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udwig Wittgenstein이 공식적인 출판을 염두에 두고 쓴 저서는 『논리-철학 論考Tractatus Logico-Philosophicus』(1921)와 『철학적 탐구Philosophical Investigations』(死後 1953년에 출간) 단 두 권이다. 두 저서는 표면적으로는 매우 비슷하다. 두 권 모두 대체로 언어철학에 관해 논하고 있으며, 논증을 통해 특정 결론을 납득시키는 연속적인 산문 형식이 아니라 짤막한 글들이 모여 단속적으로 배열된 형식으로 저술되었다. 번뜩이는 단상들이 풍부하고 다양한 모습으로 결합된 이러한 스타일은, 최종 목적을 지향하는 일반적인 선형적 글쓰기 방식에 저항하는 듯하다.
하지만 내용 측면에서 두 저서의 차이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 논의의 목적상 우리는 『論考』의 저자로서의 젊은 Wittgenstein을 언어의 기능에 대한 Frege-Russell적인 관점의 핵심적인 부분을 받아들였던 인물로 간주할 수 있다. 4章에서 살펴보았듯 적어도 『論考』에서 제시되었던 원자문장에 대한 그림이론은 언어, 언어의 객관성, 마음과 세계 간의 관계 등이 바로 지시reference 개념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Frege-Russell적인 관점에 입각하여 구상되었다. 물론 『論考』의 저자로서의 Wittgenstein은 보다 심층적인 차원에서는 Frege와 Russell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런데 『탐구』의 저자로서 後期 Wittgenstein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러한 불일치는 더이상 중요한 사안이 아니다. 後期 Wittgenstein은 지시reference가 언어를 이해하는 데에 핵심적인 사항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언어의 헤아릴 길 없는 다양성과 다층성을 기술할 수 있는 체계적이고 최종적인 방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언어에서 체계적인 일반성generality을 찾아내려 시도하는 것은 마치 중세 이탈리아의 도시를 인위적인 격자판에 억지로 끼워 맞추려는 것과 같다. 그 도시에는 구불구불한 도로들, 막다른 골목, 不규칙적인 형태의 광장들, 터널, 다리, 심지어 길 위에 나 있는 길들도 있다. 물론 굳이 하고자 한다면 그러한 시도를 할 수는 있겠지만, 이는 그 도시 본연의 모습을 작위적으로 왜곡하는 처사에 지나지 않으며 이런 식으로 얻어낸 정보는 그 도시를 실제로 답사해서 얻어낼 수 있는 정보와 판이할 것이다. 이것이 이번 章에서 보게 될 後期 Wittgenstein의 더욱 급진적인 언어관에 대한 비유이다.
언어게임
Frege와 Russell 및 젊은 Wittgenstein을 포함하여 대부분의 언어철학자들에 따르면 지시 내지 명명(命名)naming하기라는 개념은 언어에서 매우 근본적인fundamental 것이다. 『論考』의 언어를 활용하여 말해보자면 지시는 언어가 실재(實在)reality 즉 세계와 접촉하는 지점이다. 언어에 대한 고전적인 구상에서 근본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또 다른 단어는 ‘이해(理解)understanding’와 ‘의미’이다. 後期 Wittgenstein에 따르면 이러한 단어들은 명료성에 대한 환상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문장을 이해하는 것이란 그 의미를 파악grasp하는 것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그저 종교적인 기도문을 암송하고 있는 데 지나지 않는다. 반면 우리가 현실의 언어를 좀 더 “가까이”에서 들여다본다면 언어에 매우 다차원적인 사태들이 있음(가령 한 단어를 이해한 것으로 간주되는 바가 다른 단어를 이해하는 일과는 상당히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며, 인간이 갖는 여타 기술(技術)skill이나 기능들로부터 특별히 언어적 능력만을 따로 떼어내어 탐구할 방도란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무언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다양한 현상들이 지닌 세부 사항에 따라 달라지는바 이해를 구성하는 단일한 그 무엇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이해했느냐 아니냐 하는 양자택일적인 것이 아니라 정도(定度)degree의 문제이다.
이러한 점은 『탐구』의 초입에서 Wittgenstein이 묘사한 언어게임language game을 생각해보면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
내가 어떤 사람에게 심부름을 시킨다. 나는 그 사람에게 ‘빨간 사과 다섯 개’라고 적힌 쪽지를 준다. 가게에 간 그 사람은 점원에게 쪽지를 건네고 점원은 ‘사과’라 적힌 수납장을 연다. 표에 적힌 ‘빨강색’이라는 단어를 본 점원은 그 반대편에서 색깔 샘플을 찾아낸다. 그는 일련의 기수를 ‘다섯’에 이르기까지 세면서(아마 이를 마음속으로 세었을 것이다) 그에 맞춰 앞의 샘플과 동일한 색상의 사과를 수납장에서 꺼낸다. 우리가 단어들을 사용하는 일은 이런 식으로 이뤄진다.
(Wittgenstein 1953, 1절)
이는 무척이나 평범하고 하릴 없이 따분한 일이 묘사된 것이긴 하지만, 이러한 게임을 하기 위해 점원과 심부름꾼은 기실 엄청나게 다양한 기술들에 숙달해 있어야 한다. 이러한 활동에 참여하기 위해 우리가 숙달해야 할 단 하나의 기술이란 없으며, 숙달되어야 할 다양한 기술들 중 일부를 언어적 기술이라 칭하는 것은 매우 자의적인 것처럼 여겨진다. 언어적인 기술과 그 외의 기술들을 깔끔하고 명확하게 구분할 수는 없다. 쇼핑목록을 특정 장소에 가져가서 건네는 것, ‘사과’라고 적인 수납장을 찾아내는 것, 필요한 색상 샘플을 찾아내어 그에 걸맞게 대응하는 것, 정확한 개수의 사과를 수납장에서 꺼내는 것 등, 이 모든 기술 내지 활동들은 Wittgenstein이 칭한바 “삶의 형식forms of life”들을 구성한다constitute. 이것들은 부분적으로 언어적인 측면과 非언어적인 측면을 모두 지니고 있으며, 이러한 행위들이 유의미해질 수 있는 이유는 그것들이 전반적인 삶과 문화의 좀 더 넓은 영역에서 구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들 중 언어적인 현상이라 할 만한 것을 외따로 떼어내어 조사하는 것은 이 활동들이 유의미해지는 맥락을 일절 무시하는 처사이다. 이는 마치 쓸개를 신체에서 떼어내어, 그것이 신체에서 어떤 기능을 하는지는 완전히 무시한 채 그 기능이나 특성을 조사하는 것마냥 터무니없는 일이다.
