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표사와 지시사
다음 단어들을 보자:
나, 나를, 저는 | 내일 |
너, 당신 | 오늘 |
그, 그녀 | 어제 |
그를, 그녀를 | 그의, 그녀의 |
그들, 그들을 | 지금, 그 때 |
우리, 우리를 | 여기, 저기 |
이것, 저것, 그것 | 너의, 우리의 |
이것들, 그것들 | 나의 |
이러한 표현들은 모두 지표사(指標詞)indexical이다. ‘나’라는 단어를 생각해보자. ‘나’는 분명 단칭용어이긴 하지만 ‘나’라는 단어가 지시체를 갖는다고 할 수는 없다. 예컨대 통상적인 단칭용어인 ‘로테르담’은 사용될 때마다 동일한 지시체를 갖는 반면 ‘나’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나’라는 단어 자체가 특정 지시체를 갖는다기보다는, 그에 대한 각각의 발화(發話)utterance가 지시체를 갖는다고 하는 편이 올바르다. ‘나’의 지시체는 그것이 발화되는 경우의 화자(話者)speaker, 즉 발화가 이뤄진 시점에 ‘나’를 말하고 있는 바로 그 사람이다.
이번엔 ‘오늘’에 대해 생각해보자. ‘오늘’에 대한 각 발화는 그 단어가 발화된 시점이 포함된 그 날을 지시한다. 이와 유사하게 ‘여기’는 그 단어가 발화된 바로 그 장소를 지시한다(‘여기’는 지시사(指示詞)demonstrative에 해당하기도 한다. 지시사에 대해서는 곧 살펴볼 것이다). 위의 단어들은 모두 이와 유사한 특징들을 지니고 있다.
일반적으로 지표사의 지시는 발화의 맥락(脈絡)context of utterance에 따라 달라진다. 반면 ‘태양’이나 ‘로테르담’과 같은 통상적인 단칭용어는 발화가 이뤄지는 맥락과 무관하게 항시 동일한 사물을 지시한다.
따라서 지표사의 언어적 의미linguistuc meaning는 가능한 발화의 맥락에 따라 개항token으로서의 지시체를 결정하는 규칙rule(내지 함수function)이라 할 수 있다. 이 규칙은 각각의 가능한 발화의 맥락에 대해 그 맥락에서 발화된 지표사의 지시체를 명시한다.
시제(時制)tense는 시간의 측면에서 지표성indexicality을 띤다. 어떤 사람이 ‘여기 눈 와’ 하고 말한다면 이는 지금 여기에 눈이 온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과거 시점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면 ‘눈이 왔었어’ 또는 ‘눈 오고 있었어’ 하고 말할 것이며, 미래 시점에 대해서는 ‘눈이 올 것이다’ 하고 말할 것이다.
일부 지표사들은 지시사(指示詞)demonstrative에 해당하기도 한다. ‘저것that’이라는 단어를 보자. 이 단어가 지시사로 사용될 경우, 말해지는 대상이 무엇인지가 대화가 이뤄지는 상황에서 그다지 ‘명백salient’하지 않다면, 화자는 자신이 의도하는 대상을 지시하기 위해 그 대상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거나 그와 유사한 몸짓gesture을 취해야 한다. 예컨대 나무들이 울창한 숲에서 화자가 ‘저 나무 진짜 멋있다’ 하고 말하면서도 자신이 의도하는 나무가 정확히 무엇인지 가리키지 않는다면, 화자는 자신이 말하고자 하였던 바를 성공적으로 표현해내지 못한 셈이다. 그 말의 온전한 의미가 전달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화자는 자신이 의도하였던 나무를 직접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등의 동작을 취해야 한다. 다만 이러한 몸짓 내지 지시행위가 반드시 명시적explicit인 것만은 아니며 암묵적implicit으로 이뤄질 수도 있다. 만약 우리가 탁 트인 평원을 걷다가 지척에 단 한 그루의 나무만을 맞닥뜨린 상황이라면, 그 나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지 않더라도 ‘저 나무 진짜 멋있다’는 말의 의미는 온전히 전달된다. 굳이 가리키지 않아도 청자는 화자가 어떤 나무에 대해 말하고 있는지 알아챌 수 있기 때문이다.
