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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ine의 언어철학

 

Willard Van Orman Quine은 언어철학의 거물급 인사들 중 한 명이다. 그는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언어철학이 전개되었던 흐름 및 향방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대표적으로 8에서 일부 살펴보았듯이 명제적 태도에 관한 논쟁이 형성 및 촉발되는 데에 비중 있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이러한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이제껏 우리는 막상 Quine의 고유한 철학에 관해서는 그다지 많은 것들을 말하지 않은 편이었다. 그 이유는 언어에 대해 그가 실제로 제시한 이론이 이전에 주류를 이루던 관점과는 다소 동떨어진 것이었기 때문이다. 우선 한편으로 Quine을 유명하게 만든 착상들 대부분은 많은 사람들이 보기에 다소 불합리할 정도로 너무 비판적이거나 부정적인 것으로 여겨졌기에, 이전의 주류 흐름을 고수하던 철학자들은 자신들이 발전시킨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관점을 본질적으로 수정해야 할 만큼 Quine의 제안을 중요한 것으로 여기지는 않았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Quine이 제시한 나름의 긍정적인 언어철학적 제안들이 그다지 폭넓게 고려되지는 못한 편이었다. 대부분의 Quine 연구가들이 입을 모아 지적하는 바에 따르면 이러한 실정은 Quine 철학의 다양한 측면들이 어떤 식으로 상호 보완하고 강화하는지를 면밀히 파악하지 못함에 따라 그의 입장이 갖는 진정한 힘을 인정하는 데에 걸림돌이 된다. 이번 에서 우리는 Quine 철학의 파괴적인 측면과 건설적인 측면 양자를 균형 있게 살펴보면서, 특히 이러한 측면들이 어떻게 서로를 지지하는지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Quine의 자연주의

 

FregeRussell 같은 인물들이 제시하는 언어철학은 다소 과장되고 거만한 것처럼 보인다. 전통적인 언어철학자들은 언어 자체에 대해, 그리고 언어와 세계 간의 관계 내지 언어와 마음 간의 관계에 대해 사실상 선험적인 가정들을 거리낌 없이 제시한다. 이전의 언어철학적 이론들은 가령 이나 이해understanding와 같은 언어철학의 핵심 개념들이 충분히 명료하다고 가정한 채, 그러한 개념들이 현실 세계에서 이뤄지는 발화와 같은 실제 언어적 현상에 무리 없이 명확하게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을 무비판적으로 가정한다.

Quine이 언어철학에서 설정한 주된 기획은 이런 식의 가정을 몰아내는 것이다. 그 대신 우리는 자연과학natural science의 견지에서 언어 및 의미이론에 접근하고자 할 경우 일이 어떤 식으로 진행될지를 면밀히 조사해보아야 한다. 언어에 대한 엄밀한 과학rigorous science of language이란 과연 어떤 모습이어야 하겠는가? 의미라는 개념은 과연 과학적으로 존중될 만한scientifically respectable 개념이 될 수 있는가? FregeRussell은 의미, 명제를 파악한다는 것grasping, 지시, 진리-조건 등을 거침없이 들먹이면서, 그러한 개념들 및 그 개념들의 설명적 가치explanatory value가 오로지 철학적 반성(反省)philosophical reflection을 통해 선험적으로 상정되거나 수립될 수 있는 것처럼 여긴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한 개념들이 세계에 존재하는 실제 대상과 사건에 적용된다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아낼 수 있는지에 관해서는 그다지 많은 것을 말해주지 않는다. 단지 두 인물 모두 자신들의 형식논리 내지 기호논리formal or symbolic logic를 설계하는 과정에서 그러한 개념들이 명확하게 적용될 수 있다고 추정하거나 혹은 그러한 적용 가능성을 약정(約定)stipulate할 뿐이다. 하지만 분명 언어 및 언어의 유의미성이라는 것은 실제 세계에 존재하는 생물체가 구체적으로 소리를 만들어냄으로써 발생시키는 현상이다. 그렇다면 의미이론은 조음(調音)된 특정 소리나 표기된 특정 기호가 어떻게 유의미significance해지는지를 기술해야 하지 않겠는가? 자연언어natural language에 관한 이론은 특정 생물이 행동하는do 것에 관한 이론으로서, 관찰가능한 증거observable evidence를 토대로 입증될confirmed 수 있는 경험적 이론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인간 두뇌에 있는 신경세포들의 축색돌기 및 시냅스와 같은 물질에서 발생하는 인지(認知)cognition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과연 의미라든가 명제와 같은 물질적인immaterial 것들을 굳이 가정해야할 필요가 있겠는가?

이러한 질문들을 제기한 뒤 Quine 스스로가 내놓는 답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의미에 대한 과학science of meaning으로서 단어에 특정 의미를 할당하는 식으로 작업하는 전통적인 부류의 그런 학문이란 기실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의미 개념은 실용적으로는practically 필수불가결하다. 즉 우리가 실생활을 영위해나가면서 언어를 통해 상호작용하는 데에는 의미 개념이 필요하다. 하지만 엄밀한 자연과학적 견지에서 보자면 그러한 의미라 할 만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저 불가피하게 실용적(實用的)pragmatic이고 관심에-따른interest-relative 이유에서 직관적으로 언어에 의미를 귀속시키거나 할당하는 것일 뿐, 그 중 어느 것도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conceivable 객관적 증거에 의해 정당화될 수는 없다. 한 진술의 의미를 기술한다는 것은 항시 변하기 마련인 우리의 관심사에 따르는바 상당 부분 편의의 문제matter of convenience로서, 편의상의 목적을 넘어선 그 이상의 것을 의미에 대해 이론적으로 기도(企圖)할 수는 없다.

Quine은 자신이 발전시킨 철학적 관점 일반을 자연주의naturalism라 칭하였다. 그가 말하는 자연주의란 자연과학 전체의 총합sum of natural science으로서, 과학의 상위 혹은 배후(背後)above or behind에서 지식과 실재에 대한 준거를 정립하는 선험적 학문분과로서의 철학은 아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았을 때 철학이란 그것을 정의해주는 단일한 본질a defining essence을 지닌 체계라기보다는 그저 세계에 대한 여러 과학적 지식이 뒤범벅된 총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철학이 자연과학과 구분되어 나름의 적법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이유는, 대개 철학이 과학의 개별 분야들에 비해 더욱 일반성generality과 추상성abstractness을 띠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철학은 인류가 지식을 습득하고자 도모하는 과정에서 제기되는 각종 문제, 역설, 혼동 등에 주로 관심하는데, 이러한 문제영역들은 몇몇 이유에서 아직도 자연과학적 관점에서는 명료하게 해명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쨌든 Quine의 유명한 선언에 따르면 1철학first philosophy이란 없다. “철학은 오로지 자연과학 자체 내에within science itself 있을 뿐, 실재(實在)reality를 확인하고 기술하는 선험적인 철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1981[사물과 이론 내에서 사물의 지위Things and Their Place in Theories, 이론과 사물Theories and Things, 1-23쪽에 수록]: 21) 종종 Quine은 오스트리아의 과학철학자 Otto Neurath(1882-1945)가 제시한 다음과 같은 이미지를 원용하기도 한다: 과학자든 철학자든 우리 모두는 바다 위에서 항해중인 배에 탑승한 채로 그 배를 수리해야만 하는 처지에 있는데도, 배를 가라앉히지 않으면서 그 배 전체를 해체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오로지 철학자들의 허황된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4, ‘비엔나 학단과 프로토콜 논쟁참조). 어떤 식으로든 원리상 자연과학의 범위를 벗어나는unscientific 지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즉 과학적 지식은 통상적인 지식ordinary knowledge과 종류를 달리하지 않는다. [다르게 말하면 어떤 것이 도대체 지식이라 불릴 수 있으려면 그것은 과학적으로 존중될 수 있는 성격의 지식이어야 한다.] 역사 속의 점성술이나 동종요법(同種療法)homeopathy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만약 어떤 학문분과가 자연과학에서 우세한 규준이나 준거에 부합하지 않으려 한다면, 이는 그 학문이 정말로 지식인지 [즉 참거짓을 가리기에 앞서 애초에 진리치-평가 가능한 지식이기나 한지] 여부를 의심해볼 충분한 이유가 된다.

다만 앞서 지적했듯이 Quine의 관점이 무작정 부정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Quine은 언어에 대해 긍정적인 구상을 제시하는 데에도 상당히 관심하여, 위에서 언급된 자연주의적 기조에 저촉되지 않으면서도 의사소통을 설명해낼 수 있고, 특히 언어가 우리의 믿음과 지식을 담아내어 보존하는 측면을 설명해낼 수 있는 이론을 모색하였다.

 

 

정글 언어학자

 

특정 사람 Jo가 특정 시점 t에 드러내는 모든 언어적 성향(性向)linguistic disposition이 기술된 기록부를 당신이 갖고 있다 해보자. 그 기록부는 시점 t나 그 직후에 Jo가 어떤 문장을 실제로 말할지would actually say를 예측할 필요까지는 없다. 부분적으로 이는 Jo에게 어떤 일이 발생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단지 그 기록부가 말해주는 바는 Jo가 사용하는 언어의 각 문장 및 Jo를 둘러싼 환경들 집합에 대해, 특정 환경 하에서 특정 문장에 대해 질문을 받을 경우 Jo가 그 문장을 긍정할 것인지would assent 여부이며, Jo가 부정하는 경우 및 Jo의 반응이 미결정되는 경우에 대해서도 동일한 정보가 제공된다. 이런 의미에서 그 기록부는 Jo가 말하는 문장들의 의미와 연관된 모든 자료들을 포함하고 있다. Quine에 따르면 의미에 관해 이 이상의 것을 요구하는 것은 큰 착각이다. 만약 그 이상의 무언가가 분명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한 사람의 언어적 성향을 모두 알고 있는데도 그 사람의 말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 말하는 셈이다. 물론 당연한 얘기겠지만 Jo가 자신의 말을 통해 의미한 바를 당신이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분명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언어가 연관되어있는 한에서 당신이 Jo에 대해 알고 있는 바는, 당신 이외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서로에 대해 알고 있는 바와 별반 다르지 않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언제 어떤 말을 하느냐를 관찰observe함으로써 언어를 배우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Quine행동주의behaviourism로서, 이에 따르면 언어현상은 적어도 잠재적으로 공적(公的)public 것이다.