‘언어게임’이라는 명칭은 이러한 활동들을 폄하하거나 경시하고자 붙여진 것이 아니다. 이러한 활동들을 ‘언어게임’이라 부르는 요지는 현실의 삶에서 사용되는 단어들과 게임에서 쓰이는 말piece 간의 유사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특정 말을 룩rook이라고 식별하는 것은 특정한 틀framework에 따라, 즉 체스 게임에서 통용되는 전반적인 규칙과 관행에 따라 유의미해지는바, 이러한 규칙 및 관습의 총체는 게임 참여자가 룩을 갖고 둘 수 있는 특정한 수(手)move를 기술한다. 뿐만 아니라 체스에서 게임 참여자는 규칙을 그저 무작정 따르지만은 않는다. 정해진 규칙 내에 주어진 수많은 기회와 경우의 수를 활용하여 창조적이고 극적으로 게임을 이끌어가기도 하는 것이다. 언어게임 역시 이와 마찬가지이다. 다만 언어게임이 이뤄지는 전반적인 틀이란 것이 지시 내지 의미에 대해 통상 요구되는 기준에 비해서는 훨씬 더 넓고 덜 결정적으로 제한되어 있다는 점만이 다를 뿐이다. 이해될 수 있는바 적절성을 갖춘 언어행위에 대한 필요조건이 언어게임의 규칙에 의해 일단 결정되고 나면, 실제 언어현상에서 그러한 제한사항들은 다양하게 변형되는 주제로 취급되기도 하고 다른 목적을 위해 얼마든지 변경될 수 있는 수단으로 취급되기도 한다.
이러한 관점 자체는 통상적인 언어적 기술(記述)linguistic description을 전적으로 잘못된 것으로 치부하는 게 아니다. ‘다섯’이 다섯을, ‘빨강’이 빨강을, ‘사과’가 사과를 지시한다고 말하는 것은 분명 올바르며, 누군가 그렇게 말한다면 우리는 그 요지를 이해할 것이다. 다만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앞서 살펴본 언어게임에 무언가 더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실제로 무슨 일이 진행되고 있는지에 대해 더 명료한 설명을 제공하게 되는 것도 아니다. 언어현상을 그런 식으로[의미론적으로] 기술하는 것이 어쨌든 모종의 유의미한 설명을 제공한다고 가정한다면, 이는 ‘지시하다’, ‘뜻하다’, ‘의미하다’ 등의 단어들이 으레 지니고 있을 것이라 여겨지는 일반성(一般性)에 대한 갈망carving for generality에 굴복하는 셈이다. 이러한 단어들은 다양한 언어활동들을 간략하게 제시하는 데에는 유용하겠지만, 이를 통해 얻어진 통찰력이란 그저 매우 일반적이기 때문에 극히 피상적인 종류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단어들은 다양한 언어게임들 간의 차이점을 조명함으로써 언어를 이해하는 데에 진정한 통찰력을 가져다준다기보다는, 그 차이점들을 단지 은폐할 뿐이다(Wittgenstein은 〈Lear 왕〉의 한 대사를 인용하여 “내가 너희에게 차이들을 가르쳐 주겠다”라고 말한다).
‘지시하다’, ‘뜻하다’, ‘…라는 것을 의미한다’ 등의 표현들이 수행하는 진정한 역할은, 하나의 배경background이 일단 이해되고 나면, 즉 한 언어게임이 이뤄지는 지점이 개념적으로 정립되고 나면, 그 언어게임에서 특정 목적을 위해 어떤 단어를 사용(使用)use해야 할지를 나타내는 일일 따름이다. 다소 인위적이지만 분명한 예를 들자면, 달리기 경주에서 선수들이 출발하기 전에 심판이 ‘준비’ 하고 말하는 경우를 들 수 있다. 그 말은 달리기 경주와 연관된 다양한 규칙, 예측, 전통적인 관습 등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하나의 배경이 일단 갖추어져 있다는 특정 맥락에서 발화됨으로써만 비로소 유의미해지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앞 단락에서 기술 것처럼 ‘빨강’이 빨강을 지시한다는 식의 언어게임에 관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상당히 많은 사안들이 선제(상정)presuppose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런 식의 언어게임과 연관된 배경을 우리가 상당 부분 이미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상에서 우리는 매우 다양한 삶의 형식들을 무의식중에 공유하고 있으며, 굳이 명시적으로 말하지 않더라도 그것들에 의존하고 있다. 스마트폰으로 통화하면서 복닥거리는 거리를 걸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생각해보라. 이는 실제로는 매우 복잡한 활동이지만 우리는 그에 완전히 숙달되어 있기 때문에 이를 매우 쉽게 해낸다. 재삼 강조하지만 의미론적 어휘semantical vocabulary들이 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의 다양한 습관과 성향을 구성하는 삶의 형식들이 배경에 갖춰진 것으로서 이해되고 있기 때문이다.
유념해야 할 또 다른 중요한 점은 앞서 기술된 대로의 언어게임이 완전하다complete는 것이다. 언어게임이 완전하다는 말의 요지는 앞서 묘사된 언어게임에 그 이상으로 추가될 세부 사항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언어게임을 온전히 수행하기 위해 유일하게 숙달되어야 할 것으로서, 혹은 우리가 숙달master해야 할 소위 언어적 기술로서, 그러한 기술들 집합 이외의 무언가가 더 요구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언어게임이 불완전하다거나 부분적partial이라고 생각할 이유란 없다. 앞의 언어게임에서 가게 점원은 자신이 사용하는 단어들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 그 사람은 자신이 사용하는 단어들을 통해 특정 활동을 충분히 능숙하게 해내고 있으며, 이것이 하나의 언어게임에 대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전부이다.
가족 유사성, 도구, 도시
한 아이가 앞서 기술된 언어게임에서 점원의 역할을 숙달하게 되었다 해보자. 이제 그 아이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몇몇 요소들을 차용하기도 하고 아예 새로운 형식의 용어들을 습득하기도 하면서 점점 더 많은 언어게임들을 차츰 숙달해갈 것이다. 그 경우 우리는 그 아이가 숙달한 전반적인 기술들 집합의 그림을, 각각이 상호 얽혀 있으면서도 고유의 영역 및 고유한 목적들을 지니고 있는 다양한 셀cell들로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러한 요소들로는 이야기하는 것storytelling, 믿는 체 하는 것(가장(假裝)하는 것)making-believe, 학교에서 학생으로서 처신하는 것, 농담하는 것, 원하는 바를 드러내는 것, 무언가를 부탁하는 것 등등 매우 다양한 활동들이 있을 것이다. 중요한 점은 그 아이가 언어를 온전히 숙달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는 명확한 시점은 없다는 것이다. 이는 정도의 문제matter of degree이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언어를 습득한다는 것은 매우 다양한 능력 및 다양한 종류의 숙달과 연관되어 있다. 그렇다면 언어란 무엇인가? Wittgenstein의 대답은 이 물음이 단 하나로 답해질 수 없다는 것이다. Wittgenstein은 언어에 대한 “反-본질주의자anti-essentialist”이다. 언어를 깔끔하고 명확하게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보다 언어라는 개념은 가족 유사성family resemblance 개념이라고 해야 한다.
