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 옥스퍼드 Intro 1
사이먼 블랙번 지음, 고현범 옮김 / 이소출판사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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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에 붙은 부제 그대로 꽤나 매력적인 철학 입문서이자 교양서이다. 전문적이고 기술적인 언어보다는 최대한 일상언어를 사용하여 철학적 논제나 쟁점들을 흥미롭게 논의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필요에 따라 철학자들의 1차문헌들을 인용하고 그 핵심을 논증적으로 대강 재구성한 뒤, 다소 일반적인 관점(때로는 저자 고유의 관점)에서 해설, 분석, 비판 및 평가하는 등, 기초적이고 정석적인 철학적 사항들 역시 놓치지 않고 평이한 문체로 잘 풀어낸다. 전문적인 용어들로 다소 교과서적이고 정통적으로 서술된 입문서를 찾는 사람이라면 조금 의아하거나 지겹다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외려 그런점 때문에 철학에 쌩 초보자인 사람들에게는 더욱 접근성이 높을 것 같다. 정 고민된다면 서문만을 읽어보아도 이 책이 자신에게 필요한 책인지, 자신이 읽어낼 만한 책인지 여부를 판가름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서문이 많이 인상깊었다. 


 다소 비슷한 성격의 책으로 존 호스퍼스라는 사람의 "철학적 분석 입문"이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이 책과 유사하게 철학의 하위 분야 및 주제들에 따라 철학적 논의들을 풀어가는 입문서인데, 내용의 난이도는 이 책과 비등하되 서술 측면에서는 살짝 더 전문적이고 교과서적이었던 듯하다. 철학에 전연 문외한인 사람이 입문서를 추천해달라 요청한다면, 그러면서도 철학사를 통한 입문이 아니라 철학의 하위 분야별 내지는 큰 테마별로 서술된 책을 바란다면, 거리낌 없이 이 책과 호스퍼스의 책을 추천해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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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프랑스 현대철학 처음 읽는 철학
철학아카데미 엮음 / 동녘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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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단점이 상당히 얽혀 있는데, 입문자든 숙련자든 학술서로서보다는 교양서로서만 읽기를 추천하고픈 책이다. 우선 구어체로 평이하게 쓰였다는 점은 가뜩이나 복잡하고 어려운 현대 대륙철학에 대한 입문서로서의 점수를 올려주는 장점이다. 각 철학자들을 연구한 비교적 신흥 학자들 복수가 한 철학자씩 도맡았다는 점 역시 글의 전문성과 접근성을 다소 높여주는 듯하다. 블랑쇼, 크리스떼바, 바디우 등 정통적인 현대철학사 서적에서는 보기 힘든 인물들이 소개되고 있다는 다양성도 나름 신선한 장점이다. 반면 대륙 현대철학이 대체로 고중세 및 근대 철학과의 대결 내지 비판적 계승이라는 쟁점을 두고 전개되기에, 철학적 지식이 전무한 쌩 초보자가 읽기에는 분명 무리가 있다. 그렇다고 철학사에 다소 숙달된 독자들이 읽기에는, 제시되는 내용이 파편적이거나 부분적인 경우가 있어 통일되고 탄탄한 그림을 얻어가지 못해 읽는 소득이 적다고 느낄 공산이 커보인다. 그러니 초심자든 숙련자든 너무 많은 욕심을 내지 말고, 현대 프랑스 철학이 배태된 문제의식의 단초를 가볍게 맛본다는 마음가짐으로 읽는 편이 좋겠다. 이에 구매소장은 딱히 권하지 않으며, 빌려 읽거나 중고 매물을 저렴하게 구매해서 읽어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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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명제적 태도

 

외연성에 대한 再考

 

외연성 원리는 대체성 원리와 매우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2, ‘대체성과 외연성참조). 이 원리는 다음과 같다:

 

() 복합문장의 일부로 나타나는 임의의 부분문장에 대해, 그 문장을 그와 동일한 진리치를 갖는 다른 문장으로 대체replace하여도, 복합문장 전체의 진리치는 변하지 않는다.

() 문장에 나타나는 임의의 술어에 대해, 그 술어를 그와 동일한 외연을 갖는 다른 술어로 대체하여도, 문장 전체의 진리치는 변하지 않는다.

() 문장에 나타나는 임의의 단칭용어에 대해, 그 단칭용어를 그와 동일한 지시를 갖는 다른 단칭용어로 대체하여도, 문장 전체의 진리치는 변하지 않는다.

 

외연성 원리는 매우 직관적이다. 단칭용어에 대해 말하고 있는 ()을 생각해보자: 특정 대상이 특정 술어를 만족한다satisfy는 것을 한 문장이 말하고 있고, 다른 문장 역시 동일한 대상이 동일한 술어를 만족한다 말하고 있다면, 전자가 참인 경우 후자 역시 분명 참이며 전자가 거짓인 경우 후자 역시 분명 거짓이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1) 파리Paris는 비엔나보다 북쪽에 있다.

(2) ‘파리프랑스의 수도-지시적co-referential이다.

(3) 프랑스의 수도는 비엔나보다 북쪽에 있다.

 

(1)이 실제로 참이든 아니든, (2)에 따르면 (1)(3)은 동일한 진리치를 갖는다. 다음 사례에서 볼 수 있듯 술어에 대해 말하고 있는 () 역시 마찬가지이다:

 

(4) 이 금붕어는 췌장을 갖고 있다.

(5) ‘𝛼는 췌장을 갖고 있다‘𝛼는 비장을 갖고 있다-외연적co-extensive이다.

(6) 이 금붕어는 비장을 갖고 있다.

 

(5)가 참이라고 가정한다면, (4)(6)의 진리치는 반드시 동일해야만 한다(, 진리치 동일성은 의미의 동일성과 다르다는 점에 유의하라).

그런데 우리의 언어에는 -외연적인 표현 혹은 대체성이 성립하지 않는 표현이 존재한다. 가령 ()에 대한 가장 단순하고 명백한 반례(反例)counterexample때문에because라는 문장 연결사이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7) 그 개가 짖었기 때문에 그 고양이는 가르랑거렸다.

(8) 파리는 프랑스의 수도이기 때문에 그 고양이는 가르랑거렸다.

 

(7)이 참이라고 가정해보자. 따라서 각 부분문장인 그 고양이는 가르랑거렸다그 개는 짖었다는 참이다. 하지만 (7)에서 그 개는 짖었다를 그와 마찬가지로 참인 파리는 프랑스의 수도이다로 대체한 (8)은 거짓이다.

 

 

지시적 불투명성, 그리고 태도에 대한 Frege의 견해

 

이제 다음 문장을 보자:

 

(9) ‘금성은 두 글자로 이루어져 있다.

 

금성개밥바라기는 동일한 대상 금성을 지시하는 각기 다른 이름이다. 하지만 이 사실로부터 다음을 추론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10) ‘개밥바라기는 두 글자로 이루어져 있다.

 

(9)와 달리 (10)은 거짓이다. Frege의 설명에 따르면, (9)의 초입에 나타나는 단칭용어는 행성 금성을 지시하는 게 아니라 언어표현 금성을 지시한다. 즉 그것은 행성 금성의 이름이 아니라 금성의 이름의 이름인바, “‘금성’”은 금성이 아니라 금성을 지시한다.1) (9)에서 “‘금성’”이 나타나는 이러한 자리는 지시적으로 투명referentially transparent하지 않고 지시적으로 불투명하다referentially opaque. 이름 금성이 이렇게 지시적으로 불투명한 자리에 삽입되면, 금성을 지시한다는 통상적인 역할[즉 지시적으로 투명한 자리에서 수행했을 역할]을 수행하지 않는다. 다음과 같은 맥락

 

(11) ‘ 은 두 글자로 이루어져 있다.

 

에서 -외연적 표현들 간의 대체가 허용되지 않는 것은 바로 지시적 불투명성에 기인한다. 즉 이러한 맥락은 -외연적non-extensive이다. (9)와 같은 맥락에서 나타나는 금성은 금성을 지시하지 않는다. 어떤 언어표현이 (11)과 같은 맥락의 공란에 삽입되면, 인용부호quotation marks와 결합됨으로써 [그 표현의 지시체에 대한 이름이 형성되는 게 아니라] 그 표현 자체를 지시하는 이름이 형성되며, 문장 전체는 [그 표현의 통상적인 지시체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 표현의 이름에 관해 무언가를 말하게 된다.


1) 본문에서 인용부호가 두 번 사용되었다는 점에 유의하라. (9)는 금성의 이름인 금성사용하고 있는 반면, 본문은 (9)에서 사용된 그 이름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금성은 금성을 지시하는 이름이고 “‘금성’”은 금성을 지시하는 이름인 금성을 지시하는 이름이다. 전자는 세계에 존재하는 대상을 지시하는 언어표현이고 후자는 언어표현 자체를 지시하는 언어표현이다.


하지만 (11)과 미묘하게 다른 다음과 같은 맥락은 지시적으로 투명하다:

 

(12) 은 두 글자로 이루어져 있다.

혹은 다음 맥락 역시 마찬가지이다:

 

(13) 𝛼는 두 글자로 이루어져 있다.2)


2) 가령 다음을 보자: 


  (a) ‘미당은 두 글자로 이루어져 있다

  (b) ‘미당’ = 서정주의 호 

  (c) 서정주의 호는 두 글자로 이루어져 있다


(a)는 참이다. 그리고 미당은 미당 즉 시인 서정주를 지시하는 반면, “‘미당’”은 서정주의 호인 미당을 지시한다. 따라서 (b)는 참이다. 이제 (a)에서 인용부호가 포함된 표현 “‘미당’”을 그와 -지시적인 서정주의 호로 대체한 (c) 역시 참이다.

 

Frege는 지시적 불투명성이 (11)과 같은 직접인용 맥락에서뿐만 아니라, 간접인용indirect quotation 맥락 및 믿음과 같은 명제적 태도와 연관된 표현에서도 드러난다고 지적하였다. 2에서 살펴보았던 관점을 잠시 되살려보자. 먼저 다음과 같은 간접인용 맥락의 사례를 생각해보자:

 

(14) Adam은 금성이 행성이라고 말했다said that Venus is a planet.

(15) Adam은 개밥바라기가 행성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다음은 참이다:

 

(16) 개밥바라기 = 금성.

 

하지만 (16)이 참임에도, 만약 Adam개밥바라기에 대해 일절 들어본 바가 없어 (16)이 참임을 모른다면, 그 경우 (14)(15)는 분명 동시에 참일 수 있다. 심지어 Adam(16)이 참임을 알더라도, 어쨌든 그가 (14)에서 기술된 대로 말했다 해서 개밥바라기가 행성이라고 말했다 할 수는 없다. 이러한 -외연적 맥락은 보통 -내포적 맥락hyper-intensional context이라 칭해진다. 그런 명칭이 붙게 된 이유는 잠시 뒤에 살펴보게 될 것이다.

명제적 태도가 나타내어지는 다음과 같은 맥락 역시 -내포적이다:

 

(17) Adam은 금성이 행성이라고 믿는다believe that.

(18) Adam은 개밥바라기가 행성이라고 믿지 않는다.

 

이 두 문장을 참이게 하면서 Adam이 합리적이라고 간주할 수 있으려면 우리는 Adam(16)이 참임을 모른다고 가정해야 한다. 그래야만 (17)(18)이 동시에 참일 수 있게 된다. 이 대목에서 Frege가 제시하는 설명에 따르면

 

(19) 금성이 행성이라는 것that Venus is a planet

 

이라는 일련의 표현은 [명제를 표현하는] 온전한 문장이 아니라, ‘금성은 행성이다라는 문장의 뜻 즉 그 문장이 표현하는 명제를 지칭하는 단칭용어이다. ‘라는 것that이라는 단어가 온전한 문장에 결합되어 형성된 일련의 명사절 전체는 결합된 문장의 뜻을 지시하는 단칭용어로 전환된다. (19)가 지칭하는 뜻은 다음 명사절

 

(20) 개밥바라기가 행성이라는 것

 

이 지칭하는 뜻과 다르다. 왜냐하면 [Frege의 뜻-지시 구분에 따르면 금성개밥바라기-지시적이긴 해도 그 뜻을 달리하기에, 그것들이 나타나는] ‘금성은 행성이다개밥바라기는 행성이다가 각기 다른 명제 즉 각기 다른 뜻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맥락

 

(21) Adamα가 행성이라고 믿는다.

 

는 지시적으로 불투명하다. 다르게 말하면 (21)에 단칭용어가 삽입됨으로써 형성된 문장 전체의 진리치는 그 단칭용어에 의해 지시되는 대상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Frege에 따르면 그러한 문장의 진리치는 삽입되는 단칭용어의 뜻에 의해 결정된다. 이를 일반화하자면, 임의의 문장 S에 대해

 

(22) AdamS라고 믿는다believe that S.

 

라는 맥락은 지시적으로 불투명하다. 이러한 맥락은 -내포적이다. 물론 Adam에게 특별한 초능력이 있어서 (22)-내포적인 것은 아니다. 좀 더 정확하게 일반화하자면, 임의의 믿음-주체 α와 임의의 문장 S에 대해

 

(23) αS라고 믿는다.

 

라는 맥락은 S를 대체하는 문장의 측면에서 지시적으로 불투명하다. 하지만 직접인용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이와 미묘하게 다른 다음 맥락

 

(24) αβ를 믿는다.

 

는 통상적이고 외연적인 관계를 나타내는 단순한 2항관계로서, 그 관계가 단지 믿음관계일 뿐이다. ((23)(24)(11) (12)와 비교해보라.)

따라서 Frege가 보기에 불투명 맥락 (23)(11)과 매우 유사하다. (11)의 공란에 지시적 용어가 채워지면 그 용어의 지시체에 관해서가 아니라 그 용어 자체에 관해 무언가를 말하는 문장이 형성된다. 삽입되는 용어 자체에 관한 문장이 얻어지지 않는다는 점만을 제외한다면 (23) 역시 이와 마찬가지로서, (23)의 각 공란이 채워지면 명제태도의 주체와 하나의 명제 즉 삽입된 문장의 에 관해 무언가를 말하는 문장이 형성된다.

뿐만 아니라 Frege에 따르면 (17)과 같은 문장은 금성 내지 개밥바라기라는 행성을 지시하는 표현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 그 문장은 Adam금성은 행성이다에 의해 표현되는 명제를 지시하며, 전자가 후자를 믿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비록 그 명제의 구성요소[금성의 뜻][외연적인 맥락에서라면] 금성을 결정하지만, 그 명제를 가리키는 단칭용어인 (19)에서는 그 어떤 단칭용어도 금성을 지시하지 않는다.

이러한 Frege의 관점은 우리의 직관에 부합한다. 왜냐하면 다음과 같은 문장이 주장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25) Le VerrierVulcan이 수성보다 작다고 믿었다.

 

Vulcan은 실존하지 않지만 그래도 이 문장은 참이다. 따라서 믿음-연산자belief-operator가 포함된 문장의 진리치는, 그 연산자의 범위(영향권)scope 내에 있는 단칭용어가 통상적으로 가리키는 대상customary object[즉 믿음 연산자 외부에서 가리켰을 대상]을 지시하는지 여부와 무관하다. 오직 필요한 것은 명사절(라는 것-)that-clause(또는 문법학자들이 말하는 간접절indirect clause)이 한 명제를 짚어내는가 여부일 뿐이다. (25의 경우 이 요건은 다음과 같이 충족된다: ‘Vulcan’이 대상을 지시하는 데에 실패하기에 ‘Vulcan은 수성보다 작다는 진리치를 결여하지만, 이 문장은 그럼에도 하나의 뜻 즉 명제를 표현하며, (25)Le Verrier가 그 명제를 믿었음을 말하고 있다.

 

 

추가적인 논의: -내포적 맥락의 다중 삽입

 

고양이 한 마리가 매트 위에 있는 모습을 상상해보자. 이 사태를 CM이라 칭하자. 이제 특정 관점에서 CM을 그린 그림을 떠올려보라. 그 그림은 CM을 특정한 방식으로 묘사한다(여기서 방식은 명제의 뜻과 유사하다 [그림이 한 사태를 특정 관점에서 묘사하듯이, 명제 역시 하나의 사태를 특정 관점에서 제시한다. Frege적 뜻이란 지시체가 제시되는 방식 내지 지시-결정 규칙임을 상기할 것]). 이 그림을 P1이라 하자. 이제 P1을 또다시 그린 그림. CM의 그림에 대한 그림인 P2를 떠올려보라. P2P1을 특정한 방식으로 묘사하며 그에 따라 CM을 특정한 방식으로 묘사할 것이다. 이러한 절차는 P3, P4 등으로 계속 이어질 수 있으며 원래의 사태 CM을 묘사하는 방식들은 그에 따라 다층적multiple으로 겹치게 될 것이다. 하지만 P1에 포함된 정보는 그 과정에서 (모든 그림들이 매우 이상적이고 완전하게 그려졌다고 가정한다면) 원리적으로 소실되지 않는다. 모든 그림들의 연쇄에서 그 어떤 것을 골라잡아도, P1에 포함된 정보인 원래의 사태 CM을 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구조는 Frege가 명제에 관한 명제, 혹은 명제에 관한 명제에 관한 명제 등에 대해 생각했던 방식과 매우 유사하다. Frege가 생각하기에 주어진 어떤 용어가 한 문장의 진리치를 결정하는 데에 기여contribution하는 방식은, 그 용어가 문장에서 내포적인 혹은 -내포적인 연산자의 영향권 내에 삽입되는지 여부에 따라 달라진다. 우선 외연적 맥락의 경우 문장의 진리치에 영향을 미치는 실체entity는 용어의 통상적인 지시체ordinary referent이다. 반면 -내포적인 맥락의 경우 문장의 진리치와 유관한 실체는 Frege가 칭한바 용어의 간접지시체“indirect” referent로서, 이는 용어의 통상적인 뜻ordinary sense[즉 외연적 맥락에서 표현되는 뜻] 이다. 다소 느슨하게 말하자면 용어의 지시는 맥락에 따라 전환shift되며, 지시가 전환되는 단계는 다음과 같이 더욱 높은 수준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

 

(26) Don Ho가 가수라는 것을 Adam이 믿는다는 것을 Dudley는 믿는다.

Dudley believes that Adam believes that Don Ho is a singer.

 

(17) ‘Adam은 금성이 행성이라고 믿는다와 같은 경우를, 한 용어의 간접적 뜻indirect sense과 간접 지시를 갖는 것으로서 -내포적 삽입hyper-intensional embedding 유형-1이라 칭한다면, (26)2 간접적 뜻과 2차 간접 지시를 갖는 것으로서 -내포적 삽입 유형-2라 할 수 있다.

아래의 8.1-내포적 맥락이 이렇게 다중적으로 삽입되는 단계를 단칭용어 ‘Don Ho’를 예시로 삼아 나타내고 있다. 식별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꺾쇠괄호가 의 뜻을 나타낸다고 하자. 가령 Don Ho= ‘Don Ho’의 뜻이며, 〈〈Don Ho〉〉 = “‘Don Ho’의 뜻의 뜻이다. 따라서 Don Ho[외연적 맥락에서 직접 지시체로서] Don Ho를 결정하며, 〈〈Don Ho〉〉[-내포적 맥락에서 간접 지시체로서] Don Ho를 결정한다(그리고 〈〈〈Don Ho〉〉〉[2-내포적 맥락에서 2차 간접 지시체로서] 〈〈Don Ho〉〉를 결정한다). 화살표는 연결된 각 항목이 동일한 실체로서 반복되고 있음을 나타낸다:

 

8.1 세 층위 맥락에서 한 용어의 뜻과 지시

외연적 맥락

 

-내포적 맥락 유형-1

 

-내포적 맥락 유형-2

(통상적) 지시체

Don Ho

 

 

 

 

(통상적)

Don Ho

(간접) 지시체

Don Ho

 

 

 

 

(간접적)

〈〈Don Ho〉〉

(2차 간접) 지시체

〈〈Don Ho〉〉

 

 

 

 

(2차 간접적)

〈〈〈Don Ho〉〉〉

 

표에서 첫 번째 세로열은 ‘Don Ho는 가수다와 같은 보통의 외연적 맥락을 나타낸다. 이 맥락에서 용어 ‘Don Ho’는 통상적인 뜻 Don Ho를 표현하며, 이 뜻은 그 용어의 통상적 지시체로서 Don Ho를 결정한다(실제로 Don Ho는 히트곡 Tiny Bubbles를 부른 하와이 출신 가수였다). 두 번째 열은 ‘AdamDon Ho가 가수라고 믿는다와 같은 -내포적 맥락 유형-1을 나타낸다. 외연적 맥락에서 ‘Don Ho’의 통상적 이었던 Don Ho가 이 맥락에서는 그 용어의 간접 지시체가 된다. [그리고 이 간접 지시체를 결정하는 것은 간접적 뜻인 〈〈Don Ho〉〉이다.] 세 번째 열은 (26)과 같은 -내포적 맥락 유형-2를 나타내는바, 2차 내포맥락에서 간접적 뜻이었던 〈〈Don H〉〉가 이 맥락에서는 그 용어의 2차 간접 지시체가 된다. [그리고 이를 결정하는 것은 2차 간접적 뜻인 〈〈〈Don Ho〉〉〉이다.] 한 문장 내에서 라고 믿는다와 같은 명제태도 연산자가 무한히 반복되면서 그 영향권 내부에 동일한 용어가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한 용어가 -내포적 맥락에 다중적으로 삽입되는 이러한 절차는 원리상 무한히 계속될 수 있다. 따라서 ‘S라고 B가 믿는다는 것을 C가 믿는다는 것을 가 믿는다는 것을 A는 믿는다A believes that B believes that C 등과 같이 계속 이어질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을 이번 의 초입에 살펴보았듯 한 주제를 그린 그림을 그린 그림을 그린 그림처럼 생각해볼 수 있다. 여기서 최초 단계에 그려지는 주제는 통상적인 지시체에 해당할 것이다.

