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증주의 Ⅰ: Ayer
1936년에 출간된 Ayer의 『언어, 진리, 논리Language, Truth and Logic』는, Wittgenstein의 『논고』처럼 저자의 20대 시절에 쓰였으며, 역시 Wittgenstein의 저서와 마찬가지로 선대 철학자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지는 않은 저서이다. 그 책은 Witgenstein의 『논고』가 보여주는 깊이나 독창성, 논리적 명민함이라든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저술된 Carnap의 저서가 보여주는 엄격하고 지적인 정교함을 지니고 있지는 않지만, 고전적인 형태의 검증주의를 힘차고 당당한 어조로 표명한 저서로 여전히 평가된다(Ayer의 주요 착상들 대부분은 Carnap의 저서에서 본뜬 것이다. Carnap의 철학은 다음 절에서 다뤄진다). Carnap의 철학은 Ayer의 철학보다 더욱 추상적이고 난해하고 단일하게 규정하기 어려운 편이며, 두 인물의 이론적 동기 역시 현저히 다르다. 그렇기에, Ayer보다 Carnap이 시기상으로 좀 더 앞선 인물이긴 하지만, Carnap의 복잡한 이론을 살펴보기에 앞서 상대적으로 덜 추상적이고 실질적인 측면을 지닌 Ayer의 이론을 먼서 살펴보고자 한다. 비록 Ayer는 『언어, 진리, 논리』에 개진하였던 생각들을 말년에 철회하였지만, 지금도 그 책은 읽기에 평이하고 종종 흥미로운 면모를 보여준다. 책의 전체적인 기조는 명시적이면서도 설득력 있는 방식으로 Berkeley와 Hume의 철학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Michael Dummett, Crispin Wright, Simon Blackburn 등 비교적 최근의 인물들이 개진하는 관점을 예견하기도 한다.
『논고』에서 Wittgenstein은 언어가 사실을 묘사하는지 여부의 측면에서 뜻을-형성하는 언어의 한계를 설정하였다. 여기서 사실이란 대상들이 우연적이 방식으로 배열된 상태로서, 이러한 배열을 “그리지” 못하는 언어는 무언가를 보여줄 수는 있어도 여하한 사실적인factual 것을 말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그림이론에는 인식론적인epistemological 제약사항이 없다. 즉 언어가 적절한 의미를 담지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아는 것 혹은 직접 대면한 것만을 말해야 한다거나, 말의 주제가 되는 사안에 대해 간접적인 방식으로라도 정신적으로 접촉해야 한다는 등의 구체적인 요구사항이 없다.
『언어, 논리, 진리』의 핵심 아이디어인 검증원리Verification Principle는 그러한 제한조건을 제시한다. 뿐만 아니라 이 원리는 그 배경이 되는 전통적인 철학적 관점과 합쳐짐으로써, 언어와 철학의 본성 및 한계에 대한 설득력 있는 그림을 제공한다. 그 철학적 배경이란 필연성necessity과 선험성을 분석성과 동일시하고, 분석적 진술을 경험에 의해서는 논박되지 않는 진술로 간주하는 관점이다. 분석적 진술이 경험에 의해 논박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단지 우리의 기호사용 방식에 대한 규약, 즉 기호를 특정 방식으로 사용하겠다는 결정을 기록하는” 데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분석적 진술의 예로 Ayer는 Wittgenstein이 제시한 “항진명제”라든가 “형식적 참formal truth” 등을 제시하지만, 이것들을 명확히 정의하지는 않는다.) 분석적으로 참인 진술의 부정문은 자체-모순이다self-contradictory. 반면 분석적이지 않은 진술이란 “경험적인 사실의 문제empirical matters of fact”와 관련되는 진술로서, “개연적probable이지만 확실하지는 않은not certain 가설hypothesis”이다. 非-분석적 진술이 개연적인 이유는 차차 드러날 것이다.
모든 가설들이 부합해야 하는 검증원리는 “〔한 진술이〕 결정적으로 검증가능conclusively verifiable해야 한다”고 규정하지는 않고, 다만 “진술의 참이나 거짓을 결정하는 데에는 가능적인possible 감각-경험이 연관되어야 한다”고 규정한다. 이는 다음과 같은 약한 검증weak veritication을 표방한다: 한 진술은 “경험이 그것을 개연적이게 만들 수 있는 경우” 약하게 검증가능하다. 반면 Ayer는 Ernst Mach가 표방한 바와 같은 초기 실증주의를, 모든 경험적 가설이 결정적으로 검증가능해야 한다고 규정하는 강한strong 검증주의와 동일시하며, 이러한 형태의 검증주의는 거부한다.
검증원리와 필연성-선험성-분석성 개념들 간 동일시에 의거하여 Ayer는 모든 지식이 경험적이거나 선험적인 것 둘 중 하나에만 속한다고 주장한다. 후자는 단지 “본성상 언어적linguistic in character”(57)인 것으로서, 이를 통해 그가 의미하는 바는 선험적 지식이 언어적 사실에 관장 주장이라는 게 아니라 선험적 주장의 참이 분석적인 것으로서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Ayer는 “사실의 문제matters of fact”에 관한 것도 아니고 “관념들 간의 관계relation of ideas”에 관한 것도 아닌 진술들을 “불덩이 속에 던져버려야 한다”고 주장한 Hume의 인식론에 다소 동의한다. 또한 Ayer는 反-형이상학적anti-metaphysical 철학을 표방한다는 점에서 Schlick과 Carnap에 동의하는바, 왜냐하면 어떤 의미에서 형이상학은 인간 경험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 경험적 가설의 영역을 넘어서는 것, 언어의 뜻에 의해 검증될 수는 없는 것들에 관해 무언가를 주장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에 전통적으로 주장되어온 초월적인 신의 존재, 감각-경험이 실재하지 않는다는 가능성, 물질적 대상들에게서 지각되는 성질들의 기저에 있지만 그것 자체는 필연적으로 지각불가능한 ‘실체substance’에 대한 관념 등의 형이상학적 대상들은 거부된다. 그러한 대상들이 존재하지 않는바 그에 대한 형이상학적 주장이 거짓이기 때문에 거부되는 게 아니라, 그러한 대상들에 관해 말하고자 하는 문장들이 아무런 뜻도 지니지 못하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감각가능한sensible 세계가 실재에 반하는 현상appearance의 세계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은, 유의미성에 대한 우리의 기준에 따르면 문자 그대로 터무니없는 헛소리일 뿐이다.”(39)
그렇다면 Ayer가 제시하는 바의 유의미성 기준criterion of significance을 충족하는 모든 언어는, 분석적이지 않다면 왜 단지 개연적이기만 한 것인가? [즉 모든 非-분석적 진술, 실재 내지 사실의 문제에 관해 말하는 진술들이 확실하지는 않고 다만 개연적일 뿐인 이유는 무엇인가? 과학적으로 입증된 진술들은 세계에 관해 확실한 것들을 말하지 않는가?] 이러한 놀라운 주장에 대해 Ayer는 두 단계에 걸쳐 설명한다.
첫 번째로, Ayer가 생각하기에 철학이란 언어에 대한 논리적 명료화logical clarification 작업에 지나지 않기에, [새로운 지식의 발견이라는 측면에서는] 자연과학natural science과 더불어 조금도 경쟁하지 않는다. Ayer는 귀납원리Principle of Induction에 대해 Hume과 동일한 입장을 취한다. 거칠게 말해 귀납원리란, 충분한 수의 F가 G인 것으로 관찰된다면 모든 F가 G일 개연성이 있다는 것으로서, Hume에 따르면 이러한 귀납원리 자체가 [논리적으로는 정당화되지 않는] 경험적 일반화에 불과하다. 분명 귀납원리는 분석적으로 참이 아니며, 귀납원리를 받아들이는 것이 오류일 수도 있다. 관찰된 사례의 수가 매우 많기에 모든 F가 G라는 것이 아무리 높은 정도로 뒷받침된다 하더라도, 경우에 따라서는 G가 아닌 F가 존재하는 것은 분명 가능하다. Hume이 말했듯이 내년에는 “나무들이 겨울에 잎사귀를 틔울지 모른다”. 하지만 이러한 한계점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상식과 더불어 잘 입증된 최선의 과학은 귀납에 높은 신뢰도를 부여한다. 귀납원리에 대해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할 수는 없으며, 이는 곧 귀납원리를 절대적으로 확신할 수는 없더라도 그것을 믿는 일이 ‘합리적rational’이라는 단어에 대한 “정의의 문제matter of definition”로서 합리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귀납원리는 우주에서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진 지점에 대해 추론하는 것과 시간적으로 멀리 떨어진 시점에 대해 추론하는 것을 허용해준다. 즉 우리는 공간적으로 우리 근처에 있는 실재를 조사한 뒤 모든 실재가 동일한 법칙에 따를 것이라는 점에 근거하여 아직 관찰되지 않은 실재 역시 우리가 관찰한 바와 비슷할 것이라 추론하며, 현재 및 가까운 과거를 조사한 뒤 모든 시점이 동일한 법칙에 따를 것이라는 점에 근거하여 먼 과거와 미래 역시 현재와 비슷할 것이라 추론한다. [여기서, 아직 관찰되지 않은 모든 것들이 이미 관찰된 바와 동일한 법칙을 따를 것이라는 우리의 기대가 바로 귀납원리가 개입되는 지점이다.]
추가적으로, Ayer는 그 어떤 가설도 단독으로 검증되지는 않는다고 주장한다. 한 가설에 대한 입증confirmation은 언제나 다양한 여타 조건들, 예컨대 가설을 입증하는 데에 활용되는 실험장치의 작동방식이라든가, 계산에 활용되는 기초적인 기하학이나 일반적인 운동 법칙 등을 상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학적 주장의 입증에 대한 이러한 소위 ‘전체론holism’적인 관점은 프랑스의 과학철학자 Pierre Duhem(1867-1979)에 의해 처음 표명되었으며, 이후 Quine은 Duhem의 논제를 좀 더 다듬어, 한 과학적 진술을 시험test하는 데에 연루되는 것은 원리적으로 과학 전체(내지는 과학의 국소적인 부분이 아니라 거대한 부분)라고 주장하였다.
두 번째로, Ayer에 따르면 바로 지금 여기에서 관찰된 감각적 내용sensory content에 적용되는 진술이라 하더라도 절대적으로 수정 불가능incorrigible하다거나 절대적으로 확실하지 않다. 여기서 그의 주장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얌whiteness과 같은 하나의 감각sensation과, 그 감각을 ‘이것은 하얗다’와 같이 기술하는 명제를 분명하게 구분해야 한다. Ayer는 감각 자체가 의심스럽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는 돌멩이가 의심스럽다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무의미한 말이기 때문이다. 돌멩이가 그러하듯이 감각 자체는 그냥 존재하는 것 혹은 그냥 발생하는 것이다. 반면 명제 내지 진술이 감각을 잘못 기술할mis-describe 가능성은 원리적으로 배제되지 않는다. 다른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우리는 하나의 감각을 무엇이라고 칭해야 하는지에 대해, 그것을 ‘하얗다’고 분류해야 할지 여부에 대해 실수할 수 있다.