가족 유사성 개념의 또 다른 예가 있다. 게임의 개념을 생각해보자(이는 Wittgenstein이 직접 들었던 유명한 예시이기도 하다. 그러니 그가 “언어게임”이라는 착상을 제시한 것은 상당히 미묘한 데가 있다). 게임이란 정확히 무엇인가? 어떤 것이 게임이 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은 무엇인가? Wittgenstein에 따르면 이 질문에는 답이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게임이라는 개념 내지 단어에는 문제될 것이 없다. 어떤 게임에서는 게임판과 말들이 쓰이지만(주사위놀이) 그렇지 않은 게임도 있다. 어떤 게임에서는 참여자들이 경쟁하지만 그렇지 않은 게임도 있다(혼자 하는 카드게임, 몸짓 알아맞히기 놀이). 어떤 게임에는 운이 작용하지만 그렇지 않은 게임도 있다(체스, 오목, 틱택토 게임). 어떤 게임은 팀을 구성하여 진행되지만 그렇지 않은 게임도 있다(전문 스포츠 경기). 이렇듯 게임 개념의 사례가 되는 데 대한 충분조건이라 할 수 있는 특성들은 매우 다양한바, 속성 A와 B, 또는 B와 C, 또는 C와 D를 갖는 것은 게임이라는 식으로 말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모든 게임에 고유하거나 공통되는 단 하나의 특성은 없다. 뿐만 아니라 게임 개념은 선언적 속성을 통해 온전히 정의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즉 과거에 존재했고 현재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게임들이 갖는 속성들을 한데 모아 유한한 수의 선언지들로 취하여, 속성 A와 B, 또는 B와 C, 또는 C와 D … 등을 갖는 경우 그리고 오직 그 경우에 게임이라는 식으로 정의될 수는 없다. 이러한 선언적 정의는 Wittgenstein이 말하였듯이 단순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이런 식의 선언문을 실제로 진지하게 제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Wittgenstein이 드러내고자 했던 가족 유사성 개념의 기본적인 특징, 즉 게임 개념이 열린-구조open-textured를 지니고 있다는 기본적인 아이디어를 놓치고 있다. 모든 게임들이 갖는 속성들을 남김없이 포괄하는 선언적 정의가 실제로 규정된다고 해도, 이러한 정의는 과거에 실현되지 않았던 가능성들과 미래에 실현될 가능성들을 고려하지 못할 수밖에 없다. 한 언어 공동체linguistic community가 어떤 새로운 사례를 마주할 경우, 즉 과거에 적용되었던 게임 개념에 포함될 자격을 갖추지 못한 전적으로 새로운 속성들 집합에 직면할 경우, 그것이 아무리 생소하더라도 기존의 게임 개념에 부합하는 것으로서 공동체에 받아들여진다면, 기존의 게임 개념은 그 새로운 사례 역시 포함되게끔 확장될 것이다. 이렇듯 게임과 같은 가족 유사성 개념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올바르게 적용되는 영역을 넓혀나가는 열린-구조를 지니고 있다. 이런 식의 열린-구조 모형은 시간에 따른 개념적 변화 및 언어표현의 역동성을 수용한다.
가족 유사성 개념을 일단 파악하고 나면 우리는 이를 다양한 분야에서 발견해낼 수 있다. 특히 좋음[善]goodness, 지식, 예술 등의 개념과 같이 철학적으로 중요하고 민감한 영역들에 이 개념을 적용해볼 수 있다.
언어 개념으로 다시 돌아와 보자. 전술했듯이 ‘언어’는 그 자체로 하나의 가족 유사성 개념을 표현한다. 우리가 ‘언어’라는 단어로써 특징짓는 모든 잡다한 활동들에 공통되는 단 하나의 것이란 없다. 언어의 본질을 원리적으로 명료하게 특성화할 수 있다는 생각 대신, Wittgenstein은 도시와 언어 간의 유사점을 생각해볼 것을 제안한다. 그가 말하는 도시는 밀턴 킨즈1)나 브라질리아 같은 계획도시가 아니라, 런던이나 뭄바이 같이 오랜 역사에 걸쳐 유기적으로 발전해온 도시이다. 전자에 속하는 도시는 실제 건설되고 사용되기에 앞서 단일한 사람에 의해 계획되고는 한다. 언어에서 이에 상응하는 것으로는 화학적 표기법이나 논리계산을 위해 고안된 표기법 등을 들 수 있다. 반면 후자에 속하는 도시는 우리 일상에서 쓰이는 자연언어natural language가 그러했듯이 극히 오랜 시간에 걸쳐 매우 서서히 발전해왔다(또한 단일한 사람이 그에 관한 모든 것을 반드시 알아야한 하는 것도 아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도시들이 발전해온 과정을 모종의 단일하고 전반적인 논리를 통해 추적할 수는 없다. 가령 런던은 2천년이라는 매우 긴 기간에 걸쳐 급격히 확장되기도 하고 발전상의 정체기를 겪기도 하며 때로는 위축되기도 하면서 뒤죽박죽으로 발전해왔다. 한국어나 영어 같은 자연언어 역시 이와 마찬가지이다. 역사적 도시와 자연언어 양자는 유기적이고 자연적인 진화의 산물로서, 그로부터 어떤 전반적이고 포괄적인 틀을 추출해낼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러한 역사적 도시들에서 잘 생활할 수 있으며, 도시 내의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무리 없이 이동할 수 있다. 가령 역사적 도시라고 해서 모든 도로가 죄다 막다른 길은 아니지 않는가. 자연언어 역시 이와 마찬가지로서, 주지하다시피 영어의 문법이나 어휘 규칙이 아무리 뒤죽박죽이고 엉망이더라도, 영어가 전적으로 불규칙적이고 무질서하게만 사용되는 것은 아니다.2) 뿐만 아니라 Haussmann의 디자인에 따라 파리 중심지가 재개발되었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중심가든 교외지역이든 역사적인 도시의 일부 지역이 의도적인 설계 하에 개발되는 경우도 있다. 마찬가지로 자연언어의 일부도 계획적이고 엄밀한 방식으로 개조될 수 있는바, 가령 일상에서 느슨하게 쓰이던 특정 용어들이 과학적⋅학문적인 전문용어로 엄밀하게 정의되어 사용되는 경우가 뚜렷한 사례일 것이다.