지시사가 성공적으로 사용되기 위해 동반되는 몸짓은 실-지시화(實-指示化)demonstration라 칭해진다. ‘지금’과 같이 암묵적이든 명시적이든 實지시화를 필요로 하지 않는 지표사는 순수 지표사pure indexical라 칭해진다. 다르게 말해 순수 지표사가 발화되는 경우의 지시체는 순전히 언어적인 발화의 맥락에 의해서만 결정된다.
발화의 맥락이란 거칠게 말해 하나의 발화가 이뤄지는 혹은 이뤄질 수 있었던 상황situation을 말한다. 발화맥락에는 대체로 다음 항목들이 포함되며, 반드시 이것들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화자 및 청자(의 동일성), 시간, 장소.
‘나’라든가 ‘지금’은 단순한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기실 대부분의 지표적 표현indexical expression들은 복합적compound이다. ‘내 말[馬]’, ‘저 커다란 붉은 건물’, ‘그저께the day before yesterday’ 등은 복합적인 지표적 표현들이다.
지표적으로 사용되는 많은 단어들이 지표적이지 않게 사용되기도 한다. 다음 두 문장을 보자:
당나귀를 가진 모든 남자는 그것it을 때린다.
Ottoline Morrell 양은 Ludwig Wittgenstein을 만났는데, 그he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두 맥락에서 ‘그것’과 ‘그’는 지표사가 아니라 상호-지시cross-reference를 위한 장치인 재귀대명사reflexive pronoun이다. 이러한 단어들이 재귀대명사로 쓰이는 경우 그 지시체는 발화의 맥락에 따라 결정되지 않는다. 첫 번째 사례에서 ‘그것’은 논리학 표기법에서 쓰이는 속박변항 ‘x’와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는바, 이 문장에서는 아무런 특정 당나귀도 지시되고 있지 않다[(즉 특정 당나귀에 대한 존재론적 개입은 이뤄지지 않는다)]. 두 번째 사례에서 ‘그’는 그 자리에 ‘Ludwig Wittgenstein’을 한 번 더 씀으로써 문장의 의미 손실 없이 대체될 수 있다. 여기서 ‘그’의 지시체가 결정되는 것은 ‘그’가 ‘Ludwig Wittgenstein’과 이른바 조응(照應)적(대용어(代用語)적)anaphoric1)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데에 기인한다. [이렇듯 어떤 단어들은 지표사 형태를 지니고 있음에도 아예 무언가를 지시하는 역할을 하지 않거나 지표사와 다른 방식으로 지시체가 결정된다.] 반면 다음 문장에서는 위와 동일한 두 단어들[(‘it’, ‘him’)]이 지표사의 기능을 하고 있다:
(파도타기하고 있는 두 사람 중 한 명이 다가오는 파도를 바라보며 다른 이에게)
엄청 크다! It's big one!
(철조망을 넘어 탈옥하려는 수감자를 발견한 한 교도관이 다른 교도관에게)
쏴버려! Shoot him!
1)“어떤 언어표현이 다른 언어표현을 지시할 경우 전자를 조응 혹은 조응적이라고 한다. 앞서 이미 말해진 표현을 언급하는 대명사나 정관사 등이 조응적 표현이다. ‘철수가 순희를 보았을 때 그는 그녀에게 손을 흔들었다’에서 대명사 ‘그’와 ‘그녀’는 각각 앞에 나타난 ‘철수’와 ‘순희’를 가리킨다. ‘He kept a cat and took very good care of the cat’에서 ‘the cat’의 정관사는 앞에 나온 ‘a cat’을 가리킨다.” (김방한, 『언어학의 이해』, 민음사, 2012(신장판), 160-1쪽.)
지표성 혹은 맥락-상대성context-relativity(맥락-민감성context-sensitivity)은 명시적으로 드러나기보다는 대체로 암묵적인 경우가 많다. 서로 먼 거리에서 전화통화를 하는 경우가 아닌 이상, 우리는 보통 ‘눈 오고 있어’라 말하지 굳이 ‘여기 눈 오고 있어’라 말하지는 않는다. 일상담화에서는 화자가 무엇에 관해 말하고자 하는지 굳이 명시적으로 밝히지 않더라도 의도된 청자는 화자의 발화를 대체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발화가 이뤄지는 맥락을 드러내는 지표사가 사용되지 않더라도] 대화가 이뤄지는 데에 큰 지장이 없는 편이다.