따라서 그 어떤 경험적 주장도 절대적으로 확실하지는 않은 “가설”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 Ayer의 언어철학이 지닌 또 다른 면모와 그 위력을 추가적으로 살펴보자.
물질적 대상material object. Ayer는 근대 영국의 철학자이자 주교였던 George Berkeley (1685-1753)에게로 돌아가 그의 관념론idealism적 요소를 받아들인다. Berkeley의 관념론 논제에 따르면 탁자와 나무 등의 물질적 사물들로 이뤄진 것처럼 보이는 세계는 실제로는 정신 내의 관념들ideas in mind로만 구성되어있는바 실재는 정신적이다. 다만 Ayer는 Berkeley의 관념론 전부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는 않고 그의 현상주의Phenomenalism를 받아들인다. 현상주의에 따르면 탁자나 나무 등의 실재는 탁자와 나무에 대한 감각가능한 경험sensible experience[즉 현상(現象)phenomenon]의 세계일 뿐이다. 예컨대 탁자는 감각가능한 개별자sensible particular들로 구성되어있으며, Ayer는 이를 “감각 내용sense content”이라 칭하였다. 하지만 Berkeley와 달리 Ayer는 감각-내용 자체는 내성introspection에 의해 드러나는 내적인 정신세계와 탁자나 나무 같은 외부 세계 그 어느 것에도 속하지 않는 “중립적neutral”인 것이라 생각하였다.
내가 지각하고 있는 동안 탁자는, 좀 더 정확히 말해 탁자를 구성하는 부분들은, 감각-내용의 집합체로서 제시된다. 그럼 내가 (그리고 다른 아무도) 탁자를 지각하지 않을 때 탁자는 어떻게 될까? Berkeley는 내가 방을 떠나더라도 탁자는 여전히 다른 누군가에 의해 즉 신에 의해 지각되기에 여전히 존재한다고 가정하였다. 이에 비해 Ayer는 만약 내가 방에 돌아온다면 탁자를 지각할 것이라는 상식적인 믿음을 물질적 대상의 존재를 보증하는 원리로 상승시킨다. 잘 정립된 과학과 마찬가지로 상식은 그러한 믿음이 일반적으로 참임을 보증해준다. 따라서 탁자는, 그것을 구성하는 감각-내용이 발생하거나 혹은 특정 조건 하에서 발생할 수 있는 경우, 그리고 오직 그 경우에 존재한다.
Ayer는 물질적 대상을 “논리적 구성물[논리적으로 구성된 것]logical construction“이라 칭하였다. 그리고 물질적 대상을 설명하기 위해 Russell의 맥락적 정의 즉 “사용 내” 정의라는 방법을 차용한다(3장, ‘한정 기술구 이론’ 절 참조). 우선 그와 대비되는바 ‘탁자’에 대한 명시적 정의는, 임의의 감각 내용 A에 대해, ‘탁자 =df A’와 같은 식으로 주어진다. 하지만 탁자 자체가 감각내용과 동일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러한 명시적 정의는 거부된다. 감각 내용은 그것이 지각되는 찰나에만 존재하며 아무도 그것을 지각하지 않을 때는 존재하지 않는다. 반면 맥락적 정의는 한 용어를 포함하고 있는 임의의 문장 전체를 그것을 포함하지 않는 문장으로 번역하는 규칙을 제공한다. 그래서 탁자에 대한 맥락적 정의는 ‘탁자는 …인 경우 그리고 오직 그 경우에 G하다the table is G iff …’와 같은 식으로 주어진다. 여기서 ‘G’의 자리는 ‘책들로 뒤덮여있다’나 ‘내 방에 있다’ 등의 술어로 채워지며, ‘…’로 표시된 공란은 당면 목적상 필요한 가정적인hypothetical 감각-내용을 기술하는 임의의 복합적인 기술구로 채워진다. 구체적인 예시를 들자면 ‘내가 탁자를 바라본다면, 나는 여차저차한such-and-such 감각 내용을 경험할 것이다’와 같은 식이 될 것이다.13)
13) (原註) 이러한 정의에 뭔가 문제가 있다고 여겨진다면 탐구문제 4를 참조할 것.
타인의 마음other mind. 만약 우리가 각자의 감각-내용에 대한 지식만을 갖고 있다면, 다른 사람의 감각-내용에 대해서는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타인의 감각-내용에 대한 인식이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다면 다른 사람 역시 나와 같은 의식적인conscious 존재라는 것, 나의 마음 이외의 다른 마음이 존재한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이 문제에 대해 Ayer는 Mill의 소위 ‘유비에 의한 논증argument by analogy’을 거부한다. 그 논증에 따르면 “나의 신체와 타인의 신체에는 감지될 수 있는 유사성perceptible resemblance이 있으며, 이러한 유사성은〕 내가 직접 관찰할 수는 없는 경험을 소유한 타인의 존재에 대한 믿음〔을 정당화한다justify.〕”(129) Ayer가 이 논증을 거부하는 강력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그 어떤 논증도 검증불가능한unverifiable 가설을 개연적인 것으로 만들 수는 없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그 어떤 관찰이든 타인의 마음의 존재에 대한 가설을 여하한 긍정적인 정도로도 뒷받침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타인의 마음에 대한 주장은 형이상학적인 것으로서 원리상 검증불가능한 성격의 것이다.]
이에 Mill의 논증 대신 Ayer는 다음과 같이 마음에 대한 행동주의behaviourism적 관점을 취한다: 타인의 마음은 타인의 신체가 취하는 행동behaviour의 측면에서 (맥락적으로) 정의된다(그리고 타인의 신체는 특정한 물질적 대상으로서, 앞서 살펴본바 탁자에 대한 정의와 같이 현상주의적인 방식으로 정의된다). 물질적 대상의 존재와 타인의 마음의 존재 모두 “일련의 적절한 감각-내용”(130)의 현실적인 혹은 가정적인 발생에 의해 동일한 방식으로 검증된다. 물론 이런 식의 정의는 매우 복잡할 것이다. 어쨌든 Ayer에 따르면 한 대상이 모든 측면에서 의식적인 것처럼 행동한다면 그것은 의식적이다. 그리고 Ayer는 “이는 분석적인 명제”(130)라고 확언한다. 이러한 관점이 [직관적으로 생각하기에는 하나뿐인 것처럼 여겨지는] 의식적임consciousness이라는 개념을 1인칭적인 것과 3인칭적인 것으로 나누는 다소 기이한 이분법을 함축한다는 비판이 제기될 수 있겠지만, Ayer는 이에 개의치 않는다. 타인의 마음에 대한 행동주의적 정의 이외의 유일한 대안으로서는 “형이상학적인” 것밖에 남지 않[으며 이는 결코 만족스런 선택지일 수 없]기 때문이다. “철학자는 과학적 절차에 의해 밝혀진 사실을 단지 명확하게 기술하는 데에 만족해야 한다. 만일 철학자가 과학적 사실을 [과학적으로 밝혀진 바 이상으로] 정당화justify하고자 한다면 … 자신이 非논리적인spurious 문제에 연루되고 있음을 이내 알아차릴 것이다.”(98)
가치에 대한 진술statement of value. 가치에 대한 진술들에는 윤리학⋅미학⋅종교의 진술들이 포함된다. 윤리적 논의 및 이론에서 핵심적인 윤리적 진술들 일부는 ‘x는 최상의 행복을 야기한다’ 등과 같이 외견상 사실적인[사실에 관한]facual 진술들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x는 좋다/나쁘다’ 등과 같은 여타 진술들은 분명 가치에 관해 무언가를 말한다. 이러한 진술들은 그 참을 결정하는 데에 상상가능한 그 어떤 관찰도 적절하지 않다는 점에서 사실적이지 않은 진술이다. 그렇다고 가치에 관한 진술들이 분석적인 것도 아니다. 가치에 관한 언어는 적절한 명제를 표현하는 게 아니라 감정을 표현하는express emotion 기능을 갖는다. 그래서 가치진술을 이런 식으로 보는 관점은 정서주의emotivism라 불린다. 예를 들어 ‘당신은 그 돈을 부당하게 갈취하였다’는 윤리적 진술이 지닌 사실적 내용은 기실 ‘당신은 그 돈을 취하였다’일 뿐이다. 전자를 발화하는 사람은 그 말을 함으로써 그 돈을 취한 사건에 대한 “〔자신의〕 도덕적 반감이나 못마땅함을 단지 분명하게 피력하고 있을 뿐이다”(107).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감정을 표현하는 것과 감정을 지니고 있음을 진술하는 것 간의 구분이다. 나는 내가 느끼는 지루함을 표현하지 않은 채 그것을 말로 진술할 수도 있으며, 반면 그러한 말 없이 하품을 함으로써 나의 지루함을 표현할 수도 있다. 물론 늘어지는 어조로 ‘아오 지루해 죽겠네’ 하고 말함으로써, 나의 지루함을 표현하는 동시에 말할 수도 있다. 돈 갈취 사례의 경우 ‘당신은 그 돈을 부당하게 갈취하였다’고 말한 화자는, 자신이 도덕적으로 반감을 느끼는 상태에 있음을 진술하는 게 아니라 표현하고 있는 셈이다.
의견충돌이 발생하는 대부분의 경우 그 충돌은 합리적인 논증을 통해 합의에 이를 수 있다(물론 그러한 합의가 일반적으로 그렇게 자주 일어나지는 않지만 말이다). 예컨대 절도는 대기업의 횡포에 저항하는 수단이 될 수 있으므로 나쁜 행위가 아니라 생각하는 사람은, 모든 점주가 대기업을 대표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됨으로써 생각을 바꾸도록 설득될 수 있다. 하지만 이와 다른 경우에는 명명백백한 사실에 호소한다고 해서 의견대립이 그리 쉽게 해소되지는 않는다. 그 경우 어느 편 의견이 옳으냐 묻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런 식의 의견대립이란 기실 논증에 의한 토론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서로 치고박는 싸움인 셈이다.
검증원리는 젊은 시절 Ayer의 철학의 기초를 이루는 것이었다. 그는 검증원리를 “급진적 경험주의”와 동일시하였다. 자연과학과 협업하는 언어철학 및 논리적 분석은 그의 철학의 근본 기조를 꼴짓는 핵심 표어였다. “철학은 … x란 무엇인가 〔혹은〕 x의 본성은 무엇인가와 같이 … 외견상 사실에 관한 물음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물음들로 가득하다. … 그러한 물음들은 모두 〔맥락적인〕 정의를 요하고 있을 뿐이다.”(59) “‘x의 본성’이라는 어구는 ‘“x”라는 기호의 사용’으로 대체된다.”(39)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문법의 속임수에 넘어가는 꼴이다.”(45) 이러한 관점은 Carnap이 제시한 실질화법material mode of speech과 “형식화법formal mode of speech”의 구분, 즉 기호를 사용하는 것과 기호를 언급하는 것 간의 구분과 유사하다. 진지하고 심오해 보이는 대부분의 철학적 문제들은 기실 두 화법 중 하나를 사용해야 할 곳에서 다른 것을 부적절하게 오용했기 때문에 빚어지는 착종에 불과하다.