1) 1967년 버킹엄셔 북부에 건설된 영국 최대의 新도시.
2) 그리고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전적으로 不규칙적이게 사용되는 언어란 언어조차도 아니며, 언어의 불규칙적인 사용이란 사용조차도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다양한 언어게임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상호 얽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한 아이가 언어를 습득하는 과정은 그렇게 복잡다단하게 얽힌 각각의 언어게임들을 차츰 숙달해 가는 과정으로서, 어떤 언어게임이 다른 것보다 먼저 익혀지기도 하고, 어떤 언어게임의 숙달은 다른 것의 숙달을 상정하기도 하며, 일부 언어게임의 경우 여타의 것들과 동시에 익혀지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은 단편적으로 차츰차츰 진행된다. 눈치 빠른 독자는 예상했겠지만, 이러한 고찰에 따라 Wittgenstein은 사실을 기술하는 언어, 무언가를 주장하는 언어, 진리-조건과 논리적 함축을 갖는 언어 등과 같은 소위 ‘인지적 언어cognitive language’가 7章에서 살펴본 개념인 화행speech-act보다 선행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언어에는 주장이나 진술 외에도 인사하기, 모욕하기, 명령하기, 내기를 걸기, 흥정하기, 도덕적 칭찬과 비난, 위협하기, 감탄사, 욕설, 압박⋅두려움⋅혐오⋅고통⋅기쁨 등을 느낄 때 내뱉는 말 등 매우 많은 것들이 존재한다. 각각의 언어표현들은 이러한 다양한 목적들을 위해 존재하며, 그 중 어떤 것들은 지시하기referring의 기능을 일절 수행하지 않는다. ‘안녕!’, ‘Come on!’, ‘지금 비 와’ 등의 말을 생각해보라.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모든 언어표현 내지 언어행위들이 무언가 공통점을 갖고 있다고 말하기는 매우 어렵다. 모든 언어게임들이 이론적으로 중요한 공통점을 갖는다고 선험적으로 가정할 수는 없다.
Wittgenstein이 언어게임의 다양성을 강조한 것을 감안하건대 그가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전부는 아니더라도 우리가 ‘의미’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대부분의 경우, 그 단어는 이렇게 정의될 수 있다: 단어의 의미는 언어에서의 그 사용use in language이다.” (1953, 43절) 모든 단어가 의미를 표현한다는 식으로 말함으로써 언어에 그럴듯한 획일성을 부여하기보다는, 단어들이 다양하게 사용use되는 방식에 관해 묻는 것이 더 유익하고 오해의 소지가 덜하다는 것이다.
Wittgenstein이 들었던 또 다른 유명한 유비는 언어를 도구상자에, 단어를 도구에 비유하는 것이다. 모든 도구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말하려 해본다면, 우리는 ‘모든 도구는 무언가를 고치는 데에 사용되는 물건이다’(또는 심지어 ‘도구는 사용되는 물건이다’)와 같은 식으로 전혀 정보적이지 않거나 대체로 거짓인 답만을 제시할 수밖에 없다. 망치, 톱, 줄자, 바이스, 드라이버, 접착제, 페인트 붓, 펜치, 수평자, 소켓 렌치, 납땜용 인두, 사포 등을 생각해보라. 대체로 철학자들은 사실을 진술하는 것 내지 사실적 정보를 전달하는 것(그리고 이와 연관된 언어행위로서 정보를 요구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질문을 하는 것)만이 언어의 유일한 목적인 것처럼 말하고는 한다. 이는 마치 도구상자를 뒤적거리면서 망치와 못만 찾느라 혈안이 된 사람의 행태와 다를 바가 없다. 물론 이러한 유비에는 분명 제한사항이 있으며, 어찌 보면 선결되어야 할 문제 자체에 호소하는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언어와 도구 사이의 가장 뚜렷한 차이점은, 언어가 기여하는 모든 목적이 언어와 독립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고 가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도구의 경우엔 한 도구를 사용하여 의도했던 결과가 달성되었을 때, (도구를 사용하여 다른 도구를 고치는 경우가 아닌 바에야) 굳이 그 도구를 지시하지 않고도 결과가 달성된 과정을 설명해낼 수 있다. 반면 언어의 경우 어떤 식으로든 무언가를 사고하는 우리의 능력은 언어를 숙달함으로써만 가능한 것처럼 여겨진다. 따라서 우리가 언어를 사용하여 특정 사고내용을 기록하거나 전달할 때 의도되는 결과(대체로 특정 사람으로 하여금 특정 믿음을 갖도록 하는 것)는 언어 숙달과 무관하게 설명될 수 없다. 대부분의 언어적 활동들은 Wittgenstein이 말한 삶의 형식들과, 즉 우리 삶의 특정 부분들을 구성하는 규약적인 관행들이자 특정 목적이나 가치가 존재할 수 있는 기반이 되는 다양한 삶의 형식들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규칙 따르기Ⅰ
이제 우리는 Wittgenstein이 제기했던 또 다른 유명한 주제를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1982년 Kripke의 『Wittgenstein의 규칙과 사적 언어Wittgenstein on Rules and Private Language』가 출간된 이래 이 주제는 수많은 해설과 토론의 대상이 되었다. 이와 연관된 논의는 상당히 복잡하게 진행되었지만, Wittgenstein이 제기했던 핵심 논점 자체는 꽤 단순하다.