 

 

대물적 필연성과 대언적 필연성

 

한 가지 중요한 종류의 -외연적 맥락은 필연적(必然的)으로necessarily와 같은 양상적(樣相的) 부사modal adverb에 의해 조성된다. 앞서 우리는 이 주제를 간단히 살펴본 바 있다(5, ‘필연성, 가능성, 가능세계6, ‘자연종 용어와 본질에 관한 Putnam의 견해). 앞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수학적 진리가 필연적 진리라는, 즉 달리 될 수 없었던could not have been otherwise 진리라는 관점을 택하기로 한다. 이제 다음을 보자:

 

(27) 필연적으로, 23보다 작다.

Necessarily, two is less than three.

 

[수학적 진리는 필연적으로 참이므로] 이는 참이다. 그리고 화성은 PhobosDaimos라는 두 개의 위성을 거느리고 있다. 그러므로 단칭용어 화성의 위성의 개수‘2’는 동일한 지시를 갖는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에 근거하여 (27)로부터 다음을 추론할 수는 없다:

 

(28) 필연적으로, 화성의 위성의 개수는 3보다 작다.

Necessarily, the number of Martian moons is less than three.

 

물론 화성이 셋보다 적은 수의 위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는 단지 우연적(偶然的)인 사실contingent fact로서, 화성은 지금보다 더 많은 수의 위성을 거느리고 있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필연적으로라는 표현은 -외연적인 맥락을 만들어내는 셈이다. [(27)의 일부를 그와 -지시적인 용어로 대체하였는데도 진리치가 유지되지 않기 때문이다.]

한 가지 유의할 사항은, ‘필연적으로와 같은 양상적 부사가 조성하는 맥락이 -내포적이지는 않고 [단순] 내포적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전문적인 구분을 굳이 도입하는 이유는, 양상적 부사가 작동하는 방식이 명제적 태도를 나타내는 동사의 작동방식만큼 까다롭고 섬세하지는 않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예시를 통해 양자를 비교해보자: 모든 캥거루가 캥거루라는 것은 필연적으로 참이다. [즉 가능세계 해석을 따르자면 모든 캥거루는 캥거루이다는 모든 가능세계에서 참이다.] 따라서 Samuel Beckett1906년에 태어난 가능세계들과, Beckett1906년에 태어났고 모든 캥거루가 캥거루인 가능세계들은 정확히 동일한 세계들이다. [전자가 참인 모든 세계들에서는 후자 역시 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Beckett1906년에 태어났는지를 궁금해 한다고 해서 모든 캥거루가 캥거루인지 여부까지 궁금해 하지는 않을 것이다. [요컨대 어떤 두 문장의 양상적 진리치가 일치하는 세계가 동일하다고 해도, 양자에 대한 명제적 태도는 분명 다를 수 있다.] 문장들 간에 나타나는 의미론적 차이가 문장들이 지닌 내포적 진리치intensional truth-value간의 차이에 반영되지는 않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단순 내포적 맥락에서의 진리치 동일성이 -내포적 맥락에서의 의미 동일성을 함축하는 것은 아니다.]3)


3) 단순 내포적 맥락과 -내포적 맥락 간의 차이를 요약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진리치 보존적인 대체가 허용되기 위해 전자에서는 양상적으로 동일한 지시(즉 진리치외연지시체)를 갖는 표현들로 대체되어야 하고, 후자에서는 동일한 의미(Frege적인 뜻)를 갖는 표현들로 대체되어야 한다. (반면 외연적 맥락에서는 현실세계에서 동일한 지시를 갖는 표현들로 대체되어야 한다.) 


이렇듯 (28)은 거짓이다. 그런데 이번엔 다음 문장을 보자:

 

(29) 2는 필연적으로 그것3보다 작은 그러한 것이다.

Two is such that necessarily it is less than three.

 

Quine(그에 대해서는 10에서 더욱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27)에서 (29)로의 이행을 수출exportation이라 칭한다. (29)에서 대명사 그것의 지시는 앞서 나타난 ‘2’에 의해 공급되지만, ‘2’와 다르게 그것은 내포적 부사 필연적으로의 범위 내부에 나타난다. (27)(29)는 각각 대언적(對言的)de dicto 양상진술(말해진 것에 관해of things said 양상성을 귀속시키는 진술)대물적(對物的)de re 양상진술(사물에 관해of things 양상성을 귀속시키는 진술) 간의 구분을 예시해준다.4)5)


4) ) “라틴어 어원적으로 ‘dicto’는 말 내지 언어를 뜻하며 ‘re’는 대상 내지 사물을 뜻하므로, 대언적 필연성을 언어적 혹은 명제적 필연성이라 부르고, 대물적 필연성을 존재적 혹은 대상적 필연성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김영정, 언어, 논리, 존재: 언어철학, 논리철학 입문, 철학과현실사, 1999, 45.)

) “대언적 필연성de dicto necessity 개념은 전통철학에서든 현대철학에서든 한결같이 중요하다고 인정된 구분인 대언적 필연성과 대물적 필연성de re necessity 간의 구분을 환기한다. 전자는 명제가 지닌 속성으로서의 필연성 개념으로서, 명제의 술어로 붙일 수 있는 속성 중에는 양상적 속성 즉 필연적으로 참이 됨이라는 속성이 있다는 것이다. 후자는 대상이 지닌 속성으로서의 필연성 개념으로서, 대상이 어떤 본질적 혹은 필연적 속성을 가진다는 생각이다. 명제 내에서 지시된 대상이 여차여차한 속성을 본질적필연적으로 지닐 때, 그 명제는 대물적 양상성을 표현한다. (中略) 대언적/대물적 양상 간의 구분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대언적 양상을 표현하는 명제는 어떤 다른 명제가 양상적 진리치를 갖는다고 기술한다. 반면 대물작 양상을 표현하는 명제는 어떤 대상이 어떤 속성을 필연적본질적으로 예화한다고 기술한다.” (Anthony Clifford Grayling, 철학적 논리학 입문An Introduction to Pilosophical Logic(3, 1997), 이윤일 , 선학사, 94-5, 볼드체는 원저자의 것.)

* “대언성/대물성 구분을 명확히 보여주기 위해 이따금 Thomas Aquinas가 들었던 예가 사용된다. Aquinas-이교도 大典에서 인간 의지의 자유가 신의 예지(豫知)와 모순되는지 여부를 고찰하면서 이 구분을 도입한다. 신이 시점 t2에 앉아있는 Aristoteles를 그보다 이전 시점인 t1에 본다고 해보자. 이러한 가정 하에서 앉아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필연적으로 앉아있다가 참이라고 할 경우, Aristoteles는 시점 t2에 반드시 앉아있을 수밖에는 없는 것처럼 여겨진다. [즉 신의 예지를 가정한다면 결정론이 참인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결론이 도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Aquinas는 여기서 대물성-대언성 구분을 사용한다. 위 문장이 대언적 양상성을 표현하는 것으로 해석된다면, 앉아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 그 무엇이 되었든 그것이 앉아있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참이다로 해석된다면, 이는 참이다. [‘은 필연적으로 참이다를 제외한 명사절로 취해진 문장은 임의의 x에 대해, xF하다면 xF하다[(x)(FxFx)]’ 형식으로서 논리적으로 참이며, 논리적으로 참인 문장은 필연적으로 참이기 때문이다(여기서 αF한 것으로 보인다αF하다가 동일한 술어로 간주되는 것은 신의 전지성에 근거한다).] 반면 위 문장이 앉아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 그 무엇이 되었든 그것은 필연적본질적으로 앉아있다는 속성을 갖는다로 해석된다면, 이는 거짓이다. Aquinas에 따르면 결정론을 옹호하는 논증은 위 문장에 대한 대물적 해석이 참인 경우에만 타당하다. 따라서 결정론이 신의 예지로부터 자동적으로 따라나온다는 논제는 거짓이다.” (A. C. Grayling, 같은 책, 95, 내용 일부 수정.) 

5) 자연언어로 표기된 양상문에서는 필연성 부사가 취하는 영향권이 명확하지 않아 대언적/대물적 양상성 구분이 모호하다. 양화논리에 두 가지 양상 연산자 필연적으로[]’가능적으로[]’가 도입된 양화양상논리의 문장을 비교해보면 대언적/대물적 양상성이 더욱 명료하게 구분될 수 있다.

우선 세 개의 가능세계 W1, W2, W3가 존재하고, 각 세계 내에는 빌딩 a, b, c라는 세 개체들만이 존재한다고 가정하자. 그리고 개체/술어상항에 대한 해석함수 I를 활용하여 다음과 같이 간략화된 해석을 가정하자:


() I(a) = a, I(b) = b, I(c) = c.

() I(H) = {W1|a}, {W2|b}, {W3|c}.

 

()는 모든 가능세계에서 개체상항 ‘a’, ‘b’, ‘c’에 대해 지시체를 할당하고 있고, ()는 술어상항 ‘H’에 대해 각 가능세계에서 그 술어를 만족하는 개체상항을 명시하고 있다. 직관적인 이해를 위해 술어 ‘Hα를 자연언어에서 α는 가장 높은 빌딩이다에 해당한다고 하자. 따라서 위 해석에 따르면 가령 W1에서 1항 원자문장 ‘Ha’는 참이지만 ‘Hb’‘Hc’는 거짓이다. 마지막으로 보편/존재 양화사는 緖論에서 살펴본 대로 통상적인 양화논리의 의미론에 따라 해석하고, 양상성 연산자 5에서 살펴본 다소 간략한 가능세계 의미론에 따라 각각 는 모든 가능세계에서 참이다는 어떤 가능세계에서/적어도 하나의 가능세계에서 참이다로 해석한다.

이제 다음 두 문장을 보자:

 

() (x)Hx.

() (x)Hx.

 

채택된 해석에 따라 각 문장의 진리조건을 명시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의 경우 에 대한 해석에 따라 존재 양화문 ‘(x)Hx’가 모든 가능세계에서 참이어야 한다. ‘(x)Hx’가 모든 가능세계에서 참이기 위해서는 존재 양화사의 해석에 따라 개방문 ‘Hx’를 만족하는 개체가 각 가능세계에 적어도 하나씩 존재해야 한다. 해석 ()에 따르면 ‘Hx’를 만족하는 개체가 각 가능세계마다 적어도 하나씩 존재하므로(즉 각 가능세계마다 가장 높은 빌딩들이 각기 존재하므로), 최종적으로 이 해석 하에서 ()는 참이다.

그 다음 ()의 경우 존재 양화사의 해석에 따라 개방문 Hx’를 만족하는 개체가 현실세계에 적어도 하나 존재해야 한다. 편의를 위해 W1를 현실세계라 한다면, W1에 존재하는 세 빌딩 중 적어도 하나가 Hx’를 만족해야 하는 셈이다. 이를 위해서는 의 해석에 따라 모든 가능세계에서 ‘Hx’를 만족하는 개체가 W1에 적어도 하나 존재해야 한다. 모든 가능세계에서 ‘Hx’를 만족하는 그러한 개체가 W1에 존재하지 않으므로(즉 모든 가능세계를 통틀어 가장 높은 동일한 하나의 빌딩이란 W1에 존재하지 않으므로), 최종적으로 이 해석 하에서 ()는 거짓이다.

두 문장의 진리조건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에서는 각각 대언적/대물적 양상성이 드러난다. 전자는 ‘(x)Hx’라는 문장 내지 명제에 대해 필연적으로 참이다라는 대언적 양상성을 귀속시키고 있고, 후자는 세계 내의 개체와 속성에 대해 ‘x는 필연적으로 H하다라는 대물적 양상성을 귀속시키고 있다. 일반적으로 양상성 연산자가 양화사보다 넓은 범위를 취할 경우 대언적 양상성이 표현되고, 그 반대일 경우 대물적 양상성이 표현된다. 자연언어로 양상문을 표기할 경우 양화사가 없더라도 양화양상논리 형식문의 이러한 구문론적 특성과 대응되도록 대언적 문장은 필연적으로, aF하다, 대물적 문장은 ‘a는 필연적으로 F하다(필연적으로 F한 그러한 것이다)’와 같은 식으로 통일하였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29)에서 용어 ‘2’는 필연성 연산자의 영향권 외부에outside the scope 있다. (27)에서 내포적 자리에 있던 ‘2’(29)에서는 [Quine식 수출작용에 의해] 외연적 자리로 옮겨진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지시적인 표현에 의해 진리치 보존적으로 대체될 수 있는 자리로 옮겨졌다.] 그리고 2 = 화성의 위성의 개수이므로, (29)로부터 다음을 추론할 수 있다:

 

(30) 화성의 위성의 개수는 필연적으로 3보다 작은 그러한 것이다.

The number of Martian moons is such that necessarily it is less than three.

 

(28)과는 달리, 그리고 (29)와 마찬가지로, 이 문장은 참이다. 이 문장이 말하고 있는 바는, 화성이 거느린 위성의 개수(혹은 Charles 왕자의 귀의 개수와 같이 원하는 그 무엇이라 칭하든)2를 고려하건대, 그 대상이 필연적으로 3보다 작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수출작업은 한 용어가 지닌 개념적 내용conceptual content, 그 용어가 지시하는바 개념적 내용이 제거된 대상 그 자체naked object를 갈라낼 수 있게 해준다.

 

 

대물적 믿음과 대언적 믿음

 

양상 맥락과 같은 단순 내포적 맥락에서 대언성/대물성이 구분되었던 것과 동일하게, 명제적 태도 맥락과 같은 -내포적 맥락의 측면에서도 양자가 구분될 수 있다. 이를 설명 및 예시하기 위해 명제적 태도 진술과 관련하여 Quine이 들었던 유명한 사례를 생각해보자: Ralph는 갈색 모자를 쓴 특정 남자가 수상쩍게 행동하는 것을 여러 차례 목격했다. 한정 기술구 갈색 모자를 쓴 그 남자the man in the brown hat을 축약하여 MBHthe MBH라 하자. 이에 다음은 참이다:

 

(31) Ralph는 그 MBH가 간첩이라고 믿는다.

Ralph believes that the MBH is a spy.

 

이로부터 다음이 얻어진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

 

(32) MBHRalph가 그를 간첩이라고 믿는 그러한 것이다.

The MBH is such that Ralph believes that he is a spy.

 

(31)로부터 (32)로의 이행은 (27)로부터 (29)로의 추론과 정확히 동일해 보인다. [앞 사례에서 화성의 위성의 개수필연적으로의 범위 내부에서 외부로 이동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번 사례의 경우엔 MBH’믿는다의 범위 내부에서 외부로 이동함으로써, 대언적 믿음 진술로부터 대물적 믿음 진술이 얻어진 것이다. 그러나 일견 문제될 것이 없어 보이는 대언성에서 대물성으로의 이러한 이행은 인식론적으로 중대한 차이점을 야기한다. 이를 살펴보기 위해, 대물적 문장인 (32)를 다음과 같이 존재 양화existential quantification[존재 일반화existential generalization]해보자:

 

(33) 그러한 x가 존재한다 (Ralphx가 간첩이라고 믿는다).

There is an x such that (Ralph believes that x is a spy).

 

그런데 (33)Ralph의 인지적 상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단순한 대언적 믿음 문장인 (32)에 비해 더욱 흥미로운 무언가를 드러내고 있다:

 

(34) Ralph는 그러한 x가 존재한다고 믿는다 (x는 간첩이다).

Ralph believes that there is an x such that (x is a spy).6)

 

6) 임의의 개체상항 ‘s’와 임의의 폐쇄문 ‘P’에 대해, 믿음 연산자 ‘sP라고 믿는다‘Bs[P]’로 기호화한 뒤, 각주)에서 살펴본 방식대로 (33)(34)를 기호화하자면 다음과 같이 표기될 수 있다:

 

(33) (x)Br[Sx].

(34) Br[(x)Sx].

 

앞서 양상성 문맥에서와 마찬가지로, 존재 양화사가 넓은 범위를 취하고 있는 (33)에서는 대물적 믿음이 드러나고 있고, 믿음-연산자가 넓은 범위를 취하고 있는 (34)에서는 대언적 믿음이 드러나고 있다. 전자는 어떤 대상이 존재해서, 그 대상이 Ralph에 의해 여차여차하다고 믿어진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반면, 후자는 Ralph가 어떤 대상이 여차여차하다고 믿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우선 (34)에 따르면 Ralph는 세상에 간첩이 존재한다고 믿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이는 세상 사람들 누구에게나 다 해당되는바, 특별히 Ralph의 인지적 상태에 대해 별다른 무언가를 말하고 있지는 않은 셈이다. 반면 (33)(34)와 미묘하게 다른 점은, 대부분 사람들과는 다르게 Ralph가 특정한 누군가를 간첩이라 의심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양상성이 나타나는 단순 내포적 맥락에서와 달리, 이렇듯 명제태도가 나타나는 -내포적 맥락에서는 수출이 가해지기 이전과 이후에 인식론적 측면에서 모종의 비대칭성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 자체로 보자면 (32)에서 (33)으로의 이행[즉 존재 양화]은 명백히 타당하다. (32)에서 양화되는quantified into 자리인 MBH’가 나타나는 맥락은, 단칭용어가 온전히 통상적으로 나타나는 자리 즉 지시적으로 투명한 자리이기 때문이다. (32)에서 'MBH'라고 믿는다에 의해 속박bind되어 있거나 그 연산자의 영향권 내부에 있는 게 아니라 외부에서 나타나고 있다(그리고 존재양화가 이뤄지면서 (33)에서 두 번째로 나타나는 변항 ‘x’ [즉 양화사를 제외한 부속문 ‘Ralphx가 간첩이라고 믿는다‘x’](32)에서 나타나는 단어 he’ [‘Ralph가 그를 간첩이라고 믿는’]를 대체한 셈이다. (32)에서처럼 사용되는 경우 대명사 는 변항과 동일한 기능을 수행한다).

하지만 Frege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31)에서 (32)로의 추론부터가 애초에 타당하지 않았던 것처럼 보인다. 앞서 태도에 관한 Frege의 견해와 지시적 불투명성말미에서 살펴보았듯, 믿음 맥락 내부에 있는 용어는 그것의 통상적인 지시체가 아니라 통상적인 뜻을 지시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31)Ralph가 그 MBH라는 대상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음을 진술하고 있는 게 아니라, 어떤 명제와 관계를 맺고 있음을 진술하고 있다. 기실 (31)은 그러한 남자가 존재한다는 것조차도 함축하지 않는다. [(31)에서 단칭용어 MBH’-외연적인 맥락에 나타나는바 그 지시체에 대한 존재함축이 가정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Le VerrierVulcan의 사례에서살펴본 바와 같다. [Le VerrierVulcan이 뜨거울 것이라 믿었다 해서, 그 믿음이 Vulcan의 존재를 보증해주지는 않는다.] 따라서 (31)은 그 MBH의 존재를 함축하는 (32)를 함축할 수 없다. (32)와 그에 따라 (33)은 특정한 한 남자 즉 그 MBH의 존재로 인해 참인 반면, (31)은 엄밀히 말해 그 MBH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은 문장이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31)과 같이 지시적으로 불투명한 맥락은 양화사와 같은 장치에 대해 봉쇄되어있는 듯하다. 무언가 추가적인 도움이 없는 한, 지시적으로 불투명한 맥락 외부에 있는 양화사는 그 맥락 내부의 자리를 양화할quantify into 수 없는 것이다. (31)을 둘러싼 이러한 의미론적 여건을 그림에 대한 태도에 빗대어 이해해볼 수 있겠다: Ralph가 어떤 그림이 실제 사건을 묘사한 것이라 여긴다 해서, 그 그림에 묘사된 사건이 실제로 발생했다거나 그려진 사물들이 실재한다는 것을 함축하지는 않는다.

(31)에서 (32)를 추론했던 절차에는 한 가지 더 추가적인 가정이 숨어있는 듯하다. 바로 MBH’가 대상을 결정하는 뜻을 표현한다는 것, 간단히 말해 무언가를 지시한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었다. 이러한 가정을 다소 간략히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다:

 

그러한 x가 존재한다: ‘MBH’의 뜻은 x를 결정한다.

 

 

궁지에 몰린 Ralph

 

QuineRalph 이야기를 이어간다. RalphBernard J. Ortcutt라는 사람이 매우 정직한 사회구성원으로서 확실히 간첩이 아니라 믿고 있다. 따라서 다음은 참이다:

 

(35) RalphOrtcutt가 간첩이 아니라고 믿는다.

