에는 분명 어떤 식으로든 차이점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양자는 완전히 동일한 것이 되며, 그 경우 모든 원자명제는 자동적으로 참이 되어버린다. 어떤 명제든 그에 대응하는 사실 즉 그 명제 자체가 존재할 것이기에, 그 어떤 명제도 거짓일 수 없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예컨대 바다코끼리가 날아다닌다는 것은 충분히 상상가능하기에 바다코끼리가 날아다닌다는 명제는 분명 존재하며, 그에 따라 바다코끼리가 날아다닌다는 사실 역시 자동적으로 존재하게 된다. 하지만 이는 분명 사실이 아니다. 이렇듯 진리 대응론적인 모델은 그 어떠한 거짓 믿음이나 거짓 명제도 원리적으로 허용치 않는 것처럼 보인다.4)5)


4) “[진리를 대응론적으로 정의하는 작업에서] 거짓을 용납해야 하는 필요성은 믿음을 정신과 어떤 대상 간의 관계로만 간주할 수는 없게 만든다. 일단 그 단일한 대상이란 대략적으로 말해 믿어지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만약 믿음이 그러한 단일 대상과의 관계로 간주된다면, 직접대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거짓이라는 반대를 용납하지 않고 믿음이 항상 참이어야만 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오델로는 데스데모나가 카시오를 사랑한다고 잘못 믿고 있다고 해보자. 이때 이 믿음이 어떤 단일한 대상 즉 카시오에 대한 데스데모나의 사랑이라는 대상과의 관계에만 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한 대상이 있다면 오델로의 믿음은 참이 될 것인데, 실제로는 그러한 대상이란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존재하지 않는 대상에 대해 오델로는 어떠한 관계도 가질 수 없다. 그리하여 그의 믿음은 이러한 단일 대상과는 관계를 맺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오델로의 믿음은 다른 대상 즉 데스데모나가 카시오를 사랑한다는 사실과의 관계라고 말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데스데모나가 카시오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와 같은 대상이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앞서의 경우처럼 카시오에 대한 데스데모나의 사랑이라는 대상이 있다는 가정만큼이나 불합리하다. 그러므로 차라리 믿음을 정신이 어떤 단일 대상에 대해 관계를 맺는 것으로 간주하지 않는 이론을 찾는 편이 더 낫다.
(中略) 판단한다나 믿는다 내에 수반되는 관계에 거짓 가능성을 정당하게 허용하고자 한다면, 그 관계는 두 개의 항 사이가 아니라 셋 이상의 항들 간에 맺어지는 관계로 취급되어야 한다. 데스데모나가 카시오를 사랑한다고 오델로가 믿는다면, 오델로는 마음 속에서 카시오에 대한 데스데모나의 사랑이라든가 데스데모나가 카시오를 사랑한다는 사실 등의 단일 대상을 떠올리지 않아야 한다. 그러한 경우엔 어떤 마음과도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객관적인 거짓이 있어야 한다고 요청되기 때문이다.” (Bertand Russell, 철학의 문제들, 박영태 , 서광사, 1989, 133-5.)

5) (原註) 이는 진리 대응론이 완전히 틀린 이론이라는 말은 아니다. 진리 대응론을 발전시킨 탁월한 저서로는 Barwise, Etchemendy (1987) 참조.


뿐만 아니라 1장에서 짧게 언급되기만 하고 상세히 살펴보지는 않았던 문제로서, 명제의 구조적개념과 얽힌 문제 역시 대응론적 관점이 지닌 대표적인 난점이다. 앞 단락에서 말했듯이 위의 정의에 따르면 화성은 태양을 공전한다에 의해 표현되는 명제는 화성, 𝛼𝛽를 공전한다는 관계, 태양이라는 세 요소로 구성된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에서는 이 명제가 태양은 화성을 공전한다에 의해 표현되는 명제와 어떻게 다른지 식별되지 않는다. 양자는 분명 다르다. 두 명제는 동일한 세 구성요소를 각기 다른 방식으로 결합하고 있는바, 구성요소들 간 맺어진 관계의 방향direction이 다르기 때문이다. 물론 두 문장의 의미 차이는 문장의 구성요소들이 각기 다른 순서로 배열되어있다는 점으로 인해 물리적구체적으로 표시되지만, 추상적인 명제의 차원에서 이러한 차이를 반영하는 요인이 무엇인지는 아직 해명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을 집합set 내지 부류class 개념의 경우와 비교해보자. 집합 역시 명제처럼 그 구성요소와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추상적 대상이다. 하지만 명제의 경우와 달리 집합은 그 구성요소 즉 원소member에 의해 전적으로 정의된다. 집합 AB가 동일한 집합이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은 양자가 동일한 원소를 갖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명왕성, 금성}{금성, 명왕성}은 정확히 동일한 두 집합-개항이다. [요컨대 원소들이 배열되는 순서는 집합의 동일성 조건과 무관하다.] 반면 화성은 태양을 공전한다태양은 화성을 공전한다에 의해 각각 표현되는 두 명제의 사례에서 살펴보았듯이, 임의의 두 명제가 동일한 부분이나 동일한 구성요소를 가짐에도 [그것들이 배열된 순서에 따라] 각기 다른 명제일 수 있다.

이와 밀접하게 연관되는 문제로서 2, ‘술어의 지시와 말 개념 문제절에서 살펴본 바 있는, Frege주의 의미론에서의 말 개념 문제가 있다. 지시적 표현들을 그저 한데 모은다고 해서 명제가 표현되게끔 유의미하게 결합되는 것은 아니다. ‘Socrates’‘Groucho Marx’만으로는 유의미한 문장이 형성되지 않으며 기껏해야 재담꾼들이 나열된 목록이 얻어질 뿐이다. 더 나아가 ‘Socrates’술을 마심이라는 속성내지는 ‘Socrates’술을 마신다drinks를 생각해보라. Socrates는 술을 마신다는 명제와 Socrates, 술을 마신다Socrates, drinks라는 목록은 분명 다르다. 그 차이는 무엇인가? ‘술을 마신다는 표현에 계사(繫辭)copula 즉 술어화로서의 이다를 부가하여 은 술을 마시는 사람이다라든가 은 술을 마시고 있다가 축약된 것이라 가정하더라도 사정은 나아지지 않는다. 그 경우 실제로 일어난 일이란 그저 일련의 소리나 종이 위 표시가 더 추가된 데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부가된 표현들이 의미하는 바는 유의미한 실체meaningful entity, 문법적 결합copulation이라 불리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모종의 추상적인 실체여야 한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문제는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온 셈이다. Socrates가 술을 마시고 있다는 명제와 Socrates, 연결, 술을 마시고 있음Socrates, copulation, drinking이라는 목록을 구분해야 한다는 동일한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Russell은 판단에 대한 다중관계이론Multiple Relation Theory of judgement을 도입한다. 이제 Russell은 명제라는 것을 폐기하고, 그에 따라 참을 명제가 지니는 속성으로서가 아니라 판단 내지 믿음이라 불리는 정신적 상태mental state가 지니는 속성으로 간주한다. 그렇다. 아무런 판단주체judger가 없다면 참이거나 거짓일 수 있는 여하한 것도 없을 것이다.6) 다만 그 경우에도 사실fact은 여전히 남아있을 것이다. 앞선 문제에서 사실이라는 요소가 꺼림칙하게 여겨졌던 이유는 명제에 더해 사실이라는 것을 추가적으로 받아들이는 데에서 기인하였다. 이에 Russell은 명제를 제거하는 전략에 착수한 것이다.


6) 만약 어떠한 판단주체도 있을 수 없다면 거짓도 있을 수 없으며, 거짓과 상반되는 진리 역시 있을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한 것처럼 여겨진다. 단순히 물질세계만을 생각한다면 그 세계 내에는 거짓이 설 수 있는 여하한 자리도 없다. 그 세계가 사실이라 불리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할지라도, 참이라는 것이 거짓과 동일한 층위에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는 여하한 진리 역시 포함하지 않을 것이다. 참과 거짓은 믿음이나 언명의 속성인데, 단순한 물질세계에는 어떠한 믿음이나 언명도 없으므로 참과 거짓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B. Russell, 같은 책, 130-1.)


여기서 결정적으로 Russell은 앞서 우리가 살펴본 직접대면관계the relation of acquaintance라는 개념을 활용한다(3, ‘직접대면에 의한 지식과 기술구에 의한 지식참조). 그에 따르면 엄밀히 말해 우리가 직접대면할 수 있는 유일한 대상(자아를 제외하면) 감각-자료들 뿐이지만, 당면 목적상 이 점은 무시한 채 논의의 단순성을 위해 임의의 일상적인 대상들 역시 직접대면될 수 있다고 가정해보자. 대상(전문적인 철학용어로는 개별자individual)은 아니지만 우리가 직접대면할 수 있는 또 다른 실체로는 속성 및 관계와 같은 다양한 보편자들이었다. Russell이 말했듯이 대상은 지각되고perceived 보편자는 생각된다conceived.

이제 판단주체 BRab(예컨대 고양이가 매트 위에 있다’)라고 판단하는judge that Rab 상황을 가정해보자. 이를 위해 첫 번째로, B는 대상 ab, 관계 R직접대면해야(혹은 그것을 지시하거나 그에 관해of생각해야) 한다.7) 이는 다음의 도식 4.1과 같이 제시될 수 있다:

 

B

묶음 개체입니다.

a

 

R

 

b

도식 4.1 직접대면

 

여기서 점선은 직접대면관계를 나타낸다.


7) 앞 단락에서 언급되었듯이 판단의 대상으로서 직접대면되는 대상에는 관계라는 보편자 역시 포함된다. 이에 Russellab처럼 개별자인 판단대상을 대상-object-term이라 칭하고 R처럼 보편자인 판단대상을 대상-관계object-relation라 칭하기도 한다.


두 번째로, B는 이러한 복합체에 대해 특정 태도를 형성해야 한다. 그에 따라 BRab라고 판단하게 된다. 이는 다음의 도식 4.2와 같이 제시된다:

 

B

묶음 개체입니다.

a

 

R

 

b

도식 4.2 판단

 

여기서 실선은 판단함이라는 정신적 상태를 나타낸다.

이에서 알 수 있듯이 Rab라는 판단judgement that Rab은 판단주체 B, 대상 ab, 관계 R 간에 맺어지는 4 관계four-termed relation이며, 그 판단관계 자체는 하나의 사실이다.8) 이 판단은 B가 연루되어있지 않은 특정 사실, Rab라는 사실fact that Rab이 존재하는 경우 참이며, 그러한 사실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 판단은 거짓이다.9) 이렇듯 참이란 사실들 간에 성립하는 객관적인 대응관계로서, 명제와 실재 간의 대응이 아니라 정신적 상태와 실재 간의 대응이다.


8) 판단이라는 것을 마음 및 이와 관계된 여러 대상들이 여러 번 동시에 함께 발생하는 관계[즉 다중관계]라고 생각한다면 거짓을 설명하기가 더 수월하다. 데스데모나, 사랑하고 있다, 카시오 등은 오델로가 데스데모나는 카시오를 사랑한다고 믿을 때 존재하게 되는 관계에 참여하는 모든 항들이다. 이 관계는 네 항 사이의 관계로서 오델로 역시 그 관계를 맺는 항들 중 하나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관계는 오델로가 데스데모나, 사랑함이라는 관계, 카시오라는 세 항 각각에 대해 맺는 관계는 아니며, 오델로가 그것들 모두에 대해 갖는 관계이다. 수반된 믿음행위의 관계에 대한 지표는 오직 하나이며, 다만 이러한 하나의 행위의 지표가 네 항들을 서로 연결시킨다. 오델로가 그러한 믿음을 형성한 순간에 실제로 일어나는 일은, 믿는다는 관계가 네 개의 항 모두를 하나의 복합체로 짜맞춘다는 사실이다.

(中略) 판단행위에서 관계는 어떤 뜻sense이나 방향direction을 갖는다. 판단이라는 관계는 그 구성요소들을 어떤 순서order로 배열하며 이 순서는 문장 내에서 단어들이 배열된 순서에 의해 드러난다.” (B. Russell, 같은 책, 135-6.)

9) 한 믿음이 그와 관계된 어떤 연상된 복합체와 대응한다면 참이 되고 그렇지 않다면 거짓이 된다. 두 개의 항과 그 둘 간의 관계가 믿음의 대상이며, 그 항들이 믿음의 뜻에 의해 특정 순서로 배열되어 있다 해보자. 이때 두 항들이 그 특정 순서에 따라 관계지어진 복합체가 존재한다면 그 믿음은 참이며 그렇지 않다면 거짓이다. 판단이나 믿음이라는 행위는 마음을 구성요소로 갖는 하나의 복합체로서, 마음을 제외한 나머지 구성요소들이 믿음에서 나타난 순서대로 배열되어 하나의 복합체를 형성한다면 그 믿음은 참이며, 그렇지 않다면 거짓이다.

그래서 참과 거짓이 믿음의 속성이라 할지라도 믿음 자체 내에서가 아니라 믿음의 외부에 의해 결정되는 속성이다. 믿음의 진리-조건은 그 어떤 믿음이나 마음도 포함하지 않고 단지 믿음의 대상들만을 수반한다. 믿고 있는 마음은, 그 마음을 제외한 믿음의 대상들만이 연ㄹ된 복합체가 존재해서 그에 대응할 때에만 참되게 믿는 것이다. 이러한 대응은 진리를 보증하며 이러한 대응이 없다면 거짓을 함축한다. 따라서 최종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1) 믿음은 그것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마음에 의존한다. (2) 그러나 믿음의 진리를 위해서는 마음에 의존하지 않는다.” (B. Russell, 같은 책, 138.)


Russell의 다중관계론은 여기서 살펴본 형태보다 좀 더 복잡하지만 그 이론의 핵심을 파악하는 데에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요컨대 Russell은 모종의 특정한 정신적 상태에 의거하여 명제라는 추정된 실체를 일소해버리고자 하였으며, 그에 따라 참과 거짓은 그러한 정신적 상태들이 지니는 속성으로 설명된다.

