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연성에 대한 再考
외연성 원리는 대체성 원리와 매우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2章, ‘대체성과 외연성’ 참조). 이 원리는 다음과 같다:
(ⅰ) 복합문장의 일부로 나타나는 임의의 부분문장에 대해, 그 문장을 그와 동일한 진리치를 갖는 다른 문장으로 대체replace하여도, 복합문장 전체의 진리치는 변하지 않는다.
(ⅱ) 문장에 나타나는 임의의 술어에 대해, 그 술어를 그와 동일한 외연을 갖는 다른 술어로 대체하여도, 문장 전체의 진리치는 변하지 않는다.
(ⅲ) 문장에 나타나는 임의의 단칭용어에 대해, 그 단칭용어를 그와 동일한 지시를 갖는 다른 단칭용어로 대체하여도, 문장 전체의 진리치는 변하지 않는다.
외연성 원리는 매우 직관적이다. 단칭용어에 대해 말하고 있는 (ⅲ)을 생각해보자: 특정 대상이 특정 술어를 만족한다satisfy는 것을 한 문장이 말하고 있고, 다른 문장 역시 동일한 대상이 동일한 술어를 만족한다 말하고 있다면, 전자가 참인 경우 후자 역시 분명 참이며 전자가 거짓인 경우 후자 역시 분명 거짓이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1) 파리Paris는 비엔나보다 북쪽에 있다.
(2) ‘파리’와 ‘프랑스의 수도’는 共-지시적co-referential이다.
(3) 프랑스의 수도는 비엔나보다 북쪽에 있다.
(1)이 실제로 참이든 아니든, (2)에 따르면 (1)과 (3)은 동일한 진리치를 갖는다. 다음 사례에서 볼 수 있듯 술어에 대해 말하고 있는 (ⅱ) 역시 마찬가지이다:
(4) 이 금붕어는 췌장을 갖고 있다.
(5) ‘𝛼는 췌장을 갖고 있다’와 ‘𝛼는 비장을 갖고 있다’는 共-외연적co-extensive이다.
(6) 이 금붕어는 비장을 갖고 있다.
(5)가 참이라고 가정한다면, (4)와 (6)의 진리치는 반드시 동일해야만 한다(단, 진리치 동일성은 의미의 동일성과 다르다는 점에 유의하라).
그런데 우리의 언어에는 非-외연적인 표현 혹은 대체성이 성립하지 않는 표현이 존재한다. 가령 (ⅰ)에 대한 가장 단순하고 명백한 반례(反例)counterexample는 때문에because라는 문장 연결사이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7) 그 개가 짖었기 때문에 그 고양이는 가르랑거렸다.
(8) 파리는 프랑스의 수도이기 때문에 그 고양이는 가르랑거렸다.
(7)이 참이라고 가정해보자. 따라서 각 부분문장인 ‘그 고양이는 가르랑거렸다’와 ‘그 개는 짖었다’는 참이다. 하지만 (7)에서 ‘그 개는 짖었다’를 그와 마찬가지로 참인 ‘파리는 프랑스의 수도이다’로 대체한 (8)은 거짓이다.
지시적 불투명성, 그리고 태도에 대한 Frege의 견해
이제 다음 문장을 보자:
(9) ‘금성’은 두 글자로 이루어져 있다.
‘금성’과 ‘개밥바라기’는 동일한 대상 금성을 지시하는 각기 다른 이름이다. 하지만 이 사실로부터 다음을 추론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10) ‘개밥바라기’는 두 글자로 이루어져 있다.
(9)와 달리 (10)은 거짓이다. Frege의 설명에 따르면, (9)의 초입에 나타나는 단칭용어는 행성 금성을 지시하는 게 아니라 언어표현 ‘금성’을 지시한다. 즉 그것은 행성 금성의 이름이 아니라 금성의 이름의 이름인바, “‘금성’”은 금성이 아니라 ‘금성’을 지시한다.1) (9)에서 “‘금성’”이 나타나는 이러한 자리는 지시적으로 투명referentially transparent하지 않고 지시적으로 불투명하다referentially opaque. 이름 ‘금성’이 이렇게 지시적으로 불투명한 자리에 삽입되면, 금성을 지시한다는 통상적인 역할[즉 지시적으로 투명한 자리에서 수행했을 역할]을 수행하지 않는다. 다음과 같은 맥락
(11) ‘ ’은 두 글자로 이루어져 있다.
에서 共-외연적 표현들 간의 대체가 허용되지 않는 것은 바로 지시적 불투명성에 기인한다. 즉 이러한 맥락은 非-외연적non-extensive이다. (9)와 같은 맥락에서 나타나는 ‘금성’은 금성을 지시하지 않는다. 어떤 언어표현이 (11)과 같은 맥락의 공란에 삽입되면, 인용부호quotation marks와 결합됨으로써 [그 표현의 지시체에 대한 이름이 형성되는 게 아니라] 그 표현 자체를 지시하는 이름이 형성되며, 문장 전체는 [그 표현의 통상적인 지시체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 표현의 이름에 관해 무언가를 말하게 된다.
1) 본문에서 인용부호가 두 번 사용되었다는 점에 유의하라. (9)는 금성의 이름인 ‘금성’을 사용하고 있는 반면, 본문은 (9)에서 사용된 그 이름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금성’은 금성을 지시하는 이름이고 “‘금성’”은 금성을 지시하는 이름인 ‘금성’을 지시하는 이름이다. 전자는 세계에 존재하는 대상을 지시하는 언어표현이고 후자는 언어표현 자체를 지시하는 언어표현이다.
하지만 (11)과 미묘하게 다른 다음과 같은 맥락은 지시적으로 투명하다:
(12) 은 두 글자로 이루어져 있다.
혹은 다음 맥락 역시 마찬가지이다:
(13) 𝛼는 두 글자로 이루어져 있다.2)
2) 가령 다음을 보자:
(a) ‘미당’은 두 글자로 이루어져 있다.
(b) ‘미당’ = 서정주의 호
(c) 서정주의 호는 두 글자로 이루어져 있다.
(a)는 참이다. 그리고 ‘미당’은 미당 즉 시인 서정주를 지시하는 반면, “‘미당’”은 서정주의 호인 ‘미당’을 지시한다. 따라서 (b)는 참이다. 이제 (a)에서 인용부호가 포함된 표현 “‘미당’”을 그와 共-지시적인 ‘서정주의 호’로 대체한 (c) 역시 참이다.
Frege는 지시적 불투명성이 (11)과 같은 직접인용 맥락에서뿐만 아니라, 간접인용indirect quotation 맥락 및 믿음과 같은 명제적 태도와 연관된 표현에서도 드러난다고 지적하였다. 2章에서 살펴보았던 관점을 잠시 되살려보자. 먼저 다음과 같은 간접인용 맥락의 사례를 생각해보자:
(14) Adam은 금성이 행성이라고 말했다said that Venus is a planet.
(15) Adam은 개밥바라기가 행성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다음은 참이다:
(16) 개밥바라기 = 금성.
하지만 (16)이 참임에도, 만약 Adam이 개밥바라기에 대해 일절 들어본 바가 없어 (16)이 참임을 모른다면, 그 경우 (14)와 (15)는 분명 동시에 참일 수 있다. 심지어 Adam이 (16)이 참임을 알더라도, 어쨌든 그가 (14)에서 기술된 대로 말했다 해서 개밥바라기가 행성이라고 말했다 할 수는 없다. 이러한 非-외연적 맥락은 보통 超-내포적 맥락hyper-intensional context이라 칭해진다. 그런 명칭이 붙게 된 이유는 잠시 뒤에 살펴보게 될 것이다.
명제적 태도가 나타내어지는 다음과 같은 맥락 역시 超-내포적이다:
(17) Adam은 금성이 행성이라고 믿는다believe that.
(18) Adam은 개밥바라기가 행성이라고 믿지 않는다.
이 두 문장을 참이게 하면서 Adam이 합리적이라고 간주할 수 있으려면 우리는 Adam이 (16)이 참임을 모른다고 가정해야 한다. 그래야만 (17)과 (18)이 동시에 참일 수 있게 된다. 이 대목에서 Frege가 제시하는 설명에 따르면
(19) 금성이 행성이라는 것that Venus is a planet
이라는 일련의 표현은 [명제를 표현하는] 온전한 문장이 아니라, ‘금성은 행성이다’라는 문장의 뜻 즉 그 문장이 표현하는 명제를 지칭하는 단칭용어이다. ‘…라는 것that’이라는 단어가 온전한 문장에 결합되어 형성된 일련의 명사절 전체는 결합된 문장의 뜻을 지시하는 단칭용어로 전환된다. (19)가 지칭하는 뜻은 다음 명사절
(20) 개밥바라기가 행성이라는 것
이 지칭하는 뜻과 다르다. 왜냐하면 [Frege의 뜻-지시 구분에 따르면 ‘금성’과 ‘개밥바라기’가 共-지시적이긴 해도 그 뜻을 달리하기에, 그것들이 나타나는] ‘금성은 행성이다’와 ‘개밥바라기는 행성이다’가 각기 다른 명제 즉 각기 다른 뜻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맥락
(21) Adam은 α가 행성이라고 믿는다.
는 지시적으로 불투명하다. 다르게 말하면 (21)에 단칭용어가 삽입됨으로써 형성된 문장 전체의 진리치는 그 단칭용어에 의해 지시되는 대상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Frege에 따르면 그러한 문장의 진리치는 삽입되는 단칭용어의 뜻에 의해 결정된다. 이를 일반화하자면, 임의의 문장 S에 대해
(22) Adam은 S라고 믿는다believe that S.
라는 맥락은 지시적으로 불투명하다. 이러한 맥락은 超-내포적이다. 물론 Adam에게 특별한 초능력이 있어서 (22)가 超-내포적인 것은 아니다. 좀 더 정확하게 일반화하자면, 임의의 믿음-주체 α와 임의의 문장 S에 대해
(23) α는 S라고 믿는다.
라는 맥락은 S를 대체하는 문장의 측면에서 지시적으로 불투명하다. 하지만 직접인용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이와 미묘하게 다른 다음 맥락
(24) α는 β를 믿는다.
는 통상적이고 외연적인 관계를 나타내는 단순한 2항관계로서, 그 관계가 단지 믿음관계일 뿐이다. ((23)과 (24)를 (11) 및 (12)와 비교해보라.)
따라서 Frege가 보기에 불투명 맥락 (23)은 (11)과 매우 유사하다. (11)의 공란에 지시적 용어가 채워지면 그 용어의 지시체에 관해서가 아니라 그 용어 자체에 관해 무언가를 말하는 문장이 형성된다. 삽입되는 용어 자체에 관한 문장이 얻어지지 않는다는 점만을 제외한다면 (23) 역시 이와 마찬가지로서, (23)의 각 공란이 채워지면 명제태도의 주체와 하나의 명제 즉 삽입된 문장의 뜻에 관해 무언가를 말하는 문장이 형성된다.
뿐만 아니라 Frege에 따르면 (17)과 같은 문장은 금성 내지 개밥바라기라는 행성을 지시하는 표현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 그 문장은 Adam과 ‘금성은 행성이다’에 의해 표현되는 명제를 지시하며, 전자가 후자를 믿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비록 그 명제의 구성요소[즉 ‘금성’의 뜻]는 [외연적인 맥락에서라면] 금성을 결정하지만, 그 명제를 가리키는 단칭용어인 (19)에서는 그 어떤 단칭용어도 금성을 지시하지 않는다.
