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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ssell의 판단이론,

前期 Wittgenstein, 논리실증주의

 

FregeRussell은 논리학에 대한 작업을 통해 언어철학적 사유에 이르게 되었다. 특히 Frege는 지금도 기초논리학 강의에서 교수되는 진리-함수적 논리 및 양화논리의 창시자 혹은 발견자로 인정받는다. 이 새로운 논리학은 Aristoteles에 의해 창안되어 Frege 시대에 이르기까지 별다른 진전 없이 이어져 오던 전통적인 삼단논법적 논리학logic of syllogism를 뛰어넘는 것으로서, Aristoteles 논리학이 유일하게 다룰 수 있었던 형태의 정언명제, 즉 범주category 내지 1항 술어만이 나타나는 명제들을 다룰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임의의 1항 원자명제들이 결합된 복합명제 및 임의의 2항 이상 관계술어가 나타나는 명제들 역시 다룰 수 있는 강력한 논리학이었다.

논리학에 대한 FregeRussell의 관심은 궁극적으로 수학기초론foundations of mathematics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되었다. 둘 모두 순수수학의 명제가 논리학의 명제로 환원 가능하다는 논리주의 논제thesis of Logicism를 확고히 정립하길 원하였[으며, 그에 따라 수학의 모든 명제들이 환원될 수 있을 만큼 논리학을 강력한 체계로 강화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Frege는 이 작업을 본격적으로 개진한 저서 산수의 근본법칙11893년에 완성하였는데, Russell수학의 원리(1903)를 거의 완성해갈 무렵까지 Frege의 저서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미구에 Frege의 작업을 접하게 된 Russell수학의 원리가 출판되기 직전에 추가한 부록에서 Frege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으면서도 Frege의 체계에서 모순이 도출가능하다derivable는 결점을 지적하였으며, 이는 같은 해 Frege에게 보낸 유명한 서한에도 나타난다.

소위 Russell의 역설Russell’s paradox로 널리 알려진 이 문제는 다음과 같다: Frege의 체계에서 특히 공리Axiom에 따르면, 임의의 술어에 대해 그에 대응하는 하나의 집합set 내지 외연extension이 존재한다.1) 달리 말하면 모든 조건condition은 하나의 부류class를 결정한다. 이에 따르면 어떤 집합들은 그 집합 자신을 원소로 포함한다. [‘𝛼는 자신을 원소로 갖는다라는 술어에는 일단 아무런 문제가 없으며, 공리에 의해 그 술어에 대응하는 집합 즉 자신을 원소로 갖는 집합이 존재한다.] 가령 셋 이상의 원소를 갖는 집합들의 집합을 들 수 있다. [세상엔 셋 이상의 원소를 갖는 집합들이 당연히 적어도 셋 이상 있으며, 이런 집합들을 원소로 갖는 집합의 원소 역시 셋 이상이고, 따라서 그 집합은 자신을 원소로 갖는다.] 반면 이와는 다른 집합들은 자신을 원소로 포함하지 않는다. 가령 표범의 집합은 그 자체로는 표범이 아니기 때문에 자신을 원소로 갖지 않는다. 이제 은 자신을 원소로 갖지 않는 집합이다라는 술어를 생각해보자. 공리가 함축하는 바에 따르면 이 술어에 대해서도 그에 대응하는 하나의 집합, 즉 표범의 집합 등과 같이 자신을 원소로 갖지 않는 집합들로 이뤄진 집합이 존재한다. 이 집합을 ‘Russell 집합이라 부르자. Russell 집합은 자신을 원소로 포함하는가, 포함하지 않는가? Russell 집합이 자신의 원소라면, [Russell 집합의 정의에 따라] Russell 집합은 자신을 원소로 포함하지 않는다. Russell 집합이 자신의 원소가 아니라면, [역시 Russell 집합의 정의에 따라] Russell 집합은 자신을 원소로 포함한다. [간단히 말해 Russell 집합은 자신을 원소로 갖는 경우 그리고 오직 그 경우에 자신을 원소로 갖지 않는다.2)] 모순은 여기서 드러난다. 한 명제는 참이거나 거짓 둘 중 하나여야지 둘 다일 수는 없다. 하지만 Russell 집합 사례의 경우 ‘Russell 집합은 자신을 원소로 갖는다, 참이라면 거짓이고 거짓이라면 참이다. Frege의 체계 어딘가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1) (原註) 공리: F의 집합=G의 집합은 다음의 경우 그리고 오직 그 경우이다: 모든 x에 대해, xG인 경우 그리고 오직 그 경우에 xF이다. [(x(Fx)=x(Gx))(x)(FxGx)]

2) 이러한 결론의 도출과정을 형식적으로 좀 더 명료하게 보이자면 다음과 같다: “자신을 원소로 갖지 않는 집합을 A라 하자. 그러면 A는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A={x|xx}

이제 어떤 집합 𝛳가 집합 A의 원소라면, A의 정의에 의해 𝛳는 자신을 원소로 갖지 않는다. 이에 다음이 성립한다:

(𝛳A)(𝛳𝛳)

역으로 𝛳가 자신을 원소로 갖지 않는 집합이라면, A의 정의상 𝛳A의 원소이다. 이에 다음이 성립한다:

(𝛳𝛳)(𝛳A)

양자로부터 다음이 도출된다:

(*) (𝛳A)(𝛳𝛳)

그렇다면 A 자체는 자신을 원소로 갖는 집합인가, 그렇지 않은 집합인가? 전자 AA라면 (*)에 의해 AA이다. 역으로 후자 AA라면 (*)에 의해 AA이다. 따라서 모순이 발생한다.” (송하석, 거짓말쟁이 역설에 관한 탐구, 아카넷, 2019, 34-5.)


Russell로부터 모순을 전해 들은 Frege유일하게 가능한 것처럼 여겨졌던 산수의 토대가 완전히 무너져버린 듯하다고 답변하였다. 실제로도 Frege는 자신의 체계가 지닌 결함을 끝내 해결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Russell은 이에 굴하지 않고 Alfred North Whitehead와 함께 대작 수학원리1910, 1912, 1913년에 각각 출간하였다(중요한 것으로 평가받는 21927년에 출간되었다). 수학원리에 제시된 체계는 Frege의 작업보다 훨씬 정교하고 복잡하였지만, 순수수학이 일반적으로 논리학으로 환원가능reducible하며 따라서 순수수학의 진정한 주제가 논리학이라는 논리주의 논제를 정당화하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다.

