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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ripke1)命名과 필연


   1) (原註) 일부 학자들은 고유명에 관한 Kripke의 관점 배후에 있는 핵심 착상이, 본디는 양상논리(樣相論理)modal logic에 대한 Ruth Barcan Marcus의 선구적인 작업에서 유래하였다고 주장한다. 이번 역사적 사항참조.



필연성, 가능성, 가능세계 개념에 대한 기초사항

 

2+2=4라는 것은 필연적(必然的)으로 참necessary truth인 듯하다. 그것은 거짓일 수 없기could not have been false 때문이다. 모든 것은 자신과 동일하다는 것, xy보다 크고 yz보다 크다면 xz보다 크다는 것 등도 필연적인 참의 사례들인 듯하다.

우리는 아이스크림이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하지만 아이스크림이 존재하지 않는 게 사실이었을 수도 있다might have been the case는 의미에서, 아이스크림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가능하다[가능적(可能的)이다]possible. 아이스크림은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아이스크림이 존재한다는 것은 참이긴 하지만 필연적으로 참이지는 않다.

필연성necessity과 가능성possibility이란 무엇인가? 당면 목적상 우리는 가장 편리한 수단으로서 가능세계(可能世界)possible world에 입각한 필연성/가능성 해석을 가정하고자 한다(가능세계 개념이 주는 기이함과 생소함에 대해서는 잠시 뒤 고찰해볼 것이다). 필연적으로 참인necessarily true 명제란 세계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참인true no matter what 명제이다. 그것은 거짓일 수 없다could not. 필연적으로 참인 명제는 세계가 어떻게 되든지 참일 것이다. 간단히 말해 필연적으로 참인 명제는 모든 가능세계에서 참이다true in every possible world. 마찬가지로, 가능적으로 참인possibly true 명제란 사실이었을 수도 있는might have been the case 명제 혹은 사실인is the case 명제이다. 간단히 말해 가능적으로 참인 명제는 적어도 하나의 가능세계에서[혹은 어떤 가능세계에서] 참이다true in some possible world. 이에 필연적/가능적인 명제의 진리-조건을 다음과 같이 규정할 수 있다:

 

한 명제는 모든 가능세계에서 참일 경우 필연적이다.

한 명제는 적어도 하나의 가능세계에서 참일 경우 가능적이다.

 

이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한 명제가 필연적이라면 그것은 사소하게 가능적인 셈이다. [모든 가능세계에서 참이라는 것은 적어도 하나의 가능세계에서 참임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실세계the actual world 역시 가능세계들 중의 하나이므로, 한 명제가 현실세계에서 참이라면 사소하게 적어도 하나의 가능세계에서 참이다. 현실세계란 사물들이 실제로 존재하는 방식the way things actually are이다.

p가 가능적이지만 필연적이지는 않은 명제라면, P우연적(偶然的)이다contingent. 아이스크림이 존재한다는 명제처럼, 필연적이지는 않지만 현실세계에서 참인 명제는 우연적인 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가능하다필연적이다라는 단어가 항상 이런 식으로 쓰이지는 않으며, 특히나 철학 외부에서는 이런 식으로 거의 쓰이지 않는다. 그렇기에 우리가 논의하는 영역을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 지금 우리는 철학에서 통상 형이상학적 양상성(樣相性)metaphysical modality이라 칭해지는 개념에 대해 말하고 있다. 여기서 논의되고 있는 가능성/필연성/우연성 등은 인식론적(認識論的)epistemological 개념이 아니라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metaphysical 개념이다. 한 명제가 가능적이라고 말할 때 우리가 의미하는 바는 그것이 참이다 혹은 참일 수 있었다는 것이지, ‘나는 그것이 참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예를 들면 우리는 지구에서 가장 높은 산이 타히티에 있지 않다는 것을 확실히with certainty 알고 있다. 하지만 형이상학적인 관점에서는 그러했을 수도 있다. 어떤 가능세계에서는 지구에서 가장 높은 산이 타히티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구에서 가장 높은 산이 타히티에 있다는 명제가 사실이 아님을 알긴 하지만, 형이상학적으로 그 명제는 사실이었을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은 필연적이다라는 말로써 우리는 그것은 확실하다certain를 의미하지 않는다. 물론 철학 밖의 일상적인 대화에서 우리는 은 필연적이지 않다[반드시 하지는 않다]’는 말을 그것이 사실인지 확신할 수는 없다는 의미로 종종 사용하지만, 이는 여기서 우리가 염두에 두고 있는 의미가 아니다. 이러한 의미차이는 일부 필연적 참의 경우 확실하게 알려져 있지는 않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분명하게 납득할 수 있다. 예컨대 수학적으로 참인 명제들은 통상 필연적으로 참인 것으로 받아들여지지만, [Goldbach의 추측과 같이] 참인지 여부를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는 수학적 명제들이 분명 존재한다.

전통적으로 필연성 및 우연성과 각기 유사한 인식론적 개념들로는 선험성a priori후험성a posteriori/경험성the empirical을 들 수 있다. 전자는 경험과 독립적으로 알려질 수 있는 것이고 후자는 경험을 통해서만 알려질 수 있는 것이다. 선험성과 밀접하게 연관된 개념은 생각가능성[상상가능성]conceivability으로서, 이는 대강 말하자면 선험적으로 배제되지는 않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한 명제 p의 부정이 생각가능하다면 p가 선험적으로 배제되지는 않는 것이므로, 결국p는 선험적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가령 아이스크림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상상가능하므로 아이스크림은 존재한다는 선험적이지 않다. 반면 2+24라는 것은 생각할 수조차 없는바 선험적으로 배제되므로, ‘2+2=4’는 선험적이다.)]

편의를 위해 필연성/가능성을 나타내는 데에 다음과 같은 기호들이 도입될 것이다:

 

‘Nec (p) [p]’‘p라는 것은 필연적이다it is necessary that p로 읽는다.

‘Pos (p) [p]’‘p라는 것은 가능적이다로 읽는다.

 

기호 ‘Nec[]’이라든가 자연언어 라는 것은 필연적이다등의 표현들은, ‘라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와 같은 문장 연산자(문장 연결사)이다. 하지만 라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와 다르게, ‘Nec’진리-함수적이지 않다. 다르게 말하면 2에서 도입된 의미에서 -외연적인 즉 내포적인 연산자이다. 왜냐하면 다음과 같은 형식을 갖는 문장의 경우

 

Nec (p)

 

문장 전체의 진리치는 p의 진리치에 의해 결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가령 ‘Nec (지구는 둥글다)’의 진리치는 지구가 실제로 둥글다는 사실만으로는 결정되지 않는다. [이 양상문이 참이기 위해서는 모든 가능세계에서 지구가 둥글어야 하는데, 어떤 가능세계에서는 지구가 둥글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Nec’은 다음 문장들에서 나타나는 진리-함수적인 문장 연산자들과는 성질이 다르다:

 

p라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p 그리고 q

p 또는 q

 

이 문장들의 경우, 문장 전체의 진리치는 그것을 구성하는 각 요소문장들의 진리치에 의해, 즉 첫 번째 문장은 p의 진리치에 의해, 나머지 두 문장은 pq 각각의 진리치에 의해 진리-함수적으로 결정된다.

필연성/가능성은 일반적으로 상호-정의가능한inter-definable 것으로 간주된다. 즉 두 개념은 다음과 같이 서로에 대한 정의항으로 쓰일 수 있다:

 

한 명제는 그 부정이 가능하지 않은 경우 그리고 오직 그 경우에 필연적이다.

[p ↔ ∼◇∼p]

한 명제는 그 부정이 필연적이지 않은 경우 그리고 오직 그 경우에 가능적이다.

[p ↔ ∼□∼p]

 

그런데 (현실이-아닌non-actual) 가능세계란 도대체 무엇인가? 가능세계란 David Lewis가 주장했듯이 현실세계와 시간적-공간적으로 연속되어있지 않다는 점만을 제외하고는 현실세계와 유사한 세계인가? 아니면 물질적구체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추상적인 것으로서 현실세계와 전연 판이한 것인가? 아니면 우리는 가능세계라는 표현을 단지 하나의 이론적인 발견의 수단으로서as an heuristic, 즉 실제로 존재하지는 않는 하나의 말하기 방식manner of speaking으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는 형이상학적인 문제들이기에 양상성과 연관된 우리의 언어철학적 논의에서 이러한 의문들에 대해 크게 유념할 필요는 없으며, 하나의 가능세계란 단순히 사물들이 존재할 수 있었던 /그랬을 수 있었던 하나의 방식이라고 이해해도 무방하다. 혹여 가능세계라는 단어에 수반되는 공상과학적인 어감이 꺼림칙하게 느껴진다면, 가능세계를 가능상황possible situation 내지 사실적 환경counterfactual circumstance 등으로 칭할 수도 있다(물론 후자의 경우, 현실에 존재하는 사실은 사실--하는contrary-to-fact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현실세계를 사실적 환경이라 칭할 수는 없다는 데에 유의해야 한다). 어쨌든 가능세계가 풍기는 공상과학적인 느낌은, 사물들이 존재했을 수도 있는 방식에 관해 우리가 일상적으로도 종종 말한다는 비근한 사실을 생각해보면 다소 경감될 것이다.2)


2) (原註) 혹여 이마저도 만족스럽지 않다면 최후의 방법으로서 가능적으로/필연적으로라는 부사를 원초적인primitive 것으로, 즉 엄밀히 말해 세계나 상황 등의 측면에서는 설명될 수 없는 기초개념으로 간주할 수도 있다.