[마지막으로 Ayer의 철학에 가해질 수 있는 비판 몇 가지를 살펴보자.] 실재를 특정 감각-내용과 동일시하는 Ayer의 인식론적 관점을 철저히 고수하자면 현대의 자연과학이 밝혀낸 많은 이론적 사실들이 거부될 위험에 처한다. 예컨대 쿼크처럼 우리의 직접적인 감각 능력의 범위를 벗어나는 대상이나 혹은 빅뱅처럼 원리상 우리가 지각할 수 없는 사건들을 과연 실재의 부분으로서 받아들여야 하는지 의문스러워지기 때문이다. Ayer는 현대에 이룩된 자연과학의 성과를 거부하고자 하지는 않기 때문에, 이 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소위 ‘이론적 대상(이론상의 실체)theoretical object’에 대해] 모종의 ‘도구주의instrumentalism’ 내지 ‘허구주의fictionalism’를 수용해야 할 듯하다. 이에 따르면 이론적 실체들은 감각가능하지 않기에 비록 경험적으로 실재하는empirically real 것으로서는 인정되지 않지만, 그것이 지니는 설명적 가치로 인해 우리가 받아들이는 과학적 그림의 일부로서는 인정되는바 비교적 낮은 지위의 존재를 부여받는다. 도구주의적 관점은 작금의 과학철학 논의에서도 지지되고 있으며 대표적인 인물로 Bas Van Frassen을 들 수 있다.
Ayer의 철학이 직면다는 또 다른 두 가지 중요한 문제는 소위 Frege-Geach 문제와 검증원리 자체의 지위에 관한 문제가 있다.
먼저 Frege-Geach 문제란 가치에 대한 정서주의와 연관되는 문제이다. 다음 논증을 보자: 절도가 나쁜 짓이라면 나는 내 모자를 먹을 것이다. 절도는 나쁘다. 따라서 나는 내 모자를 먹을 것이다. 그 누구든 이 논증을 이해할 것이며, 절도가 나쁜지 여부에 대해 특정 관점이나 태도를 취한다거나 특정 감정을 갖고 있지 않더라도 이 논증이 타당함을 받아들일 것이다. 하지만 그 경우 ‘절도는 나쁘다’는 문장이 단지 도덕적 반감을 표현하는 기능만을 수행한다고 할 수는 없다. 그 문장을 이해하기 위해 그러한 감정이 반드시 표현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뿐만 아니라 표준적인 논리학적 관점에 따르면 타당한 논증 형식이란 전제들이 참일 경우 결론도 반드시 참인 형식이다. 그런데 참이라는 속성을 지닐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명제이므로, 이 논증에서 ‘절도는 나쁘다’가 단지 감정을 표현하는 데에 그치는 것일 수는 없다. 달리 말해 그 문장 역시 진리치가 평가될 수 있는truth-evaluable 무언가를 의미해야만 한다. 즉 명제를 표현해야만 하는 것이다.14)
14) 제시된 논증을, 단순한 감정표현 기능을 갖는 문장이 전제로 나타나는 다음 논증과 비교해보라: 아오 젠장할이라면 나는 내 모자를 먹을 것이다. 아오 젠장할! 따라서 나는 내 모자를 먹을 것이다. 아무도 이것이 적절하고 유의미한 논증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첫 번째 전제의 전건과 두 번째 전제가 논증에 사용될 수 없는 무의미한 문장, 정확히 말해 진리치가 평가될 수 있는 적절한 명제를 표현하지 않는 문장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첫 번째 전제는 적형식도 아니다. 따라서 이 논증이 부적절한 것으로 거부된다면 형식상 이와 동일한 본문의 논증 역시 거부되어야 한다. 하지만 직관적으로 우리는 후자가 비록 그 내용상 기이하게 여겨지긴 하더라도 어쨌든 논증으로서는 형식상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렇듯 가치에 관한 진술 내지 문장을 감정표현 기능만을 갖는 것으로 간주하는 정서주의는, 감정을 표현하는 언어표현들이 논증에 사용되었을 때 그 종류에 따라 이러한 비대칭성이 발생하는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이 Frege-Geach 문제의 골자이다.
다음으로 검증원리 자체의 지위에 관한 문제는 매우 단순하면서도 포괄적이다. 여타 진술들과 마찬가지로 검증원리를 기술하는 진술 그 자체 역시 검증가능하거나 아니면 선험적이거나 둘 중 하나여야 한다. 전자라면 검증원리를 입증 및 반증disconfirm하는 관찰사례들이 각각 명시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도대체 어떠한 종류의 경험적 관찰이 검증원리를 입증하거나 반증할 수 있는지 불분명할 뿐더러, 설사 그것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이는 순환적인 것처럼 여겨진다. 뱀이 꼬리를 물고 있는 형국과도 같이 검증원리의 검증이 그 자체에 의해 이뤄지는 셈이다. 이번엔 검증원리 자체가 선험적이라 가정해보자. 그러면 검증원리 자체가 검증되어야 한다는 요구는 일단 면하게 된다. 하지만 검증원리를 기술하는 문장은 분명 ‘모든 개는 非-개가 아니다’와 같이 항진명제 내지는 논리적 참의 형식을 지니고 있지도 않으며, ‘모든 총각은 미혼이다’와 같이 분석적 진술의 형식을 지니고 있지도 않다. [검증원리에 나타나는 어휘들을 아무리 동의어들로 대체하더라도 논리적으로 참인 진술로 변환되지 않는다(緖論, ‘8개의 예비사항’ 절에서 ‘8. 분석-종합 구분’ 항목 참조).] 요컨대 검증원리는 [공허하거나 형식적이지만은 않은바] 언어와 세계 간 관계에 대해 무언가 실질적인substantive 사항을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이에 혹여 검증원리가 선험적이지만 분석적이지는 않은 진술, 즉 선험적 종합진술이라 한다면 이는 Ayer 철학의 기본 토대와 배치된다.] 선험적 종합진술이란 없다는 것, 즉 선험적이되 항진명제도 아니고 논리적 참도 아니고 분석적이지도 않은 진술이란 없다는 것이 Ayer 이론의 골자이다. [그러므로 검증원리가 세계에 관한 사실적인 진술 즉 종합진술이라면 선험적일 수는 없으며, 따라서 검증가능해야 한다. 검증원리 자체가 검증불가능함은 앞서 밝혀졌다. 결국 검증원리는 검증가능하지도 않고 선험적이지도 않은 셈이다. 그리고 Ayer의 이론에 따르면 그러한 진술은 그저 무의미한 진술일 뿐이다. 이러한 결론이 도출되는 과정을 논증으로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1 | 검증원리가 유의미하다면 검증원리는 검증가능하거나 선험적이다. | Ayer의 이론 |
2 | 그런데 검증원리 자체는 검증가능하지 않다. | 일반원리에 의해 |
3 | 따라서 검증원리는 선험적이다. | 1, 2, 선언지 제거 |
4 | 검증원리가 선험적이라면 검증원리는 분석적이다. | Ayer의 이론 |
5 | 그런데 검증원리는 분석적이지 않다. | ‘분석적’의 정의해 의해 |
6 | 따라서 검증원리는 선험적이지 않다. | 4, 5, 후건부정 |
7 | 검증원리는 검증가능하지도 않고 선험적이지도 않다. | | 3, 6, 연언도입 |
8 | 따라서 검증원리는 무의미하다. | | 1, 7, 후건부정 |
∙ 검증주의 Ⅱ: Carnap의 논리경험주의
Ayer의 저작은 시기적으로도 철학적으로도 Carnap의 저작과 상당히 겹친다. Carnap은 1891년생으로서 1910년생인 Ayer보다 나이가 많았으며, Carnap의 『세계의 논리적 구조The Logical Structure of the World/Der Logische Aufbau der Welt』가 1928년에 출간(1967년에 英譯)된 반면 Ayer의 『언어, 논리, 진리』는 1936년에 출간되었다. Carnap의 『과학의 통일성The Unity of Science』과 『언어의 논리적 구문론The Logical Syntax of Language/Logische Syntax der Sprache』은 1934년에 출간(후자는 1937년에 英譯)되었고, 이보다 긴 『시험가능성과 의미Testability and Meaning』는 1936년에 출간되었다. (이외에도 『경험주의, 의미론, 존재론Empiricism, Semantics, Ontology』(1950) 역시 우리에게 중요한 저서이다. 다른 章에서는 『의미론 서설Introduction to Semantics』(1942) 및 『의미와 필연성Meaning and Necessity』(1947)도 잠시 살펴볼 기회가 있을 것이다.) Carnap은 분명 Ayer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Carnap은 소위 ‘비엔나 학단Vienna Circle’의 창립 멤버 중 하나였으며 Ayer는 그의 나이 스물두 살이던 1933년에 이 모임을 방문한 바 있다. (비엔나 학단은 앞서도 언급된 Morris Schlick을 위시하여, Herbert Feigl, Phillip Frank, Hans Hahn, Carl Gustav Hempel. Otto Neurath, Frederich Waismann 등 당시 유럽 학계에서 기라성 같았던 인물들로 구성된 어마어마한 집단이었다.) [이렇듯 두 인물의 겹치는 부분이 많긴 하지만,] 이번 절에서는 Ayer의 이론과 차별되는 Carnap 이론만의 핵심적인 측면을 부각시키기 위해, 두 인물의 철학 간 주요 차이점에 주로 주목하고자 한다. Carnap의 관점은 시기에 따라 복잡한 양상으로 변모 및 발전하였기에 Carnap이 전개한 언어철학의 전모를 속속들이 살펴보지는 않고, 다만 이번 장의 주제인 검증주의와 연관되는 측면들에만 초점을 맞출 것이다.