FregeRussell은 새로이 고안된 강력한 논리학이 사고를 더욱 명료화함으로써 경험적 사실 및 여타 학문들에도 확대 적용될 수 있을 것이라 전망하였다. 다만 이러한 방향에서 실질적인 작업을 수행한 이는 Russell이었다. 철학의 문제들, 외부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식Our Knowledge of the External World, 논리원자론의 철학The Philosophy of Logical Atomism과 이를 확장시킨 논리원자론Logical Atomism등의 저서들을 통해, Russell은 우리의 모든 지식이 오로지 논리학 및 감각-경험sense-experience에 대한 지식에 기초하고 있다는 주장을 정립하고자 하였으며, 그러한 작업은 지식-주장knowledge-claim이 담긴 문장들에 대한 분석을 요하였다. 지식을 주장하는 문장들은 실제로 어떤 대상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인가? 지식-주장이 개입하고 있는 속성 내지 관계란 정확히 무엇인가?

1911년 비엔나의 스물두 살 청년이었던 Ludwig Wittgenstein은 그해 초 찾아갔던 Frege의 제안에 따라 Russell을 만나기 위해 케임브리지로 갔다.3) Wittgenstein을 만난 Russell은 머지않아 그를 열정적이고 심오하며 강렬하고 특출난, 내가 아는바 전통적으로 생각되어온 천재의 전형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이번 장의 중추라 할 수 있는 Wittgenstein 철학은 논리-철학 논고(1921)에 제시된 소위 前期 철학이다. 논고를 유명한 철학적 운동이었던 논리실증주의Logical Positivism와 함께 살펴보는 것은 세간에 퍼진 인식과 다르게 실제로는 다소 부적절할 수도 있지만, 양자 모두 1910년 직후 Russell의 관점으로부터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논고의 핵심 착상으로서 의미에 대한 그림 이론‘picture theory’ of meaning이라 일컬어지는 Wittgenstein의 관점은 Russell의 관점이 지닌 결점을 해결하고자 한 시도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자신의 이론이 지닌 결점을 극복하고자 Russell이 차후 제시한 더욱 복잡한 이론까지 살펴보지는 않을 것이며, 단지 Wittgenstein의 이론이 어떤 점에서 Russell의 것보다 우월하다고 여겨질 수 있는지를 이해하는 데에 충분한 정도에서 만족할 것이다.

 

3) Wittgenstein1908년부터 멘체스터에서 공학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당해 Russell수학의 원리를 접한 뒤로는 수학의 기초 및 Frege의 새로운 논리학에 대한 관심을 키워갔다. 그러다 1911년 여름방학이 끝날 무렵 철학책을 쓰겠다는 계획을 논의하기 위해 Frege를 찾아 예나로 갔으며, Frege의 권고로 그해 10Russell을 찾아 케임브리지로 갔다. 따라서 2역사적 사항에서 Wittgenstein“1912년에 Russell의 권고로 Frege를 방문했다는 저자의 서술은 (연도권고자방문 대상 모두) 착오인 듯하다.


 

명제, 사실, Russell의 판단이론

 

서론에서 살펴보았듯이 참과 거짓이란 명제가 갖는 특성이다. 참을 대응correspondence으로 가정하는 것, 특히 세계 또는 사물이 존재하는 방식the way that world is/things are과 명제 간의 대응으로 가정하는 것은 퍽 자연스러운 생각이다. 사물이 존재하는 방식이란 사실fact 또는 사태state of affairs라 할 수 있다. 예컨대 눈이 하얗다는 사실, 아스날이 2002년 영국 프리미어쉽에서 우승했다는 사실, 2+2=4라는 사실 등이 존재한다. 우리는 직관적으로 사실이란 실체들이 배열된 것configurations of entities이라 가정한다. 눈이 하얗다는 사실은 눈과 하얌whiteness이라는 속성으로 구성된다be composed of. 이 사실을 나타내는 단칭용어들로는 눈이 하얌을 갖는다는 것’, ‘눈이 하얗다는 것’, ‘눈이 하얗다는 사실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진리 대응론적 고찰에 따라 1장에서 원자명제의 진리-조건을 다음과 같이 정식화한 바 있다:

 

원자명제의 참에 대한 소박한 정의: 원자명제는 다음의 경우 그리고 오직 그 경우에 참이다: (i) 대상 o와 속성 p로 구성된 1항 원자명제이고, op를 갖는다는 사실이 존재하는 경우, (ii) 대상 o1o2 및 관계 R로 구성된 2항 원자명제이고, R(o1, o2)라는 사실(o1o2가 이 순서로 관계 R을 맺는다는 사실)이 존재하는 경우(3항 이상의 관계에 대해서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Russell은 이러한 진리 정의에 심각한 문제점이 있음을 지적한다(이러한 연유로 위의 정의에는 별표가 붙었다. 1, ‘원자문장의 참과 의미절 참조). 화성이 태양을 공전한다는 사실과 화성이 태양을 공전한다는 명제를 비교해보자. 위의 정의에 따르면 이 경우 사실과 명제 둘 다 화성, 𝛼𝛽를 공전한다는 관계, 태양이라는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된다. 그러니 양자 간에는 대체 어떤 차이가 있겠는가? 둘 사이에는 분명 어떤 식으로든 차이점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양자는 완전히 동일한 것이 되며, 그 경우 모든 원자명제는 자동적으로 참이 되어버린다. 어떤 명제든 그에 대응하는 사실 즉 그 명제 자체가 존재할 것이기에, 그 어떤 명제도 거짓일 수 없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예컨대 바다코끼리가 날아다닌다는 것은 충분히 상상가능하기에 바다코끼리가 날아다닌다는 명제는 분명 존재하며, 그에 따라 바다코끼리가 날아다닌다는 사실 역시 자동적으로 존재하게 된다. 하지만 이는 분명 사실이 아니다. 이렇듯 진리 대응론적인 모델은 그 어떠한 거짓 믿음이나 거짓 명제도 원리적으로 허용치 않는 것처럼 보인다.4)5)