지표성의 암묵적 특성을 잘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로서 양화사의 사용을 들 수 있다. 일상적인 담화에서 우리가 ‘모든, 전부’라는 단어를 통해 ‘무엇이 되었든 모든 것’을 의미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예를 들어 저녁 파티에 친구들을 초대한 집주인이 ‘요리 다 됐다everything's cooked’ 하고 말한다면, 이 말로써 그 사람은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다 요리되었다, 혹은 존재하는 것, 존재해온 것, 존재할 것이 전부 요리되었다를 의미하고 있는 게 아니라, 단지 곧 있을 저녁 파티를 위한 음식들이 모두 준비되었음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전문적인 논리학 용어를 활용하여 말하자면, 이 사례에서 화자는 자신의 말을 해석하는 데에 청자가 활용할 법한 지식 내지 정보에 근거하여, 양화사의 논의영역domain of quantifier을 암묵적으로 제한implicitly restrict하고 있는 셈이다. 이에 따라 청자는 ‘모든 x는 …하다’는 화자의 발화를, 양화사의 범위를 획정(劃定)하는 술어 F가 활용된 ‘모든 F한 x는 …하다’로 해석하게 된다. 위 사례의 경우 F의 자리에는 ‘𝛼는 곧 있을 저녁 파티를 위해 실제로 준비된 요리이다’ 정도의 술어가 취해질 것이다.
∙ 자연종 용어와 본질에 대한 Putnam의 견해
Putnam의 1975년 논문 「‘의미’의 의미The Meaning of ‘Meaning’」에 제시된 유명한 “쌍둥이 지구” 논증“Twin Earth” argument은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주지하다시피 물은 H2O이다. 이제 세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모든 면에서 우리의 지구와 완전히 똑같으면서도, 강이나 바다에 있는 투명한 액체가 H2O가 아니라 모종의 화학적 구성체 XYZ라는 점에서만 다른 그러한 행성을 가정해보자. 당면 목적을 위해 XYZ는 물과 구별되지 않는다고 가정하자. 즉 XYZ는 통상적인 기압에서 100℃에서 끓고, 마심으로써 생명을 유지시켜 주는 등 물과 정확히 동일한 작용을 한다. 그 물질은 과연 물인가, 아닌가? Putnam은 아니라고 답한다. 어떤 물질이 되었든 H2O(H3O)가 아닌 이상, 그 외의 모든 측면에서 물과 아무리 비슷하다 하더라도 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 그러한가? Putnam에 따르면 우리는 ‘물’과 같은 용어를 이른바 자연종(自然種) 용어natural kind term로서 사용하는데, 자연종 용어는 Kripke가 말한 고유명과 동일한 방식으로 기능한다. 다소 이상화하여 말하자면, 우리는 자연종 용어를 정의할 때(혹은 자연종 용어의 지시를 고정할 때) 그 지시체가 되는 대상을 직접 가리키면서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물’이라는 단어로써 나는 저것that stuff을 의미한다. 이는 앞 章에서 보았듯이 Haydn의 부모가 ‘그 이름으로 우리는 이 아이this child를 의미한다’고 선언함으로써 고유명 ‘Josef Haydn’의 지시를 고정하는 경우와 마찬가지이다. 또 다른 자연종 용어인 ‘호랑이’ 역시 마찬가지로서, 우리는 한 동물을 가리키면서 ‘호랑이’는 그 동물that animal과 동일한 종에 속하는 동물 그리고 오직 그 동물에만 적용되는 단어라고 결정함으로써 ‘호랑이’의 지시를 고정한다.
자연종 용어는 물이나 금[金]과 같은 물질substance 및 호랑이와 같은 생물종species을 포함한다. 좀 더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한 자연종 용어를 도입할 때 특정 종의 표본sample을 직접 가리키면서 그 단어는 그 표본과 동일한 종류에 속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그 대상을 지칭하는 것으로 결정한다. 이러한 종류의 술어에 관하여 ‘동일한 자연종’이라는 표현이 하는 역할은, 고유명에 대하여 ‘동일한 대상’이 하는 역할과 같다. [‘“Josef Haydn”이라는 이름으로 저 사람을 의미한다’에서 지표사 ‘저 사람’이 ‘저 사람과 동일한 대상’을 가리키는 지시-고정 장치로 쓰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물”이라는 단어로 저것that stuff을 의미한다’에서 지표사 ‘저것’은 ‘저것과 동일한 자연종에 속하는 것’을 가리키는 지시-고정 장치로 활용된다.]