이러한 Frege의 관점은 우리의 직관에 부합한다. 왜냐하면 다음과 같은 문장이 주장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25) Le Verrier는 Vulcan이 수성보다 작다고 믿었다.
Vulcan은 실존하지 않지만 그래도 이 문장은 참이다. 따라서 믿음-연산자belief-operator가 포함된 문장의 진리치는, 그 연산자의 범위(영향권)scope 내에 있는 단칭용어가 통상적으로 가리키는 대상customary object[즉 믿음 연산자 외부에서 가리켰을 대상]을 지시하는지 여부와 무관하다. 오직 필요한 것은 명사절(…라는 것-절)that-clause(또는 문법학자들이 말하는 간접절indirect clause)이 한 명제를 짚어내는가 여부일 뿐이다. (25의 경우 이 요건은 다음과 같이 충족된다: ‘Vulcan’이 대상을 지시하는 데에 실패하기에 ‘Vulcan은 수성보다 작다’는 진리치를 결여하지만, 이 문장은 그럼에도 하나의 뜻 즉 명제를 표현하며, (25)는 Le Verrier가 그 명제를 믿었음을 말하고 있다.
추가적인 논의: 超-내포적 맥락의 다중 삽입
고양이 한 마리가 매트 위에 있는 모습을 상상해보자. 이 사태를 CM이라 칭하자. 이제 특정 관점에서 CM을 그린 그림을 떠올려보라. 그 그림은 CM을 특정한 방식으로 묘사한다(여기서 ‘방식’은 명제의 뜻과 유사하다 [그림이 한 사태를 특정 관점에서 묘사하듯이, 명제 역시 하나의 사태를 특정 관점에서 제시한다. Frege적 뜻이란 지시체가 제시되는 방식 내지 지시-결정 규칙임을 상기할 것]). 이 그림을 P1이라 하자. 이제 P1을 또다시 그린 그림. 즉 CM의 그림에 대한 그림인 P2를 떠올려보라. P2는 P1을 특정한 방식으로 묘사하며 그에 따라 CM을 특정한 방식으로 묘사할 것이다. 이러한 절차는 P3, P4 등으로 계속 이어질 수 있으며 원래의 사태 CM을 묘사하는 방식들은 그에 따라 다층적multiple으로 겹치게 될 것이다. 하지만 P1에 포함된 정보는 그 과정에서 (모든 그림들이 매우 이상적이고 완전하게 그려졌다고 가정한다면) 원리적으로 소실되지 않는다. 모든 그림들의 연쇄에서 그 어떤 것을 골라잡아도, P1에 포함된 정보인 원래의 사태 CM을 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구조는 Frege가 명제에 관한 명제, 혹은 명제에 관한 명제에 관한 명제 등에 대해 생각했던 방식과 매우 유사하다. Frege가 생각하기에 주어진 어떤 용어가 한 문장의 진리치를 결정하는 데에 기여contribution하는 방식은, 그 용어가 문장에서 내포적인 혹은 超-내포적인 연산자의 영향권 내에 삽입되는지 여부에 따라 달라진다. 우선 외연적 맥락의 경우 문장의 진리치에 영향을 미치는 실체entity는 용어의 통상적인 지시체ordinary referent이다. 반면 超-내포적인 맥락의 경우 문장의 진리치와 유관한 실체는 Frege가 칭한바 용어의 “간접” 지시체“indirect” referent로서, 이는 용어의 통상적인 뜻ordinary sense[즉 외연적 맥락에서 표현되는 뜻] 이다. 다소 느슨하게 말하자면 용어의 지시는 맥락에 따라 “전환shift”되며, 지시가 전환되는 단계는 다음과 같이 더욱 높은 수준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
(26) Don Ho가 가수라는 것을 Adam이 믿는다는 것을 Dudley는 믿는다.
Dudley believes that Adam believes that Don Ho is a singer.
(17) ‘Adam은 금성이 행성이라고 믿는다’와 같은 경우를, 한 용어의 간접적 뜻indirect sense과 간접 지시를 갖는 것으로서 超-내포적 삽입hyper-intensional embedding 유형-1이라 칭한다면, (26)은 2차 간접적 뜻과 2차 간접 지시를 갖는 것으로서 超-내포적 삽입 유형-2라 할 수 있다.
아래의 표 8.1은 超-내포적 맥락이 이렇게 다중적으로 삽입되는 단계를 단칭용어 ‘Don Ho’를 예시로 삼아 나타내고 있다. 식별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꺾쇠괄호가 ‘…’의 뜻을 나타낸다고 하자. 가령 〈Don Ho〉 = ‘Don Ho’의 뜻이며, 〈〈Don Ho〉〉 = “‘Don Ho’의 뜻”의 뜻이다. 따라서 〈Don Ho〉는 [외연적 맥락에서 직접 지시체로서] Don Ho를 결정하며, 〈〈Don Ho〉〉는 [超-내포적 맥락에서 간접 지시체로서] 〈Don Ho〉를 결정한다(그리고 〈〈〈Don Ho〉〉〉는 [2차 超-내포적 맥락에서 2차 간접 지시체로서] 〈〈Don Ho〉〉를 결정한다). 화살표는 연결된 각 항목이 동일한 실체로서 반복되고 있음을 나타낸다:
표 8.1 세 층위 맥락에서 한 용어의 뜻과 지시
외연적 맥락 | | 超-내포적 맥락 유형-1 | | 超-내포적 맥락 유형-2 |
(통상적) 지시체 Don Ho | | | | |
(통상적) 뜻 〈Don Ho〉 | | (간접) 지시체 〈Don Ho〉 | | |
| | (간접적) 뜻 〈〈Don Ho〉〉 | | (2차 간접) 지시체 〈〈Don Ho〉〉 |
| | | | (2차 간접적) 뜻 〈〈〈Don Ho〉〉〉 |
표에서 첫 번째 세로열은 ‘Don Ho는 가수다’와 같은 보통의 외연적 맥락을 나타낸다. 이 맥락에서 용어 ‘Don Ho’는 통상적인 뜻 〈Don Ho〉를 표현하며, 이 뜻은 그 용어의 통상적 지시체로서 Don Ho를 결정한다(실제로 Don Ho는 히트곡 〈Tiny Bubbles〉를 부른 하와이 출신 가수였다). 두 번째 열은 ‘Adam은 Don Ho가 가수라고 믿는다’와 같은 超-내포적 맥락 유형-1을 나타낸다. 외연적 맥락에서 ‘Don Ho’의 통상적 뜻이었던 〈Don Ho〉가 이 맥락에서는 그 용어의 간접 지시체가 된다. [그리고 이 간접 지시체를 결정하는 것은 간접적 뜻인 〈〈Don Ho〉〉이다.] 세 번째 열은 (26)과 같은 超-내포적 맥락 유형-2를 나타내는바, 2차 내포맥락에서 간접적 뜻이었던 〈〈Don H〉〉가 이 맥락에서는 그 용어의 2차 간접 지시체가 된다. [그리고 이를 결정하는 것은 2차 간접적 뜻인 〈〈〈Don Ho〉〉〉이다.] 한 문장 내에서 ‘…라고 믿는다’와 같은 명제태도 연산자가 무한히 반복되면서 그 영향권 내부에 동일한 용어가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한 용어가 超-내포적 맥락에 다중적으로 삽입되는 이러한 절차는 원리상 무한히 계속될 수 있다. 따라서 ‘S라고 B가 믿는다는 것을 C가 믿는다는 것을 … 가 믿는다는 것을 A는 믿는다A believes that B believes that C … 등과 같이 계속 이어질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을 이번 節의 초입에 살펴보았듯 한 주제를 그린 그림을 그린 그림을 … 그린 그림처럼 생각해볼 수 있다. 여기서 최초 단계에 그려지는 주제는 통상적인 지시체에 해당할 것이다.
대물적 필연성과 대언적 필연성
한 가지 중요한 종류의 非-외연적 맥락은 ‘필연적(必然的)으로necessarily’와 같은 양상적(樣相的) 부사modal adverb에 의해 조성된다. 앞서 우리는 이 주제를 간단히 살펴본 바 있다(5章, ‘필연성, 가능성, 가능세계’ 節 및 6章, ‘자연종 용어와 본질에 관한 Putnam의 견해’ 節). 앞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수학적 진리가 필연적 진리라는, 즉 달리 될 수 없었던could not have been otherwise 진리라는 관점을 택하기로 한다. 이제 다음을 보자:
(27) 필연적으로, 2는 3보다 작다.
Necessarily, two is less than three.
[수학적 진리는 필연적으로 참이므로] 이는 참이다. 그리고 화성은 Phobos와 Daimos라는 두 개의 위성을 거느리고 있다. 그러므로 단칭용어 ‘화성의 위성의 개수’와 ‘2’는 동일한 지시를 갖는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에 근거하여 (27)로부터 다음을 추론할 수는 없다:
(28) 필연적으로, 화성의 위성의 개수는 3보다 작다.
Necessarily, the number of Martian moons is less than three.
물론 화성이 셋보다 적은 수의 위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는 단지 우연적(偶然的)인 사실contingent fact로서, 화성은 지금보다 더 많은 수의 위성을 거느리고 있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필연적으로’라는 표현은 非-외연적인 맥락을 만들어내는 셈이다. [(27)의 일부를 그와 共-지시적인 용어로 대체하였는데도 진리치가 유지되지 않기 때문이다.]
한 가지 유의할 사항은, ‘필연적으로’와 같은 양상적 부사가 조성하는 맥락이 超-내포적이지는 않고 [단순] 내포적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전문적인 구분을 굳이 도입하는 이유는, 양상적 부사가 작동하는 방식이 명제적 태도를 나타내는 동사의 작동방식만큼 까다롭고 섬세하지는 않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예시를 통해 양자를 비교해보자: 모든 캥거루가 캥거루라는 것은 필연적으로 참이다. [즉 가능세계 해석을 따르자면 ‘모든 캥거루는 캥거루이다’는 모든 가능세계에서 참이다.] 따라서 Samuel Beckett가 1906년에 태어난 가능세계들과, Beckett가 1906년에 태어났고 모든 캥거루가 캥거루인 가능세계들은 정확히 동일한 세계들이다. [전자가 참인 모든 세계들에서는 후자 역시 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Beckett가 1906년에 태어났는지를 궁금해 한다고 해서 모든 캥거루가 캥거루인지 여부까지 궁금해 하지는 않을 것이다. [요컨대 어떤 두 문장의 양상적 진리치가 일치하는 세계가 동일하다고 해도, 양자에 대한 명제적 태도는 분명 다를 수 있다.] 문장들 간에 나타나는 의미론적 차이가 문장들이 지닌 내포적 진리치intensional truth-value간의 차이에 반영되지는 않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단순 내포적 맥락에서의 진리치 동일성이 超-내포적 맥락에서의 의미 동일성을 함축하는 것은 아니다.]3)
3) 단순 내포적 맥락과 超-내포적 맥락 간의 차이를 요약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진리치 보존적인 대체가 허용되기 위해 전자에서는 양상적으로 동일한 지시(즉 진리치⋅외연⋅지시체)를 갖는 표현들로 대체되어야 하고, 후자에서는 동일한 의미(Frege적인 뜻)를 갖는 표현들로 대체되어야 한다. (반면 외연적 맥락에서는 현실세계에서 동일한 지시를 갖는 표현들로 대체되어야 한다.)
이렇듯 (28)은 거짓이다. 그런데 이번엔 다음 문장을 보자:
(29) 2는 필연적으로 그것이 3보다 작은 그러한 것이다.