4) “[진리를 대응론적으로 정의하는 작업에서] 거짓을 용납해야 하는 필요성은 믿음을 정신과 어떤 대상 간의 관계로만 간주할 수는 없게 만든다. 일단 그 단일한 대상이란 대략적으로 말해 믿어지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만약 믿음이 그러한 단일 대상과의 관계로 간주된다면, 직접대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거짓이라는 반대를 용납하지 않고 믿음이 항상 참이어야만 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오델로는 데스데모나가 카시오를 사랑한다고 잘못 믿고 있다고 해보자. 이때 이 믿음이 어떤 단일한 대상 즉 카시오에 대한 데스데모나의 사랑이라는 대상과의 관계에만 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한 대상이 있다면 오델로의 믿음은 참이 될 것인데, 실제로는 그러한 대상이란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존재하지 않는 대상에 대해 오델로는 어떠한 관계도 가질 수 없다. 그리하여 그의 믿음은 이러한 단일 대상과는 관계를 맺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오델로의 믿음은 다른 대상 즉 데스데모나가 카시오를 사랑한다는 사실과의 관계라고 말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데스데모나가 카시오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와 같은 대상이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앞서의 경우처럼 카시오에 대한 데스데모나의 사랑이라는 대상이 있다는 가정만큼이나 불합리하다. 그러므로 차라리 믿음을 정신이 어떤 단일 대상에 대해 관계를 맺는 것으로 간주하지 않는 이론을 찾는 편이 더 낫다.
(中略) 판단한다나 믿는다 내에 수반되는 관계에 거짓 가능성을 정당하게 허용하고자 한다면, 그 관계는 두 개의 항 사이가 아니라 셋 이상의 항들 간에 맺어지는 관계로 취급되어야 한다. 데스데모나가 카시오를 사랑한다고 오델로가 믿는다면, 오델로는 마음 속에서 카시오에 대한 데스데모나의 사랑이라든가 데스데모나가 카시오를 사랑한다는 사실 등의 단일 대상을 떠올리지 않아야 한다. 그러한 경우엔 어떤 마음과도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객관적인 거짓이 있어야 한다고 요청되기 때문이다.” (Bertand Russell, 철학의 문제들, 박영태 , 서광사, 1989, 133-5.)

5) (原註) 이는 진리 대응론이 완전히 틀린 이론이라는 말은 아니다. 진리 대응론을 발전시킨 탁월한 저서로는 Barwise, Etchemendy (1987) 참조.


뿐만 아니라 1장에서 짧게 언급되기만 하고 상세히 살펴보지는 않았던 문제로서, 명제의 구조적개념과 얽힌 문제 역시 대응론적 관점이 지닌 대표적인 난점이다. 앞 단락에서 말했듯이 위의 정의에 따르면 화성은 태양을 공전한다에 의해 표현되는 명제는 화성, 𝛼𝛽를 공전한다는 관계, 태양이라는 세 요소로 구성된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에서는 이 명제가 태양은 화성을 공전한다에 의해 표현되는 명제와 어떻게 다른지 식별되지 않는다. 양자는 분명 다르다. 두 명제는 동일한 세 구성요소를 각기 다른 방식으로 결합하고 있는바, 구성요소들 간 맺어진 관계의 방향direction이 다르기 때문이다. 물론 두 문장의 의미 차이는 문장의 구성요소들이 각기 다른 순서로 배열되어있다는 점으로 인해 물리적구체적으로 표시되지만, 추상적인 명제의 차원에서 이러한 차이를 반영하는 요인이 무엇인지는 아직 해명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을 집합set 내지 부류class 개념의 경우와 비교해보자. 집합 역시 명제처럼 그 구성요소와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추상적 대상이다. 하지만 명제의 경우와 달리 집합은 그 구성요소 즉 원소member에 의해 전적으로 정의된다. 집합 AB가 동일한 집합이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은 양자가 동일한 원소를 갖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명왕성, 금성}{금성, 명왕성}은 정확히 동일한 두 집합-개항이다. [요컨대 원소들이 배열되는 순서는 집합의 동일성 조건과 무관하다.] 반면 화성은 태양을 공전한다태양은 화성을 공전한다에 의해 각각 표현되는 두 명제의 사례에서 살펴보았듯이, 임의의 두 명제가 동일한 부분이나 동일한 구성요소를 가짐에도 [그것들이 배열된 순서에 따라] 각기 다른 명제일 수 있다.

이와 밀접하게 연관되는 문제로서 2, ‘술어의 지시와 말 개념 문제절에서 살펴본 바 있는, Frege주의 의미론에서의 말 개념 문제가 있다. 지시적 표현들을 그저 한데 모은다고 해서 명제가 표현되게끔 유의미하게 결합되는 것은 아니다. ‘Socrates’‘Groucho Marx’만으로는 유의미한 문장이 형성되지 않으며 기껏해야 재담꾼들이 나열된 목록이 얻어질 뿐이다. 더 나아가 ‘Socrates’술을 마심이라는 속성내지는 ‘Socrates’술을 마신다drinks를 생각해보라. Socrates는 술을 마신다는 명제와 Socrates, 술을 마신다Socrates, drinks라는 목록은 분명 다르다. 그 차이는 무엇인가? ‘술을 마신다는 표현에 계사(繫辭)copula 즉 술어화로서의 이다를 부가하여 은 술을 마시는 사람이다라든가 은 술을 마시고 있다가 축약된 것이라 가정하더라도 사정은 나아지지 않는다. 그 경우 실제로 일어난 일이란 그저 일련의 소리나 종이 위 표시가 더 추가된 데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부가된 표현들이 의미하는 바는 유의미한 실체meaningful entity, 문법적 결합copulation이라 불리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모종의 추상적인 실체여야 한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문제는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온 셈이다. Socrates가 술을 마시고 있다는 명제와 Socrates, 연결, 술을 마시고 있음Socrates, copulation, drinking이라는 목록을 구분해야 한다는 동일한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Russell은 판단에 대한 다중관계이론Multiple Relation Theory of judgement을 도입한다. 이제 Russell은 명제라는 것을 폐기하고, 그에 따라 참을 명제가 지니는 속성으로서가 아니라 판단 내지 믿음이라 불리는 정신적 상태mental state가 지니는 속성으로 간주한다. 그렇다. 아무런 판단주체judger가 없다면 참이거나 거짓일 수 있는 여하한 것도 없을 것이다.6) 다만 그 경우에도 사실fact은 여전히 남아있을 것이다. 앞선 문제에서 사실이라는 요소가 꺼림칙하게 여겨졌던 이유는 명제에 더해 사실이라는 것을 추가적으로 받아들이는 데에서 기인하였다. 이에 Russell은 명제를 제거하는 전략에 착수한 것이다.


6) 만약 어떠한 판단주체도 있을 수 없다면 거짓도 있을 수 없으며, 거짓과 상반되는 진리 역시 있을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한 것처럼 여겨진다. 단순히 물질세계만을 생각한다면 그 세계 내에는 거짓이 설 수 있는 여하한 자리도 없다. 그 세계가 사실이라 불리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할지라도, 참이라는 것이 거짓과 동일한 층위에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는 여하한 진리 역시 포함하지 않을 것이다. 참과 거짓은 믿음이나 언명의 속성인데, 단순한 물질세계에는 어떠한 믿음이나 언명도 없으므로 참과 거짓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B. Russell, 같은 책, 130-1.)