따라서 이런 식으로 언어적 성향이 기록된 자료를 토대로 한 개인의 언어를 설명해낼 수 있다. 좀 더 생생한 논의를 위해, 우리가 이적지 여타 언어로 번역된 적 없는 언어가 사용되고 있는 가상적인 지역을 탐험하고 있다 상상해보자. 우리는 그 지역의 언어를 정글라 부를 것이다. Quine이 말하듯이 우리가 해야 할 과업은 정글어를 한국어로 번역(飜譯)translation하는 체계적인 번역편람을 만드는 일이다. 우리가 한국어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 가정한다면, 이 작업의 결과 만들어진 매뉴얼은 정글어의 각 문장을 하나의 동등한 환경 하에서 그와 적절하게 대응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한국어 문장과 짝지어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원초적 번역radical translation의 과업이다. 이는 앞서 9에서 살펴본 Davidson의 원초적 해석radical interpretation과 유사해 보이지만(사실 QuineDavidson보다 먼저 이 사고실험을 제기하였다), 양자 간에는 적어도 한 가지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이에 대해서는 차후에 설명할 것이다.

우리 논의에서 늘상 그래왔듯이, 원초적 번역작업에서도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서술문(敍述文)declarative sentence이다. 번역에 착수하기 위해 우리는 정글어-화자들의 분주한 일상에서 이뤄지는 다양한 발화행위들을 관찰하면서, 특히 그들이 무엇에 대해 말하고 있는지 알아내려 노력할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토끼 한 마리가 나타나자 원주민 한 명이 ‘Ga-va-gai!’ 하고 소리친다. 자연스럽게 우리는 이 말이 (온전한 문장인 저기 토끼가 있다!’에 대략 상응하는) ‘토끼다!’와 동등한 문장일 것이라 추측해볼 수 있다. 그런데 좀 더 생각해보자. 원주민이 말한 바는 그 시점에 나타난 특정 토끼만의 이름일 수도 있고, 혹은 통통히 살이 오른 토끼가 나타나자 이를 본 원주민이 저녁식사가 푸짐할 것이란 기대에서 내뱉은 말일 수도 있다. 심지어 토끼와는 아주 무관한 말이었을 수도 있는바, 원주민이 그 말을 한 시점에 토끼가 출몰했던 게 순전한 우연이었을지도 모른다. 가령 그 원주민은 자신의 할아버지에 관해 말하고 있던 중인데 때마침 토끼가 나타났을 뿐인 것이다. 이러한 여러 가능성들을 번뜩 떠올린 당신은 좀 더 확실하게 확인하기 위해 아직 토끼가 눈앞에 있는 상황에서 그 원주민에게 ‘Gvagai?’ 하고 묻는다. 원주민은 ‘Ja’ 하고 대답한다. 잠시 후 토끼가 사라지자 당신은 똑같이 ‘Gavagai?’ 하고 묻는다. 원주민은 이번엔 ‘Nie’라고 답한다. 이제 당신은 다음과 같은 가설을 세운다: ‘Gavagai’저기 토끼가 있다내지 그와 비슷한 것으로 번역될 수 있으며, ‘Ja’‘Nie’는 각각 아니오에 해당한다. 이에 그 부족의 여타 구성원들을 대상으로 토끼가 있거나 없는 상황에서 앞서와 동일한 실험을 여러 번 반복한 뒤, 이 가설을 입증하게 되었다고 해보자.

Quine의 원초적 번역과 Davidson의 원초적 해석 간에는 두 가지 차이점이 있다. 우선 우리의 논의 목적상 결정적인 차이점은, Quine이 오로지 인과적인 용어causal terminology만을 사용하여 원주민의 언어행동을 기술하는바, 관찰가능한 특정 환경에서 원주민으로 하여금 특정 말소리를 발화하도록 야기하는 사안들에만 집중하는 반면, Davidson은 애초부터 원주민의 언어행위를 주장assertion으로서, 즉 진리치를 지닌 무언가를 말하는 것 내지 대상을 언어적으로 지시하는 행위로서 기술한다는 점이다. 다음으로 보다 덜 중요한 차이점은, Quine의 경우 원주민 언어의 한 문장을 가령 바로 그거야That’s it와 같이 지표사가 포함된 문장으로 번역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만, 발화에 진리 개념을 적용하고자 하는 Davidson의 입장에서는 해석자가 지표사의 지시체를 찾아낼 수 있게 해주는 방법을 말해줄 도식 역시 필요하다는 점이다.

‘Gavagai’Quine이 칭한바 관찰문장observation sentence이다. 관찰문장을 긍정하는 성향은 즉각적으로 관찰가능한 환경에서 분명하게 식별되는 사안이 무엇인지에 따라 현시된다. 직접적으로 관찰가능한 환경을 Quine은 관찰문장에 대한 상호주관적 자극-의미intersubjective stimulus-meaning라 칭하였다. 관찰문장은 가령 나 배 아파와 같이 공적(公的)으로 관찰될 수 없는 사안들에 적용되는 주관적subjective 문장과는 다르다. 또한 관찰문장은 Quine이 칭한바 고정문장standing sentence도 아니다. 고정문장이란 대체로 상호-주관적이거나 공적인 문장이되 그 참이나 거짓이 일단 결정되면 그 진리치가 변하지 않는 문장이다. ‘Neil Armstrong1969년 달에 착륙했다헬륨원자의 핵에는 두 개의 중성자가 있다와 같은 문장들은 고정문장이다. 원초적 번역을 시작할 때 당신이 우선적으로 찾아내야 하는 것은 분명 주관적 문장이나 고정문장이 아니라 ‘Gavagai’와 같은 관찰문장이다. Quine의 비유를 들자면 관찰문장은 번역을 고정하는 쐐기“entering wedge” of translation와 같다. 원주민 화자가 ‘Gavagai’를 긍정하는 성향은 토끼가 나타났다가 사라짐에 따라 그와 마찬가지로 현시되었다가 사라질 것이다. 반면 원주민 화자의 긍정-성향과 관찰가능한 환경변화 간의 상관관계를 아무리 살펴보아도 헬륨원자에는 두 개의 중성자가 있다로 번역될 수 있는 원주민 언어의 문장을 찾아내기란 불가능하다. 헬륨원자에는 언제나 두 개의 중성자가 존재하므로, 원주민 화자는 그 문장에 대해 언제나 긍정하는 반응을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고정적인] 상관관계는 그 문장의 의미와 전연 무관하며 이는 모든 고정문장에 대해서 마찬가지이다. 요컨대 고정문장의 진리치는 우리 주변 환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동일하게 유지되기 때문에, 모든 고정문장들은 언제나 동등한 자극-의미를 갖는 셈이다. 동일한 자극-의미를 아무리 모은다 한들 그것이 의미가 되지는 않는다.

사실상 우리는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관해 상당히 간략하게as shorthand 말하곤 한다. 엄밀히 말해 관찰문장의 자극-의미는 특유의 방식으로 자극되는 신경(神經)nerve being stimulated과만 연관되어 있다. 우리말의 아 뜨거!’와 동일한 역할을 수행하는 원주민 문장의 경우 그 자극-의미는 상대적으로 매우 단순할 것이다. 하지만 ‘Gavagai’의 경우 그에 개입되는 자극-의미는 상당히 복잡할 것이다. 가령 토끼를 명확하게 목격하는 것이나 언뜻 보는 것과 같이 토끼임rabbithood과 연관될 수 있는 모든 다양한 감각적 징후sensory manifestation[즉 어떤 것을 토끼로서 지각할 때 현시되는 신경상태들]뿐만 아니라, 토끼에 의해 통상 야기되는 감각적 상태는 아니지만 실제로는 토끼가 없는데도 착각으로 인해 토끼를 긍정할 때 주체의 감각기관 표층에서 나타나는 상태events at the sensory surfaces , 실로 다양한 사안들이 ‘Gavagai’에 대한 자극-의미와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다만 이에 대한 상세한 논의는 우리의 당면 목적상 불필요하게 복잡하므로, 이 정도만 언급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관찰문장을 넘어서 정글어의 모든 표현을 번역하기 위해서는, 정글어 문장을 분해하여 문장 이하 단위의 단어들 내지 표현들에 번역을 할당해야 한다. 어떻든 간에 당신은 각 문장들을 하나하나 번역하는 것만으로는 정글어 전체를 번역하는 데에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중요한 것은 원리적으로 무한히 많은 모든 정글어 문장을 번역하게끔 해줄 수단을 찾는 일이다. 이 지점이 바로 구성성compositionality 원리 내지는 Quine이 말한바 분석적 가설들의 체계system of “analytic hypotheses”가 도입되는 지점이다. 단순한 예로, 우리가 ‘Gavagai blei’저기 하얀 토끼가 있다로 번역하고 ‘Bollogai pirg’저기 검은 뱀이 있다로 번역했다면, ‘blei’하얗다에 해당하고 ‘pirg’검다에 해당한다고 추측해볼 수 있다. 검은 토끼가 나타날 경우 당신은 원주민에게 ‘Gavagai pirg’를 시험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절차를 Quine유추적 대체analogical substitution라 칭한다.