우리는 임의의 세계 즉 사물들이 존재했을 수 있는 임의의 방식과 임의의 명제를 취해, 그 명제가 그 세계에서 참인지 물을 수 있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한 명제의 진리치는 명시된 특정 조건들이 성립하는 임의의 세계에 따라 물어질 수 있다. 이는 마음을 의미한다: 여차여차한 가능적인 환경들을 생각해보자. 이 명제는 그러한 조건 하에서 참이겠는가?

가능세계 의미론은 필연적/우연적이다등의 표현을 해석할 수 있게 해줄 뿐만 아니라, 사실적 조건문counterfactual conditional(가정법적 조건문subjunctive conditional)에 대한 해석 역시 용이하게 해준다. 다음 문장을 보자:

 

만약 Jones가 안전벨트를 매고 있었더라면, 교통사고에서 살아남았을 것이다.

If Jones had been wearing a seat belt, he would have survived the collision.

 

보통 이런 식의 조건문을 말하는 것은 전건이 실제로는 거짓인 경우에만, 즉 이 사례에서는 Jones가 실제로는 안전벨트를 매지 않았던 경우에만 적절한 것으로 여겨지고는 한다. 그렇기에 이러한 조건문을 진리-함수적인 실질적 조건문material conditional으로 해석할 경우 자동적으로 참인 것으로 판명되어버린다. 이는 위 문장의 후건이 부정된 다음 문장 역시 마찬가지이다:

 

만약 Jones가 안전벨트를 매고 있었더라면, 교통사고에서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If Jones had been wearing a seat belt, he would not have survived the collision.

 

두 문장의 진리치가 결정되는 방식이 이렇게 직관적인 이유는, ‘로 표현되는 실질 조건문의 진리표에 따르면 전건이 거짓일 경우 실질 조건문 전체는 [후건의 진리치와 무관하게] 항상 참이기 때문이다. 이럴진대 [이 문장이 진리-함수적으로 해석되는 한] 우리는 Jones가 안전벨트를 매고 있었더라면, 교통사고에서 살아남았으리라는 것이 참인지를 도대체 어떻게 결정할 수 있겠는가?3)


3) 직설법적 조건문indicative conditional과 가정법적 조건문은 우리말에서는 잘 구분되지 않지만 영어에서는 시제상 비교적 뚜렷하게 구분된다. 보통 직설법적 조건문은 전건이 실제로 참일 경우 후건이 참이라는 단순한 가정을 주장하는 경우에 말해진다. 예컨대 다음문장


만약 OswaldKennedy를 쏘지 않은 거라면, 다른 누군가가 쏜 셈이다.
If Oswald did not shoot Kennedy, than someone else did.

, Kennedy가 죽은 것이 확실한 상황이므로 Oswald가 쏘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다른 누군가가 쐈던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는 별 무리 없이 참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반면 다음 문장

만약 OswaldKennedy를 쏘지 않았더라면, 다른 누군가가 쐈을 것이다.
If Oswald had not shoot Kennedy, than someone else would have.

, 실제로는 OswaldKennedy를 쏘았다는 것은 알지만, 그 사실과 반대되는 가정을 해보았을 때 후건이 성립할 것이라는 추측이다. Kennedy 암살에 관한 음모론을 믿는 사람이 아닌 바에야, 보통은 거짓이라 여겨지는 가정이다. 보통 직설법적 조건문은 이미 일어난 일이거나 불가능하지 않은(혹은 불가능하지 않다고 화자가 판단하거나 최소한 불가능 여부가 확실치 않은) 경우에 사용되고, 가정법적 조건문은 일어난 사실과 반대이거나 일어날 확률이 희박하다고 화자가 판단하는 경우에 사용된다. 가정법적 조건문의 경우가 사실적인 가정을 하는 경우와 관련된다. 반사실적 조건문은 일반적인 조건문과 달리 진리-함수적이므로 이런 조건문의 진위를 결정하기 위해 가능세계 의미론이 적용된다.” (미우라 도시히코(三浦俊彦), 가능세계의 철학, 박철은 , 그린비, 2011, 24, 譯註1).)


[이러한 조건문들을 진리-함수적으로가 아니라 가능세계의 측면에서 양상적으로 해석한다면] 이 문제는 다음과 같이 쉽게 해결된다: 실제 사실과는 다르게, 교통사고가 발생할 당시 Jones가 안전벨트를 매고 있었다는 바로 그 점만을 제외하고는, 현실세계와 모든 점에서 유사한 하나의 가능세계를 떠올려보자. 간단히 말해 [사실에 하도록 전건이 성립한다는 점만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현실세계와 최대한 유사하도록 유지시킨다. David Lewis가 말하였듯이, 이는 사실적 조건문의 전건이 성립하되 현실세계와 최근접한nearest/가장 유사한closest 가능세계이다. 그 세계에서 Jones는 살아남았겠는가? 이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다면 우리가 고려하던 사실적 조건문 전체는 참이며, 그렇지 않다면 거짓이다.

 

 

기술주의 패러다임

 

FregeRussell 모두 고유명에 대한 기술주의적 이론descriptivist theory of proper name을 견지하였다고 할 수 있다. 두 사람 모두 ‘Aristoteles’라든가 ‘Madonna’와 같은 통상적인 고유명ordinary proper name이 사용되거나 이해되는 각 경우마다, 그 이름을 통해 화자가 의미하는 내용 내지 청자가 이해하는 내용은 한정 기술구에 의해 표현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4) 이런 의미에서 (통상적) 고유명은 한정 기술구와 엄밀하게 동등하다. 다르게 말해 고유명은 한정 기술구가 축약된abbreviate 것 내지 한정 기술구에 대한 약칭shorthand으로서 기능한다고 할 수 있다. 이제 Beethoven이 다음 문장을 읽는다고 해보자:


4) (原註) Frege가 고유명에 대해 기술주의 이론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라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내 관점에서는 그러하다. 다만 이는 Kripke의 관점과 연관되는 한 그다지 중요한 사안이 아니다. 이번 에서 살펴볼 Kripke의 공격은 고유명에 대한 기술주의적 관점을 누가 견지했는가와 무관하게 그 이론 자체를 겨냥하기 때문이다.

     

Mozart는 죽었다.

 

이 문장을 읽고 이해했을 때 Beethoven이 파악하는 내용은, 기술주의 관점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것이 된다: Don Giovanni의 작곡가the composer of Don Giovanni는 죽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렇게 이해한 시점의 Beethoven에게 다음 두 문장은 동의적이다. 즉 적어도 그 시점에 이 두 문장은 동일한 명제를 표현한다:

 

Mozart는 죽었다.

Don Giovanni의 작곡가는 죽었다.

 

물론 RussellFregeDon Giovanni의 작곡가와 같은 한정 기술구의 의미론적 역할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설명한다. Frege는 한정 기술구가 그것을 만족하는 대상을 지시하는refer 역할을 하는바 진정한 단칭용어genuine singular term라 생각한다. 반면 한정 기술구에 대한 Russell의 맥락적 정의방식에 따르면 정관사 the정확히 하나의를 의미하는바 한정 기술구는 양화사를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되며, 따라서 엄밀히 말해 대상을 지시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차이점은 중요한 사안이 아니다. 요점은 고유명에 대한 기술주의 패러다임이 다음 물음에 답하고자 제시된 이론이라는 점이다: 우리가 한 이름을 통해 대상에 관해 말할 때 그 이름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요인은 무엇인가? Kripke에 따르면 기술주의 패러다임은 이 물음에 잘못된 답을 제시하고 있으며, 특히 이번 에서 도입된 양상성 개념의 측면에서 심각한 난점을 지니고 있다.

 

 

고유명에 대한 기술주의 패러다임에 대한 Kripke의 반박

 

당신이 앞 Beethoven처럼 특정 시점에 ‘Mozart’Don Giovanni의 작곡가로만 이해하고 있다 해보자. 이 경우 당신은 다음 문장을 분석적인 것으로, 즉 그 의미에 의해서 참인 것(분석성 개념에 관해서는 緖論, ‘8개의 예비사항’, 8번 항목 참조)으로 이해할 것이다:

 

(1) Mozart = Don Giovanni의 작곡가

 

이 문장이 실제로 분석적인 것으로 이해된다면 다음 두 문장과 엄밀하게 동의적인 셈이다:

 

(2) Don Giovanni의 작곡가 = Don Giovanni의 작곡가

(3) Mozart = Mozart

 

Kripke의 지적에 따르면, 모든 분석적 참은 필연적 참이므로, 기술주의 패러다임에 따라 (1)이 분석적으로 참이라면 동시에 필연적으로도 참이어야 한다.5) 게다가 (2)(3)이 선험적이며 (1)은 양자와 동일한 명제를 표현하기 때문에, (1)은 선험적이기도 해야만 한다.6)


5) (原註) [모든 분석적 참이 필연적 참이기도 하다는 논제에 대해 미리 언급할 사항이 있다.] David Kaplan은 주장하길, 예컨대 나는 여기에 있다와 같은 문장은, 언어적 규약에 따르면 그 문장에 대한 어떤 발화(發話)utterance든 거짓일 수 없기에 분석적으로 참이지만, 그 문장에 의해 표현되는 명제는 우연적으로만 참이라고 말한다. 가령 Kapkan이 웸블리 경기장에서 나는 여기에 있다고 말한다면, 그 발화는 Kaplan은 웸블리 경기장에 있다는 명제를 표현한다. 그런데 Kaplan이 그 시점에 웸블리 경기장에 있다는 것이 필연적으로 참은 아니다. 그는 다른 곳에 있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6장에서 더욱 상세히 살펴보게 될 것이다.