여기서 결정적으로 Russell은 앞서 우리가 살펴본 직접대면관계the relation of acquaintance라는 개념을 활용한다(3, ‘직접대면에 의한 지식과 기술구에 의한 지식참조). 그에 따르면 엄밀히 말해 우리가 직접대면할 수 있는 유일한 대상(자아를 제외하면) 감각-자료들 뿐이지만, 당면 목적상 이 점은 무시한 채 논의의 단순성을 위해 임의의 일상적인 대상들 역시 직접대면될 수 있다고 가정해보자. 대상(전문적인 철학용어로는 개별자individual)은 아니지만 우리가 직접대면할 수 있는 또 다른 실체로는 속성 및 관계와 같은 다양한 보편자들이었다. Russell이 말했듯이 대상은 지각되고perceived 보편자는 생각된다conceived.

이제 판단주체 BRab(예컨대 고양이가 매트 위에 있다’)라고 판단하는judge that Rab 상황을 가정해보자. 이를 위해 첫 번째로, B는 대상 ab, 관계 R직접대면해야(혹은 그것을 지시하거나 그에 관해of생각해야) 한다.7) 이는 다음의 도식 4.1과 같이 제시될 수 있다:

 

B

묶음 개체입니다.

a

 

R

 

b

도식 4.1 직접대면

 

여기서 점선은 직접대면관계를 나타낸다.


7) 앞 단락에서 언급되었듯이 판단의 대상으로서 직접대면되는 대상에는 관계라는 보편자 역시 포함된다. 이에 Russellab처럼 개별자인 판단대상을 대상-object-term이라 칭하고 R처럼 보편자인 판단대상을 대상-관계object-relation라 칭하기도 한다.


두 번째로, B는 이러한 복합체에 대해 특정 태도를 형성해야 한다. 그에 따라 BRab라고 판단하게 된다. 이는 다음의 도식 4.2와 같이 제시된다:

 

B

묶음 개체입니다.

a

 

R

 

b

도식 4.2 판단

 

여기서 실선은 판단함이라는 정신적 상태를 나타낸다.

이에서 알 수 있듯이 Rab라는 판단judgement that Rab은 판단주체 B, 대상 ab, 관계 R 간에 맺어지는 4 관계four-termed relation이며, 그 판단관계 자체는 하나의 사실이다.8) 이 판단은 B가 연루되어있지 않은 특정 사실, Rab라는 사실fact that Rab이 존재하는 경우 참이며, 그러한 사실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 판단은 거짓이다.9) 이렇듯 참이란 사실들 간에 성립하는 객관적인 대응관계로서, 명제와 실재 간의 대응이 아니라 정신적 상태와 실재 간의 대응이다.


8) 판단이라는 것을 마음 및 이와 관계된 여러 대상들이 여러 번 동시에 함께 발생하는 관계[즉 다중관계]라고 생각한다면 거짓을 설명하기가 더 수월하다. 데스데모나, 사랑하고 있다, 카시오 등은 오델로가 데스데모나는 카시오를 사랑한다고 믿을 때 존재하게 되는 관계에 참여하는 모든 항들이다. 이 관계는 네 항 사이의 관계로서 오델로 역시 그 관계를 맺는 항들 중 하나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관계는 오델로가 데스데모나, 사랑함이라는 관계, 카시오라는 세 항 각각에 대해 맺는 관계는 아니며, 오델로가 그것들 모두에 대해 갖는 관계이다. 수반된 믿음행위의 관계에 대한 지표는 오직 하나이며, 다만 이러한 하나의 행위의 지표가 네 항들을 서로 연결시킨다. 오델로가 그러한 믿음을 형성한 순간에 실제로 일어나는 일은, 믿는다는 관계가 네 개의 항 모두를 하나의 복합체로 짜맞춘다는 사실이다.

(中略) 판단행위에서 관계는 어떤 뜻sense이나 방향direction을 갖는다. 판단이라는 관계는 그 구성요소들을 어떤 순서order로 배열하며 이 순서는 문장 내에서 단어들이 배열된 순서에 의해 드러난다.” (B. Russell, 같은 책, 135-6.)

9) 한 믿음이 그와 관계된 어떤 연상된 복합체와 대응한다면 참이 되고 그렇지 않다면 거짓이 된다. 두 개의 항과 그 둘 간의 관계가 믿음의 대상이며, 그 항들이 믿음의 뜻에 의해 특정 순서로 배열되어 있다 해보자. 이때 두 항들이 그 특정 순서에 따라 관계지어진 복합체가 존재한다면 그 믿음은 참이며 그렇지 않다면 거짓이다. 판단이나 믿음이라는 행위는 마음을 구성요소로 갖는 하나의 복합체로서, 마음을 제외한 나머지 구성요소들이 믿음에서 나타난 순서대로 배열되어 하나의 복합체를 형성한다면 그 믿음은 참이며, 그렇지 않다면 거짓이다.

그래서 참과 거짓이 믿음의 속성이라 할지라도 믿음 자체 내에서가 아니라 믿음의 외부에 의해 결정되는 속성이다. 믿음의 진리-조건은 그 어떤 믿음이나 마음도 포함하지 않고 단지 믿음의 대상들만을 수반한다. 믿고 있는 마음은, 그 마음을 제외한 믿음의 대상들만이 연ㄹ된 복합체가 존재해서 그에 대응할 때에만 참되게 믿는 것이다. 이러한 대응은 진리를 보증하며 이러한 대응이 없다면 거짓을 함축한다. 따라서 최종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1) 믿음은 그것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마음에 의존한다. (2) 그러나 믿음의 진리를 위해서는 마음에 의존하지 않는다.” (B. Russell, 같은 책, 138.)


Russell의 다중관계론은 여기서 살펴본 형태보다 좀 더 복잡하지만 그 이론의 핵심을 파악하는 데에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요컨대 Russell은 모종의 특정한 정신적 상태에 의거하여 명제라는 추정된 실체를 일소해버리고자 하였으며, 그에 따라 참과 거짓은 그러한 정신적 상태들이 지니는 속성으로 설명된다.

 

 

∙ 『논리-철학 논고

 

논고에는 대단히 흥미로운 측면들이 아주아주 많다. 우리는 그것들 모두를 속속들이 살펴보지는 않고, 다만 명제에 관한 그림이론Picture Theory을 기초적으로 파악한 뒤 후대 철학자들, 특히 논리실증주의자Logical Positivist 혹은 논리경험주의자Logical Empiricist들에게 영감을 준 주된 특징들 몇몇만을 살펴볼 것이다.