Two is such that necessarily it is less than three.
Quine(그에 대해서는 10章에서 더욱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은 (27)에서 (29)로의 이행을 수출exportation이라 칭한다. (29)에서 대명사 ‘그것’의 지시는 앞서 나타난 ‘2’에 의해 공급되지만, ‘2’와 다르게 ‘그것’은 내포적 부사 ‘필연적으로’의 범위 내부에 나타난다. (27)과 (29)는 각각 대언적(對言的)de dicto 양상진술(말해진 것에 관해of things said 양상성을 귀속시키는 진술)과 대물적(對物的)de re 양상진술(사물에 관해of things 양상성을 귀속시키는 진술) 간의 구분을 예시해준다.4)5)
4) ⅰ) “라틴어 어원적으로 ‘dicto’는 말 내지 언어를 뜻하며 ‘re’는 대상 내지 사물을 뜻하므로, 대언적 필연성을 ‘언어적 혹은 명제적 필연성’이라 부르고, 대물적 필연성을 ‘존재적 혹은 대상적 필연성’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김영정, 『언어, 논리, 존재: 언어철학, 논리철학 입문』, 철학과현실사, 1999, 45쪽.)
ⅱ) “대언적 필연성de dicto necessity 개념은 전통철학에서든 현대철학에서든 한결같이 중요하다고 인정된 구분인 대언적 필연성과 대물적 필연성de re necessity 간의 구분을 환기한다. 전자는 명제가 지닌 속성으로서의 필연성 개념으로서, 명제의 술어로 붙일 수 있는 속성 중에는 양상적 속성 즉 필연적으로 참이 됨이라는 속성이 있다는 것이다. 후자는 대상이 지닌 속성으로서의 필연성 개념으로서, 대상이 어떤 본질적 혹은 필연적 속성을 가진다는 생각이다. 명제 내에서 지시된 대상이 여차여차한 속성을 본질적⋅필연적으로 지닐 때, 그 명제는 대물적 양상성을 표현한다. (中略) 대언적/대물적 양상 간의 구분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대언적 양상을 표현하는 명제는 어떤 다른 명제가 양상적 진리치를 갖는다고 기술한다. 반면 대물작 양상을 표현하는 명제는 어떤 대상이 어떤 속성을 필연적⋅본질적으로 예화한다고 기술한다.” (Anthony Clifford Grayling, 『철학적 논리학 입문An Introduction to Pilosophical Logic』(第3版, 1997), 이윤일 譯, 선학사, 94-5쪽, 볼드체는 원저자의 것.)
* “대언성/대물성 구분을 명확히 보여주기 위해 이따금 Thomas Aquinas가 들었던 예가 사용된다. Aquinas는 『對-이교도 大典』에서 인간 의지의 자유가 신의 예지(豫知)와 모순되는지 여부를 고찰하면서 이 구분을 도입한다. 신이 시점 t2에 앉아있는 Aristoteles를 그보다 이전 시점인 t1에 본다고 해보자. 이러한 가정 하에서 ‘앉아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필연적으로 앉아있다’가 참이라고 할 경우, Aristoteles는 시점 t2에 반드시 앉아있을 수밖에는 없는 것처럼 여겨진다. [즉 신의 예지를 가정한다면 결정론이 참인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결론이 도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Aquinas는 여기서 대물성-대언성 구분을 사용한다. 위 문장이 대언적 양상성을 표현하는 것으로 해석된다면, 즉 ‘앉아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 그 무엇이 되었든 그것이 앉아있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참이다’로 해석된다면, 이는 참이다. [‘…은 필연적으로 참이다’를 제외한 명사절로 취해진 문장은 ‘임의의 x에 대해, x가 F하다면 x는 F하다[(∀x)(Fx→Fx)]’ 형식으로서 논리적으로 참이며, 논리적으로 참인 문장은 필연적으로 참이기 때문이다(여기서 ‘α는 F한 것으로 보인다’와 ‘α는 F하다’가 동일한 술어로 간주되는 것은 신의 전지성에 근거한다).] 반면 위 문장이 ‘앉아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 그 무엇이 되었든 그것은 필연적⋅본질적으로 앉아있다는 속성을 갖는다’로 해석된다면, 이는 거짓이다. Aquinas에 따르면 결정론을 옹호하는 논증은 위 문장에 대한 대물적 해석이 참인 경우에만 타당하다. 따라서 결정론이 신의 예지로부터 자동적으로 따라나온다는 논제는 거짓이다.” (A. C. Grayling, 같은 책, 95쪽, 내용 일부 수정.)
5) 자연언어로 표기된 양상문에서는 필연성 부사가 취하는 영향권이 명확하지 않아 대언적/대물적 양상성 구분이 모호하다. 양화논리에 두 가지 양상 연산자 ‘필연적으로[□]’와 ‘가능적으로[◇]’가 도입된 양화양상논리의 문장을 비교해보면 대언적/대물적 양상성이 더욱 명료하게 구분될 수 있다.
우선 세 개의 가능세계 W1, W2, W3가 존재하고, 각 세계 내에는 빌딩 a, b, c라는 세 개체들만이 존재한다고 가정하자. 그리고 개체/술어상항에 대한 해석함수 I를 활용하여 다음과 같이 간략화된 해석을 가정하자:
(가) I(a) = a, I(b) = b, I(c) = c.
(나) I(H) = {W1|a}, {W2|b}, {W3|c}.
즉 (가)는 모든 가능세계에서 개체상항 ‘a’, ‘b’, ‘c’에 대해 지시체를 할당하고 있고, (나)는 술어상항 ‘H’에 대해 각 가능세계에서 그 술어를 만족하는 개체상항을 명시하고 있다. 직관적인 이해를 위해 술어 ‘Hα’를 자연언어에서 ‘α는 가장 높은 빌딩이다’에 해당한다고 하자. 따라서 위 해석에 따르면 가령 W1에서 1항 원자문장 ‘Ha’는 참이지만 ‘Hb’와 ‘Hc’는 거짓이다. 마지막으로 보편/존재 양화사는 緖論에서 살펴본 대로 통상적인 양화논리의 의미론에 따라 해석하고, 양상성 연산자 ‘□’와 ‘◇’는 5章에서 살펴본 다소 간략한 가능세계 의미론에 따라 각각 ‘…는 모든 가능세계에서 참이다’와 ‘…는 어떤 가능세계에서/적어도 하나의 가능세계에서 참이다’로 해석한다.
이제 다음 두 문장을 보자:
(다) □(∃x)Hx.
(라) (∃x)□Hx.
채택된 해석에 따라 각 문장의 진리조건을 명시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다)의 경우 ‘□’에 대한 해석에 따라 존재 양화문 ‘(∃x)Hx’가 모든 가능세계에서 참이어야 한다. ‘(∃x)Hx’가 모든 가능세계에서 참이기 위해서는 존재 양화사의 해석에 따라 개방문 ‘Hx’를 만족하는 개체가 각 가능세계에 적어도 하나씩 존재해야 한다. 해석 (나)에 따르면 ‘Hx’를 만족하는 개체가 각 가능세계마다 적어도 하나씩 존재하므로(즉 각 가능세계마다 가장 높은 빌딩들이 각기 존재하므로), 최종적으로 이 해석 하에서 (다)는 참이다.
그 다음 (라)의 경우 존재 양화사의 해석에 따라 개방문 ‘□Hx’를 만족하는 개체가 현실세계에 적어도 하나 존재해야 한다. 편의를 위해 W1를 현실세계라 한다면, W1에 존재하는 세 빌딩 중 적어도 하나가 ‘□Hx’를 만족해야 하는 셈이다. 이를 위해서는 ‘□’의 해석에 따라 모든 가능세계에서 ‘Hx’를 만족하는 개체가 W1에 적어도 하나 존재해야 한다. 모든 가능세계에서 ‘Hx’를 만족하는 그러한 개체가 W1에 존재하지 않으므로(즉 모든 가능세계를 통틀어 가장 높은 동일한 하나의 빌딩이란 W1에 존재하지 않으므로), 최종적으로 이 해석 하에서 (라)는 거짓이다.
두 문장의 진리조건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다)와 (라)에서는 각각 대언적/대물적 양상성이 드러난다. 전자는 ‘(∃x)Hx’라는 문장 내지 명제에 대해 ‘필연적으로 참이다’라는 대언적 양상성을 귀속시키고 있고, 후자는 세계 내의 개체와 속성에 대해 ‘x는 필연적으로 H하다’라는 대물적 양상성을 귀속시키고 있다. 일반적으로 양상성 연산자가 양화사보다 넓은 범위를 취할 경우 대언적 양상성이 표현되고, 그 반대일 경우 대물적 양상성이 표현된다. 자연언어로 양상문을 표기할 경우 양화사가 없더라도 양화양상논리 형식문의 이러한 구문론적 특성과 대응되도록 대언적 문장은 ‘필연적으로, a는 F하다’로, 대물적 문장은 ‘a는 필연적으로 F하다(필연적으로 F한 그러한 것이다)’와 같은 식으로 통일하였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29)에서 용어 ‘2’는 필연성 연산자의 영향권 외부에outside the scope 있다. (27)에서 내포적 자리에 있던 ‘2’가 (29)에서는 [Quine식 수출작용에 의해] 외연적 자리로 옮겨진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共-지시적인 표현에 의해 진리치 보존적으로 대체될 수 있는 자리로 옮겨졌다.] 그리고 2 = 화성의 위성의 개수이므로, (29)로부터 다음을 추론할 수 있다:
(30) 화성의 위성의 개수는 필연적으로 3보다 작은 그러한 것이다.
The number of Martian moons is such that necessarily it is less than three.
(28)과는 달리, 그리고 (29)와 마찬가지로, 이 문장은 참이다. 이 문장이 말하고 있는 바는, 화성이 거느린 위성의 개수(혹은 Charles 왕자의 귀의 개수와 같이 원하는 그 무엇이라 칭하든)인 2를 고려하건대, 그 대상이 필연적으로 3보다 작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수출작업은 한 용어가 지닌 개념적 내용conceptual content과, 그 용어가 지시하는바 개념적 내용이 제거된 대상 그 자체naked object를 갈라낼 수 있게 해준다.
대물적 믿음과 대언적 믿음
양상 맥락과 같은 단순 내포적 맥락에서 대언성/대물성이 구분되었던 것과 동일하게, 명제적 태도 맥락과 같은 超-내포적 맥락의 측면에서도 양자가 구분될 수 있다. 이를 설명 및 예시하기 위해 명제적 태도 진술과 관련하여 Quine이 들었던 유명한 사례를 생각해보자: Ralph는 갈색 모자를 쓴 특정 남자가 수상쩍게 행동하는 것을 여러 차례 목격했다. 한정 기술구 ‘갈색 모자를 쓴 그 남자the man in the brown hat’을 축약하여 ‘그 MBHthe MBH’라 하자. 이에 다음은 참이다:
(31) Ralph는 그 MBH가 간첩이라고 믿는다.
Ralph believes that the MBH is a spy.
이로부터 다음이 얻어진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
(32) 그 MBH는 Ralph가 그를 간첩이라고 믿는 그러한 것이다.
The MBH is such that Ralph believes that he is a spy.