여기서는 아주 기초적인 예시가 취해지겠지만, 이것만으로도 일반적인 요점을 간추리는 데에는 충분할 것이다. 당신이 공항 복도를 따라 걷다가 ‘Y’자 형태의 갈림길에서 다음 기호가 적힌 표지판을 마주쳤다고 해보자:
당연히 당신은 아무런 주저함도 없이 자연스럽게 오른쪽으로 발걸음을 향할 것이다. 이 기호는 오른쪽으로 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기호가 말해주는 바가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신은 이를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 이와 관련하여 당신이 알고 있는 사실이란 무엇인가? 대체 어떤 요인으로 인해 당신은 이 기호의 그러한 의미를 이해하게 된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한 답변으로 모종의 정신적인 사건을 제시해볼 수 있다. 즉 우리가 위 기호를 이해할 때 어떤 정신적인 像(이미지)mental image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정신적인 대상 내지 상태라는 것은 이 기호에 적절히 대응하는 데에 필요하지도 않고 충분하지도 않다. 우선 심적 이미지는 기호를 이해하기 위한 필요조건이 아니다. 특정한 정신적 이미지가 수반되지 않더라도 이 기호에 적절히 대응하는 경우를 충분히 상상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그저 화살표 기호를 보고는 오른쪽으로 갔을 뿐, 이러한 사건을 설명해줄 또 다른 정신적 처리 과정이 추가로 상정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
다음 더욱 중요한 사안으로서, 심적 이미지는 기호를 이해하는 데 대한 충분조건도 아니다. 즉 정신적 사건을 들먹인다고 해도 무언가를 이해하는 절차가 충분히 설명되지는 않는다. 당신이 화살표 기호를 이해하는 시점에 당신의 내적인 정신적 스크린에 무언가가 번뜩 떠올랐다고 해보자. 이 경우 당신의 정신에 떠오른 그 이미지는 표지판에 그려진 화살표 기호와 정확히 동일한 상황에 처해 있다. 다시 말해, 표지판의 기호가 읽히고 적절히 해석되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당신의 정신에 떠오른 이미지 역시 읽히고 적절히 해석되어야 하는 것이다. 결국 그 심적 이미지의 의미는 또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느냐 하는 앞서와 동일한 물음이 다시 제기될 뿐이다. 단순하게 생각해보라. 외적인 물리적 기호와 그에 대한 내적인 정신적 복제물이 있어서, 전자를 이해하는 데 대해 후자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점을 일단 받아들여 보자. 그 경우, 그렇다면 내적인 기호 자체에 대한 해석은 또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물음이 다시 제기되는 것이다. 화살표가 그것이 그려진 방향과 반대 방향을 가리키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사회에서라면 위 기호는 왼쪽으로 가라는 것을 의미할 것이며, 이는 충분히 상상가능하다. 심지어 어떤 사회에서는 위 기호가 ‘진입금지’라든가 ‘휴대전화 사용금지’를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이 모든 것들은 [한 공동체 내에서 통용되는] 규약convention이다. [그리고 심적 이미지는 이렇듯 기호가 규약에 따라 의미하는 바를 가려내는 데에 충분하지 않다.] 따라서 정신적 스크린에 떠오르는 또 다른 심적 기호는 외부 기호를 이해하는 데에 아무런 효력도 발휘하지 않는다. 이에서 더 나아가 우리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그 무엇이 되었든, 설사 그것이 여기서 살펴본 형태의 내적 복제물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상세하더라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그 어떤 내적 현상도 이해를 구성(構成)constitute하지 못한다. Wittgenstein의 말을 빌자면 “그 어떤 〔심적〕 과정〔mental〕 process도 의미를 가져다줄 수는 없다.”(1953, Ⅱ:218)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우리의 이해를 구성하는가?] 이에 대해 Wittgenstein이 전적으로 회의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우리가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다거나, 혹은 의미와 이해에 관한 생각들이 모조리 헛된 것이라 주장하지는 않는다. Wittgenstein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기호에 대한 파악이 기호를 해석함으로써 이루어진다는 식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해석’이라는 것이 한 기호를 통해 다른 기호를 이해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한, 바로 앞 단락에서 살펴본 문제가 곧바로 대두된다. 그렇다기보다 기호를 따르거나 준수하는 것은 특정 성향(性向)disposition을 습득하는 훈련(교육)training의 문제이다. 공항 사례의 경우 우리가 그 기호를 이해하고 적절히 대응할 수 있는 이유는, 그러한 환경에서 그러한 기호를 마주쳤을 때는 오른쪽으로 간다는 성향을 훈련을 통해 습득했기 때문이다. 『탐구』의 초입에서 Wittgenstein은 이렇게 강조한다: “설명은 어딘가에서 멈춰야 한다.” 계속 파헤쳐 내려가다 암반(巖盤)에 도달하면 “삽의 방향을 돌려야 한다.” 우리가 평소에 하던 대로 반응할 수 있는 이유는 단지 우리가 그렇게 “하는 경향이 있기inclined to do” 때문이다. 그게 바로 우리가 행하는 방식일 뿐이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무언가를 배우는 능력은 우리의 자연사(自然史)natural history의 특징이다. 우리와 매우 다른 성향을 지닌 다른 종의 생물체들은 우리가 훈련하는 방식으로 반응할 수조차 없을 것이다. Wittgenstein이 말하듯이 의사소통의 가능성은 “판단에서의 일치agreement in judgement”에 달려 있다(1953, 242절). 거꾸로 말해 만약 우리 각자가 어떤 사건들에 대해 유사한 방식으로 반응하는 성향을 지니고 있지 않다면, 의사소통은 애초에 시작될 수조차 없을 것이다. 종종 이러한 논점은 Platon의 대화편 『Menon』에 나오는 노예 소년 이야기와 비교되고는 한다. 그 대화편에서 Socrates는 한 노예 소년에게 일련의 질문들만 던지면서 그 소년으로 하여금 한 기하학 정리를 증명하도록 유도함으로써, 기하학적 지식이 선천적innate임을 실증해보이고자 한다. Wittgenstein은 우리가 기하학에 관한 지식을 선천적으로 타고난다는 데에는 동의하지 않겠지만, (기하학을 배우기 위한) 특정 성향을 이미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Socrates가 보여주었다는 점에는 동의할 것이다.
규칙 따르기Ⅱ
그렇다면 기호에 반응하는 성향을 갖는 것은 기호에 대한 이해를 구성하는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최소한 기호에 올바르게in the right way 반응하는 성향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즉 언어적 공동체의 다른 구성원들이 하는 방식대로 기호에 반응하는 성향을 지녀야만 한다. 이는 앞서 언급한 Kripke의 책 『Wittgenstein의 규칙과 사적 언어』의 핵심이 되는 주제로서, Wittgenstein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이미 이를 눈치챘을 것이다. 이 주제는 두 부분으로 나뉠 수 있다.