1912, 스물두 살의 WittgensteinRussell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약 내가 aRb라고 판단한다면, 내가 원하는 것은 더 이상의 추가적인 전제 없이 aRb인지 또는 aRb인지를 말해줄 수 있는 그러한 판단이론이다. 당신의 이론은 이 조건을 충족하지 못한다.

 

(WittgensteinRussell의 표기법에 따라 ‘Rab’‘aRb’, ‘부정: aRb’aRb’로 표기하였다.) 즉 그가 원한 것은 다음과 같은 추론을 보여줄 수 있는 판단론이다:

 

1. BaRb라고 판단한다.

 

따라서

 

2. aRb는 명제이다.

 

따라서

 

3. aRb이거나 aRb이다.

 

Russell의 이론은 1에서 2로의 추론을 설명하지 못한다.

Russell이 제시한 바와 같이 직접대면관계를 기본적인 것으로 삼는 판단이론의 문제는 직접대면될 수 있는 적절한 종류의 실체들에 대해 아무런 제약도 가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나는 탁자, 펜 홀더, 책 등을 지각하여 직접대면할 수 있다. 세 사물을 동시에 직접대면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세 사물에 대해 판단이라는 태도를 취하여 탁자 펜 홀더 책이라는 판단을 내릴 수도 있다는 것인가? 이러한 귀결을 막을 수 있는 장치가 있는가?

Wittgenstein은 그러한 장치란 없다고 딱 잘라 말한다. 적어도 다중관계이론의 관점에서 보는 한, 판단의 대상들은 올바른 방식으로 결합되지 못할 수 있으며, 그 결과 도무지 명제라고는 할 수 없는 무의미한 헛소리nonsense가 얻어질 뿐이다. 하지만 명제 내지 思考란 적어도 판단의 내용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탁자, 펜 홀더, 이 참이라는 속성을 가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즉 그것이 하나의 사실을 구성하지 않는다는 대답만으로는 불충분하다. 문제는 그러한 판단이 참일 수 없는 성질의 것임에도 참이라고 말하는 데에만 있는 게 아니라, 도대체 그러한 무의미한 판단 자체가 허용된다는 데 있다.

 

그림이론the pcture theory. 여기서는 그림이론을 개략적으로만 살펴볼 것이기에 Wittgenstein의 복잡한 전문용어들이 엄밀한 방식으로 사용되지는 않을 것이다.

Wittgenstein은 참이란 사실의 측면에서 설명되어야 한다는 Russell의 기본 착상에 동의한다. 하지만 명제에 관해 말하는 것이 단지 말하는 방식façon de parler에 지나지 않는다는 Russell의 유명론적 생각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Wittgenstein은 명제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명제란 대상은 아니지만 그 자체로 하나의 사실이다:

 

3.14 명제적 기호propositional sign를 구성하는 것은, 명제의 요소들(낱말들)이 명제 내부에서 서로 확정적인 관계를 맺는다는 점이다. 하나의 명제적 기호는 하나의 사실이다.


명제는 문장에 의해 표현되는 추상적 실체라기보다는 단순히 (발화의 맥락에 따라) 유의미한 평서문declarative sentence이다. 명제는 추상적인 그 무엇이 아니라 종이에 표시된 일련의 잉크 자국이나 입으로 소리 내어진 일련의 음소들 등에 의해 구체화된 문장-유형으로서, 이러한 문장-유형들은 실질적인 맥락에 따라 유의미해진다.

일례로 고양이가 매트 위에 있다는 것과 같은 일상적인 사실 내지 사태를 생각해보자. 우리의 일상적인 생각과는 다르게, 매트-위의-고양이는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사실이며, 사실 그 자체는 대상이 아니다(그 이유는 잠시 뒤에 살펴볼 것이다). 이제 이러한 사실을 단순하고도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는 통상적인 한 폭의 그림picture 또는 소묘drawing를 생각해보자. 여기서 그리기 관계picturing relation는 두 가지 사실들 사이에 맺어지는 관계, 즉 그리는 사실picturing fact[즉 그림]과 그려지는 사실pictured fact[즉 매트-위의-고양이] 간에 맺어지는 관계이다. 전자는 실제의 구체적인 고양이와 매트를 각각 나타내는stand for 구체적인 항목item[즉 고양이와 매트 형상으로 그려진 물감 자국들]을 지니고 있어서 그것들이 서로 관계 맺고 있는 방식을 보여주어야show 한다.

이번엔 동일한 매트--고양이에 관해 묘사하고 있는 다음 명제(즉 문장)에 관해 생각해보자:

 

고양이가 매트 위에 있다.

 

앞서 그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명제를 구성하고 있는 항목들인 고양이매트는 각각 실제의 고양이와 매트를 나타내거나 지시하며, 이 명제는 그 두 항목들이 관계맺고 있는 방식을 보여준다show how. 다만 명제에서 수행되는 종류의 보여주기showing는 그림의 경우에 비해 더욱 추상적이고 규약convention에 의존적이다. 통상적으로 그림에서는 어떤 하나가 다른 하나 위에 있는 관계를 구현하기 위해 한 무리의 물감 자국들이 다른 무리의 물감 자국들 위에 공간적으로 배치되는 방식이 사용된다. 실제로 Wittgenstein이 그림이론의 착상을 떠올리게 된 계기로서, 법정에서 교통사고를 묘사하기 위해 모형 자동차가 사용되는 경우에 이러한 점은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반면 명제에서 이러한 관계가 구현되는 것은, ‘의 위에 있다는 표현의 각 공란에 사물의 이름이 삽입됨으로써 전자가 후자 위에 있음을 보여준다는 우리의 언어적 규약에 따른 바이다. 그렇게 완성된 명제적 기호는 하나가 다른 하나 위에 있음을 말해준다say. 다시 말해 명제는 그 명제가 참이라면 사물들이 어떻게 관계를 맺고 있어야만 하는지를 보여준다.

이에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매우 간결명료하게 표현된 정식을 얻게 된다:

 

3.1432 ‘복합기호 “aRb”ab에 대해 관계 R을 맺는다는 것을 말해준다고 하기보다는, ‘“a”“b”에 대해 특정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 aRb라는 것을 말해준다고 해야 한다.