Ayer가 자연과학에 대한 존중과 형이상학에 대한 적대감을 비엔나 학단 및 Carnap으로부터 배운 게 아니라면, 그가 비엔나에 머무르는 동안 확고해진 두 경향은 Hume에게서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Carnap은 『논리적 구문론』의 서문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철학은 과학에 대한 논리학logic of science으로 대체될 것이다. 즉 과학에 대한 과학으로서, 과학의 개념 및 문장에 대한 논리적 분석으로 대체될 것이다. 과학에 대한 논리학이란 과학언어의 논리적 구문론에 대한 분석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Carnap, 1936, )
Carnap은 이러한 反-형이상학적 관점을 다름 아닌 독일의 철학자 Martin Heidegger에게 적용하여 그가 구사하는 대부분의 문장들이 심각한 종류의 무의미한 문장들임을 보이고자 한다. 가령 Heidegger의 다음 문장을 보라:
탐구되어야 할 것은 오직 존재being일 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nothing. 단지 존재일 뿐 그 이상은 아무것도 아니다. 오로지 존재일 뿐 그것을 넘어서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이러한 無the Nothing/獨: Das Nichits15)란 어떠한가? 16)… 無는 단지 아님Not 즉 부정Negation이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하는가? 아니면 그 逆으로, 부정과 아님이 오로지 無가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하는가? … 우리는 다음과 같이 단언한다: 無는 아님과 부정에 앞선다[보다 근원적이다]is prior to. … 無를 과연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無를 어떻게 찾아내야 하는가? … 우리는 無를 이미 알고 있다. … 불안anxiety/die Angst은 無를 드러낸다reveal. … 그것에 대해 우리가 불안해하고 그것 때문에 우리가 불안해하던 그것은 ‘본래’ 아무것도 아닌 것nothing이었다.17) … 참으로 無는 그 자체로 이미 드러나 있었다. … 그렇다면 [다시 원래의 질문으로 돌아오자면] 無는 어떠한가? 無는 스스로 無化한다The Nothing itself nothnings/Das Nichts selbst nichtet.18)19)
(Carnap, [「형이상학의 제거The Elimination of Metaphysics」,] 1936, 69쪽에서 再인용.)
15) 독일어 단어 ‘nichts’의 첫 철자를 대문자로 표기하여 名詞化한 Heidegger의 조어.
16) ‘Wie steht es um Dieses Nichts?’. 無는 말 그대로 아무것도 아닌 것이기 때문에 ‘無란 무엇인가Was ist?’라 물을 수 없어 이런 식으로 물은 것이다.
* “無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한 첫걸음부터가 이미 예사롭지 않다. 이 물음에서 우리는 애초부터 無를 여차여차하게 있는 무엇으로서, 곧 존재자로서 간주하게 된다. 하지만 無는 이러한 것과는 아주 다르다. 無에 대한 물음, 곧 無란 무엇이며 어떻게 있는가라는 물음은, 물어지는 것을 본디의 그것과는 반대되는 것으로 바꿔버린다. 이 물음은 물어지는 대상을 그 자체로부터 빼앗아 버린다.” (Martin Heidegger,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Was ist Metaphysik?』(1929), 최동희 譯, 삼성출판사, 1982, 75쪽, 번역 일부 수정.)
17) Heidegger의 현존재(現存在)Dasein에 대한 실존론적 분석에 따르면, 현존재 즉 인간이 처하는 근본기분으로서의 불안은 공포와 달리 특정 대상에 대해 느끼는 기분이 아니다. 세계와 사물의 적나라한 존재 자체를 마주하여 그것들이 평소 지니고 있던 일상적인 의미가 탈색되고 그것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었음을 알게 될 때, 막연하게 섬뜩하다고 느끼는 기분이 바로 불안이다. 존재 일반의 일상적 의미가 미끄러져 달아나 버리는 이러한 사태가, 인용문의 마지막에 말해지는바 ‘無는 스스로 無化한다’는 말의 의미이다. 無化작용은 존재자들에게 결부되었던 일상적 의미를 몰아냄으로써 모든 것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바꿔버리는 동시에, 그러한 일상적 의미를 탈각시킴으로써 외려 적나라하고 규정할 수 없는 존재 그 자체를 열어젖힌다.
* “불안은 공포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공포는 항상 어떤 일정한 무엇에 대한 공포이다. … 그러나 불안은 이것 혹은 저것 때문에 느끼는 불안이 아니다. … 불안 속에서 우리는 ‘뭔가 꺼림칙하다[섬뜩하다]’고 말한다. 무엇이 사람에게 꺼림칙한지 뚜렷이 말할 수는 없다. 그저 전체적으로 사람에게 꺼림칙하다. … [불안 속에서] 사물들은 밀려감으로써 도리어 우리에게 엄습해온다. … 미끄러져 달아나는 전체로서의 존재자를 이와 같이 전체적으로 거부하며 지시하는 것이 無의 본질 즉 無化작용Nichtung이다. 이는 존재자를 없애는 것도 아니고, 부정에서 유래하는 것도 아니다. 無化작용은 없앰이나 부정과 결부시켜 생각할 수 없다. 無는 스스로 無化한다.” (M. Heidegger, 같은 책, 79-81쪽.)
18) ‘nichts’를 動詞化한 Heidegger의 조어.
19) M. Heidegger, 같은 책, 74-81쪽에서 번역 참조.
Carnap은 Heidegger가 ‘아무 것도 아님nothing’이라는 용어를 특정 실체의 이름인 것처럼 오용하고 있다고 지적한다(Ayer는 『언어, 논리, 진리』의 44-5절에서 이러한 지적이 온당하다고 논평한다). Frege와 Russell의 양화논리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아무 것도 아님’은 단칭용어가 아니라 ‘모든 것everything’과 같은 양화사라고 말할 것이다. [Heidegger가 하듯이] 탐구될 수 있는 본성을 지닌 특정 대상을 지시하는 표현이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Heidegger가 묻고자 하였던 형태의 문장들은 형이상학적이어서 검증불가능한 “사이비-문장pseudo-sentence”조차도 못되는 헛소리일 뿐이다. 논리적으로 올바르게 정립된logically well-behaved 언어에서는 그러한 문장이 “구성될 수조차 없다.” (70)
『구조』가 목표하는 언어란 모든 무정의undefined 용어 내지 원초primituve 용어, 즉 논리상항(常項)logicla constant 이외의 모든 非-논리적 표현non-logical expression들이 직접적으로 경험에 적용되는 언어이다. 따라서 직접적으로 경험을 기록하는 문장이 아닌 문장들은 다음 둘 중 하나에 속한다: (a) 정의에 의해 직접적으로 경험을 기술하는 문장으로 환원 가능한 문장, (b) 분석적 문장, 즉 오로지 논리적 규칙 및 (직접적이고 맥락적인) 정의에 의해서 참임이 증명 가능한 문장. 이것이 Carnap의 현상론적 환원주의Phenomenological Reductionism의 개요이다. 이 관점이 제시하는 이상적인 모델의 언어에서, 모든 유의미한 진술은 분석적인 것이거나, 그렇지 않다면 경험을 직접 기술하는 기초 어휘들로 구성된 (복합적일 수 있는) 진술로 원리상 환원 가능하다. 이에 Carnap은 이러한 관점을 논리경험주의Logical Empiricism라 명명하였다.
Carnap은 Ayer에 비해 훨씬 엄밀하고 세심한 철학자이다(그는 Frege의 수리논리학을 수강한 몇 안되는 인물들 중 하나이다). 철학적 여정의 초기에는 주로 논리학 분야에서 작업하였으며 후기에는 확률론probability theory과 귀납원리에 관해 저술하였다. Carnap과 Ayer가 철학적으로 유사했던 시기에 둘 사이에서 식별되는 가장 흥미로운 차이점은, Ayer가 자신의 철학을 언어 일반에 대해 참이라 생각한 반면 Carnap은 그렇지 않았다는 점이다. 앞서 우리는 Ayer의 검증원리가 그 원리 자체에 적용되었을 때 발생하는 문제점을 살펴보았다. [Ayer의 생각대로 검증원리가 모든 언어에 대한 일반적 진리라면 이 문제는 불가피하다.] 이 문제를 피하기 위해 Carnap은 Ayer와 다른 노선을 취한다. 그는 검증 개념에 대해서는 Ayer와 유사한 관점을 견지하긴 하되, 검증원리의 지배를 받는 형식언어formal language를 [언어에 대한 일반모델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언어적 제안linguistic proposal”으로 간주한다. Carnap은 (잠시 동안은) 이것이 받아들일 만한 제안이라고 생각하였지만, 검증원리에 위배되는 언어가 (무엇을 의미하든) 전적으로 인지적 의미를 결여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설사 검증원리에 부합하지 않는 언어라 하더라도,] 대안으로서 제안되는 언어에 대한 적절한 “메타언어meta-language”, 즉 그 언어를 대상언어object-language로 삼아 대상언어가 구현하는 표현들에 관해 말하는 상위-언어가 정립될 수 있기만 하다면, 그 어떤 언어이든 자유롭게 탐구될 수 있다. 이러한 완화된 조건마저도 충족하지 못하는 언어는 “형이상학적”인 것으로서 거부된다. 이에 따라 Carnap은 다음과 같은 원칙을 제시한다:
관용의 원칙Principle of Tolerance: 최대한의 정밀성을 갖춘 이론적 주장을 개진하고자 한다면, 그 이론에 사용된 언어의 구문론을 명시하고 그 언어에서 분석적으로 참인 문장을 결정하는 규칙 및 추론관계에 관한 규칙을 명시하여야 한다. 하지만 하나의 언어를 선택하는 데 대해 이론적인 근거에서 비판할 수는 없다. [다르게 말하면 하나의 언어를 선택하는 것이 이론적으로 정당화될 수도 없다.]
따라서, 『구조』에서 Carnap은 기초용어들이 감각경험에 적용되는 언어를 제시하긴 하지만, 이는 그러한 언어만이 과학의 토대 역할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언어라는 생각에 이론적으로 개입하고 있는 것은 아님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Carnap은 이러한 태도원칙을 대부분의 철학적 문제들로 확대하여 적용한다. 이에 그는 관용의 원칙에 따른 두 가지 부수적인 귀결을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규약(規約)으로서의 논리학logic as convention. Frege와 Russell 모두 논리학 자체에 관해 혹은 논리적 진리의 본성에 관해 설득력 있는 설명을 제시하지는 못하였다. Wittgenstein(그리고 아마도 Ayer)는 이에 대한 나름대로의 답을 갖고 있었지만, Carnap은 그 중심에 붙박여 있는 형언불가능성(말해질 수 없음)ineffability이라는 처치곤란한 요소로 인해 Wittgenstein의 해답을 거부한다. Carnap의 답은 단순하면서도 급진적이다. 논리적 진리라는 개념 및 무엇에서 무엇이 따라나온다follow는 개념[즉 논리학에서의 귀결(歸結)concequence 개념]은 단순히 언어의 규칙(規則)rule일 뿐이다. 하나의 언어를 말한다는 것은 그 언어를 지배하는 논리적 규칙에 종속된다는 것과 같다. 예컨대 ‘총각’이 ‘미혼 남성’과 상호대체 가능하다는 규칙이라든가, P이면 Q이다와 P를 받아들일 경우 Q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규칙 등을 준수하는 것이 곧 언어를 사용하는 것인 셈이다. 논리학에 대한 물음은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언어의 규칙에 대한 물음이며, 그러한 사안은 Carnap이 말하는 뜻에서 모두 분석적인 것들이다. 무엇이 분석적인 것인가 하는 물음은 규약 내지 약정stipulation에 관한 문제이다. 우리는 목표하는 바에 따라 원하는 것이면 그 어떤 언어든지 선택할 수 있다. 단, 우리가 어떤 언어를 택하든, 그럼으로써 우리는 곧 그 언어를 지배하는 규칙들의 한 집합을 선택하는 셈이며, 그럼으로써 곧 하나의 논리학을 택하는 셈이다. 뿐만 아니라 모든 인지적 활동, 즉 이론적으로 유의미한 사고 활동은 언어를 통해서 이뤄져야만 한다. 따라서 모든 이론은 한 언어를 지배하는 규약들의 집합을 전제하고 있으며, 따라서 어떠한 추론의 연쇄가 타당한지를 결정하는 하나의 논리를 전제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의 언어를 택하는 것이 이론적으로 정당화될 수는 없다. 언어의 선택은 인지적인 사안이 아니라 실천적인practical 사안이다. 그렇다면 하나의 표상체계[즉 하나의 언어]system of representaion를 다른 표상체계로써 설명하는 것이 가능한 이유는 오로지 양 체계가 동일한 논리적 형식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며, 그 논리적 형식 자체는 [그 어떤 표상체계로도] 설명될 수 없다는 Wittgenstein의 주장은 어떻게 되는가? Carnap은 그런 식으로 설명의 영역을 벗어나는 것이란 없다고 단언한다. 각 표상체계들이 공유하는 논리적 형식 역시 메타언어로 진술될 수 있기 때문이다. 원리적으로 형언 불가능한ineffable in principle 것에 대한 주장은 분석적이지도 않고 검증될 수도 없는 무언가에 대한 형이상학적 주장으로서 일축될 뿐이다.