 

에서 그 MBH가 존재한다는 것을 근거로 (31)로부터 (32)를 추론하고 그에 따라 (33)을 추론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Ortcutt가 존재함을 근거로 (35)로부터 다음을 추론할 수 있다:

 

(36) 그러한 x가 존재한다(Ralphx가 간첩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Ralph는 모르지만 다음은 참이다:

 

(37) MBH = Ortcutt.

 

앞선 (33) ‘그러한 x가 존재한다 (Ralphx가 간첩이라고 믿는다)’에 따르면 Ralph는 어떤 사람에 대해 그가 간첩이라 믿고 있다. 그 사람은 그 MBH인데, (33)에 따르면 이는 곧 Ortcutt와 동일인이다. 따라서 Ortcutt에 관해 Ralph는 그가 간첩이라 믿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이와 정확히 평행하게 진행되는 추론에 의해서, Ortcutt에 관해 Ralph는 그가 간첩이 아니라 믿고 있다는 것이 따라나온다. 이 남자에 대한 Ralph의 태도는 둘 중 과연 어느 것인가? Ralph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는 그가 그 남자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에 달렸다. Ralph가 그 남자를 그 MBH로 여기는 한 그 남자를 간첩이라 믿는 것인 반면, 그 남자를 Ortcutt로 여기는 한 그 남자를 간첩이 아니라 믿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보기엔 어떠한가? 분명 그 남자에 대한 Ralph의 태도는 우리가 그 남자를 생각하는 방식과 무관하다. 도대체 Ortcutt에 관해 Ralph는 그가 간첩이라 믿고 있는 것인가, 간첩이 아니라 믿고 있는 것인가?

샛별 사례에 대한 Frege의 가르침에 따르자면, Ralph의 태도는 둘 다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Ralph일관적inconsistent이거나 합리적irrational인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즉 하나의 명제 P에 대해 RalphP라고 믿고 있는 동시에 P가 아니라 믿고 있는 것은 아니다. Frege의 착상에 따라 말해보자면, (31) ‘Ralph는 그 MBH가 간첩이라고 믿는다에서 믿는다의 범위 내부에 나타나는 용어에는, RalphOrtcutt에 관해 생각하는 방식, Ralph가 그 남자를 MBH로서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이 반영되어야 한다. 이는 (35)에서도 마찬가지로서, 다만 (35)에서는 Ralph가 그 남자를 Ortcutt로서 생각하고 있다는 점만이 다를 뿐이다. (31)(35)에서 각각 MBH’‘Ortcutt’가 나타나는 자리는 지시적으로 불투명한바 -지시적 용어에 의한 대체가 허용되지 않는다. ‘Ralph 가 간첩이라고 믿는다라는 맥락에 대체성 원리가 적용될 수 있는지 여부는, 공란에 삽입되는 용어가 지시하는 대상이 아닌 다른 무언가에 따라 결정된다. Frege에 따르면 그러한 맥락을 지닌 문장은 그 대상에 관해 말하고 있지 않다.

반면 (32) ‘MBHRalph가 그를 간첩이라고 믿는 그러한 것이다에서 나타나는 MBH’는 이러한 기능을 수행하지 않는다. [(32)에서 MBH’에는 Ralph가 그 남자에 관해 생각하는 방식이 결부되어 있지 않다.] (32)에서 MBH’가 차지하는 자리는 명백히 지시적으로 투명한바 -지시적 단칭용어(일테면 ‘Ortcutt’)에 의한 대체가 허용된다. (31)로부터 (32)로의 수출작용은 대언적 문장으로부터 대물적 문장으로 이행하는 절차라 할 수 있다. 한편, 존재 양화문인 (33) ‘그러한 x가 존재한다 (Ralphx가 간첩이라고 믿는다)’는 술어를 만족하는 특정 대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명시적으로 말하고 있다.

 

대물성/대언성 구분의 인식론적 중요성은 매우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두드러진 것으로 다음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 대물성의 필수불가결성. Rusell나는 네 요트가 그보다 훨씬 길다longer than it is고 생각했어라는 예시를 든 적이 있다. 여기서 말해지고 있는 그 요트를 A라 해보자. Russell이 과거 특정 시점에 자신이 지녔던 믿음에 대해 말하는 바가 분명 다음과 같은 것은 아니다:

 

(38) BertranAA보다 길다고 믿는다.

 

그는 이와 같은 명백한 모순을 믿었다고 주장하고 있지 않다. 우리는 그의 말을 BertrandA의 길이가 A의 길이보다 길다고 생각했다는 식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직관적으로 생각해보자면 그가 의도했던 의미는, A의 실제 길이가 존재하는데, Bertrand[자신이 생각한] A의 길이가 그것보다 길다고 믿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를 나타내기 위해서는 A의 실제 길이를 지시하는 표현을 다음과 같이 라고 믿는다의 범위 내부로부터 그 외부로 수출시켜야 한다:

 

(39) 그러한 xy가 존재한다 (x = A의 길이 yx보다 길다 BertrandyA의 길이라고 믿는다).

 

다시 말해 Bertrand가 착각한 내용을 정확하게 기술하기 위해서는 믿는다의 범위 외부로부터 그 내부로 양화할 필요가 있는 셈이다. 이렇듯 경우에 따라서는 대물적 문장이 반드시 요구된다.

 

() 수출작용에 대한 추가적인 제한사항. Ralph의 친구 Leo에게는 Ralph와 달리 특정한 누군가가 간첩이라고 믿을 이유가 전혀 없다고 해보자. 다만 매우 일반적인 통념에 따라 Leo는 키가 가장 작은 두 간첩의 키가 정확히 동일하지는 않다고 믿는다. 그의 생각이 맞다고 해보자. 따라서 우리는 다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40) Leo는 키가 가장 작은 간첩이 간첩이라고 믿는다.

 

키가 가장 작은 간첩은 존재하기 때문에, (40)에 수출작용을 가하여 다음을 얻을 수 있다:

 

(41) 키가 가장 작은 간첩은 Leo가 그를 간첩이라 믿는 그러한 것이다.

The shortest spy is such that Leo believes that he is a spy.

 

여기서 키가 가장 작은 간첩을 존재 양화하여 다음을 도출한다:

 

(42) 그러한 x가 존재한다 (Leox가 간첩이라 믿는다).

 

하지만 어딘가 잘못된 듯하다. (42)에 따르면 Leo는 특정 누군가가 간첩이라 믿고 있는 셈인데, 앞선 가정에 따르면 이는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41)로부터 (42)를 도출하는 과정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이는 단지 ‘B는 여차저차하다로부터 여차저차한 어떤 것이 존재한다를 도출하는 형식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40)으로부터 (41)을 얻어내는 수출절차에 있을 수밖에 없다. 단순히 대언적인 믿음을 갖는 것만으로는 그에 상응하는 대물적 믿음을 갖는 데에 충분하지 않다. 다시 말해 지시적이거나 기술적descriptive인 단칭용어가 포함된 한 명제에 대한 믿음을 갖는다고 해서, 그 단칭용어에 의해 지시되는 사물에 관한 믿음 역시 갖고 있다는 게 반드시 보증되지는 않는다. 그 특정 대상과 연관된 단칭명제에 대한 믿음을 갖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대언적 문장으로부터 대물적 문장으로 이행하는 수출작용에는 지금까지 고찰해온 것 이상의 무언가가 더 요구된다.

직관적으로 생각해보면 Leo와 키가 가장 작은 간첩 사례에서 결정적인 문제점은 키가 가장 작은 바로 그 간첩이 누구인지Leo모른다는 점에 기인하는 듯하다. 따라서 만약 키가 가장 작은 간첩이 누구인지를 Leo가 안다는 전제가 추가된다면 (41)에는 문제가 없게 된다.

David Kaplan은 이러한 착상을 더욱 정교하게 다듬고 발전시켰는데, 여기서는 그 핵심만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Kaplan에 따르면 수출작용을 통해 대언성에서 대물성으로 이행하는 추론이 성공적이기 위해서는, 수출되는 용어(이 사례의 경우 (40)키가 가장 작은 간첩’)가 믿음의 주체(이 경우 Leo)를 믿음의 대상과 인식론적으로 부합하게 되는 위치에 두어야 한다.7) 여기서 Kaplan생생한 지시어vivid designator라는 핵심 개념을 도입한다. 생생한 지시어란 한 사람의 내적 이야기inner story를 이루는 단칭용어이다. 이는 정신적 이미지mental images, 부분적인 기술구partial descripsion, 일상적인 이름ordinary name 등이 뒤섞인 복합체conglomeration로서, 만약 이를 만족하는 대상이 존재한다면 생생한 지시어는 그것을 지닌 사람의 마음에 그 대상을 불러일으키는 작용을 한다. 심지어 대상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주체의 관점에서는 마치 그 대상이 존재하는 것처럼 여겨지도록 작용한다. 생생함vivacity이라는 개념은 보통 심리철학philosophy of mind에서 내적 현상internal phenomenon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렇기 때문에 생생한 이름vivid name이 반드시 지시체를 가져야 할 필요는 없으며,8) 어떤 동일성 진술의 양변이 생생한 지시어로 이루어져 있다 해도 그 진술의 진리치에 관해 실수할 가능성이 언제나 열려 있다.


7) 이 문장은 언뜻 이해하기 어렵다. 논의 맥락상 추정해보자면, 믿음-주체가 언어표현 e를 통해 그 지시체를 인식론적으로 투명하게 떠올릴 수 있는 경우에만, e에 대한 수출과정이 타당하다는 의미인 듯하다. (40)키가 가장 작은 간첩과 같이 막연한 개념적대언적 믿음만을 환기하는 용어를 Leo가 받아들인다 해서 그로부터 Leo가 그 간첩에 대한 대물적 믿음을 갖고 있다고 추론할 수는 없다. 이것이 타당하기 위해서는 키가 가장 작은 간첩을 통해 Leo가 바로 그 간첩을 인지적으로 명료하게 표상할 수 있어야 한다. 본문에서 곧 이어지듯이, 수출되는 용어가 믿음-주체의 입장에서 생생한 이름이어야 한다는 것이 이 문장의 요지인 듯하다.

8) 심리철학에서 내적 현상 내지 심적 상태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로 여겨지는 것이 바로 지향성intentionality 개념이다. 상식적으로 알 수 있듯이 믿음바람욕구함혐오함사랑함 등의 정신적 상태가 존재한다고 해서 그렇게 믿어지거나 욕구되는 대상이 반드시 존재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대상에 대해서도 정신적 태도를 취할 수 있는바 이러한 특성을 심적 상태의 지향성이라 칭한다. 물리적 상태는 대체로 이런 종류의 지향성을 갖지는 않는다. 내가 무언가를 발로 찼다면(찼다고 착각한 게 아니라 정말로 찼다면) 내 발에 치인 대상이 분명 존재한다.

Kaplan에 따르면 생생한 지시어는 이런 특징을 갖는 내적 현상에 속하는 사안이므로, 어떤 표현 e가 태도-주체 s에게 생생한 이름이라고 해서 그 지시체의 존재가 보증되는 것은 아니다. 반면 표현 e의 지시체가 보증된다고 해서 e가 임의의 주체에게 반드시 생생한 이름인 것도 아니다. 따라서 MBH’Ralph에게 생생한 이름이어도 그 MBH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을 수 있으며, 키가 가장 작은 간첩이 분명 존재한다고 해도 키가 가장 작은 간첩Leo에게는 생생한 이름이 아닐 수 있다



Kaplan 이론의 요지를 간추려보자면, 어떤 사람이 생생한 지시어를 사용하여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고, 그에 더해 믿음주체의 입장에서 그 지시어와 적절하게 연관된다고 여겨지는 대상이 존재할 경우, 생생한 지시어는 그 대상을 믿음주체에게 드러낸다(표상시킨다)represent. [즉 믿음주체는 생생한 지시어를 통해 대상을 명시적으로 표상한다.] 수출작용은 이러한 경우에만 허용된다. 반면 (40)키가 가장 작은 간첩과 같이 생생하지 않은 지시어가 개입된 경우엔 단지 희미하고 막연한 개념적 내용이 표현될 뿐으로서. 이는 특정 [대언적] 믿음을 형성하는 데에는 충분하겠으나 그로부터 [대물적 믿음으로 이행하는] 수출작업을 진행할 수는 없다.

 

 

믿음 귀속과 명시적 지표사: 대자적 믿음

 

칵테일 파티에서 Jones가 방 건너편에 있는 Brown을 가리키며 다음과 같이 험담을 늘어놓고 있다 해보자:

 

(43) 대학 총장은 그가 돌팔이라고 믿는다.

The president of the university believe that he’s a charlatan.

 

Jones의 발화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Frege의 도식을 철저히 따라본다면, 그의 발화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Brown을 짚어내는 데에 Jones가 사용하는 뜻이 아니라 총장이 사용하는 뜻이 필요하다. 하지만 (43)은 그러한 뜻이 무엇인지에 대해 아무런 단서도 제공하지 않는다. 게다가 분명 (43)에서 (지표사가 [특정 화자에 의해 특정 맥락에서] 사용될 때 모종의 뜻이 표현된다고 한다면) Jones를 짚어내기 위해 총장이 이용하는 뜻이 아니라 Jones에 의해 이용되는 뜻을 표현한다. [요컨대 Jones는 발화맥락에 따라 화자의 뜻만을 표현하는 지표사를 사용하고 있음에도, 총장의 믿음 내용을 성공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Frege적인 도식은 이런 식의 믿음 귀속이 어떻게 가능한지 설명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는다.]

JonesBrown에 대한 험담을 다음과 같이 일반화할 경우 문제는 한층 더 복잡해진다:

 

(44) 대학 사람들은 전부 그가 돌팔이라고 믿는다.

Everyone in the university believes that he is a charlatan.

 

이 발화에서도 JonesBrown을 지시하기 위해 지표사 를 사용하고 있다. Frege주의자라면 (44)에 있는 그 지표사가 표현하는 뜻이 Brown을 지시하기 위해 대학 구성원들이 각기 이용하는 다양한 뜻들이 아니라 Jones가 표현하는 뜻이라는 데에 동의해야만 한다.

앞서 6, ‘지표사의 필수불가결성에서 지표사가 단순한 지시적 장치만은 아니라는 점을 살펴본바 있다. 지표사는 매우 특이하면서도 필수적인 방식으로 화자 자신을 특정 공간 및 시점에 위치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우리는 지도를 보면서 여기가 어딘지를 알고 싶어 하기도 하며, 달력을 보면서 지금 혹은 오늘이 무슨 날인지를 알고 싶어 하기도 있다. 그 경우 일반적인 개념들로 이뤄진 단순한 기술구만으로는 궁금증이 해소되지 않는다. 이는 ’, ‘나를’, ‘나 자신과 같은 1인칭 대명사가 사용되는 경우에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예를 들어, 연주가 한창인 클래식 공연장에서 그 F(F한 그 사람)의 핸드폰 벨소리가 울린다면, 이를 처음 들었을 때 내가 느끼게 될 짜증스러움의 정도와, 알고 보니 그 핸드폰이 다름 아닌 의 것이었을 경우 느끼게 될 당혹스러움의 정도는 천양지차일 것이다. 1인칭 지표사가 사용된 믿음 귀속의 사례로는 다음과 같은 문장을 들 수 있다: 앞서와 마찬가지로 이 문장의 화자가 Jones라고 가정하자.

 

(45) 대학 총장은 내가 돌팔이라고 믿는다.

The president of the university believes that I am a charlatan.

 

이런 식의 자기-귀속적인 믿음self-ascribing belief대자적(對自的) 믿음belief de se이라 칭해진다. (45)에서 Jones는 총장이 Brown이 아니라 Jones 자신을 좋지 않게 생각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도 앞서와 마찬가지로 지표적 대명사 Jones에 관해 생각하기 위해 총장이 사용하는 뜻을 표현할 수 없다. (45)에서도 Jones가 자신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그만의 방식을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나는 돌팔이이다라는 명사절을 사용하여 Jones가 표현하고 있는 명제는, 총장이 아니라 오로지 Jones 그 자신에 의해서만 이용되거나 생각될 수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럼에도 Jones는 그 명사절을 사용하여 자신의 믿음이 아닌 총장의 믿음을 성공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이런 난점을 해결하기 위해 (43)Kaplan의 도식에서 분석해보자면, 다음과 같이 지표사가 결합된 존재 양화문으로 나타낼 수 있다:

 

(46) 예상 가능한 맥락상 의 지시체 = Brown이다 & 다음과 같은 생생한 이름 y가 존재한다 (y는 총장에게 Brown을 표상해준다 & 총장은 ‘y는 돌팔이이다에 의해 표현되는 명제를 믿는다).9)


9) (原註) 여기서 인용부호 내부가 양화되었는데, 엄밀히 말해 이는 형식논리적으로 무의미하다. 하지만 이에 대해 올바른 논리적 관점까지 설명하는 것은 지금의 맥락상 논의를 너무 복잡하게 만들 듯하다.

 

(44)(46) 역시 이와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분석될 수 있다. 물론 이와는 다른 방식의 접근법들도 제시되어왔다. 그중 한 가지를 다음 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암묵적인 지표적 요소

 

앞서 5장에서 살펴보았듯이, 고유명에 대한 Kipke식의 직접지시적 관점은 Frege로 하여금 뜻이라는 것을 상정하게끔 추동했던 생각 자체를 단순히 거부하기에 이른다. 왜냐하면, 만약 고유명이 직접지시적인 용어로서 내포connotation를 갖지 않고 오로지 외포denotation만을 갖는다면, 다음과 같은 상황이 만족스럽게 설명될 수 없기 때문이다:

 

(47) AliceMarilyn Monroe가 유명한 여배우라고 믿는다.

(48) AliceNorma Jean Baker가 유명한 여배우가 아니라고 믿는다.

(49) Marilyn Monroe = Norma Jean Baker.

 

직접지시론의 관점에서 보자면 단칭용어 ‘Marilyn Monroe’‘Norma Jean Baker’는 동의어이다. 따라서 Alice합리적이게도 한 명제와 그 부정을 동시에 믿는 셈이다. 하지만 직관적으로 생각하기에 (47)-(49)에 제시된 상황은 분명 있음직한 일로서 반드시 합리적인 것만은 아닌 듯하다. 반면 Frege의 관점에서 ‘Marilyn Monroe’‘Norma Jean Baker’는 각기 다른 뜻을 표현하기에 Alice의 믿음을 모순 없이 설명해낼 수 있다.

하지만 Frege의 노선이 정말로 만족스러운지 의심할 만한 강력한 이유가 있다. 당신이 Pederewski가 폴란드의 두 번째 수상이었다는 점만을 제외하고는 그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다고 해보자.10) 그런데 당신이 월광 소타나라는 영화에서 한 피아니스트를 얼핏 보게 되는데, 그 사람 역시 Pederewski라 불린다(실제로 Pederewski는 그 영화에 출연하여 자기 자신을 연기하였다). Pederewski에 대해 잘 모르는 당신으로서는 두 사람이 동일인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둘은 같은 이름을 가진 동일인이다. 따라서 당신은 Pederewski가 정치인이라는 명제와, 그 부정인 Pederewski가 정치인이 아니라는 명제를 동시에 믿고 있는 듯하다. 여기서 이 문제가 고유명에 대한 직접지시론 논제와는 무관하다[즉 고유명이 직접지시적인지 여부에 대한 쟁점과는 무관하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Pederewski’라는 용어가 어떤 식으로 설명되든, Frege의 관점에 따라 설명되든 Kripke의 관점에 따라 설명되든 그와 무관하게, 당신은 Pederwski가 정치인이이라는 것과 정치인이 아니라는 것을 동시에 받아들이고 있는바 논리적으로 모순된 믿음을 지니고 있는 듯하다.


10) (原註) 이 예시는 Kripke (1979)에서 차용하였다.


Frege는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교묘하게 피해간다: 당신의 개인어(個人語)idiolect 내에는 하나가 아니라 두 개의 ‘Pederewski’라는 이름이 있어서, 당신은 두 이름이 각기 다른 사람의 것이라 믿고 있다. 이런 종류의 현상은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이 일상에서 매우 흔한 일이다. 당신이 동일한 하나의 사물 내지는 사물의 한 가지 종류라 여겼던 것이 실제로는 둘 혹은 그 이상이었던 일은, 자주 있을 법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상상가능하다conceivable. 당신은 당신의 왼손이 늘 동일한 하나의 신체 일부라 생각해왔겠지만, 그게 실제로는 당신 모르게 매일 새벽마다 사악한 악마에 의해 새로 만들어진 일련의 다수의 실체들이었을지도 모른다. 그것들에게 내 왼손1’, ‘내 왼손2와 같은 식으로 이름을 붙여줄 수도 있다. 그 경우 분명 당신의 왼손1 당신의 왼손2이다. 전혀 있을 법하지 않은 일이지만 그렇다고 절대적으로 배제될 수도 없는 가능성이기 때문에[즉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지만 논리적으로는 가능하기 때문에], 단순히 약정에 의해 의미론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종류의 사안은 아닌 듯하다. 다르게 말해 이러한 가능성이 분석적으로 거짓이라 판정할 수는 없다. 이보다 훨씬 더 그럴듯한 사례를 들 수도 있다. 당신이 창밖을 보니 어떤 버스의 앞부분이 비스듬한 각도로 보인다 해보자. 같은 벽면에 있는 다른 창문을 통해 보니 거기에서는 어떤 버스의 뒷부분이 보인다. 버스가 아주 길다는 점을 감안하건대 당신이 저 버스가 이 버스인가?’ 하고 궁금해 하는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이런 사례들에서 나타나는 단칭용어들은 고유명이나 자연종 용어라기보다는 차라리 지표사라고 해야 한다. 그중에서도 특히 지시사demonstrative라 할 수 있는바, 이 경우 단칭용어는 사용될 때마다 각기 다른 (암묵적인) -지시화demonstration가 동반되면서 여러 번 사용되는 동일한 지시사와 같이 사용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우리는 앞서 6에서 과 같은 자연종 용어가 암묵적인 혹은 숨겨진 지표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음을 꽤 설득력 있게 주장하는 Putnam의 논증을 살펴본 바 있다. 또 다른 예를 들자면, 19세기까지는 옥()이 한 가지 광물인 것으로 알려져 왔지만, 이후 광물학자들에 의해 두 가지 다른 광물인 경옥(硬玉)과 연옥(軟玉)으로 구분된다는 것이 밝혀졌다. 암묵적인 지표사 내지 암묵적인 지시사를 다음과 같이 명시적이게 만듦으로써 두 광물이 구분될 수 있다: (통상 옥이라고 불려온 물질의 표본을 가리키며pointing at) 이것은 경옥이고, (또 다른 물질 표본을 가리키며) 저것은 연옥이다.