 

 

∙ 『논리-철학 논고

 

논고에는 대단히 흥미로운 측면들이 아주아주 많다. 우리는 그것들 모두를 속속들이 살펴보지는 않고, 다만 명제에 관한 그림이론Picture Theory을 기초적으로 파악한 뒤 후대 철학자들, 특히 논리실증주의자Logical Positivist 혹은 논리경험주의자Logical Empiricist들에게 영감을 준 주된 특징들 몇몇만을 살펴볼 것이다.

1912, 스물두 살의 WittgensteinRussell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약 내가 aRb라고 판단한다면, 내가 원하는 것은 더 이상의 추가적인 전제 없이 aRb인지 또는 aRb인지를 말해줄 수 있는 그러한 판단이론이다. 당신의 이론은 이 조건을 충족하지 못한다.

 

(WittgensteinRussell의 표기법에 따라 ‘Rab’‘aRb’, ‘부정: aRb’aRb’로 표기하였다.) 즉 그가 원한 것은 다음과 같은 추론을 보여줄 수 있는 판단론이다:

 

1. BaRb라고 판단한다.

 

따라서

 

2. aRb는 명제이다.

 

따라서

 

3. aRb이거나 aRb이다.

 

Russell의 이론은 1에서 2로의 추론을 설명하지 못한다.

Russell이 제시한 바와 같이 직접대면관계를 기본적인 것으로 삼는 판단이론의 문제는 직접대면될 수 있는 적절한 종류의 실체들에 대해 아무런 제약도 가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나는 탁자, 펜 홀더, 책 등을 지각하여 직접대면할 수 있다. 세 사물을 동시에 직접대면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세 사물에 대해 판단이라는 태도를 취하여 탁자 펜 홀더 책이라는 판단을 내릴 수도 있다는 것인가? 이러한 귀결을 막을 수 있는 장치가 있는가?

Wittgenstein은 그러한 장치란 없다고 딱 잘라 말한다. 적어도 다중관계이론의 관점에서 보는 한, 판단의 대상들은 올바른 방식으로 결합되지 못할 수 있으며, 그 결과 도무지 명제라고는 할 수 없는 무의미한 헛소리nonsense가 얻어질 뿐이다. 하지만 명제 내지 思考란 적어도 판단의 내용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탁자, 펜 홀더, 이 참이라는 속성을 가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즉 그것이 하나의 사실을 구성하지 않는다는 대답만으로는 불충분하다. 문제는 그러한 판단이 참일 수 없는 성질의 것임에도 참이라고 말하는 데에만 있는 게 아니라, 도대체 그러한 무의미한 판단 자체가 허용된다는 데 있다.

 

그림이론the pcture theory. 여기서는 그림이론을 개략적으로만 살펴볼 것이기에 Wittgenstein의 복잡한 전문용어들이 엄밀한 방식으로 사용되지는 않을 것이다.

Wittgenstein은 참이란 사실의 측면에서 설명되어야 한다는 Russell의 기본 착상에 동의한다. 하지만 명제에 관해 말하는 것이 단지 말하는 방식façon de parler에 지나지 않는다는 Russell의 유명론적 생각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Wittgenstein은 명제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명제란 대상은 아니지만 그 자체로 하나의 사실이다:

 

3.14 명제적 기호propositional sign를 구성하는 것은, 명제의 요소들(낱말들)이 명제 내부에서 서로 확정적인 관계를 맺는다는 점이다. 하나의 명제적 기호는 하나의 사실이다.


명제는 문장에 의해 표현되는 추상적 실체라기보다는 단순히 (발화의 맥락에 따라) 유의미한 평서문declarative sentence이다. 명제는 추상적인 그 무엇이 아니라 종이에 표시된 일련의 잉크 자국이나 입으로 소리 내어진 일련의 음소들 등에 의해 구체화된 문장-유형으로서, 이러한 문장-유형들은 실질적인 맥락에 따라 유의미해진다.

일례로 고양이가 매트 위에 있다는 것과 같은 일상적인 사실 내지 사태를 생각해보자. 우리의 일상적인 생각과는 다르게, 매트-위의-고양이는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사실이며, 사실 그 자체는 대상이 아니다(그 이유는 잠시 뒤에 살펴볼 것이다). 이제 이러한 사실을 단순하고도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는 통상적인 한 폭의 그림picture 또는 소묘drawing를 생각해보자. 여기서 그리기 관계picturing relation는 두 가지 사실들 사이에 맺어지는 관계, 즉 그리는 사실picturing fact[즉 그림]과 그려지는 사실pictured fact[즉 매트-위의-고양이] 간에 맺어지는 관계이다. 전자는 실제의 구체적인 고양이와 매트를 각각 나타내는stand for 구체적인 항목item[즉 고양이와 매트 형상으로 그려진 물감 자국들]을 지니고 있어서 그것들이 서로 관계 맺고 있는 방식을 보여주어야show 한다.

이번엔 동일한 매트--고양이에 관해 묘사하고 있는 다음 명제(즉 문장)에 관해 생각해보자:

 

고양이가 매트 위에 있다.

 

앞서 그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명제를 구성하고 있는 항목들인 고양이매트는 각각 실제의 고양이와 매트를 나타내거나 지시하며, 이 명제는 그 두 항목들이 관계맺고 있는 방식을 보여준다show how. 다만 명제에서 수행되는 종류의 보여주기showing는 그림의 경우에 비해 더욱 추상적이고 규약convention에 의존적이다. 통상적으로 그림에서는 어떤 하나가 다른 하나 위에 있는 관계를 구현하기 위해 한 무리의 물감 자국들이 다른 무리의 물감 자국들 위에 공간적으로 배치되는 방식이 사용된다. 실제로 Wittgenstein이 그림이론의 착상을 떠올리게 된 계기로서, 법정에서 교통사고를 묘사하기 위해 모형 자동차가 사용되는 경우에 이러한 점은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반면 명제에서 이러한 관계가 구현되는 것은, ‘의 위에 있다는 표현의 각 공란에 사물의 이름이 삽입됨으로써 전자가 후자 위에 있음을 보여준다는 우리의 언어적 규약에 따른 바이다. 그렇게 완성된 명제적 기호는 하나가 다른 하나 위에 있음을 말해준다say. 다시 말해 명제는 그 명제가 참이라면 사물들이 어떻게 관계를 맺고 있어야만 하는지를 보여준다.

이에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매우 간결명료하게 표현된 정식을 얻게 된다:

 

3.1432 ‘복합기호 “aRb”ab에 대해 관계 R을 맺는다는 것을 말해준다고 하기보다는, ‘“a”“b”에 대해 특정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 aRb라는 것을 말해준다고 해야 한다.

 

10) 이 구절은 이해하기 다소 어렵다. 작은따옴표로 제시된 두 문장 중 전자는 Russell의 판단이론을 겨냥한 듯하다. Russell에 따르면 판단주체는 대상 ab, 관계 R을 직접 대면한 뒤, ab에 대해 관계 R을 맺는다는 것을 심적 행위로써 판단한다. 복합기호 “aRb”는 이 심적인 판단의 내용을 단지 언어적으로 구현해낸 것일 뿐이다.

본 절 초입에서 살펴보았듯이 Wittgenstein은 이 설명에서 직접대면 단계로부터 판단이 형성되는 단계로 넘어가는 과정을 문제삼는다. 직접대면관계는 판단주체가 판단대상들로서 개별자 ab 및 보편자 관계 R 각각에 대해 맺는 관계인 데 반해, 판단관계는 세 항목이 통합된 aRb라는 복합체에 대해 판단주체가 맺는 관계이다. Russell에 따르면 세 항목이 bRa가 아니라 aRb로 통합되는 것은 각주8)에서 전술되었듯이 판단행위의 뜻이나 방향에 기인한다. Wittgenstein이 생각하기에 이는 해결되어야 할 문제를 전제로 삼는 격이다. 판단행위에서 그러한 뜻 내지 방향이라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부터가 설명되어야 하는데, Russell의 이론은 도리어 그것이 가능함을 가정하고 있는 셈이다. 뿐만 아니라 임의의 개별자가 직접대면 가능하다면 탁자, 펜 홀더, 책에 대한 직접대면으로부터 탁자, 펜 홀더, 이라는 판단으로의 이행을 막을 길이 없다. 이것이 왜 무의미한 판단인지를 설명할 방도가 Russell의 이론에는 없다. Russell 식의 판단행위에 의해 형성된 복합기호 ‘aRb’는 이렇듯 실재에 대해 아무런 설명력도 지니지 못한다.
이에 Wittgenstein의 전략은 우리가 유의미하게 인식하는 최소한의 원자적 단위를 Russell과 같이 직접대면되는 개별자 및 보편자 수준이 아니라, 그것들이 이미 결합되어 있는 사실의 수준으로 끌어올린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이 논고의 유명한 첫 구절 세계는 사실들의 총체이다가 말하는 바이다. 우리는 대상 ab, 관계 R을 각각 인식한 뒤 그것들이 어떠하다고 판단하는 게 아니라, aRb라는 사실 자체를 인식한다. 대상들 간 관계에서 순서가 어떠한지, 대상들의 단순한 집적이 왜 사실이 아닌지 등의 문제는 이미 이 단계에서 일소된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과 명제적 기호 간의 관계는 언어적인 그리기 관계 및 그에서 통용되는 언어적 규약에 의해 설명된다. 명제 기호를 구성하는 요소들 간의 관계가 사실이 어떠한지를 보여준다. 이것이 바로 인용문의 두 문장 중 두 번째 ‘(명제 기호의 구성 요소들인) “a”“b”에 대해 특정 관계를 맺는다는 것(즉 언어적 규약)aRb라는 것(사실이 어떠하다는 것)을 말해준다가 말하는 바이다. 요컨대 명제가 실재에 대해 여하한 설명력을 지닐 수 있는 것은, Russell이 말했든 판단행위의 뜻이나 방향에 기인하는 게 아니라, 명제 기호의 요소들이 배열되는 규약에 따른 그리기 관계에 기인한다.


물론 언어의 규약은 지금 통용되는 바와 달랐을 수도 있다. 일테면 고양이가 매트 위에 있다와 같이 쓰는 우리의 실제 표기법과 달리, 그와 동일한 것을 언어적으로 구현하는 데에 다음과 같은 표기법이 채택되었을 수도 있다


고양이

매트.

 

심지어 이와 동일한 사태를 표상하기 위해 아예 반대로 매트가 고양이 위에 있다는 표기법이 발전했을 수도 있다. 익숙하지 않기에 영 있을 성싶지 않은 일처럼 여겨지겠지만, 아랍어나 히브리어에서는 문장이 좌측에서 우측으로 써진다는 사실, 혹은 일본의 전통적인 표기법에서는 위에서 아래로 써진다는 사실 등을 생각해보면, 언어적 규약이 임의적이라는 점을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고찰에 따라 Wittgenstein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3.1431 명제적 기호의 본질은, 그것을 표기된 기호로서가 아니라 (탁자, 의자, 책과 같은) 공간적 대상들로 구성된 것이라 상상해본다면 보다 명료하게 드러난다.

 

혹여 공교롭게도 고양이가 매트 위에 있지 않다 하더라도, 그림에 그려진 공간적 사실의 지위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것은 단지 부정확한inaccurate 그림, 거짓된 그림인 것으로 판명될 뿐이다. 그 경우 실제 사물들은 그림이 나타내는대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순수하게 논리적인그림인 명제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렇듯 그림이론은 [명제의 참에 대한 대응론적인 관점임에도] 거짓 명제를 허용하는 데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림이론은 목록 문제를 해결하고자 고안되었다. 현재 통용되는 언어적 규약에 따르면 탁자, 펜 홀더, 이라는 일련의 기호는 문장이 아니며. 하나의 그림이 되는 데에 필수적인 구조를 갖춘 사실이 아니다. 이는 마치 세 항목을 표상하는 형상들이 단일한 그림으로 통합되지 않은 채 종이 위에 각기 독립적으로 그려져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런 식으로 배열된 물감 자국들이 적절한 그림이 아닌 이유가 그림에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규약 때문인 것처럼, ‘탁자, 펜 홀더, 이 문장이 아닌 이유는 현재 통용되는 언어적 규약 때문이다.] 고양이가 매트 위에 있다매트가 고양이 위에 있다처럼, 그리는 사실에서 관계의 방향을 구별하는 문제 역시 언어적 규약에 의해 해결되는바, 한국어에서 두 문장은 상반되는 것을 말한다는 규약이 두 문장을 구분해준다. 첫번째 문장은 하나가 다른 하나 위에 있음을 보여주는 반면, 두 번째 문장은 후자가 전자 위에 있음을 보여준다.

 

뜻의 한계the limits of sense. Wittgenstein논고의 첫 문장에서 세계는 사실들의 총체all that is the case이다라고 말한다. 세계는 (명제를 포함하여) 모든 사실들의 총체이다. 하나의 사실이란 하나의 대상이 한 속성을 갖는 것 혹은 복수의 대상이 관계를 맺는 것이다. f1, f2, f3 fn 등은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가능적인 사실possible fact들의 총체이고,11) p1, p2, p3 pn 등은 이 사실들에 대응하는 (참이거나 거짓인) 요소명제elementary proposition들의 총체라 해보자. 논의를 단순화하기 위해 현실을 다소 이상화하여, 실재reality 전체가 실제로 발생한happen to be the case 요소사실들로 이뤄져 있고, 따라서 참인 요소명제들에 의해 표상될 수 있다고 해보자. 여기서 근본적인 착상은, 논고가 말하는 세계Tractarian world에선 그 어떤 요소명제도 선험적이거나 필연적necessary이지 않다는 점이다. 각각의 요소명제들은 논리적으로 상호 독립적independent인바, 한 요소명제의 진리치는 다른 요소명제의 진리치와 무관하다.