이러한 고찰에 따르면 ‘금’과 같은 용어를 기술적으로 정의descriptive definition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은 정의방식이다. [이는 역시 앞 章에서 살펴본바 ‘Mozart’를 ‘〈Don Giovanni〉의 작곡가’와 같은 기술구를 활용하여 정의하는 것이 올바르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금’을 가령 ‘노랗고 빛나는 연성(延性) 금속’과 같은 식으로 정의하여, 이것이 금에 대해 그리고 오직 금에 대해 참true of이라고 가정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정의가 ‘금’에 대한 동의어를 제공하지는 않는다. 즉 ‘노랗고 빛나는 연성(延性) 금속’이 ‘금’에 의미를 주지는give the meaning 않는다. 다음 정의를 생각해보자:
금 =df 대체로 장신구를 제작하는 데 활용되는 노랗고 빛나는 연성 금속
이는 분명 의심할 바 없이 참이긴 하지만, 단지 우연적으로만 참이다. 금이 장신구 제작에 활용된다는 것은 단지 현실세계에서만 성립하는 우연적인 사실이며, 다른 가능세계에는 노랗고 빛나며 연성을 띠는 금속이면서도 분명 금은 아닌 물질이 존재한다(후자 사례는 현실에도 존재하는데, 황철광은 금과 매우 비슷하게 생겼지만 FeS2의 화학식을 갖는바 금이 아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물이 다른 사물과 동일한 종에 속하기 위한 조건은 무엇인가? 금과 같은 원소element의 경우 동일한 원자번호atomic number(원자핵을 구성하는 양성자의 수)를 갖는 경우 그리고 오직 그 경우에 두 사물은 동일한 종에 속한다. 물과 같은 화학적 복합물의 경우 동일한 분자구성composition of molecules을 갖는지 여부가 기준으로서, 물의 각 분자는 하나의 산소원자와 두 개의 수소 원자 즉 H2O로 구성되어 있다. 생물학적 종의 경우엔 다소 불분명한 데가 있긴 하지만, 특정 계통 유형에 속하는 것, 특정 DNA 구조를 갖는 것, 교미함으로써 번식력을 갖춘 자손을 출산할 능력을 갖추는 것 등을 거론할 수 있겠다.
자연종 용어는 ‘진흙 투성이인’, ‘[‘해충’, ‘유해조류’ 등에서 사용되는]해로운vermin’ 등의 단어들과는 달리 전혀 기술적이지 않다. 하지만 특정 기술구는 자연종 용어에 대해 특권적인 지위를 점하고 있다. 만약 우리가 물을 가리키고 있는 중이라면, 필연적으로 어떤 것은 H2O인 경우 그리고 오직 그 경우에 바로 저것이다. 동일한 분자구성을 갖는 것이 복합물질의 동일성 기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음은 참이다:
필연적으로, 물 = H2O.
이러한 고찰에 따라 우리는 H2O가 물의 본질(本質)essence이라고 말할 수 있다. H2O가 바로 물 그 자체이다.2) 하지만 우리는 물이 H2O라는 것을 선험적으로 알고 있는 것은 아니며, ‘물’과 ‘H2O’가 동의적인 것은 아니다. 물이 H2O임을 모르는 사람은 과학적 지식이 부족한 것일지는 몰라도, 그렇다고 해서 언어적 지식linguistic knowledge까지 부족한 것은 아니다. 그 사람 역시 문장 내에서 ‘물’이라는 단어를 무리 없이 사용할 수 있으며, 물을 가리키면서 ‘물’은 저것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다.
2) (原註) 다만 한 사물이 필연적으로 여차여차하다고 해서, 그 여차여차함이 그 사물의 본질을 이룬다고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가령 한 사물이 그것 자신만으로 구성된 단위집합unit class의 원소가 됨이라는 속성은 각 대상이 갖는 필연적인 속성이다. 예를 들어 Madonna는 집합 {Madonna}의 원소로서, 이 집합에 속한다는 속성은 Madonna 그리고 오직 그녀만이 필연적으로 예화하는 속성이다. 하지만 그것이 Madonna의 본질적 속성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에 대해서는 K. Fine(1994), 「본질과 양상성Essence and Modality」 참조.