6) (原註) 사실 이 점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만약 Mozart가 아예 태어나지도 않았더라면, ‘Mozart = Mozart’는 참된 명제를 표현할 수조차 없지 않겠는가?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Mozart = Mozart’가 논리적으로 참인 동어반복 문장이긴 하지만, 혹여 Mozart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다면 그 문장에 대해 인식론적 관점에서 선험적으로 참이라 말하는 것이 과연 적절한지가 문제시될 수 있는 것이다.] 이에 우리는 혹여 Mozart가 존재하지 않더라도 ‘Mozart = Mozart’가 참이라는 단순한 입장을 고수하고자 한다. 아니면 이 동일성 문장을 만약 Mozart가 존재한다면, Mozart = Mozart’라고 고쳐 쓸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3) 역시 만약 Don Giovanni의 작곡가가 존재한다면, Don Giovanni의 작곡가 = Don Giovanni의 작곡가로 고쳐 쓸 수 있다. 다만 이러한 세부사항은 작금의 논의를 필요 이상으로 복잡하게 만들기에 차치해둔다.


이제 문제는 분명해졌다. Kripke의 고찰에 따르면 (1)은 필연적 참이 아니다. Mozart가 위대한 그 오페라를 작곡하지 않았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실제로는 Mozart가 그 곡을 쓰긴 하였다. 하지만 그가 성악곡에는 관심하지 않아 기악곡만을 작곡했을 수도 있고, 혹은 어린 시절 마차 사고를 당해 작곡 활동을 아예 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요컨대 (1)이 거짓인 가능세계가 존재한다.

(1)은 선험적이지도 않다. (1)이 참이라는 사실은 경험적 지식에 속하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1)이 참임을 확실히 알고 있긴 하지만 그것이 거짓이라고 의심하는 일은 충분히 가능하다. 다시 말해 우리는 (1)이 참임을 입증해주는 좋은 증거를 갖고 있긴 하지만, (3)이 참임을 아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즉 선험적으로] (1)이 참임을 아는 것은 아니다. (1)이 거짓이라는 것은 생각가능하다conceivable[선험적으로 배제되지 않는다]. 따라서 (1)(3)은 각기 다른 인지적 가치를 지니며, 그에 따라 각기 다른 명제를 표현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Frege가 소박한 의미론을 논박하기 위해 사용했던 바와 동일한 종류의 논증인 인지적 가치로부터의 논증이, Frege가 소박한 의미론의 대안으로서 제시한 기술주의적 이론[-지시 구분 이론]을 역으로 논박하는 데에 다시 활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1)은 분석적이지도 않다. (1)이 참임은 그 문장을 구성하는 단어들의 의미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1)(2)(3)과 달리, 다른 예시를 들자면 모든 사각형은 네 변을 갖고 있다와 달리, 사소하게 참인 것은 아니다.

이상 Kripke의 세 가지 논박을 정리해보자: 기술주의 이론은 (1)과 같이 () 우연적으로만 참인 명제가 필연적으로 참이라는 잘못된 함축을 갖는바 형이상학적 관점에서 잘못되었다. () 후험적(경험적)인 명제가 선험적이라는 잘못된 함축을 갖는바 인식론적 관점에서 잘못되었다. () 종합적인 명제가 분석적이라는 잘못된 함축을 갖는바 의미론적 관점에서 잘못되었다.

이외에도 Kripke는 다음과 같은 네 번째 반박도 제시한다: 당신은 ‘Josef Haydn’Mozart와 비슷한 시대에 살았던 작곡가의 이름이라는 사실만을 알고 있을 뿐, 그 이상은 그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다고 해보자. 그가 작곡한 작품의 곡명조차 단 한 가지도 모른다. 간단하게 말해 당신은 대상을 개별화(個別化)하는 기술구individuating description, 즉 세계의 다른 대상들로부터 이름 ‘Josef Haydn’의 담지자를 짚어내게끔 하여 주는 기술구를 일절 갖고 있지 않다. 그렇기에 당신은 다음과 같은 형식을 지닌 그 어떤 문장도 형성해낼 수 없다:

 

Josef Haydn = F

 

다르게 말해 당신은 이러한 형식의 그 어떤 문장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거나, 적어도 이러한 문장이 참이라고 믿지 않는다. 이러한 실정에서 기술주의 이론이 참이라면, 설사 ‘Josef Haydn’이라는 이름을 사용한다 하더라도 당신은 Haydn을 결코 성공적으로 지시할 수 없다. 당신이 ‘Josef Haydn은 작곡가였다고 말하거나 생각하더라도, Josef Haydn에 대해 무언가를 성공적으로 말하거나 생각할 수조자 없다는 것이다! 이는 분명 잘못되었다. 당신은 분명 Haydn에 대한 약간의 정보를, Mozart와 비슷한 시대에 살았던 작곡가였다는 사실만큼은 분명 알고 있다.

앞 단락에 제시된 마지막 네 번째 논증을 기술주의에 반대하는 무지(無知)로부터의 논변argument from ignorance이라 칭해볼 수 있겠다. 이는 다음과 같은 오류(誤謬)로부터의 논변argument from error과 밀접히 연관되어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GeorgeDante에 대해 아는 사실이라곤 그가 신곡의 저자라는 점뿐이라고 해보자. 이 경우 기술주의에 따르면 ‘Dante = 신곡의 저자George에게 분석적이다. 그런데 역사를 통해 세간에 알려진 바와는 달리 신곡의 실제 저자가 초라한 무명작가였던 Adriano라는 사람이었다고 해보자. Adriano신곡을 아무도 몰래 혼자 조용히 완성해내었지만, 이 사실을 알게 된 Dante가 그를 교살하고 그 위대한 작품의 명성을 가로채었던 것이다. 이 경우 기술주의 이론은 George가 이해한 바와 마찬가지로 ‘Dante신곡을 썼다가 잘못된 사람에 대해 참이라는 잘못된 결론을 내리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기이하고 가상적인 상황에서조차도 ‘Dante’의 지시체는 Adriano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Dante이다. (1) ‘Mozart = Don Giovanni의 작곡가와 같은 명제가 우연적이고 경험적이라는 사실은, 이번 단락에서 살펴본 바와 같은 사례에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렇게 무지 및 오류로부터의 두 논변이 보여주듯이, 고유명을 통해 대상을 지시하는 것이 대상을 식별해주는 기술구identifying description를 통해 대상을 짚어내는 있는 능력에 의존한다는 기술주의적인 가정은 전적으로 잘못되었다. 우리는 그러한 기술구를 일절 갖고 있지 않더라도 고유명을 사용하여 그 이름의 대상에 대해 성공적으로 무언가를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대상에 대한 개별화/식별 기술구는 고유명을 통해 대상을 지시하는 데 대한 필요조건이 아니다.]

이러한 일련의 논증들을 통해 도출된 결론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고유명은 직접적으로 지시하는 표현directly referring expression이다(다만 David Kaplan은 정확히 이것이 Kripke의 결론은 아니라고 해석한다). 다시 말해 고유명은 Frege의 뜻(대상의 제시방식)과 같은 대상에 대한 모종의 개념적 표상(表象)conceptual representation을 통해 대상을 지시하지는 않는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고유명은 뜻 없이 오로지 지시만을 갖는다. J. S. Mill의 용어법을 따라 말해보자면 고유명은 그 지시체를 외포denote하기만 할 뿐 별도의 개념적 내용을 내포connote하지는 않는다. 이런 식의 -Frege주의적 노선은 종종 직접지시이론direct reference theory이라 칭해진다. (역설적이게도 직접지시론은 고유명에 대한 ‘Russell주의적Russellian이론이라 불리기도 한다. 직접지시론은 고유명에 대한 Russell의 관점, 즉 고유명이 실은 대상에 대한 개념적 내용을 표현하는 한정 기술구가 위장된 형태라는 Russell의 관점을 부정하긴 하지만, Frege의 뜻 개념을 거부하고 모든 언어표현의 의미가 지시라는 소박한 의미론을 고수하고자 한 Russell의 핵심 기조만큼은 계승하기 때문이다.)

 

 

고정 지시어

 

전술했듯이 우연적으로 참인 문장이란 현실세계에서는 참이지만 어떤 -현실 가능세계에서는 거짓인 문장이다. 가령 ‘1965Beatles의 음반 판매량은 Rolling Stones보다 많다는 현실세계에서 참이지만, 어떤 -현실 가능세계에서는 거짓이다.7) 반면 필연적으로 참인 문장은 모든 가능세계에서 참이다.


7) (原註) 이런 의미에서 이란 명제와 세계 간 성립하는 관계이다. 다만 이라는 단어는 대체로 현실세계에서 참현실적으로 참actually true의 의미로 사용된다.


이렇게 어떤 문장들은 세계에 따라 각기 다른 진리치를 갖는 반면 어떤 문장들은 모든 세계에 걸쳐 동일한 진리치를 갖는 것과 유사하게, 어떤 단칭용어들은 우리가 어떤 세계에 관해 말하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사물들을 지시하는 반면 어떤 단칭용어들은 모든 세계에 걸쳐 동일한 지시체를 갖는다. 다음 두 단칭용어를 보자:

 

(4) 화성의 위성의 개수.

(5) 3보다 작은 양의 정수의 개수.