방금 예시된 문장들은 관찰문장이었지만, 개별 용어들에 대한 번역은 고정문장을 번역하기 위한 핵심 단초가 된다. 개별 용어들을 번역하는 데에 필수적인 사안은 정글어에서 논리적 관계들을 나타내는 용어terms for logical relations들을 번역하는 것, 가령 정글어에서 우리말의 라면 이다모든등에 해당하는 논리적 용어들을 번역하는 것이다. 다음 절차를 생각해보면 이 작업이 어떻게 진행될 수 있는지 대략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og’가 정글어에서 하나의 문장-연결사라고 추측하게 되었다 해보자. 임의의 번역된 관찰문장 %에 대해, 전형적인 원주민이 % 각각을 모두 긍정할 경우 og %’를 긍정하고 그 이외에는 og % ’를 부정한다면, 우리는 ‘og’그리고로 번역된다고 확신할 수 있다. 여타 논리적 연결사들에 대해서도 동일한 전략이 활용된다. 이러한 절차에 따라 우리는 정글어의 토대에 있는 논리적 뼈대를 추출해냄으로써, 가령 한국어로 눈이 오면 춥다로 번역될 수 있는 문장들 같은 정글어의 고정문장 및 이론적 문장을 다룰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를 넘어서 번역절차를 더 진행하진 않을 것이다. 이제 Quine이 주장하는 바의 핵심을 살펴볼 지점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미결정성

 

이런 방식을 통해 ‘Gavagai’토끼다!’로 번역될 수 있다 해도, 직관적으로 생각하기에 의미론상 그와 동등하지 않은 다른 문장으로의 번역, 토끼다!’와 동일한 것을 의미하지 않는 문장으로의 번역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이 따라나오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토끼의 일시적인 시간적 단면을 가리키는 토끼-단면(斷面)rabbit-stage이라는 개념을 생각해보자. ‘토끼다!’토끼-단면이다!’ 내지는 저기 토끼가 있다!’저기 하나의 토끼-단면이 있다!’라는 관찰문장 쌍과 연관된 관찰가능 환경은 동일하다. 다시 말해 둘 중 하나가 주장될 수 있는assertable 경우 다른 문장 역시 주장가능하다. 이뿐만이 아니라 저기 떼어지지 않은 토끼-부분이 있다!’라든가 저기 토끼성()rabbithood이 현시되었다!’와 같이, ‘저기 토끼가 있다!’자극-동의적stimulus-synonymous[동일한 자극-의미를 갖는] 문장들은 얼마든지 인위적으로 만들어질 수 있다. 따라서 토끼다!’(혹은 저기 토끼가 있다!’)‘Gavagai’가 자극-동의적이라는 점에서 동등한 문장이라는 사실이, ‘토끼‘gavagai’가 동의 내지는 -외연적 용어라는 것을 함축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gavagai’토끼토끼-단면중 정확히 어느 것과 동일한 지시를 갖는지 알아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알아내기 위해서는 와 동일하다is the same as에 해당하는 정글어 표현을 먼저 번역해야 한다.

이제 원주민이 ‘ipso’와 동일하다로 사용하고 ‘yo’를 한국어의 ()’과 같은 지시대명사로 사용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해보자. 우리는 원주민이 다음 문장을 긍정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1) Yo gavagai ipso yo gavagai.

 

원주민은 우리가 동일한 토끼를 두 번 가리킬 때 그리고 오직 그럴 때에만 이 문장을 긍정한다. 이러한 사실은 ‘gavagai’토끼-단면보다는 토끼를 의미한다는 가설을 입증해주는 것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기실 그렇지가 않다. (1)은 다음 두 문장으로 번역될 수 있기 때문이다:

 

(2) 저 토끼는 저 토끼와 같다.

That rabbit is the same as that rabbit.

(3) 저 토끼-단면은 저 토끼-단면과 동일한 동물-이력(履歷)의 일부이다.

That rabbit-stage is part of the same animal-history as that rabbit stage.

 

이 두 문장과 연관된 관찰가능 환경은 정확히 동일하다. 복수의 토끼-단면들이 동일한 동물-이력의 일부인 경우 그리고 오직 그 경우에만 우리는 동일한 하나의 토끼에 대해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원주민의 발화성향은 용어 ‘gavagai’의 지시를 고정fix the reference해주지 않는다.

물론 (1)에 나타나는 ‘gavagai’‘ipso’ 등의 용어들은 정글어의 다른 문장들에서도 사용되며, 따라서 이 용어들에 대한 특정 번역은 여타 번역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하지만 (1)을 구성하는 용어들에 지시를 할당할 때 우리에게 가용한 관찰자료에 근거하여도 복수의 선택지들이 가능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번역편람의 다른 부분과 관련하여 또 다른 선택지들이 나타날 경우 앞서 우리가 결정했던 선택지는 [새로운 선택지와 부합하게끔] 적절하게 보완compensate될 수 있다. 이는 우리와 원주민들이 토끼와 토끼-단면의 차이점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말이 결코 아니다. 우리가 한국어나 정글어와 같은 하나의 언어를 사용하는 한 토끼 = 토끼-단면은 분명 거짓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역과정 어느 지점에서든 토끼토끼-단면에 각각 상응하게끔 번역편람을 전체적으로 조정adjustment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정글어 단어 ‘gavagai’를 둘 중 어느 쪽으로든 번역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은 특정 주소지가 여기에서 얼마큼 떨어져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 ‘7만큼이라고 대답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 대답이 의미하는 바는 일곱 블록이라는 것인가? 아니면 7마일? 7킬로미터? 7리그? 이런 비근한 사례를 제외한다면, 적어도 Quine이 생각하기에 번역의 불확정성(미결정성)indeterminacy 문제를 원리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은 없다. 이는 번역이 일절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문제는 오히려 번역이 너무나 쉽다는 것, 특정 단어를 어떻게 번역하느냐에 관해 옳은 답들이 너무 많이 있다는 것이다. 언어적 행동linguistic behaviour에 의해 그어지는 일정 한도를 일단 넘어서면, 번역에 있어서 옳은 것과 그른 것 간의 구분은 사라진다. 사실상 우리는 그저 가장 친숙한 선택지를 취할 뿐이다. 정글어 단어 ‘gavagai’가 우리말 토끼에 상응한다고 약정(約定)stipulate할 순 있겠지만 이는 단지 편의에 따른 선택일 뿐인바, 원주민이 드러내는 언어적 행동이라는 사실만을 고려하는 한 다른 대안들이 취해졌을 수도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어쩌면 원주민의 사고방식에서는 우리가 취하지 않았던 다른 선택지가 더욱 자연스럽게 여겨질 수도 있다.

이상이 Quine이 말한바 지시 불가해성(不可解性)inscrutability of reference에 대한 간략화된 논증으로서, 이 논제는 소위 번역 불확정성(미결정성)indeterminacy of translation 논제의 일부를 이룬다. 이에 대한 몇몇 논증들 및 그것이 함축하는 바가 더 있긴 하지만, 여기서 살펴본 사항들만으로도 다음과 같은 Quine의 핵심 주장을 파악하는 데에는 충분하다: 명제 개념 및 의미의 동일성 개념은 언어가 사용된다는 평범한 사실을 명확하게 설명해내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사실을 설명하는 데에 필요하지도 않다. 이론적으로가 아니라 통상적으로 생각할 때, 우리는 어떤 언어표현이 다른 표현과 동일한 의미를 갖는 경우에만, 그리고 한 문장이 다른 문장과 동일한 명제를 표현하는 경우에만, 양자가 서로에 대한 정확한 번역이 된다고 생각한다. 어떤 두 번역편람이 하나의 언어를 성공적으로 번역해낸다면, 우리는 그 두 편람이 하나로 수렴converge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양자 모두 그 언어를 동일하게 번역할 것이라 기대하기 때문이다(물론 번역상의 강조점, 문체, 문법 및 어휘상의 미묘한 차이 등은 있겠지만, 이는 피상적인 차이일 뿐 최종적으로는 두 번역 모두 동일한 의미를 전달하리라 기대하는 것이다). Quine은 이러한 생각을 거부한다. 설사 당신과 내가 의심할 여지없이 올바르고 정확하게 정글어를 각기 번역해냈다고 해도, 우리 둘의 결과물이 상술한 바와 같은 식으로 일치할 것이라 가정할 합리적인 이유는 없다. 두 편람은 정글어의 한 문장을 각기 다른 한국어 문장들로 번역할 것이며, 그 두 한국어 문장은 Quine이 말했듯이 아무리 줄잡아보더라도 그럴싸한 등가관계relation of equivalence에 있지 않다.”(1960[말과 대상Word and Object]: 27) 의미는 객관적인 그 무엇이 아니다. 한 언어표현에 특정 의미를 할당하는 것은 그 이상으로 더 설명될 수 없는 직관적intuitive이고 관심-상대적interest-relative인 사안일 뿐, 특정 개인과 무관한impersonal[객관적중립적인] 과학적 절차에 의해 승인validate될 수는 없다. 주어진 어떤 사람의 한 언어행위에 대해 두 개의 동등하지 않은 판정verdict이 이루어졌는데, 둘 모두 각기 그 사람의 언어에 대한 하나의 완전한 분석(즉 그 사람의 언어적 성향 전부가 빠짐없이 속속들이 기재된 목록)의 일부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해보자. 이 경우, 의미가 어떤 식으로든 객관적이라고 생각한다면, 두 판정은 그 사람의 언어행위에 각기 다른 의미가 귀속되고 있다는 데 대한 증거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주장하기 위해서는 의미란 것이 실재하긴 하되 다만 그 사람의 언어적 성향에서 드러나지는 않는다고 가정해야 한다. 하지만 이번 의 초입에 살펴보았듯이 이런 생각을 전면적으로 거부하는 것이 Quine의 자연주의의 기본 착상이다. Quine이 보기에 이러한 사고방식은 [언어현상을 설명함에 있어] 달성될 수 없는 높은 기준치를 요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런 요구를 만족할 만한 것이 대체 무엇인지조차 극히 불분명하다.