따라서 Hume이나 Kant 등 많은 철학자들이 생각했던 바와는 반대로, 어떤 필연적 참은 경험적(후험적)이다. 이는 매우 기이한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예를 들어 고양이가 동물이라는 것은 분적석 내지 필연적인 것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다소 허황되긴 하더라도 상상가능한conceivable 가능성 하에서라면, 예컨대 ‘고양이’라 불리는 동물들이 실은 전부 외계인에 의해 조종되는 로봇인 상황에서라면, ‘고양이는 동물이다’는 거짓일 것이다.
주의할 사항이 있다. Putnam(과 Kripke)의 견해에 대해 일반적으로 저지르기 쉬운 실수는, 모든 일반용어가 자연종 용어라고 생각하는 것, 모든 용어가 본질을 가리킨다거나 혹은 모든 용어가 고정 지시어로서 그 지시체를 직접지시한다고 과도하게 확대 해석하는 것이다. 이는 사실이 아니다. 모든 명사가 직접지시적이거나 고정 지시어인 것은 아니다. 가령 언덕이나 진흙 등의 개념은, 그 단어가 가리키는 역할을 실제로 실현하는realise 물질의 본성에 의해 정의될 수 없는 개념이다. ‘물’이나 ‘호랑이’와 달리 언덕이나 진흙이 어떤 숨겨진 본성(즉 우리가 언덕과 진흙에 속한다고 생각했던 바와는 전연 다른 본성)을 기저에 지니고 있는 것으로 판명된다는 것은 상상가능하지 않다. ‘물’ 내지 ‘물 같은watery’ 및 ‘호랑이’ 내지 ‘호랑이-모양의tiger-shaped’와 다르게, ‘언덕’과 ‘진흙’은 그것이 나타내는 대상의 실현자(實現者)realiser에 대한 개념을 표현하는 게 아니라 그 역할 자체의 개념을 표현한다. 마찬가지로 ‘멍청한’, ‘예쁜’ 등의 형용사, ‘흔들다’, ‘방해하다’ 등의 동사, ‘바쁘게’, ‘중심적으로’ 등의 부사 역시 자연종 용어로 간주될 수 없다. 우리 언어의 대부분은 직접지시적이거나 고정적이지 않은 기술적인 단어들로 구성된다. (한 가지 고려해봄직한 의문은 인공물artefact을 가리키는 용어에 대한 것이다. 가령 책의 개념은 특정한 인공적 본질이라는 개념을 지니고 있다 할 수 있겠는가? 인공적 종artefactual kind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는가? 아니면 그것은 직접지시적인 개념이 아니라 기술적인 개념인가?)
자연종과 그 본질에 대한 Putnam의 설명은 실질적 본질real essence과 명목적(名目的) 본질nominal essence을 구분하는 J. Locke의 논의와 비슷한 데가 있다. Locke에 따르면 명목적 본질이란 우리가 한 종의 사례들instances을 가려내기 위해 사용하는 규칙으로서, 대체로 [감각적으로] 관찰가능한 속성observable property들로 이루어져 있다. 가령 금의 명목적 본질은 ‘노랗고 빛나는 연성의 금속’과 같은 식이 된다. 반면 한 종의 실질적 본질이란 그 종의 기저(基底)에 있는 본성underlying nature이다. Locke는 [경험론자이자 명목론(名目論)자이기에] 우리가 실질적 본성을 알 수 있는지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하지만 Locke는 실질적 본질을 알 수 없다는 자신의 주장이 [우리가 자연종의 본질을 알 수 있다는 Putnam의 주장으로 인해] 틀린 것으로 입증된다 해도 이를 오히려 반가워할 것이다.
자연종에 대한 Putnam의 논의에서 핵심적인 사항은, 자연종 용어가 ‘이것’과 같은 지표사로서 기능할 뿐, ‘오렌지 색 바탕에 검은 줄무늬가 있는 덩치 큰 고양잇과 육식동물’과 같은 그 어떤 맥락-독립적context-free인 기술구와도 전혀 동등하지 않다는 것이다.3) 자연종 용어의 지시는, 그 용어가 도입될 때 실제로 가리켜지는 대상의 본성에 따라 고정된다.
3) (原註) 다만 일부 자연종 용어는 지표사가 아니다. 예컨대 버클륨과 같은 원소의 경우 그에 속하는 사례가 발견되거나 합성되기 이전에 정의되었다.