 

여기서 산술학의 진리는 필연적으로 참이라 해보자. 위 두 표현은 모두 수 2를 지시한다. 주지하다시피 화성의 위성은 PhobosDeimos 두 개이다. 그런데 두 표현이 -지시적인 이유는 현실세계에서 달을 공전하는 위성이 두 개이기 때문이다. 만약 사태가 현실과 달랐더라면, 화성은 둘보다 많거나 적은 위성을 갖고 있었을 수도 있다. 따라서 현실세계와는 다른 가능세계의 측면에서 보자면 (4)2가 아닌 다른 수를 지시한다. 즉 특정 사실적 환경에서는 화성의 위성이 네 개이거나 다섯 개였을 수도 있다. 반면 (5)그 어떤 가능적인 상황을 생각해보더라도 동일한 수를 지시한다. 3보다 작은 양의 정수가 정확히 두 개 뿐이라는 것은 필연적으로 참이기 때문에, (5)는 모든 가능세계에서 동일한 대상을 지시한다.

(5)와 같이 여러 세계들에 걸쳐서도 동일한 지시체를 갖는 단칭용어를 Kripke고정 지시어rigid designator라 칭하였다. 반면 (4)-고정적non-rigid이다(또는 유연하다flaccid’).

주의할 사항이 있다; ‘3보다 작은 양의 정수의 개수라는 단어는 물론 지금과 다르게 사용되었을 수도 있다. 자연언어의 역사가 지금과 달랐더라면 그 단어가 다른 의미를 지녔을 수도 있다. 그 경우 (5)는 다른 대상을 지칭했을 것이다. 이와 동일한 의미에서 문장 총각은 미혼이다역시 지금 의미하는 바와는 다른 것을 의미했을 수도 있다. 만일 총각고슴도치를 의미하고 은 미혼이다은 털이 없다를 의미한다면, 그 문장은 고슴도치는 털이 없다는 거짓 명제를 표현할 것이다. 하지만 총각은 미혼이다가 필연적 참인지 여부에 관해 물을 때 우리가 진정 의도하는 바는, 그 문장의 의미가 주어져 있을 경우 그 문장이 거짓이 되는 세계가 존재하는지 여부를 묻는 것이다. [다르게 말해 문장의 양상성에 관한 물음은, 문장이 어떤 명제를 표현했을 수 있겠느냐 하는 의미론적인 사안에 관련된 물음이 아니라, 이미 특정 명제를 표현하고 있는 문장이 어떤 세계에서 어떤 진리치를 가졌겠느냐 하는 형이상학적인 사안에 관련된 물음이다. 사실적인 의미론적 가정에 따라 한 문장이 각기 다른 명제들을 임의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그 명제들은 당연히 제각기 다른(혹은 동일한) 진리치를 갖게 될 것인바 그러한 양상적 진리치는 매우 사소하고 임의적인 방식으로 달라질/동일해질 것이다. 이렇듯 문장이 다른 명제를 표현할 것이라 가정함에 따라 달라지는/같아지는 식의 양상적 진리치는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다. 한 명제를 표현하는 문장이 세계에 따라 달리 갖게 되는 종류의 양상적 진리치가 우리의 관심사이다.] 총각이 미혼이라는 명제는 거짓이었을 수 있겠는가? 물론 그 답은 아니오이다. ‘총각은 미혼이다미혼 남성은 미혼이다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5)가 고정 지시어인지 여부를 물을 때 우리가 진정 묻고 있는 바는, 그 단어의 의미가 주어져 있을 경우 그 단어가 수 2가 아닌 다른 대상을 지시하는 세계가 존재하는지 여부이다. 산술의 진리가 필연적으로 참이라는 앞선 가정을 고려하였을 때 그 답은 아니오이다.

이번에는 다음 두 표현을 생각해보자:

 

(6) Nixon.

(7) 미국의 37대 대통령.

 

실제 미국의 37대 대통령은 Nixon이다. Nixon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미국의 37대 대통령인 그러한 세계가 존재하는가? 그렇다. 이렇듯 한정 기술구 형태의 (7)은 세계에 따라 각기 다른 사람을 지시하므로 고정 지시어가 아니다. 이에 다음 문장은 참이다:

 

(8) 미국의 37대 대통령은 미국의 37대 대통령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이 문장이 말하고 있는 바는 다음과 같다: (실제로) 미국의 37대 대통령인 사람 즉 Nixon을 생각해보라. 그 사람이 미국의 37대 대통령이 아닌 가능세계가 존재하는가? 그렇다.

 

그렇다면 (6)은 어떠한가? 여기서 고유명 (6)의 지시체인 그 사람 Nixon 자체에 대해 생각해보라. Nixon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Nixon인 그러한 세계가 존재하는가? 당연히 그렇지 않다! 그 어떤 가능세계에서도 NixonNixon이다. 그러니 다음 문장은 명백히 거짓이다:

 

(9) NixonNixon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우리는 Nixon을 취하여 그가 Nixon이 아닌 가능세계를 찾아낼 수는 없다. 현실세계의 그 사람 NixonNixon이 아닌 가능세계란 없다. 그 사람이 그 사람이 아닌 가능세계란 없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고유명 ‘Nixon’이 고정 지시어라는 점이다: ‘Nixon’은 모든 가능세계에서 동일한 대상을 지시한다. 이에 (9)와 같은 형식의 문장은 다음과 같이 한 용어의 고정성 여부를 검사하는 문장함수로 사용될 수 있다:

 

만약 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의 두 공란에 임의의 한 용어를 대입한 결과 문장 전체가 거짓일 경우 그 용어는 고정적이며, 그렇지 않을 경우 -고정적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Nixon’이라는 이름은 지금과 다르게 사용되었을 수도 있다. 즉 현실에서 ‘Nixon’이라 불리는 바로 그 사람 Nixon‘Nixon’이라고 불리지 않았을 수도 있다. Nixon을 부르는 이름이 ‘Nixon’이 아닌 가능세계가 존재한다. ‘Nixon’이 고정 지시어라고 말할 때 우리는 이러한 명백한 사실을 부정하고 있는 게 아니다. 고유명이 고정 지시어라는 아이디어의 요지는, 현실세계의 우리가 ‘Nixon’을 관습적인 의미로 사용할 경우라면, 다른 어떤 가능세계 내지 상상가능한 상황에 대해 말하더라도 동일한 사람인 Nixon에 대해, 즉 현실적으로 ‘Nixon’이라 불리는 바로 그 사람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번 절에서 살펴본바 고정 지시어에 대한 Kripke의 생각을 요약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a) 진정한 고유명은 모두 고정 지시어이다(반면 (5) ‘3보다 적은 양의 정수의 개수사례가 보여주듯이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즉 모든 고정 지시어가 진정한 고유명 형태인 것은 아니다]).

(b) 진정한 고유명은 모두 직접 지시한다refer directly.

(c) 직접 지시하는 표현은 모두 고정 지시어이지만, 모든 고정 지시어가 직접 지시하는 것은 아니다(이 역시 (5)의 사례에서 알 수 있다).8)

 

8) (a)(b)(c)로부터 도출된다. 모든 고유명이 직접지시표현이고 모든 직접지시표현이 고정 지시어라면, 모든 고유명은 고정 지시어이다(Aristoteles 정언논리학의 1-AAA식인 소위 Barbara 형식에 해당). 이에서 알 수 있듯이 외연적 측면에서 말하자면 고유명의 외연이 가장 좁고 고정 지시어의 외연이 가장 넓으며, 개념적인 내포의 측면에서 말하자면 고유명 개념은 고정 지시어 개념을 함축하되 그 역은 아니다. 고유명과 직접지시표현 간의 정확한 포함관계는 지금까지의 논의만으로는 불분명하다.


 

지시 고정하기: 인과의 사슬

 

Kripke의 평가대로 기술주의 이론이 틀린 이론이라 하자. 그렇다면 어떤 지시이론reference theory이 참이겠는가? 만약 당신이 Haydn을 짚어내게끔 해 줄 여하한 기술구를 알지 못한다 해도 ‘Josef Haydn’이라는 이름만으로 Haydn을 성공적으로 지시할 수 있다면, 이는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이에 대해 Kripke는 여직껏 아무도 그러한 답변을 제시하지 않은 것이 이상하게 여겨질 만큼 단순하고도 상식에 부합하는 설명을 내놓는다. 다시 ‘Haydn’ 사례로 돌아가보자. 이름 ‘Haydn’을 사용 할 때 당신은 암묵적으로 다음과 같은 의도를 갖고 있는 셈이다: ‘“Haydn”을 통해 나는 다른 사람들이 그 이름으로 의미하는 바를 의미한다.’ 여기서 다른 사람들이란 당신에게 ‘Haydn’이라는 이름을 말해 준 사람들, 예컨대 당신 주변의 친구들, 책이나 잡지의 저술가들, 인터넷에 글을 올리는 사람들, 라디오나 텔레비전에 출연하는 사람들 등을 일컫는다. 편의를 위해 그러한 사람들 전부를 대표하는 한 인물 A를 상정하자. A‘Haydn’을 통해 누구를 의미하는가? A 역시 다른 누군가인 B로부터 그 이름을 듣고 나서는, ‘“Haydn”을 통해 나는 다른 사람들이 그 이름으로 의미하는 바를 의미한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B‘Haydn’을 통해 누구를 의미하는가? B 역시 C로부터 그 이름을 들었을 것이며, CD에게서 들었을 것이며 등등 이렇게 계속된다. 요컨대 ‘Haydn’을 사용하는 사람들 간에는 당신에 이르기까지의 역사적인 사슬historical chain이 얽혀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그 사슬이 이어진 방향을 당신에서 시작하여 추적해 간다면 어디에 이르겠는가? 아마 최종적으로는 Haydn을 실제로 알았던 사람들, 그를 직접 보아서in person 알았던 사람들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 사람들은 한 남성 내지 한 어린 아이를 소개받으면서 얘가 바로 Haydn이에요라는 말을 들었을 것이다. 이름 ‘Haydn’최초로 사용한 사람은 그의 부모이다. 그의 부모는 까르륵거리며 웃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자식을 보며 애 이름은 “Josef”라고 합시다하고 말했을 것이다. 부계 성을 따른다는 사회적 관습에 따라 그 아이의 이름은 ‘Josef Haydn’이 된다. 이것이 Haydn에 대한 명명식(命名式)dubbing/ceremony of naming의 현장이다. 그 시점 이후로 부모는 그 아이를 지시하고자 하는 의도로 그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한다. 부모로부터 그 이름을 듣게 된 사람들은 그 부부가 지시하는 아이를 지시하기 위해 역시 그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을 것이며, 그렇게 ‘Josef Haydn’의 사용에 관한 역사적인 사슬이 시작된다. 종종 활용되는 경제학적인 비유를 들어 말해보자면, Haydn의 부모는 이름을-사용하는 관행name-using practice에서 ‘Josef Haydn’생산자producer이며, 그 이름을 전해들은 사람들은 소비자consumer인 셈이다.