 

 

직접지시, 태도, 의미론적 대물성

 

앞선 들에서 논의된 바에 따르면 명제적 태도는 Frege가 주장했을 법한 방식으로 의미론과 상호 연관되지는 않는 것처럼 여겨진다. 기실 샛별개밥바라기는 전형적인 고유명과는 거리가 멀다. 왜냐하면 이 경우 두 이름에는 공적인 의미로서 각기 독특한 제시방식mode of presentation이 결부되어 있다고 보는 편이 합당하기 때문이다. [반면 사람의 이름과 같은 일상적인 고유명은 그렇지 않다.] 그리고 아무리 그러한 경우라도 정작 중요한 사안은, 한 용어에 특정 속성이 결부되는 것은 파기 가능한데도, 그렇게 결부됨으로써 그 속성이 그 용어와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즉 특정 속성이 한 용어의 고유한 의미 내지 뜻으로 결부되어 있는 것처럼 여겨지게 된다. 경옥과 연옥 사례, Pederewski 사례, 창밖으로 보이는 리무진 사례 등은 매우 희소한 경우로서 사실 그다지 놀라울 것도 없다. 언어는 다른 무엇보다도 의사소통을 목적으로 사용된다. 그런데 우리가 마주치는 모든 대상이나 대상의 모든 부분들에게 굳이 별도의 이름을 일일이 붙이려 한다면, 그것들이 실제로도 일일이 구분되는 사물이나 물질인 경우가 아닌 한, 정상적인 의사소통은 도저히 이뤄질 수 없을 것이다. 만약 어떤 것이 오리처럼 소리를 낸다면, 그것에 오리라는 이름을 붙여주면 그만이다.

그렇다면 이제 Frege를 제쳐두고 직접지시론의 입장에 서보자. 이 관점에서 고유명, 자연종 용어, 지표사 등의 의미론적 값semantic value 혹은 정보적 값informational value은 단지 그 용어들의 지시체에 불과하다. 이것이 바로 Mill주의적Millianism 관점으로서, 이에 따르면 고유명과 지표사는 기술적(記述的) 내용descriptive content을 표현하지 않으며 단지 대상을 지시하기만 할 뿐이다. (이러한 관점은 Russell주의적Russellianism이라 칭해지기도 한다. 고유명이 한정 기술구가 축약된 표현이라는 주장을 제외한다면 Russell의 관점 역시 대체로 이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이에 [직접지시론자인] Nathan Salmon은 태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대안적인 설명을 제시한다. ‘슈퍼맨‘Clark Kent’가 직접지시적인 고유명이라 해보자. Salmon의 관점에 따르면 이 두 이름의 의미론적 값 내지 정보적 값은 동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Lois Lane11)슈퍼맨은 영웅이야!’‘Clark Kent는 영웅이야!’를 듣는다면 각기 다르게 반응할 것이다. Salmons의 용어법을 따르자면 Lois는 동일한 유형에 속하는 두 명제-개항들12)을 각기 다른 외양(外樣)guise을 통해 파악한다grasp. 두 진술은 정확히 동일한 명제를 표현하지만, Lois는 어떤 외양 하에서는 슈퍼맨은 영웅이다를 긍정하는 성향을 보이고dispose to assent, 그와 다른 외양 하에서는 ‘Clark Kent는 영웅이다를 부정하는dissent 성향을 보일 것이다.


11) 슈퍼맨 시리즈의 등장인물로서 Clark Kent가 근무하는 언론사의 동료이자 슈퍼맨의 연인.

12) 직접지시론의 관점에서 보자면, ‘슈퍼맨‘Clark Kent’의 지시체가 동일하므로, 임의의 술어 ‘F’에 대해 슈퍼맨은 F하다‘Clark KentF하다는 동일한 명제를 표현한다.


중요한 것은 Lois가 그 명제를 파악하는 각기 다른 외양이라는 것이 이름 슈퍼맨‘Clark Kent’에 관한 의미론에 속하는 사안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 외양들은 슈퍼맨은 영웅이다Clark Kent는 영웅이다라는 진술의 의미의 일부가 아니다. 오히려 그 외양들은 Lois 내부에in Lois 있는 인지적cognitive 혹은 심리적 특질psychological feature이다. 그렇기에 이 사례에서 결정적 용어인 슈퍼맨‘Clark Kent’를 혹여 다른 어떤 사람이 충분히 능숙하게 사용하더라도, Lois가 지닌 외양이 그 사람에게 반드시 떠올라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Lois가 한 명제를 파악하는 외양들은 Lois에게만 고유한 인지적 특성이다.] 가령 Clark Kent와 슈퍼맨이 동일인임을 잘 아는 사람이라면 두 용어가 상호대체가능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 사례가 별로 만족스럽지 않게 여겨진다면, 한 사람이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 여타 비근한 사례를 떠올려보라.)

이제 이러한 착상을 명제적 태도를 나타내는 용어가 명시적으로 포함된 문장에 적용해보자. Salmon의 이론에서 결정적인 사안은, 태도에 대한 분석 내지 믿음 문장에 대한 분석에서 태도 주체의 외양이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가령 Lois가 슈퍼맨이 영웅이라고 믿는다면, 그 경우 한 외양과 한 명제가 존재해서 Lois는 그 외양 하에서under that guise 그 명제에 대해 특정한 인지적 관계cognitive relation를 맺는다. 이러한 관계를 ‘BEL-관계라 칭해보자. 통상적인 2항 믿음-관계와 유사하게 BEL-관계는 3항 관계이다. ‘p’가 한 명제를 나타내고 ‘g’가 한 외양을 나타낸다고 한다면, 믿음에 대한 Salmon 식의 분석은 다음과 같이 일반화된다:

 

A는 다음의 경우 그리고 오직 그 경우에 p믿는다: 그러한 g가 존재한다 Ag에 의해서 p를 파악한다 Ag 하에서 p에 대해 BEL-관계를 맺는다.

 

이를 Lois에게 적용하기 위해, 앞서와 마찬가지로 슈퍼맨은 영웅이다‘Clark Kent는 영웅이다[직접지시론의 입장에 따라] 동일한 명제를 표현한다고 가정한 채 그 명제를 ‘P’라 하자. Salmon의 관점에 따르면 두 문장은 각기 다른 외양을 통해 Lois와 연관된다. 이에 Lois가 맺고 있는 두 믿음-관계를 분석하면 각각 다음과 같다:

 

Lois슈퍼맨은 영웅이다가 포함된 외양을 통해 P를 믿는다 Lois는 그 외양 하에서 P에 대해 BEL-관계를 맺는다.

 

Lois‘Clark Kent는 영웅이다가 포함된 외양을 통해 P를 믿는다 Lois는 그 외양 하에서 P에 대해 BEL-관계를 맺는다.

 

따라서 최종적으로 Lois는 명제 P와 그 부정을 동시에 믿고 있는 것으로 드러난다. 그녀는 슈퍼맨이 영웅이라 믿는 동시에 영웅이 아니라고도 믿는다는 것이다. 물론 후자에 대해 그녀는 그러한 단어로 표현된 믿음을 갖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것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한 문장을 부정한다고 해서 그 문장에 의해 표현된 명제마저 부정한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Lois의 믿음이 이렇게 분석된다고 해서 그녀가 합리적이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녀가 합리적이게 되는 경우란 오로지 동일한 하나의 외양 하에서 한 명제를 믿으면서 믿지 않는 경우뿐이다. 다른 사례들 역시 이와 마찬가지로 분석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Mark TwainSamuel Clemens이다를 부정하면서도 그와 동일한 명제를 믿는다는 게 반드시 불합리한 일은 아니다. 이 명제는 단순히 ‘a=a’의 형식을 지니고 있지만, 이 명제를 부정하는 사람이 의존하는 외양 하에서라면 ‘a=b’의 형식으로 파악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7에서 우리는 가령 파리Paris가 독일에 있다면 파리는 모로코에 있다와 같이, 의미론적으로 올바른 문장들이 왜 화용론적으로는 부적절한지에 대해 Grice가 제시한 설명을 살펴보았다. 조건문에 대한 고전적인 진리-함수적 설명에 따르면 이 문장은 참이지만, 이 문장에 대한 발화 즉 그 문장에 대한 진술은 통상 화용론적으로 부적절하다고 받아들여진다. [이러한 착상을 Lois 사례에 차용해볼 수도 있다.] Lois Lane[순전히 의미론적인 관점에서만 보자면] 슈퍼맨이 Clark Kent라는 것, 혹은 위 사례의 경우 Clark Kent가 영웅이라는 것을 엄연히 믿고 있긴 하지만, 그녀의 믿음을 그러한 단어들로 기술하는 것은 화용론적으로 부적절할 것이다.

Salmon이 제시한 외양 개념은 언어표현의 의미론적 속성에 의해서는 충분히 해결되지 않는 인지적 측면의 잔여물을 포착하여 이와 얽힌 문제를 만족스럽게 해결해낸다. 따라서 외양에 관한 온전한 이론은 인지과정 내지 정보처리절차에 대한 경쟁하는 이론들의 일부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물론 Salmon 역시 어떤 대상에게 명제적 태도를 귀속시킬 때 태도-주체가 지닌 특정 인지적 관점이 드러나도록 분석해야 한다는 데에 동의한다. 종종 우리는 어떤 사람이 자신의 태도를 명시하면서 긍정할 법한 것과 동일하거나 혹은 거의 유사한 단어들을 사용하여 그 주체의 태도를 기술하고자 한다. 그 경우 우리는 추정컨대 모종의 Grice적인 준칙에 따라서, 주체의 믿음을 기술하기 위해 사용된 단어들에 의해 순전히 의미론적으로 전달되는 내용을 명시하는 데에 몰두하기보다는, 믿음 주체의 인지적 상태에 관한 사안들을 전달하는 데에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Salmon이 칭한바 화용론적으로 전달되는 정보pragmatically imparted information에 속하는 사안일 뿐이다. 그러므로 고유명이 Frege적인 뜻을 표현하지 않는 직접지시적 표현이라는 논제를 유지한 채로도, Lois의 경우와 같은 변칙적인 사례들을 여전히 설명해낼 수 있다.

따라서 다음 도식은 타당하지 않다(즉 이 도식의 대입례는 경우에 따라 거짓일 수 있다):

 

BS라고 믿는다면, B가 진실될sincere 경우 B‘S’를 긍정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고유명이 연관되어 있는 한 대물성/대언성 간의 구분은 무너지게 된다. Frege에서 비롯된 고전적인 사고방식에 따르면, 대물적 믿음 진술에서는 믿음의 대상을 명시하는 용어(앞 사례들의 경우 개밥바라기‘Marilyn Monroe’)가 믿음 연산자 내지 믿음 술어belief predicate의 영향권 외부에 있어야 한다. 따라서 이는 곧 대물성이라는 속성being de re을 구문적인syntactical 사안 내지는 언어의 구조적인structural 사안으로 취급하는 셈이다. 반면 단칭용어가 직접지시적이라는 점을 받아들인다면 이러한 생각은 지지될 수 없다. 왜냐하면, ‘Marilyn Monroe’와 같은 단칭용어가 대상을 직접지시한다면 그 용어가 문장에 기여하는 바는 오로지 지시체밖에 없으며, 그 경우 ‘AliceMarilyn Monroe가 유명한 여배우라고 믿는다‘Marilyn Monroe에 대해, Alice는 그녀가 유명한 여배우라고 믿는다의 내용 내지 진리-조건 간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관점에서는 구문론적 대물성syntactic de re 개념과 대조되는 의미론적 대물성semantic de re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여야 할 듯하다.

 

 

역사적 사항

 

명제적 태도에 대한 철학적 관심이 2차 세계대전 이후 극적으로 대두된 이래 이러한 기조는 지난 70년간 좀체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물론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훨씬 이전에 FregeRussell이 명제적 태도에 관한 논의의 초석을 다지긴 하였지만, 그 주제에 본격적으로 착수한 인물은 1940년대 후반 및 1950년대에 대략 Frege적인 체계 내에서 작업하였던 Rudolf CarnapAlonzo Church였다. Carnap1947(21956에 출간)년에 출간된 의미와 필연성Meaning and Necessity에서, Church1951년의 뜻과 지칭에 관한 논리학A Formulation of the Logic of Sense and Denotation1954년의 내포적 동형성과 믿음 동일성Intensional Isomorphism and Identity of Belief에서 각각 명제적 태도에 대한 분석을 시도하였다.

이후 Quine1955년 논문 양화사와 명제적 태도Quantifiers and Propositional Attitudes(Quine 1975[역설의 길The Ways of Paradox, 개정판]에 수록)에서, Frege가 말하는 지시적 불투명성이 명제적 태도에 관한 논의의 전부는 아니며, 태도는 태도-주체와 Frege적인 명제 간에 성립하는 단순한 2항 관계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당시 Quine이 취했던 관점에 따르면, 명제적 태도 동사의 범위 내부를 양화하는 것은 대체로 올바르다고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만 최종적으로 Quine은 그러한 상식적 직관에 반대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이후 많은 인물들이 Quine의 도전에 응수하였으며, 대표적인 인물로 1968년의 획기적인 논문 내부로의 양화Quantifying In(Kaplan 1969 [단어와 반대: W. V. Quine의 저작들에 관한 小論Word and Objections: Essays on the Works of W. V. Quine]에 수록)를 쓴 David Kaplan을 들 수 있다.

명제적 태도에 관한 논의의 흐름은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Frege주의에서 벗어나 Mill주의적 관점 내지는 직접지시론의 관점으로 향하게 된다. Kaplan은 비교적 후기 논문들에서 이러한 방향전환을 보여주었으며, Kripke1979믿음에 관한 퍼즐A Puzzle About Belief을 출간하였다. 그 글에서 Kripke, 설사 양화와 연관된 쟁점들을 차치하더라도 어쨌든 Frege주의 의미론은 믿음-퍼즐을 처리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떠올릴 법한 해결책과는 거리가 멀다고 주장한다. Nathan Salmon1986년에 Frege의 퍼즐Frege’s Puzzle을 출간하였는데, 이 책은 직접지시론의 관점에서 명제적 태도 문제에 접근하고자 했던 다양한 시도들 중의 하나이다. 이 방향에서 작업한 좀 더 최근의 인물들로는 Mark RichardScott Soams를 들 수 있다.

Salmon의 접근법은 Jerry Fodor (1975)[사고언어The Language of Thought]에 제시된 사고언어Language of Thought이론과 부합하는 측면이 있다. 그 책에 제시된 Fodor의 이론에 따르면 인지활동cognition은 정신적mental이면서 개별적인individual 언어에 의해 발생하는바, 이 정신적 언어란 사실상 Frege가 제시한 바와 다소 유사한 구조more Frege-like structure를 지니고 있되 다만 공적언어public language의 층위가 아니라 개인어idiolect 층위에 있는 언어이다.13) 여기서 우리가 살펴보지 않았던 또 다른 줄기로는 Donald Davidson병렬적paratactic접근법을 들 수 있다. 이에 따르면 태도를 귀속시키는 문장은 명제와 태도-주체 간의 관계를 나타내는 게 아니라, 믿음 귀속자에 의해 제시된 문장-개항과 태도-주체 간의 관계를 나타낸다.


13) Salmon이 제시하는 외양 개념이 Fodor의 이러한 정신언어에 속하는 개념이라 할 수 있는 듯하다.

 

 

이번 의 요약

 

Frege의 도식에 따르면 -내포적 맥락에서 나타나는 표현들은 [그것이 외연적 맥락에서 가리켰을] 통상적인 지시체를 지시하는 게 아니라 [외연적 맥락에서 표현했을] 통상적인 뜻을 지시한다. 예를 들면 금성은 행성이다에서 금성은 행성 금성을 지시하지만, ‘Bob은 금성이 행성이라고 믿는다에 있는 금성은 그 지시체인 금성이 아니라 그 용어 자체의 뜻을 지시한다. 이러한 관점은 ‘Vulcan’이 존재하지 않음에도 ‘Le VerrierVulcan이 태양을 공전한다고 믿었다와 같은 문장[즉 믿음 연산자의 범위 내에 지시체가 없는 표현이 나타나는 믿음-귀속 문장]이 참이 될 수 있는 이유를 잘 설명해낸다는 이점을 갖는다. 또한 이 관점은 ‘Bob은 금성이 행성이라고 믿는다‘Bob은 개밥바라기가 행성이 아니라고 믿는다가 일관된 진리치를 가질 수 있다는 명백한 직관을 잘 설명해내기도 한다. -내포적 맥락이란 지시적으로 불투명한 맥락으로서, 이러한 맥락 내에 있는 표현들은 그와 -지시적인 여타 표현으로 대체될 수 없다. -내포적 맥락은 가령 ‘p라고 Fred가 믿는다는 것을 Bill이 믿는다는 것을 Jim은 믿는다에서처럼, -내포적 맥락, -내포적 맥락 내에 있는 -내포적 맥락, -내포적 맥락 내에 있는 -내포적 맥락 내에 있는 -내포적 맥락 등과 같은 식으로 무한히 반복될 수 있다.

이러한 -내포적 맥락과 달리, 대언적인 단순 내포적 맥락에서 진리치-보존적인 대체가 허용되기 위해서는 대체되는 표현들의 뜻이 동일해야 할 필요는 없으며, 다만 대체되는 표현들의 양상적 특징이 보존되어야 한다. 가령 대언적 내포맥락을 갖는 필연적으로, 2<3이다에서 ‘2’‘1+1’으로 대체될 수 있지만, 그와 -지시적인 화성의 위성의 개수로는 대체될 수 없다. [후자의 지시체가 ‘2’와 동일한 것은 우연적으로만 성립하기 때문이다.] 반면 온전한 지시적 투명성은, 가령 화성의 위성의 개수는, 필연적으로 3보다 작은 그러한 것이다와 같이 대물적 필연성 맥락이 갖는 특징이다. 이 대물적 필연성 진술은 그에 대응하는 앞서의 대언적 필연성 진술 필연적으로, 2<3이다를 함축하지만, 은 성립하지 않는다.

명제적 태도 문장에서의 수출작용은 수출되는 용어가 무언가를 지시하는 데에 성공하는 한 일견 타당해 보인다. a가 지시적 단칭용어라면 ‘BobFa라고 믿는다aBob이 그것에 대해 F하다고 믿는 그러한 것이다를 함축하는 듯하다. 그런데 이러한 함축관계는 다른 단칭용어 b가 있어서 b=a이고 BobFb라고 믿는 경우에도 성립한다. 왜냐하면 이 상황에서 bBob이 그에 대해 F하지 않다고 믿는 그러한 것인데, 그 경우 a 역시 Bob이 그에 대해 F하지 않다고 믿는 그러한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동일한 하나의 특정 대상에 대해 Bob은 그것이 F하다고 믿는 동시에 F하지 않다고 믿고 있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도, 가령 FaFa를 동시에 믿는 것과 같은 식의 합리성[즉 모순되는 두 대언적 명제를 믿는 합리성]Bob에게 귀속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수출작업이 성공적이기 위해서는 추가적인 무언가가 더 필요한 듯하다. 예를 들어, 설사 키가 가장 작은 간첩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Ralph는 키가 가장 작은 간첩이 간첩이라고 믿는다와 같은 문장에서는 수출작업이 진행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제안되는 해결책에 따르면, 이러한 경우 수출이 진행되기 위해서는 키가 가장 작은 그 간첩이 누구인지를 Ralph가 알고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David Kaplan은 이러한 착상을 더 명료하게 다듬어서, 수출되는 용어가 생생한 지시어여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다. 생생한 지시어는 수출 및 그 에 해당하는 수입importation작용의 대상이 된다는 점에서 고정 지시어와 유사하지만, 하나의 지시어가 생생한지 여부는 사람에 따라 각기 달라질 수 있는바 주관적으로만 생생하다는 점에서는 고정 지시어와 다르다.