내적(內的) 물음과 외적(外的) 물음internal question and external question. 언어와 관련된 원칙인 관용의 원칙은, 주어진 한 이론이 어떤 실체에 개입(介入)commit to하고 있는지에 관해 묻는 존재론(存在論)ontology의 영역으로까지 확장된다. 예를 들어, 우리는 ‘12와 15 사이에는 소수(素數)prime number가 존재하는가?’, ‘창밖에 라일락이 피었나?’와 같은 존재적 물음existential question을 물을 수 있다. 하지만 이와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여 ‘數란 존재하는가?’, ‘물리적 대상physical object이란 존재하는가?’와 같이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 이런 식의 물음은 Carnap이 칭한바 내적 물음이나 외적 물음 둘 중 하나에 속할 것이다. 전자의 경우라면 답변은 그 물음이 속한 언어 자체에 관한 분석적 진술의 측면에서 제시될 수밖에 없으며, 이는 사실적인 내용을 지니지 않는바 사소하게 긍정적인trivially affirmative 답변일 뿐이다. 후자의 경우라면 답변은 수학적 언어라든가 물리학적 언어를 채택하는 데 대한 실용성(實用性)practticality의 측면에서 제시될 것이다. [요컨대 실체의 존재 여부를 묻는바 외견상 세계에 관한 물음인 것처럼 보이는 존재론적 물음은, 한 언어 내에서 특정 어휘가 쓰이는지 여부에 관해 묻는 내적 물음이든가, 아니면 특정 학문분야의 언어체계를 받아들일지 여부에 관해 묻는 외적 물음으로서, 본디는 세계가 아닌 언어에 관한 물음이라는 것이다.] 실질적인 사안에 관한 이론적인 물음들은 전부 내적 물음이다. 반면 數 자체라든가 물리적 대상 자체와 같이 무엇이 궁극적으로 존재하는지에 관해 묻는 전통적인 존재론은, [언어에 관해서가 아니라 세계에 관해 묻는 사실적인 물음으로 의도된바 내적/외적 물음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면,] Carnap이 보기에 사이비-학문pseudo-science일 뿐이다.
∙ 비엔나 학단과 프로토콜 논쟁.
논리실증주의 내지 논리경험주의는 추상적인 사조로서보다는 구체적인 역사적 운동movement으로서 묘사되곤 한다. 논리실증주의는 비엔나 학단이 모임을 가졌던 동명의 도시 비엔나에서 태동한 뒤 1929년에서 1935년까지 절정을 이루었다. 이 운동의 선구자격 인물들이라 할 수 있는 프랑스 철학자 Aguste Comte라든가 앞서 언급된 E. Mach 등은 이른바 ‘실증주의(實證主義)Positivism’ 형태의 철학을 옹호하였으며, 논리원자론을 정립 및 발전시키던 시기의 Russell은 논리실증주의가 표방한 핵심 착상들과 유사한 사유를 전개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新-실증주의neo-positivism’로서의 본격적인 논리실증주의는 Wittgenstein의 1922년 저서 『논고』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비엔나 학단의 발흥에 이르러서야 고유한 철학적 운동으로 대두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앞서 우리는 이 운동에 속했던 Ayer와 Carnap의 철학을 일부 논의하였으며, 비엔나 학단의 핵심 구성원이었던 M. Schlick, H. Feigl, P. Frank, C. G. Hempel, H. Hahn, F. Waismann, O. Neurath등이 언급된 바 있다. 전술하였듯 Ayer는 1933년에 비엔나 학단을 방문하였으며, 수 주간 프라하에 머물면서 Carnap에게 수학하고 그와 논쟁하면서 중대한 시기를 보내던 Quine 역시 같은 해에 비엔나 학단을 방문하였다(Quine의 철학에 대해서는 10장에서 살펴볼 것이다). 역사는 흘러 나치가 출범하고 오스트리아 합병이 이뤄짐에 따라 모임의 핵심 구성원들이 타국으로 망명하게 되면서 비엔나 학단은 1930년대 중반 즈음 사실상 해체되기에 이른다. Carnap을 포함한 많은 인물들이 미국으로 망명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논리실증주의 운동은 오스트리아와 유럽을 넘어 더욱 국제적인 철학적 사조로 발전하였다.
보통 논리실증주의는 철학에서의 모더니즘으로 여겨지고는 한다. Arnold Schönberg, Gustav Klimt, Alfred Loos 등 모더니즘 예술가들이 활동했던 도시를 중심으로 발흥하였다는 사실에 걸맞게, 논리실증주의는 종종 철학에서의 모더니즘적 운동으로 묘사된다. 비엔나 학단이 1929년 에 발표한 선언문은 “현대 경험주의가 표방하는 근본 논제의 핵심은 종합적〔즉 非-분석적〕이면서 선험적인 지식의 가능성에 대한 부정이다”라고 말한다. 특히 현대 경험주의는 (a) ‘형이상학’을 인지적으로 무의미한cognitively meaningless 것으로서 제거하고자 하였으며, (b) 인식론 내지 지식론 분야에서는 모든 과학(학문)이 논리적으로 경험에 토대를 두고 있음을 보이고자 하였다. 물론 두 목표는 D. Hume의 철학에 따라 설정된 것이지만, 이 목표의 달성을 구체적으로 가능케 한 요인은 Frege와 Russell 등이 발전시킨 새로운 논리학이었다.
논리실증주의자들 모두는 다음과 같은 특정 도식이 경험과학의 정의특성defining feature이라는 데에 동의하였다: 하나의 이론은 ‘O1이라면 O2이다if O1 then O2’ 형식의 진술들을 함축하는imply 이론적 진술들theoretical statements의 집합으로 구성되는바, 여기서 O1은 관찰적observational 혹은 실험적 환경experimental circumstance에 대한 진술(例: ‘물체에 열이 가해진다’)이고 O2는 관찰가능한 결과observable result에 대한 진술(例: ‘그 물체는 팽창한다’)이다. 그리고 O1과 O2에 의해 나타내어지는 경험적experiential 혹은 관찰적 토대observational foundation는 어떤 방식으로든 감각sense과 연계되어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 기초적인 진술basic statement이 세부적으로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지, 즉 그 진술의 정확한 형식과 내용은 무엇이며 과학이론 내의 여타 진술들이 이러한 기초진술들에 토대를 두고 있다are based upon는 말이 정확히 어떠한 의미인지 등에 대해 논리실증주의자들은 각기 현저히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소위 ‘프로토콜(기초진술) 논쟁Protocol Debate’와 관련하여 여기서는 Carnap, Neurath, Schlick이 각각 제시한 관점 세 가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Carnap. 프로토콜 진술에 대한 형식적인 개념은 과학에서 통상 사용되는바 경험적 관찰을 공식적으로 기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Carnap은 1931년의 글을 발전시킨 저서 『과학의 통일성』(1934)에서는 프로토콜 진술에 대한 바람직한 정의가 무엇인지 하는 문제에 비교적 덜 개입하는 자세를 취하였다. 하지만 1928년의 『구조』에서는 이러한 기초적 기록이라는 것을 하나의 감각적 상태 전체whole of one sensory state(즉 Gestalt)에 대한 기록으로 간주하였으며, [이러한 덩어리로서의 감각적 상태를 분석하기 위해] 정교한 집합-이론적 수단을 활용하여 예컨대 ‘노란색이 발생한다’과 같이 감각질(感覺質)sensory quality을 가리키는 용어들을 “유사성에 대한 상기(想起)recollection of similarity”라는 술어를 사용해 정의하였다.
매우 대담하고 독보적이긴 하지만 여기서 이 이론을 상세하게 파고들 필요는 없다. Carnap의 요지는 프로토콜 진술이 직접적인 감각적 느낌immediate sensation들로 이뤄진 세계에 적용된다pertain to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방법론적 유아론(唯我論)methodological solipsism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이 [형이상학적 유아론이 아니라] 단지 ‘방법론적’일 뿐인 유아론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Carnap은 직접적인 감각적 느낌들로 이뤄진 사적인 세계가 우선적인 실제 세계라고 주장하지는 않으며, 임의의 그 어떤 언어에 대해서도 그것만이 올바른 단 하나의 언어라고 단정하지 않고 단지 하나의 언어적 제안일 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프로토콜 진술을 구성하는 감각-언어들을 유사성에 대한 상기를 통해 분석하는 Carnap의 전략 역시, 단 하나의 세계에 대한 단 하나의 참된 언어라기보다는 여러 언어적 제안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사적인 감각질-용어에 대한 이러한 정의를 토대 삼아 Carnap은 가령 내가-바라보는-커피잔coffee-cup-for-me과 같은 “주관적 대상subjective object”들을 정의하며. 다시 이를 토대로 일상적인 커피잔과 같은 “상호-주관적inter-subjective 대상”(즉 공적(公的)인 대상public object)들을 정의한다.
Carnap의 관점은 매우 급격히 변하였는데, 1932년 후반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도식을 포기하고 프로토콜 진술이 직접적으로 적용되는 것은 [사적인 감각경험이 아니라 그 자체로 공적인] 물리적 대상physical object이라는 관점으로 돌아선다.