11) (原註) Wittgenstein은 요소적인 사실elementary fact사태state of affairs(: Sachverhalt)’라 칭하였고, 그와 구분하여 복합적인compound 사실을 사실fact(: Tatsache)’이라 칭하였다.


그림이론은 원자명제atomic proposition 혹은 요소명제의 뜻 내지 진리-조건에 관한 이론이다. 요소명제는 그려진 요소pictured element들이 그림이 보여주는 바대로 존재할 경우 참이며, 그렇지 않을 경우 거짓이다. -원자적인non-atomic 명제 혹은 복합명제complex proposition를 포함하여, 일반적으로in general 모든 명제의 뜻 내지 진리-조건은 요소명제의 뜻 내지 진리-조건에 의해 결정된다. 이는 다음과 같이 두 단계로 나누어 이해해볼 수 있다.

첫 번째로, Wittgenstein은 문장 연결사에 대해 설명한다(이는 1장 말미에서 살펴본 바와 거의 똑같다12)). 모든 명제는 참이나 거짓 둘 중 하나이다. 임의의 명제 pl에 대해, ‘부정: pl [pl]’pl이 거짓인 경우 참이며 그렇지 않을 경우 거짓이다. 임의의 두 명제 plpk에 대해, ‘pl 그리고 pk [plpk]’plpk 양자가 참일 경우 참이며 그렇지 않을 경우 거짓이다. 이를 4.1과 같이 진리표truth-table형식으로 간명하게 나타낼 수 있다:

 

4.1 그리고[]’의 진리표

pl

pk

plpk

T

T

T

T

F

F

F

T

F

F

F

F

 

12) (原註) 다만 실제로 Wittgenstein논고에서 활용하는 진리-함수는 ‘N()’이라는 연산자 하나 뿐이다. 이 함수는 임의의 수의 명제들을 논항으로 취한다. ‘N(p1 pn)’는 모든 논항 p1 pn이 거짓인 경우 그리고 오직 그 경우에 참이다. 부정, 연언, 선언 등의 모든 진리-함수가 이러한 소위 공동 부정Joint Denial함수에 의해 정의될 수 있기에 이 연결사는 진리-함수적으로 적절하다truth-functionally adequate.


선언문의 진리치 역시 진리표로 제시될 수 있다. ‘pl 또는 pk [plpk]’plpk 양자가 거짓일 경우 거짓이며 그렇지 않을 경우 참이다. ‘pl 또는 (pk 그리고 부정: pm) [pl(pk&∼pm)]’과 같이 복수의 연결사들이 결합된 더욱 복잡한 형식의 진리치 역시 진리표 방법에 의해 나타내어질 수 있다(여기서는 명제논리에서 통용되는 일반적인 표기법에 따라 괄호를 사용하였지만, Wittgenstein의 표기법은 약간 다르다. 각주) 참조). 이러한 문장 연결사들에 의해 원자명제들이 결합되어 형성된 복합명제의 뜻이 바로 그것의 진리-조건이며, 이는 진리표에 의해 명확하게 나타내어질 수 있다. ‘그리고’, ‘또는’, ‘가 아니다등의 표현들은 사실의 영역에 있는 아무런 요소도 나타내지 않는다. 즉 문장 연결사들은 무언가의 이름이 아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실재 자체는 원자사실들의 방대한 집합체일 뿐이다.

두 번째로, Wittgenstein은 양화사에 대한 이른바 대입적(代入的)’ 해석‘substitutional’ account of quantifier을 제시한다. 원자명제는 한 대상이 특정 방식으로 존재한다(특정 속성을 갖는다)는 것, 혹은 복수의 대상들이 특정한 방식으로 존재한다(특정 관계를 맺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3, ‘직접대면에 의한 지식과 기술구에 의한 지식에서 살펴보았듯이] 일반화 문장이 표현하는 내용은 이러한 요소명제들에 의해 이미 제시되어 있어야 한다. 대상 o1, o2, on 등의 이름이 o1, o2, on 이라 해보자. 이 경우 보편 양화문 모든 대상은 빨갛다[(x)Rx]’(무한한) 연언문 o1은 빨갛고, o2는 빨갛고 on은 빨갛고 [Ro1Ro2& … Ron& …]’와 동치이며, 존재 양화문 어떤 대상은 빨갛다[(x)Rx]’는 선언문 o1이 빨갛거나, o2가 빨갛거나 on이 빨갛거나 [Ro1Ro2∨ … Ron∨ …]’와 동치이다. 양화사 역시 그리고’, ‘또는’, ‘가 아니다등의 문장 연결사들과 마찬가지로 단순히 표기법상의 편의장치notational convenience일 뿐, 실재 세계에 존재하는 아무런 대상도 나타내지 않는다.

논고에서 대상의 지위에 관해 언급할 사항이 있다. 현실에서 우리는 고양이를 대상으로 간주하는 데에 익숙하고 또 그것이 실질적으로도 유용하지만, 논고Wittgenstein에 따르면 고양이는 엄밀히 말해 대상이 아니다. 고양이는 더욱 단순한 요소들로 분해될 수 있기 때문이며, Russell이 제시한 바와 유사한 근거에서(3, ‘직접대면에 의한 지식과 기술구에 의한 지식절 참조), 이는 그 고양이가 이름(논리적 고유명)이 아니라 기술구라는 점을 보여준다. 진정한 대상이란, 우리가 그 본성을 인식하는 데에 아무런 장애물도 없어야 하기 때문에, 단순simple하여 더 이상 분해될 수 없는indestructible 것이어야 한다. 진정한 대상은 그 존재만으로도 단어의 의미를 보증해준다. 대상 및 그것들이 배열된 형태는 우리의 언어가 궁극적으로 관계를 맺는 것be ultimately about으로서, Wittgenstein의 표현을 빌자면 대상은 언어의 더듬이가 실재와 접촉하는지점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대상이라 여기는 사물들에 관한 일상적인 명제가, 진정한 대상에 명시적으로 관계하는 명제들로 어떻게 환원되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논리적 분석이 필요하다. 하지만 잘 알려진 대로 Wittgenstein은 정확히 무엇이 이러한 진정한 대상인지에 대해서는 명시적으로 개입하지 않는다. 혹시 보편자가 진정한 대상일까? 아니면 특정한 종류의 물질적인 원자인가? Wittgenstein은 아무런 답도 내놓지 않는다. (다만 스쳐 지나가듯이 몇몇 사례를 제시하였으며 그러한 대상들이 특정 속성을 필연적으로 갖는다고 추측하였다. 예를 들어 하나의 색깔 조각이라든가 음악에서의 한 등을 대상으로 간주할 수 있으며, 한 음의 경우 특정한 음높이pitch를 가져야만 한다.)

그림이론 및 이에 대해 앞서 설명한 것들에는 매우 많은 문제점들이 있지만, 여기서는 그것들을 피해 돌아가는 방식을 택하였다. 이로 인해 그림이론과 얽힌 쟁점들이 다소 흐려졌을 수도 있겠으나, 어쨌든 그 이론의 핵심 착상을 파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Wittgenstein이 궁극적으로 제시하고자 한 바는 뜻을-형성하는sense-making 모든 언어에 대한 하나의 모형model을 만드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곧 어떤 방식으로든 그 모형에 부합하지 않는 언어란 뜻을 전혀 갖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무의미한 언어의 사례 및 뜻의 한계에 놓인 명제의 사례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들 수 있다:

 

1  항진(恒眞)명제(동어반복 명제)tautology와 모순명제(항위(恒僞)명제)contradiction. ‘p 또는 부정: p [p∨∼p]’와 같이 모든 조건에서 참인true in all conditions 소위 항진문장은 세계가 존재하는 방식에 대해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p 그리고 부정: p [p&∼p]’와 같이 그 어떤 조건에서도 참일 수 없는 모순문장 역시 마찬가지이다. 두 문장은 뜻을 한계짓는limiting 사례들이다.

2  언어가 작동하는 방식을 설명하고자 하는 언어. 예컨대 그림이론 자체가 이러한 언어에 속한다. 한 언어가 다른 언어의 규약을 기술하는 데에 사용되는 일은 있을 수 있겠으나, 논리적 형식logical form 자체는 가능한 모든 언어에 공통적인 것이다. 논리적 형식 그 자체는 기술될 수 없다. 우리가 무언가를 묘사하고자 할 때 논리적 형식을 벗어날 수는 없다.” (4.041) 요컨대 논리적 형식은 형언될 수 없는ineffable 것으로서 모든 특정 표기법notation을 넘어서는 층위에 있다.

3  윤리적미학적종교적신비적인 가치를 진술하는 언어. 이러한 언어들은 세계 내에서 대상들이 배열된 우연적 사실들에 관해 무언가를 말하는 언어가 아니다.

 

이러한 언어들을 논의하는 단계에 이르러 Wiitgenstein사고를 한계짓기 위해 우리는 그 한계의 양 극단을 생각해보아야 한다는 유명한 말을 내뱉는다. 하지만 이러한 종류에 속하는 무의미nonsense한 언어(아니면 적어도 1번에 제시된 항진/모순명제)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왜냐하면 언어는 그것이 문자 그대로 말할 수 없는 것을 다만 보여줄 수는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논리학이나 그림이론을 배울 때, 혹은 가치에 대해 배울 때 우리는 분명 무언가를 배우긴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우리가 배우는 그것 자체를 말할 수는 없다. 언어는 아주 중요한 것들을 보여줄 수 있는 반면, 적절치 않은 데에 잘못 사용될 경우 언어는 우리를 혼란에 빠뜨릴 수도 있다.

Wittgenstein은 뜻을 한계짓는 종류의 무의미가 뜻을 결여한다: sinloss라고 표현한다. 이와 다른 종류의 무의미에 대해서는 무의미하다: unsinnig고 칭하는데, 이는 대략 자기-논박적이다self-defeating와 비슷하다. 이러한 더욱 심각한 종류의 무의미한 언어들 일부는 우리를 오도한다는 점에서, 뜻을 결여하는 언어들보다 더욱 위험하다.

 

4  비교적 덜 문제적인 종류의 무의미는 다음과 같다:

a  일반적인 문법에 반하는 문장: ‘Suzy Jane 그것 그것 그것’, ‘탁자 펜 홀더 책’.

b  문법적으로는 올바르게 형성되었지만 사전적으로lexicographically 문제 있는 어휘가 사용된 문장: “굴 때 낭끈한 오도와들은 팽돌하고 나사구하고 있었다.”

 

5  이에 비해 더욱 심각한 종류의 무의미는 다음과 같이 문법적사전적으로는 올바르지만 그림이론에 위배되는 언어들이다:

a  창백한 초록색 관념들이 사납게 잠자고 있다.”(Chomsky) “이 돌맹이는 비엔나에 관해 생각하고 있다.”(Carnap) 이러한 문장들의 문제는 정상적인 어휘들이 문법상 적형식으로 구성되었음에도, 적절한 뜻이 형성되지 못하는 방식으로 결합되었다는 점이다. 이 문장들은 하나의 적절한 그림을 형성하지 못한다. 이러한 문장들은 일견 정상적인 문장처럼 보이기에 그 무의미성이 교묘하게 은폐된다.

b  이 문장은 참이 아니다.’ 여기서 문제는 참이라고 말해질 수 있는 그림 내지 명제가 아무것도 없다는 점이다. ‘이 문장이라는 표현은 뜻을-형성하는 하나의 독립적인 문장을 지시하지 않는다.

 

Wittgenstein은 논리학이 천문학과 같은 여타 학문들과 동등한 층위에 있는 학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논리학은 사유의 전제조건으로서 모든 학문에 앞선다. 논리적 형식 자체가 형언 불가하기에 논리학은 본질적으로 말해질 수 없다. 또한 그는 철학에 관한 한 자신이 본질적인 모든 측면에서 철학적 문제에 대한 최종적인 해결책을 찾아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의 친구 Frank Ramsey1923년의 논평에서 지적한 사항을 몇 년 뒤 받아들임에 따라 Wittgenstein은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시인하게 된다.

 

이제 한편으로는 Wittgenstein前期 철학과 유사하되 절대적이거나 구도자스러운 면은 그보다 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Russell의 철학에 우호적인 스타일의 철학적 프로젝트를 살펴볼 차례이다. 바로 검증주의 철학Verificationist philosophy으로서 대표적인 두 인물 Alfred Jules AyerRudolf Carnap을 중심으로 그 이론을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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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Russell의 의미론

 

Russell의 과업

 

Frege로 하여금 뜻과 지시를 구분하도록 추동시킨 두 가지 문제는 공허한 단칭용어의 문제와 인지적 가치의 문제였다. 이번 장에서는 Russell의 의미론을 살펴보는 과정에서 그 두 문제를 다음과 같이 칭할 것이다:

 

1. 존재existence의 문제

2. 동일성indentity의 문제

 

첫 번째로 존재 문제란 다음과 같은 문장의 명백한 유의미성을 어떻게 설명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Kennedy 형제의 암살범the man who killed the Kenneys은 마피아 조직원이었다.

Vulcan은 뜨겁다.1)


1) (原註) 한때 천문학자들은 수성의 공전궤도 내에서 태양을 공전하는 행성이 있다고 믿었으며 그 행성을 Vulcan이라 칭하였다. 2장의 소박한 의미론의 두 문제절 참조.

 

BobbyJohn은 한 사람에 의해 살해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Kennedy 형제를 죽인 한 사람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Vulcan과 같은 행성 역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위 두 문장에서 단칭용어 ‘Kennedy 형제의 암살범‘Vulcan’은 아무것도 지시하지 않는 공허한 단칭용어이다. 그럼에도 분명 두 문장은 유의미하다. 뿐만 아니라 다음과 같은 문장이 참일 수 있다는 점 역시 존재 문제에 속한다:

 

JonesVulcan이 뜨겁다고 믿는다.