 

 

의미와 분석적 참

 

이러한 고찰에 따라 Quine은 의미에 대한 과학science of meaning을 정당화해줄 만한 것, 즉 문장에 명제를 할당하고 단칭용어에 대상을 할당하는 식의 의미이론을 정당화해줄 수 있는 사실이란 없다고 결론내린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Quine의미라는 단어가 일상언어ordinary language에서 확고하게 자리 잡힌 단어라는 점 역시 잘 알고 있다. 분명 일상적으로 우리는 단어의 의미에 관해 말하고, 단어사전이나 관용구사전 등에서는 언어의 의미를 다루며, 사전을 편찬하는 사람들이나 번역가들은 의미 개념을 활용하여 작업한다. Quine이 의미개념을 부정한다고 해서 이 모든 명백한 사실들마저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단지 우리가 단어의 의미에 관해 말하는 것들 대부분이 언어적 성향 내지 언어적 행동의 측면에서 설명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가령 한 언어-사용자가 말하는 단어 내지 phrase, 주어진 그 상황에서 그 사람이 사용할 법한 여타 단어 내지 구로 대체될 수 있다. [의미 내지 그 비슷한 것에 관해 말할 필요가 있을 경우] ‘그것은 를 의미한다라고 말하기보다는 그 대신, 나는 라고 말하는 경향이 있다be disposed to say 라고 말하는 편이 더 낫다는 것이다. 의미에 대한 이러한 일반적인 관점의 일부로서, Quine의미라는 단어가 실제로 일상어에 도입되고 사용되는 방식 및 사전 편찬가들과 같은 전문가들에 의해 더욱 체계적이고 전문적으로 사용되는 방식에 대해서도 설명을 시도한다. 이에 따르면 의미가 사용되는 매우 다양한 방식이 존재하며 이것들은 그 어떤 식으로도 하나의 체계적인 이론으로 통합되지 않는다. 우리는 언어표현에 의미를 주기give a meaning위해 종종 그와 동등한 여타 단어나 구를 끌어오는 경우가 있다. 특정 목적에 비추었을 때 그에 상응하는 표현을 제시하며, 다른 목적을 위해서는 역시 그에 상응하는 다른 표현이 인용된다. 어떤 경우에는 한 표현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가령 ‘‘호랑이는 아시아에서 서식하며 덩치가 크고 주황색 바탕에 검은 줄무늬를 지닌 고양잇과 동물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되는 단어이다와 같은 식으로 다른 형식의 단어들을 제시하는 게 아니라, 아예 사물 자체를 가리키기도 한다. 또 어떤 경우에는 특정 표현과 연관된 유추 내지 암시라든가 그 표현에 대한 올바른 용례(用例)들을 통해 표현의 의미를 파악해내기도 한다. 다만 이러한 모든 것들은 일상적으로는 매우 유용하긴 하되 궁극적으로는 부정확한 활동으로서, 엄밀한 과학이라기보다는 모종의 기교art와 같은 것이다.

적어도 Hume 이래로 철학자들은 두 가지 중요한 구분으로서 사실의 문제matters of fact를 표현하는 진술과 관념들 간의 관계relations of ideas를 표현하는 진술 간의 구분에 대해 말해왔다. 이에 상응하여 Kant종합적진술과 분석적진술이라는 구분을 도입하였으며 이 용어는 오늘날까지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현대적인 관점에 따르면 분석성과 종합성을 지닐 수 있는 것은 명제, 판단judgement, 마음--사고(思考)thought-in-mind 등이 아니라 진술, 보다 엄밀히 말해 발화-맥락--진술statement-at-context-of-utterance로서, 분석적 진술은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한 진술은 논리적으로 참logical truth이거나 혹은 동의어를 대체함으로써 논리적 참으로 변환될 수 있는 경우 그리고 오직 그 경우에 분석적이다(緖論 참조). ‘모든 총각은 미혼이다를 생각해보자. 이 진술 자체만으로는 논리적 참이 아니다. 이 진술의 논리적 형식은 그 어떤 A[모든 A] B가 아니다[(x)(Ax→∼Bx)]’인데, 이 형식의 대입례들 중에는 논리적으로 참이 아닌 것들이 무수히 많기 때문이다. 가령 그 어떤 사람도 금성이 아니다는 참이긴 하되 논리적으로 참은 아니며, ‘그 어떤 사람도 캘리포니아에 살지 않는다는 거짓이기 때문에 당연히 논리적 참도 아니다. 그런데 총각미혼 남성와 동의어이다. 따라서 모든 총각은 미혼이다에서 총각미혼 남성으로 대체함으로써 모든 미혼 남성은 미혼이다를 얻을 수 있다. 이 진술의 논리적 형식은 ‘B가 아니면서 C인 모든 것은 B가 아니다[(x)((Bx&Cx)→∼Bx)]’로서 이는 논리적으로 참이다.

동의성 개념은 두 표현이 동일한 의미를 갖는 것으로 정의될 수 있다. [그리고 앞 단락에서 보았듯이 분석성의 정의항에는 동의성 개념이 나타난다.] 이렇듯 분석성 개념은 용어의 의미라는 개념을 가정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Quine은 의미 개념이 일상적인 목적에 유용하다는 데에는 동의하지만 그 이상으로 명확하게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은 부정하는바, 정밀한 과학적 목적 내지 철학적 목적에 비추었을 때 의미 개념은 언어적 성향이라는 개념에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Quine[의미 개념과 밀접하게 얽혀 있는] 분석성 개념이 철학에서 중요하고 필수불가결한 역할을 담당한다는 생각에 강하게 반대한다.

 

 

경험주의의 두 독단의 논증

 

사실 Quine은 의미 개념을 직접 공박하기에 앞서 분석성 개념을 먼저 공격하였다. 분석성 개념에 대한 사전 공격은 의미에 대한 간접적 공격이었던 셈이다(이와 관련된 저술들로서, Quine의 유명한 혹은 악명 높은 논문 경험주의의 두 독단Two Dogmas of Empiricism1951년에 나왔으며이 글은 약간 수정되어 Quine 1961[논리적 관점에서From a Logical Point of View]에 수록되었다, 말과 대상1960년에 출간되었다). Quine이 우선 명시적으로 공격 대상으로 삼았던 타겟은 Carnap의 견해였지만, Quine이 그 기반을 약화시키고자 했던 분석성/종합성 구분에 의존하고 있는 Ayer, Strawson, Grice 등과 같은 여타 철학자들의 견해 역시 이 논박의 대상이 된다(1961StrawsonGriceQuine의 공격에 대한 답변으로 독단을 옹호하여In Defense of a Dogma共著했다).

이 논문에서 Quine은 의미 개념 및 그와 동일하지는 않지만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들로서 개념적 내용conceptual content, 검증조건verification condition, 명제적 내용propositional content, Frege 등의 개념들이 적법성을 갖는다고 상정되지 않는 한, 분석성 개념 역시 결코 만족스럽게 정의되거나 특성화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다소 조악하긴 하더라도 이러한 개념들이 어쨌든 받아들일 만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Quine의 주장이 매우 의아하게 여겨질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분석성 개념에 대한 논의의 맥락에서] Quine에게 대단히 중요한 사안이 지식(知識)knowledge의 본성, 구조, 역학(力學)관계dynamics 등의 문제라는 점이다. Quine의 공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기에 앞서, 우선 그가 공격하는바 분석성 개념이 요구되는 인식론적 관점의 기본 착상을 오해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면서 간략히 살펴보자.

진술들 중에는 우리의 감각(感覺)sensation이나 경험에 직접적으로 주어지는immediately given 것에 관한 진술들이 있다. 다음으로 그 자체로는 직접적인 경험적 진술이 아니지만 개념적으로 경험적 진술과 연관되는 진술들이 있다. [이를 -분석적 진술이라 해보자.] -분석적 진술의 사례로서 비근한 것들로는 냉장고 안에 맥주가 있다’, ‘그녀는 싱글이다등이 있고, 이론적인 진술로는 다람쥐의 평균 수명은 25년 이하이다’, ‘에탄올은 -114에서 냉각된다등을 들 수 있다. -분석적 진술과 직접적인 경험 진술 간에 맺어지는 개념적 연관관계는 분석적이다. -분석적 진술과 경험 진술들이 다양하고 복합적인 분석적 관계로 맺어져 있기 때문에, -분석적 진술 S가 특정 의미를 지니게 되고 특정 경험적 진술 E1, E2 등을 논리적으로 함축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경험적 진술 E1, E2 등은 총괄적으로 진술 S의 참을 경험적으로 시험test하는 데에 이용된다. E1, E2 등이 전부 참이라면 S 역시 참인 것으로서 받아들여지며, E1, E2 중 적어도 하나가 거짓이라면 S 역시 거짓인 것으로 기각된다. 그렇다면 몇몇 진술들은 경험과 무관하게 입증되는 것일 수밖에 없다. 가령 냉장고에 맥주가 있거나 없다가 그러한 부류에 속한다. 이러한 진술들은 모든 총각은 미혼이다모든 미혼 남성은 미혼이다와 같이 분석적으로 참인 진술이다. 지식의 전체 체계를 이런 식으로 보는 견해를 인식론적 환원(還元)주의epistemological reductionism라 한다. 이에 따르면 진술을 정당화justification하는 절차란 경험에 직접 주어진 토대(土臺)foundation에서 시작하여 사실상 경험과 직접 비교될 수는 없는 이론적 진술theoretical statement에 이르는 과정이다. 이렇게 수립된 이론적 진술들 각각은 그 자체로 경험에 의해 직접 검증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지만, 경험적 토대에 의해 직접 검증가능한 진술들로 이뤄진 복합체와 인식론적으로 동등한 지위를 갖는다. 요컨대 인지적으로 유의미한cognitively meaningful 모든 진술은 분석적이거나 아니면 검증가능한 진술들 조합에 상당하는 것이거나 둘 중 하나에 속한다.