지금까지 살펴본 형태의 Frege적인 그림은 지표사 및 지시사를 고려할 때 제기되는 사항들에 많은 제약을 받는 편이었다. Jones대학 총장은 내가 돌팔이라고 믿어와 같이 말하는 경우에서처럼, 어떤 명제적 태도 문장들은 명시적으로 지표사를 포함하고 있다. John Perry에 따르면 이러한 대자적 믿음은 1인칭 대명사가 나타나지 않는 그 어떤 진술과도 인식론적으로 동등하지 않지만, ‘나는 돌팔이이다Jones의 진술에서와 같은 방식으로 사용될 경우 그 문장은 총장만이 이용 가능한 명제를 표현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Frege 식의 퍼즐은 지시되는 그 어떤 대상과 관련해서든 발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엄청 느릿느릿하게 저 태양 = 저 태양이다하고 말한다면, 그 말을 들은 사람은 정말로 저 태양 = 저 태양인지 궁금해 할 것이다. 여기서 그 진술은 실제로 참이며, 첫 번째로 나타나는 저 태양과 두 번째로 나타나는 저 태양에는 각기 다른 -지시화 행위가 동반된다. 이러한 사안들을 감안하건대 명제적 태도는 Frege의 이론에서 즉각 환기될 법한 언어의 모양새와는 그다지 잘 부합하지 않는 듯하다. 명제적 태도라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섬세하고 까다로우며, 명제적 태도와 연관된 인지적 상태는 통상적으로 공적 언어에서 즉각 표현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다양한 것이다.

Nathan Salmon은 명제적 태도 연산자의 영향권 내에서 -지시적 고유명들 간의 대체를 제한 없이 허용하는 관점을 펼친다. Salmon은 고유명이 직접지시적이라고 간주하기 때문에, 가령 ‘Hesperus’‘Phosphorus’가 명제적 태도 맥락 내에서도 상호교환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다만 명제적 태도를 설명해내는 것[즉 태도-주체에 대한 믿음 귀속과 같은 문제를 설명하는 것]은 언어철학적 문제라기보다는 심리철학에서 다뤄져야 할 문제가 된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한 명제를 믿지 않을지라도 다른 외양 하에서는 그 명제를 믿을 수 있으며, 이 경우 그러한 외양의 구성에 관한 논의들은 궁극적으로는 심리학 내지 심리철학에 속하는 사안이라는 것이다. 분명 우리는 외양과 연관된 정보에 관해 의사소통하며 이는 많은 경우 뜻에 관한 Frege의 이론과 부합하는 측면이 있긴 하지만, 그러한 정보는 Grice적인 방식에 따라 화용론적으로만 전달되거나 함의되는바 용어에 관한 의미론의 일부는 아니라는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다, 예컨대 Lois‘Clark Kent는 용감하지 않다를 긍정하더라도, 그녀는 슈퍼맨이 용감하다고 믿기 때문에 그에 따라 Clark Kent가 용감하다는 것을 믿고 있기도 하다.

 

 

탐구문제

 

1. 다음을 생각해보자:


Hob은 마녀가 Bob의 암말들이 전염병에 걸리게 만들었다고 믿으며, Nob은 그녀(그와 동일한 마녀)Cob의 암퇘지들을 죽였는지 궁금해한다.

 

마녀가 존재하지 않더라도 이 문장은 참일 수 있다. 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HobNob의 믿음을 한데 묶어주는 그러한 사물이 실존하지 않는데도, 두 사람의 믿음 사이에 성립하는 연관성을 어떻게 재구성해볼 수 있겠는가? (Geach 1967[내포적 동일성Intensional Identity]에서 차용)

 

2. Frege주의 의미론의 관점에서 볼 때, -속의-brain-in-a-vat는 당신과 정확히 동일한 믿음을 가질 수 있겠는가? 그 경우 그 고양이는 배고프다와 같은 전형적인 믿음은 거짓이겠는가, 아니면 참도 거짓도 아니겠는가? 혹은 통-속의-뇌가 그러한 믿음을 지닐 수나 있겠는가? 직접지시론의 관점에서는 어떻겠는가?

 

3. 언어표현들의 동의성 조건, 즉 용어가 표현하는 뜻의 동일성에 대한 조건으로서 한 가지 그럴 법한 것은 용어들이 (인용되는 맥락을 제외한) 모든 맥락에서 상호대체가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다구매하다가 동의어라고 가정한 채, 다음을 생각해보자:

 

(a) x가 핫도그를 산다고 믿는 그 누구든 x가 핫도그를 산다고 믿는다는 것을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

 

앞서 제안된 동의성 조건에 따르면 이 문장은 다음을 함축한다:

 

(b) x가 핫도그를 산다고 믿는 그 누구든 x가 핫도그를 구매한다고 믿는다는 것을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

 

과연 이것이 올바른가? (b)(a)정확히 동일한 명제를 표현하는가? (Mates 1952[동의성Synonymity]에서 차용)

 

4. 지금까지 우리는 이 책에서 다음과 같은 사안을 그저 무비판적으로 가정해왔다: 예를 들어

 

(a) 그 고양이가 하얗다는 것

 

은 다음을 의미한다

 

(b) ‘그 고양이는 하얗다의 뜻

 

하지만 뭔가 잘못된 듯하다. 분명 번역translation에서는 언어표현의 뜻이 보존되어야 한다. 우선 (a)를 프랑스어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c) que le chat est blanc

 

그리고 (b)를 프랑스어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d) le sens du 그 고양이는 하얗다

 

이 과정에서 뭔가 잘못된 것처럼 여겨지는 이유는, (b)가 특정 한국어 문장과만 연관되기 때문이다. (b)는 한국어 문장의 제시방식[Frege적인 뜻]을 포함하고 있다. 앞서 말했듯 뜻은 지시결정규칙이므로, 이 번역과정에서는 한국어 문장 그 고양이는 하얗다에 대한 지시가 보존되어야 한다. 따라서 (d)(b)와는 동의적이지만 (c)와 동의적이지는 않다. 그런데 (c)(a)와 동의적이므로, 결국 [우리의 직관과는 다르게] (b)(a)와 동의적이지 않게 되어 버린다. 하지만 (b)(a)와 엄밀히 동등하지 않다면, 대체 어떤 표현이 (a)와 동의어일 수 있겠는가? 아니면 위의 추론과정 어딘가에 결함이 있는 것인가? (Curch 1950[주장진술 및 믿음진술에 대한 Carnap의 분석에 관하여On Carnap’s Analysis of Statement of Assertion and Belief])

 

 

주요 읽을거리

 

Kripke, S. (1979), 믿음에 관한 퍼즐A Puzzle about Belief: A. Margalit , 사용에서의 의미Meaning in Use에 수록.

Salmon, N. (1986, 1991), Frege의 퍼즐Frege’s Puzzle.

다음은 좀 더 어렵다:

Kaplan, D. (1969), 내부로의 양화Quantifying In.

Quine, W. V. (1975), 양화사와 명제적 태도Quantifiers and Propositional Attitudes, 개정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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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화용론

 

철학자들은 사실을 진술(陳述)하는 것stating of fact 내지 기술적(記述的) 정보descriptive information를 전달하는 것만이 언어의 유일한 목적이라고 말하곤 한다. 물론 이는 사실이 아니다. 언어에는 진술하기나 기술하기 이외에도 질문하기, 명령하기, 예측하기, 인사하기, 농담하기, 이야기하기story-telling 등등 많은 활동들이 있으며, 그것들 중 참이나 거짓이라고 적절하게 가려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언어의 이러한 영역들은 과거에 상대적으로 덜 탐구되어왔다. 하지만 지난 50년 동안 John Langshaw Austin, Herbert Paul Grice, John Rogers Searle 등을 위시한 일군의 철학자들은 이렇듯 다양한 언어활동들의 목적을 기술하기 위한 이론적 틀을 고안해왔다. 後期 Wittgenstein이 언어의 실천적인practical 차원, 즉 특정 목적purpose을 위한 언어의 사용use에 주목한 것에 고무되어 이러한 철학자들이 모색하고 발전시킨 기본 체계들은 매우 큰 성과를 거두었으며, 지난 40여년간 언어철학 및 이론언어학 분야에서 학문적 주류에 대한 시금석 역할을 담당해왔다. 이번 에서는 이러한 이론들의 초기 형태 및 그 이론적 동기를 탐구하고 몇몇 적용사례를 살펴볼 것이다.

 

 

서법과 효력에 대한 再考

 

緖論에서 우리는 의미효력force을 구분한 바 있다. 전자는 의미론과 연관되는 반면 후자는 대체로 화용론(話用論)pragmatics과 연관된다. 7.1에 있는 문장들은 동일한 명제를 표현하지만, 그 명제에 각기 다른 효력을 부여하기 위해 보통 사용된다. 여기서 나타나는 문법적인 차이는 서법(敍法)mood의 차이이다.

 

7.1 서법과 효력

문장

 

서법

 

해당 서법에 의해

주로 표현되는 효력

이러한 맥락에서

보통 말해지는 명제(내용)

너는 회를 먹는다.

 

직설법/서술법

Indicative/Declarative

주장

Assertion

네가 회를 먹는다는 것

That you are going to eat raw fish

너 회 먹어?

 

의문법

Interrogative

질문

Question

회 먹어라.

 

명령법

Imperative

명령

Qommand

영어에서 명령의 주체 및 의도된 청중은 대체로 암묵적이다.

 

효력이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심리적 사안인 것처럼 여겨진다. 가령 보통의 경우 우리는 스스로 의도한intend 경우에만 무언가를 질문하거나 주장한다. 반면 서법은 명백히 규약적인 사안이다. 가령 의문법 문장을 사용하는 것은 화자가 청자에게 질문하고 있음을, 다시 말해 한 명제에 의문적 효력을 부여하여 표현하고 있음을 나타낸다는 규약이 존재한다. 가령 영어에서 의문법은 대체로 주어와 동사의 순서가 도치됨으로써 표현된다.

하지만 서법과 효력의 관계는 다소 유동적이기도 하다. 즉 특정 효력을 나타내는 데에 단 하나의 서법만이 결부되는 것은 아니다. 특정 서법의 문장을 단지 발화한다고 해서, 그 서법에 의해 대체로 전달된다고 여겨지는 효력을 그 문장에 결부시켜 표현하는 데에 충분한 것은 아니다. ‘회 먹어라라는 문장을 발화하면서도 아무것도 진지하게 명령하거나 권하거나 제안하지 않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서법은 효력에 대한 필요조건도 아니다. 가령 직설법 문장의 말미를 어조나 억양을 높이면서 발화함으로써 질문을 할 수도 있다. 이 역시 언어적 규약에 속하는 사안이다. 영어를 예로 들자면 문장 끝에서 목소리를 올리는 식으로 ‘You are going to eat raw fish’를 말할 경우, 화자가 무언가를 주장하는 게 아니라 질문하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규약이 존재하는 것이다. 음성으로 이뤄지는 발화가 아니라 문장으로 표기되는 경우엔 ‘You are going to eat raw fish?’와 같이 직설법 문장에 물음표를 붙임으로써 의문적 효력을 나타낼 수 있다.

 

 

화행론

 

그런데 효력이 표현되는 또 다른 방식으로 다음과 같은 문장들을 생각해볼 수 있다:

 

나는 당신이 회를 먹는지 여부를 묻는다.

I ask you that you are going to eat raw fish.

나는 당신이 회를 먹는다고 주장한다I assert that.

나는 당신이 회를 먹을 것을 명령한다I command that.

 

앞 절에서 살펴본 식으로 서법에 따라 통상적으로 효력을 표현하는 다소 복잡한 언어적 규약을 이용하는 대신, 서법들 간의 구분을 아예 폐기해버리고 위와 같은 식으로 나는 인지 여부를 묻는다’, ‘나는 라고 주장한다’, ‘나는 할 것을 명한다와 같은 일군의 연산자operator를 도입하여 효력을 표현할 수도 있다.

J. L. Austin은 유명한 논문 수행적(遂行的) 발화Performative Utterances(1961)에서 영어에 이런 형태의 표현들이 있다는 데에 주목하였으며, 이런 문장들의 문법적 구조가 철학자들을 오도(誤導)하기mislead 쉽다고 지적하였다. 첫 번째 문장인 나는 당신이 회를 먹는지 여부를 묻는다를 생각해보자. 표면적으로는, 이 문장의 발화가 어쨌든 실제로는 무언가를 주장하고 있다고, 청자가 회를 먹는지 여부를 화자가 묻고 있다는 것을 화자 스스로가 주장하는 발화라고 생각해볼 수도 있다. 하지만 Austin은 이러한 생각이 사태를 혼동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나는 당신에게 묻는다라는 표현의 목적은 화자 자신을 기술하는 것to describe이 아니다. 나는 당신이 회를 먹는지 여부를 묻는다고 말하는 화자는 스스로를 기술하고자 그런 말을 한 것이 아니다. 만약 그 말의 목적이 진정 화자 자신에 대한 기술이었다면, 화자는 그저 스스로를 잘못 기술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화자는 자신이 무언가를 묻고 있다고 기술하였으나, 화자는 무언가를 묻고 있는 게 아니라 기술하고 있는 셈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화자가 기술한 바는 자동적으로 거짓이 되어버린다. 이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언어를 사용하는 방식이 전혀 아니다.] 만약 청자가 농담하길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아니네! 너 지금 묻고 있는 게 아니네!’ 하고 반응할 것이다. 분명 이러한 발화의 목적은 나는 당신에게 묻는다이후에 나오는 단어들에 의해 표현되는 내용에 관해 화자가 묻고 있다는 효력을 유발하는bring about 이다. 적절한 조건 하에서 이러한 발화가 이뤄질 경우 무언가를 묻는다는 행위가 성공적으로 이뤄진다는 사실을 생각해본다면 이는 더욱 분명해진다.

이러한 고찰에 따라 Austin, 말함으로써in saying 모종의 행위(行爲)act가 수행되는perform 특정 단어들이 있다는 착상에 이르게 된다. 그러한 행위들은 피상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무언가를 기술하거나 보고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Austin의 요점은 다음과 같은 사례들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나는 사과한다.

나는 이로써hereby 내 담배 케이스를 내 조카에게 유증(遺贈)한다.

나는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한다.

나는 이 배를 Queen Elizabeth라 명명(命名)한다.

 

Austin의 표현을 빌어 말하자면 발화가 이뤄지는 상황이 행위를 무효한void것으로 만들지 않는 한(가령 위 문장들이 연극 공연에서 대사로 말해진 게 아니라 정상적이고 일상적인 상황에서 말해졌다든가, 마지막 사례의 경우 화자가 배를 명명할 만한 적절한 권한이 있는 사람인 경우 등), 이러한 단어들을 발화하는 것은 [발화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곧 사과하고 유증하고 약속하고 명명하기라는 행위를 수행하는 것이다. 이 문장들을 구두로 발화verbal act of uttering하는 사람은 자신이 그 행위를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고report the fact하고 있는 게 아니다. 즉 그 행위를 화자의 발화행위 이외의 요소들로 구성되는 -구어적인 행위non-verbal act인 것처럼 여기면서, 그 행위가 언어적 행위와 별도로 수행되고 있음을 기술하고 있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 행위들의 수행은 위 문장들에 대한 발화에 의해 전적으로 구성된다constituted. 이에 Austin나는 사과한다’, ‘나는 유증한다’, ‘나는 약속한다’, ‘나는 명령한다’, ‘나는 명명한다등과 같은 형태의 단어들을 수행적(遂行的) 동사performative verb라 칭하였다. 두 번째 사례에 나타나는 이로써hereby라는 단어는 수행적 동사가 쓰이는 수행적 발화의 특징을 잘 드러내 준다.

논문 수행문(遂行文)Performatives을 쓸 당시 Austin은 언어적 발화가 수행적인 것과 -수행적인 것(Austin은 후자를 사실 기술문constative이라 불렀다)으로 양분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즉 모든 발화가 한편으로 (몇몇 규약에 따라) 어떤 행동을 하는(행위를 수행하는) 발화와, 다른 한편으로 무언가를 말하거나 진술state하거나 주장assert하는 발화로 남김없이 구분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러한 차이점을 정확하게 기술하는 일이 매우 어려운 것으로 판명되었다. 한가지 문제는, 진술의 고유한 특징이라 여겨져 온 진리치-평가가능성truth-evaluability이라는 속성을 갖는지 여부가, 진술과 수행문을 명확하게 구분해주는 기준이 되지 못한다는 점이다. 우선 한편으로, 수행문 역시 사실에 직면한다confront facts”. 사태에 부합하지 않는 부당한 경고unjustified warning를 하는 경우라든가, 지키기 불가능하다는 것을 화자가 알고 있는 내용을 약속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가령 내가 그 얼음에 손 데지 않게 조심해!’라고 경고하거나 다음 주 수요일에 5+712임을 증명해볼게라는 약속을 한다면, 청자는 이 말을 진지한 발언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농담이라 여길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한 진술을 참이다거짓이다라고 기술하는 것은 대부분 매우 대강의crude 방식으로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Raglan 왕은 그 전투에서 승리하였다를 생각해보자. Raglan 왕이 부대의 지휘관이기는 했지만 사실상 그 전투는 병사들의 전투였으며, 이는 전투에서의 승리가 지휘관의 전략과는 무관했을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 진술을 참이다라든가 거짓이다라고 단순하게 평가하는 것은 많은 사안들을 무시한 채 대략적으로만 이뤄지는 셈이다.

두 번째 문제는, 나는 주장한다, 나는 묻는다 등의 표현들이 분명 수행적 동사처럼 여겨지긴 하지만, 가령 나는 피고가 결백하다고 주장하는 바입니다라 말하는 것과 피고는 결백합니다라 말하는 것은, 피고가 결백하다고 주장하는 역할을 동등하게 수행하는 것으로 여겨진다는 점이다. 마찬가지로 문 닫아!’나는 당신에게 문을 닫을 것을 명령합니다는 문을 닫으라고 명령하는 역할을 동일하게 수행한다. 이럴진대 행위하기doing와 말하기saying를 굳이 구분해야 할 근거가 있겠는가? 이러한 고찰은 말하기가 행위하기로부터 명확히 구분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기실 말하기 역시, 다소 특별한 종류의 행위이긴 하지만, 어쨌든 일종의 행위이다. 게다가 넓게 보아 진술하기로 분류되는 행위 자체에도 자세히 들여다 보면 다양한 종류가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라: 말하기, 상기시키기reminding, 얘기하기telling, 통지하기informing, 기술하기, 비판하기, 주의를 환기하기alerting 등등. 이를 감안하건대 수행문/-수행문 간의 경계선은 더욱 흐려진다.

일련의 비판적 고찰에 따라 Austin은 새로운 이론을 고안하기에 이른다. 이 이론은 매우 유명해지게 되어 그가 칭한바 화행(話行)speech-act이라는 현상을 다루는 분야에서 거의 표준적인 이론으로 자리 잡았다. 표준적인 화행은 세 가지 주요 하위-행위sub-actions로서 발화행위locutionary act, 발화수반(隨伴)행위(발화--행위)illocutionary act, 발화효과행위(발화성취행위)perlocutionary act 등으로 구성된다(네 번째로 특성 음소(音素)phoneme를 발화하는 조음행위phonic act가 있긴 하지만 여기서는 이를 다루지 않는다). 앞서 들었던 회를 먹는지 여부에 대한 질문 사례에 이 도식을 적용해보면 다음의 7.2와 같다:

 

7.2 화행에 따른 효력 구분

화행

정의

효력

발화행위

 

내용(인지적/표현적 의미)을 표현하는 행위

 

의도된 청자가 회를 먹는다는 명제를 표현하기

발화수반행위

 

 

말함으로써in speaking 수행되는 행위

(특히 효력을 표현하며, 이는 발화수반적 효력illocutionary force이라고도 칭해진다)

표현된 명제가 참인지 여부를 질문하기

 

발화효과행위

 

화자의 발화수반행위에 의해 수행됨으로써 청자에게 효과가 가해지는 행위

일례로, 청자로 하여금 자신이 회를 먹는지 여부를 답하도록 하기


이 도식은 화행론speech-act theory의 핵심 체계로서 Austin에 의해 처음 고안되고 차후 J. R. Searle에 의해 수정 및 발전되었다(Frege는 한 주장이 한 질문에 대한 적절한 대답이 될 수 있기 위해서는 양자에 공통되는 내용common content이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AustinSearle은 이러한 착상을 여타 서법들까지 포함하도록 확장한 셈이다). 너 회 먹어?라고 질문하는 사례를 취해보자. 우선 화자는 네가 회를 먹는다는 명제 내지 내용을 표현하는 발화행위를 수행한다. 이 경우 화자는 의문법 형식의 문장을 발화함으로써 그 명제를 표현하고 있는 셈이다(Austin은 이를 온전한 표준적인 뜻으로in the full normal sense 무언가를 말하는’” 행위라 칭하였다). 이 때 청자가 화자의 말을 들을 수 있는 적절한 위치에 있다는 등과 같이 발화가 이뤄지는 상황이 적절하고 정상적이라면, 화자는 그 발화행위를 통해 회를 먹는지 여부를 청자에게 묻는 발화수반행위를 수행한다. 마지막으로 발화효과행위는 청자의 반응에 따라 달라진다. 만약 발화효과행위가 성공적이라면, 이는 자신이 회를 먹는지 여부를 청자로 하여금 답하게끔 하거나 그와 유사한 결과를 야기할 것이다.