(31)로부터 (32)로의 이행은 (27)로부터 (29)로의 추론과 정확히 동일해 보인다. [앞 사례에서 ‘화성의 위성의 개수’가 ‘필연적으로’의 범위 내부에서 외부로 이동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번 사례의 경우엔 ‘그 MBH’가 ‘믿는다’의 범위 내부에서 외부로 이동함으로써, 대언적 믿음 진술로부터 대물적 믿음 진술이 얻어진 것이다. 그러나 일견 문제될 것이 없어 보이는 대언성에서 대물성으로의 이러한 이행은 인식론적으로 중대한 차이점을 야기한다. 이를 살펴보기 위해, 대물적 문장인 (32)를 다음과 같이 존재 양화existential quantification[존재 일반화existential generalization]해보자:
(33) 그러한 x가 존재한다 (Ralph는 x가 간첩이라고 믿는다).
There is an x such that (Ralph believes that x is a spy).
그런데 (33)은 Ralph의 인지적 상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단순한 대언적 믿음 문장인 (32)에 비해 더욱 흥미로운 무언가를 드러내고 있다:
(34) Ralph는 그러한 x가 존재한다고 믿는다 (x는 간첩이다).
Ralph believes that there is an x such that (x is a spy).6)
6) 임의의 개체상항 ‘s’와 임의의 폐쇄문 ‘P’에 대해, 믿음 연산자 ‘s는 P라고 믿는다’를 ‘Bs[P]’로 기호화한 뒤, 각주)에서 살펴본 방식대로 (33)과 (34)를 기호화하자면 다음과 같이 표기될 수 있다:
(33′) (∃x)Br[Sx].
(34′) Br[(∃x)Sx].
앞서 양상성 문맥에서와 마찬가지로, 존재 양화사가 넓은 범위를 취하고 있는 (33′)에서는 대물적 믿음이 드러나고 있고, 믿음-연산자가 넓은 범위를 취하고 있는 (34′)에서는 대언적 믿음이 드러나고 있다. 전자는 어떤 대상이 존재해서, 그 대상이 Ralph에 의해 여차여차하다고 믿어진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반면, 후자는 Ralph가 어떤 대상이 여차여차하다고 믿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우선 (34)에 따르면 Ralph는 세상에 간첩이 존재한다고 믿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이는 세상 사람들 누구에게나 다 해당되는바, 특별히 Ralph의 인지적 상태에 대해 별다른 무언가를 말하고 있지는 않은 셈이다. 반면 (33)이 (34)와 미묘하게 다른 점은, 대부분 사람들과는 다르게 Ralph가 특정한 누군가를 간첩이라 의심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양상성이 나타나는 단순 내포적 맥락에서와 달리, 이렇듯 명제태도가 나타나는 超-내포적 맥락에서는 수출이 가해지기 이전과 이후에 인식론적 측면에서 모종의 비대칭성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 자체로 보자면 (32)에서 (33)으로의 이행[즉 존재 양화]은 명백히 타당하다. (32)에서 양화되는quantified into 자리인 ‘그 MBH’가 나타나는 맥락은, 단칭용어가 온전히 통상적으로 나타나는 자리 즉 지시적으로 투명한 자리이기 때문이다. (32)에서 '그 MBH'는 ‘…라고 믿는다’에 의해 속박bind되어 있거나 그 연산자의 영향권 내부에 있는 게 아니라 그 외부에서 나타나고 있다(그리고 존재양화가 이뤄지면서 (33)에서 두 번째로 나타나는 변항 ‘x’ [즉 양화사를 제외한 부속문 ‘Ralph는 x가 간첩이라고 믿는다’의 ‘x’]는 (32)에서 나타나는 단어 ‘그he’ [즉 ‘Ralph가 그를 간첩이라고 믿는’의 ‘그’]를 대체한 셈이다. (32)에서처럼 사용되는 경우 대명사 ‘그’는 변항과 동일한 기능을 수행한다).
하지만 Frege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31)에서 (32)로의 추론부터가 애초에 타당하지 않았던 것처럼 보인다. 앞서 ‘태도에 관한 Frege의 견해와 지시적 불투명성’ 節 말미에서 살펴보았듯, 믿음 맥락 내부에 있는 용어는 그것의 통상적인 지시체가 아니라 통상적인 뜻을 지시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31)은 Ralph가 그 MBH라는 대상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음을 진술하고 있는 게 아니라, 어떤 명제와 관계를 맺고 있음을 진술하고 있다. 기실 (31)은 그러한 남자가 존재한다는 것조차도 함축하지 않는다. [(31)에서 단칭용어 ‘그 MBH’는 非-외연적인 맥락에 나타나는바 그 지시체에 대한 존재함축이 가정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Le Verrier와 Vulcan의 사례에서살펴본 바와 같다. [Le Verrier가 Vulcan이 뜨거울 것이라 믿었다 해서, 그 믿음이 Vulcan의 존재를 보증해주지는 않는다.] 따라서 (31)은 그 MBH의 존재를 함축하는 (32)를 함축할 수 없다. (32)와 그에 따라 (33)은 특정한 한 남자 즉 그 MBH의 존재로 인해 참인 반면, (31)은 엄밀히 말해 그 MBH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은 문장이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31)과 같이 지시적으로 불투명한 맥락은 양화사와 같은 장치에 대해 봉쇄되어있는 듯하다. 무언가 추가적인 도움이 없는 한, 지시적으로 불투명한 맥락 외부에 있는 양화사는 그 맥락 내부의 자리를 양화할quantify into 수 없는 것이다. (31)을 둘러싼 이러한 의미론적 여건을 그림에 대한 태도에 빗대어 이해해볼 수 있겠다: Ralph가 어떤 그림이 실제 사건을 묘사한 것이라 여긴다 해서, 그 그림에 묘사된 사건이 실제로 발생했다거나 그려진 사물들이 실재한다는 것을 함축하지는 않는다.
(31)에서 (32)를 추론했던 절차에는 한 가지 더 추가적인 가정이 숨어있는 듯하다. 바로 ‘그MBH’가 대상을 결정하는 뜻을 표현한다는 것, 간단히 말해 무언가를 지시한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었다. 이러한 가정을 다소 간략히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다:
그러한 x가 존재한다: ‘그 MBH’의 뜻은 x를 결정한다.
궁지에 몰린 Ralph
Quine은 Ralph 이야기를 이어간다. Ralph는 Bernard J. Ortcutt라는 사람이 매우 정직한 사회구성원으로서 확실히 간첩이 아니라 믿고 있다. 따라서 다음은 참이다:
(35) Ralph는 Ortcutt가 간첩이 아니라고 믿는다.
앞 節에서 그 MBH가 존재한다는 것을 근거로 (31)로부터 (32)를 추론하고 그에 따라 (33)을 추론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Ortcutt가 존재함을 근거로 (35)로부터 다음을 추론할 수 있다:
(36) 그러한 x가 존재한다(Ralph는 x가 간첩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Ralph는 모르지만 다음은 참이다:
(37) 그 MBH = Ortcutt.
앞선 (33) ‘그러한 x가 존재한다 (Ralph는 x가 간첩이라고 믿는다)’에 따르면 Ralph는 어떤 사람에 대해 그가 간첩이라 믿고 있다. 그 사람은 그 MBH인데, (33)에 따르면 이는 곧 Ortcutt와 동일인이다. 따라서 Ortcutt에 관해 Ralph는 그가 간첩이라 믿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이와 정확히 평행하게 진행되는 추론에 의해서, Ortcutt에 관해 Ralph는 그가 간첩이 아니라 믿고 있다는 것이 따라나온다. 이 남자에 대한 Ralph의 태도는 둘 중 과연 어느 것인가? Ralph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는 그가 그 남자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에 달렸다. Ralph가 그 남자를 그 MBH로 여기는 한 그 남자를 간첩이라 믿는 것인 반면, 그 남자를 Ortcutt로 여기는 한 그 남자를 간첩이 아니라 믿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보기엔 어떠한가? 분명 그 남자에 대한 Ralph의 태도는 우리가 그 남자를 생각하는 방식과 무관하다. 도대체 Ortcutt에 관해 Ralph는 그가 간첩이라 믿고 있는 것인가, 간첩이 아니라 믿고 있는 것인가?
샛별 사례에 대한 Frege의 가르침에 따르자면, Ralph의 태도는 둘 다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Ralph가 非일관적inconsistent이거나 非합리적irrational인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즉 하나의 명제 P에 대해 Ralph가 P라고 믿고 있는 동시에 P가 아니라 믿고 있는 것은 아니다. Frege의 착상에 따라 말해보자면, (31) ‘Ralph는 그 MBH가 간첩이라고 믿는다’에서 ‘믿는다’의 범위 내부에 나타나는 용어에는, Ralph가 Ortcutt에 관해 생각하는 방식, 즉 Ralph가 그 남자를 그 MBH로서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이 반영되어야 한다. 이는 (35)에서도 마찬가지로서, 다만 (35)에서는 Ralph가 그 남자를 Ortcutt로서 생각하고 있다는 점만이 다를 뿐이다. (31)과 (35)에서 각각 ‘그 MBH’와 ‘Ortcutt’가 나타나는 자리는 지시적으로 불투명한바 共-지시적 용어에 의한 대체가 허용되지 않는다. ‘Ralph는 가 간첩이라고 믿는다’라는 맥락에 대체성 원리가 적용될 수 있는지 여부는, 공란에 삽입되는 용어가 지시하는 대상이 아닌 다른 무언가에 따라 결정된다. Frege에 따르면 그러한 맥락을 지닌 문장은 그 대상에 관해 말하고 있지 않다.
반면 (32) ‘그 MBH는 Ralph가 그를 간첩이라고 믿는 그러한 것이다’에서 나타나는 ‘그 MBH’는 이러한 기능을 수행하지 않는다. [즉 (32)에서 ‘그 MBH’에는 Ralph가 그 남자에 관해 생각하는 방식이 결부되어 있지 않다.] (32)에서 ‘그 MBH’가 차지하는 자리는 명백히 지시적으로 투명한바 共-지시적 단칭용어(일테면 ‘Ortcutt’)에 의한 대체가 허용된다. (31)로부터 (32)로의 수출작용은 대언적 문장으로부터 대물적 문장으로 이행하는 절차라 할 수 있다. 한편, 존재 양화문인 (33) ‘그러한 x가 존재한다 (Ralph는 x가 간첩이라고 믿는다)’는 술어를 만족하는 특정 대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명시적으로 말하고 있다.
대물성/대언성 구분의 인식론적 중요성은 매우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두드러진 것으로 다음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ⅰ) 대물성의 필수불가결성. Rusell은 ‘나는 네 요트가 그보다 훨씬 길다longer than it is고 생각했어’라는 예시를 든 적이 있다. 여기서 말해지고 있는 그 요트를 A라 해보자. Russell이 과거 특정 시점에 자신이 지녔던 믿음에 대해 말하는 바가 분명 다음과 같은 것은 아니다:
(38) Bertran는 A가 A보다 길다고 믿는다.
그는 이와 같은 명백한 모순을 믿었다고 주장하고 있지 않다. 우리는 그의 말을 Bertrand는 A의 길이가 A의 길이보다 길다고 생각했다는 식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직관적으로 생각해보자면 그가 의도했던 의미는, A의 실제 길이가 존재하는데, Bertrand는 [자신이 생각한] A의 길이가 그것보다 길다고 믿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를 나타내기 위해서는 A의 실제 길이를 지시하는 표현을 다음과 같이 ‘…라고 믿는다’의 범위 내부로부터 그 외부로 수출시켜야 한다:
(39) 그러한 x와 y가 존재한다 (x = A의 길이 & y는 x보다 길다 & Bertrand는 y가 A의 길이라고 믿는다).