Neurath. Neurath에게 프로토콜 진술이란 일반적인 물리적 진술이되,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은 형태를 지니고 있다. 예시를 들면 다음과 같다: ‘3:17에 Otto에 의해 기록된 프로토콜: [3:16에 Otto는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3:15에 이 방에는 Otto에 의해 지각된 책상이 있었다)].’ 여기서 가장 안쪽의 소괄호 내부에 있는 문장은 기록자가 지녔던 지각내용content of a perception이라 할 수 있다. 그 다음 바깥쪽 대괄호 내의 [3:16에…]로 시작하는 내용은 그 시점에 기록자가 지녔던 생각이 언어화된verbalised 바를 표현하고 있으며, 가장 바깥쪽 문장은 과학적인 실험적 관찰을 공식적으로 기록하기 위해 기록자가 적은 내용을 추가적으로 명시하고 있다.
프로토콜 논쟁과 관련하여 Neurath를 추동시킨 전반적인 동기는, 그의 관점에서 보자면 모든 진술이 교정가능하다corrigible는 점이다. 여타 통상적인 진술들과 마찬가지로 프로토콜 역시 그것을 수용할지 여부에 대한 조건condition for acceptance들을 지니고 있다. Neurathe는 인상적인 한 구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과학의 출발점으로 삼을 수 있을 만큼 확정적인 순수 프로토콜 문장을 정립할 수 있는 방법이란 없다. 백지상태tabula rasa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망망대해에 떠 있는 배 위에서 그 배를 수리해야 하는 선원과도 같아, 항만의 건조(乾燥) 도크dry-dock에서 배를 해체하여 최상의 재료들로 재건할 수는 없는 처지에 있다.
(Neurath 201)
다시 말하자면 “폐기처분될 운명은 프로토콜 문장에도 닥칠 수 있다”. 왜냐하면 철두철미하게 잘 지지되는 한 이론이 프로토콜과 상충할 경우라면 프로토콜 문장이 철회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Ayer 역시 이와 비슷한 신조를 옹호하였음을 앞서 살펴본 바 있다). 뿐만 아니라 폐기처분될 가능성은 경험적 문장의 본성에 속한다. 프로토콜 문장은 분석적이지 않으므로 반드시 검증가능해야 하며, 공허하고 형식적인 것에 그치지 않기 위해서는 거짓인 것으로 드러날 가능성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언어란 아무리 단순한 것이라 할지라도 어쨌든 물리적 세계physical world에 관한 언어이다. “모든 언어는 상호-주관적”이며 따라서 타인과의 논쟁의 대상이 될 수 있다.
Schlick. 앞서 살펴본 인물들에 비해 연상이었던 Schlick이 프로토콜 논쟁에 관해 쓴 글은, 그다지 명료하지는 않지만 가장 예리한 관점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Schlik은 1936년에 나치 동조자였던 한 학생의 총격으로 암살되었는데,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그 학생은 Schlik의 反-형이상학적 관점에 적대적이었다고도 하고 여학생들에 대한 질투심에 광분한 상태였다고도 한다.) Schlick의 판단에 따르면 프로토콜은 Neurath(와 후기의 Carnap)가 말했듯이 “지식을 위한 확고한 토대” 역할을 할 수 없으며, 특히 진리를 판가름하는 척도가 될 수 없다. 프로토콜이라는 것이 Neurath가 기술하였듯 언제든 교정될 소지가 있다면, 최선의 이론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정립하기 위해 우리가 따라야 할 원리란 대체 무엇이겠는가? 그것이 경험과의 일치 여부일 수는 없다. 경험 역시 프로토콜과 마찬가지로 철회될 가능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최소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각각의 문장들의 참을 시험하는 것은 우리가 지닌 소위 여타 ‘지식’과의 정합성(整合性)coherence이다. 그런데 정합성이란 적어도 일관성(一貫性)consistency 내지 무모순성lack of contradiction과 같은 것으로서, 이는 진리에 대한 필요조건이긴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는 할 수 없다. 한 편의 동화가 아무런 모순이 없다고 해서 그것을 참이라 할 수는 없다. Schlick은 지적하기를, p는 내적으로 일관적인 한 이론 A를 구성하는 부분이고, ∼p는 역시 내적으로 일관적인 다른 이론 B의 구성 부분일 수 있다. 이 경우 두 이론이 결합된 A&B는 분명 받아들여질 수 없음에도, 정합론(整合論)coherence theory이 말하는 대로 일관성이 진리에 대한 충분조건이라면 우리는 (p를 포함하는) A와 (∼p를 포함하는) B를 동시에 참인 것으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이에 Schlick은 프로토콜 문장이 적어도 Neurath의 의미에서 지식의 토대 역할을 할 수 없다고 결론짓는다. 대신에 그는 관찰문장observation sentence에 대해 다소 양면적Janus-faced인 개념을 제시한다. 관찰문장은 사적(私的)이며private, 직접적인 현재에 직접적으로 지각된 것들에 관계하며, ‘어떤 점에서는 전혀 기록될 수 없는’ 것이다(여기서 Schlick은 인용부호를 주의 환기용scare quotes으로 사용해야만 했던 듯하다). 관찰문장은 심적(心的)상태mental state에 대한 기록이 아니라 심적상태 그 자체이다. 어떤 사람이 하나의 가설을 입증하기 위해 시험관을 유심히 관찰하며 무언가를 찾는 중이라 해보자. 이 상황에서 Schlick이 말하는 바의 관찰문장이란 어떤 만족감satisfaction, 즉 “그래, 바로 이거야!” 하는 말로 표출되는 모종의 느낌이 즉각 경험되는 바로 그 내적인 순간inner moment이라 할 수 있다. “최종성finality이라는 단어는 관찰문장의 기능을 특성화하는 데에 가장 부합하는 단어이다.”(Schlick 223).
Schlick에 따르면 이러한 관찰문장은 반드시 [‘이것, 저것, 여기, 지금’ 등과 같은] 지표적(指標的)인 요소indexical element(Schlick은 이를 ‘지시사(指示詞)적demonstrative’ 요소라 칭한다)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관찰문장이 프로토콜 문장일 수 없는 주된 이유이다. 지표사(指標詞)가 포함된 관찰문장으로서 비근한 예시를 들자면 ‘지금 여기가 파랗네!’ 정도를 들 수 있다. 이에 대응될 법한 프로토콜 문장은 ‘Schlick은 시점 t에 파란색에 대한 감각을 경험하였다’ 정도가 될 것이다. 후자는 [전자에 나타났던] ‘지금’에 대응될 만한 지시사를 결여하고 있으며, 전자와 같은 관찰진술에서 나타나는 1인칭적인 직접성first-person immediacy을 결여하고 있다. 이는 일반적인 언어로 표현된 일반적인 진술로서, 상호-주관적으로 이해가능한 언어 즉 제3자의 관점에서도 이해될 수 있는 언어이다. 이에 비해 전자의 관찰진술은 사적이며, 그것이 말해진 당시 순간이 지나가면 그 의미 역시 퇴색된다. 관찰진술의 의미는 “바로 그 순간에만” 존재한다. 따라서 관찰진술은 그 의미를 파악하면 그것만으로 그 진리 역시 파악하게 된다는 점에서 분석적 진술과 유사하다. 하지만 분석진술은 실재가 존재하는 방식에 관해서는 말해주는 바가 없는 공허한 것인 반면 관찰진술은 그에 관한 지식을 제공한다. (이러한 생각은 일견 기이하고 불분명해 보이지만 나름대로 설득력과 설명력을 지니고 있다. 일례로, Jerry Fodor가 주장한 바와 같이, 자연언어natural language의 기저에 있는 이른바 ‘사고언어Language of Thought’를 통해 정신적인 과정이 수행된다는 착상은, 작금의 인지과학cognitive science 분야에서 활발히 연구되고 있는 대표적인 연구 프로그램 중 하나이다.)
∙ 역사적 사항
여타 章들과 달리 이번 章의 내용은 비엔나를 주된 배경으로 여러 배우들에 의해 펼쳐진 한 편의 드라마처럼 진행되었다. 그렇기에 역사적 사항들에 대한 별도의 언급이 불필요하다고 여겨질지 모르겠다. 하지만 다음 두 가지 논평을 짧게 덧붙일 필요가 있다: 하나는 논리실증주의를 지나치게 단순화하여 일반화하는 관점이 지닌 위험성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번 章에서 소개된 이야기의 여파에 관한 것이다.
현대 철학사를 돌이켜보건대, 1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1930년대 중반까지 중부 유럽에서 발흥했던 초기 분석철학에 대해, 과거에 보였던 순전한 철학적 흥분감이 사그라들고 초기 분석철학이 제시했던 새로운 철학적 지평이 서서히 무너져왔다는 작금의 일반화된 평가에는 다소 과장된 측면이 있다. 우선, 비엔나 뿐만 아니라 베를린, 체코 공화국, 폴란드는 물론이요, 심지어 중부 유럽이 아닌 스칸디나비아, 영국,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에서도, 활동적이고 지적으로 탁월하며 과학주의적으로 정향된 철학자들이 당시 다수 활동하고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철학 이외의(혹은 철학에 더하여) 자연과학이나 수학 분야에서 주로 훈련된 학자들이었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지녔던 기조는 反-형이상학적이고 경험주의적이었으며, 넓게 보자면 주로 검증주의적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비엔나 학단 내부에마저 다양한 흐름과 영향이 존재했고, Albert Einstein[(그리고 Kurt Gödel)]과 같이 논리실증주의적 흐름의 주변부에만 머물렀던 특수한 인물들도 다수 있었다는 사실이다(지난 세기 초 실증주의가 달성했던 가장 위대한 업적 중 하나는 Schlick의 1915년 논문 「상대성 이론의 철학적 의의The Philosophical Significance of the Principle of Relativity」인데, 이 글은 Einstein과의 긴밀한 협조 하에 쓰였다). 정신-세계 간 관계에 대한 ‘Kant주의적Kantian’ 그림이 상대성 이론에 의해 무너짐에 따라, 과학철학자들은 과학 및 학문에 대해 이전에 지녔던 도식을 철회하고, 규약주의적 관점을 토대로 과학이론의 과소결정성underdetermination 논제 및 검증주의에 대해 탐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에 대해 개별 철학자들이 제기했던 관점은 매우 다양하고 변화무쌍하다. 이러한 다채로운 사실들을 감안하건대, ‘논리실증주의’가 지금은 완전히 사장된 통일적이고 단일한 관점을 취했다는 작금의 일반화된 평가는 사실과 매우 다르다. 이번 장에서 살펴본 프로토콜 문장에 관한 논쟁이 혹여 이러한 잘못된 인상을 심어주었다면, 독자들은 그것이 논리실증주의의 일반적이고 핵심적인 단 하나의 관심사가 전혀 아니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기 바란다.