 

10) 이 구절은 이해하기 다소 어렵다. 작은따옴표로 제시된 두 문장 중 전자는 Russell의 판단이론을 겨냥한 듯하다. Russell에 따르면 판단주체는 대상 ab, 관계 R을 직접 대면한 뒤, ab에 대해 관계 R을 맺는다는 것을 심적 행위로써 판단한다. 복합기호 “aRb”는 이 심적인 판단의 내용을 단지 언어적으로 구현해낸 것일 뿐이다.

본 절 초입에서 살펴보았듯이 Wittgenstein은 이 설명에서 직접대면 단계로부터 판단이 형성되는 단계로 넘어가는 과정을 문제삼는다. 직접대면관계는 판단주체가 판단대상들로서 개별자 ab 및 보편자 관계 R 각각에 대해 맺는 관계인 데 반해, 판단관계는 세 항목이 통합된 aRb라는 복합체에 대해 판단주체가 맺는 관계이다. Russell에 따르면 세 항목이 bRa가 아니라 aRb로 통합되는 것은 각주8)에서 전술되었듯이 판단행위의 뜻이나 방향에 기인한다. Wittgenstein이 생각하기에 이는 해결되어야 할 문제를 전제로 삼는 격이다. 판단행위에서 그러한 뜻 내지 방향이라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부터가 설명되어야 하는데, Russell의 이론은 도리어 그것이 가능함을 가정하고 있는 셈이다. 뿐만 아니라 임의의 개별자가 직접대면 가능하다면 탁자, 펜 홀더, 책에 대한 직접대면으로부터 탁자, 펜 홀더, 이라는 판단으로의 이행을 막을 길이 없다. 이것이 왜 무의미한 판단인지를 설명할 방도가 Russell의 이론에는 없다. Russell 식의 판단행위에 의해 형성된 복합기호 ‘aRb’는 이렇듯 실재에 대해 아무런 설명력도 지니지 못한다.
이에 Wittgenstein의 전략은 우리가 유의미하게 인식하는 최소한의 원자적 단위를 Russell과 같이 직접대면되는 개별자 및 보편자 수준이 아니라, 그것들이 이미 결합되어 있는 사실의 수준으로 끌어올린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이 논고의 유명한 첫 구절 세계는 사실들의 총체이다가 말하는 바이다. 우리는 대상 ab, 관계 R을 각각 인식한 뒤 그것들이 어떠하다고 판단하는 게 아니라, aRb라는 사실 자체를 인식한다. 대상들 간 관계에서 순서가 어떠한지, 대상들의 단순한 집적이 왜 사실이 아닌지 등의 문제는 이미 이 단계에서 일소된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과 명제적 기호 간의 관계는 언어적인 그리기 관계 및 그에서 통용되는 언어적 규약에 의해 설명된다. 명제 기호를 구성하는 요소들 간의 관계가 사실이 어떠한지를 보여준다. 이것이 바로 인용문의 두 문장 중 두 번째 ‘(명제 기호의 구성 요소들인) “a”“b”에 대해 특정 관계를 맺는다는 것(즉 언어적 규약)aRb라는 것(사실이 어떠하다는 것)을 말해준다가 말하는 바이다. 요컨대 명제가 실재에 대해 여하한 설명력을 지닐 수 있는 것은, Russell이 말했든 판단행위의 뜻이나 방향에 기인하는 게 아니라, 명제 기호의 요소들이 배열되는 규약에 따른 그리기 관계에 기인한다.


물론 언어의 규약은 지금 통용되는 바와 달랐을 수도 있다. 일테면 고양이가 매트 위에 있다와 같이 쓰는 우리의 실제 표기법과 달리, 그와 동일한 것을 언어적으로 구현하는 데에 다음과 같은 표기법이 채택되었을 수도 있다


고양이

매트.

 

심지어 이와 동일한 사태를 표상하기 위해 아예 반대로 매트가 고양이 위에 있다는 표기법이 발전했을 수도 있다. 익숙하지 않기에 영 있을 성싶지 않은 일처럼 여겨지겠지만, 아랍어나 히브리어에서는 문장이 좌측에서 우측으로 써진다는 사실, 혹은 일본의 전통적인 표기법에서는 위에서 아래로 써진다는 사실 등을 생각해보면, 언어적 규약이 임의적이라는 점을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고찰에 따라 Wittgenstein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3.1431 명제적 기호의 본질은, 그것을 표기된 기호로서가 아니라 (탁자, 의자, 책과 같은) 공간적 대상들로 구성된 것이라 상상해본다면 보다 명료하게 드러난다.

 

혹여 공교롭게도 고양이가 매트 위에 있지 않다 하더라도, 그림에 그려진 공간적 사실의 지위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것은 단지 부정확한inaccurate 그림, 거짓된 그림인 것으로 판명될 뿐이다. 그 경우 실제 사물들은 그림이 나타내는대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순수하게 논리적인그림인 명제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렇듯 그림이론은 [명제의 참에 대한 대응론적인 관점임에도] 거짓 명제를 허용하는 데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림이론은 목록 문제를 해결하고자 고안되었다. 현재 통용되는 언어적 규약에 따르면 탁자, 펜 홀더, 이라는 일련의 기호는 문장이 아니며. 하나의 그림이 되는 데에 필수적인 구조를 갖춘 사실이 아니다. 이는 마치 세 항목을 표상하는 형상들이 단일한 그림으로 통합되지 않은 채 종이 위에 각기 독립적으로 그려져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런 식으로 배열된 물감 자국들이 적절한 그림이 아닌 이유가 그림에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규약 때문인 것처럼, ‘탁자, 펜 홀더, 이 문장이 아닌 이유는 현재 통용되는 언어적 규약 때문이다.] 고양이가 매트 위에 있다매트가 고양이 위에 있다처럼, 그리는 사실에서 관계의 방향을 구별하는 문제 역시 언어적 규약에 의해 해결되는바, 한국어에서 두 문장은 상반되는 것을 말한다는 규약이 두 문장을 구분해준다. 첫번째 문장은 하나가 다른 하나 위에 있음을 보여주는 반면, 두 번째 문장은 후자가 전자 위에 있음을 보여준다.

 

뜻의 한계the limits of sense. Wittgenstein논고의 첫 문장에서 세계는 사실들의 총체all that is the case이다라고 말한다. 세계는 (명제를 포함하여) 모든 사실들의 총체이다. 하나의 사실이란 하나의 대상이 한 속성을 갖는 것 혹은 복수의 대상이 관계를 맺는 것이다. f1, f2, f3 fn 등은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가능적인 사실possible fact들의 총체이고,11) p1, p2, p3 pn 등은 이 사실들에 대응하는 (참이거나 거짓인) 요소명제elementary proposition들의 총체라 해보자. 논의를 단순화하기 위해 현실을 다소 이상화하여, 실재reality 전체가 실제로 발생한happen to be the case 요소사실들로 이뤄져 있고, 따라서 참인 요소명제들에 의해 표상될 수 있다고 해보자. 여기서 근본적인 착상은, 논고가 말하는 세계Tractarian world에선 그 어떤 요소명제도 선험적이거나 필연적necessary이지 않다는 점이다. 각각의 요소명제들은 논리적으로 상호 독립적independent인바, 한 요소명제의 진리치는 다른 요소명제의 진리치와 무관하다.