다시 말해 Bertrand가 착각한 내용을 정확하게 기술하기 위해서는 ‘믿는다’의 범위 외부로부터 그 내부로 양화할 필요가 있는 셈이다. 이렇듯 경우에 따라서는 대물적 문장이 반드시 요구된다.
(ⅱ) 수출작용에 대한 추가적인 제한사항. Ralph의 친구 Leo에게는 Ralph와 달리 특정한 누군가가 간첩이라고 믿을 이유가 전혀 없다고 해보자. 다만 매우 일반적인 통념에 따라 Leo는 키가 가장 작은 두 간첩의 키가 정확히 동일하지는 않다고 믿는다. 그의 생각이 맞다고 해보자. 따라서 우리는 다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40) Leo는 키가 가장 작은 간첩이 간첩이라고 믿는다.
키가 가장 작은 간첩은 존재하기 때문에, (40)에 수출작용을 가하여 다음을 얻을 수 있다:
(41) 키가 가장 작은 간첩은 Leo가 그를 간첩이라 믿는 그러한 것이다.
The shortest spy is such that Leo believes that he is a spy.
여기서 ‘키가 가장 작은 간첩’을 존재 양화하여 다음을 도출한다:
(42) 그러한 x가 존재한다 (Leo는 x가 간첩이라 믿는다).
하지만 어딘가 잘못된 듯하다. (42)에 따르면 Leo는 특정 누군가가 간첩이라 믿고 있는 셈인데, 앞선 가정에 따르면 이는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41)로부터 (42)를 도출하는 과정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이는 단지 ‘B는 여차저차하다’로부터 ‘여차저차한 어떤 것이 존재한다’를 도출하는 형식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40)으로부터 (41)을 얻어내는 수출절차에 있을 수밖에 없다. 단순히 대언적인 믿음을 갖는 것만으로는 그에 상응하는 대물적 믿음을 갖는 데에 충분하지 않다. 다시 말해 지시적이거나 기술적descriptive인 단칭용어가 포함된 한 명제에 대한 믿음을 갖는다고 해서, 그 단칭용어에 의해 지시되는 사물에 관한 믿음 역시 갖고 있다는 게 반드시 보증되지는 않는다. 그 특정 대상과 연관된 단칭명제에 대한 믿음을 갖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대언적 문장으로부터 대물적 문장으로 이행하는 수출작용에는 지금까지 고찰해온 것 이상의 무언가가 더 요구된다.
직관적으로 생각해보면 Leo와 키가 가장 작은 간첩 사례에서 결정적인 문제점은 키가 가장 작은 바로 그 간첩이 누구인지를 Leo가 모른다는 점에 기인하는 듯하다. 따라서 만약 키가 가장 작은 간첩이 누구인지를 Leo가 안다는 전제가 추가된다면 (41)에는 문제가 없게 된다.
David Kaplan은 이러한 착상을 더욱 정교하게 다듬고 발전시켰는데, 여기서는 그 핵심만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Kaplan에 따르면 수출작용을 통해 대언성에서 대물성으로 이행하는 추론이 성공적이기 위해서는, 수출되는 용어(이 사례의 경우 (40)의 ‘키가 가장 작은 간첩’)가 믿음의 주체(이 경우 Leo)를 믿음의 대상과 인식론적으로 부합하게 되는 위치에 두어야 한다.7) 여기서 Kaplan은 “생생한 지시어vivid designator”라는 핵심 개념을 도입한다. 생생한 지시어란 한 사람의 내적 이야기inner story를 이루는 단칭용어이다. 이는 정신적 이미지mental images, 부분적인 기술구partial descripsion, 일상적인 이름ordinary name 등이 뒤섞인 복합체conglomeration로서, 만약 이를 만족하는 대상이 존재한다면 생생한 지시어는 그것을 지닌 사람의 마음에 그 대상을 불러일으키는 작용을 한다. 심지어 대상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주체의 관점에서는 마치 그 대상이 존재하는 것처럼 여겨지도록 작용한다. 생생함vivacity이라는 개념은 보통 심리철학philosophy of mind에서 내적 현상internal phenomenon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렇기 때문에 생생한 이름vivid name이 반드시 지시체를 가져야 할 필요는 없으며,8) 어떤 동일성 진술의 양변이 생생한 지시어로 이루어져 있다 해도 그 진술의 진리치에 관해 실수할 가능성이 언제나 열려 있다.
7) 이 문장은 언뜻 이해하기 어렵다. 논의 맥락상 추정해보자면, 믿음-주체가 언어표현 e를 통해 그 지시체를 인식론적으로 투명하게 떠올릴 수 있는 경우에만, e에 대한 수출과정이 타당하다는 의미인 듯하다. (40)의 ‘키가 가장 작은 간첩’과 같이 막연한 개념적⋅대언적 믿음만을 환기하는 용어를 Leo가 받아들인다 해서 그로부터 Leo가 그 간첩에 대한 대물적 믿음을 갖고 있다고 추론할 수는 없다. 이것이 타당하기 위해서는 ‘키가 가장 작은 간첩’을 통해 Leo가 바로 그 간첩을 인지적으로 명료하게 표상할 수 있어야 한다. 본문에서 곧 이어지듯이, 수출되는 용어가 믿음-주체의 입장에서 생생한 이름이어야 한다는 것이 이 문장의 요지인 듯하다.
8) 심리철학에서 내적 현상 내지 심적 상태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로 여겨지는 것이 바로 지향성intentionality 개념이다. 상식적으로 알 수 있듯이 믿음⋅바람⋅욕구함⋅혐오함⋅사랑함 등의 정신적 상태가 존재한다고 해서 그렇게 믿어지거나 욕구되는 대상이 반드시 존재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대상에 대해서도 정신적 태도를 취할 수 있는바 이러한 특성을 심적 상태의 지향성이라 칭한다. 물리적 상태는 대체로 이런 종류의 지향성을 갖지는 않는다. 내가 무언가를 발로 찼다면(찼다고 착각한 게 아니라 정말로 찼다면) 내 발에 치인 대상이 분명 존재한다.
Kaplan에 따르면 생생한 지시어는 이런 특징을 갖는 내적 현상에 속하는 사안이므로, 어떤 표현 e가 태도-주체 s에게 생생한 이름이라고 해서 그 지시체의 존재가 보증되는 것은 아니다. 반면 표현 e의 지시체가 보증된다고 해서 e가 임의의 주체에게 반드시 생생한 이름인 것도 아니다. 따라서 ‘그 MBH’가 Ralph에게 생생한 이름이어도 그 MBH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을 수 있으며, 키가 가장 작은 간첩이 분명 존재한다고 해도 ‘키가 가장 작은 간첩’이 Leo에게는 생생한 이름이 아닐 수 있다.
Kaplan 이론의 요지를 간추려보자면, 어떤 사람이 생생한 지시어를 사용하여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고, 그에 더해 믿음주체의 입장에서 그 지시어와 적절하게 연관된다고 여겨지는 대상이 존재할 경우, 생생한 지시어는 그 대상을 믿음주체에게 드러낸다(표상시킨다)represent. [즉 믿음주체는 생생한 지시어를 통해 대상을 명시적으로 표상한다.] 수출작용은 이러한 경우에만 허용된다. 반면 (40)의 ‘키가 가장 작은 간첩’과 같이 생생하지 않은 지시어가 개입된 경우엔 단지 희미하고 막연한 개념적 내용이 표현될 뿐으로서. 이는 특정 [대언적] 믿음을 형성하는 데에는 충분하겠으나 그로부터 [대물적 믿음으로 이행하는] 수출작업을 진행할 수는 없다.
믿음 귀속과 명시적 지표사: 대자적 믿음
칵테일 파티에서 Jones가 방 건너편에 있는 Brown을 가리키며 다음과 같이 험담을 늘어놓고 있다 해보자:
(43) 대학 총장은 그가 돌팔이라고 믿는다.
The president of the university believe that he’s a charlatan.
Jones의 발화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Frege의 도식을 철저히 따라본다면, 그의 발화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Brown을 짚어내는 데에 Jones가 사용하는 뜻이 아니라 총장이 사용하는 뜻이 필요하다. 하지만 (43)은 그러한 뜻이 무엇인지에 대해 아무런 단서도 제공하지 않는다. 게다가 분명 (43)에서 ‘그’는 (지표사가 [특정 화자에 의해 특정 맥락에서] 사용될 때 모종의 뜻이 표현된다고 한다면) Jones를 짚어내기 위해 총장이 이용하는 뜻이 아니라 Jones에 의해 이용되는 뜻을 표현한다. [요컨대 Jones는 발화맥락에 따라 화자의 뜻만을 표현하는 지표사를 사용하고 있음에도, 총장의 믿음 내용을 성공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Frege적인 도식은 이런 식의 믿음 귀속이 어떻게 가능한지 설명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는다.]
Jones가 Brown에 대한 험담을 다음과 같이 일반화할 경우 문제는 한층 더 복잡해진다:
(44) 대학 사람들은 전부 그가 돌팔이라고 믿는다.
Everyone in the university believes that he is a charlatan.
이 발화에서도 Jones는 Brown을 지시하기 위해 지표사 ‘그’를 사용하고 있다. Frege주의자라면 (44)에 있는 그 지표사가 표현하는 뜻이 Brown을 지시하기 위해 대학 구성원들이 각기 이용하는 다양한 뜻들이 아니라 Jones가 표현하는 뜻이라는 데에 동의해야만 한다.
앞서 6章, ‘지표사의 필수불가결성’ 節에서 지표사가 단순한 지시적 장치만은 아니라는 점을 살펴본바 있다. 지표사는 매우 특이하면서도 필수적인 방식으로 화자 자신을 특정 공간 및 시점에 위치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우리는 지도를 보면서 여기가 어딘지를 알고 싶어 하기도 하며, 달력을 보면서 지금 혹은 오늘이 무슨 날인지를 알고 싶어 하기도 있다. 그 경우 일반적인 개념들로 이뤄진 단순한 기술구만으로는 궁금증이 해소되지 않는다. 이는 ‘나’, ‘나를’, ‘나 자신’과 같은 1인칭 대명사가 사용되는 경우에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예를 들어, 연주가 한창인 클래식 공연장에서 그 F(F한 그 사람)의 핸드폰 벨소리가 울린다면, 이를 처음 들었을 때 내가 느끼게 될 짜증스러움의 정도와, 알고 보니 그 핸드폰이 다름 아닌 나의 것이었을 경우 느끼게 될 당혹스러움의 정도는 천양지차일 것이다. 1인칭 지표사가 사용된 믿음 귀속의 사례로는 다음과 같은 문장을 들 수 있다: 앞서와 마찬가지로 이 문장의 화자가 Jones라고 가정하자.
(45) 대학 총장은 내가 돌팔이라고 믿는다.
The president of the university believes that I am a charlatan.
이런 식의 자기-귀속적인 믿음self-ascribing belief은 대자적(對自的) 믿음belief de se이라 칭해진다. (45)에서 Jones는 총장이 Brown이 아니라 Jones 자신을 좋지 않게 생각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도 앞서와 마찬가지로 지표적 대명사 ‘나’는 Jones에 관해 생각하기 위해 총장이 사용하는 뜻을 표현할 수 없다. (45)에서도 ‘나’는 Jones가 자신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그만의 방식을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나는 돌팔이이다’라는 명사절을 사용하여 Jones가 표현하고 있는 명제는, 총장이 아니라 오로지 Jones 그 자신에 의해서만 이용되거나 생각될 수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럼에도 Jones는 그 명사절을 사용하여 자신의 믿음이 아닌 총장의 믿음을 성공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이런 난점을 해결하기 위해 (43)을 Kaplan의 도식에서 분석해보자면, 다음과 같이 지표사가 결합된 존재 양화문으로 나타낼 수 있다:
(46) 예상 가능한 맥락상 ‘그’의 지시체 = Brown이다 & 다음과 같은 생생한 이름 y가 존재한다 (y는 총장에게 Brown을 표상해준다 & 총장은 ‘y는 돌팔이이다’에 의해 표현되는 명제를 믿는다).9)
9) (原註) 여기서 인용부호 내부가 양화되었는데, 엄밀히 말해 이는 형식논리적으로 무의미하다. 하지만 이에 대해 올바른 논리적 관점까지 설명하는 것은 지금의 맥락상 논의를 너무 복잡하게 만들 듯하다.