고유명에 대한 Kripke의 설명에서 고유명의 지시체가 고정되는 절차가 바로 이러한 방식을 따른다. 고유명 역시 지표사와 매우 유사한 방식으로 기능한다. Haydn의 부모가 태어난 아기를 가리키면서 처음으로 ‘이 애를 “Josef”라 칭하자’ 하고 말하는 경우처럼, 고유명의 사용과 얽힌 인과적 사슬이 최초로 시작되는 시점에 실제로 가리켜진 대상이 바로 그 고유명의 담지자가 되는 것이다. 또한 앞 章에서 살펴보았듯이(‘지시 고정하기Ⅱ: 기술구’) 고유명의 지시체를 고정하는 데에 모종의 기술구가 활용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연종 용어가 도입되는 경우에도 지시를 고정해주는 기술구reference-fixing description가 활용될 수 있다. 예컨대 ‘나는 “물”이라는 단어로써, 실제로 강에서 흐르고 비가 되어 내리는 그러한 것the stuff을 의미한다’와 같은 식으로 ‘물’의 지시를 고정할 수 있다. 다만 고유명의 담지자가 만족하는 기술구를 통해 고유명의 지시를 고정한다고 해서 그 기술구가 고유명에 의미를 주지는 않는 것처럼, 이 경우에도 ‘실제로 강에서 흐르고 비가 되어 내리는 그러한 것’이라는 기술구가 ‘물’이라는 자연종 용어와 동의적인 것은 아니다.
∙ 의미는 머릿속에 있는가?
Frege주의적인 견지에서 보자면, 가령 ‘물벼룩은 물속에 산다’와 같은 문장에 의해 표현되는 명제가 그 문장을 말하거나 이해하는 사람의 내적인 심리상태internal psychological state, 궁극적으로는 그 사람의 두뇌상태brain-state에 의해 결정된다고 가정하는 편이 자연스러운 듯하다. 지표사에 대한 Putnam의 관점에 따르면 이러한 생각은 잘못되었다. 쌍둥이 지구가 우리의 지구와 정말로 똑같다면 거기엔 당신의 도플갱어가 살고 있을 것이다. 그 도플갱어는, 당신의 신체가 H2O로 이루어져 있는 반면 당신의 도플갱어의 신체가 XYZ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만을 제외하고는, 모든 면에서 당신의 정확한 복제물인 사람이다. 그렇다면 당신과 그 도플갱어가 ‘물벼룩은 물속에 산다’고 말할 때 둘은 서로 다른 것을 의미하고 있다. 그 문장에서 ‘물’이라는 단어를 통해 당신은 H2O를 의미하고 도플갱어는 XYZ를 의미하기에, 당신이 말한 문장-개항의 진리-조건은 물벼룩이 H2O에 산다는 것이고 도플갱어가 말한 문장-개항의 진리-조건은 물벼룩이 XYZ에 산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경우에도 당신과 도플갱어의 두뇌상태는 정확히 동일할 것이다(단, 여기서 두뇌상태의 동일성 여부는 신체가 H2O로 이루어져 있는지 또는 XYZ로 이루어져 있는지와 무관하다고 가정하자). 따라서 당신이 말한 바의 의미가 당신의 두뇌상태에 의해서는 결정되지 않는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오히려 당신의 말의 의미는 당신 주변의 환경, 즉 당신이 처해 있는 물리적 맥락에 좌우된다. 지구에 사는 우리가 ‘물’로서 알고 있는 바는 쌍둥이 지구에 사는 쌍둥이 지구인이 ‘물’로서 알고 있는 바와 다르다. 쌍둥이 지구로 우주여행을 간 당신이 XYZ가 담긴 잔을 보며 ‘아, 물이다!’ 하고 말한다면, 당신은 틀린 말을 한 셈이다. 쌍둥이 지구인이 그것을 ‘물’이라 칭하더라도, 당신은 그것을 ‘물’이라 칭할 수 없다. 지구에서 쓰이는 단어 ‘물’과 쌍둥이 지구에서 쓰이는 단어 ‘물’은 동일한 표기형태와 동일한 음을 가지면서도 뜻을 달리하는 동철이의어(同綴異義語)homonym인 셈이다. 이것이 바로 의미론적 외재주의semantic externalism에 대한 논증의 기본 골자이다. 의미론적 외재주의에 따르면 당신과 도플갱어가 동일한 개념을 갖고 있거나 동일한 심리적 상태에 있다고 하더라도, 둘의 발화는 각기 다른 것을 의미한다. 보다 전문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의미론은 심리학에 수반(隨伴)supervene4)되지 않는다. 좀 더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의미는 내적 상태internal state에 수반되지 않는다. 다소 기이하고 충격적이게 여겨지는 귀결이긴 하지만, 당신과 쌍둥이 지구의 당신이 ‘나는 우리 엄마를 사랑해’라고 말할 때 표현되는 명제가 당연히 다르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기실 그다지 놀라울 것도 없다.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은 지구에 있는 당신의 엄마이지 쌍둥이 지구에 있는 도플갱어-엄마는 아니다.