 

이 문장이 참이라는 사실은 Vulcan이 뜨겁다는 명제가 존재함을 함축하는데, 그 경우 ‘Vulcan’은 지시체를 갖지 않음에도 유의미해야 한다.

이보다 더욱 결정적이고 복잡한 종류의 존재 문제는 Frege도 만족스럽게 해결하지 못한 소위 단칭존재부정문의 문제이다. 다음 두 문장을 보라:

 

Ness호 괴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Vulcan은 존재하지 않는다.

 

두 문장은 유의미할 뿐만 아니라 참이다. 그런데 두 문장의 참을 의미론적으로 결정하는 절차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진행될 수는 없다: 단칭용어 ‘Ness호 괴물‘Vulcan’의 지시체를 찾아내어 그것들이 술어 은 존재하지 않는다를 만족하는지 여부를 결정한다. 이는 ‘Spot은 배고프다의 진리치를 결정하기 위해 단칭용어 ‘Spot’의 지시체를 찾아내어 그것이 술어 은 배고프다를 만족하는지 여부를 결정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위 두 문장의 경우 ‘Ness호 괴물‘Vulcan’의 지시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문장의 술어가 만족되는지 여부를 가려낼 수 있게 해줄 대상 자체가 없다.

두 번째로 동일성 문제란, -지시적 단칭용어가 나타나는 문장들이 Frege가 말한 인지적 가치의 측면에서 상이할 수 있는 이유를 어떻게 설명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이 문제는 다음과 같이 참인 두 문장 쌍에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금성 = 금성.

금성 = 개밥바라기.

 

두 문장 모두 참이긴 하지만 인지적 가치의 측면에서는 분명 상이하다. 다음 두 문장 역시 동일한 대상에 대해 동일한 것을 말하는 문장들이 각기 다른 인지적 가치를 지닐 수 있음을 보여준다:

 

금성은 행성이다.

개밥바라기는 행성이다.

 

물론 후자의 두 문장 쌍은 ‘x=y’ 형식의 동일성 진술이 아니지만 금성과 개밥바라기가 동일하기 때문에, 소박한 의미론과 같이 지시의 측면에서만 의미를 설명하는 이론은 두 문장의 차이를 만족스럽게 설명해내지 못한다.

이렇듯 언어표현들이 -지시적임에도 상이한 인지적 가치를 지닐 수 있다는 점으로 인해, 명제적 태도를 귀속시키는 문장들에서는 다음과 같이 대체성 원리가 성립하지 않는 듯하다:

 

GeorgeScott = Waverley의 저자the author of Waverley인지 여부를 궁금해했다.

GeorgeScott = Scott인지 여부를 궁금해했다.

 

Russell이 직접 들었던 이 예시에 따르면 후에 George 4세가 된 섭정 왕자 George는 스코틀랜드의 그 유명한 소설의 저자가 시인 Walter Scott인지 여부를 궁금해했다고 하며, 실제로 Scott은 그 작품의 저자이다. [따라서 위의 첫 번째 문장은 참이며, 대체성 원리에 따르면 그 문장에서 Waverley의 저자를 그와 -지시적인 ‘Scott’으로 대체한 두 번째 문장 역시 참이어야 한다.] 하지만 그는 ScottScott인지 여부를 궁금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다음 두 문장 역시 진리치를 달리할 수 있다:

 

George는 금성이 행성이라고 믿는다.

George는 개밥바라기가 행성이라고 믿는다.

 

[앞서 외연적 맥락에서 나타난 금성-개밥바라기 사례와 마찬가지로, 내포적 맥락을 갖는 후자의 두 문장 쌍에서 명사절에 있는 문장들은 전자 쌍에서처럼 ‘x=y’ 형식의 동일성 문장이 아니지만 -지시적 단칭용어가 나타나고 있기에, 소박한 의미론은 두 문장의 진리치 차이를 적절히 설명해내지 못한다.]

 

Frege는 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뜻과 지시를 구분하였지만 Russell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한 구분을 상정하지 않고도 존재 문제와 동일성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더욱 경제적인 방식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Russell은 의미가 지시일 뿐이라는 소박한 의미론의 주요 원리를 받아들이되, 두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Frege주의적인 뜻을 상정해야 할 필요성을 다른 방식으로 해소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한다.

 

 

한정 기술구 이론

 

1장에서 살펴보았듯이 단칭용어는 단순한 것과 복합적인 것으로 나뉠 수 있다. 단순 단칭용어는 파리Pris’, ‘Michelangelo’와 같은 고유명이다(물론 대부분의 人名‘Winston Churchill’과 같이 형태상 둘 이상의 단어들로 이뤄지긴 하지만, 이러한 사소한 복잡함은 도외시한 채 인명을 포함한 모든 고유명을 단순 단칭용어로 간주하자). 반면 복합 단칭용어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들 수 있다:

 

프랑스의 수도the capital of France

Alexander의 아버지

가장 높은 지능을 가진 사람the most intelligent human being

 

중요한 것은 모든 복합 단칭용어들이 다음과 같은 형식의 표현으로 표기될 수 있다는 점이다:

 

F(F한 그것)the F

 

여기서 F는 임의의 술어이다. 예컨대 복합 단칭용어 ‘Alexander의 아버지Alexander’s father‘Alexander의 그 아버지the father of Alexander표기될 수 있다.2)


2) (原註) 사실 이 예시에는 좀 복잡한 데가 있다. 가령 ‘Sally의 선생님Sally’s teacher‘Sally의 아버지가 유일성uniqueness을 함축하는 방식으로 유일성을 지니지는 않는다. Sally의 아버지가 유일성을 갖는 이유는 의미론적 사안이라기보다는 생물학적인 사실에 기인한다. 반면 ‘Sally의 선생님이 말하고 있었다의 맥락에서 ‘Sally의 선생님‘Sally의 어떤 선생님과 동등하며 따라서 단칭용어는 아닌 셈이다. ‘Sally의 선생님이나 ‘Sally의 아버지와 같은 표현들은 애매한ambiguous 표현으로 간주될 수 있으며, 그 애매성은 ‘Sally의 그 선생님the teacher’, ‘Sally의 어떤 선생님a teacher’, ‘Sally의 아무 선생님이든any teacher과 같이 양화사가 보충된 형태로 변환됨으로써 해소될 수 있다. 그럴 경우 의도된 양화사가 무엇인지[즉 어떤 양화사가 보충되어야 하는지]는 통상적으로 대화가 이뤄지는 맥락에 따라 결정된다.


F’ 형식을 지닌 단칭용어를 Russell한정 기술구(限定 記述句)definite description라 칭하였다. Russell의 기술구 이론theory of description이란 정관사 the라는 단어에 관한 이론이다. 1장에서 규정한 바에 따르면 문장에서 단칭용어를 제거하고 남는 것이 술어이다. 따라서 한정 기술구가 포함된 임의의 문장은 다음 형식을 지닌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3):


3) (原註) 이 역시 조금 복잡한 데가 있다. 이에 대해 명백한 반례가 되는 양상(樣相)modal 어휘나 명제적 태도 연산자가 포함된 표현들은 일단 도외시하기로 한다.

 

(1) FG하다(F한 그것은 G하다)The F is G.

 

여기서 술어 ‘𝛼G하다는 복합적일 수도 있다.

이제 다음 예시를 생각해보자:

 

(2) 현재 프랑스의 왕the present King of France은 현명하다.

 

Frege의 이론에 따르면 이 문장은 뜻을 표현하기에 유의미하긴 하지만, ‘현재 프랑스의 왕이 지시체를 갖지 않기에 참도 거짓도 아니다. Russell은 이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Frege가 말했듯이 뜻을 표현하는 유의미한 문장은 진리-조건을 표현하기 때문에, 즉 표현되는 명제가 참이라면 세계가 그러해야 할 하나의 방식을 표현하기 때문에, 반드시 참이나 거짓 둘 중 하나여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모름지기 문장은 세계가 명제의 진리-조건대로 존재하기에 참이든가 그렇지 않기에 거짓이든가 둘 중 하나여야 한다. (2)는 분명 특정 진리-조건을 표현한다. 따라서 참이 아니라면 거짓이어야 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유의미하되(즉 명제를 표현하되) 참이 아닌 문장에 대해 거짓이라 말하는 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진리치 공백을 일단 받아들이면 어떤 문장이 유의미하면서도 참이 아닐 경우, 참도-거짓도-아닌 문장과 거짓인 문장 간의 구분이 불분명해지며, 이는 언어에 대한 우리의 직관적인 이해방식과 상충한다. 하나의 진리-조건이 표현된다면 그 조건은 분명 만족되거나 만족되지 않거나 둘 중 하나라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2)의 진리-조건은 명백하다. Russell에 따르면 (2)는 다음과 같은 존재 구절existence clause, 유일성uniqueness 구절, 정언적categorical 구절 등의 세 문장이 연언문으로 결합된 것과 논리적으로 동치이다:

 

(2a) 현재 프랑스의 왕이 존재한다.

(2b) 현재 프랑스의 왕이 하나보다 많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2c) 모든 현재 프랑스의 왕은 현명하다.

 

조금만 숙고해보면 (2)가 참이기 위해 (2a)(2c)는 전체로서는 충분조건이며 개별적으로는 필요조건임을 알 수 있다. 세 문장의 연언은 (2)와 필연적으로 동치이다necessarily equivalent. 이를 일반화하자면 (2a)(2c)가 형식화된 다음 세 문장의 연언은 형식 (1)과 필연적으로 동치이다:

 

(1a) 그러한 x가 존재한다 (Fx).

(x)Fx

(1b) 부정: 그러한 xy가 존재한다 (xyFxFy).

(x)(y)(xyFxFy)

(1c) 모든 x에 대해 (FxGx).

(x)(FxGx)

 

이러한 분석에 따르면 (1)정확히 하나의 F가 존재하며, 모든 FG이다를 말하고 있는 셈이다. 또한 (1a)(1c)의 연언은 다음과 같이 더욱 축약된 식과 논리적으로 동치이다:

 

(1) 그러한 x가 존재한다 (Fx 모든 y에 대해 (Fyy=x) Gx). 4)

(x)(Fx(y)(Fyy=x)Gx)


4) (原註) 이 식 역시 다음과 같이 더 축약될 수 있다: ‘그러한 x가 존재한다, 모든 y에 대해 ((Fyx=y)Gx)’ [(x)(y)((Fyx=y)Gx)].

 

여기서 내부 개방문을 구성하는 하위-sub-formula 모든 y에 대해(Fyy=x)[(y)(Fyy=x)]’는 불명료하게 여겨질 수도 있다. 좀 더 명확히 하자면 이는 다음과 동치이다:

 

모든 y에 대해 (yx부정: Fy)

(y)(yx→∼Fy)

 

이는 ‘x를 제외한 모든 것은 -F이다non-F(F하지 않다)’를 말하고 있다. Russell이 주장하는 요지는 (1) 형식을 지닌 모든 문장이 (1) 형식의 문장으로 분석되는바 양자는 동일한 것을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RussellFG하다‘GF가 존재한다There is an F that is G[몇몇 FG하다Some F is G]’ 간의 유사성에 주목하면서 다음 사항을 강조한다: Russell에 관점에서 전자는 정확히 하나의 FG임을 말하고 있는 반면, 후자는 적어도at least 하나의 FG임을 말하고 있다. 다르게 말해 라는 정관사는 일종의 양화사로서, ‘가 존재한다’, ‘몇몇의과 같은 존재 양화사 및 모든’, ‘각각의와 같은 보편 양화사와 동일한 층위에 속하는 언어표현이다. 다음 어구들을 보자:

 

F

몇몇 F

어떤an F

모든 F

각각의 F

 

이것들은 모두 술어 G하다와 결합되어 온전한 문장을 형성할 수 있으며, 술어 F가 지칭하는 대상의 존재 여부와 무관하게 위 어구들은 의미를 갖는다. 다르게 말해 위 표현들은 모두 기술구(記述句)description이다. 그 중 첫 번째만이 한정 기술구definite description이며 나머지는 한정 기술구indefinite description이다. [한정적이든 한정적이든 모든 기술구는 그것이 기술하는describe 사물의 존재 여부와 무관하게 유의미하다.]

소박하게 생각하면 한정 기술구 F’1항 술어의 공란에 삽입됨으로써 하나의 문장을 형성하기에, 이름 ‘Sigmund Freud’와 같은 지시적 표현referring expression 즉 진정한genuine 단칭용어인 것처럼 여겨지지만, 위와 같은 Russell의 고찰에 따르면 그렇지 않다. 앞선 분석에 따라 (1)(1) 내지 (1a)(1c)의 연언으로 분석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FG하다는 단순한 형식인 ‘Fa’(‘aF하다’)와 완전히 다르다. (1) 내지 (1a)(1c)의 연언과 다르게 ‘Fa’는 가능한 가장 단순한 형식의 원자적 서술문이다. 요컨대 FG하다논리적 형식logical form표층 형식surface form(문법적grammatical 내지 언어적linguistic 형식)은 매우 다르다.

 

한 가지 주목할 사항으로서, Russell은 정관사 를 분석하는 이러한 방법을 맥락적 정의(定義)contextual definition 혹은 사용--정의definition-in-use라 칭하였다. 우선 이와 쌍을 이루는 명시적explicit 혹은 직접적direct 정의를 먼저 살펴보자. 한 기호symbol를 명시적으로 정의한다는 것은, 주어진 기호를 문법적으로 그와 동일한 범주에 속하는 다른 기호로 대체하는 것이다(이 때 정의되는 표현[정의항definiendum]은 단순하며, 정의하는 표현[정의항definiens]은 대체로 복합적이다). 가령 총각미혼 남성으로 정의하는 것이 명시적 정의의 대표적 사례로서, 양자는 동일한 문법적 범주에 속하는 동등한 표현들이다. 명시적 정의는 대체로 다음과 같이 쌍조건문 형식으로 주어진다:

 

정의df: 모든 x에 대해, x는 미혼 남성인 경우 그리고 오직 그 경우에 총각이다.