11) (原註) Wittgenstein은 요소적인 사실elementary fact사태state of affairs(: Sachverhalt)’라 칭하였고, 그와 구분하여 복합적인compound 사실을 사실fact(: Tatsache)’이라 칭하였다.


그림이론은 원자명제atomic proposition 혹은 요소명제의 뜻 내지 진리-조건에 관한 이론이다. 요소명제는 그려진 요소pictured element들이 그림이 보여주는 바대로 존재할 경우 참이며, 그렇지 않을 경우 거짓이다. -원자적인non-atomic 명제 혹은 복합명제complex proposition를 포함하여, 일반적으로in general 모든 명제의 뜻 내지 진리-조건은 요소명제의 뜻 내지 진리-조건에 의해 결정된다. 이는 다음과 같이 두 단계로 나누어 이해해볼 수 있다.

첫 번째로, Wittgenstein은 문장 연결사에 대해 설명한다(이는 1장 말미에서 살펴본 바와 거의 똑같다12)). 모든 명제는 참이나 거짓 둘 중 하나이다. 임의의 명제 pl에 대해, ‘부정: pl [pl]’pl이 거짓인 경우 참이며 그렇지 않을 경우 거짓이다. 임의의 두 명제 plpk에 대해, ‘pl 그리고 pk [plpk]’plpk 양자가 참일 경우 참이며 그렇지 않을 경우 거짓이다. 이를 4.1과 같이 진리표truth-table형식으로 간명하게 나타낼 수 있다:

 

4.1 그리고[]’의 진리표

pl

pk

plpk

T

T

T

T

F

F

F

T

F

F

F

F

 

12) (原註) 다만 실제로 Wittgenstein논고에서 활용하는 진리-함수는 ‘N()’이라는 연산자 하나 뿐이다. 이 함수는 임의의 수의 명제들을 논항으로 취한다. ‘N(p1 pn)’는 모든 논항 p1 pn이 거짓인 경우 그리고 오직 그 경우에 참이다. 부정, 연언, 선언 등의 모든 진리-함수가 이러한 소위 공동 부정Joint Denial함수에 의해 정의될 수 있기에 이 연결사는 진리-함수적으로 적절하다truth-functionally adequate.


선언문의 진리치 역시 진리표로 제시될 수 있다. ‘pl 또는 pk [plpk]’plpk 양자가 거짓일 경우 거짓이며 그렇지 않을 경우 참이다. ‘pl 또는 (pk 그리고 부정: pm) [pl(pk&∼pm)]’과 같이 복수의 연결사들이 결합된 더욱 복잡한 형식의 진리치 역시 진리표 방법에 의해 나타내어질 수 있다(여기서는 명제논리에서 통용되는 일반적인 표기법에 따라 괄호를 사용하였지만, Wittgenstein의 표기법은 약간 다르다. 각주) 참조). 이러한 문장 연결사들에 의해 원자명제들이 결합되어 형성된 복합명제의 뜻이 바로 그것의 진리-조건이며, 이는 진리표에 의해 명확하게 나타내어질 수 있다. ‘그리고’, ‘또는’, ‘가 아니다등의 표현들은 사실의 영역에 있는 아무런 요소도 나타내지 않는다. 즉 문장 연결사들은 무언가의 이름이 아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실재 자체는 원자사실들의 방대한 집합체일 뿐이다.

두 번째로, Wittgenstein은 양화사에 대한 이른바 대입적(代入的)’ 해석‘substitutional’ account of quantifier을 제시한다. 원자명제는 한 대상이 특정 방식으로 존재한다(특정 속성을 갖는다)는 것, 혹은 복수의 대상들이 특정한 방식으로 존재한다(특정 관계를 맺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3, ‘직접대면에 의한 지식과 기술구에 의한 지식에서 살펴보았듯이] 일반화 문장이 표현하는 내용은 이러한 요소명제들에 의해 이미 제시되어 있어야 한다. 대상 o1, o2, on 등의 이름이 o1, o2, on 이라 해보자. 이 경우 보편 양화문 모든 대상은 빨갛다[(x)Rx]’(무한한) 연언문 o1은 빨갛고, o2는 빨갛고 on은 빨갛고 [Ro1Ro2& … Ron& …]’와 동치이며, 존재 양화문 어떤 대상은 빨갛다[(x)Rx]’는 선언문 o1이 빨갛거나, o2가 빨갛거나 on이 빨갛거나 [Ro1Ro2∨ … Ron∨ …]’와 동치이다. 양화사 역시 그리고’, ‘또는’, ‘가 아니다등의 문장 연결사들과 마찬가지로 단순히 표기법상의 편의장치notational convenience일 뿐, 실재 세계에 존재하는 아무런 대상도 나타내지 않는다.

논고에서 대상의 지위에 관해 언급할 사항이 있다. 현실에서 우리는 고양이를 대상으로 간주하는 데에 익숙하고 또 그것이 실질적으로도 유용하지만, 논고Wittgenstein에 따르면 고양이는 엄밀히 말해 대상이 아니다. 고양이는 더욱 단순한 요소들로 분해될 수 있기 때문이며, Russell이 제시한 바와 유사한 근거에서(3, ‘직접대면에 의한 지식과 기술구에 의한 지식절 참조), 이는 그 고양이가 이름(논리적 고유명)이 아니라 기술구라는 점을 보여준다. 진정한 대상이란, 우리가 그 본성을 인식하는 데에 아무런 장애물도 없어야 하기 때문에, 단순simple하여 더 이상 분해될 수 없는indestructible 것이어야 한다. 진정한 대상은 그 존재만으로도 단어의 의미를 보증해준다. 대상 및 그것들이 배열된 형태는 우리의 언어가 궁극적으로 관계를 맺는 것be ultimately about으로서, Wittgenstein의 표현을 빌자면 대상은 언어의 더듬이가 실재와 접촉하는지점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대상이라 여기는 사물들에 관한 일상적인 명제가, 진정한 대상에 명시적으로 관계하는 명제들로 어떻게 환원되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논리적 분석이 필요하다. 하지만 잘 알려진 대로 Wittgenstein은 정확히 무엇이 이러한 진정한 대상인지에 대해서는 명시적으로 개입하지 않는다. 혹시 보편자가 진정한 대상일까? 아니면 특정한 종류의 물질적인 원자인가? Wittgenstein은 아무런 답도 내놓지 않는다. (다만 스쳐 지나가듯이 몇몇 사례를 제시하였으며 그러한 대상들이 특정 속성을 필연적으로 갖는다고 추측하였다. 예를 들어 하나의 색깔 조각이라든가 음악에서의 한 등을 대상으로 간주할 수 있으며, 한 음의 경우 특정한 음높이pitch를 가져야만 한다.)