이 지점에서 Quine이 제시하는 기본 착상은 지식체계의 정당화에 대한 이러한 선형적(線形的)linear인 그림을 인식론적 전체론epistemic holism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이론적 진술 S를 시험하려 한다. 그리고 그에 상응하여 기대되었던바 우리의 이론 에서 S에 의해 함축되는 경험적 진술 E5가 실제 시험 결과 반증(反證)되었다falsified 해보자. 전형적으로 S는 자신 혼자만으로 E5의 참을 함축하는 게 아니라 여타 진술들과 함께 E5를 함축한다. 일테면 시험장비의 특성 및 신뢰도에 관한 진술이라든가, 관찰되는 물질의 화학적 구성방식 및 작용방식에 관한 진술, 이론을 검증하는 데에 활용되는 논리적수학적 진술들 등이, S와 더불어 전체적으로 E5를 함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원리적으로 시험대에 오르는 대상은 독자적인 S 하나만이 아니라 그것이 포함된 진술들의 집합 전체whole raft of statements인 셈이다. 물론 그 집합의 여타 구성원들은 대체로 S 자체에 비해 좀 더 확고하게 수립된 것들일 수 있다. 우리가 굳이 S를 시험하는 이유는 사실상 검증되는 이론 내에서 그것이 여타 진술들보다 더욱 결정적이기 때문[즉 우리의 이론적인 관심상 더 문제시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취사선택은 정도의 문제일 뿐이지 종류의 문제는 아니다. E5가 거짓인 것으로 입증된 경우, 원리적으로는 S와 함께 E5를 함축하는 진술들의 총체에서 S가 아닌 여타 진술들을 철회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철회되는 진술들은 이론 내에서 차례로 또 다른 진술들과 연관되어 있을 것이며 이러한 연결고리는 이론 전체에 걸쳐있다. 이는 매우 원리적인in-principle수준에서의 사안이긴 하지만, 어쨌든 우리가 각각의 특수한 시험, 실험, 관찰 등을 통해 테스트하는 것은 원리상 과학 전체whole of science이며, 이에는 소위 분석적 진술및 수학적 진술들 역시 포함된다. 그렇다. 산술(算術)이나 수학의 진술들마저도 일반적으로 수정(修整)될 수 있는revisable 것이다. 극단적으로 드문 일이긴 하겠지만, 이론을 테스트해본 결과 필요하다면 우리는 수학적 진술들마저 관찰에 부합하게끔 조정할 수 있다.

자주 인용되는 유명한 구절에서 Quine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상당히 평범한 분야인 지리학이나 역사학에서 다뤄지는 사안들부터, 매우 심오한 분야인 원자물리학의 법칙이라든가 심지어 순수수학 및 논리학의 법칙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우리의 지식혹은 믿음의 총체는 인류에 의해 만들어진 거대한 조직체fabric로서 이는 그 가장자리를 따라서만 경험에 영향을 미친다. 또는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전체 과학은 경험을 경계조건boundary condition으로 갖는 힘의 field of force과 같다. 그 장의 주변부에서 경험과의 충돌이 발생할 경우 장 전체의 내부에 조정readjustment이 가해진다. 우리가 갖고 있는 진술들의 진리치가 재분배되어야 하는 것이다. 장 전체는 그 경계조건인 경험에 의해 매우 과소(寡少)하게-결정되기under-determined 때문에, 기대에 하는 경험contrary experience을 단 하나라도 마주할 경우 장 내부에서 어느 진술을 재평가해야 하는가에 관해 매우 폭넓은 선택지가 주어진다. 전체로서의 장에 도모되는 평형을 고려했을 때 간접적으로만 경험과 연결된다는 의미에서가 아닌 한, 장 내부에 있는 그 어떤 진술이든 특정 경험과 연결되어 있지 않다.

 

(Quine 1961[논리적 관점에서]: 42-3)

 

인식론적 전체론에 따르면 인간 지식의 총체는 비유적으로 말해 느슨하게 조직된 믿음의 망()web of belief과도 같다. 지식의 체계는 경험적 진술이라는 토대 위에 분석적 진술이라는 시멘트를 발라 수직적으로 세워진 고정적이고 완고한 구조물이 아니다. 따라서 지식은 분석성 개념 내지 의미 개념을 이용하지 않고도 특성화될 수 있다.

본디 Quine이 해결하고자 한 문제는 언어학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인식론적인 것이었지만, 인식론적 문제들에 대한 그의 해결책은 언어학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실제로 Quine두 독단을 저술하던 시기는 경력 초기에 몰두했던 논리학 및 수학철학에서 차츰 벗어나 언어철학으로 진출하던 시기이기도 하다.

 

 

Quine의 제안: 분석이 아닌 대체

 

8에서 살펴보았듯이 Quine은 명제적 태도 문제에 관한 논의를 본격적으로 촉발한 인물이기도 하다. 믿음과 관련하여 최종적으로 드러났던 문제는, 대언적(對言的) 믿음de dicto belief(명제에 관한 믿음)이 대물적(對物的) 믿음de re belief(통상적인 대상에 대한 믿음)을 함축하는지 여부를 결정해줄 명확하고 정보적인 기준을 정식화하기가 극히 어렵다는 것이었다. 이에 우리는 Kaplan이 발전시켰던 Frege적인 해결책과 Salmon이 제시한 Mill주의적 혹은 Kripke적인 해결책을 간략히 살펴본 바 있다. 그럼 Quine의 해결책은 무엇이었던가? 최종적으로 Quine은 아무런 해결책도 내놓지 않는다! 그는 차라리 이 문제를 그저 제쳐두는 편이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물적/대언적 믿음 구분은 믿음-주체가 대상을 무엇이라고 알고 있는가knowing what에 궁극적으로 의존하는데, Quine이 보기에 이는 철저하게 맥락에 따라 좌우되는context-bound 사안일 뿐이다. 우리는 어떤 사람의 얼굴을 알면서도 그 사람의 이름은 모르거나, 반대로 이름만을 알 뿐 그 사람의 외모는 전연 모르는 경우가 있다. ‘내포성intensionality에 대한 일반적인 개념 및 그에 대한 진지하고 일반적인 이론이란 있을 수가 없다. 내포성은 특정 상황에서 유용하게 쓰이는 장치일 수는 있겠으나, 오로지 그뿐이다. 어떤 사람의 믿음이 무엇에 관한 믿음인지 명시하고자 할 때, 믿음-주체가 대상을 특징짓는 고유의 방식에 따라 그 사람의 믿음 내용을 대언적으로 보고하기de dicto belief-report보다는, 그저 대물적으로 보고하는 편이 더욱 편리한 경우가 종종 있다. 가령 ‘AbF하다고 믿는대[AbF라는 것을 믿는대]’와 같이 대언적으로 기술하기보다는, ‘b 알지? A는 그게it F하다고 믿는대와 같이 대물적인 방식으로 기술하는 것이 더 간편할 수 있다.

사실 더욱 중요한 사안은 이 쟁점과 얽힌 논쟁들 자체를 상세히 이해하는 일이 아니라, 애초에 Quine이 이 문제를 제기했던 동기를 파악하는 것이다. Quine은 개별 문장들이 의미를 지닌다는 생각을 거부하며, 이에 따라 자연히 소위 개념적 분석conceptual analysis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일상언어의 용어들에 의해 표현될 것이라 여겨지는 개념 내지 의미를 발견하고 분리해내어 탐구하는 것은 Quine이 기도하는 목표가 아니다. 엄밀히 말해 Quine은 그러한 것들이 존재한다는 생각 자체를 거부한다. 그런 식의 개념 내지 의미란 걷잡을 수 없이 모호할 뿐이며, 과학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Quine이 개념적 분석 대신 겨냥하는 목표는, 부정확하고 문제투성이인 일상언어로 된 어구locution들을 그러한 결함이 없는 이론적 언어theoretical language대체(代替)replacement하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언어를 개선하는 것 자체만을 위한 게 아니라, 일상적인 표현방식ordinary mode of expression이 지닌 위험성을 피하면서, 특정 주제에 관한 공식적인 이론적 진술들을 엄밀하게 표현할 방식rigorous mode of expression을 제공하기 위함이다. 대물성/대언성 구분은 일상적으로 유용하긴 하지만, 이에 너무 집착할 경우 사태를 호도할 수 있으며 실제로는 그러한 구분이 없는데도 마치 이를 구분해야 한다고 여기게끔 오도될 수 있다. 이 구분은 극히 과학적인 근거에서 자의적이거나 오해의 소지가 있는 방식으로만 유지될 수 있을 뿐이다. 문장의 의미 개념 역시 이와 마찬가지 운명에 처해있는바 이론적인 목적상 언어적 성향 개념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일상용어를 이론적 용어로 대체하는 전략은 심지어 고유명의 경우에도 적용될 수 있다. 고유명은 일상언어에서 매우 비근하게 사용되지만, 우리가 이제껏 살펴보았듯이 고유명을 만족스럽게 정의하거나 설명하는 일은 매우 어렵기로 악명이 높다. Quine의 해결책에 따르면 고유명은 더욱 단순한 개념이나 의미들로 분석되는 것이 아니라, 고유명이 포함된 언어가 그것이 포함되지 않은 언어로 대체됨으로써 언어에서 아예 제거될 수 있다. 그러면서도 일상언어에서 사용될 때 고유명이 갖는 중요한 측면들은 고유명이 없는 언어에서도 여전히 보존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통상적인 고유명 ‘Socrates’가 수행하는 역할을 해낼 법한 하나의 이름을 갖길 원한다 해보자. 그 경우 [특정 고유명이나 이름을 사용하기보다는] 그저 αSocrates한다α Socratises와 같은 술어를 고안하여 그 술어가 그 특정 남자에 대해서만 참이라고 약정할 수 있다 그렇게 하면 우리가 이름 ‘Socrates’를 사용하고자 할 경우 그 이름 자체를 사용하는 대신 앞서와 같이 고안된 술어를 활용하여 ‘Socrates하는 바로 그것the Socratiser라는 기술구를 만든 뒤, 이를 Russell[기술구 이론에 따른] 방식으로 정의하면 되는 것이다.1) 분명 ‘Socrates는 그리스인이다라는 문장은 [이것이 Russell 식으로 분석된 존재 양화문인] ‘그러한 x가 존재한다 (x는 유일하게 Socrates화한다uniquely Socratises x는 그리스인이다)[(x)(USxGx)]’2)가 참인 경우 그리고 오직 그 경우에 참일 것이다. 더욱 결정적인 사항으로서, 그 어떤 이유에서든 그 기술구가 실제로는 아무런 대상도 지칭해내지 못한다면, 후자와 같은 진술은 진리치를 결여하는 게 아니라 단순지 거짓값을 할당받을 것이다.