4)임의의 속성 A와 B에 대해, A가 B에 수반된다면, B의 차이가 없이는 A의 차이도 없다. 가령 어떤 두 조각품이 아주 세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정확히 동일한 색과 크기와 모양 등을 지니고 있다면, 두 조각품은 동일한 정도로 아름다운 셈이다. 또는 조각품에 어떤 식으로든 물리적 변형을 가하지 않는 이상 그 조각품이 갖는 아름다움 역시 동일하게 유지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조각품이 예화하는 미적 속성은 조각품의 물질적 재료가 예화하는 물리적 속성에 수반된다. 의미론적 외재주의에 따르면 언어의 의미론적 속성은 언어 사용자의 내적인 심리상태가 예화하는 속성에 수반되지 않는다. 의미론적 속성이 심리적 속성에 수반된다면 심리적 차이 없이는 의미의 차이가 없어야 하는데, Putnam의 쌍둥이 지구 사고실험은 심리상태의 차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언어의 의미가 다를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 하나의 맥락으로서의 현실세계
자연종 용어에 대한 Putnam의 고찰은 ‘물’과 같은 단어들의 의미를 결정하는 데에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 생각보다 더욱 근본적인 수준에서 개입되어 있는 반면, 우리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그에 비해 훨씬 적게 관여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처럼 여겨진다. 이러한 논의의 핵심은 ‘이것은 물이다’와 같은 문장의 의미가 발화의 맥락에 따라 잠재적으로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와 어떤 파급력을 지니는지에 대해 좀 더 상세히 살펴보자.
Jones가 가능세계 W에 존재한다고 해보자. 그가 기르는 개는 Fido이다. Jones가 정확히 오후 한 시에 ‘나의 개에게는 벼룩이 있다’라고 말한다. 그의 말은 오후 한 시에 Fido에게 벼룩이 있는 경우에만 참이다. Jones가 같은 말을 오후 여덟 시에 또 한다면, 그 말은 오후 한 시가 아니라 오후 여덟 시에 Fido에게 벼룩이 있는 경우에만 참이다. 이렇듯 그가 말한 바는 발화의 맥락에 따라 달라진다. 즉 두 경우에 Jones가 표현한 명제는 각기 다른바, 왜냐하면 ‘…에게 벼룩이 있다’는 동사가 지닌 현재시제는 Jones가 그 개에게 현재 벼룩이 있다고 말했음을, 즉 발화가 이뤄진 시점에 벼룩이 있다고 말했음을 나타내는데, 그러한 발화의 시점이 변하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Jones가 W와는 다른 가능세계 W✻에 존재한다 해보자. 그 세계에서 Jones는 Fido와는 다른 개 Spot을 기르고 있다. 이 경우 Jones가 ‘나의 개에게는 벼룩이 있다’고 말한다면, 분명 그의 말은 발화가 이뤄진 시점에 Spot에게 벼룩이 있는 경우에만 참이다.
이제 Jones가 Fido를 기르고 있는 W로 다시 돌아가 보자. 이번에는 Fido에게 벼룩이 없지만, Jones가 ‘나의 개에게는 벼룩이 있었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해보자. 그의 말은 다음 둘 중 하나로 해석될 수 있다:
(1) 어떤 가능세계에서, Jones는 개를 기르고 있으며 그 개에게는 벼룩이 있다.
(2) 어떤 가능세계에서, Fido에게는 벼룩이 있다.
그런데 직관적으로 생각하기에 Jones의 말은 분명 (2)로 해석되어야 할 듯하다. ‘나의 개에게는 벼룩이 있었을 수도 있다’고 말할 때 Jones는 그가 현실에서 기르고 있는 개, 즉 W에서 기르고 있는 개에 관해 말하고 있는바, 그 개에게 벼룩이 있었을 수도 있음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즉 Jones의 말은 바로 그 개 Fido에게 벼룩이 있는 가능세계가 적어도 하나 존재함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지, Fido가 아닌 어떤 다른 개를 그가 기르고 있고 그 개에게 벼룩이 있는 가능세계가 존재함을 의미하고 있는 게 아니다.