이 이론의 장점은, ‘Josef Haydn’으로 칭해지는 사람이 누구인지 설사 정확히 모른다 하더라도, 그 이름을 사용함으로써 다른 이가 아닌 바로 그 작곡가를 성공적으로 지시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설명해낸다는 점이다. 당신이 그 이름을 통해 누구를 지시하느냐 하는 사안은, 그 이름과 얽힌 어떠한 의사소통에 참여하고자 (암묵적으로) 의도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으로 설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지시 고정하기: 기술구

 

[고유명을 사용할 때 기술구를 경유하여 대상을 지시하는 게 아니라 대상을 직접 지시한다고 해서,] 우리가 기술구의 사용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있다고 할 수 있는가? [앞 절에서 말한바 고유명을 사용할 때 암묵적으로 떠올리는] ‘다른 사람들이 이름 N을 통해 지시하는 바로 그 사람이라는 표현 역시 기술구가 아닌가? 물론 그렇다. 하지만 그 기술구가 이름 N의미를 부여give the meaning하지는 않는다. [고유명을 사용할 때 그러한 기술구가 개입된다고 해도] 기술구 이론에 대한 Kripke의 반박논증은 여전히 주효하다. Haydn이 그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점은 Haydn에 대한 우연적인 사실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이 “Josef Haydn”을 통해 지시하는 그 사람이라는 기술구 역시 Haydn과 우연히 결부되었을 뿐, ‘Josef Haydn’에 의미를 주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앞서와 마찬가지로 당신이 이름 ‘Josef Haydn’A로부터 듣게 되었다 가정한 뒤, 다음 문장을 생각해보자:

 

(10) Josef Haydn = A‘Josef Haydn’을 통해 지시하는 그 사람

 

이 문장은 참이며, 따라서 두 단칭용어 ‘Josef Haydn’‘A“Josef Haydn”을 통해 지시하는 그 사람은 사실상 동일한 지시체를 갖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두 표현의 의미가 동일한 것은 아니다. 두 표현은 전연 동등equivalent하지 않은바, 필연적으로 동등하지도 않으며 인식론적으로 동등하지도 않으며 개념적으로 동등하지도 않다. Frege의 용어를 빌려 말하자면 두 표현의 인지적 가치는 다르다. Haydn‘Josef Haydn’으로 불리지 않는 가능세계에서라면 (10)은 거짓이다. 그러한 세계에서는 A‘Josef Haydn’을 통해 Josef Haydn을 지시한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Kripke에 따르면 ‘A“Josef Haydn”을 통해 지시하는 그 사람과 같은 식의 기술구는 이름에 의미를 주는 것이 아니라 이름의 지시를 고정fix the reference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거칠게 말하자면 Frege(Russell)는 언어-사용자language-user의 마음속에 이름의 지시체를 고정하고자 하는 의도intention가 있어서, 그 의도의 내용content of that intention이 이름의 의미를 구성한다고 주장하였다. Kripke가 보기에 결정적인 문제점은 두 번째 주장이다. 이름의 지시를 고정하는 것이 반드시 이름의 의미 내지 이름의 인지적 가치를 결정하는 것과 연관되어야 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하나의 기술구가 이름의 지시를 고정하는 데에 사용될 수는 있겠으나, 그렇다고 하여 그 기술구가 축약된 것이 이름은 아니다.

Kripke의 생각을 이에서 더 밀고 나가볼 수도 있다. 한 언어-사용자가 어떤 이름을 성공적으로 사용하는 경우, 그 사람은 이름의 지시를 고정하고자 하는 의도를 반드시 가져야만 하는가? [즉 이름의 지시체를 고정하고자 하는 의도는 이름의 성공적인 사용에 대한 필요조건인가?] 그렇지 않다! 표현될 수 있는 모종의 인지적 가치를 이름이 반드시 지녀야만 한다는 생각을 일단 폐기하고 나면, 우리가 관심하는 사안은 오로지 이름이 무엇을 지시하는가일 뿐이라는 점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지시이론에서 우리가 필요한 전부란 어떤 사실이 이름의 지시체를 결정해주느냐에 관한 이론이다. 그리고 화자의 마음속 명백한 의도라는 것이 그러한 사실에 반드시 포함되어야만 한다고 가정할 필요는 없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한 쌍의 의미론적 규칙을 상정할 수 있다:

 

1   A가 어떤 주어진 대상을 이름 NN으로 명명한다면, NN을 사용할 때 ANN을 통해 그 A대상을 지시한다.

2   C가 이름 NNB로부터 들었고 CNN을 사용한다면, BNN을 통해 무엇을 지시하 든 C 역시 NN을 통해 그것을 지시한다.

 

이러한 의미론적 규칙 내지 규약은 (설사 화자가 그 규칙을 명시적으로 정식화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화자가 한 이름을 통해 지시하는 바를 결정한다.

지시-고정reference-fixing 절차가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알고 나면, 고유명의 지시체가 Frege Russell이 생각한 바와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는 방식으로 고정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예를 들어 어떤 옷가게 점원은 가게에 자주 와서 탈의실에서 옷들을 한참 동안 입어보기만 하는 한 손님을 지시하기 위해 굼벵이 아가씨라는 이름을 사용하겠다고 약정(約定)stipulate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경우 점원은 그 이름의 지시체를 단지 명시하고 있을 뿐, ‘굼벵이 아가씨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점원은 굼벵이 아가씨라는 이름과 탈의실에서 옷들을 한참 동안 입어보기만 하는 그 손님이라는 한정 기술구가 동의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후자와 다르게 전자는 고정 지시어이다. 점원은 이러한 약정을 활용하여 , 오늘은 굼벵이 아가씨가 쇼핑하러 오지 않았음 좋겠다!’ 하고 말할 수는 있다. 다만 그러한 약정을 하고 그것을 아무리 자주 활용하더라도, 그 점원은 다음 문장이 명백히 우연적으로만 참이라 생각하지 그 어떤 의미에서도 필연적이라고는 여기지 않을 것이다:

 

(11) 굼벵이 아가씨 = 탈의실에서 옷들을 한참 동안 입어보기만 하는 그 손님

 

이렇듯 한정 기술구는 이름의 지시를 고정하는 데에 사용될 수 있다. 그렇기에 [고유명의 지시를 고정하는 데에] ‘Josef Haydn’ 사례에서 보았던 바와 같은 명명식이 반드시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이름의 지시를 고정하는 데에 활용될 경우의 기술구는 [마치 대상에 이목을 끌기 위해 동원되는 손가락이나 지휘봉처럼] 대상을 가리키는-장치[(손가락이 실제적물리적으로 대상을 가키리는 것과 유사하게 대상을 언어적으로 가리키는 장치)]의 역할을 수행하는 셈이다.

 

그런데 고유명에 대한 Kripke의 그림에 문제를 일으키는 사례들이 있다: 첫 번째로, 어떤 이름의 경우엔 기술주의 이론에 더 잘 부합한다. 대부분 사람들은 그리스의 역사 이전 시대의 실제 사실이 어떠하였든 간에 이름 ‘Homer’가 지금도 그러하듯이 애초에 IliadOdyssey의 저자라는 한정 기술구를 의미하는 것으로 의도된 이름이라 생각할 것이다. 앞서 고찰했던 사례들과 달리, 그 기술구는 단지 ‘Homer’라는 이름의 지시를 고정하기 위해서만 동원되지는 않았던 것이다. ‘토막 살인마 JackJack the Ripper’9) 역시 이와 마찬가지로서, 이 이름 내지 별칭은 누군지를 특정할 수 없는 살인사건의 범인에 적용될 법한 특정 기술구가 단지 축약된 것일 뿐이다. 그렇기에 토막 살인마 Jack은 토막 살인마 Jack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말은 전연 이상하지만은 않은 듯하다. ‘Nixon’은 진정한 고유명이기에 NixonNixon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명백히 거짓인바 앞서 살펴본 고정성 검사를 통과하는 반면, ‘토막 살인마 Jack’화이트채플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인 그 사람과 같은 한정 기술구의 축약일 뿐이기에 고정성 검사를 통과하지 못하는 것이다.


9) 1988년 영국 이스트엔드 지역의 윤락가 화이트채플에서 일어났던 미제사건의 범인에게 붙여진 별명. 우리말의 김철수와 같이 아무개를 의미하는 범용한 이름 ‘Jack’, 발견된 시신 다섯 구 대부분이 처참히 훼손된 상태였기에 갈가리 찢는 사람이라는 의미의 ‘ripper’가 활용되어 이러한 별명이 붙었다.