 

1) “‘Pegasus’와 같이 단순한 낱말로 된 이름 내지 추정상의 이름을 Russell의 기술구 이론 하에 포섭하기 위해 우리는 처음에 이 낱말을 하나의 기술구로 번역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사실상 제약을 가하는 요소가 아니다. 만약 Pegasus의 개념이 너무 모호하거나 원초적이어서 그것을 하나의 적당한 기술구로 번역할 방도가 없다면, 다음과 같이 다소 인위적이게 여겨지는 기법을 이용할 수 있다: 즉 더이상 분석될 수도 환원될 수도 없으며 가설적인 개념으로서 Pegasus-being Pegasus이라는 속성에 기대는 것이다. 이를 표기하기 위해 동사로서 ‘Pegasus-이다is-Pegasus내지는 ‘Pegasus하다pegasize라는 표현을 도입한다. 그러면 ‘Pegasus’라는 명사 자체는 파생어로 처리될 수 있고, 최종적으로 ‘Pegasus-인 사물’, ‘Pegasus한 사물등과 같은 하나의 기술구와 동일하게 간주될 수 있다.” (W. V. O. Quine, 존재하는 것에 관하여On What There Is, 논리적 관점에서From a Logical Point of View, 1953/1961: Milton Karl Munitz, 현대분석철학Contemporary Analytic Philosophy(1981), 박영태 , 서광사, 1997(수정판), 636-7쪽에서 인용.)


2) 이를 3에서 살펴본 방식대로 좀 더 상세하게 표기하면 다음과 같다:

그러한 x가 존재한다 (xSocrates한다 모든 y에 대해 (ySocrates한다 y=x) x는 그리스인이다).

(x)(Sx(y)(Syy=x)Gx).

 

즉 이 양화문의 내부 부속문에서 유일성을 표현하는 절인 모든 y에 대해 (ySocrates한다 y=x)[(y)(Syy=x)]’, 본문에서는 α는 유일하게 Scrateses화한다[USα]’와 같이 유일하게라는 부사가 첨가된 술어를 활용하여 간단하게 표기하였다.

또는 술어 및 변항과 결합됨으로써 (즉 개방문과 결합됨으로써) 한정 기술구를 형성하는 요타 연산자 ι를 활용하여 다음과 같이 표기할 수도 있다: 우선 개방문 ‘Sx’에 요타 연산자를 결합하여 한정 기술구 ‘(ιx)Sx’를 형성한다. 이는 자연언어로 ‘S한 바로 그 하나the single thing S에 해당한다. 이 표현 전체는 하나의 개체상항이므로 술어 ‘Gα의 공란에 채워질 수 있으며, 이에 최종적으로 (양화문이 아닌 단순 단칭문장) ‘G(ιx)Sx’가 얻어진다.

* “본디 기초적인 술어논리 언어에는 한정 기술구를 나타내는 단순한 표기법이 없지만, 요타(ι)-연산자iota-opertator라는 논리상항을 도입합으로써 표기법이 확장될 수 있다. 이 연산자를 이용해서 속성 F를 지닌 그 x’‘(ιx)Fx’로 표기할 수 있다. 이 표현은 ‘a, b, c’ 등과 같은 개체상항으로 쓰일 수 있으며, 따라서 가령 ‘G(ιx)Fx’처럼 술어의 논항이 됨으로써 속성 F를 지닌 그 x는 속성 G를 지닌다내지는 더욱 간단하게 나타내면 FG하다로 해석되는 문장을 형성할 수 있다. 요타-연산자는 양화사와 약간 비슷하지만 그 차이점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양화사는 개방문 앞에 놓임으로써 그 개방문을 폐쇄문으로 만들지만, 요타-연산자는 개방문을 단칭용어(개체상항)로 전환시킨다.” (Jens Allwood , 언어학에서의 논리학Logic in Linguistics, 전병쾌 外 譯, 한신문화사, 1987, 169.)

 


자연주의의 지위

 

전술했듯이 미결정성 논제의 결론은 번역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아니다. 일테면 외계인의 마음을 우리가 알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번역이란 게 너무 쉽게 이뤄지기 때문에, 외계인의 마음을 묘사하는 단 하나의 정확한 방식이 있다는 자연스런 생각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와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마음 및 심지어는 우리 자신의 마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3) Quine의 요지는 특정한 정신주의적(유심론(唯心論))mentalistic 개념들, 가령 정신이 명제를 파악한다는 것이라든가 정신이 외부 대상과 -인과적으로 접촉한다는 등의 개념들이, Quine이 염두에 두는 식의 과학주의적scientistic 관점에서 보자면 진지한 설명의 대상이 될 자격을 갖추지 못한 개념들이라는 것이다. 나는 과학주의적관점이라고 말했지만, Quine에게는 이것이 모든 지식 영역을 포괄하는바 그 어떤 분야의 지식이 되었든 자연주의적 제약에 따라야만 한다. 물론 일상적인 지식ordinary knowledge이 인식적 가치epistemic value가 아예 없다거나 그 어떤 의미에서도 지식이 아닌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은 엄밀성과 최대한의 객관성을 지니지 못하기에 엄정한 과학적이론적 요구조건에는 부합하지 못할 뿐이다.


3) “Quine은 원초적 번역에서 직면하기 마련인 극단적인 정도의 지시 불가해성이 모국어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고 단언한다. Quine은 지적하길, 우리는 누구나 일상적으로 이웃 사람의 말을 (다소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말로 번역하며, 이러한 번역은 실제적으로는 훌륭하게 정당화된다. 하지만 그것이 이론적으로는 그처럼 명쾌하게 정당화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이웃 사람이 사용하는 개체 구별장치를 번역할 때 번역상의 전체적 균형을 위해 우리의 해석 방식으로 조정하고자 하기만 한다면, 이웃 사람의 담화에서 지시된 내용이라고 간주되는 것을 우리 마음대로 변경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中略) 결국 우리는 나 자신이 사용하는 말의 지시작용에 대해서마저, 그 말이 정말로 어떤 대상을 지시하기는 하는지 문제 삼을 수 있다. 한 예로 내가 토끼를 사용할 때 그것이 과연 토끼 내지 그 밖의 무언가 존재하는 것이라 할 만한 대상을 정말로 지시하는지 여부까지도 문제 삼을 수 있는 것이다.” (George D. Romanos, Quine과 분석철학: 언어에 대한 언어Quine and Analytic Philosophy: The Language of Language(1983), 곽강제 , 한국문화사, 2002, 86-7.)

* “우리는 토끼에 대한 이웃 사람의 분명한 언급을 참으로 토끼-단면에 대한 언급으로, 산술학 공식에 대한 분명한 언급을 참으로 Gödel에 대한 언급으로 체계적으로 바꿔 해석할 수 있으며, 이런 일은 그 반대 방향으로도 가능하다. 우리는 다방면에서 결합되어 있는 그 사람의 술어들을, 우리의 번역에 따라 존재론에서 변경된 사항들이 보충되도록 적절하게 재정리함으로써, 이 모든 것을 이웃 사람의 언어습관과 일치시킬 수 있다.” (W. V. O. Quine, 존재론적 상대성 및 다른 小論Ontological Relativity and Other Essays, 1969: 같은 책, 같은 곳에서 인용.)

** “지시 불가해성은 개개인 자신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문제이다. 만일 누군가가 토끼-단면이나 Gödel를 지시하는 게 아니라 한 마리의 토끼나 특정 형식문을 지시하고 있다고 자신에게 말하는 게 의미가 있다면, 다른 누구에게 그렇게 말하는 것 역시 유의미해야 하기 때문이다.” (W. V. O. Quine, 같은 책: 이명숙, 존재론의 상대성, 서광사, 1994, 127쪽에서 인용.)


자연주의에는 동의하되 의미에 대한 Quine의 부정적 결론이 꺼림칙하게 여겨진다면, 다음과 같은 선택지를 취해볼 수 있다: Quine에 반대하여 많은 이들이 주장해왔던 것처럼, 번역이라는 것이 Quine이 주장하는 식으로 미결정적이지는 않다고 가정해보자. Quine적인 원초적 번역에 가해지는 자연주의적 제약을 벗어나지 않되, 번역을 결정해주는 특정 사실들을 Quine이 놓친 것이라 가정해보자는 것이다. 이 경우 문장의미라는 개념은 다음과 같이 이용될 수 있다: 주어진 특정 문장이 올바르게 번역된 모든 문장들, 즉 그 번역 에서 동의적인 모든 번역문들을 취한다. 이 문장들은 직관적으로 동등하게 번역된 문장들 집합(xy를 올바르게 번역한다x correctly translates y라는 관계 하의 동치류(同値類)equivalence class4))을 형성한다. 이 집합은 이전에 문장에 의해 표현되는 의미, 명제, 뜻이라 칭해진 것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즉 이 집합은 진리치의 담지체이자, 원래의 번역 문장과 동의적인 모든 문장들이 (정의에 의해) 공통으로 지니는 것이자, 명제적 태도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그러한 것이다. 이 집합을 의미라 칭하자. 이러한 의미개념에 의존하면 언어에 대한 Quine의 전체적인 그림은 기존의 의미 개념에 대한 우리의 상식뿐만 아니라 통상적으로 생각되어온 의미론과도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이 집합이 그러한 의미론적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지를 설명하는 일은, 의미개념을 적용하는 것과는 무관하며 그에 선행한다. [자연과학의 관점에서 보자면] 의미개념은 [전통적인 의미개념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인과적 견고성causal robustness을 결여하는바 진정한 [과학적행동주의적] 설명력을 지니지 않는다. 즉 기본적으로 한 문장이 언어적 행동패턴 내에서 여차여차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원인, 그 문장이 특정한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한 문장이 의미를 지닌다고 규정하여도, 그 문장이 특정한 행동적 역할을 수행한다는 설명에는 아무것도 보태지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기실 자연주의적 테두리 내에서는 의미개념이 인과적으로 견고한 모종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지 여부 자체가 매우 불분명하다. 의미개념이 그러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적(私的) 언어private language가 가능하다는 극히 잘못된 생각에 개입하는 데에 지나지 않는다.5) 사적 언어 개념에 대한 상세한 논의는 다음 장에서 後期 Wittgenstein을 살펴볼 때 등장하게 될 것이다.