비엔나 학단과 그를 중심으로 한 과학주의적 철학의 조류가 나치의 출범 및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유럽대륙에서 점차 사양길에 접어듦에 따라, 전술하였듯 그와 관련된 많은 인물들이 망명길에 올랐는데, 대부분은 미국으로 그리고 일부는 영국으로 이주하였다. 이들 중 거론될 만한 이름들로는, 이번 章을 읽기 전부터 독자들에게 익숙했을 법한 Carnap을 위시하여, H. Feigl, Gustav Bergmann, P. Frank, F. Waismann, C. G. Hempel, 그리고 베를린의 과학철학자 Hans Reichenbach 등이 있다. 비엔나 학단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던 두 명의 거물급 논리학자로서, 체코 공화국의 브르노 출신이자 비엔나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Curt Gödel과 바르샤바의 Alfred Tarski 역시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이러한 인물들의 저술과 학계 활동이 없었다면, 미 대륙의 과학철학과 논리학은 현재의 모습으로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Wittgenstein은 당시 비엔나에서 철강사업으로 성공한 매우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1908년에 청년 Wittgenstein은 공학을 공부하기 위해 잉글랜드로 갔는데, [Frege와 Russell의 수학철학 저서를 접하게 된 뒤로] 머지않아 Russell을 찾아가 수학과 논리학을 사사하게 된다. Russell은 Wittgenstein의 철학적 천재성을 즉각 알아차렸다. 당시 Russell 고유의 철학에서는 Wittgenstein의 영향을 감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미구에 Russell이 자신의 철학적 토대가 뒤흔들린다고 느꼈을 정도로, Wittgenstein이 Russell에게 남긴 인상은 매우 강렬했다. 1913년 Wittgenstein은 철학적 작업에 몰두하기 위해 노르웨이로 갔다가, Waismann의 비평으로 인해 비엔나로 돌아오게 된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고국을 위해 자원입대하여 용감하게 복무하다가, 오스트리아의 패망으로 인해 포로로 수감되자 1919년에는 막대한 유산의 대부분을 형제자매들에게 모조리 나눠줘 버린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당시까지 살아있었던 형제자매들에게 나눠주었다. 1918년에 이르기까지 총 세 명의 형제가 자살했기 때문이다.) 1921년(英譯本은 1922년)에 『논고』가 출간되자 Wittgenstein은 철학의 모든 문제를 해결했다고 생각하여 철학계를 떠남과 동시에 비엔나 역시 떠나게 된다. 이후 어느 시골의 한 초등학교에서 보내던 교사생활이 다소 비극적으로 끝나고, Wittgenstein은 다시 비엔나와 철학계로 돌아온다. 비엔나를 떠난 뒤에도 그는 비엔나 학단의 몇몇 구성원들과 간간히 접촉해왔는데, 당시 비엔나 학단에게 Wittgenstein의 『논고』는 철학적인 바이블이나 마찬가지였다. 비엔나로 돌아온 직후 두어 해 동안 Wittgenstein이 집중했던 주된 과업은 누이 Margaret의 집을 설계하고 건축하는 일이었다(이 집은 현재 불가리아 대사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는 동안 케임브리지에 있던 Wittgenstein의 철학적 동료들은 그에게 잉글랜드로 돌아올 것을 거듭 촉구하였으며, 이에 Wittgenstein은 1929년에 잉글랜드로 건너가 케임브리지에서 교수생활을 시작한다. (이후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11章의 ‘역사적 사항’ 節 참조)
앞서 언급했듯 1933년에 청년 Ayer가 비엔나를 방문했던 시기는 역시 청년기였던 Quine이 미국에서 비엔나를 방문했던 시기와 대강 일치하며, 이는 Quine이 프라하에서 Carnap에게 수학하던 시기이기도 하다(당시 Carnap은 프라하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Ayer처럼 Quine도 당시 비엔나에서 성행하던 논리실증주의 조류에 깊은 인상을 받았지만, Ayer의 『언어, 논리, 진리』가 출간되던 1936년에 Quine은 논문 「규약에 의한 진리Truth by Convention」을 발표하였다. 전자가 논리실증주의의 근본 기조와 핵심을 갈무리하여 설파하는 저술인 데 반해, 후자는 Carnap의 철학 및 그를 위시한 논리실증주의 전반에 날카롭게 대항하기 위한 것이었던바, 거기서 Quine은 규약에 의한 진리와 같은 것은 없으며 좀 더 협소하게 말하자면 규약이 논리학을 설명할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물론 실증주의가 형이상학으로부터 학문으로서의 지위를 박탈한 것이 올바른 처사였음을 Quine은 그 누구 못지않게 확신한다. 철학적 직관의 권위를 부정하고, 선험적이면서 종합적인 진리를 부정하며, 경험적 지식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실질적 지식도 있을 수 없다는 실증주의의 기본 주장에는 Quine 역시 철저히 동의한다. 하지만 그는 [논리실증주의가 형이상학을 제거하는 데에 전가의 보도마냥 휘두르는] 분석성이란 개념 자체를 매우 의심스런 눈초리로 보았으며, 이에 논리실증주의보다도 더욱 철저하고 급진적인 형태의 경험주의를 유명한 논문 「경험주의의 두 독단Two Dogmas of Empiricism」(1951)에서 처음 스케치한 뒤 이를 발전시켜나간다. 일부 학자들은 Quine이 20세기 후반기의 가장 중요한 철학자라고 평가한다. 그는 비록 엄밀한 의미에서의 실증주의자는 아니었지만, 자신이 견지했던 강력한 철학적 착상들의 많은 부분을 비엔나 학단 구성원들과 공유하였으며, 논리실증주의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고유의 철학적 기반을 다져갔다. Quine의 철학에 관해서는 10장에서 더욱 상세히 살펴볼 것이다.
∙ 이번 장의 요약
Russell은 판단의 참을 두 가지 실체와 연관시키는 대응론적 관점, 즉 명제와 세계 간 대응이라고 생각하는 직관적인 관점이 양자를 구분할 수 없게 만드는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고 제적한다. 이에 그는 명제라는 것을 아예 폐기하고, 판단 자체를 판단주체 및 이전 도식에서 명제의 구성요소였던 대상과 속성 내지 관계로 이뤄진 하나의 정신적 사실로 간주한다. 이러한 판단은 판단주체를 제외한 나머지 구성요소들이 이루고 있는 하나의 사실이 존재할 경우 그리고 그 경우에 참이다. 이에 대해 Wittgenstein은 Russell의 판단론이 탁자, 펜 홀더, 책과 같이 특정 실체들의 단순한 모임이 왜 판단 불가능한 것인지를 설명해내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Wittgenstein은 다시 사실과 명제,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하나의 사실과 또 다른 하나의 사실로서의 명제라는 개념으로 돌아간다. 그에 따르면 명제란 추상적 실체가 아니라 그가 “명제적 기호”라고 칭한바 글로 쓰이거나 음성으로 발화된 문장 자체이다. 그림이 물감 자국들로 구성되는 것과 같이 명제적 기호는 특정 요소들 즉 대상을 나타내는 이름들로 구성되며, 하나의 그림이 정확한 그림일 경우 그려진 대상들이 존재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것과 같이, 명제는 참일 경우 이름들의 지시체들이 존재해야 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요컨대 명제는 실체들이 배열된 사실의 구체적인 구조를 문장이라는 추상적인 구조로 그려낸다는 점에서 하나의 언어적인 그림과 같다.] 이에 참이라는 것은 사실들 간의 대응, 즉 그리는 사실(명제)과 그려지는 사실 간의 대응으로 설명된다. 명제와 그림 간 결정적인 차이는, 후자가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구현해내는 바를 전자는 규약을 통해 추상적으로 수행한다는 점이다. 그림은 실재의 공간적 배치를 캔버스 위에 칠해진 물감자국들의 공간적 배치로 대신함으로써 사실을 구현해낸다면, 명제는 예컨대 술어의 용법에 대한 언어적 규약을 통해 사실이 배열된 방식을 보여준다. 명제적 기호와 그에 의해 그려지는 사실 간에는, 혹은 일반화하자면 모든 표상체계와 그 체계에 의해 표상되는 사실 간에는 “논리적 형식”이 공유되어야 한다. 논리적 형식은 그 어떤 표상체계에도 앞서 상정되어있는 것이기에, 논리적 형식 그 자체는 언어를 통해 설명될 수 없다[다르게 말하면 논리적 형식 자체는 그림으로 그려질 수 없다]. 이에 Wittgenstein은 논리적 형식 자체와 같이 그림이론이 말하는 방식으로 그려질 수 없는 것은 문자 그대로 말해질 수 없는 것이라 단언한다. 그러한 것은 하나의 특정 언어가 사용되는 과정에서 단지 보여질 수 있을 뿐이다. 논리적 형식뿐만 아니라 가치 및 철학 자체 역시 말해질 수 없는 것에 속한다.
Ayer는 철학적 여정에서 핵심적이었던 시기에 (약한) 검증원리를 표방하였다. 유의미한 명제 혹은 진술은 선험적인 것이거나, 아니면 가능한 관찰에 의해 그 참이 결정될 수 있는 것 둘 중 어느 하나에 속해야 한다(여기서 Ayer가 말하는 선험적인 명제란 단순한 동어반복이거나 분석적인 것으로서 경험적인 사안과는 무관한 명제이다). Ayer는 이러한 원리를 물리적 대상에 대한 설명, 타인의 정신, 가치에 관한 논의, 과거와 미래에 관한 귀납적 추론, 관념론 대 실재론 간 논쟁 등의 사례에 적용한다. 그 과정에서 Ayer가 취하는 일반적인 전략은, 현상을 설명하는 데에 우리가 상식적으로 혹은 과학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관찰증거를 발견하여 이를 그 현상을 정의하는 기준의 지위로 올려놓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Russell의 맥락적 정의방식이 핵심 역할을 담당한다. Ayer의 검증주의는 여러 문제점을 지니고 있지만 대표적인 두 가지를 꼽자면, 가치에 대한 정서주의 이론에 제기되는 소위 Frege-Geach 문제와, 검증원리에 따르면 검증원리 자체가 유의미하지 않다는 문제가 있다.