두 번째로, 우리는 슈퍼맨이라든가 ‘Santa Claus’와 같은 소위 허구적 실체fictional entity를 지칭하는 고유명에 관해서는 아직 살펴보지 않았다. 그러한 이름들은 단지 지시하도록 가장(假裝)pretended to refer것일 뿐, 실제로 무언가를 지시하지는 않는 듯하다.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이름들이 단순히 무의미한 것만은 아니기에, 허구적 고유명의 의미를 설명하는 데에는 그 지시체로 의도된 허구적 대상이 만족할 법한 모종의 기술구가 개입되어야 한다.

물론 이러한 문제들이 Kripke의 이론에 대한 진정한 반례인지 여부는 따져볼 여지가 있다. Kripke의 주장을 통상적인 사례에 속하는 고유명으로 한정하여, 즉 앞서 고정 지시어말미에 있는 박스에서 언급된바 진정한 고유명에만 한정하여 그러한 이름들의 경우엔 기술주의 이론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해석해볼 수 있으며, 이는 기술주의 이론에 부합하는 이름이 일절 없다는 주장과는 다르다. 하지만 이렇게 해석하여도 Kripke 이론에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는 사례가 Gareth Evans에 의해 제시되었다.10) 알려진 바에 따르면 Madagascar 섬은 본디 그렇게 불리지 않았다고 한다. ‘Madagascar’는 원래 아프리카에 있는 한 해안가의 일부를 일컫는 명칭이었는데, 유럽의 탐험가들 및 지도 제작자들의 착오로 인해 그 해안가의 앞바다에 있는 거대한 섬의 이름으로 잘못 전이되어버렸다는 것이다. ‘Homer’ 사례와는 다르게 이번 사례의 경우 ‘Madagascar’는 기술구가 축약된 이름이라 여겨지지는 않는다. ‘Madagascar’는 진정한 고유명으로서 분명 Kripke가 제시한 논증들이 적용되는 종류의 이름이다. 이와 유사하면서도 미묘하게 다른 사례들은 얼마든지 많이 제시될 수 있겠으나 여하간 그 모든 사례들의 공통점은, 한 이름을 현재 사용하는 사람들이 지칭하는 대상과 최초에 그 이름을 생산한 사람들이 본디 지칭했던 대상이 다를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례들을 정확히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는 앞선 두 사례와는 달리 Kripke 이론에 대해 명백하고 심각한 문제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 어떤 해결책이 되었든, 언어 공동체 내에 이어져 온 역사적 사슬이 예상치 못하게 어그러질disrupted 수 있다는 사실, 즉 이름이 사용되어온 역사적 사슬의 한 지점에서 이름과 그 지시체에 대한 잘못된 정보misinformation가 퍼질 수 있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10) (原註) 이 사례 및 여타 예시들에 관해서는 G. Evans, 이름에 대한 인과이론The Causal Theory of Names(G. Evans 選集, 옥스퍼드: 옥스퍼드대학교출판부, 1985, 1-24쪽에 수록) 참조. 본문에 제시된 ‘Madagascar’ 사례는 11쪽에 제시되어 있다.


 

FregeRussell에서부터 계속되는 문제들

 

Russell은 통상적인 고유명이 진정한 고유명은 아니라고 믿었다. 통상적인 고유명은 단지 한정 기술구가 축약된 것이며, 그의 이론에 따르면 한정 기술구는 단칭용어가 아니라 양화사이다. 오직 감각-자료(및 자아)를 지시하는 이름만이 논리적 고유명이다. Frege와 달리 Russell의 관점에서 논리적 고유명은 아무런 기술적 내용을 지니지 않는다. Frege가 말한바 지시체의 결정 규칙 및 지시체의 현상방식 따위를 표현하지 않는다.

이런 연유로 직접지시론은 Russell주의적이라 칭해진다. 직접지시론은 고유명이 기술적 내용을 갖는지 여부의 문제에 대해 Frege에 반대하고 Russell에 동의하기 때문이다. 직접지시론의 관점에서도 고유명은 아무런 기술적 내용을 지니지 않는다. 하지만 직접지시론은 통상적인 고유명이 진정한 고유명 즉 논리적 고유명임을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Russell과 관점을 달리한다.

통상적 고유명에 대한 Frege Russell의 기술주의 관점에 반대하는 Kripke의 논증은 매우 강력하다. 그런데 Frege로 하여금 뜻 이론을 정립하도록 추동하고, Russell로 하여금 직접대면된 항목만이 논리적 고유명의 지시체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을 견지하도록 만들었던 인식론적 이유들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예컨대 직접지시론자들은 다음과 같은 가능성을 어떻게 설명해낼 수 있겠는가?:

 

Hesperus = Phosphorus.

JohnHesperus가 행성이라고 믿는다.

JohnPhosphorus가 생성이라고 믿지 않는다.

 

Kripke의 관점에서 보자면 ‘Hesperus’‘Phosphorus’는 어쨌든 동일한 의미를 지니며, 따라서 동일한 인지적 내용을 갖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리고 그 경우 위의 세 문장은 분명 동시에 참일 수 없다.

뿐만 아니라 ‘Vulcan’과 같이 비존재에 대한 이름과 얽힌 문제는 직접지시론의 관점에서 어떻게 처리될 수 있겠는가? 분명 ‘Vulcan’은 단순한 허구적 이름이 아니며 통상적인 고유명으로서 진지하게 의도된 이름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지시체를 갖고 있지 않기에 Kripke‘Vulcan’과 같은 이름이 무의미하다는 잘못된 답변을 내놓을 수밖에 없는 듯하다. [이는 2에서 살펴본바 지시와 의미를 동일시하는 소박한 지시론이 봉착하는 것으로 Frege가 진단했던 바로 그 문제로서, 소박한 의미론의 기본 원리를 그대로 고수하는 직접지시론 역시 이 문제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 ‘Vulcan’‘Nessie’는 공허한 단칭용어이기에 직접지시론의 관점에서는 동일하게 무의미하며, 따라서 ‘Vulcan은 뜨겁다‘Nessie는 뜨겁다가 동의적 문장이라는 잘못된 판결을 내릴 수밖에 없다.]

직접지시론의 관점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세 가지 가능한 선택지가 있는 듯하다. 첫 번째는 기술주의적 관점과 직접지시론적 관점을 적절하게 통합하는 것으로서, 언어의 인지적 차원에 대해서는 FregeRussell이 발전시킨 설명을 받아들이되, Kripke가 지시 및 필연성에 관해 지적한 사실들 역시 수용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Kripke의 논증을 다시 논박하는 것이다. 세 번째는 Kripke의 논증을 전적으로 수용하고 Frege반대하는 것으로서, 언어표현의 지시에 관한 문제와 인지적 차원에 관한 문제를 날카롭게 구분한 뒤, 언어철학적으로 개입해야 할 유일한 문제로서 전자에 대해서는 Kripke의 이론을 받아들이고, 후자는 인식론, 심리철학, 심리학 등의 문제로 남겨놓는 것이다. 우리는 8에서 이 문제를 다시 상세히 살펴보게 될 것이다.

 

 

추가적인 논의: 내포 의미론

 

미국의 44대 대통령은 미국의 첫 흑인 대통령이었다. ‘미국의 44대 대통령미국의 첫 흑인 대통령이라는 두 기술구는 동일한 개체를 짚어내지만, 동일한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는 두 기술구가 동일한 대상을 필연적으로 짚어내지는 않는다는 사실에 반영되어 있다. 다른 가능세계에서는 미국의 42대 대통령이 미국의 첫 흑인 대통령이다.

박쥐는 날 수 있는 유일한 포유류이다(날다람쥐는 나는 게 아니라 활공할 뿐이라고 가정하자).따라서 두 술어 ‘𝛼는 박쥐이다‘𝛼는 날 수 있는 포유류이다-외연적이다. 즉 박쥐의 집합은 날 수 있는 포유류의 집합과 정확히 동일하다. 하지만 두 술어는 분명 동의적이지 않다. 두 술어표현의 의미는 다르다. 이는 현실세계에서 박쥐의 집합과 날 수 있는 포유류의 집합이 정확히 동일하긴 하지만, 두 집합이 일지하지 않는 다른 가능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반영되어 있다. 어떤 가능세계에는 두 술어 중 하나만을 만족하는 생물들이 존재한다.

이러한 대응성에 주목한 많은 철학자들은 언어표현의 의미가 이런 식의 가능세계에 따른 작동방식behaviour across possible world 즉 언어표현의 양상적특질‘modal’ feature과 부합해야 된다는 생각을 제시해왔다. 모든 언어표현은 하나의 내포(內包)intension를 가지며, 이 내포는 각 가능세계에 따라 그 세계에서의 한 외연(外延)extension을 결정한다. [다르게 말하면 언어표현의 내포는 가능세계로부터 외연을 사상하는 함수이다.] 예를 들어 미국의 첫 흑인 대통령의 내포는 현실세계에서 Barack Obama를 그 외연으로 결정하지만, 다른 가능세계에서는 Jesse Jackson, 또 다른 가능세계에서는 또 다른 대상을 그 외연으로서 결정한다. ‘𝛼는 날 수 있는 포유류이다의 내포는 현실세계에서 ‘𝛼는 박쥐이다와 동일한 외연을 결정하지만, 다른 가능세계에서는 가령 날아다니는 웜뱃의 집합과 같은 다른 외연을 결정한다.