의미론은 발화행위와 관련되는바, 각종 언어표현들을 그 의미에 따라 분류하고 다양한 유형의 언어표현들이 갖는 의미를 기술한다. 발화행위는 명제를 표현하는 온전한 문장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가령 우리 언어에는 아야!’가 화자의 신체 일부의 고통을 표현한다는 규약이 존재한다. 다만 이 경우 표현되는 의미란 -명제적인non-propositional 것으로서, 인지적cognitive이라기보다는 전적으로 표현적expressive이다. 그러한 의미는 화자의 상태를 표현하되 무언가를 기술하지는 않는다. ‘아이고!’, ‘제기랄!’ 등의 어구 역시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이러한 언어표현들은, 고양이가 꼬리를 밟혔을 때 내는 소리 마냥 고통이나 어떤 문제로 인해 야기되는caused 단순한 소음noise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만약 당신이 실수로 외국인의 발을 밟아 그 사람이 ‘Ouch!’ 하고 말한다면 당신은 즉각 미안하다고 사과할 것이다. 이에서 알 수 있듯이 아야!’[자동적으로 나오는 무의미한 소리라기보다는] 고통을 표현한다는 것 역시 하나의 언어적 규약이다.

반면 화용론은 우선적으로 발화수반행위와 관련된다(종종 화행이라는 용어는 사실상 발화수반행위로만 제한되곤 한다). Austin에 따르면 발화수반행위는 대체로 규약적이다. 즉 적절한 종류의 발화수반행위가 달성되기 위해서는 일반적으로 충족되어야 할 특정 규칙rule 내지 표준standard이 존재한다. 발화수반행위의 시도가 실패하는 경우란 대체로, 그 행위가 달성되기 위한 조건으로서의 선제(先題)presupposition가 애초에 성립되어있지 않았던 경우이다. 예를 들면 일전에 부과된 과태료가 행정착오로 잘못 부과되었던 것이라 이미 취하되었는데도, 이 사실을 모르는 당신이 과태료를 납부하려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선제 개념에 대해서는 잠시 뒤 살펴볼 것이다). 그러한 경우 당신이 책임을 지려 하는 상황 자체가 결함이 있음에 따라, 그 상황에 책임을 진다는 당신의 행위 역시 애초에 수행되지 못한다. 반면, 발화수반행위가 일단 성공적으로 달성된 경우, 어떤 주장의 거짓됨이라는 속성은 Austin이 말한바 다양한 종류의 부적절성infelicity중 단지 하나에 불과하다. 이외에도 진실되지 못한 주장이라든가 약속, 고의로 하는 거짓 경고 등과 같이 다양한 양태의 부적절한 발화수반행위들이 존재한다. 흥미로운 점은, 어떤 경우에는 화자가 발화수반행위를 의도하지mean않았다고 해서, 즉 여차여차한 행위를 할 의도intention가 화자에게 없었다고 해서, 화자가 그 행위를 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가령 사과할게라고 말함으로써 사과를 하는 것은 인사를 하는 경우와 비슷하다. [내심 상대방을 그다지 반기거나 존중하지 않더라도 인사말을 건네는 것이 어쨌든 형식적으로나마 인사를 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다지 미안한 마음이 없으면서도 일반적으로 사과의 표시로 간주되는 발화행위를 하는 것은, 어쨌든 사과하기라는 발화수반행위를 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발화수반행위에는 앞서 언급한 기본적인 것들 외에도 매우 다양한 것들이 있다. 우리는 발화행위를 통해 꾸짖기, 기술하기, 경고하기, 주문하기, 요청하기, 비판하기, 견책하기, 환영하기, 책망하기, 칭찬하기, 인사하기, 질책하기, 청원하기, 나무라기 등등 실로 다양한 발화수반행위들을 수행한다(이들 중 일부 유형은 여타 것들을 하위 유형으로 포섭할 수도 있다).

발화효과행위에 대한 연구는 언어적 규약을 탐구한다기보다는 실제로 발생하는 언어적 사건들에서 발견되는 심리적이고 사회적인 특징들을 탐구한다고 할 수 있다. 발화수반행위에 의해 수행되는 발화효과행위는 청자에게 가해지는 특정 효과를 수반한다. 그렇기에 발화효과행위는 타동사transitive verb를 활용하여 기술될 수 있어야 하며, 이때 동사의 주어는 화자이고 목적어는 청자이다. 예를 들어 그렇게 말함으로써 Patton 장군은 부대원들의 사기를 고취하였다는 하나의 발화효과행위를 기술하는 문장이다. 이외에도 화자는 발화수반행위를 통해 청자를 화나게 하거나, 설득하거나, 청자의 관심을 끌거나, 놀래키거나, 지루하게 만드는 등 실로 다양한 효과를 청자에게 야기할 수 있다. 여기서 이로써라는 단어에 다시 주목해볼 수 있다. ‘이로써 나는 당신에게 문을 닫으라고 명령한다이로써가 올바르게 사용된 경우인 반면, ‘이로써 나는 당신이 문을 닫도록 설득하였다는 잘못 사용된 경우이다. [전자에서 명령하기라는 발화수반행위는 청자의 발화행위를 통해 충분히 성공적으로 달성되는바, ‘이로써라는 말에 의해 즉 나의 발화행위를 통해라는 말에 의해 나타내어질 수 있다. 반면 후자의 경우 설득되기라는 발화수반행위가 성공적으로 달성되는지 여부는 화자의 발화행위에만 의존하는 게 아니라 청자가 실제로 설득되었는지에 따라 최종적으로 결정되는바, ‘이로써라는 말로 나타내어질 수 없다.] 발화효과행위는 반드시 의도적intentional일 필요는 없지만 어쨌든 화자가 행한 things that the speaker did으로 기술될 수 있어야 한다. 가령 Patton 장군이 자신의 발화를 통해 부대원들의 사기를 고취하고자 의도했더라도, 도리어 부대원들이 위축되는 결과가 야기될 수도 있다. 그 경우 부대원들을 위축시키기라는 발화효과행위는, 의도적이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어쨌든 Patton 장군이 자신의 발화를 통해 행한 일이다.

발화효과행위에도 특정한 한계점이나 범위는 없다. 다만 발화효과행위는 발화수반행위와 달리 일반적으로 규약에 지배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발화효과행위는 언어를 이해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왜냐하면 말하기란 명백히 의도적인 활동intentional activity이기 때문이다. 일상에서 우리는 그저 아무 이유 없이 되는대로 지껄이지는 않는다. 우리는 특정한 이유에 따라, 즉 우리가 말을 건네는 상대방에게 어떤 효과를 가하기 위해 말을 한다. 의도했던 바와는 다른 발화효과행위가 야기되거나 혹은 아무런 효과가 야기되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긴 하지만, 어쨌든 발화효과행위는 보통 우리가 말할 때 최종적으로 겨냥하는 목표인 셈이다.

 

 

함의

 

정보전달conveying information은 의미론적인 사안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자연스럽다. 그런데 어떤 경우, 발화에 명시적으로 부호화encoded되지는 않은 정보가 그 발화에 의해 의도적으로 전달되기도 한다. 이런 식으로 전달되는 정보란 엄밀히 말하면 발화와 연관된 의미론적인 사안에 속하지 않는 성질의 것이다.

Grice가 제시한 유명한 사례를 들어보자. Jones의 부모님이 아들이 다니는 기숙학교의 교장선생인 Smith 씨에게 Jones가 학교생활을 잘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Smith는 답하길 글쎄요, 그 애가 퇴학을 당하진 않았지요하고 말한다. 이 대답에 자연스럽게 Jones 부부는 아들의 생활태도가 나쁘다는 메시지를 Smith 씨가 의도했다고 여길 것이다. 물론 Smith 교장은 그러한 내용을 말하지 않았으며, 그의 말은 그러한 내용을 논리적으로 함축logically entail하지도 않는다. 교장의 말이 참이면서도 Jones가 학교생활을 잘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 상상가능conceivable하기[즉 선험적논리적으로 배제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Smith 교장은 자신의 발화를 통해 Jones의 학교생활이 불량하다는 메시지를 분명 성공적으로 전달하였다. 그러니 Jones 부부가 아들의 학교생활이 방정치 못하다고 결론 내린 것은 [논리적으로 타당한 추론은 아니더라도 어떤 다른 의미에서는] 올바른 추론이었던 셈이다.

Grice는 이러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대화적 함의(含意)(암시함축)conversational implicature 내지는 축약하여 함의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Smith 교장의 진술은 Jones의 학교생활이 불량하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함축하지는 않지만] 대화적으로 함의한다implicate. 함의 개념을 일반화하자면 다음과 같다:

 

진술 P는 다음의 경우 명제 Q함의한다
: PQ를 논리적으로 함축하지는 않지만, 대화의 맥락상 충분한 정보를 갖춘well-informed 능숙한competent 청자1)라면 화자가 Q를 전달하려 의도한다고 여기는 경우.

1) 원문에는 ‘speaker’로 되어 있으나 착오인 듯하다.


Austin의 화행론적 용어를 활용하여 말하자면, Grice식의 함의란 일종의 의도된 발화효과적 효력intended perlocutionary force이라 할 수 있다.

주의할 사항이 있다. 전술하였듯이 설사 Jones가 학교생활을 잘하고 있더라도 Smith의 말은 적어도 참일 수 있으며, 그 경우에도 Smith는 어쨌든 올바르게 말한 셈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대화적 함의는 언제든 취하될cancelled 여지가 있다. 예를 들어 교장이 앞의 발언에 이어서 아직 소식을 전해 듣지 못하셔서 혹여 걱정하실까 말씀드리는데, 어제 급식실에서 있었던 불미스런 일 때문에 Jones네 학급 인원들 중 거의 절반이 근신 조치를 받았거든요하고 덧붙였다 해보자. 그 경우 ‘Jones가 퇴학을 당하지는 않았다는 앞서의 발언에 의해 함의된바 ‘Jones의 생활태도가 불량하다는 내용은 취소될 것이다.2) 교장의 발화를 앞 단락에서의 Jones 부부와 같은 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교장이 자신이 함의했던 바를 이런 식으로 취소하지 않는 경우에만 합당하다.


2) (原註) Grice규약적 함의conventional implicature대화적 함의를 구분한다. 규약적 함의는 취하될 수 없는바, 어떤 문장이 특정 내용을 규약적으로 함의하는 경우 그 문장을 발화하는 화자는 함의된 바에 대한 책임을 면할 수 없다. 가령 그는 서둘러 집에 갔다, ‘그는 별다른 이유 없이 서둘러 집에 갔다고 말하는 것과 논리적으로 모순되지는 않지만, 그가 서둘러 집에 가야 할 이유가 있음을 언제나 함의한다.


이번에는 Smith 교장이, Jones가 학교생활을 잘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글쎄요, 그 애가 퇴학을 당하진 않았지요하고 말하고는, 자신의 발언이 함의하는 바를 취소하지 않았다 해보자. 그는 아무런 거짓된 것도 말하지 않았다. [Jones가 학교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해도] 교장의 말이 의미론적으로 부적절semantically improper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경우 그의 말은 화용론적으로pragmatically 부적절하다. 좀 더 정확히 말해, 교장이 Jones의 생활태도가 좋지 못하다는 내용을 전달하고 있다고 추론하는 것이 청자 입장에서는 합리적이기 때문에, 이러한 상황 하에서 교장의 말은 화용론적으로 부적절하다.

Grice에 따르면 이러한 대화적 함의 현상이 발생하는 이유는 대화를 지배하는 일반적인 준칙(準則)maxim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Grice는 이러한 준칙들 집합을 협조원리cooperative principle라 칭하였다. 협조원리는 다음과 같은 몇몇 하위-준칙들로 구성된다:

 

의 준칙maxim of quality: 거짓이라 믿는 바를 말하지 말 것, 적절한 증거adequate evidence가 결여된 바를 말하지 말 것.


방식manner의 준칙: 간결하게 말할 것be brief, 애매성ambiguity모호성obscurity불분명성vagueness을 피할 것.


관계relation의 준칙: [대화의 맥락상] 적절한 사안만을 말할 것be relavant.


quantity의 준칙: 당면 목적상 요구되는 바보다 많지도 적지도 않은 정보만을 말할 것.

 

이런 준칙들이 준수되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대화란 하나의 관습(慣習)practice, 즉 특정 규칙들에 의해 통제되는 관습적 활동practical activity이다. 다만 위의 준칙들이 모든 대화에서 전적으로 지켜지거나 아니면 전적으로 위반되는 것은 아닌바, 각 준칙들은 대화의 성격에 따라 다양한 방식과 다양한 정도로 준수될 수도 있고 위반될 수도 있다. 대화란 애초에 엄밀하게 정의되는 성질의 활동이 아니기에, 농담, 이론적 논의, 논쟁, 논증, 진솔한 대화, 가벼운 잡담 등과 같은 다양한 형태의 대화들은, 각각에 고유한 규칙 내지 원리의 통제를 받음과 더불어 위의 준칙들에 각기 다른 정도의 가중치를 둔 채로 이뤄질 것이다.

어쨌든 협조원리를 통해 Grice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다양한 종류의 대화에서 대화 참여자들이 상호 협조적인 태도를 취한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대화에 참여한 사람들은 암묵적으로 상대방이 상호 이해를 돕는 방식으로 말할 것이라 간주한 채로 대화에 임한다. 따라서 대화적 함의가 작동하는 이유 역시, 화자들 서로가 협조원리의 하위-준칙들을 준수하려 노력하면서 말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는 게임 참여자들이 서로를 게임에서 이기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라 여긴다는 사실과 매우 유사하다. [게임 참여자들이 게임에서 이기기 위해 진지하게 노력하는 게 아니라 그저 되는대로 아무렇게나 게임에 임한다면 게임이 정상적으로 진행될 수 없듯이(혹은 적어도 게임이 아주 시시하고 재미없어지듯이), 대화 참여자들이 협조원리의 준칙들을 준수하지 않고 서로를 그런 식으로 간주하지도 않는다면, 어떤 종류의 대화든 정상적인 의사소통이 이뤄질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번 초입에 제시된 사례에서 Jones 부부 역시 Smith 교장이 최대한 정보적인informative 내용을 말하려 노력하고 있다고 간주했을 것이다. 그러니 만약 Jones가 학교생활을 잘하고 있다면 교장은 그에 준하도록 사실대로 올바르게 말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퇴학을 면하는 것은 건전한 학교생활에 대한 필요조건이기는 하지만 충분조건과는 거리가 멀며, 만약 Jones의 생활태도가 좋다는 게 사실이라면, 교장은 퇴학을 당하지 않았다는 말보다는 더 정확하고 사실에 근접한 말을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교장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따라서 Jones 부부가 다음과 같이 추론하는 것은 자연스럽고도 정당하다: Smith 교장은 최대한 정보적이고 진실되게 말하려 노력하고 있으면서도, 우리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끔 정중하게 말하려 노력하는 중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실대로 말할 수 있는 것들 중에서 그나마 가장 긍정적인 내용을 말한 셈인데, 그게 바로 ‘Jones가 퇴학을 당하지는 않았다이다. [그리고 앞서 살펴보았듯 이 말은 Jones가 학교생활을 잘하지 못하고 있다는 내용을 대화상 함의한다.] 따라서 최종적으로 교장은 우리 아들의 생활태도가 그다지 좋지 못하다는 정보를 전달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함의 개념의 적용

 

함의 개념은 언어에 대한 논리적 분석을 방해하거나 복잡하게 만드는 다양한 현상들을 설명하는 데에 유용하다. 예를 들어 자연언어에서 라면 이다if then 로 표현되는 실질적 조건문에 대한 진리-함수적 분석에 따르면 다음 진술은 참이다:

 

당나귀가 벼룩보다 작다면, 당나귀는 고양이보다 크다.

 

이 문장이 참인 이유는, 진리-함수적 분석에 따르면 전건이 거짓일 경우 조건문 전체는 참이기 때문이다(1, ‘논리적 구문론과 논리적 연산자참조). 하지만 이러한 분석은 기이하게 여겨진다. 벼룩보다 작으면서 고양이보다 큰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위 조건문은 어딘가 잘못된 것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이러한 조건문의 부적절성은 의미론적인 측면에서보다는 화용론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 [위 문장 자체가 의미론적으로 참이긴 하지만,] 위 문장을 말하는 것은 분명 올바르지 않다. 다만 위 문장의 발화가 잘못된 이유는 그 문장이 참이 될 수 없기 때문인 것은 아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당나귀가 벼룩보다 작지 않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즉 위 조건문의 전건의 진리치가 거짓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따라서 이 조건문은 그 누구에게도 정보적이지 않다. 당나귀가 말과 비슷한 동물이며 벼룩보다야 훨씬 크다는 것은 누구나가 다 아는 사실이다. 이렇듯 전건의 거짓됨이 누구에게든 명백히 알려져 있기에, 위 조건문의 전건이 참이면서 후건 역시 참인 경우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 역시 누구나 다 안다. 진리-함수적 분석에 따르면 전건의 거짓은 조건문 전체의 참을 함축하기 때문에(그러나 그 은 성립하지 않는다), 이 조건문을 주장하는 것은 발화가 정보적이어야 한다는 의 준칙을 어기는 셈이다. 따라서 이 조건문은 의미론적으로 참이지만 화용론적으로 부적절하다pragmatically improper.

일반적으로, 조건진술conditional statement을 주장하는 것이 적절해지는(즉 정보적이게 되는) 경우는, 전건과 후건 양자의 진리치가 적어도 대화 참여자들에게 알려져 있지 않은unknown 경우 내지는 청자가 모를 것이라고 화자가 합당하게 추정할 수 있는 경우에 한한다, 따라서 일상적인 상황에서라면, 전건이 거짓이라는 점이 명백히 알려져 있는 조건문은 주장가능하지 않다never assertible. 위의 당나귀-조건문이 기이하게 여겨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앞 단락에서 살펴보았듯이 위 조건문의 전후건 양자의 진리치는 명백히 알려져 있는바, 조건문의 주장가능성이 성립하기 위한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다.]

[그런데 조건문이 적절하게 주장될 수 있는지 여부에 대한 직관 외에도, 우리에게는 조건문의 내용 자체의 적절성 내지 정당성에 대한 직관 역시 존재한다. 가령 ‘2보다 큰 모든 짝수가 두 소수의 합이라면, 화성에는 생명체가 존재한다, 후건 양자의 진리치가 알려져 있지 않음에도 진지하게 발언하기엔 곤란한 조건문인 것처럼 여겨진다.] 그렇다면, [적절하게 주장가능한 동시에 내용의 측면에서도 적절한 조건문의 경우,] 조건문의 구성요소가 갖는 진리치가 조건진술을 정당화하는 요인이 아니라면, 무엇이 그 진술을 정당화해주는가? 바로 전후건 간에 성립하는 모종의 연관성connection으로서,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는 대체로 인과적 연관성causal connection인 경우가 많다. 가령 저 고기가 상했다면 저 개는 그걸 토해낼 것이다라고 말하는 화자는, 그 고기가 상했는지 혹은 그 개가 고기를 토해낼는지 여부를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개가 상한 고기를 먹으면 대체로 뱉어낸다고 믿고 있기에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이 조건문을 받아들인 사람이 연후에 전건이 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 사람은 [논리학의 전건 긍정규칙에 의해] 후건을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또는 전건을 받아들인 연후에 후건이 거짓임을 알게 되면, [후건 부정규칙에 의해] 전건 역시 거짓임을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예외가 있긴 하지만 이를 일반화하자면, 조건문을 주장하는 것이 적절한 경우는, 후건 양자의 진리치가 알려져 있지 않거나 혹은 명시적으로는 알려져 있지 않다고 화자가 합당하게 추정할 수 있으면서, 그 조건문을 주장할 법한 여타 근거를 화자가 지니고 있는 경우에 한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엔 협조원리가 위반된다.

이러한 관점은 우리가 왜 니가 김태희면 나는 장동건이다’3)와 같은 식의 농담을 제대로 된 농담으로 받아들이는지를 설명해준다. 이 문장의 화자는 상대방이 김태희가 아님을 알고 있다. 화자가 장동건이 아니라는 사실은 모든 이가 알고 있기 때문에 [혹은 모든 사람들이 이를 받아들이리라고 화자가 추측하기 때문에] 청자는 화자의 말을 상대방이 김태희가 아니라는 의미로 이해한다. [즉 청자는 화자의 조건문 전체를 받아들이되 그 후건이 명백히 참이 아니라는 점에 근거하여, 후건 부정규칙에 의해 전건이 거짓임을 말하고자 한다는 것이 이 조건문의 발화 의도라고 추론하는 셈이다.] 이런 식의 발화가 이렇듯 적절한 농담으로 받아들여진다는 사실은 일상에서 우리가 조건문을 암묵적으로 진리-함수적인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만 그러한 진리-함수적 이해가 작동할 수 있게 하는 화용론적인 발화조건이 먼저 성립되어 있어야 한다. 만약 화자가 실제로 장동건이라거나 혹은 정말로 김태희 만큼 외모가 출중한 사람을 두고 위의 발언을 한다면, 이는 적절한 농담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3) 원문에서 제시된 사례는 저게 갈까마귀라면 나는 원숭이 삼촌이다이다.