첫 번째로, 주어진 규칙이 사용되는 범위가 실제적으로도 잠재적으로도 무한하다는 점을 감안했을 때, 한 사람은 분명 상당히 많은 경우에 걸쳐 그 규칙에 노출되었을 것이다. 그 사람은 자신이 올바른 성향을 갖고 있는지 여부에 대해 결코 확신할 수 없다. 그 사람이 지닌 성향과 그 규칙이 실제로 지시하는 바가, 그 사람이 이제껏 마주쳐온 경우들에서는 부합했을지라도 그 사람이 아직 마주쳐본 적 없는 경우들에서는 부합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향을 갖는 것과 규칙을 준수하는 것 간에는 다음과 같은 회의적인 문제 혹은 인식론적인 틈epistemic gap이 있는 셈이다: 우리는 자신이 규칙을 올바르게 준수하고 있다는 것을 도대체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두 번째로, 다른 사람들이 하는 방식대로 기호에 반응하는 성향을 갖는 것과 기호를 이해하는 것 간에는 규범적인 틈normative gap이 존재한다. 실제로 올바른 방식으로 하는 성향을 내가 갖고 있다 하더라도 [즉 내가 나의 성향에 따라 행했던 바가 실제로도 올바른 것이었더라도], 나의 그 행동이 그 자체로 올바른 것이 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성향 그 자체는 아무런 규범적 효력도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한 생물체가 특정 성향을 갖고 행동한다는 사실이, [그 성향이 산출하는 행동이 실제로 올바른 것이라 해도,] 그 생물체가 올바른 방식으로 행동하고 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뿐만 아니라 성향을 갖는 것은 내가 무엇을 해야ought 하는지를 말해줄 수도 없다. 이는 등을 긁어줄 때 개가 다리를 위아래로 움직인다고 해서, 반드시 해야만 하는 올바른 행위를 그 개가 하고 있는 것은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이것이 규칙과 의미에 관해 말할 수 있는 요점의 전부이다. 우선 한편으로, 나는 체계적으로 실수할systematically make mistake 수 있다. 이는 나의 수행이 규칙에 비추었을 때 체계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경우로서, 성향을 갖는 것이 규칙 준수와 연관된 전부라면 이러한 일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당연하고 사소한 말이겠지만, 사람은 자신이 행동하는 대로 행동하는 성향이 있기 때문이다). 규칙을 파악하고 있는 상태에서 실수를 하는 것과, 그와 정확히 동일한 행동인데도 아무런 규칙에 따르지 않은 채로 행동하는 것 간에는 분명 차이가 있다. 또 다른 한편으로 내 행동이 규칙과 정확히 일치하더라도, 그 행위는 규칙에 의해 인도된guided 게 아니라 단지 규칙에 부합하게끔match the rule 행해진 것일 수 있다(와플 굽는 틀이 아무리 완벽한 모양으로 와플을 구워낸다고 해도 그것은 규칙을 따르고 있는 게 아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 Wittgenstein이 어떤 입장을 취하는지 혹은 취했을지와 관련하여 매우 많은 논란이 있어왔다. Kripke가 Wittgenstein을 대신하여 제시한 답이 상당히 많은 지지자를 얻긴 했지만, 그와 다른 답변들도 많이 제안되었다. 여기서 나는 두 번째 난점에 대해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Wittgenstein이 다소 동의했을 법한 해결책을 간략히 제시해보고자 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핵심은 언어적 행동이 발생하는 사회적 맥락social context이다. 우리가 행하는 다양한 언어게임들 중에는 타인의 잘못된 언어적 성향을 올바르게 교정하려는 습관이 있다. 바로 이것이 규범성normativity을 설명해주는 우리 관행의 기본적인 요소로서, 그 이상을 기대할 수는 없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잘못되거나 탈선적인 언어행위를 꾸짖거나 지적하고는 한다(심지어 처벌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식의 제재를 가하는 공동체가 없는 한 어떤 발화를 옳거나 그르다고 규정하는 것은, 언어-사용자가 보기에는 외견상 그런 것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실상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이는 주어진 기호의 해석과 관련하여 현실적으로나 잠재적으로 제기될 수 있는 모든 문제를 한 개인이 해결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언어 공동체 전체 역시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언어 공동체는 그러한 문제를 상당량 처리할 수 있지만, 그 전부를 남김없이 깔끔하게 해결할 수는 없다. 그런데 애초의 문제는 공동체의 관행 내에 규범성을 허용하는 것뿐이었다. 내가 지금 제시한 해결책이 하고 있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즉 규칙 준수의 올바름을 규정하는 규범성의 원천은 특정 관행이 통용되는 언어 공동체 자체일 뿐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Wittgenstein은 첫 번째 문제에 대해서는 그다지 개의치 않았을 듯하다. 이에 대해서는 소위 귀납(歸納)induction의 문제, 즉 관찰된 사례에 근거하여 아직 관찰되지 않은 사례들을 추론하는 것이 어떻게 정당화되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 그가 취했던 입장이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Wittgenstein은 “그 문제”에 대해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침묵할 것을 권하는바, 그 문제와 관련하여서는 단순히 삶의 형식을 묵묵히 따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다만 이를 상세히 논의하자면 이야기가 너무 길어질 것이다.
사적 언어
『탐구』의 243절에서 Wittgenstein은 단어들이 內적 경험inner experience에 적용되는 언어, 즉 오로지 말하는(혹은 글로 쓰는) 사람 자신에게만 알려질 수 있는 그런 언어에 대해 고찰한다. 필연적으로 화자 자신에게만 이해되는 이러한 사적(私的) 언어private language의 이해 가능성에 대해 Wittgenstein은 의구심을 던진다. 다만 이는, 단어들이 원리적으로 타인에게 이해될 수 있는 한, 우리가 자신의 내적 경험에 관해 말하기 위해 단어들을 사용한다는 명백한 사실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이에 관해서는 잠시 뒤에 살펴볼 것이다). 그는 필연적으로 사적일 수밖에 없는 언어라는 생각을 반대하고자 하는 것이다.
당신이 그러한 사적 언어를 고안하려 한다고 가정해보자. 당신이 느낀 한 감각(感覺)sensation을 당신은 ‘S’라고 부르기로 한다. 당신은 ‘S’를 노트에 적어 놓고는 그것이 S의 이름이 된다고 생각한다. 시간이 흘러 당신은 또 어떤 감각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S인가? 단순하게 생각해보자면 마음속으로inwardly 그 감각을 이전의 경우와 비교해볼 수 있다고 답할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러한 내적 비교inner comparison라는 게 전연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는 기준(基準)criterion 자체가 없다. 왜냐하면 어떤 내적 감각이 존재하는 것existence과 그것이 단지 존재하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seeming to exist간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없다: 그 감각이 S인 것처럼 여겨진다면 그것은 S이고, 그렇지 않다면 S가 아니다. 한 단어가 유의미해지기 위해서는 그 단어가 실수로 오용(誤用)되는mistakenly misapply 경우가 상상가능해야 한다. 즉 실제로는 S가 아닌데도 S인 것처럼 여겨지는 경우가 상상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 경우 ‘S’라는 단어로 무언가를 의미하고자 하는 시도는 실패한다.