형이상학에 대한 반감을 비롯하여 Ayer가 지녔던 아이디어 대부분은 Carnap에게서 유래한 것들이긴 하지만, Carnap은 Ayer가 비형식적으로 기술한 착상들을 형식논리적으로 전개하면서 더욱 복잡하고 다층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Carnap은 검증원리를 모든 유의미한 사고를 지배하는 일반원리로서가 아니라 단지 특정 언어가 지닐 수 있는 하나의 특징으로 제시함으로써, 검증원리 가체가 검증 불가능하다는 문제를 피해간다. Carnap의 ‘관용의 원칙’에 따르면 한 언어체계 내에서의 귀결관계가 올바르게 정립되어있기만 하다면 당면 목적을 위해 그 어떤 형태의 언어든 구성하는 것이 허용된다. Carnap은 이 원칙에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항을 덧붙인다: (1) [언어가 실재를 그릴 수 있음은 언어적 규약에 따른 것이라는 Wittgenstein의 생각과 유사하게,] 논리적 진리 역시 단지 규약의 문제일 뿐인바, 어떤 문장이 분석적으로 참인지는 한 언어가 정립될 때 그 언어를 지배하는 규칙으로서 약정된다. (2) 탐구되는 물음들이 “내적 물음”인지 “외적 물음”인지 구분해야 한다. 가령 “네 신발 안에 돌멩이가 있는가?”는 한 언어체계 내에서 묻고 답해질 수 있는 내적 물음이다. 반면 “물리적 대상은 존재하는가?”는 [일견 내적 물음으로서 묻고 답해져야만 하는] 철학적인 존재 물음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를 한 언어를 채택해야할지 여부에 관해 묻는 외적 물음으로서 바라본다면 문제 해결이 더욱 수월해진다. 따라서 이 물음은 실제로는 ‘지금 이 언어는 물리적 대상에 관한 용어들을 도입하고 있는가?’라는 물음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어떤 언어를 택하느냐 하는 것은 인지적인 문제가 아니라 실천적인 문제이다. 모든 인지적 활동은 반드시 하나의 언어 내에서 수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르게 말하면 한 언어를 채택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론적⋅인지적인 정당화가 불가능하며, 단지 당면 목적에 비춘 실천적⋅실용적인 근거만이 제시될 수 있을 뿐이다.] 언어-독립적인language-independent 혹은 언어-중립적인language-neutral 이론적 관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논리실증주의가 제시하는 과학적 도식을 다소 단순화하여 말해보자면, 모든 경험적 과학은 ‘이 이론적 진술이 참이라면, 여차여차한 관찰적 환경이 조성될 경우 특정 관측 결과가 발생할 것이다’라는 형태의 도식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 관측결과란 것은 정확히 무엇인가? 경험적인 관찰결과를 표현하는 표준형식은 무엇인가? 관찰자료라는 것은 물리적 대상⋅사건⋅항목들에 의해 구성되는가, 아니면 직접적인 감각경험에 의해 얻어진 것들로 구성되는가? 이 문제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참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딜레마dilemma이다: 한편으로 관찰진술이라는 것은 상호-주관적이어야 하는바 따라서 물리적이고 공적인 것이어야 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른 한편으로는 관찰진술은 과학 및 모든 지식의 토대 역할을 해야 하는바 따라서 직접적으로 감각적이고 사적인 것이어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이 비엔나 학단 구성원들 간에 벌어진 소위 ‘프로토콜 논쟁’의 핵심 쟁점으로서, 이에 대해 우리는 Carnap, Neurath, Schlick의 관점을 살펴보았다.
∙ 탐구문제
1. Wittgenstein의 “그림이론”은 명제를 “명제 기호”로, 즉 언어적 관습에 따라 실제로 말해지거나 표기된 문장으로 간주하여 그것을 설명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명제에 대한 이런 식의 설명은, (a) 명제에서 관계의 방향 문제, 가령 ‘Brad는 Janet에게 키스했다’와 ‘Janet는 Brad에게 키스했다’가 어떻게 구분될 수 있는지를 정말로 해결해내는가? 해결한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결하는가? (b) “목록 문제”, 다르게 말하면 어떤 것이 “적절하게 결합된 명제”인지 설명하는 문제를 정말로 해결해내는가? 해결한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결하는가? (c) Frege의 말 개념 문제를 해결해내는가? 해결한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결하는가?
2. 만약 당신이 가치에 대한 Ayer의 정서주의 노선을 받아들인다면, ‘절도는 나쁜가?’라는 질문의 지위에 대해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아니면 다음과 같이 생각해보자: 당신은 절도가 나쁜 행위인지 여부에 대해 확신하고 있지 않다고 해보자. 당신은 다음 논증에 대해 생각해본다: 절도가 나쁘다면 나는 내 모자를 먹을 것이다. 절도는 나쁘다. 따라서 나는 내 모자를 먹을 것이다. 이 논증의 명백한 타당성을 당신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가능한 하나의 선택지는 다음과 같다: 논리학에서 핵심적인 것은 (서술적) 문장에 대한 수용acceptance이라는 일반개념이라고 가정해보자. 이에 따르면 한 논증을 통해 사실적 문장factual sentence이 (참인 것으로) 수용되든가 표현적 문장expressive sentence이 (지지될 만한 것으로) 수용되든가 둘 중 하나이다. 이에 따라 논증의 타당성을 판별하는 기준 역시 다음과 같이 변경된다: 전제가 수용된다면 결론은 반드시 수용되어야 한다. 이러한 고찰은 Frege-Geach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정말로 효험이 있는가, 아니면 단지 논증의 타당성 개념에 대한 말 바꾸기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3. 검증가능성 원리는 정말로 합리적인가? 합리적이라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검증원리를 지지하기 위해 경험적 전제를 지닌 논증을 제시할 수 있는가? 아니면 그 전제는 분석적인 것이어야 하는가? 검증원리는 그 자체에 적용되어도 좋은가? 아니면 검증원리 자체는 과학을 위한 “언어게임language game”을 정의하는 종류에 속하는 언어로서 특별한 지위를 지니고 있[기에, 검증원리 자체를 스스로에게 적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는가?
4. Russell의 맥락적 정의방식의 근저에 있는 신조에 따르면, ‘그 F는 G하다’가 참일 경우, F한 대상은 존재한다. ‘프랑스 왕은 키가 크다’가 참이라면 프랑스의 왕은 실제로 존재한다. 맥락적 정의에 따르면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 그 대상이 존재하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Ayer는 엄밀히 말해 F한 대상이 존재하지 않을지라도, 말해지는 대상이 가령 탁자와 같은 논리적 구성체일 경우라면 ‘그 탁자’와 같이 ‘그 F’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참인 문장을 말할 수 있는 것처럼 주장한다. 여차저차한 상황에 처한다면 갖게 될 특정 감각-경험이 그것을 보증하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가설적 감각-내용hypothetical sense-content”이란 정확히 무엇인가? 그것은 가능적인possible 내용인가? 아니면 Ayer는 정의된 대상이 실제로는 ‘논리적 허구logical fiction’에 지나지 않게 되는 더욱 급진적인 스타일의 정의방식을 요구하고 있는 것인가?
5. 검증원리가 단지 하나의 가능한 언어적 제안일 따름이라는 Carnap의 관점은 그 원리의 진정한 정당화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6. Neurath와 Schlick 중 누구의 관점이 프로토콜 문장에 관한 논쟁을 더욱 잘 해결해내는가? Schlick의 관점은 진정 Neurath에 대항하는 것이라 할 수 있는가, 아닌가? 후대의 20세기 철학자들, 특히 미국의 철학자 Wilfred Sellars는 이른바 ‘주어진 것[소여(所與)]the given’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였는데20)(최근에는 John Mcdowell이 Sellars의 이러한 노선에 가담하였다). 이는 프로토콜 논쟁에서 Schlick이 이론적으로 개입했던 핵심 개념이다. 지식의 참된 토대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Schlick은 그가 칭한바 “관찰진술”이 사적인 경험[(즉 주어진 것)]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통용하는 공적 언어에 의해서는 표현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하지만 그의 주장이 참이라면, 우리의 내적 경험은 공적인 언어 체계에 의해 표현된 일상적인 문장에 도대체 어떻게 통합될 수 있겠는가? 개개인의 사적인 경험과 공적인 일상언어가 과연 적절하게 연관될 수 있겠는가? 양자 간 관계는 적어도 논리적인 것이어야 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그 경우 사적 경험의 영역 역시 언어가 미치는 범위로부터 봉쇄되지 않는다. [다르게 말하면 Carnap과 Neurath가 비유적으로 역설하였듯이 우리는 우리가 타고 있는 언어라는 배를 떠날 수 없다.] 이러한 사항들을 고려하건대 Schlick과 Neurath(그리고 Sellars) 간의 논쟁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겠는가?
20) “아무리 원리적인 방식으로라도, 인지적 사실들이 현상적인 것[감각자료]이든 행동주의적인 것이든, 공적인 것이든 사적인 것이든 간에, 非-인지적 사실들을 통해 남김없이 분석될 수 있다는 생각은 (中略)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고 나는 믿는다.” (Wilfred Sellars, (1973〔1956〕), 「경험주의와 심리철학Empiricism and Philosophy of Mind」: Stephen P. Schwartz, 『분석철학의 역사: 러셀에서 롤스까지』, 2017, 서광사, 225쪽에서 再인용.)
* “Sellars의 기본 주장들 중 하나는, 감각자료 이론가들이 그들의 목적에 적합한 그 어떠한 [순수하고 투명한] 언어나 개념적 구조도 전혀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中略) 우리는 인식적으로 오염되지 않은 순수 자료의 원천에 접근하지 못한다. 우리가 가진 자료가 무엇이든 간에, 그것이 감각이든 여타의 것이든 간에,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무엇이 되었든 이미 이론 적재적인 것으로서 우리에게 나타난다.” (S. P. Schwartz, 같은 책, 225-6쪽.)
∙ 주요 읽을거리
Ayer, A. J. (1946), 『언어, 진리, 논리Language, truth and Logic』.
비엔나 학단의 좀 더 다양한 구성원들에 관해서는 A. J. Ayer가 편집한 選集, 『논리실증주의Logical Positivism』(1959) 참조.
Carnap, R. (1928), 『세계의 논리적 구조와 철학에서의 사이비 문제The Structure of the World and Pseudoproblems in Philosophy』.
, (1956〔1947〕), 『의미와 필연성: 의미론 및 양상논리 연구Meaning and Necessity: a Study in Semantics and Modal Logic』. Carnap의 논문 「경험주의, 의미론, 존재론Empiricism, Semantics, Ontology」이 포함되어 있다.
Russell, B. (1910), 「직접대면에 의한 지식과 기술구에 의한 지식Knowledge by Acqauintance and Knowledge by Description」, 『Aristoteles 학회지Proceedings of the Aristotelian Society』, 卷11: 108-128쪽에 수록. Russell, B. (1918), 『신비주의와 논리Mysticism and Logic』, 152-67쪽에 再錄.
Wittgenstein, L. (1961), 『논리-철학 논고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 추가적인 읽을거리
Coffa, A. (1991), 『Kant에서 Carnap까지의 의미론적 전통: 비엔나 학단까지The Semantic Tradition from Kant to Carnap: to the Vienna Station』. 논리실증주의의 의미론적 뿌리와 궤적을 철학사적으로 추적하고 있는 평이한 저서이다.
A. Richardson, T. Uebal 編, (2007), 『케임브리지 입문서: 논리경험주의The Cambridge Companion to Logical Empiricism』. 탁월한 학자들이 해당 주제에 관해 쓴 글들을 모은 권위 있는 개요서이다.
Uebel, T. (2007), 『기로에 선 경험주의: 비엔나 학단의 프로토콜 문장 논쟁Empiricism at the Crossroads: The Vienna Circle's Protocol Sentence Debate』. 프로토콜 논쟁과 연관된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