협조원리를 위반하는 발화(특히 의 준칙을 위반한 발화)가 화용론적으로 부적절하다는 진단은, 선언문이 의미론적논리적으로 참임에도 그에 대한 발화가 기이하거나 부적절하게 여겨지는 이유를 설명해주기도 한다. 가령 Marie의 차가 피아트임을 아는 사람이 ‘Marie의 차는 피아트이거나 폭스바겐이다라고 말한다면, [앞의 선언지가 참이기에] 그 선언문 전체가 참이긴 하지만 그 발화는 부적절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두 선언지 중 하나가 명백히 참임을 알면서도 두 개의 선택지를 제시하는 것은 [필요한 만큼의 정보 이상도 이하도 말하지 말라는 양의 준칙을 어기는바] 오도적misleading일 것이다.4)대왕고래보다 큰 모든 포유류는 야행성이다라는 보편 양화문 역시 마찬가지이다. 양화문에 대한 고전적인 술어논리에 따르면, 대왕고래보다 큰 포유류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 보편 양화문은 참이다.5) 하지만 이 문장을 말하는 것은 오도적이다. 그보다는 대왕고래보다 큰 포유류는 없다고 주장하는 편이 더욱 정보적이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많은 사례들에서 보이는바 정통적인 의미론 내지 논리학과 일상적인 언어적 직관 사이에서 빚어지는 갈등이나 반직관성은 Grice적인 관점에 의해 다소 해소될 수 있다.


4) (原註) 이 선언문은 ‘Marie의 차가 피아트가 아니라면 그건 폭스바겐이다와 진리-함수적으로 동치truth-functionally equivalent이다. Marie의 차는 피아트이기에 전건은 거짓이며 따라서 조건문 전체는 참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즉 전건의 진리치가 명백히 알려져 있기 때문에] 이 조건문은 주장하기에는 화용론적으로 부적절하다. ‘Marie의 차가 폭스바겐이 아니라면 그건 피아트이다역시 마찬가지이다. [이 조건문 역시 본문의 선언문과 진리-함수적으로 동치인데, 후건이 참이기에 조건문 전체가 참이라는 점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선언지 중 하나의 진리치가 명백히 알려진 선언문의 발화는, 본 각주가 붙은 단락에서 설명되듯이 의 준칙을 어기기에 화용론적으로 부적절한 것으로 설명될 수도 있고, 본 각주 및 본문에서 앞서 살펴보았듯 선언문과 조건문 간 논리적 동치관계에 근거하여, 후건의 진리치가 청자에게 알려져 있지 않거나 그렇다고 추정될 수 있는 경우에만 조건문의 발화가 적절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는 조건문의 주장가능성에 의해 설명될 수도 있다.]

5) 이 양화문을 형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모든 x에 대해 ((x는 포유류이다 & 모든 y에 대해 (y는 대왕고래다 xy보다 크다)) x는 야행성이다)
(x)((Mx&(y)(WyBxy))Nx))

본문에서 말해지듯이 대왕고래보다 큰 포유류는 없기에, 내부 부속문으로 취해진 조건문 형식의 명제함수에서 전건 ‘Mx&(y)(WyBxy)’는 모든 x에 대해 거짓이다. 그에 따라 명제함수 전체는 모든 x에 대해 사소하게 참이며, 따라서 최종적으로 보편 양화문 전체 역시 사소하게 참이다.


적은 수의 단어들로 다양하고 풍부한 정보를 전달할 수 있는 것은 대체로 우리가 대화에서의 협조성에(특히 관계 및 의 준칙에) 암묵적으로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오늘 저녁 런던의 한 술집에서 친구들과 파티를 열기로 했는데, 오기로 했던 친구 중 한 명이 오후 늦게 야 미안, 나 지금 출장 때문에 에딘버러에 와 있어라고 문자를 보냈다 해보자. 대화의 맥락상 가용할 수 있는 여러 정보들이 주어져 있는 한(일테면 단지 파티 때문에 에딘버러에서 런던까지 가기엔 너무 멀고 번거롭다든가 등), 그 친구의 문자는 그 말만으로도 오늘 저녁 파티에 자신이 참석하지 못한다는 내용을 전달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될 것이다.

그런데 협조원리는 Grice적인 관점이 지닌 더욱 복잡한 측면을 드러내기도 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사례들에서 대화적 준칙들은 대화 참여자들이 발화에 의해 어떤 명제가 표현되는지를 알고 있다는 전제 하에서 비로소 작동하기 시작했다. 즉 앞의 사례들에서 협조원리의 준칙들은, 발화에 의해 문자적으로 표현되는 명제가 무엇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발동한 게 아니라, 발화에 의해 함의되는 바를 들춰내기 위해 발동했다. 그런데 때에 따라서는 의미론과 화용론이 상호 침투하여 함께 작동해야 하는 경우가 존재한다. 당신의 룸메이트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해보자:

 

집주인이 화요일에 창문 고쳐줄 거라 말했어.

The landlord said on Tuesday he would fix the window.

 

이 문장은 애매하다. 룸메이트의 말이 표현하는 명제는, 집주인이 창문을 고쳐주겠다고 진술한 날이 화요일이었다는 것인가, 아니면 집주인이 창문을 고쳐주기로 한 날이 화요일이라는 것인가? 이런 경우 대체로 청자는, 화자가 지니고 있을 법한 믿음들 및 목적들과 유관한 정보들을 포함하여 발화의 맥락과 연관된 정보들을 토대로 위 발화가 지닌 애매성을 제거함으로써, 둘 중 어떤 명제가 화자의 의도에 부합하는지 결정할 것이다. 가령 당신은 다음과 같이 추론할 수도 있다: ‘집주인이 평일에는 매우 바빠서, 건물을 점검하거나 보수할 일이 생기면 대체로 주말에 들른다는 사실을 나랑 룸메이트는 잘 알고 있다. 그러니 룸메이트의 말을 첫 번째로 해석하는 편이 더욱 그럴듯하다.’

이러한 경우를 감안하건대, 발화에 의해 어떤 명제가 표현되는지를 확인하는 작업과 발화에서 어떤 내용이 함의되는지를 확인하는 작업은, [별개의 것이라기보다는] 발화의 해석과 연관된 모든 정보를 검토하는 동일한 하나의 해석절차가 지닌 두 가지 측면이라고 간주하는 편히 합당하다.

 

 

선제

: Russell의 기술구 이론에 대한 StrawsonDonnellan의 반박

 

Strawson. Russell의 한정 기술구 이론에 따르면(3참조) ‘F(F한 그것)’ 형식의 표현인 한정 기술구는 대상을 지시하는 의미론적 기능을 갖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한정 기술구의 유의미성은 단일한 F한 것 내지는 F한 것들의 존재에 의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의 왕은 부유하다와 같은 문장은 미국의 왕인 사람이 단 하나 존재하고 그 사람이 부유하다는 명제를 말하고 있다. 미국의 왕은 없기 때문에 그 문장에 의해 표현되는 명제는 거짓이다.

이에 대해 Peter Frederic Strawson(1919-2006)은 유명한 논문 지시에 관하여On Referring(1950)에서 다음과 같은 반론을 펼쳤다: 누군가 실제로 미국의 왕은 부자야!’ 하고 말한다면, 청자는 그 사람의 말이 단순히 거짓이라고 반응하지는 않을 것이다. 청자는 아니, 미국의 왕은 부자가 아니야!’ 하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보다 자연스러운 반응은 뭔 소리야. 뭘 잘못 알고 있는 모양인데, 미국엔 왕이 없어와 같은 식이 될 것이다. 즉 우리는 화자의 말에서 진리치-평가가능한truth-evaluable 그 무엇도 애초에 말해지지 않았음을 지적할 것이다. Strawson에 따르면, 화자는 무언가를 지시하기 위해 미국의 왕이라는 사용하였지만, 그러한 시도가 단지 실패fail했을 따름이다. 이는 눈가리개를 하고 피냐타piñata를 치는 놀이에서, 피냐타가 없는데도 피냐타를 치려고 막대기를 휘두르는 격이다. Strawson에 따르면 한정 기술구의 사용은 그 지시체의 존재를 선제(先題)한다presppose. 즉 한정 기술구가 사용되는 경우, 그 지시체가 존재한다는 것은 통상 명시적으로 말해지지는 않고 다만 선제될 뿐이다.

화용론적 개념으로서의 선제와 의미론적논리적 개념으로서의 함축을 명확하게 대비시켜보자면 다음과 같다:

 

PQ를 함축한다면, Q가 거짓일 경우 P는 거짓이다.

PQ를 선제한다면, Q가 거짓일 경우 P는 참도 거짓도 아니다.

 

 

결정적으로 StrawsonF’ 형태를 지닌 지시적 표현의 의미가 그 표현이 무언가를 지시하는 데에 성공하였는지 여부와는 무관하다고 주장한다. Strawson이 보기에 의미란 언어표현이 지니는 특징인 반면, 지시란 화행 즉 언어표현의 사용이 지닌 특징이다. 지시하기refering는 우리가 하는 그 무엇이지 추상적으로 생각된 언어표현의 속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한정 기술구를 포함한) 임의의 단칭용어의 지시는, 용어가 문장 내에서 표준적으로 사용됨으로써 화용론적으로 선제될 뿐 의미론적으로 함축되지는 않는다.

사실상 Strawson은 다음과 같은 Frege적인 착상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하는 셈이다: F와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 문장 FG하다의 의미에는 아무런 영향이 미치지 않되 다만 그 문장에 대한 발화는 여하한 진리치도 갖지 못한다. 이런 점에서 Strawson에게 의미란 Frege주의적인 뜻과 같다. 따라서 적어도 언뜻 보기에 StrawsonFrege와 마찬가지로 2장에서 살펴본바 아메리카의 왕은 존재하지 않는다와 같이 참인 단칭존재 부정문의 문제에 직면하는 듯하다. 하지만 언어의 의미론적 기능이라든가 명제, 뜻과 같이 일상과는 다소 동떨어진 측면보다는 언어가 구체적으로 사용되는 방식에 천착함으로써, Strawson은 일상언어의 실행practice이라는 측면에 더욱 가까이 다가서게 되었다. 이런 점으로 인해 그는 Austin과 더불어 일상언어철학자ordinary language philosopher로 분류되고는 한다. 일상언어철학자들은 일상언어의 표면적인 현상을 면밀히 탐구함으로써, 단칭존재 부정문 퍼즐과 같은 까다로운 문제들에 해결의 실마리를 던져주었다. 선제 개념은 이러한 일상언어철학적 접근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철학적언어학적 화용론 양 분야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선제 개념은 지시의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우리의 일상언어 전반에서 다양한 형태로 발견된다. 앞서 Austin의 이론을 살펴볼 때도 선제현상의 사례가 언급된 바 있다. ‘그녀는 그에게 키스했던 것을 후회했다는 그녀가 그에게 키스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선제한다. ‘이제 그는 더 이상 피아노를 연주하지 않는다는 그가 이전에 피아노를 연주했었음을 선제한다. ‘그녀는 탈세를 범하길 그만두었다는 그녀가 탈세를 한 적이 있음을 선제한다.

 

Donnellan. Keith Sedgwick Donnellan은 한정 기술구가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방식에 대해 Russell과도 다르고 Strawson과도 다른 또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이에 따르면 한정 기술구는 적어도 어떤 경우에는 지시적 표현의 기능을 수행한다. Smith를 살해한 혐의로 기소된 Jones의 재판현장에 당신과 내가 청중으로 참석해 있다 해보자. 사실 Smith를 살해한 진범은 온전한 정신을 갖춘 냉혈한 살인마 Brown이다. 하지만 부당하게 기소된 당사자 Brown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이 사실을 모르며 당신과 나 역시 Jones가 진범이라 믿고 있다. 사람들이 그렇게 설득된 이유 중 하나는 피고석에서 Jones가 보여준 기괴하고 미친 듯한 모습 때문이기도 하다. 실제로도 Jones는 제정신이 아니다. 재판을 참관하던 내가 당신에게 ‘Smith 살인범은 미친놈이야하고 속삭이자 당신은 내가 보기에도 그래하고 답한다.

이 상황에서 나의 발화는 어떤 식으로든 ‘Jones는 미친놈이다와 동등한 의미를 갖는바, 분명 나는 Jones에 관해 참인 무언가를 말하였다. 그런데 Russell에 따르면 내가 발화한 문장은 거짓이다. Russell의 분석에 따르면 ‘Smith 살인범(Smith를 살해한 바로 그 사람the person)’이라는 한정 기술구를 만족하는 대상은 제정신을 갖춘 살인마 Brown이기 때문에, ‘Smith 살인범은 미친놈이다Jones에 관해서가 아니라 Brown에 관해 그가 미쳤다는 명제를 표현한다. [하지만 그러한 실제 사실이야 어찌되었든 나는 거짓인 문장을 사용하여 어떤 점에서는 Jones에 관해 참인 무언가를 말한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이러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Donnellan지시와 한정 기술구Reference and Definite Description(1966)에서 한정 기술구의 지시적 사용referential use속성적(귀속적) 사용attributive use을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한정 기술구를 말함으로써 화자가 청자로 하여금 지시체를 확인할 수 있게 하려는 용도로 사용되는 경우 그 한정 기술구는 지시적이다. 반면 Russell의 관점이 보여주는 방식으로, 그 무엇이 되었든 한정 기술구를 만족하는 대상에 관해 청자가 무언가를 말하려는 용도로 사용되는 경우 그 한정 기술구는 속성적(귀속적)이다. 이러한 구분에서 핵심은 지시적으로 사용되는 경우 기술구 자체는 그다지 본질적인 사안이 아니라는 점이다. 즉 지시적으로 사용된 한정 기술구는 단지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동원되는 보조적인 도구일 뿐, 화자가 진정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의 일부가 아니다. 화자가 의도한 메시지가 [발화가 이뤄지는 맥락상 어떤 식으로든] 성공적으로 소통되는 한, 그 메시지가 어떤 언어적 포현으로 포장되어 전달되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Donnellan이 보기에 Russell의 관점이 지닌 문제점은, 이렇듯 한 대상이 한정 기술구를 만족하지 않더라도 그 기술구가 사용됨으로써 의도된 그 대상이 성공적으로 지시되는 경우를 적절하게 설명해내지 못한다는 점이다.

Donnellan에 따르면 1950년 논문에서 개략적으로 제시되었던 Strawson의 관점 역시 이러한 구분을 포착해내지 못한다. 적어도 그 F가 존재하는 경우라면, ‘F’가 사용됨으로써 다름 아닌 바로 그 F가 성공적으로 지시된다는 데에는 Strawson역시 Russell에게 동의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Jones 사례에서 보았듯이 F’를 만족하는 대상이 엄연히 존재하더라도, 발화된 F’가 자동적으로 그 대상을 지시한다고 보기 어려운 경우가 존재한다.]

위 사례를 제시하면서 나는 ‘Smith 살인범은 미친놈이다라는 나의 발화에 의해 표현된 명제라 말하지 않고 단지 모호하게 내가 의사소통한 것이라는 식으로 서술하였다. 위 사례의 맥락에서 내가 발화한 그 문장은 Brown에 관해 거짓인 명제를 표현한 것인가, 아니면 Jones에 관해 참인 명제를 표현한 것인가? 만약 전자라면 굳이 Russell의 관점에 반대할 이유는 없겠지만, 이러한 설명은 실제 이뤄진 언어적 상황을 올바르게 포착하지 못하는 셈이다. 하지만 그 답이 후자라면, 설사 사건의 전모가 밝혀져 Smith를 살해한 진범이 Jones아니라는 사실을 당신이 알게 되었더라도, ‘Smith 살인범은 미쳤다라는 나의 발화가 ‘Jones는 미쳤다와 동치이며 이는 어쨌든 참이라는 데에 당신은 동의해야만 할 것이다.

한편 이 문제와 관련하여 Kripke화자-지시와 의미론적 지시Speaker’s Reference and Semantic Reference(1977)에서, Grice적인 관점과 밀접히 연관된 한 가지 중요한 구분을 거론하면서, Russell의 이론에 손상을 가하지 않고도 이 문제가 정리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강도 두명이 물건을 훔치고 있는데 갑자기 한 명이 상대방에게 작지만 다급한 목소리로 , 경찰들 오고 있어하고 말한다면, 그러한 특정 맥락에서 화자에 의해 의도된 내용은 그 문장의 문자적(축자적(逐字的)) 의미literal meaning와 분명 다르다. 그 강도가 의도한 바는 이제 그만 털고 튀자!’와 같은 식이 될 것이다. 따라서 화자-의미speaker’s meaning의미론적 의미semantic meaning가 구분되어야 한다. 후자가 언어표현의 사용을 지배하는 언어적 규칙에 의해 결정되는 반면, 전자는 Grice의 협조 준칙들 및 화자가 품은 다양한 특정 의도들에 따라 결정된다. (따라서 대화적 함의 개념은 화자-의미에 속하는 사안으로 간주되는 편이 적절하다.)

Grice가 제시한 화자-의미 및 의미론적 의미 구분과 유사하게, Kripke화자-지시speaker’s reference와 의미론적 지시를 구분한다. 당신과 내가 먼 거리에 있는 Bob을 보고 있는데 우리 둘 다 그를 Jarda로 착각하고 있다 해보자. 내가 ‘Jarda 쟤 뭐해?’ 하고 묻자 당신이 낙엽 치우고 있네하고 답한다. 이 상황에서 의미론적 지시체는 Jarda이지만 화자-지시체speaker’s referentBob이다. [고유명 ‘Jarda’가 의미론적으로 지시하는 대상은 Jarda이지만, 내가 그 고유명을 사용하여(발화하여) 가리킨 사람은 실제로는 저 멀리 보이는 Bob이었기 때문이다.] 앞서의 Smith 살해범 사례 역시 이와 매우 유사한 상황이다. ‘Smith 살해범은 미친놈이다라는 나의 발화에서 ‘Smith 살해범의 의미론적 지시체는 진범 Brown이지만 화자-지시체는 저기 피고인석에 있는 Jones이다. 이렇게 볼진대 한정 기술구의 지시체에 대해 Donnellan이 제시한 구분은 화용론적인 차이에 기인한 것일 뿐, 의미론적인 것은 아닌 셈이다. Donnellan 식의 구분을 받아들인다 해서 지시적 용어 내지 한정 기술구에 대한 Russell 식의 의미론적 분석에 결점이 있다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 Kripke의 주장이다. 공구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은 일자드라이버를 끌로 착각하여 그것을 끌처럼 사용할 수도 있다. 이렇듯 한 도구의 목적이나 사용법을 착각하여 그 도구를 오용하더라도 어쨌든 기도한 작업을 완수할 수 있는 것처럼, Donnellan이 제시한 현상은 기실 그다지 복잡하거나 불가사의한 현상은 아닌 것이다. [도구를 잘못 사용하고도 목적이 달성되었다 해서 그 도구의 원래 쓰임새가 바뀐다고 할 수는 없는 것처럼, 한정 기술구를 지시적으로 사용하여 그 기술구를 만족하지 않는 대상을 성공적으로 지시했다고 해서, 그 기술구와 올바른 지시체 간의 의미론적 관계가 바뀌는 것은 아니다.]

 

 

은유

 

은유(隱喩)mephor는 다루기 매우 까다로운 주제다보니 이에 대한 논의는 언어철학 이외에도 심리학, 인식론, 문예비평, 과학철학, 심리철학 등등 실로 다양한 분야에 걸쳐 있는 복잡한 논쟁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 여기서는 이번 장에서 살펴본 화용론적인 수단들이 은유 현상을 밝혀내는 데에 일말의 도움이 될 수 있음을 알아보는 정도로만 은유에 대해 논의해보고자 한다. 그 이상의 심화된 내용을 원한다면 추가적인 읽을거리 목록에 제시된 문헌들을 참고하길 바란다.

우선 은유의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보자:

 

Richard는 사자다.

 

[]은 요요yo-yo.

 

그의 말은 그 문제에 일말의 빛을 던져주었다cast some light on.

 

그녀는 격정에 휘말렸다.

She was carried away by passion.

 

빛은 파동으로 이루어져있다consist of.

 

그는 그녀로 인해 애태웠다.

He burns for her.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

I’ve some new ideas floating around in my head.

 

그녀는 그녀 세대에서 가장 화려한 꽃이었다.

 

나는 지옥으로 가는 고속도로 위에 있어.

I’m on a highway to hell.

 

돈은 나무에서 자라지 않는다[공짜는 없다].

 

Giovanni는 아버지의 전철(前轍)을 밟았다follow in footsteps.

 

은유란 대체 무엇인가? 다음과 같이 매우 다양하면서도 일견 설득력 있어 보이는 설명들이 시도되어왔지만, 모두 최종적으로 충분히 만족스럽지는 않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은유는 비교를 진술한다state a comparison.
이는 올바르지 않다. 은유는 비교를 단순히 진술하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뉴욕은 파리보다 크다역시 비교를 진술하지만 은유적이지는 않다. 기껏해야 은유는 비교를 함축imply하거나 암시suggest할 뿐이다.


은유는 곧 직유simile이다.
이는 올바르지 않다. 대체로 은유는 그에 대응하는 직유보다 더욱 강렬하고 인상적인 효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Richard는 사자다‘Richard는 마치 사자 같다를 비교해보라.