그림이론 및 이에 대해 앞서 설명한 것들에는 매우 많은 문제점들이 있지만, 여기서는 그것들을 피해 돌아가는 방식을 택하였다. 이로 인해 그림이론과 얽힌 쟁점들이 다소 흐려졌을 수도 있겠으나, 어쨌든 그 이론의 핵심 착상을 파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Wittgenstein이 궁극적으로 제시하고자 한 바는 뜻을-형성하는sense-making 모든 언어에 대한 하나의 모형model을 만드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곧 어떤 방식으로든 그 모형에 부합하지 않는 언어란 뜻을 전혀 갖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무의미한 언어의 사례 및 뜻의 한계에 놓인 명제의 사례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들 수 있다:

 

1  항진(恒眞)명제(동어반복 명제)tautology와 모순명제(항위(恒僞)명제)contradiction. ‘p 또는 부정: p [p∨∼p]’와 같이 모든 조건에서 참인true in all conditions 소위 항진문장은 세계가 존재하는 방식에 대해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p 그리고 부정: p [p&∼p]’와 같이 그 어떤 조건에서도 참일 수 없는 모순문장 역시 마찬가지이다. 두 문장은 뜻을 한계짓는limiting 사례들이다.

2  언어가 작동하는 방식을 설명하고자 하는 언어. 예컨대 그림이론 자체가 이러한 언어에 속한다. 한 언어가 다른 언어의 규약을 기술하는 데에 사용되는 일은 있을 수 있겠으나, 논리적 형식logical form 자체는 가능한 모든 언어에 공통적인 것이다. 논리적 형식 그 자체는 기술될 수 없다. 우리가 무언가를 묘사하고자 할 때 논리적 형식을 벗어날 수는 없다.” (4.041) 요컨대 논리적 형식은 형언될 수 없는ineffable 것으로서 모든 특정 표기법notation을 넘어서는 층위에 있다.

3  윤리적미학적종교적신비적인 가치를 진술하는 언어. 이러한 언어들은 세계 내에서 대상들이 배열된 우연적 사실들에 관해 무언가를 말하는 언어가 아니다.

 

이러한 언어들을 논의하는 단계에 이르러 Wiitgenstein사고를 한계짓기 위해 우리는 그 한계의 양 극단을 생각해보아야 한다는 유명한 말을 내뱉는다. 하지만 이러한 종류에 속하는 무의미nonsense한 언어(아니면 적어도 1번에 제시된 항진/모순명제)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왜냐하면 언어는 그것이 문자 그대로 말할 수 없는 것을 다만 보여줄 수는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논리학이나 그림이론을 배울 때, 혹은 가치에 대해 배울 때 우리는 분명 무언가를 배우긴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우리가 배우는 그것 자체를 말할 수는 없다. 언어는 아주 중요한 것들을 보여줄 수 있는 반면, 적절치 않은 데에 잘못 사용될 경우 언어는 우리를 혼란에 빠뜨릴 수도 있다.

Wittgenstein은 뜻을 한계짓는 종류의 무의미가 뜻을 결여한다: sinloss라고 표현한다. 이와 다른 종류의 무의미에 대해서는 무의미하다: unsinnig고 칭하는데, 이는 대략 자기-논박적이다self-defeating와 비슷하다. 이러한 더욱 심각한 종류의 무의미한 언어들 일부는 우리를 오도한다는 점에서, 뜻을 결여하는 언어들보다 더욱 위험하다.

 

4  비교적 덜 문제적인 종류의 무의미는 다음과 같다:

a  일반적인 문법에 반하는 문장: ‘Suzy Jane 그것 그것 그것’, ‘탁자 펜 홀더 책’.

b  문법적으로는 올바르게 형성되었지만 사전적으로lexicographically 문제 있는 어휘가 사용된 문장: “굴 때 낭끈한 오도와들은 팽돌하고 나사구하고 있었다.”

 

5  이에 비해 더욱 심각한 종류의 무의미는 다음과 같이 문법적사전적으로는 올바르지만 그림이론에 위배되는 언어들이다:

a  창백한 초록색 관념들이 사납게 잠자고 있다.”(Chomsky) “이 돌맹이는 비엔나에 관해 생각하고 있다.”(Carnap) 이러한 문장들의 문제는 정상적인 어휘들이 문법상 적형식으로 구성되었음에도, 적절한 뜻이 형성되지 못하는 방식으로 결합되었다는 점이다. 이 문장들은 하나의 적절한 그림을 형성하지 못한다. 이러한 문장들은 일견 정상적인 문장처럼 보이기에 그 무의미성이 교묘하게 은폐된다.

b  이 문장은 참이 아니다.’ 여기서 문제는 참이라고 말해질 수 있는 그림 내지 명제가 아무것도 없다는 점이다. ‘이 문장이라는 표현은 뜻을-형성하는 하나의 독립적인 문장을 지시하지 않는다.

 

Wittgenstein은 논리학이 천문학과 같은 여타 학문들과 동등한 층위에 있는 학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논리학은 사유의 전제조건으로서 모든 학문에 앞선다. 논리적 형식 자체가 형언 불가하기에 논리학은 본질적으로 말해질 수 없다. 또한 그는 철학에 관한 한 자신이 본질적인 모든 측면에서 철학적 문제에 대한 최종적인 해결책을 찾아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의 친구 Frank Ramsey1923년의 논평에서 지적한 사항을 몇 년 뒤 받아들임에 따라 Wittgenstein은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시인하게 된다.

 

이제 한편으로는 Wittgenstein前期 철학과 유사하되 절대적이거나 구도자스러운 면은 그보다 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Russell의 철학에 우호적인 스타일의 철학적 프로젝트를 살펴볼 차례이다. 바로 검증주의 철학Verificationist philosophy으로서 대표적인 두 인물 Alfred Jules AyerRudolf Carnap을 중심으로 그 이론을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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