 

이 정의에 의거하여 총각이라는 기호는 어디서든 미혼 남성으로 대체될 수 있으며 그 역 또한 성립한다vice versa.

반면 한 기호를 맥락적으로 정의한다는 것은, 주어진 기호를 포함하고 있는 문장 전체whole sentence를 그 기호가 포함되어있지 않은 다른 문장으로 변환하는 규칙을 규정하는 것이다. 이에 Russell또는 F’를 정의하되, 그와 동등한 또 다른 하나의 단어나 기호를 제시하는 게 아니라, 그 단어가 포함된 다음 형식의 임의의 문장

FG하다.

 

에 대해 이 문장의 내용과 동일한 내용을 그와 다른 문장으로 -표현re-express할 수 있게 해주는 방법을 제시한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도 또는 F’를 대체할 다른 단칭용어는 주어지지 않는다. 이러한 맥락적 정의에 따라 분석된 결과가 (1)로서, (1)(1)가 축약된 형태였던 셈이다. 따라서 (1)에는 F’를 대체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 아무런 기호도(단순하든 복합적이든) 포함되어있지 않다. [한정 기술구 F’는 여타 단칭용어로 대체되는 게 아니라 분석에 의해 사라진다.]

 

[상술하였듯 기술구의 경우 기술되는 사물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기술구가 포함된 문장은 유의미한 반면,] Russell논리적 고유명logically proper name이라 칭한 표현의 경우 그것이 포함된 문장은 이름의 담지자가 존재하는 경우에만 유의미하다. ‘a’가 논리적 고유명으로 의도된 단칭용어라면, ‘a’가 지시체를 결여하는 경우 문장 ‘Fa’는 무의미하다.5) 반면 앞서 살펴본 Russell의 분석에 따르면, (1) ‘FG하다의 유의미성은 그 F가 존재한다는 것을 선제(先題)presupposition하지 않는다. [즉 기술구의 적용대상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1)은 유의미하다.] F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1)은 거짓이며 따라서 결코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1)의 의미는 (1)에 의해 더욱 명백하게 주어진다. 이것이 바로 한정 기술구가 진정한 지시적 표현이 아니라는(또는 한정 기술구가 단독적으로는 의미를 갖지 않는다have no meaning in isolation) 말의 핵심이다. 이런 연유로 Russell은 그 F가 존재하는 경우 F’와 그 F 간의 관계를 지시관계 내지 의미관계가 아니라 지칭denoting관계라고 구분하여 칭하였다(다만 우리의 논의에서는 그의 용어법을 엄격히 따르지 않을 것이다). [지시관계는 언어표현의 지시체가 존재하는 경우에만 성립하는 반면 지칭관계는 지시체가 존재하지 않더라도 성립한다.]


5) 1장의 역사적 사항절 및 이번 장의 초입에서 언급되었듯이 Russell이 의미와 지시를 동일시하는 소박한 의미론의 주요 원리를 받아들이는 지점이 바로 이곳이다. 다만 본문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Russell은 통상적인ordinary 모든 고유명이 아니라 그가 칭한바 논리적 고유명logically proper name에 한해 소박한 의미론을 받아들인다. 그가 말하는 논리적 고유명과 그 지시체가 정확히 무엇인지에 관해서는 이후의 직접대면에 의한 지식과 기술구에 의한 지식절에서 상세히 논의된다.

 

마지막으로 주목할 사항이 있다. Russell의 이론에 따르면 현재 프랑스 왕은 현명하다가 거짓이기 때문에, 부정문negation현재 프랑스 왕이 현명하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는 참이다. [여기서 핵심은 전자의 부정문이 우리의 직관적인 생각과는 다르게 현재 프랑스 왕은 현명하지 않다가 아니라는 점이다.] 여기서 RussellFG하다내적 부정문internal negation외적external 부정문을 구분한다. 먼저 내적 부정문은 다음 형식을 지니고 있다:

 

FG하지 않다The F is not-G. (내적 부정)

 

이는 정확히 하나의 F가 존재하며 그것은 G하지 않다를 의미한다. 반면 외적 부정문은 다음 형식을 취한다:

 

부정: FG하다. (외적 부정)

 

이는 그 FG하다는 것이 단지 거짓임을 의미한다. [따라서 부정되기 이전의 원래 문장이 거짓이어서] 외적 부정문이 참이더라도 그에 대응하는 내적 부정문은 [원래 문장과 마찬가지로] 거짓일 수 있다. [‘FG하다FG하지 않다가 모두 거짓이라 해서 배중률이 위배되는 것은 아니다. 표층적인 문법적 수준에서 보이는 바와는 다르게 두 문장은 논리적의미론적인 수준에서는 애초에 모순관계가 아니었던 것이다.] 예시로 다음 두 문장을 보자:

 

Ness호 괴물은 헤엄치지 않는다. (내적 부정, 거짓)

부정: Ness호 괴물은 헤엄친다. (외적 부정, )

 

전자가 참이기 위해서는 Ness호 괴물이 존재하고 헤엄치지 않는다는 것이 요구되는 반면, 후자가 참이기 위해서는 그 괴물이 존재하고 헤엄치지 않거나 혹은 그 괴물이 아예 존재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이기만 하면 충분하다. 이에서 알 수 있듯이 내적 부정문의 진리-조건은 그에 대응하는 외적 부정문의 진리-조건을 함축하는 반면 그 역은 아니다. [이를 다르게 말하면 외적 부정문의 거짓-조건은 내적 부정문의 거짓-조건을 함축하되 그 역은 아니다. 그렇기에 위 사례처럼 내적 부정문이 거짓이면서도 외적 부정문은 참인 사례가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누차 강조되었듯이 이는 기술구의 적용대상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에 발생한다(기술구의 적용대상이 존재하되 단지 술어를 만족하지 않는 경우라면 내적 부정문 역시 참일 것이다).]

내적/외적 부정문을 형식화하여 표기하자면 다음과 같다:

 

내적 부정:

그러한 x가 존재한다 (Fx 모든 y에 대해 (Fyy=x) 부정: Gx).

(x)(Fx(y)(Fyy=x)Gx)

 

외적 부정:

부정: 그러한 x가 존재한다 (Fx 모든 y에 대해 (Fyy=x) Gx)).

(x)(Fx(y)(Fyy=x)Gx)

 

형식문에서 더욱 명료히 드러나듯이 내적/외적 부정문은 부정 기호의 위치에 따라 구분된다. 다소 전문적인 용어로 설명하자면, 내적 부정문의 경우 부정 연산자는 한정 기술구(즉 양화사)범위scope 내부에 나타나는바, 후자는 전자에 비해 넓은wide 범위를 취한다. 외적 부정문의 경우 부정 연산자는 한정 기술구의 범위 외부에 나타나는바, 후자는 전자에 비해 좁은narrrow 범위를 취한다.

 

 

기술구 이론의 적용

 

-는 존재 문제를 다루고 은 동일성 문제를 다룬다.

 

Frege의 이론에서 다음 문장은 참도 거짓도 아니다:

 

(3) Kennedy 형제의 암살범은 쿠바인이다.

 

이 문장은 특정 명제를 표현하기에 유의미하긴 하지만 참도 거짓도 아니다. 그 이유는 2장에서 살펴보았듯이, Frege는 이 문장을 다음 형식을 지닌 것으로 분석하고 있으며

 

Fa

 

여기서 단칭용어 ‘a’가 지시체를 결여하는 경우 지시의 구성성 원리에 따라 문장 전체 역시 지시체 즉 진리치를 결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도식에 따르면 (3)은 단칭용어 ‘Kennedy 형제의 암살범에 술어 은 쿠바인이다를 귀속시키고 있는바, 그 술어가 그러한 대상에 적용될 경우 참이며 그렇지 않을 경우 거짓이다. (3)은 그 부정문이 참일 경우 그리고 오직 그 경우에 거짓이다. 하지만 단칭용어 ‘Kennedy 형제의 살인범이 지시체를 결여하기에 (3)의 진리-조건이 만족되는지 여부를 판가름하는 이러한 절차는 시작될 수조차 없으며 그에 따라 아무런 진리치도 결정되지 못한다. 반면 상술하였듯 Russell의 이론에서 (3)은 거짓으로 판명된다. Russell의 기술구 이론에 따르면 ‘Kennedy 형제의 암살범은 단칭용어가 아니라 기술구로서, 그 기술구가 분석됨에 따라 (3)의 논리적 형식이 ‘Fa’ 형식과는 판이한 것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기술구가 분석된 형식의 진리-조건은 만족되거나 만족되지 않거나 둘 중 하나인 것으로 판명될 수 있다.]

 

다음 문장을 생각해보자(여기서 ‘Ness호 괴물‘Ness호에 사는 (유일한) 괴물을 의미하는 한정 기술구라고 가정한다):

 

(4) Ness호 괴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2장에서 설명하였듯이 존재한다라는 단어는 두 가지 방식으로 해석 가능하다. 첫 번째로, ‘은 뚱뚱하다’, ‘은 현명하다처럼 통상적인 1-수준 술어first-level predicate로 간주될 수 있다. 이렇게 해석된다면 존재nonexistence술어인 은 존재하지 않는다do not exist는 모든 대상에 대해 거짓이기에, (4)와 같은 형식의 모든 문장은 결코 참일 수 없다. 다시 Frege의 이론을 떠올려보라. (4)의 진리치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Ness호 괴물의 지시체를 찾아내어 존재 술어가 그에 대해 참인지(즉 그것이 존재 술어를 만족하는지) 여부가 판가름되어야 한다. ‘Ness호 괴물이 지시체를 갖는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4)는 거짓으로 판명된다. (4)가 정말 거짓이라면 Frege 이론에는 아무 문제가 없겠지만, 문제는 (4)가 분명 참이라는 점이다. (4)가 참이라는 것이 Frege 이론 내에서 어떻게 결정될 수 있겠는가? ‘Ness호 괴물이 치시체를 갖지 않는다면 (4)참도 거짓도 아닌 것으로 드러나는바 당연히 참이 아니다. 이는 Frege 이론에 따라 (3)이 참도 거짓도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던 것과 동일한 귀결이다.

존재한다를 통상적인 1-수준 술어로 해석할 경우 Russell의 이론에서 (4)는 참인 것으로 드러난다. 하지만 FregeRussell 모두 존재한다에 대한 이런 관점을 채택하지 않으며, ‘존재한다에 대한 두 번째 해석으로서 존재는 존재 양화사existential quantifier에 의해서만 표현된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예를 들어 개가 존재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면 술어 은 개다에 양화사를 부가하여6) 그러한 x가 존재한다 (x는 개다)[(x)Dx]’와 같이 말해야 한다. 반면 단칭용어에는 존재 양화사[(는 물론이요 보편 양화사 역시)]가 유의미하게 결합될 수 없다. 예컨대 Fido가 존재함을 말하기 위해 그러한 x가 존재한다 (Fido)[(x)f]’라 표기할 수는 없다. 존재표현에 대한 이러한 관점에 따르자면 (4)는 어떻게 분석되는가? Frege 이론에서 문제가 되는 사안은 [‘존재한다를 양화사로 해석하더라도] (4)의 내용을 표현할 직접적인 방도가 없다는 것이다. ‘Ness호 괴물이 단칭용어라면, (4)에는 양화사가 결합됨으로써 문장을 형성할 수 있게끔 해주는 술어 자체가 없는 셈이다.7) [(4)Fido 문장의 경우처럼 그러한 x가 존재한다 (Ness호 괴물)[(x)n]’과 같은 -적형문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6) 논리학적으로 엄밀하게 말하자면, 술어 ‘𝛼는 개다[D𝛼]’가 나타나는 개방문 ‘x는 개다[Dx]’의 변항을 존재 양화사로 속박해야 한다.

7) 논리학적으로 엄밀하게 말하자면, 변항과 결합되어 개방문을 형성한 뒤 그 변항을 양화사가 속박할 수 있게끔 해줄 술어가 없는 셈이다.


(4)의 진정한 형식을 다음과 같이 분석해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4) 부정: 그러한 x가 존재한다 (x=Ness호 괴물) [(x)x=n]

 

물론 앞서와 다르게 이 문장에는 ‘𝛽=Ness호 괴물[𝛽=n]’이라는 술어가 포함되어있긴 하다. [존재 양화사가 결합되어 적형문을 형성할 수 있도록, 의미상 적당한 술어인 동일성 관계술어가 도입된 셈이다.] (4)에서 이 술어는, 좌변이 존재 일반화된 뒤 문장 전체가 부정된 동일성 진술의 맥락에서 나타나고 있다. 동일성 진술은 좌변에서 명명된 대상이 우변에서 명명된 대상과 동일한 경우 참이며 그렇지 않을 경우 거짓이다. 따라서 (4) 전체는 동일성 진술 형식의 내부 개방문 ‘x=Ness호 괴물이 좌변의 x로 취해지는 모든 대상에 대해 거짓이라 말하고 있다.8) 하지만 우변에서 명명되는 대상은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동일성 진술 형식의 내부 개방문이 만족되는지 여부는 여전히 결정되지 않]는다. 이에서 알 수 있듯이 Frege 이론이 단칭존재부정문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궁극적인 결점은, ‘Ness호 괴물과 같은 표현들의 의미론적 기능을 지시적 용어라고 간주하는 데에 있다.


8) 사실 이는 ‘(x)xn’이며, 이는 부정 연산자와 보편/존재 양화사가 결합된 문장들 간 동치쌍에 의해 (4)와 동치이다.