(44)와 (46) 역시 이와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분석될 수 있다. 물론 이와는 다른 방식의 접근법들도 제시되어왔다. 그중 한 가지를 다음 節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암묵적인 지표적 요소
앞서 5장에서 살펴보았듯이, 고유명에 대한 Kipke식의 직접지시적 관점은 Frege로 하여금 뜻이라는 것을 상정하게끔 추동했던 생각 자체를 단순히 거부하기에 이른다. 왜냐하면, 만약 고유명이 직접지시적인 용어로서 내포connotation를 갖지 않고 오로지 외포denotation만을 갖는다면, 다음과 같은 상황이 만족스럽게 설명될 수 없기 때문이다:
(47) Alice는 Marilyn Monroe가 유명한 여배우라고 믿는다.
(48) Alice는 Norma Jean Baker가 유명한 여배우가 아니라고 믿는다.
(49) Marilyn Monroe = Norma Jean Baker.
직접지시론의 관점에서 보자면 단칭용어 ‘Marilyn Monroe’와 ‘Norma Jean Baker’는 동의어이다. 따라서 Alice는 非합리적이게도 한 명제와 그 부정을 동시에 믿는 셈이다. 하지만 직관적으로 생각하기에 (47)-(49)에 제시된 상황은 분명 있음직한 일로서 반드시 非합리적인 것만은 아닌 듯하다. 반면 Frege의 관점에서 ‘Marilyn Monroe’와 ‘Norma Jean Baker’는 각기 다른 뜻을 표현하기에 Alice의 믿음을 모순 없이 설명해낼 수 있다.
하지만 Frege의 노선이 정말로 만족스러운지 의심할 만한 강력한 이유가 있다. 당신이 Pederewski가 폴란드의 두 번째 수상이었다는 점만을 제외하고는 그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다고 해보자.10) 그런데 당신이 〈월광 소타나〉라는 영화에서 한 피아니스트를 얼핏 보게 되는데, 그 사람 역시 Pederewski라 불린다(실제로 Pederewski는 그 영화에 출연하여 자기 자신을 연기하였다). Pederewski에 대해 잘 모르는 당신으로서는 두 사람이 동일인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둘은 같은 이름을 가진 동일인이다. 따라서 당신은 Pederewski가 정치인이라는 명제와, 그 부정인 Pederewski가 정치인이 아니라는 명제를 동시에 믿고 있는 듯하다. 여기서 이 문제가 고유명에 대한 직접지시론 논제와는 무관하다[즉 고유명이 직접지시적인지 여부에 대한 쟁점과는 무관하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Pederewski’라는 용어가 어떤 식으로 설명되든, Frege의 관점에 따라 설명되든 Kripke의 관점에 따라 설명되든 그와 무관하게, 당신은 Pederwski가 정치인이이라는 것과 정치인이 아니라는 것을 동시에 받아들이고 있는바 논리적으로 모순된 믿음을 지니고 있는 듯하다.
10) (原註) 이 예시는 Kripke (1979)에서 차용하였다.
Frege는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교묘하게 피해간다: 당신의 개인어(個人語)idiolect 내에는 하나가 아니라 두 개의 ‘Pederewski’라는 이름이 있어서, 당신은 두 이름이 각기 다른 사람의 것이라 믿고 있다. 이런 종류의 현상은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이 일상에서 매우 흔한 일이다. 당신이 동일한 하나의 사물 내지는 사물의 한 가지 종류라 여겼던 것이 실제로는 둘 혹은 그 이상이었던 일은, 자주 있을 법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상상가능하다conceivable. 당신은 당신의 왼손이 늘 동일한 하나의 신체 일부라 생각해왔겠지만, 그게 실제로는 당신 모르게 매일 새벽마다 사악한 악마에 의해 새로 만들어진 일련의 다수의 실체들이었을지도 모른다. 그것들에게 ‘내 왼손1’, ‘내 왼손2’ … 와 같은 식으로 이름을 붙여줄 수도 있다. 그 경우 분명 당신의 왼손1 ≠ 당신의 왼손2이다. 전혀 있을 법하지 않은 일이지만 그렇다고 절대적으로 배제될 수도 없는 가능성이기 때문에[즉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지만 논리적으로는 가능하기 때문에], 단순히 약정에 의해 의미론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종류의 사안은 아닌 듯하다. 다르게 말해 이러한 가능성이 분석적으로 거짓이라 판정할 수는 없다. 이보다 훨씬 더 그럴듯한 사례를 들 수도 있다. 당신이 창밖을 보니 어떤 버스의 앞부분이 비스듬한 각도로 보인다 해보자. 같은 벽면에 있는 다른 창문을 통해 보니 거기에서는 어떤 버스의 뒷부분이 보인다. 버스가 아주 길다는 점을 감안하건대 당신이 ‘저 버스가 이 버스인가?’ 하고 궁금해 하는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이런 사례들에서 나타나는 단칭용어들은 고유명이나 자연종 용어라기보다는 차라리 지표사라고 해야 한다. 그중에서도 특히 지시사demonstrative라 할 수 있는바, 이 경우 단칭용어는 사용될 때마다 각기 다른 (암묵적인) 實-지시화demonstration가 동반되면서 여러 번 사용되는 동일한 지시사와 같이 사용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우리는 앞서 6章에서 ‘물’과 같은 자연종 용어가 암묵적인 혹은 숨겨진 지표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음을 꽤 설득력 있게 주장하는 Putnam의 논증을 살펴본 바 있다. 또 다른 예를 들자면, 19세기까지는 옥(玉)이 한 가지 광물인 것으로 알려져 왔지만, 이후 광물학자들에 의해 두 가지 다른 광물인 경옥(硬玉)과 연옥(軟玉)으로 구분된다는 것이 밝혀졌다. 암묵적인 지표사 내지 암묵적인 지시사를 다음과 같이 명시적이게 만듦으로써 두 광물이 구분될 수 있다: (통상 옥이라고 불려온 물질의 표본을 가리키며pointing at) 이것은 경옥이고, (또 다른 물질 표본을 가리키며) 저것은 연옥이다.
직접지시, 태도, 의미론적 대물성
앞선 節들에서 논의된 바에 따르면 명제적 태도는 Frege가 주장했을 법한 방식으로 의미론과 상호 연관되지는 않는 것처럼 여겨진다. 기실 ‘샛별’과 ‘개밥바라기’는 전형적인 고유명과는 거리가 멀다. 왜냐하면 이 경우 두 이름에는 공적인 의미로서 각기 독특한 제시방식mode of presentation이 결부되어 있다고 보는 편이 합당하기 때문이다. [반면 사람의 이름과 같은 일상적인 고유명은 그렇지 않다.] 그리고 아무리 그러한 경우라도 정작 중요한 사안은, 한 용어에 특정 속성이 결부되는 것은 파기 가능한데도, 그렇게 결부됨으로써 그 속성이 그 용어와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즉 특정 속성이 한 용어의 고유한 의미 내지 뜻으로 결부되어 있는 것처럼 여겨지게 된다. 경옥과 연옥 사례, Pederewski 사례, 창밖으로 보이는 리무진 사례 등은 매우 희소한 경우로서 사실 그다지 놀라울 것도 없다. 언어는 다른 무엇보다도 의사소통을 목적으로 사용된다. 그런데 우리가 마주치는 모든 대상이나 대상의 모든 부분들에게 굳이 별도의 이름을 일일이 붙이려 한다면, 그것들이 실제로도 일일이 구분되는 사물이나 물질인 경우가 아닌 한, 정상적인 의사소통은 도저히 이뤄질 수 없을 것이다. 만약 어떤 것이 오리처럼 소리를 낸다면, 그것에 오리라는 이름을 붙여주면 그만이다.
그렇다면 이제 Frege를 제쳐두고 직접지시론의 입장에 서보자. 이 관점에서 고유명, 자연종 용어, 지표사 등의 의미론적 값semantic value 혹은 정보적 값informational value은 단지 그 용어들의 지시체에 불과하다. 이것이 바로 Mill주의적Millianism 관점으로서, 이에 따르면 고유명과 지표사는 기술적(記述的) 내용descriptive content을 표현하지 않으며 단지 대상을 지시하기만 할 뿐이다. (이러한 관점은 Russell주의적Russellianism이라 칭해지기도 한다. 고유명이 한정 기술구가 축약된 표현이라는 주장을 제외한다면 Russell의 관점 역시 대체로 이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이에 [직접지시론자인] Nathan Salmon은 태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대안적인 설명을 제시한다. ‘슈퍼맨’과 ‘Clark Kent’가 직접지시적인 고유명이라 해보자. Salmon의 관점에 따르면 이 두 이름의 의미론적 값 내지 정보적 값은 동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Lois Lane11)이 ‘슈퍼맨은 영웅이야!’와 ‘Clark Kent는 영웅이야!’를 듣는다면 각기 다르게 반응할 것이다. Salmons의 용어법을 따르자면 Lois는 동일한 유형에 속하는 두 명제-개항들12)을 각기 다른 외양(外樣)guise을 통해 파악한다grasp. 두 진술은 정확히 동일한 명제를 표현하지만, Lois는 어떤 외양 하에서는 ‘슈퍼맨은 영웅이다’를 긍정하는 성향을 보이고dispose to assent, 그와 다른 외양 하에서는 ‘Clark Kent는 영웅이다’를 부정하는dissent 성향을 보일 것이다.
11) 슈퍼맨 시리즈의 등장인물로서 Clark Kent가 근무하는 언론사의 동료이자 슈퍼맨의 연인.
12) 직접지시론의 관점에서 보자면, ‘슈퍼맨’과 ‘Clark Kent’의 지시체가 동일하므로, 임의의 술어 ‘F’에 대해 ‘슈퍼맨은 F하다’와 ‘Clark Kent는 F하다’는 동일한 명제를 표현한다.
중요한 것은 Lois가 그 명제를 파악하는 각기 다른 외양이라는 것이 이름 ‘슈퍼맨’과 ‘Clark Kent’에 관한 의미론에 속하는 사안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 외양들은 슈퍼맨은 영웅이다나 Clark Kent는 영웅이다라는 진술의 의미의 일부가 아니다. 오히려 그 외양들은 Lois 내부에in Lois 있는 인지적cognitive 혹은 심리적 특질psychological feature이다. 그렇기에 이 사례에서 결정적 용어인 ‘슈퍼맨’과 ‘Clark Kent’를 혹여 다른 어떤 사람이 충분히 능숙하게 사용하더라도, Lois가 지닌 외양이 그 사람에게 반드시 떠올라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즉 Lois가 한 명제를 파악하는 외양들은 Lois에게만 고유한 인지적 특성이다.] 가령 Clark Kent와 슈퍼맨이 동일인임을 잘 아는 사람이라면 두 용어가 상호대체가능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 사례가 별로 만족스럽지 않게 여겨진다면, 한 사람이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 여타 비근한 사례를 떠올려보라.)