은유는 유사성similarity을 진술한다.
이는 올바르지 않다. 유사성을 진술하는 것은 오히려 직유이기 때문이다. 직유법이 사용된 내 사랑은 장미와 같다는 유사성을 진술하지만, ‘내 사랑은 장미다라는 은유는 그렇지 않다. 게다가 직유가 문자 그대로 참literally true이면서도 그에 대응하는 은유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다.


은유는 문자 그대로 거짓이다.
이는 올바르지 않다. 가령 앞서 언급된 돈은 나무에서 자라지 않는다는 문자 그대로 참이다.


하나의 은유는 문자 그대로의 문장들literal sentences의 연언과 동치이다.
이는 올바르지 않다. 가령 Seamus Heaney6)눈이 먼 채, 구덩이마다 쌓인 감자들은 어떤 문장들의 연언과 동치인가? 그런 것은 없다.


은유에서 단어들의 의미는 문자적 의미literal meaning에서 은유적 의미metaphorical meaning로 전환된다.
이는 올바르지 않다. 가령 사자가 아프리카에 서식하는 덩치 큰 고양잇과 동물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되지 않는다면, ‘Richard는 사자다라는 은유는 그것이 원래 지니는 은유적 효력을 잃게 될 것이다. [즉 어떤 경우에는 문자적 의미가 은유적 의미를 이루는 중요한 요소이다.]


6) 1955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아일랜드의 시인.

 

이러한 설명들에 비해, 은유적임being metaphorical이라는 속성을 화용론적인 문제로 본다면 은유를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를 다르게 말하면 문장 내지 명제가 아니라 특정 화행이 은유적임이라는 속성을 갖는다고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은유적인 화행에서 문장들은 일상적인 방식으로 문자 그대로의 의미를 따라 사용되지 않는다. 거칠게 말하자면 위에 언급된 은유에 관한 생각들이 공통적으로 갖는 문제는 은유를 특별한 종류의 의미와 연관지어 기술한다는 데에 기인한다. 따라서 그렇게 하기보다는 은유를 특정한 종류의 언어사용으로 기술해야 한다. Austin의 용어를 활용하자면 은유는 발화행위적인 사안이 아니며, 곧 살펴보겠지만 은유가 발화수반적인 사안인지 여부도 의심해볼 만한 몇몇 이유들이 있다.

하지만 은유에 화용론적으로 접근한다 해도 어려움은 남는다. 은유라 불리는 것들이 공통적으로 갖는 변별적 특징이 있는지 확실치 않기 때문이다. 다만 여기서는 은유에 관한 만족스러운 설명이라면 반드시 포섭해야 할 몇몇 요소들만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올바른 은유적 발화metaphorical utterance는 단순하게 문자 그대로 이해될 경우(즉 문장의 규약적 의미conventional meaning를 내용으로 갖는 진술을 표현한다고 간주될 경우) Grice의 협조원리를 어기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그는 그녀로 인해 애태웠다를 축자적으로 이해할 경우 대화에서 의미가 통하지 않을 것이다. [즉 방식의 준칙이 위반된다.] ‘Richard는 사자다는 너무 뻔하게 거짓이며, ‘돈은 나무에서 자라지 않는다는 너무 뻔하게 참이다. [즉 질의 준칙이 위반된다.] 은유가 발화되는 대화에서도 청자는 화자가 협조원리를 준수할 것이라 기대하기 때문에, 은유적 발화가 성공적이라면 청자로 하여금 화자의 발화를 평소와는 다른 방식으로 이해해보려 노력하게끔 유도할 것이다.

(2) 그렇지만 은유적 유의미성metaphorical significance은 문자적 의미에 의존한다. 전술했듯 사자가 아프리카에 서식하는 덩치 큰 고양잇과 동물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되지 않는다면, ‘Richard는 사자다라는 은유는 그것이 원래 지니는 은유적 유의미성을 지니지 않을 것이다.

(3) 은유는 인지적 기능cognitive function을 지닐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파동은 물이나 공기와 같은 물리적 매개체를 통해 전달되는 압력의 이동 영역인 반면 빛은 진공상태에서도 전파된다. 따라서 빛이 그 자체로 파동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빛을 파동으로 이해하는 것은 과학적으로 유용하고 정보적이다.

(4) 은유는 표현적 기능expressive function을 지닐 수도 있다. 시와 같은 문학작품에서, 혹은 우리가 어떻게 느끼고 생각하고 지각하는지 묘사할 때, 우리가 느끼고 생각하고 지각한 것이 어떠한지what it is like를 전달하기 위해 종종 은유적 표현들이 동원된다.

 

내가 생각하기에 (3)(4)의 구분은 은유에 대한 설명에서 핵심적인 사안이다. 우리는 문자 그대로의 언어가 인지적(표상적(表象的)representational) 기능과 표현적 기능 모두 갖는다는 것을 이미 살펴보았다. 은유 역시 마찬가지로서, 은유는 무언가를 기술하기도 하고 표현하기도 한다.

은유가 갖는 이러한 기능들에 공통적으로 상상(想像)imagination이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 은유의 인지적 기능과 얽힌 상상의 사례로서 원자(原子)atom의 모양에 대한 은유적 묘사를 들 수 있다. 한 대상을 중심으로 그보다 작은 대상들이 회전운동을 하는 양태는, 사실 원자의 실제 모양은 아니지만 원자에 대한 유용한 모형model으로 받아들여진다. -인지적인, 즉 표현적인 기능과 얽힌 상상의 사례로는 고통에 대한 일상적인 은유적 묘사를 들 수 있다. 가령 우리는 어떤 고통에 대해 날카로운 것으로 찌르는 듯하다고 표현하고는 한다. 그래서 우리는 나는 그녀가 바람을 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가슴에 찌르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는 말을 충분히 이해한다. 양자를 모두 갖는 은유와 상상이 연관된 사례로는 RomeoJuliet을 들 수 있겠다. I. A. Richard가 말했듯 RomeoJuliet에 대해 ‘Juliet은 태양이다라고 할 때 느꼈을 독특한 그 느낌, 아름다운 Juliet에 대한 상상과 태양에 대한 상상이 상호작용하여 일어난 것이다. 은유와 얽힌 이러한 모든 상상작용들을 하나로 요약하기는 불가능하다. 다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청자로 하여금 그러한 상상을 떠올리게끔 자극하는 것이 은유적 발화의 중요한 목적이라는 것이다. Austin의 화행론의 전문용어를 활용하자면 은유는 특정 종류의 의도된 발화효과행위로 특징지어질 수 있다.

 

 

역사적 사항

 

Ludwig Wittgenstein의 유명한 두 저서 철학적 탐구Philosophical Investigation(1953)청색책과 갈색책The Blue and Brown Books(1930년대. 이 책은 Wittgenstein 생전에는 출간되지 않았고, 다만 1930년대에 비공식적인 해적판 형태로 케임브리지에서 암암리에 널리 읽히고 있었다)은 소위 일상언어철학이 발흥하는 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이 흐름은 1950년대와 60년대에 절정에 달하였다. Gilbert Ryle(1900-76), Peter Frederic Strawson(1919-2006), John Langshaw Austin(1911-60), Norman Malcolm(1911-90), O. K. Bouwsma(1898-1978) 등을 비롯하여 이 흐름에 동조했던 많은 인물들은 일상언어를 세심하게 관찰하여 얻어낸 결과를 철학적 문제들에 적용함으로써 두드러진 성과를 거두었다. 언어에 관한 철학적 이론들이 일상에서 일어나는 언어적 활동과 명확하게 부합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 작금의 철학자들이 이전에 비해 더욱 민감해지게 되었다는 점에서, 일상언어철학의 유산은 여전히 주효하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일상언어철학이 끼친 가장 현저한 영향은, 구문론 및 의미론과 더불어 언어연구의 한 하위-분과이면서 종종 두 분야와 경쟁하기도 하는 화용론에 대한 관심을 고취하였다는 점이다.

1970년까지 Austin의 저서는 특히 John Rogers Searle화행: 언어철학 小論Speech Acts: An Essay in the Philosophy of Language(1969)과 연후의 표현과 의미: 화행론에 관한Expression and Meaning: Studies in the Speech Acts(1979)를 저술하는 데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반면 Herbert Paul Grice는 특히 그의 小論 논리학과 대화Logic and Conversation(1975)를 통해 독자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번 장에서 상세히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사실 GriceAustinSearle이 논했던 규약 개념을 화자-의도 및 청자-의도speaker’s and herer’s intention 간의 구분으로 대체함으로써, 두 인물과는 다른 관점에서 나름의 완결성을 갖춘 대안적인 이론을 제시했다고 할 수 있다.

이후 Austin-Searle의 패러다임과 Grice주의적 패러다임은 다음과 같이 상당히 발전 및 개정되거나 도전을 받기도 하였다: (1) Stephen Schiffer를 비롯한 일부 인물들은 Grice의 좀 더 일반적인 착상, 즉 화행이란 본질적으로 무엇인가에 대한 그의 설명을 다듬어 의도-기반 의미론Intention-Based Semantics으로 발전시켰다(Schiffer, 의미Meaning, 옥스퍼드대학출판부, 1972 참조). 이 이론은 인지과학 및 심리철학 분야에서 제기된 특정 이론과 잘 부합하는 데가 있다. (2) 지난 30년간 함의개념에 관한 매우 많은 수의 문헌들이 쏟아져 나옴으로써 함의의 다양한 유형들 및 새로운 대화적 준칙들이 탐구되고, Grice가 본디 제시했던 준칙들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웠던 사례들을 다루기 위한 새로운 방법들이 고안되었다. (3) Dan SperberDeirdre Wilson에 의해 제안된 적합성(연관성) 이론relavance theory에 따르면, Grice의 준칙들은 다음과 같은 최적의 적합성 원리principle of optimal relavance 혹은 의사소통적 효율성의 원리principle of communicative efficiency라는 단일하고 일반적인 원리로 대체되어야 한다: 간략하게 말하자면, 대화의 최초 시점에 화자가 청자의 인지적 상태에 관한 정보들을 비롯하여 대화의 모든 맥락을 잘 이해하고 있다고 한다면, 화자는 자신이 기도한 방식으로 청자의 인지적 상태에 영향을 미치기에 충분한 것만을 말해야 한다. Grice의 이론과 적합성 이론은 경우에 따라 상충하기도 하며 언제나 후자가 더 낫다고 볼 수만은 없다. 하지만 적합성 이론은 Grice가 제시한 준칙들에 비해 더욱 직관적이고 유연성 있으며 압축적인 대안이라 할 수 있다.

 

 

이번 의 요약

 

문장의 서법이란 구문론적인 성질로서, 특정 서법은 한 문장이 발화될 때 그에 부여되는 특정 효력과 관습적으로 결부된다. 예를 들어 영어에서 ‘you are’‘are you’처럼 주어와 동사의 순서를 도치시키는 것은 대표적으로 서술법과 의문법 간의 차이점으로 받아들여진다. 물론 서술법 문장을 발화함으로써 질문을 할 수도 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이러한 관습은 종종 무시되기도 한다. [즉 서법과 효력 간의 관계는 필요충분조건 관계가 아니다.]

표준적인 세 가지 효력 유형인 주장, 의문, 명령을 다루기 위해 좀 더 세밀한 이론이 고안되었다. 주장이라는 화행을 예로 들어 살펴보자. Austin의 유명한 구분에 따르면 발화에서 우리는 한 명제를 표현하는 발화행위와 그 명제를 주장하는 발화수반행위와 청자로 하여금 그 명제를 믿도록 하는 발화효과행위를 각기 구분해야 한다. 발화행위와 발화수반행위는 대체로 화자의 행위에 의해 결정되지만 발화효과행위는 청자에게 가해지는 효과에 따라 전적으로 결정된다. 발화수반행위가 과연 어느 정도까지 의도적이고 어느 정도까지 규약적인가 하는 문제에는 논란이 많다. 일상에서 화자는 자신이 성공적으로 달성코자 하는 발화효과행위를 의도하면서 발화하지만, 실제로 야기된 발화효과행위는 화자가 의도하지 않았던 것인 경우도 많다. 하지만 그럼에도 발화효과행위는 어쨌든 발화함으로써 화자가 행하거나 야기한 것으로 간주된다.

한 진술에서 PQ함의하는 경우는 다음과 같다: PQ를 논리적으로 함축하지는 않지만, 대화의 맥락상 충분한 정보를 갖춘 능숙한 청자라면 화자가 Q를 전달하려 의도한다고 여기는 경우. 함의 개념은 우리가 일상에서 물론 너는 쟤가 못생겼다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걸 넌지시 내비쳤지imply라 말할 때 우리가 염두에 두고 있는 바를 포착해낸다. 대화적 함의로 알려진 이러한 현상을 지배하는 엄밀한 규칙은 없지만, 핵심적인 착상에 따르면 협조원리라 불리는 다음의 구성적 규칙들이 일상의 대화에서 통용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거짓이라 믿는 바를 말하지 말 것, 애매성모호성불분명성을 피할 것, 간략하게 말할 것, 맥락상 적절한 사안만을 말할 것, 당면 목적상 요구되는 바 이상도 이하도 아닌 정보만을 말할 것. 화자의 발화가 무언가를 대화적으로 함축하는지 여부를 판별하는 작업에는 이러한 대화 규칙을 화자가 충실하게 지키면서 말하고 있다는 가정이 개입되어 있다. 화자의 말이 Q를 비록 논리적으로 함축하지는 않을지라도, 화자가 협조원리를 준수하고자 노력하면서 발화하였다고 가정한다면, 화자의 말은 Q를 의도하였던 것으로 청자에게 받아들여질 것이다.

화용론에서 핵심적인 또다른 개념은 다음과 같은 선제 개념이다: PQ를 선제한다면, Q가 거짓일 경우 P는 참도 거짓도 아니다(이와 대조적으로 PQ를 함축한다면, Q가 거짓일 경우 P는 거짓이다). Strawson은 이러한 선제 개념을 토대로 Russell의 한정 기술구 이론을 다음과 같이 공박한다: 단일한 그 F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Russell이 말하듯 FG하다가 거짓이라고 말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그렇다기보다는, 화자가 한정 기술구 F’를 사용함으로써 FG하다라는 문장은 F’의 지시체가 존재함을 선제하게 되는데 이 선제가 거짓이기 때문에, 그 문장에 대한 발화는 진리치를 갖는 진술을 애초에 표현하지 못한다고 하는 편이 올바르다. Donnellan은 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FG하다Russell이 주장한 의미에서는 거짓이라 하더라도 다른 의미에서는 여전히 참인 진술을 표현하는 데 사용될 수 있음을 지적하면서, 한정 기술구가 사용되는 방식을 지시적 사용 및 Russell이 제안한 바와 같은 속성적(귀속적) 사용 두 가지로 구분한다. 이 논쟁에 대해 Kripke는 화자-지시와 의미론적 지시를 구분할 것을 제안하면서, 이를 토대로 StrawsonDonnellan이 각기 제시한 현상들 모두 순수하게 화용론적으로 설명될 수 있기에 Russell의 이론에는 아무런 영향이 미치지 않는다고 주장함으로써, 이 문제에 관한 한 최종적으로 Russell의 편을 든다.

 

 

탐구 문제

 

1. 타인의 대화를 몰래 엿들으면서 대화에서 이뤄지는 다양한 발화수반행위들을 식별해보라. 그것들 중 이번 초입의 서법과 효력에 대한 再考에서 살펴본 효력의 기본적인 범주들과 부합하는 것들은 얼마나 있는가?


2. 다음 주장에는 어떤 문제가 있겠는가?: ‘발화의 목적은 언제나 동일한 한 가지, 즉 화자의 정신적 상태mental state를 표현하는 것이다.’


3. 모든 유형의 (발화수반적) 화행이 규약적이라 할 수 있는가? 주장할 때, 약속할 때, 혼인 서약을 할 때 각각 , 그렇습니다하고 말하는 것을 비교해보라.


4. 대화적 함의 현상에 대한 Grice적인 관점은 다소 복잡한 것처럼 여겨진다. 대화적 함의를 설명하기 위해 Grice가 기술한 복잡하고 난해한 언어분석 절차가 일상대화에서는 좀체 발생하지 않는다는 지적에 대해, Grice 이론의 옹호자는 어떻게 답할 수 있겠는가?


5.다음 문장을 보자:

나는 그 케익을 조금 먹었다.

이 문장의 화자가 실제로는 그 케익을 전부 먹어버렸다고 해보자. 그 경우 화자는 거짓말을 한 것인가(즉 화자는 자신이 거짓이라 믿는 문장을 의도적으로 말했다 할 수 있는가)?


6. ‘돈은 나무에서 자라지 않는다는 문자 그대로 참이며, 따라서 모든 은유가 문자 그대로 거짓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부정을 포함하지 않으면서 문자 그대로 참인 은유가 있는가? [즉 문자 그대로 참인 긍정문이되 은유적 효력도 갖는 문장이나 표현이 있는가?] ‘사업은 사업이다는 어떤가? 이것이 과연 은유이긴 한가? 이 문장에 대한 발화는 의도한 은유적 효과를 어떻게 달성하는가?

 

주요 읽을거리

 

Austin, J. L. (1962), 단어를 통해 행위하는 방법How To Do Things With Word, 2.

Donnellan, K. S. (1966), 지시와 한정 기술구Reference and Definite Descriptions.

Grice, H. P. (1989), 논리와 대화Logic and Conversation」〔1975: 단어 사용에 관한 연구Studies in the Way of Words, 22-40쪽에 수록.

Kripke, S. (1977), 화자-지시와 의미론적 지시Speaker’s Reference and Semantic Reference.

Searle, J. R. (1969), 화행: 언어철학 小論Speech Acts: An Essay in the Philosophy of Language.

(1979), 은유Metaphor.

Strawson, P. F. (1950), 지시에 관하여On Referring.

 

 

추가적인 읽을거리

 

D. Harris, D. Fogal, M. Moss , 화행에 관한 새로운 연구New Work on Speech Acts.

Hills, D. 은유Metaphor, 스탠포드 철학 백과사전에 등재.

E. Lepore, M Stone (2014), 상상력과 규약Imagination and Convention.

D. Sperber, D. Wilson (1995), 적합성 이론: 의사소통과 인지Relevance: Communication and Cognition,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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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언어학
ALLWOOD / H.S MEDIA(한신문화사) / 198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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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논리학의 기초를 다지거나 보다 깊게 이해하는 데에 유익한 전문적인 입문서이다. 영어제목을 직역하자면 "언어학에서의 논리학"이지만, 언어학을 전문적으로 익히지 않았더라도 논리학에 대한 배타적민 관심만으로도 충분히 읽어낼 수 있게끔, 논리학 자체가 중심으로 삼아져 서술되어있다. 공리체계라든가 추론규칙 등 논리학의 실질적인 테크닉보다는, 그것들을 떠받치고 있으면서도 논리학의 실질을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기초적인 사안들을 간명하고 평이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논리/언어철학적으로 논쟁이 될만한 사안에는 깊게 천착하지 않고 여차여차한 쟁점들이 있다는 정도만을 언급하고 넘어가는바, 초심자가 지치지 않고 읽어나갈 수 있게끔 균형잡힌 입문서 노릇을 톡톡히 해낸다. 이런 점으로 인해 논리학 초심자가 기술적인 논리학 교재와 병행하여 활용하기에 좋고, 논리학을 형식적이고 기계적으로만 숙달한 사람이라면 부실하다고 여겨졌던 기초를 튼튼히 다지거나 꼼꼼하게 재고하기에 매우 좋다. 다만 초심자라면 기초적인 명제/술어논리 및 그 예비사항들이 다뤄지는 6장까지만을 읽어낼 수 있을 듯하다. 6장 이후의 장들은 기초논리 이외의 확장/파생 논리학, 내포논리, 형식의미론 등이 다뤄지는 등 다소 심화된 부분이기에, 논리학, 논리철학, 언어철학, 언어학 등에 대한 선지식을 다소 갖추고 있어야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번역은 분명 직역투이지만, 짐작건대 원서 자체가 내용이 평이하고 전달력이 탁월했던 탓인지, 직역임에도 뭔소린지 알아먹을 수 없는 정도로 형편없지는 않다고 여겨졌다. 워낙 옛날에 출간된 책이기에 역어선택이 생소하거나 어색하다는 점, 그래서 본인이 알고 있는 개념임에도 자칫 간파해내지 못하여 놓칠 수 있다는 점 정도만 주의하면 되겠다. 


삼 년 전 동네 도서관 서가에서 이 책을 우연히 발견하고는 별 생각 없이 심드렁하니 읽어나가다가, 일고 보니 내용이 워낙 좋아서 집중하여 독파해낸 기억이 새롭다. 검색해보니 절판된 책이어서, 중고매물을 찾아내어 언젠가는 꼭 구매소장해야겠다고 다짐짓했다. 당시엔 내포논리와 형식의미론이 다뤄지는 후반부가 너무 어려워 대충 훑고 넘어갔는데, 해가 몇 번 지나 다시 읽어보니 그 부분도 흥미있게 읽혀졌다. 감회도 새롭도 얻은 것도 많았던바 재밌고 뿌듯한 독서였다. 뻔하고 조악한 논리학 교재들만 그나마도 간간히나 나오는 마당에, 이 분야에서 학술적으로 양질인 이런 모양새의 책들이 절판되지 말고 외려 자꾸자꾸 새로이 출간되었느면 하는 바람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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