Russell의 기술구 이론에 따르면 (4)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4)에 나타나는 ‘Ness호 괴물은 지시적 용어가 아니라 한정 기술구로 간주되며 이는 양화사를 이미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되기 때문이다. ‘F’를 술어 Ness호 괴물이다로 해석한다면 (4)의 논리적 형식은 다음과 같다:

 

(4✻✻) 부정: 그러한 x가 존재한다 (Fx모든 y에 대해 (Fyy=x))

(x)(Fx(y)(Fyy=x))

 

[이 문장은 모든 x에 대해, 연언문 형식의 내부 개방문 ‘Fx모든 y에 대해 (Fyy=x)[Fx(y)(Fyy=x)]’이 거짓이라 말하고 있다. 연언문이 거짓이기 위해서는 연언지 중 하나만 거짓이어도 충분하며 첫 번째 연언지인 ‘Fx’가 모든 x에 대해 거짓이므로 (4✻✻) 전체는 참이다. 이는 원래의 문장 (4)가 참이라는 우리의 직관에 부합한다.] (물론 Ness호 괴물이 하나보다 많더라도[(Ness호 괴물이 정확히 하나임을 말하고 있는 두 번째 연언지 모든 y에 대해 (Fyy=x)’가 거짓이더라도] (4✻✻)는 참이 된다.)

전 장에서 지적하였듯이 이러한 문제는 일반존재부정문에서는 발생하지 않으며 오직 단칭존재부정문에서만 발생한다. 예컨대 FregeRussell용은 존재하지 않는다의 논리적 형식이 모든 x에 대해 (x는 용이 아니다)[(x)Dx]’, 또는 그와 동치인 부정: 그러한 x가 존재한다(x는 용이다)[(x)Dx]’로 분석된다는 데에 동의할 것이다. [요컨대 일반존재부정문의 경우 과 같은 일반용어가 문법적으로 주어 자리에 오긴 하지만 기실 의미론적으로는 단칭용어가 아니라 은 용이다와 같은 술어 역할을 하기 때문에, 술어의 외연이 집합이더라도 공허한 단칭용어가 포함된 단칭존재부정문의 경우와 같은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기술구 이론은 동일성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가? Russell이 들었던 George 4세에 관한 예를 다시 살펴보자:

 

(5) George 4세는 Scott = Waverley의 저자인지 여부를 궁금해했다.

(6) George 4세가 Scott = Scott인지 여부를 궁금해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두 문장은 분명 참이며, 이와 더불어 다음 문장 역시 참이다:

 

(7) Scott = Waverley의 저자.

 

Waverley의 저자를 지시적 용어로 간주한다면, (5)(7)로부터 [대체성 원리에 따라] 다음을 추론할 수 있다:

 

(8) George 4세는 Scott = Scott인지 여부를 궁금해했다.

 

이는 (6)과 명백히 모순된다. 요컨대 [대체성 원리와] (7)에 따르면 ‘Scott’가 나타나는 곳마다 그것을 Waverley의 저자로 대체할 수 있으며, 그에 따라 (5)로부터 (8)을 추론할 수 있다. 하지만 참인 전제들로부터 올바른 추론규칙에 의해 도출된 (8)(6)과 모순된다. [전제들이 참이고 도출과정이 타당하므로, 남은 문제는 Waverley의 저자를 지시적 용어로 간주한 데에 있는 셈이다.]

기술구 이론에 따르면 이러한 난점은 다음과 같이 해결될 수 있다: 우선 Waverley의 저자는 한정 기술구이다. 동일성 문장 (7)은 그 기술구를 포함하는 FG하다의 형식을 지니고 있는바, 이 경우 ‘F’Waverley의 저자이다이고 ‘G’=Scott(Scott과 동일하다)’이다. 이에 (7)을 기술구 이론에 따라 분석하여 다음과 같이 고쳐쓴다:

 

(9) 그러한 x가 존재한다 (xWaverley의 저자이다모든 y에 대해 (yWaverley의 저자이다y=x)x=Scott).
(x)(Wx(y)(Wyy=x)x=c)

 

그런데 (7)은 명제적 태도 문장인 (5)에서 명사절로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5) 역시 다음과 같이 분석된다:

 

(5) George 4세는 다음이 참인지 여부를 궁금해했다:
그러한 x가 존재한다 (xWaverley의 저자이다모든 y에 대해 (yWaverley의 저자이다y=x)x=Scott).
Wg[(x)(Wx(y)(Wyy=x)x=c)]
[(편의를 위해 ‘Wx[p]’‘xp가 참인지 여부를 궁금해했다를 의미하는 명제적 태도 연산자로 도입하자.)]

 

(5)의 진정한 논리적의미론적 형식인 (5)(6)과 모순되지 않는다. (5)에서 나타나는 단칭용어란 (‘George 4Waverley를 제외하면) ‘Scott’ 뿐이며, 따라서 (7)에 의거한다고 해도 (5)로부터 (8)을 도출할 수는 없다. 한정 기술구 Waverley의 저자Russell이 말했듯이 분석에 의해 사라진다disappear”. 핵심은 원래의 문장 (5)에는 겉보기와 다르게 ‘Scott’로 대체될 단칭용어가 없었다는 점[Waverley의 저자는 본디 단칭용어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문제가 남아있다. 다음이 참이라고 가정해보자:

 

(10) Mary는 귀신 고블린이라고 믿는다.

 

이로부터 다음과 같이 추론할 수 있다: 귀신과 고블린 모두 존재하지 않으므로 두 술어 은 귀신이다은 고블린이다-외연적이며 따라서 상호대체 가능하다. 이에 위 문장으로부터 ‘Mary는 귀신 귀신이라고 믿는다가 도출된다. 요컨대 (Frege와 마찬가지로) 동일한 외연을 갖는 술어들이 -지시적임을 받아들인다면 Russell 역시 문제에 봉착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Russell-외연적 술어들이 각기 다른 실체, 예를 들면 속성property 또는 보편자(普遍者)universal를 지시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이에 대해서는 차후에 더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위장된 한정 기술구로서의 이름

 

Russell은 존재 문제와 동일성 문제가 한정 기술구뿐만 아니라 고유명의 경우에서도 발생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이 공허한 고유명이 나타나는 단칭존재부정문은 분명 유의미하면서 참이다:

 

(11) Pegasus는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지시적 고유명이 나타나는 다음 세 문장은 일관적인 듯하다:

 

(12) JohnGeorge Eliot이 작가라고 믿는다.

(13) JohnMariane Evans가 작가라고 믿는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14) George Eliot = Mariane Evans.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Russell은 통상적인 고유명ordinary proper name실제로는 지시적 표현이 아니라 단지 위장된 한정 기술구disguised definite description라고 주장하였다. 예컨대 존재 문제의 사례로 제시된 고유명 ‘Pegasus’의 실제 의미는 한정 기술구 형태의 날개 달린 말the winged horse과 같은 것이 된다. [이 기술구는 앞서 살펴본 기술구 이론에 따라 분석되고, 그 결과 나타나는 술어 은 날개 달린 말이다를 만족하는 대상이 존재하지 않기에 (12)는 참인 것으로 판명된다.] 이러한 방책은 [고유명이 그 지시체와 결부된 속성이나 사항들을 기술하는 뜻을 갖는다는] Frege의 이론과 유사해 보인다. 하지만 2장에서 살펴보았듯이 Frege의 이론은 (12)가 유의미하면서도 진리치를 갖는다는 점을 설명하지 못하는 반면 Russell의 이론은 이를 만족스럽게 설명해낸다. Frege 이론은 (12)가 유의미하되 참도 거짓도 아니라고 판정하지만, Russell의 기술구 이론은 ‘Pegasus’날개 달린 말이 위장된 형태의 기술구로 간주하여 이를 분석해낸 뒤 분석된 문장이 참임을 결정할 수 있다. 이는 우리의 직관에 부합한다.

동일성 문제의 사례로 제시된 ‘George Eliot’은 어떠한가? ‘Pegasus’와 달리 이러한 고유명의 경우엔 이름과 결부된 의미를 갖는 단 하나의 한정 기술구가 있다고 보기 어려운 듯하다. 예컨대George Eliot에 대해 AMiddlemarchDaniel Deronda의 저자로만 알고 있고, BSilas MarnerFloss 강변의 물방앗간의 저자로만 알고 있다 해보자. 그럼에도 AB 둘 다 ‘George Eliot은 독일 철학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는 문장을 무리 없이 이해할 것이다. 이러한 점에 착안하여 Russell은 각 고유명이 특정한 하나의 한정 기술구와 동등한 것은 아니라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한 사람이 통상적인 고유명을 사용하거나 이해understand할 때마다, 그 고유명은 그 사람의 생각 속에서 특정한 하나의 한정 기술구와 동등하다. 이를 일반화하자면, 고유명 ‘a’가 나타나는 임의의 문장 a에 대해 다음이 성립한다:

 

임의의 주체subject B와 임의의 고유명 ‘a’에 대해, B‘a’를 문장 a에서 사용할 때마다, B에게는 aF가 동의적인 문장이라 받아들여지는 그러한 하나의 한정 기술구 F’가 존재한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고유명은 다소 특이한 성격을 갖는바, 통상적인 고유명이 실제로 사용되는 경우 그 고유명은 하나의 한정 기술구가 축약된 것과 마찬가지이되, 사용될 때마다 항상 동일한 기술구가 축약되는 것은 아니다.

 

 

직접대면에 의한 인식과 기술구에 의한 인식

 

내가 Wiggins 씨라 불리는 이를 마을 빵집 주인으로만 알고 있고 그에게 딸이 하나 있다는 사실은 모른다고 하자. 당신은 동일인 Wiggins 씨를 당신의 친구 Esmeralda의 아버지로만 알고 있고 그가 종사하는 직업은 모른다 하자. 이 경우 Frege에 따르면, 내가 ‘Wiggins 씨는 참 재미있는 분이셔라 말한다면 당신은 나의 진술을 이해하는 것처럼 반응하겠지만, 나의 진술을 나는 마을 빵집 사장님은 참 재미있는 분이다로 이해하고 당신은 ‘Esmeralda의 아버지는 참 재미있는 분이다로 이해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의 의사소통이 이루어질 수 있게 해주는 공통적인 토대란 무엇인가? 우리가 공통으로 이해하는 아무런 명제가 없는데도 말이다.

이러한 난점에 대해 Frege는 고유명의 지시체에 대해 대화 참여자들 간 공통 지식이 없더라도[즉 동일한 지시체를 결정해주는 각기 다른 뜻들을 이해하고 있더라도], 일상적이고 -과학적인non-scientific 목적에서라면 어떻게든 조악한 방식으로나마 의사소통이 이뤄진다고 생각하였다. 언어표현의 지시체가 동일하기만 하다면 일상적인 의사소통이 이뤄지는 데에는 그다지 큰 무리가 없으며, 그 경우 우리는 다소 격하된 의미의 의사소통을 하는 셈이다.

Russell 역시 [고유명을 의미론적으로 Frege의 뜻과 유사한 위장된 한정 기술구로 간주하기에] 다소 동일한 난점을 지니고 있지만 Frege에 비해 좀 더 공들인 해답을 내놓는다. Russell을 따라 고유명이 실제로는 한정 기술구가 축약된 것이라 해보자. 그렇다면 진정한 지시적 표현이란 과연 있는가? Russell이 말한 논리적 고유명logically proper name이라는 것이 있는가?

[지시체의 존재를 선제하는 진정한 지시적 표현, 지시체가 있는 경우에만 유의미한 논리적 고유명이] 만약 없다고 한다면 받아들이기 어려운 귀결을 가져온다. 아무런 지시적 표현이 없다면 아무런 원자문장도 전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원자문장이 존재하지 않음에 따라 ‘FaRab’같은 진리-함수적 복합문장 역시 있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원자문장이 없다고 하면 왜 문제가 되는가? 원자문장이 없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모든 문장은 다음과 같은 형식의 일반화 문장generalisation들일 것이다:

 

모든 x에 대해 (x)

그러한 x가 존재한다 (x)

 

(물론 이러한 일반문들이 논리적 연결사로 결합된 진리-함수적 복합문 역시 존재하겠지만, 이는 차치해두도록 하자.) 이러한 일반문들의 의미는 무엇인가? 예컨대 첫 번째 형식처럼 모든 xF하다고 말하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이 보편 양화문은 각각의 대상 x에 대해 ‘Fx’가 참이라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 모든 x에 대해 (x)’ 형식의 보편 양화문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음은, 그 내부 개방문의 모든 대입례each instance가 참인 경우 그리고 오직 그 경우에 양화문 전체가 참이라는 점을 이해하고 있다는 데에 근거하고 있다. 형식적으로 설명하자면 a, b, c 등등이 [논의영역 내에] 존재하는 모든 대상일 경우, 보편 양화문 모든 x에 대해 (Fx) [(x)Fx]’는 그 대입례들의 연언인 ‘Fa이고 Fb이고 Fc이고 [FaFbFc ]’를 의미한다. 이렇듯 일반화 문장들에 대한 이해는 그 대입례들인 원자문장들에 대한 이해에 토대를 두고 있다. [이런 연유로 원자문장이 불가능하다면 언어에 대한 적절한 설명 역시 불가능하며, 원자문장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문장의 유의미성을 담보해주는 진정한 지시적 표현 즉 논리적 고유명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런데 앞서 통상적인 고유명이 논리적 고유명이 아니라 가정한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첫째, 통상적인 고유명이 포함된 문장의 유의미성은 이름의 담지자의 존재를 선제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공허한 단칭용어의 경우 지시체가 존재하지 않더라도 그 용어가 나타나는 문장은 유의미하다. Le Verrier는 존재하지도 않는 Vulcan이 뜨겁다는 명제를 믿을 수 있었다.] 둘째, nn가 통상적인 고유명이고 n=n가 참이더라도, 양자가 모든 문장에서 진리지 보존적으로salva veritate(즉 진리치의 변경 없이) 상호대체 가능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명제적 태도가 드러나는 문장에서는 -지시적 표현들을 상호 대체하여도 진지리가 보존되지 않는다. ‘Hesperus = Phosporus’가 참이더라도, John은 전자가 행성이라 믿는 반면 후자는 그렇지 않다고 믿을 수 있다.