이제 이러한 착상을 명제적 태도를 나타내는 용어가 명시적으로 포함된 문장에 적용해보자. Salmon의 이론에서 결정적인 사안은, 태도에 대한 분석 내지 믿음 문장에 대한 분석에서 태도 주체의 외양이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가령 Lois가 슈퍼맨이 영웅이라고 믿는다면, 그 경우 한 외양과 한 명제가 존재해서 Lois는 그 외양 하에서under that guise 그 명제에 대해 특정한 인지적 관계cognitive relation를 맺는다. 이러한 관계를 ‘BEL-관계’라 칭해보자. 통상적인 2항 믿음-관계와 유사하게 BEL-관계는 3항 관계이다. ‘p’가 한 명제를 나타내고 ‘g’가 한 외양을 나타낸다고 한다면, 믿음에 대한 Salmon 식의 분석은 다음과 같이 일반화된다:
A는 다음의 경우 그리고 오직 그 경우에 p를 믿는다: 그러한 g가 존재한다 〔A는 g에 의해서 p를 파악한다 & A는 g 하에서 p에 대해 BEL-관계를 맺는다〕.
이를 Lois에게 적용하기 위해, 앞서와 마찬가지로 ‘슈퍼맨은 영웅이다’와 ‘Clark Kent는 영웅이다’가 [직접지시론의 입장에 따라] 동일한 명제를 표현한다고 가정한 채 그 명제를 ‘P’라 하자. Salmon의 관점에 따르면 두 문장은 각기 다른 외양을 통해 Lois와 연관된다. 이에 Lois가 맺고 있는 두 믿음-관계를 분석하면 각각 다음과 같다:
Lois는 ‘슈퍼맨은 영웅이다’가 포함된 외양을 통해 P를 믿는다 & Lois는 그 외양 하에서 P에 대해 BEL-관계를 맺는다.
Lois는 ‘Clark Kent는 영웅이다’가 포함된 외양을 통해 ∼P를 믿는다 & Lois는 그 외양 하에서 ∼P에 대해 BEL-관계를 맺는다.
따라서 최종적으로 Lois는 명제 P와 그 부정을 동시에 믿고 있는 것으로 드러난다. 그녀는 슈퍼맨이 영웅이라 믿는 동시에 영웅이 아니라고도 믿는다는 것이다. 물론 후자에 대해 그녀는 그러한 단어로 표현된 믿음을 갖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것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한 문장을 부정한다고 해서 그 문장에 의해 표현된 명제마저 부정한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Lois의 믿음이 이렇게 분석된다고 해서 그녀가 非합리적이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녀가 非합리적이게 되는 경우란 오로지 동일한 하나의 외양 하에서 한 명제를 믿으면서 믿지 않는 경우뿐이다. 다른 사례들 역시 이와 마찬가지로 분석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Mark Twain은 Samuel Clemens이다’를 부정하면서도 그와 동일한 명제를 믿는다는 게 반드시 불합리한 일은 아니다. 이 명제는 단순히 ‘a=a’의 형식을 지니고 있지만, 이 명제를 부정하는 사람이 의존하는 외양 하에서라면 ‘a=b’의 형식으로 파악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7章에서 우리는 가령 ‘파리Paris가 독일에 있다면 파리는 모로코에 있다’와 같이, 의미론적으로 올바른 문장들이 왜 화용론적으로는 부적절한지에 대해 Grice가 제시한 설명을 살펴보았다. 조건문에 대한 고전적인 진리-함수적 설명에 따르면 이 문장은 참이지만, 이 문장에 대한 발화 즉 그 문장에 대한 진술은 통상 화용론적으로 부적절하다고 받아들여진다. [이러한 착상을 Lois 사례에 차용해볼 수도 있다.] Lois Lane은 [순전히 의미론적인 관점에서만 보자면] 슈퍼맨이 Clark Kent라는 것, 혹은 위 사례의 경우 Clark Kent가 영웅이라는 것을 엄연히 믿고 있긴 하지만, 그녀의 믿음을 그러한 단어들로 기술하는 것은 화용론적으로 부적절할 것이다.
Salmon이 제시한 외양 개념은 언어표현의 의미론적 속성에 의해서는 충분히 해결되지 않는 인지적 측면의 잔여물을 포착하여 이와 얽힌 문제를 만족스럽게 해결해낸다. 따라서 외양에 관한 온전한 이론은 인지과정 내지 정보처리절차에 대한 경쟁하는 이론들의 일부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물론 Salmon 역시 어떤 대상에게 명제적 태도를 귀속시킬 때 태도-주체가 지닌 특정 인지적 관점이 드러나도록 분석해야 한다는 데에 동의한다. 종종 우리는 어떤 사람이 자신의 태도를 명시하면서 긍정할 법한 것과 동일하거나 혹은 거의 유사한 단어들을 사용하여 그 주체의 태도를 기술하고자 한다. 그 경우 우리는 추정컨대 모종의 Grice적인 준칙에 따라서, 주체의 믿음을 기술하기 위해 사용된 단어들에 의해 순전히 의미론적으로 전달되는 내용을 명시하는 데에 몰두하기보다는, 믿음 주체의 인지적 상태에 관한 사안들을 전달하는 데에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Salmon이 칭한바 “화용론적으로 전달되는 정보pragmatically imparted information”에 속하는 사안일 뿐이다. 그러므로 고유명이 Frege적인 뜻을 표현하지 않는 직접지시적 표현이라는 논제를 유지한 채로도, Lois의 경우와 같은 변칙적인 사례들을 여전히 설명해낼 수 있다.
따라서 다음 도식은 타당하지 않다(즉 이 도식의 대입례는 경우에 따라 거짓일 수 있다):
B가 S라고 믿는다면, B가 진실될sincere 경우 B는 ‘S’를 긍정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고유명이 연관되어 있는 한 대물성/대언성 간의 구분은 무너지게 된다. Frege에서 비롯된 고전적인 사고방식에 따르면, 대물적 믿음 진술에서는 믿음의 대상을 명시하는 용어(앞 사례들의 경우 ‘개밥바라기’와 ‘Marilyn Monroe’)가 믿음 연산자 내지 믿음 술어belief predicate의 영향권 외부에 있어야 한다. 따라서 이는 곧 대물성이라는 속성being de re을 구문적인syntactical 사안 내지는 언어의 구조적인structural 사안으로 취급하는 셈이다. 반면 단칭용어가 직접지시적이라는 점을 받아들인다면 이러한 생각은 지지될 수 없다. 왜냐하면, ‘Marilyn Monroe’와 같은 단칭용어가 대상을 직접지시한다면 그 용어가 문장에 기여하는 바는 오로지 지시체밖에 없으며, 그 경우 ‘Alice는 Marilyn Monroe가 유명한 여배우라고 믿는다’와 ‘Marilyn Monroe에 대해, Alice는 그녀가 유명한 여배우라고 믿는다’의 내용 내지 진리-조건 간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관점에서는 구문론적 대물성syntactic de re 개념과 대조되는 의미론적 대물성semantic de re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여야 할 듯하다.
역사적 사항
명제적 태도에 대한 철학적 관심이 2차 세계대전 이후 극적으로 대두된 이래 이러한 기조는 지난 70년간 좀체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물론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훨씬 이전에 Frege와 Russell이 명제적 태도에 관한 논의의 초석을 다지긴 하였지만, 그 주제에 본격적으로 착수한 인물은 1940년대 후반 및 1950년대에 대략 Frege적인 체계 내에서 작업하였던 Rudolf Carnap과 Alonzo Church였다. Carnap은 1947(第2版은 1956에 출간)년에 출간된 『의미와 필연성Meaning and Necessity』에서, Church는 1951년의 「뜻과 지칭에 관한 논리학A Formulation of the Logic of Sense and Denotation」 및 1954년의 「내포적 동형성과 믿음 동일성Intensional Isomorphism and Identity of Belief」에서 각각 명제적 태도에 대한 분석을 시도하였다.
이후 Quine은 1955년 논문 「양화사와 명제적 태도Quantifiers and Propositional Attitudes」(Quine 1975[『역설의 길The Ways of Paradox』, 개정판]에 수록)에서, Frege가 말하는 지시적 불투명성이 명제적 태도에 관한 논의의 전부는 아니며, 태도는 태도-주체와 Frege적인 명제 간에 성립하는 단순한 2항 관계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당시 Quine이 취했던 관점에 따르면, 명제적 태도 동사의 범위 내부를 양화하는 것은 대체로 올바르다고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만 최종적으로 Quine은 그러한 상식적 직관에 반대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이후 많은 인물들이 Quine의 도전에 응수하였으며, 대표적인 인물로 1968년의 획기적인 논문 「내부로의 양화Quantifying In」(Kaplan 1969 [『단어와 반대: W. V. Quine의 저작들에 관한 小論Word and Objections: Essays on the Works of W. V. Quine』]에 수록)를 쓴 David Kaplan을 들 수 있다.
명제적 태도에 관한 논의의 흐름은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Frege주의에서 벗어나 Mill주의적 관점 내지는 직접지시론의 관점으로 향하게 된다. Kaplan은 비교적 후기 논문들에서 이러한 방향전환을 보여주었으며, Kripke는 1979년 「믿음에 관한 퍼즐A Puzzle About Belief」을 출간하였다. 그 글에서 Kripke는, 설사 양화와 연관된 쟁점들을 차치하더라도 어쨌든 Frege주의 의미론은 믿음-퍼즐을 처리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떠올릴 법한 해결책과는 거리가 멀다고 주장한다. Nathan Salmon은 1986년에 『Frege의 퍼즐Frege’s Puzzle』을 출간하였는데, 이 책은 직접지시론의 관점에서 명제적 태도 문제에 접근하고자 했던 다양한 시도들 중의 하나이다. 이 방향에서 작업한 좀 더 최근의 인물들로는 Mark Richard와 Scott Soams를 들 수 있다.
Salmon의 접근법은 Jerry Fodor (1975)[『사고언어The Language of Thought』]에 제시된 “사고언어Language of Thought” 이론과 부합하는 측면이 있다. 그 책에 제시된 Fodor의 이론에 따르면 인지활동cognition은 정신적mental이면서 개별적인individual 언어에 의해 발생하는바, 이 정신적 언어란 사실상 Frege가 제시한 바와 다소 유사한 구조more Frege-like structure를 지니고 있되 다만 공적언어public language의 층위가 아니라 개인어idiolect 층위에 있는 언어이다.13) 여기서 우리가 살펴보지 않았던 또 다른 줄기로는 Donald Davidson의 “병렬적paratactic” 접근법을 들 수 있다. 이에 따르면 태도를 귀속시키는 문장은 명제와 태도-주체 간의 관계를 나타내는 게 아니라, 믿음 귀속자에 의해 제시된 문장-개항과 태도-주체 간의 관계를 나타낸다.
13) Salmon이 제시하는 외양 개념이 Fodor의 이러한 정신언어에 속하는 개념이라 할 수 있는 듯하다.