Wittgenstein은 이렇게 말한다:
첫 번째 경우[(최초에 한 감각을 ‘S’라고 칭했던 경우)] 나에게는 올바름correctness에 대한 기준이 없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지 모르겠다: 내가 생각하기에 올바르다고 여겨지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그것은 올바르다. 이는 우리가 여기에서 ‘올바름’에 관해 더 이상 논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1953, 258절)
그리고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규칙을 따르는 것’은 관습이다. 그리고 규칙을 따른다고 생각하는 것과 규칙을 따르는 것은 다르다. 따라서 규칙을 ‘사적으로’ 따른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그렇지 않다면 규칙을 따른다고 생각하는 것은 규칙을 따르는 것과 같아질 것이다.
(1953, 202절)
우리는 다음과 같이 물을 수 있다: 감각의 동일성 기준은 무엇인가? 감각 S를 再-확인하는re-identifying 기준은 무엇인가? 또는 다음과 같이 물을 수 있다: 어떤 감각이 S가 되는 기준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이 단 하나라도 답해질 수 없는 한 ‘S임being S’에 대해서는 아무런 표준도 없으며, 따라서 [그에 대한 명칭으로 의도된 ‘S’ 역시] 아무런 의미가 없는 셈이다. 사적 언어 개념에 대한 Wittgenstein의 반대를 간결한 논증 형태로 구성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1 한 단어로 무언가를 의미하기 위해서는 그 단어가 올바르게 적용되는 경우와 올바르게 적용되는 것처럼 여겨지는 경우가 구분될 수 있어야 한다.
2 사적 단어는 필연적으로 그러한 구분을 결여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사적 단어란 존재하지 않는다.
『탐구』가 첫 출간되었을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는 사적 언어의 불가능성 논제가 감각이 필연적으로 공적(公的)public이라는 논제를 함축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혹은 Wittgenstein이 모종의 행동주의(行動主義)behaviourism를 주장하는 것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상당히 복잡미묘한 문제이다. 예를 들어 고통-단어pain-word를 배우는 것은 실제로 약간의 행동을 배우는 것이긴 하지만, 다음과 같이 고통 및 그에 수반되는 것과 관련되어 습득된다:
단어들은 감각을 원초적(原初的)primitive이고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과 연관된다. 아이는 아픔을 느끼면 일단 운다. 어른들은 아플 때 내뱉는 단어들과 문장들을 그 아이에게 말해주며 가르친다. 이제 아이는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고통-행동pain-behaviour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1953, 244절)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단어들은 특정한 맥락 내에서 사용되는 경우에만 의미를 갖는다. 단어들은 풍부한 삶의 틀 내에서 상호 얽혀있으며 그렇게 얽힌 전체 체계 내부에서만 각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앞서 말한바 우리는 언어를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성향을 [언어를 실제로 습득하기에] 앞서 이미 지니고 있다. 위 인용문에서 Wittgenstein이 기술하듯이 그러한 성향 중에는 “자연스런 표현방식”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고통과 같은 내적 감각을 나타내기 위한 단어들은 그러한 자연스런 표현 방식 위에 올라타 있는ride atop 셈이다. Wittgenstein은 내적 상태inner state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는 의미에서의 행동주의자는 아니다. 단지 그는 내적 상태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는 단어들에 대한 기준이 인간 존재가 갖는 자연스런 행동방식과 결부되어야한 한다는 것을 주장할 뿐이다.
이러한 사적 언어 반대 논변을 우리가 앞서 살펴보았던 신조와 연관지어볼 수 있다. 2章에서 살펴본 형태의 Russell의 언어이론은 감각-자료sense-data 개념 및 그와 밀접히 연관된 직접대면의 원리를 기초로 구성되었다. 그 원리에 따르면 “우리가 이해하는 모든 명제는 우리가 직접대면하는 요소들로만 구성된다.” 여기서 우리가 궁극적으로 직접대면하는 것이란 바로 감각자료로서, 이를 수단삼아 우리는 물리적 대상을 지시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감각-자료는 가장 탁월한 사적 실체private entities par excellence다. 하지만 분명 Wittgenstein은 이러한 신조뿐만 아니라, 감각-자료의 좀 더 현대적 버전으로서 심리철학에서 논의되는 감각질(感覺質)qualia3) 개념 역시 극도로 의심스럽게 생각할 것이다.
3) “우선 첫 번째로 심적 현상들mental phenomena 중에서 고통스러움, 가려움, 간지러움, 잔상을 느낌, 둥근 녹색 조각을 봄, 암모니아 냄새를 느낌, 메스꺼움 등과 같이, 감각 내지 감각적 특질sensory quality과 연관된 것들을 구분해볼 수 있다. 이러한 심적 상태들은 ‘현상적’ 내지 ‘질적(質的)qualitative’ 특성을 갖는다고, 즉 그것들이 느껴지거나feel 보이거나look 나타나는appear 고유한 방식을 갖는다고 말해진다. 종종 선호되는 용어를 사용해 말해보자면, 그러한 현상을 경험하거나 그러한 상태에 처할 경우 여차하게 느껴지는 어떤 느낌something it is like이 존재한다. 그래서 고통은 고통에만 고유한 질적 느낌 즉 아프다는 느낌을 갖는다. 마찬가지로 가려움은 가렵게 느껴지고 간지러움은 간지럽게 느껴진다. 당신이 녹색 조각을 볼 때 그 조각은 독특한 방식으로 보인다. 그것은 녹색으로 보이며 당신의 시각 경험에는 그러한 녹색의 느낌이 동반된다. 이러한 갖가지 감각들은 나름대로의 독특한 느낌을 지니고 있으며, 최소한 각각이 속하는 일반적인 유형들(가령 고통, 가려움, 녹색을 봄 등)마다 우리가 직접적으로 식별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겨지는 질적 특질에 따라 특성화된다. 이러한 항목들은 ‘현상적 상태’나 ‘질적 상태’ 내지는 간혹 ‘날 것 그대로의 느낌raw feel’ 등으로 칭해진다. 작금에는 이러한 감각적⋅질적 상태 내지 그러한 상태에서 경험되는 감각적 특질을 가리키기 위해 ‘감각질’이라는 용어가 표준적으로 널리 쓰인다. 이러한 부류의 심적 현상들은 총괄적으로 ‘현상적 의식phenomenal consciousness’을 구성한다고 말해진다.” (김재권, 『심리철학Philosophy of Mind』, 第3版, Routledge, 2011, 15쪽.)