이와 유사하게, 우리는 명제를 문장 전체의 내포와 동일시해볼 수 있다. 1이후로 우리는 명제를 그것을 표현하는 문장과 유사한 구조를 갖는 추상적인 대상으로 가정해왔다. 이제 이러한 명제개념 대신, 명제를 문장 및 발화의 맥락context of utterance으로부터 그 문장이 (주어진 그 발화의 맥락에 따라) 참인 세계들의 집합을 사상하는 함수(函數)function로 생각해볼 수 있다. 문장의 내포는 각 세계에 따라 그 문장의 진리치를 결정한다. 예를 들어 현실세계에서 ‘Barack Obama는 미국의 44대 대통령이다의 진리치는 ‘VoltaireCandide를 저술했다의 진리치와 같다. 하지만 이는 현실세계에서만 성립할 뿐, 다른 가능세계에서 두 문장의 진리치는 다르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의미는 문장이 보이는 양상적 작동방식modal behaviour의 측면에서,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모든 언어표현이 보이는 양상적 작동방식의 측면에서 탐구되어야 한다. 이러한 아이디어는 문장의 뜻을 문장의 진리-조건으로(일반적으로 말하자면 모든 언어표현의 뜻을 그 표현의 지시-결정조건으로) 특징지은 Frege의 생각과 잘 부합한다. 즉 문장의 뜻이 곧 문장의 진리-조건이라는 말은, 문장의 내포가 곧 문장이 참이 되는 환경들의 집합이라는 말과 같다.

이러한 소위 내포 의미론intensional semantics 및 그 다양한 변형태들은 지난 60여년간 의미를 해명하는 데 대한 가장 유력한 접근방식이었다. 이 이론은 매우 직관적이다. ‘은 빨갛다라는 단어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현실세계에서 무엇이 빨간 것으로 간주되는지 알아야 할 뿐만 아니라, 대안적인 상황 즉 다른 가능세계에서는 무엇이 빨간 것으로 간주될 것인지 역시 알아야 한다. 언어표현들 간 의미의 차이를 확실하게 판명해내는 가장 신뢰할 만하면서도 익숙한 방식은 다음과 같은 가상적인 추론을 진행해보는 것이다: 현실세계에서는 임의의 언어표현 AB의 외연이 일치하긴 하지만, 양자가 갈라지는 다른 가능한 상황이 존재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AB의 의미는 다르다.

하지만 그 은 참이 아니라는 데에 내포 의미론의 난점이 있다. AB의 외연이 모든 가능세계에서 일치한다고 해도, 양자의 인지적 가치가 항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2+2=4’모든 캥거루는 캥거루이다와 같이 AB그 자체로 필연적 참이라면, 두 문장의 진리치는 모든 가능세계에서 일치하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두 문장의 의미가 같다고 여겨지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요컨대 내포적 동등성intensional equivalence은 인지적 동등성congnitive equivalence을 함축하지 않는다. [즉 임의의 두 언어표현의 내포가 모든 가능세계에서 동일한 외연을 결정한다 해도, 두 표현의 의미가 동일하다고는 할 수 없는 사례가 존재한다.] 술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서, 필연적으로 동일한 외연을 갖지만 인지적으로 동등하지 않은 술어들이 존재한다. 예컨대 ‘𝛼는 둥근 사각형이다‘𝛼는 동물들이 존재하기 이전에 존재했던 동물이다는 모든 가능세계에서 집합empty/null set을 그 외연으로 갖는바 필연적으로 -외연적이지만, 양자의 의미는 분명 다르다. 단칭용어의 경우엔 방금 언급되었던 두 술어로 구성된 한정 기술구를 예로 들 수 있겠다. 둥근 사각형동물들이 존재하기 이전에 존재했던 동물은 모든 가능세계에서 아무것도 지칭하지 않는바 내포적으로 동등하지만, 인지적으로도 동등하지는 않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멀게는 1940년대 후반 Frege 철학에 토대를 두었던 R. CarnapAlonzo Church를 위시하여, 작금의 철학자들로는 Richard Mongtague, David Kaplan, David Lewis, Robert Stalnaker `에 이르기까지, 많은 인물들에 의해 다양한 접근법과 해결책들이 제시되어왔다. 초기의 접근법은 문장의 구성적 구조compositional structure에 호소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둥근 사각형동물들이 존재하기 이전에 존재했던 동물은 필연적으로 동일한 외연을 갖긴 하지만, 동등한 내포를 지닌 구성 부분들에 의해 동일한 방식으로 구성되어있지는 않다. 간단히 말해 두 표현은 동의성에 대해 Carnap이 요구한 내포적 동형성intensional isomorphism을 띠지 않는다. Carnap의 내포적 동형성 조건에 따르면 동의적인 문장들 즉 인지적으로 동등한 문장들은 내포적으로 동등intensionally isomorphic해야 하는바, 동일한 내포를 갖는 구성 부분들에 의해 동일한 방식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Carnap의 이론 및 내포 의미론과 연관된 여타 이론들은 여기서 상세히 살펴보기에는 너무 복잡한 주제이다. 뿐만 아니라 고전적인 의미론 분야에서 FregeRussell의 이론마냥, 내포 의미론 분야에서 독보적으로 우월하고 지배적인 위상을 갖는 하나의 이론은 아직 없는 실정이다. 다만 여기서는 언어표현의 양상적 작용방식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성공적인 의미론에 대한 충분조건은 아닐지라도 필요조건이라고 가정해보고자 한다. 그 어떤 형태가 되었든 의미에 관한 이론은 한 문장이 복수의 가능세계들을 걸쳐서 갖는 진리-조건에 대해 올바른 답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역사적 사항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유명한 철학자들(특히 HumeAyer)은 선험성 후험성(또는 경험성), 필연성 우연성, 분석성 종합성이라는 세 가지 개념쌍에 대해 각 쌍을 이루는 항목들이 서로 나란히 가는 개념들이라는 점을 이의 없이 받아들였다. 뿐만 아니라 첫 번째와 두 번째 개념쌍은 세 번째 것으로 환원되거나 그에 의해 설명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선험적 지식이 어떻게 가능한지 설명하기 위해 별도의 기이한 인식론적 능력이 요구될 필요는 없으며, 필연적 참이라는 개념에는 아무런 불가사의함도 없다. 양자는 모두 의미론적 측면에서, 즉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의 측면에서 남김없이 설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전통철학에서 형이상학적으로 혹은 인식론적으로 실질적인 문제인 것처럼 보였던 사안들이 실제로는 단지 언어와 관련된 사안인바 진지한 해결책이 필요한 심각한 문제는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다. 앞서 4에서 살펴보았듯이 1920년대 후반부터 1950년대에 이르기까지 논리실증주의자들은, FregeRussell이 체계화한 강력한 새로운 논리학으로 무장한 채, 이렇듯 선험성과 필연성을 분석성으로 환원하는 관점을 발전시켰으며, 이러한 작업을 통해 형이상학을 제거하고 인식론을 명료화하고자 도모하였다. Carnap세계의 논리적 구조(19671928)경험주의, 의미론, 존재론(1950: 의미와 필연성: 의미론 및 양상논리 연구(1956)에 수록), 그리고 Ayer언어, 진리, 논리(1936, 개정판은 1946년에 출간)는 이러한 관점을 천명한 영향력 있는 저서들이었다.

한편 Kripke1971년에 논문 동일성과 필연성Identity and Necessity을 발표하였으며, 그의 이름과 이론을 널리 알리게 된 명저 命名과 필연Naming and Necessity1980년에 출간되었다. (사실 이 저서는 본디 Donald DavidsonGilbert Harman이 편집하여 1972년에 출간한 자연언어의 의미론Semantics of Natural Language에 수록된 것이 첫 공식 출판이었다.) 거기서 KripkeCarnapAyer에 반대하여 위의 세 개념쌍을 확연하게 구분하는 논증을 펼치면서, 선험적(후험적)이면서 필연적인 명제 및 선험적이면서 우연적인 명제의 사례들을 제시하였다. Kripke의 관점은 언어철학 분야뿐만 아니라 인식론, 형이상학, 과학철학 등의 분야에도 막대한 영향력을 끼쳤다. 일반적으로 Kripke의 관점은 Carnap을 위시한 논리실증주의의 대두 이후 거의 사장되다시피 하였던 형이상학을 부활 및 해방시킨 것으로 평가된다. Kripke의 저서가 출간된 이후로 철학자들은, 형이상학이 단지 우리의 개념에 암묵적으로 포함되어있는 분석적인 것[(즉 실질적 지식이 아니라 개념 내지 언어에 관한 것)]일 뿐이라는 협소한 단서조항을 받아들이지 않고도, 형이상학적 이론들을 마음껏 발전시킬 수 있게 되었다.