[통상적인 고유명이 이렇듯 지시체를 통해 문장의 유의의미성을 보증해주는 논리적 고유명이 아니라면] 우리는 ‘Pegasus는 날 수 있다와 같이 공허한 고유명이 포함된 문장의 의미를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일까? [다시 말해 의미가 지시와 동일하다는 소박한 의미론의 기본 원리를 고수하는 Russell로서는, 지시체의 존재가 유의미성을 담보해주는 논리적 고유명과 다르게, 통상적인 고유명이 지시를 결여함에도 유의미하게 사용되는 이유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그 이유는 ‘Pegasus는 날 수 있다는 문장의 내용content에 대해 우리가 특정한 태도를 취할 수 있기 때문인 것처럼 여겨진다. JohnPegasus가 존재한다고 믿는 한에서라면 Pegasus가 날 수 있다는 믿음 역시 충분히 가질 수 있으며, 그 경우 Pegasus가 날 수 있다는 명제가 분명 존재해야만 한다. 믿음belief이란 명제에 대한 태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Pegasus’와 같은 통상적인 고유명이 공허함에도 유의미할 수 있음은, 이름의 담지자가 존재하는지 여부에 대해 단지 우리가 실수mistake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인 셈이다. 그렇다면 이와 반대로 논리적 고유명은 그 지시체의 존재 여부에 대해 실수할 수 없는 그러한 이름이어야 한다.

-지시적 고유명들의 상호대체 실패 역시 마찬가지이다. ‘George Eliot = Mariane Evans’가 참임에도 불구하고 두 고유명의 의미가 다른 이유는 무엇인가? [즉 소박한 의미론의 기본 원리를 고수하는 Russell로서는, 지시체의 동일성이 동의성을 담보해주는 논리적 고유명과 다르게, -지시적인 통상적 고유명들의 의미가 상이함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답은 간단하다: George Eliot = Mariane Evans임을 믿지 않는 일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통상적 고유명들의 지시체가 동일함에도 의미가 다를 수 있음은, 이름의 담지자들 간 동일성 여부에 대해 단지 우리가 실수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인 셈이다.] 그렇다면 이와 반대로 논리적 고유명은 그 담지자가 어떤 대상인지에 대해 즉 지시체의 동일성에 대해 실수할 수 없는 그러한 이름이어야 한다.

논리적 고유명에 대한 요점을 한데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논리적 고유명이란, 그 담지자의 존재 동일성에 대해 실수할 수 없는 이름이다. 대상이 여차여차하다such-and-such고 기술하는 용어 즉 한정 기술구가 논리적 고유명임을 부정하기 위해 Russell이 들었던 이유들은 이제 더 이상 주효하지 않다.9)


9) ‘한정 기술구 이론절에서 살펴보았듯이 최초에 Russell이 한정 기술구를 진정한 지시적 표현이 아니라 간주했던 이유는, 기술구가 포함된 문장의 심층적인 논리적의미론적 형식이 분석됨에 따라, 한정 기술구의 의미론적 역할이 단칭용어가 아닌 것으로 판명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위장된 한정 기술구로서의 이름절에서 살펴보았듯이 통상적인 고유명 역시 심층적인 분석 수준에서는 한정 기술구가 위장된 표현인 것으로 판명되었으며, 이는 통상적인 고유명도 논리적 고유명이 아님을 함축한다.) 반면 연후에 논리적 고유명에 대한 기준으로서 언어표현의 유의미함 자체가 표현의 지시체를 담보해야 한다는 조건이 밝혀짐에 따라, 한정 기술구(와 통상적 고유명)이 진정한 지시적 표현이 아닌 궁극적인 이유는 그것들이 논리적 고유명에 대한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기 때문인 것으로 드러나게 된 셈이다.


과연 그러한 논리적 고유명이라는 것이 있는가? Russell에 따르면 그렇다. 그 존재와 동일성에 대해 우리가 실수할 수 없는 사물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적어도 Russell은 그렇게 생각하였다). 그러한 것들로는 다음 세 가지가 있다:

 

감각-자료sense-data

보편자(普遍者)universal

자아the self

 

에 대한 논의는 언어철학의 영역을 벗어나기에 차치해두고 여기서는 나머지 두 가지에 대해서만 살펴보도록 한다.

 

감각-자료

 

만약 당신이 지금 시각적으로 빨간색을 경험하고 있거나 목에서 간지러움을 느끼고 있다면, 그러한 경험과 느낌을 잘못 느낀 것이라 가정하거나 혹은 하나의 감각-자료sense-datum를 그것 아닌 다른 감각-자료와 혼동하고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매우 불합리해 보인다. 당신은 어떤 소리를 빨간색으로 오인할 수는 없다. Berkeley가 말했듯이 감각적 느낌이나 감각적 경험에 대해서는 존재하는 것이 곧 지각되는 것이다to exist is to be perceived”. 그에 따르면 어떤 사물이 저것이 아니라 바로 이것인 이유는, 그 사물이 저것으로서가 아니라 바로 이것으로서 지각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Descartes주의적Cartesian관점에 따르면, 사유의 주체는 주체의 정신mind 속 내용을 즉각적으로automatically 알고 있다. [따라서 감각-자료 혹은 감각-경험은 논리적 고유명의 지시체에 대한 기준으로서 그 존재와 동일성에 대해 실수할 수 없어야 한다는 조건을 충족하는 대상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우리는 감각-자료에 대해 ‘Sigmund’, ‘Elizabeth’와 같은 이름을 붙이지는 않는다. 감각-자료가 논리적 고유명의 지시체라는 Russell의 주장은 실제로는 다음과 같이 이해되어야 한다: 우리는 책상과 같이 세계에 존재하는 사물들에 관해 무언가를 말한다. 내가 어지럽혀진 내 책상을 보며 이 책상은 어수선하다고 말한다 해보자. Russell에 따르면 그 경우 내가 실제로 하고있는 일이란 책상에 대한 감각-자료를 통해via 책상에 관해 무언가를 말하는 것이다. [내가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책상 자체가 아니라 책상의 감각-자료인 것이다.] 물론 책상이 실제로 거기 있는지 여부에 대해서 착각할 수는 있겠지만, 적어도 내가 지닌 감각적 인상(印象)sense impression에 대해서는 결코 실수할 수 없다. [책상에 대한 환각을 경험하는 경우 책상 자체는 존재하지 않겠지만 환각으로 경험하고 있는 나의 느낌은 분명 존재한다.] 따라서 나의 진술은 실제로는 다음과 같은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것THIS(책상-모양으로 이뤄진 감각-자료들의 집단)의 외적 원인the external cause THIS은 어수선하다.

 

물론 나의 실제 발화에서는 이것이라는 단어를 말하지 않았지만, 내가 경험한 감각-자료들을 직접적으로directly 지시하기 위해 나는 그 단어를 생각 속에서 사용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즉 나는 지시대명사 이것을 감각-자료를 지시하는 논리적 고유명으로 사용한 셈이다. 반면 책상 자체는 Russell의 용어법에 따르면 직접적으로 지시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의 외적 원인the external cause of THIS이라는 한정 기술구에 의해) ‘지칭denote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한정 기술구는 기술구 이론에 따라 분석될 것이다.

 

보편자

 

내가 지구는 둥글다고 생각한다 해보자. (논의를 단순화하기 위해 지구가 논리적 고유명이라 가정하자.) 물론 나는 둥긂roundness이라는 속성property을 예화하는instantiate 대상이 정말로 존재하는지 여부에 대해 실수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우리가 실수할 수 있는 속성들은 분명 매우 많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나는 둥긂이라는 속성의 존재 자체에 대해 실수할 수 있는가? 이는 불가능한 듯하다. 나는 둥긂이라는 속성이 여타 속성과 동일한지 여부에 대해 실수할 수 있는가? 이는 상상가능한imaginable 듯하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둔각임being eauiangular이라는 속성과 등변임being equilateral이라는 속성을 동일한 것으로 착각할 수 있다. 혹자는 도대체 어떤 속성이 둥긂이라고 불리는지에 대해 실수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경우들은 차치한 채 다음과 같이 가정해보자: 지구는 둥글다와 같은 명제에서 둥긂 등의 속성을 지시하거나 의미할 때, 우리는 그 속성의 존재와 동일성에 대해 실수할 수 없다. 1항 속성뿐만 아니라 n-항 관계까지 포함되도록 이를 일반화하자면, 하나의 원자문장을 생각하는 경우 우리의 사고는 그 명제에서 말해지는 보편자의 존재와 동일성에 대해 실수할 수 없다.

Russell의 용어로 말해보자면 원자명제의 적절한 주어subject 역할을 할 수 있는 실체는 우리가 지각하는perceive 실체 즉 감각-자료이다. 원자명제의 술어 역할을 할 수 있는 실체는 우리가 생각하는conceive 실체 즉 보편자이다. 감각-자료는 지각perception의 대상이고 보편자는 사고thought의 대상으로서 양자는 원자명제의 구조 내에서 논리적으로 각기 다른 역할을 담당한다. 감각-자료와 보편자에 대해 우리가 맺는 관계는 인식론적으로 매우 특별한바, 우리는 양자의 존재와 동일성에 대해 결코 실수할 수 없다. Russell은 이를 직접대면의 관계relation of acquaintance라 칭하여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유명한 원리를 정식화한다:

 

직접대면의 원리principle of acquaintance: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임의의 명제는 우리가 직접 대면하는 실체들로만 구성되어야 한다.

 

즉 명제를 구성할 때 우리는 우리가 직접대면한 사물들에 관한 지식에만 의존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Russell에 따르면 우리는 책상이나 나무 자체를 직접 대면할 수는 없기 때문에, 책상이나 나무에 관한 원자명제 혹은 그것들을 [구성요소로서] “포함하는contain원자명제를 이해할 수 없다. 이것이 참이라면 우리가 사물들에 관해 말하며 의사소통하는 일이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이에 대해 Russell은 다소 당혹스럽긴 하지만 꼭 틀렸다고 할 수는 없는 답변을 제시한다. 우리 목전에 책상이 하나 있다고 가정해보자. 내가 이 책상은 둥글다라고 말한다. 그 경우 나는 내가 지각한 감각-자료들에 대한 지시와 의 외적 원인이라는 개념을 포함하는 하나의 한정 기술구를 통해via 그 책상을 지칭denote한 셈이다. 내가 지각한 감각-자료들 집단을 ‘𝜙’라 칭하여 그 한정 기술구를 ‘𝜙의 외적 원인이라 하자. 내 말을 들은 당신은 당신 자신의 감각-지각sense-perception을 통해 새로운 기술구를 구성하고 이를 통해 나의 말을 이해하게 된다. 당신의 감각-자료들 집단을 ‘𝜓’라 칭하여 당신의 한정 기술구를 ‘𝜓의 외적 원인이라 하자. 모든 상황과 조건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한, 𝜙의 외적 원인 = 𝜓의 외적 원인이다. 이에 우리가 가정해본 상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나는 생각한다: 𝜙의 외적 원인은 둥글다.

당신은 생각한다: 𝜓의 외적 원인은 둥글다.

𝜙의 외적 원인 = 𝜓의 외적 원인.

 

물론 우리는 상대방의 감각-자료를 직접 대면할 수 없기 때문에 둘 중 어느 누구도 𝜙의 외적 원인 = 𝜓의 외적 원인임을 단정할 수 있는 처지에 있지 않다. 뿐만 아니라 우리 둘 다 책상에 대해서는 Russell이 칭한바 직접대면에 의한 지식knowledge by acquaintance을 갖고 있지 않다. [즉 전술했듯이 우리가 책상 자체를 직접 대면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나는 𝜙의 외적 원인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고 당신은 𝜓의 외적 원인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여기서, 우리의 지각에 감각-자료를 야기하는 외부대상이 객관적으로 실재하는지 여부에 대한 회의주의는 잠시 제쳐두도록 하자), 우리 둘 다 어떤 대상 x(책상)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셈이며,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사물이 곧 내가 생각하고 있는 사물과 동일하다는 점은 그러한 사실에 의해 보증된다. Russell의 용어로 말하자면 우리는 책상의 존재에 대해 기술구에 의한 지식knowledge by description을 갖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당신과 나는 다음과 같은 형식의 단칭명제singular proposition

 

a는 둥글다,

 

가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셈이며, 이 명제가 내가 생각하는 명제 및 당신이 생각하는 명제 양자와 동치임을 안다. 하지만 우리가 이 명제 자체를 파악할 수는 없다(왜냐하면 우리 중 어느 누구도 a를 직접대면할 수는 없으며, 다만 a는 둥글다와 같은 명제가 존재한다는 것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실재reality에 대해 맺는 인식론적 관계를 이렇듯 경험주의적empirical으로 사고하는 방식은 Locke Hume의 인식론과 매우 흡사하다. 이런 연유로 Russell은 일반적으로 경험주의자empiricist로 간주된다.

 

 

역사적 사항

 

수학의 원리The Principles of Mathematics(1903)에서 Russell은 언어를 아주 투명한transparent 것으로 생각하였다. 우리는 언어에서 의미된 실체를 언어를 통해 see수 있으며, 언어의 기저에 있는 논리적 형식, 즉 사실(事實), 보편자, 대상 등이 지니고 있는 형식이 언어표현의 외적 형식과 상당히 대응한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이에서 알 수 있듯이 초기에 Russell은 소박한 의미론에 대체로 동의하였다. 그가 부분적으로 소박한 의미론으로부터 차츰 벗어나기 시작한 결정적인 지점은 지칭 개념denoting concepts에 관한 이론으로서, 이는 다소간 Frege의 핵심 착상에 동의하는 이론이었다. 이 관점에 의해 Russell은 언어 자체에 관한 질문이 도외시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언어를 통해 의미하고자 하는 실재에 대한 사안일 뿐, 오롯이 언어 자체를 탐구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결정적으로 지칭에 관하여On Denoting(1905)에서 표명된 기술구 이론에 이르는바, 그 이론에 따르면 언어의 논리적 형식은 표층적인 문법형식과 매우 다를 수 있다. 이 글이 발표될 당시까지도 Frege의 저작은 잘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분석철학은 Russell의 이 논문에서 시작되었다고 여겨지고는 한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Russell은 논리적으로 훈련된 철학자들만이 캐낼 수 있는 철학적인 광맥의 발견자, 조악한 일상언어의 기저에 수정같이 맑고 순수한 형태로 숨겨져 있는 명제라는 영역의 개척자였던 셈이다.