역사적 사항
(前期 Wittgenstein의 履歷에 관해서는 4章, ‘역사적 사항’ 節 참조) 1929년 철학계에 돌아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캠브릿지로 복귀한 Wittgenstein은 곧 급진적이고 새로운 사고방식을 발전시키기 시작하였다. 이는 1930년대에 비공식적인 필사본 형태로 유포되었던 「청색책The Blue Book」과 「갈색책The Brown Book」에 개진되었으며, 최종적으로는 그의 死後 2년 뒤인 1953년에 출간된 『철학적 탐구』로 집결된다. Wittgenstein의 철학을 다루는 책들은 엄청나게 많다. 그 중 가장 예리한 것들은 Wittgenstein의 저술들을 거의 신성시하는 그의 추종자들의 관점에서 쓰인 경우가 많다. 이는 그의 추종자들을 폄하하고자 함이 아니라 그의 後記 저술들이 상당히 독특하고 매력적이라는 점을 언급하기 위함이다. 심지어 Wittgenstein의 사고노선을 명시적으로 따르지는 않았더라도, Crispin Wright부터 John McDowell과 Stanley Cavell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넓은 범위에 걸친 철학자들의 저술이 Wittgenstein으로부터 막대한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이번 章의 요약
後期 Wittgenstein은 언어에 대해 Frege와 Russell의 견해 및 Wittgenstein 자신이 이전에 견지하였던 바와도 상당히 다른 사고방식을 제안한다. 이에 따르면 언어란 다양한 언어게임들로 이뤄진 조직fabric과도 같은 것으로 생각될 수 있으며, 그 조직 전체를 통괄하는 단일한 실이 존재한다고 상정할 수는 없다. 언어란 가령 ‘총각’과도 같이 필요충분조건 형식으로 정의될 수 있는 명료한 개념이 아니라 가족 유사성 개념으로서, 다양한 언어게임들이 상호 교차하고 중첩되면서 유기적이고 변화무쌍한 방식으로 결합되어 있는 그 전체가 바로 언어이다. 언어에 존재하는 이러한 다양한 활동들을 지시라든가 의미와 같은 개념을 통해 추상화하여 이론화하고자 할 경우, 지시와 의미 개념은 언어게임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왜곡할 뿐이다. 예를 들어 Wittgenstein이 묘사한 심부름꾼과 점원 사례를 우리가 그저 “살펴본다면”, 그러한 언어게임을 기술하는 데에 의미론적 개념들이 더이상 특권적priviledged이지 않다는 점을 알게 될 것이다. 의미론적 어휘들의 적용가능성에는 상당한 배경이 상정되어 있지만, 하나의 배경이 일단 정해지고 나면 그 어휘들은 언어를 이해하는 데에 당초에 생각했던 것만큼 크게 기여하지는 않게 된다.
언어에 대한 사고방식에 만연해 있는 가장 심각한 환상은, 의미라는 것이 기이하고 불가사의한 유령처럼 단어에 깃들어 있어서, 우리가 단어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알려준다는 생각이다. 단어들이 실제로 사용되는 많은 경우들을 유심히 살펴보면 그런 식으로 생각된 의미란 언어를 이해하는 데에 일절 무력하다는 점이 드러난다. 가령 단어의 의미란 단어가 사용되거나 이해될 때 파악되는 모종의 정신적인 실체라고 해보자. 그 경우, 본래의 단어 자체가 해석되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단어의 의미라고 여겨진 그 정신적 실체 역시 어떻게든 해석되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단어의 의미를 찾는 시도를 포기하고, 언어를 이해하는 일이란 의미에 대한 해석 없이 언어를 파악하는 문제라는 점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즉 신발끈 묶는 법을 배울 때처럼, 우리는 가장 낮은 단계에서 [즉 그 이상 이론적으로 더 파고들어갈 수 없는 원초적인 수준에서] 다른 사람들이 하는 방식대로 반응하도록 훈련될 뿐이다. 다만 이러한 훈련은 조련된 앵무새가 보여주는 기계적인 반응처럼 단순한 행동으로만 귀결되는 것이 아니라, 최종적으로 언어에 대한 이해를 산출한다. 왜냐하면 훈련 과정에서 우리는 언어 공동체에 통용되는 관습적인 배경에 알맞게 반응하는 법을 배우는바, 그 배경은 규범 즉 올바름에 대한 기준을 구성하며 언어 사용자는 이 규범에 부합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Russell을 비롯하여 많은 철학자들은 물질적 대상에 관해 말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이 감각자료에 대한 직접대면에 의존한다고 주장해왔다. Wittgenstein은 감각-자료와 같이 내적이고 사적인 것에 적용되는 언어란 불가능하다고 논증한다. 단어가 유의미하게 사용될 수 있으려면 그 단어가 올바르게 적용되는 경우와 단지 올바르게 적용되는 것처럼 여겨지는 경우가 구분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감각-자료와 같은 내적 현상에 적용되는 사적 단어는 이러한 구분을 결여한다.
탐구문제
1 이번 장의 초입을 되돌아보건대 우리가 가져봄직한 의문은, 구성성 원리가 제시하는 요구사항에 Wittgenstein이 어떻게 대응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의미를 등한시함으로써, 구성성 원리가 부과하는 조건을 충족해야 할 의미론적 개념 자체를 폐기해버린 셈이기 때문이다. Wittgenstein의 입장에서 이에 어떻게 대응할 수 있겠는가?
2 공장 작업대에서 사용되는 언어, 연인들이나 절친한 친구 사이에서 사용되는 언어, 길거리, 술공집, 법정 등 다양한 상황에서 사용되는 언어 등을 생각해보라. 분명 그러한 언어들에서도 모종의 규칙들(짐작건대 대체로 Grice적인 준칙들)이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규칙들이 맥락에 따라 변하는가? 변한다면 어떤 식으로 변하는가? 대화 참여자들은 그 규칙을 어떤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인가?
3 언어에 관한 Wittgenstein의 그림은 각기 다른 유형의 언어들 간 차이점만을 지나치게 강조할 뿐, 그 유사성을 간과하고 있지는 않은가?
4 타인의 마음에 관한 문제, 즉 다른 이에게도 마음이 존재한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John Stuart Mill은 다음과 같은 해결책을 제시한 바 있다: 내가 고통을 느낄 때 나는 울부짖는다. 다른 인간 존재자들 역시 나와 유사한 방식으로 행동한다. 따라서 다른 사람이 울부짖을 때, 유추에 의해 나는 그 사람이 고통을 느끼고 있다고 추론할 수 있다. Wittgenstein의 사적-언어 반대 논증을 감안하건대, Mill의 해결책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주요 읽을거리
Wittgenstein, L. (2009), 『철학적 탐구Philosophical Investigations』, 第4版.
추가적인 읽을거리
Ahmed, A. (2010), 『Wittgenstein의 철학적 탐구Wittgenstein’s Philosophical Investigation』.
Lugg, A. (2000), 『Wittgenstein의 탐구 1-133: 안내 및 해설Wittgenstein’s Investigation 1-133: A guide and interpret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