4) 집합 X 위에서의 동치관계equivalence relation란 반사적이고 대칭적이며 이행적인 관계를 뜻한다. 관계 RX 위에서의 관계일 때, 원소 xR-R-classx와 관계가 있는 모든 원소들의 모임, {yX(x, y)X}를 의미한다. R이 특히 동치관계일 때 xR-류를 R에 의한 x의 동치류라 부른다.” (Peter Jephson Cameron, 집합, 논리, 카테고리Sets, Logic and Categories(1998): 이예찬 外 譯, 수리논리학입문, ()신한출판미디어, 2019, 14.) 본문에서 말해지는 관계는 동의성 관계로서 이는 반사성, 대칭성, 이행성을 모두 만족하는 동치관계이며, 따라서 이 집합은 동치류이다. 다만 여기서 말해지는 동의성 개념은 (Quine 식의 자연주의적 제약 하에서) xy를 올바르게 번역한다는 관계를 전제로 하고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5) “Quine은 개별 낱말의 지시체가 무엇인지 확인함으로써 낱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는 식으로 언어를 이해하는 통상적인 견해를 칭하기 위해 박물관 신화(神話)myth of the museum라는 은유를 사용하고, 언어에 대한 경험적 탐구, 특히 초기의 언어습득 과정에 대한 경험적 탐구를 통해 이 신화를 제거하고자 한다. / 박물관 신화에 따르면 낱말들은 제각기 의미를 가지며, 이 의미는 화자의 생각 속 즉 정신이라는 박물관에 고정되어있는 정신적인 것들이다. (中略) Dewey와 같이 자연과학의 주제들을 탐구하는 경험주의적 정신에 입각하여 언어를 탐구하는 자연주의 철학자들에 의하면, “언어란 우리 모두가 공적으로 인지할 수 있는 상황에 처한 다른 사람들의 공공연한 행위를 증거로 삼아서만 습득되는 사회적 기술이다.”(Quine, 1969) 일단 언어라는 제도를 이렇게 파악한다면 사적 언어란 있을 수 없다. “혼잣말도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의 산물이요 그 반영이다.”(John Dewey, 경험과 자연Experience and Nature, 1958) Dewey는 언어의 사회적인 면을 강조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언어는 적어도 두 사람 즉 화자 및 청자가 상호작용하는 한 가지 양식이다. 언어는 상호작용하는 사람들이 속해 있으면서 언어습관을 그로부터 익히게 되는 조직화된 집단을 전제한다. 그러므로 언어란 일종의 관계이다.” (J. Dewey, 같은 책) 이처럼 언어를 사회적 제도로 간주한다면, 언어를 배우고 그 의미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공공연하게 현시하는 언어적 행동성향 뿐이다.” (이명숙, 같은 책, 112-3.)

* “무비판적인 의미론은 의미가 그 전시물이고 낱말들을 그에 관한 꼬리표로 간주하는 박물관 신화이다. 언어를 바꾸는 것은 단지 그 꼬리표를 바꿔 다는 일일 뿐이라는 것이다. (中略) 사람들이 공공연하게 내비치는 행동성향에서 암묵적으로라도 드러날 수 있는 것을 넘어서서, 한 사람의 정신 내에 어느 정도 확정되어 있으리라 간주되는 것을 그 사람의 언어에 대한 의미론으로 간주하는 한, 의미론은 해로운 정신주의mentalism에 오염된다. 하지만 행동을 통해 설명되어야 하는 것은 의미에 관한 사실들이지 의미된 모종의 실재가 아니다. (中略) 언어에 대한 자연주의적이고 행동주의적인 견해로 전향할 때 우리가 포기하는 것은 대화의 모양으로 된 박물관뿐만이 아니다. 우리는 확정성에 대한 보장까지도 포기하는 것이다. 박물관 신화에 따르면 한 언어의 낱맡들과 문장들은 각기 확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원주민이 사용하는 낱말들의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그의 행동을 관찰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때 기준이 되는 행동이 낱말의 의미를 발견하는 데에 아무 효력이 없을 경우에도, 그 낱말의 의미는 여전히 원주민의 정신 즉 그의 정신적 박물관에 확정되어 있으리라는 생각이 전제되어 있다. 하지만 Dewey를 따라 의미란 본디 행동의 한 속성이다라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성향에 암묵적으로 포함된 것을 넘어서서는 의미와 그 특성 및 그와 유사한 것조차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역시 깨닫게 된다. 자연주의의 관점에서 보자면 어떤 두 표현의 의미가 동일한지 여부에 관한 물음은 인식되었든 그렇지 않든 간에 확정적인 답을 갖고 있지 않다. 다만 그 답은 인식되거나 그렇지 않거나 간에 사람의 대화 성향에 의해 원리적으로 결정될 뿐이다.” (W. V. O. Quine, 같은 책: M. K. Munitz, 같은 책, 677-8쪽에서 인용.) 

 


역사적 사항


W. V. O. Quine은 젊은 시절 수학적 논리학자로서 학계활동을 시작하였다. 1950년대까지 출간된 논문들 및 단행본들은 대부분 논리학 및 집합론에 관한 것들이었다. 다만 1933, 당시 프라하에서 인식론, 언어철학, 논리학 등의 분야를 연구하던 Carnap과의 만남은 이후 Quine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는 계기가 되었다. CarnapQuine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지만 많은 의구심을 들게 하기도 했는데, 대표적으로 Quine이 고작 스물여섯 나이였던 1935년에 저술한 규약에 의한 진리Truth by Convention에서 그러한 의문점이 다소 드러나고 있다.6) 어쨌든 1937년에 나온 수리논리학의 새로운 토대New Foundations for Mathematical Logic는 집합론과 논리학 분야에서 Quine의 명성을 확고하게 만들어주었다. 전쟁 기간 중에는 그간 갈고 닦아온 논리적 기술을 활용하여, 더욱 효율적인 전기적 변환회로를 설계하는 데에 쓰일 알고리즘을 구성하는 작업에 종사하기도 하였다.


6) “Quine은 논리적 진리에 대한 논리실증주의자들의 대답 역시 받아들이지 않는다. 논리실증주의는 논리적 진리란 정의에 의한 진리이자 규약에 의한 진리라고 본다. 이런 입장을 규약론conventionalism이라고 한다. 논리적 진리의 체계란 하나의 형식체계formal system, 즉 정의 없이 주어지는 원초용어primitive terms로부터 정의를 통해 다른 용어들을 얻어내고, 증명 없이 받아들여지는 공리axiom들 및 추론규칙들로부터 다른 진리들을 연역해 내는 체계로 정식화 될 수 있다. 규약주의자들은 여기서 정의 및 공리를 일종의 언어적 규약linguistic convention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中略) Quine은 먼저 논리학이 규약에 의한 진리체계라고 한다면 상당히 많은 경험과학의 이론적 명제들도 마찬가지로 규약에 의한 진리라고 말해야 할 것이라 주장한다. 논리학의 논리체계에 대해서만 규약적 진리라는 이름을 붙일 이유가 어디 있는가? 이론물리학의 공리계도 원초용어와 공리에서 시작하는바 그렇다면 잘 공리화된 이론물리학 역시 규약적 진리라 해야 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논리실증주의자들이 결코 규약적 진리라고 말하고 싶어 하지 않을 많은 진리들이 규약적 진리의 범위에 들어오게 된다. / 더 나아가 Quine은 규약에 의한 진리라는 개념이 논리적 진리의 성격을 해명해주기보다는, 역으로 논리적 진리들을 전제로 하고서만 규약의 체계라는 것이 이해될 수 있다고 논증한다. ‘총각 = 미혼의 성인 남자라는 언어적 규약이 있다고 하자. 이 규약과 모든 미혼자는 재산권을 행사할 수 없다로부터 모든 총각은 재산권을 행사할 수 없다를 도출할 수 있다. 이렇듯 두 규약으로부터 제3의 문장을 도출할 수 있게 해주는 요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대강 말해 ‘AB이고 BC이면 AC이다라는 논리적 원칙에 의거한 것이 아닌가? 공리와 정의가 규약이라 해도 그로부터 정리들이 연역되려면 다시 논리적 진리에 호소할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논리란 규약보다 깊은 차원의 것이다Logic does deeper than any convention.”✻✻ 이렇게 해서 Quine은 논리적 진리가 경험적 진리와는 달리 규약에 의해 참이 되는 진리라고 보는 견해를 근거 없는 것이라고 물리친다.” (민찬홍, 윌라드 반 콰인, 현대철학의 흐름, 박정호 外 編, 동녘, 1996, 451-3.)

* 기하학을 다루는 이 마지막 방법[기하학의 공리계를 규약적으로 참이 되게 하는 방법]은 논리로의 정의적 환원에 저항할 수 있는 수학의 여타 분야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각각의 경우 우리는 단지 그 분야에서 참이라 인가된 공준들의 연언문을 구성하되, 거기 나타나는 원초용어들의 의미를 규약적으로 한정하도록 하며, 그럼으로써 그 분야의 모든 정리들은 규약에 의해 참이 된다. (中略) 그러나 이 방법은 수학을 넘어 이른바 경험과학들에게조차 수행될 수 있다. 이 분야에서 최대한으로 정의들의 틀을 짠 뒤. 논리학과 수학에서 채택된 규약들 집합에 새로운 규약을 첨가함으로써, 우리가 원하는 만큼 많은 수의 경험적 원초용어들을 한정할 수 있다. 그러면 경험과학은 기하학의 경우에서 앞서 살펴보았던 방식과 마찬가지로 규약적으로 참이 된다. (W. V. O. Quine, 규약에 의한 진리Truth by Convention, 1936: Hilary Putnam 外 編, 수학철학 選集Philosophy of Mathematics: Selected Readings(1983, 2nd ed), 박세희 , 아카넷, 2002, 533.)