이번 章의 요약
Frege의 도식에 따르면 超-내포적 맥락에서 나타나는 표현들은 [그것이 외연적 맥락에서 가리켰을] 통상적인 지시체를 지시하는 게 아니라 [외연적 맥락에서 표현했을] 통상적인 뜻을 지시한다. 예를 들면 ‘금성은 행성이다’에서 ‘금성’은 행성 금성을 지시하지만, ‘Bob은 금성이 행성이라고 믿는다’에 있는 ‘금성’은 그 지시체인 금성이 아니라 그 용어 자체의 뜻을 지시한다. 이러한 관점은 ‘Vulcan’이 존재하지 않음에도 ‘Le Verrier는 Vulcan이 태양을 공전한다고 믿었다’와 같은 문장[즉 믿음 연산자의 범위 내에 지시체가 없는 표현이 나타나는 믿음-귀속 문장]이 참이 될 수 있는 이유를 잘 설명해낸다는 이점을 갖는다. 또한 이 관점은 ‘Bob은 금성이 행성이라고 믿는다’와 ‘Bob은 개밥바라기가 행성이 아니라고 믿는다’가 일관된 진리치를 가질 수 있다는 명백한 직관을 잘 설명해내기도 한다. 超-내포적 맥락이란 지시적으로 불투명한 맥락으로서, 이러한 맥락 내에 있는 표현들은 그와 共-지시적인 여타 표현으로 대체될 수 없다. 超-내포적 맥락은 가령 ‘p라고 Fred가 믿는다는 것을 Bill이 믿는다는 것을 Jim은 믿는다’에서처럼, 超-내포적 맥락, 超-내포적 맥락 내에 있는 超-내포적 맥락, 超-내포적 맥락 내에 있는 超-내포적 맥락 내에 있는 超-내포적 맥락 등과 같은 식으로 무한히 반복될 수 있다.
이러한 超-내포적 맥락과 달리, 대언적인 단순 내포적 맥락에서 진리치-보존적인 대체가 허용되기 위해서는 대체되는 표현들의 뜻이 동일해야 할 필요는 없으며, 다만 대체되는 표현들의 양상적 특징이 보존되어야 한다. 가령 대언적 내포맥락을 갖는 ‘필연적으로, 2<3이다’에서 ‘2’는 ‘1+1’으로 대체될 수 있지만, 그와 共-지시적인 ‘화성의 위성의 개수’로는 대체될 수 없다. [후자의 지시체가 ‘2’와 동일한 것은 우연적으로만 성립하기 때문이다.] 반면 온전한 지시적 투명성은, 가령 ‘화성의 위성의 개수는, 필연적으로 3보다 작은 그러한 것이다’와 같이 대물적 필연성 맥락이 갖는 특징이다. 이 대물적 필연성 진술은 그에 대응하는 앞서의 대언적 필연성 진술 ‘필연적으로, 2<3이다’를 함축하지만, 그 逆은 성립하지 않는다.
명제적 태도 문장에서의 수출작용은 수출되는 용어가 무언가를 지시하는 데에 성공하는 한 일견 타당해 보인다. 즉 a가 지시적 단칭용어라면 ‘Bob은 Fa라고 믿는다’는 ‘a는 Bob이 그것에 대해 F하다고 믿는 그러한 것이다’를 함축하는 듯하다. 그런데 이러한 함축관계는 다른 단칭용어 b가 있어서 b=a이고 Bob이 ∼Fb라고 믿는 경우에도 성립한다. 왜냐하면 이 상황에서 b는 Bob이 그에 대해 F하지 않다고 믿는 그러한 것인데, 그 경우 a 역시 Bob이 그에 대해 F하지 않다고 믿는 그러한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동일한 하나의 특정 대상에 대해 Bob은 그것이 F하다고 믿는 동시에 F하지 않다고 믿고 있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도, 가령 Fa와 ∼Fa를 동시에 믿는 것과 같은 식의 非합리성[즉 모순되는 두 대언적 명제를 믿는 非합리성]이 Bob에게 귀속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수출작업이 성공적이기 위해서는 추가적인 무언가가 더 필요한 듯하다. 예를 들어, 설사 키가 가장 작은 간첩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Ralph는 키가 가장 작은 간첩이 간첩이라고 믿는다’와 같은 문장에서는 수출작업이 진행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제안되는 해결책에 따르면, 이러한 경우 수출이 진행되기 위해서는 키가 가장 작은 그 간첩이 누구인지를 Ralph가 알고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David Kaplan은 이러한 착상을 더 명료하게 다듬어서, 수출되는 용어가 생생한 지시어여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다. 생생한 지시어는 수출 및 그 逆에 해당하는 수입importation작용의 대상이 된다는 점에서 고정 지시어와 유사하지만, 하나의 지시어가 생생한지 여부는 사람에 따라 각기 달라질 수 있는바 주관적으로만 생생하다는 점에서는 고정 지시어와 다르다.
지금까지 살펴본 형태의 Frege적인 그림은 지표사 및 지시사를 고려할 때 제기되는 사항들에 많은 제약을 받는 편이었다. Jones가 ‘대학 총장은 내가 돌팔이라고 믿어’와 같이 말하는 경우에서처럼, 어떤 명제적 태도 문장들은 명시적으로 지표사를 포함하고 있다. John Perry에 따르면 이러한 대자적 믿음은 1인칭 대명사가 나타나지 않는 그 어떤 진술과도 인식론적으로 동등하지 않지만, ‘나는 돌팔이이다’가 Jones의 진술에서와 같은 방식으로 사용될 경우 그 문장은 총장만이 이용 가능한 명제를 표현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Frege 식의 퍼즐은 지시되는 그 어떤 대상과 관련해서든 발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엄청 느릿느릿하게 ‘저 태양 = 저 태양이다’ 하고 말한다면, 그 말을 들은 사람은 정말로 ‘저 태양 = 저 태양’인지 궁금해 할 것이다. 여기서 그 진술은 실제로 참이며, 첫 번째로 나타나는 ‘저 태양’과 두 번째로 나타나는 ‘저 태양’에는 각기 다른 實-지시화 행위가 동반된다. 이러한 사안들을 감안하건대 명제적 태도는 Frege의 이론에서 즉각 환기될 법한 언어의 모양새와는 그다지 잘 부합하지 않는 듯하다. 명제적 태도라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섬세하고 까다로우며, 명제적 태도와 연관된 인지적 상태는 통상적으로 공적 언어에서 즉각 표현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다양한 것이다.
Nathan Salmon은 명제적 태도 연산자의 영향권 내에서 共-지시적 고유명들 간의 대체를 제한 없이 허용하는 관점을 펼친다. Salmon은 고유명이 직접지시적이라고 간주하기 때문에, 가령 ‘Hesperus’와 ‘Phosphorus’가 명제적 태도 맥락 내에서도 상호교환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다만 명제적 태도를 설명해내는 것[즉 태도-주체에 대한 믿음 귀속과 같은 문제를 설명하는 것]은 언어철학적 문제라기보다는 심리철학에서 다뤄져야 할 문제가 된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한 명제를 믿지 않을지라도 다른 외양 하에서는 그 명제를 믿을 수 있으며, 이 경우 그러한 외양의 구성에 관한 논의들은 궁극적으로는 심리학 내지 심리철학에 속하는 사안이라는 것이다. 분명 우리는 외양과 연관된 정보에 관해 의사소통하며 이는 많은 경우 뜻에 관한 Frege의 이론과 부합하는 측면이 있긴 하지만, 그러한 정보는 Grice적인 방식에 따라 화용론적으로만 전달되거나 함의되는바 용어에 관한 의미론의 일부는 아니라는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다, 예컨대 Lois가 ‘Clark Kent는 용감하지 않다’를 긍정하더라도, 그녀는 슈퍼맨이 용감하다고 믿기 때문에 그에 따라 Clark Kent가 용감하다는 것을 믿고 있기도 하다.
탐구문제
1. 다음을 생각해보자:
Hob은 마녀가 Bob의 암말들이 전염병에 걸리게 만들었다고 믿으며, Nob은 그녀(그와 동일한 마녀)가 Cob의 암퇘지들을 죽였는지 궁금해한다.
마녀가 존재하지 않더라도 이 문장은 참일 수 있다. 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Hob과 Nob의 믿음을 한데 묶어주는 그러한 사물이 실존하지 않는데도, 두 사람의 믿음 사이에 성립하는 연관성을 어떻게 재구성해볼 수 있겠는가? (Geach 1967[「내포적 동일성Intensional Identity」]에서 차용)
2. Frege주의 의미론의 관점에서 볼 때, 통-속의-뇌brain-in-a-vat는 당신과 정확히 동일한 믿음을 가질 수 있겠는가? 그 경우 그 고양이는 배고프다와 같은 전형적인 믿음은 거짓이겠는가, 아니면 참도 거짓도 아니겠는가? 혹은 통-속의-뇌가 그러한 믿음을 지닐 수나 있겠는가? 직접지시론의 관점에서는 어떻겠는가?
3. 언어표현들의 동의성 조건, 즉 용어가 표현하는 뜻의 동일성에 대한 조건으로서 한 가지 그럴 법한 것은 용어들이 (인용되는 맥락을 제외한) 모든 맥락에서 상호대체가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다’와 ‘구매하다’가 동의어라고 가정한 채, 다음을 생각해보자:
(a) x가 핫도그를 산다고 믿는 그 누구든 x가 핫도그를 산다고 믿는다는 것을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
앞서 제안된 동의성 조건에 따르면 이 문장은 다음을 함축한다:
(b) x가 핫도그를 산다고 믿는 그 누구든 x가 핫도그를 구매한다고 믿는다는 것을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
과연 이것이 올바른가? (b)는 (a)와 정확히 동일한 명제를 표현하는가? (Mates 1952[「동의성Synonymity」]에서 차용)
4. 지금까지 우리는 이 책에서 다음과 같은 사안을 그저 무비판적으로 가정해왔다: 예를 들어
(a) 그 고양이가 하얗다는 것
은 다음을 의미한다
(b) ‘그 고양이는 하얗다’의 뜻
하지만 뭔가 잘못된 듯하다. 분명 번역translation에서는 언어표현의 뜻이 보존되어야 한다. 우선 (a)를 프랑스어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c) que le chat est blanc
그리고 (b)를 프랑스어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d) le sens du 《그 고양이는 하얗다》
이 과정에서 뭔가 잘못된 것처럼 여겨지는 이유는, (b)가 특정 한국어 문장과만 연관되기 때문이다. 즉 (b)는 한국어 문장의 제시방식[즉 Frege적인 뜻]을 포함하고 있다. 앞서 말했듯 뜻은 지시결정규칙이므로, 이 번역과정에서는 한국어 문장 ‘그 고양이는 하얗다’에 대한 지시가 보존되어야 한다. 따라서 (d)는 (b)와는 동의적이지만 (c)와 동의적이지는 않다. 그런데 (c)가 (a)와 동의적이므로, 결국 [우리의 직관과는 다르게] (b)는 (a)와 동의적이지 않게 되어 버린다. 하지만 (b)가 (a)와 엄밀히 동등하지 않다면, 대체 어떤 표현이 (a)와 동의어일 수 있겠는가? 아니면 위의 추론과정 어딘가에 결함이 있는 것인가? (Curch 1950[「주장진술 및 믿음진술에 대한 Carnap의 분석에 관하여On Carnap’s Analysis of Statement of Assertion and Belief」])
주요 읽을거리
Kripke, S. (1979), 「믿음에 관한 퍼즐A Puzzle about Belief」: A. Margalit 編, 『사용에서의 의미Meaning in Use』에 수록.
Salmon, N. (1986, 1991), 『Frege의 퍼즐Frege’s Puzzle』.
다음은 좀 더 어렵다:
Kaplan, D. (1969), 「내부로의 양화Quantifying In」.
Quine, W. V. (1975), 「양화사와 명제적 태도Quantifiers and Propositional Attitudes」, 개정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