인류 지성사의 위대한 변화들에서 으레 그러했듯이, Kripke는 이러한 혁명적 전환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낸 유일한 인물이었다. 물론 그 외에도 David Kaplan, Peter Geach, Keith Donnellan, Hilary Putnam 등의 인물들이 1960년대에 소위 새로운 지시이론new theory of reference에 관해 많은 수의 저술을 남겼다. 이 이론의 핵심 착상은 Ruth Barcan Marcus1947년부터 발표하기 시작한 양상논리(樣相論理)modal logic에 관한 저술들에서 처음 제시되었던바, Marcus는 이름을 기술적이지 않은[기술적 내용을 갖지 않는] “이름표descriptionless “tag”로서 특성화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전해지는 전설적인 사건은 1962년에 열린 보스톤 과학철학 학술회Boston Colloquium for Philosophy of science에서 있었던 만남이다. 거기서 Barcan Marcus는 그녀의 1961년 논문 양상적과 내포적 언어Modalities and Intensional Languages의 결론을 발표하였다. 청중에는 W. V. QuineAlfred Tarski 같은 쟁쟁한 원로급 철학자들 사이에 젊은 Kripke도 있었는데, 열여덟 나이였던 1959년에 양상논리에 관해 발표했던 매우 중요한 글 한편을 통해 Kripke는 당시 이미 유명해져 있었다. 그날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누가 무엇을 얼마나 이해했는지, 그리고 Kripke가 거기서 듣게 된 것들을 얼마나 간직하게 되었는지 등에 대해서는 쟁론이 분분하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Barcan Marcus가 직접 지시론의 핵심 착상을 최초로 발견해낸 것이 맞을진대, 그녀는 그 아이디어가 함축하는 바를 Kripke만큼 날카롭고 철저하게 파헤치지는 못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번 의 요약

 

이번 장에서 우리가 염두에 두었던 의미의 가능성은 형이상학적인 개념이다. 어떤 명제 p가 가능하다[가능적이다]는 말은. 설사 실제로는 p가 사실이 아니고 p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알려져 있다 해도, p였을 수도 있다는 말과 같다. 이런 의미에서 고대 그리스인들은 핵무기를 개발하였다는 명제는 실제로는 참이 아니지만 가능한 명제이다. 가능성과 필연성은 다음과 같이 상호-정의가능하다: p의 부정이 필연적이지 않다면 p는 가능적이며[∼□∼p → ◇p], p의 부정이 가능적이지 않다면 p는 필연적이다[∼◇∼p → □p]. [이러한 양상성 개념을 의미론적으로 해석하는 데에 활용되는] 가능세계라는 개념은 [그와 연관된 형이상학적 문제를 차치한다면] 최소한 이론적 발견에 유용한 수단으로서, 단순하게 생각해 사물들이 존재할 수 있었던 하나의 방식이라 할 수 있다.

FregeRussell은 크게 보자면 고유명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술주의적 관점을 견지하였던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임의의 통상적인 고유명 N에 대해, N이 사용되거나 이해되는 매 경우마다 그 이름은 F 형식의 한정 기술구를 의미한다. 이에 대해 Kripke는 최소한 다음과 같은 네 가지의 반론을 제시한다: (1) N이 그 F를 의미한다면 N이 그 F라는 것은 필연적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이는 참이 아니다. (2) N이 그 F를 의미한다면 N이 그 F라는 것은 선험적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이는 참이 아니다. (3) N이 그 F를 의미한다면 N이 그 F라는 것은 분석적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이는 참이 아니다. (4) ‘N = F’(여기서 F는 그 자체로는 언어적 조건이 아니다) 형식의 아무런 명제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더라도 N이 포함된 문장을 이해하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이름의 지시체가 되는 대상을 기술하는 지식descriptive knowledge을 일절 갖고 있지 않더라도, 그 이름을 통해 대상을 무리 없이 지시할 수 있다.

이에 Kripke는 무엇이 지시를 결정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기술주의 이론의 대안으로서 다음과 같은 인과-역사적causal-history 이론을 제시한다: 이름 N을 사용할 때 나는 N을 통해 무엇을 지시하는가? 나는 그 이름을 나 이외의 다른 언어-사용자인 A에게 들어서 알고 있다. AN을 통해 무엇을 지시하였는가? A는 그 이름을 B에게 들어서 알고 있다. BN을 통해 무엇을 지시하였는가? 이렇게 인과적-역사적으로 이어진 이름 사용의 사슬을 역추적해 가면, 가령 이 대상을 “N”이라 일컫기로 하자와 같은 말을 통해 이뤄지는 명명식에 의해, 혹은 F“N”이라 일컫기로 하자와 같은 기술구의 활용에 의해, 이름 N의 지시체가 고정되었던 시점에 최종적으로 이르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후자의 경우 F’ 형식의 기술구가 단지 대상을 가리키기 위해서만 활용된다는 사실이다. 최초 지시-고정단계에서 도입된 기술구는 이름 ‘N’과 동의적인 것으로 이해될 수 없는바, 지시체를 고정하는 데에 기술구가 활용된다고 해서 ‘N’이 그 기술구에 의해 표현되는 여하한 개념적 내용을 지니게 되는 것은 아니다. 뿐만 아니라 이름을 통한 지시가 성공적인지 여부에 대한 기준은 사용자가 그 이름 사용과 얽힌 역사적 연쇄를 이해하고 있는지 여부와는 전연 무관하다. 즉 이름을 사용하기 위해 이름 사용의 연결고리가 어떤 경로를 거쳐 최초의 지시-고정행위reference-fixing act에까지 이어지는지를 속속들이 알고 있어야 할 필요는 없다.

Kripke가 말하는 고정 지시어란 (지시체가 되는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제외한) 모든 가능세계에서 항시 동일한 대상을 지시하는 용어이다. 고정 지시어가 아닌 용어들은 -고정 지시어 내지 유연한 지시어라 칭해진다. 고정 지시어의 사례로는 사각형의 변의 개수를 들 수 있으며, -고정 지시어의 사례로는 미국의 42대 대통령을 들 수 있다. Kripke에 따르면 통상적인 고유명은 모두 고정 지시어이다. 따라서 가령 ‘Charles Lutwidge Dodgson = Lewis Carroll’은 필연적으로 참인 반면, ‘Lewis Carroll = 이상한 나라의 Alice의 작가는 현실세계에서 참이긴 하지만 필연적으로 참인 것은 아니다. ‘Charles Lutwidge Dodgson Charles Lutwidge Dodgson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거짓인 반면, ‘이상한 나라의 Alice의 작가는 이상한 나라의 Alice를 저술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참이기 때문이다.

내포 의미론이란 가능성 개념을 통해 의미를 설명하고자 하는 의미론의 한 조류이다. 한 문장의 의미를 앎으로써 임의의 가능세계에서 그 문장이 참인지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는 착상을 통해, 많은 철학자들은 의미를 양상적 진리-조건modal truth-condition과 동일시하는 의미론을 정립하고자 시도하였다. 내포 의미론의 문제점은 한 문장이 모든 가능세계에서 갖는 진리치를 안다고 해서 그 문장의 의미를 아는 데에 충분하다고 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예컨대 필연적으로 참이거나 거짓인 문장들의 경우 모든 가능세계에서 동일한 진리치를 갖겠지만 그 의미는 분명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탐구문제

 

1. 고유명에 대한 기술주의 이론에 찬동하는 다음 주장에 대해 생각해보자: 이름 N에 대한 임의의 사용자가 제시할 수 있는 다음과 같은 기술구가 존재하며, 그 기술구는 올바른 대상을 지시한다: ‘언어 공동체가linguistic community 이름 N을 통해 실제로 지시하는 그 대상’. 기술주의 이론에 대한 Kripke의 네 가지 반론 각각을 이 주장에 적용하여 검토해보라. Kripke의 반론은 이 주장에도 주효한가? 혹시 이 주장에는 악순환이 포함되어있지는 않은가?


2. 대상을 지시하는 데에는 정말 아무런 개념적 자원도 필요하지 않은가? 대상에 대해 단순한 소음 이상의 유의미한 무언가를 말하기 위해서는 어떤 형태든지의 개념적 내용이 필요한 듯하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언어-사용자가 고유명을 사용함으로써 대상을 지시하기 위해 이해하거나 혹은 의도해야만 하는 개념적 내용이란 무엇이겠는가?


3. Smith 부인이 산부인과에서 한 아이를 출산하였다. 갓 태어난 꾸물대는 아기를 건네받은 그녀는 애 이름은 ‘Roger’로 할 거야하고 말한다. 얼마 후 아기는 몸무게가 재어지고 건강상태를 확인받은 후 깨끗이 씻기게 된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 과정에서 Smith 부인의 아기는 그 산부인과에서 비슷한 시간대에 출생한 ‘Sam’이라는 이름의 다른 아기와 실수로 바꿔치기 되어버린다. 이러한 엄청난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였다. 하여 본디 ‘Sam’이라고 이름 붙여졌던 아기는 Smith 부부 슬하에서 ‘Roger’라고 불리며 성장하게 된다. 그 아이의 이름은 무엇인가? 시간이 지나 산부인과에서 있었던 사건이 밝혀지게 된다면, 그 아이는 Roger가 아니라 다시 Sam이 되는 것인가?


4. 파리Paris에는 한때 1미터 길이의 궁극적인 기준으로 간주되었던 이른바 표준 미터자라는 금속 막대가 있다. 따라서 그 기준이 통용되던 당시에는 표준 미터자의 길이 = 1미터가 당연히 필연적인 참이라 여겨졌을 것이다. Kripke는 이에 반대한다. 이 사례에 관해 Wittgenstein이 언급했던 바와는 다르게, Kripke(특정 시점에) 표준 미터자의 길이가 1미터라는 명제가 선험적이면서 우연적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표준 미터자는 실제 그 막대의 길이보다 길거나 짧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특정 시점에) 표준 미터자의 길이는 1미터이다는 단지 ‘1미터의 지시를 고정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Kripke는 이러한 주장을 하였는가? 그의 주장은 과연 옳은가?


5. ‘눈은 하얗다눈은 하얗고 모든 캥거루는 캥거루이다를 생각해보자. 두 문장은 동일한 내포를 갖는가? 양자는 모든 가능세계에서 동일한 진리치를 갖지만, 직관적으로 생각했을 때 그 의미는 분명 다르다. 내포 의미론의 관점에서 이러한 직관에 부합하는 설명을 제시할 수 있겠는가?

 

 

주요 읽을거리

 

Kripke, S. (1980), 命名과 필연Naming and Neces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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