[Russell의 철학은 시기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변모하였는데] 이번 장에서 살펴본 형태의 Russell 철학은 철학의 문제들The Problems of Philosophy(1912)에서 개진된 것이다. (이 시기는 수학이 논리학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소위 논리주의 논제thesis of Logicism를 정교화하기 위해, A. N. Whitehead와 더불어 대작 수학원리Principia Mathematica(1910, 1912, 1913)를 공저하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 관점은 다시 급격하게 변하여 그 유명한 논리 원자론logical atomism에 이르게 된다. 이 이론의 골자를 대강 말해보자면, 일상적인 물질적 대상material object이란 단지 감각-자료들의 무리일 뿐, 감각-자료 배후에서 그것을 야기하는 어떤 것[(예컨대 Kant자체와 같은 감각-자료와는 별개의 물질적 실체)]이 아니다. 1910년부터 Russell에게 수학하기 시작한 젊은 WittgensteinRussell의 원자론적 착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초기 저서 논리-철학 논고Tractatus Logico-Philosophicus(1921)에서 논리 원자론적 형태의 철학을 개진하였으며, Rudolf Carnap세계의 논리적 구조The Logical Structure of the World/Der logische Aufbau der Welt(1928)에서 Russell Wittgenstein의 논리 원자론과 많은 측면에서 유사하면서도 더욱 엄밀한 이론을 발전시켰다. Alfred Jules Ayer 역시 Russell의 논리 원자론의 기초적인 관점을 받아들인 인물들 중 하나이다. 세 인물의 이론에 관해서는 다음 장에서 상세히 살펴볼 것이다.

8장과 10장에서 다뤄질 W. V. QuineRussell의 기술구 이론과 수학 기초론에 관한 작업으로부터 큰 인상을 받았다. 하지만 인식론적 관점에서는 1912Russell이 제시한 형태의 원자론적 도식에 반대하고 전체론holism이라 일컬어지는 유명한 대안적 이론을 제시한다.

Frege와 더불어 여기 제시된 인물들 모두는 존재existence가 예컨대 둥긂과 같은 대상의 속성이 아니며 [따라서 통상적인 술어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존재 양화사에 의해서만 표현된다는 생각에 동의한다. 반면 Alexius Meinong(1853-1920)은 이와 반대되는 입장을 취하였으며 이는 존재 문제에 관한 Russell의 입장과 종종 대비되고는 한다. [존재를 속성으로 간주하는] 소위 ‘Meinong주의Meinongism는 최근 형이상학적으로 정향된 언어철학자들에게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추세로서, 이에 관해서는 12장에서 간략히 살펴볼 것이다.

 

 

이번 장의 요약

 

Russell의 과업은 Frege가 뜻과 지시이론을 통해 해결하고자 하였던 문제를, Frege와 달리 뜻이라는 범주를 상정하지 않고 지시만으로 해결하는 방안을 모색하는 일에서 시작된다. 그 문제들은 크게 존재 문제와 명제적 태도 맥락에서의 대체 문제로 대별된다.

첫 번째 단계로 Russell은 기술구 이론을 제시한다. 이에 따르면 모든 단칭용어는 한정 기술구 F(F한 그것)’의 형태로 표기될 수 있으며, 몇몇 특정한 경우를 제외하면, 한정 기술구 F’를 포함하는 모든 문장은 (복합적일 수도 있는) 임의의 술어 ‘𝛼G하다에 대해 FG하다의 형식을 지니고 있다. ‘FG하다그러한 x가 존재한다 (Fx 부정: 그러한 y가 존재한다(Fy xy) Gx)[(x)(Fx&∼(x)(Fyxy)Gx)]’와 동치인 것으로 분석된다. 이를 자연언어로 풀어보자면 ‘F한 것이 단 하나 존재하며, 모든 FG하다이다.

두 번째 단계로 Russell은 통상적인 고유명이 실제로는 위장된 한정 기술구, 즉 한정 기술구가 축약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예컨대 누군가 이름 ‘Bob’을 실제로 사용하는 경우 엄밀하게 말해 그 이름이 진정 의미하는 바는 내 앞에 있는 사람따위의 기술구와 동치이다.

이러한 전략에 따라 [고유명 ‘a’가 나타나는 문장] ‘aG하다[‘a’로 위장된 한정 기술구 F’가 나타나는] ‘FG하다의 형식을 지닌 것으로 분석되며, a와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을 경우 이 문장은 단순히 거짓인 것으로 판명된다. 반면 Frege의 이론에 따르면 그 경우 이 문장은 참도 거짓도 아닌 것으로 남는다. 뿐만 아니라 ‘a는 존재하지 않는다와 같은 소위 단칭존재부정문부정: 그러한 것이 정확히 하나 존재한다 (Fx)[(x)(Fx&∼(x)(Fyxy))]’의 형식을 지닌 것으로 분석되며, a와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을 경우 이 문장은 참인 것으로 판명된다. 반면 Frege의 도식은 이러한 문장의 진리치 역시 올바르게 결정하지 못한다.

명제적 태도 문제의 해결책 역시 이와 마찬가지로서, 요는 명시적이든 위장된 것이든 한정 기술구를 기술구 이론에 따라 분석하는 것이다. Russell에 따르면 명제적 태도 맥락에 나타나는 한정 기술구가 일단 분석되기만 하면 철학적 퍼즐은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예를 들어 ‘Scott = Waverley의 저자가 참이기에, ‘George 4세는 Scott = Waverley의 저자인지 여부를 궁금해했다‘George 4세가 Scott = Scott인지 여부를 궁금해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는 일견 상호 일관적이지 않은 것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한정 기술구 Waverley의 저자가 기술구 이론의 방식으로 분석되면 [‘Scott’으로 대체될 수 있는 단칭용어가 없음이 드러남에 따라] 이러한 모순은 사라지게 된다.

Russell이 보기에 진정한 논리적 고유명, 즉 위장된 한정 기술구로서 분석될 수는 없는 고유명이란 감각-자료(그리고 자아)를 나타내는 표현들이다. 이에 Russell은 그의 유명한 인식론적 입장으로서 직접대면에 의한 지식과 기술구에 의한 지식을 구분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인식론적 구도의 핵심은 직접대면의 원리로서, 이에 따르면 우리가 이해하는 임의의 명제는 우리가 직접대면한 실체들로만 구성되어야 한다.

 

 

탐구문제

 

1. 참인 단칭존재부정문의 문제를 Frege의 이론으로 해결하는 데에 내적/외적 부정을 구분하는 Russell의 전략이 활용될 수 있겠는가?

2. 연산자의 범위에 대한 Russell의 구분을 활용하여, ‘Ludwig는 선반 위의 그 쿠키가 바나나맛이라고 생각했다Ludwig의 착오에 따라 어떻게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지 논하라.10)


10) 이 문제는 일견 기이하게 여겨진다. 제시된 예문은 직관적으로 중의적이라 여겨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정 기술구 그 쿠키를 기술구 이론에 따라 분석하여 나타나는 존재 양화사의 범위와, 명제적 태도 연산자 라고 생각하다의 범위를 이번 장에서 소개된 바에 따라 구분해보면, 이 문장이 중의적일 수 있음을 알게 된다.
첫 번째로, 이 문장은 실제로 쿠키가 존재하고 Ludwig그것이 여차여차하다고 믿고 있음을 기술하는 문장, 선반 위에 쿠키가 있는데 Ludwig는 그것이 바나나맛이라 생각한다로 해석될 수 있다. 여기서 Ludwig가 저지를 수 있는 착오는 존재하는 그 쿠키가 바나나맛인지 여부이다. 이는 한정 기술구의 존재 양화사가 넓은 범위를 취하는 것으로 해석된 경우로서, ‘그러한 x가 존재한다 (x는 선반 위의 쿠키이다모든 y에 대해 (y는 선반 위의 쿠키이다 y=x)Ludwig는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x는 바나나맛이다])’로 분석된다. 명제적 태도 연산자 ‘xp라고 생각한다‘Tx[p]’로 도입하여 이 문장을 기호화하자면 ‘(x)(Cx(y)(Cyy=x)Tl[Bx])’이다. 전술한바 이 해석에서 Ludwig가 착각할 수 있는 사안은 형식문에서 명확히 드러나듯이 명제적 태도 연산자의 영향권 내에 있는 ‘Bx’뿐이다. 따라서 문장 전체의 진리치는 ‘Bx’가 만족되는지 여부와는 무관하며, 오로지 연언문 형식의 내부 개방문을 구성하는 각 연언지들을 모두 만족하는 x가 존재하는지(즉 선반 위에 쿠키가 있는지(‘Cx’), 그것이 단 하나인지(‘(y)(Cyy=x)’), Ludwig가 그것을 바나나맛이라 생각하는지(‘Tl[Bx]’) 등이 모두 만족되는지) 여부에 따라서만 결정된다. 전문적으로 논하자면, 존재 양화사가 넓은 범위를 취할 경우 양화사는 명제적 태도 연산자의 영향권 외부에 있는바 외연적 맥락에서 나타나기 때문에, 속박변항의 값(즉 논항)이 존재하는지 여부는 문장 전체의 진리치에 관여한다.
두 번째로, 이 문장은 Ludwig가 쿠키가 존재한다고 믿으며 존재하는 것으로 믿어진 그것이 여차여차하다고 믿고 있음을 기술하는 문장, ‘Ludwig는 선반 위에 특정 쿠키가 있다고 생각하며 그것이 바나나맛이라 생각한다로 해석될 수 있다. 여기서 Ludwig가 저지를 수 있는 착오에는 쿠키가 바나나맛인지 여부뿐만 아니라 쿠키가 존재하는지(그리고 그것이 단 하나인지) 여부 역시 포함된다. 이는 명제적 태도 연산자가 넓은 범위를 취하는 것으로 해석된 경우로서, ‘Ludwig는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그러한 x가 존재한다 (x는 선반 위의 쿠키이다모든 y에 대해 (y는 선반 위의 쿠키이다 y=x)x는 바나나맛이다)]’로 분석된다. 앞서와 마찬가지 방식으로 기호화하자면 ‘Tl[(x)(Cx(y)(Cyy=x)Bx)]’이다. 전술한바 이 해석에서 Ludwig가 착각할 수 있는 사안은 형식문에서 명확히 드러나듯이 명제적 태도 연산자의 영향권 내에 있는 ‘(x)(Cx(y)(Cyy=x)Bx)’ 전체이다. 따라서 문장 전체의 진리치는 이 존재 양화문의 진리치, 특히 실제로 선반 위에 쿠키가 있는지(‘(x)(Cx)’) 여부와는 무관하며, 오로지 Ludwig의 믿음의 내용에 따라서만 결정된다. 전문적으로 논하자면, 명제적 태도 연산자가 넓은 범위를 취할 경우 존재 양화사는 명제적 태도 연산자의 영향권 내부에 있는바 외연적 맥락이 아니라 내포적 맥락에서 나타나기 때문에, 속박변항의 값이 존재하는지 여부는 문장 전체의 진리치와 무관하다. 간단히 말해 존재 양화사가 내포적 맥락에서 나타날 경우 변항의 값에 대한 존재론적 개입은 이뤄지지 않는다.


3. ‘몇몇 길들여진 호랑이가 존재한다는 정말로 의미가 있는가? 이를 몇몇 길들여진 호랑이가 왕의 침실에 살고 있다와 비교해보라.

4. Alexius Meinong은 존재existence(완전히는 아니더라도 거의) 술어라고 생각했다, Pegasus라든가 Santa Claus와 같은 가상적 존재들은 비록 실존하지는 않지만fail to exist, 사유의 대상으로서 실존과는 다른 모종의 존재방식을 갖는다는 것이다. Russell은 초기에 이와 유사한 생각을 견지하였지만 기술구 이론을 정립하면서 이 생각을 철회하기에 이른다. 과연 Russell은 옳았는가? Russell의 기술구 이론과 달리, 표층적인 문법형식과 심층적인 논리적 형식을 구분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Meinong의 이론이 더 우월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은가? [다르게 말하면 형이상학적인 경제성과 의미론적인 경제성 중 어느 것이 철학적으로 더 중요시되어야 하는가?]

5. Russell의 이론은 탁자나 나무와 같은 일상적인 사물에 대한 우리의 대화가 어떻게 이뤄지는지를 과연 만족스럽게 설명해내는가?

 

 

주요 읽을거리

 

Russell, B. (1905), 지칭에 관하여On Denoting, 분석에 관한 小論Essays in Analysis, 103-19쪽 및 논리와 지식Logic and Knowledge, 41-56쪽에 수록.

, (1911), 직접대면에 의한 지식과 기술구에 의한 지식Knowledge by Aquaintance and Knowledge by Description, 신비주의와 논리, 그리고 다른 小論Mysticism and Logic and Other Essays, 152-67쪽에 수록.

 

 

추가적인 읽을거리

 

Hylton, P. (2005), 명제, 함수, 분석: Russell 철학 選集Popositions, Functions, and Analysis: Selected Essays on Russell’s Philosophy. 평이하면서도 날카로운 Russell의 글들 및 RussellFrege를 비교하는 글도 수록되어 있다.

Neale, S. (1993), 기술구Descriptions. Russell의 기술구 이론을 명쾌하게 탐구하고 있다.

Sainsbury, M. (1979), 러셀Russell. Russell 철학의 주요 측면들을 폭넓게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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