** “논리 자체를 [규약적으로 참이 되게끔] 세우는 데에 쓰여야 할 그 규약들을 채택할 때 직면하게 되는 난점이 있다. 이들 각 규약은 일반적이며 어떤 기술과 일치하는 무한대의 진술들 중 각각이 참임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일반적 규약으로부터 임의의 특정 진술의 참을 이끌어내는 절차에도 논리적 추론이 요구되며, 이는 무한퇴행infinite regress을 포함한다. (中略) 한 마디로 말해 난점은 논리가 규약들로부터 매개적으로mediately 진행되어야 한다면, 여기에도 규약들로부터 추론하는 논리가 역시 필요해진다는 것이다. (中略) 난점은 [논리적 어법들의 의미를 한정하기 위한] 그 규약들 자체를 전달하는 일이, 우리가 본디 제한하려 시도하고 있는 그 논리적 어법들을 자유롭게 사용하는 데에 의존하고 있고, 또 우리가 그 어법들에 이미 숙달되어 있을 때에만 성공할 수 있다는 데에 있다.” (W. V. O. Quine, 같은 글: 같은 책, 537-9.) 


전후 1951년에 출간된 경험주의의 두 독단Two Dogmas of Empiricism에서 Quine은 철학자들이 비판적으로 사용하는 분석성 개념을 비판하는 동시에, 분석성 개념이 사용되지 않은 Quine 고유의 지식론적 구도를 간략히 제시하면서 철학계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이후 1961년에 출간된 말과 대상Word and Object에서는 특히 번역 미결정성 논제를 논증해내고 의미 개념에 의존하지 않으면서 인간의 지식과 언어를 상세하게 설명하는 데에 주력하였다. 1990년대에는 그간의 견해들을 지속적으로 발전시키고 정교하게 다듬었으며, 이러한 노력은 특히 지시의 뿌리Roots of Reference(1974)진리의 추구Pursuit of Truth(1992, 개정판)에서 드러난다.

좀 더 일반적인 철학사적 견지에서 보자면 Quine은 분석철학이 전개되는 데에 다방면으로 깊은 영향을 미쳤던바, 특히 분석철학에서 선도적인 문제들을 설정하고 그에 대한 나름의 해결책을 분명하게 제시하면서 많은 철학자들로부터 찬동과 비판을 동시에 받았다. 흥미롭게도 Quine지시의 뿌리에서 분석성에 대해 자연주의적인 견지에서도 받아들여질 만한 정의를 제안하면서, 그 개념이 Carnap과 같은 철학자들이 생각했던 종류의 인식론적 역할을 수행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그 단어를 사용할 수 있다는 입장을 내비쳤다.

Quine 철학 전반을 철저하게 추종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Gilbert Harman, Daniel Dennett, Peter Hylton 등과 같은 비교적 최근의 인물들은 대체로 Quine의 철학을 지지하는 입장을 취해왔다. David Lewis(1941-2001)는 엄밀히 말해 Quine의 추종자는 아니었지만 박사과정 기간 동안 Quine의 지도를 받았으며, 그의 견해는 형이상학 분야에서 여전히 지배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다. Donald Davidson은 부분적으로 Quine 철학으로부터 고무되었음에도 엄밀한 의미이론이 가능한지 여부라는 핵심 문제에 대해서는 최종적으로 Quine과 의견을 달리하지만, 그가 발전시킨 견해 역시 다방면에서 많은 추종자들을 거느리고 있다.

 

 

이번 의 요약

 

당시 진행되고 있던 언어철학에 가해진 Quine의 비판은 언어적 현상에 대한 진지한 탐구가 의미 및 그와 연관된 개념들을 비판적으로 수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그의 과학적 자연주의로부터 추동되었다. 이와 연관된 논점은 언어적 유의미성linguistic significance이라는 것이 제3자 관점에서 접근가능해야 하며, 특히 언어적 행동의 측면에서 재구성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원초적 번역에 대한 사고실험이란 (번역자에게) 일절 알려진 바가 없는 언어를 이미 알려진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절차에 관한 것이다. 이러한 사고실험은 언어에 관한 탐구와 관련하여 자연주의적 입장이 제시하는 요구사항 및 금지사항을 명료하게 드러내주며, 인지적 의미 내지 명제적 내용이라는 개념의 객관적 지위를 확인할 수 있는 방도를 제공한다. 번역의 시초에 활용될 수 있으면서 의미로부터 자유로운meaning-free 개념은 관찰문장이라는 개념으로서, 이는 즉각 관찰가능한 환경에 따라 참이거나 거짓이 되는 문장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고정문장은 일단 참이나 거짓인 것으로 결정되고 나면 그 진리치가 변경되지 않는 문장이다. 이러한 사고실험을 통해 Quine이 내리는 결론은 원초적 번역이 미결정적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원주민 언어의 특정 관찰문장을 저기 토끼가 있다로 번역하는 것과 저기 토끼-단계가 있다로 번역하는 것 간에는 객관적인 차이가 없다. 원주민 언어 문장에 나타나는 개별 표현들에 대한 번역을 관찰자료와 부합하도록 조정함으로써, 전체 번역결과가 일관되게끔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서 강조했듯이 번역 미결정성 논제가 의미하는 바는 번역이 원체 불가능하다는 것, 그래서 우리와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생물체의 마음을 알 수 없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번역이 너무 쉽게 이뤄지기 때문에 그 생물체를 묘사하는 단 하나의 정확한 방법이 있으리라는 생각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요지이다.

분석적으로 참인 문장이란 오로지 그것을 구성하는 단어들의 의미에 의해서만 참이 되는 문장이다. 독단에서 Quine은 역시 자연주의적 관점에서 의미 개념을 몰아냈으며 그에 따라 분석성 개념도 몰아내 버린다. 분석성 개념은 HumeKant에서부터 AyerCarnap에 이르기까지 지식론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왔다. Quine은 지식체계에 관한 대안적인 관점으로서 전체론을 제시하면서 분석성 개념을 이 그림으로부터 폐기해버린다. 그가 제시하는 전체론에 따르면 이론이 예측했던 바가 틀릴 경우, 분석적 규칙에 따라 이론 내의 특정 부분에만 조정이 가해지는 게 아니라, 여러 지점에 다양한 조정 가능성이 주어짐에 따라 보다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다. 인간의 지식체계는 경험진술이라는 토대 위에 수직으로 세워진 건축물이라기보다는 느슨하게 짜인 믿음의 그물과도 같다.

일견 Quine의 저술들은 일상적인 언어표현들을 분석하고자 시도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지기 쉽다. 하지만 기실 Quine이 제안하는 전략은 일상언어 및 심지어 과학적 언어에서 문제의 소지가 있는 표현들을 그렇지 않은 표현들로 대체하는 것이다. 일상언어에서 사용되는 대다수의 표현들은 종종 모호하고 부정확하며 그것들이 함축하는 바가 상호 모순되기도 한다. Quine의 해결책은 그러한 표현들의 의미를 명료하게 분석해낼 방법을 찾을 게 아니라, 이론적인 목적상 필요한 기능을 정상적으로 수행하면서도 일상언어에서 드러나는 문제점을 지니지 않는 언어로 대체하는 것이다.

 

 

탐구문제

 

실용적인 관점에서 의미 개념이 필수불가결하다면, 자연과학은 의미가 실재하지 않는다는 견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Mary는 한국어만 할 줄 알고 Baob은 한국어가 변형된 언어인 Quin국어만 할 줄 안다고 해보자. 다소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Bob의 언어와 Mary의 언어는 간접적으로나마 상호 접촉한 바가 일절 없다고 해보자. 그렇지만 두 사람이 만나게 되면 두 사람 모두 어떻게든 원초적 번역작업에 착수하게 될 것이다. Bob저기 토끼가 있다라는 한국어 문장 S저기 토끼-단면이 있다에 해당하는 Quin국어 문장 S로 번역하였다. 꽤나 센스 있는 MaryQuin국어 문장 S저기 토끼-단면이 있다라는 한국어 문장 S✻✻로 번역하였다. S✻✻S의 번역문이고 S✻✻S의 번역문이므로, S✻✻S의 번역문이다. 하지만 이 경우 한국어 문장 저기 토끼가 있다는 한국어 문장 저기 토끼-단면이 있다와 동등하게 되어 버리는 셈이다. Mary는 이 상황에 어떻게 대처할 수 있겠는가?

 

Quine의 이론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마음과 생각 역시 알 수 없다는 것을 함축하는가?

 

분석성을 정의하는 다른 대안이 있다: 한 진술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accepting이 그것을 이해하는 것understanding에 대한 기준인 경우 (즉 한 진술과 연관된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진술을 받아들여야 하는 경우) 그리고 오직 그 경우에 분석적이다. 이 정의는 기존의 분석성 개념에 대한 Quine의 비판을 견뎌낼 수 있겠는가?

 

BC가 정글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화자라 해보자. 그런데 BC는 매우 다른 감각기관을 갖고 있어서, BC에 대해 ‘Gavagai!’가 갖는 자극-의미 역시 각기 다르다. 이 경우 도대체 무슨 근거로 두 사람이 동일한 언어를 사용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두 사람은 어떻게 ‘Gavagai!’라는 관찰문장을 사용하여 의사소통할 수 있는가? 의사소통이 어떻게 발생하는지에 관한 Russell의 구상을 이와 비교해보라.

 

 

주요 읽을거리

 

Quine1차문헌들은 매우 어렵다. 우선적으로 추천하고픈 것은 존재론적 상대성 및 다른 小論Ontological Relativity and Other Essays(1969)에 있는 대상에 관해 말하기Speaking of Object, 選集 논리적 관점에서From a Logical Point of View(1961, 2)에 있는 경험주의의 두 독단Two Dogmas of Empiricism이다. 그 다음으로는 選集 이론과 사물Theories and Things(1981)에 있는 小論 사물과 이론에서 사물의 지위Things and Their Place in Theories를 추천한다. 좀 더 숙달된 독자라면 말과 대상Word and Object(1960)을 읽어보라.

 

 

추가적인 읽을거리

 

Hylton, P. Willard van Orman Quine, 스탠포드 철학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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