이번에는 W✻로 한 번 더 가보자. W✻에서 Jones가 기르는 개 Spot에게도 벼룩이 없다고 해보자. 그 세계에서 Jones가 ‘나의 개에게는 벼룩이 있었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면, 이 경우 그는 Fido가 아니라 Spot에 대해 말하고 있는 셈이다. 이렇듯 Jones가 ‘나의 개’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어떤 대상에 관해 말하고 있는가 하는 것은 Jones가 어떤 가능세계에 존재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즉 Jones가 그 말을 W에서 발화한다면 그 세계 W에서 기르고 있는 개에 관해 말하는 것이고, W✻에서 발화한다면 그 세계 W✻에서 기르고 있는 개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고찰에 따라 우리는 앞서 나열했던바 발화의 맥락을 이루는 지표들의 목록에 다음과 같이 세계라는 항목을 추가해야 한다:
맥락적 지표contextual indices: 시간, 장소, 화자, 청자, 세계.
물론 그 어떤 문장도 현실이-아닌non-actual 가능세계에서 현실적으로actually 발화될 수는 없다. [어떤 문장이 실제로 발화된다면 그 발화는 현실세계에서 이뤄진 것이기에, 일상적으로 우리는 현실세계만이 발화가 이뤄질 수 있는 유일한 맥락이라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문장들은 현실세계가 아닌 다른 가능세계에서도 발화될 수 있다(이는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진다든가 늑대가 짖는다든가 하는 등의 여러 사건들이 다른 가능세계에서도 발생할 수 있다는 것과 하등 다를 바 없는 일이다). 그렇기에, 현실적인 발화의 맥락이 전부 현실세계라 하더라도, 발화의 맥락이 필연적으로 현실세계 뿐이라 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해 현실적인 발화의 맥락은 현실세계로 고정되지만, 가능적인 발화의 맥락은 현실세계 이외의 가능세계도 포함한다.]
논의 과정에서 시사되듯이 ‘나의 개’라는 표현은 지표사인 동시에 고정 지시어이다. 우선 ‘나의 개’는 ‘내가 기르는 개’를 의미하[며 이는 발화가 이뤄지는 맥락에 따라 각기 다른 지시체를 갖]기에 지표성을 띤다. 그리고 ‘나의 개’가 고정성을 띠는 이유는, ‘나의 개에게는 벼룩이 있다’가 다른 가능세계에서 발화될 경우 갖게 될 진리치를 평가할 때, 우리가 동일한 개에 대해 각 가능세계에서 벼룩이 있는지 여부를 조사하게 된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물론 이는 ‘나의 개’와 같은 어구가 非-고정적인 방식으로 쓰일 수도 있다는 점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예컨대 우리는 ‘저 개가 내 개가 아니었으면 좋았을 것을’ 하고 말할 수 있다. 그 말로써 의도되는 바는 그 개가 그 개가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 경우 ‘나의 개’는 [앞서와 같은 고정 지시어로서가 아니라] ‘내가 기르게 된 개’와 같이 非-고정적인 기술구로서 쓰이고 있는 셈이다. ‘나의 개’와 같은 표현이 고정적으로 사용되는지 여부는 대체로 화자의 의도에 따라 결정된다. 예를 들어 내가 기르는 개가 비글이라고 가정한 채 다음 두 문장을 생각해보자:
만약 내가 다른 개를 선택했더라면, 나의 개는 프렌치불독이었을 것이다.
만약 내가 다른 개를 선택했더라면, 나의 개는 다른 사람이 기르게 되었을 것이다.
첫 번째 문장에서 ‘나의 개’는 非-고정적으로 사용되었다. 그 문장을 통해 의도되는 바는 내가 실제로 기르고 있는 개인 비글이 프렌치불독이었을 수도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내가 기르게 된 개가 비글이 아닌 프렌치불독이었을 수도 있다는 의미이다. [즉 이 경우 ‘나의 개’는 非-고정적 표현인 ‘내가 기르게 된 개’의 의미로 쓰이고 있다.] 반면 두 번째 문장에서 ‘나의 개’는 고정적으로 사용되었다. 그 문장을 통해 의도되는 바는 가상적인 상황에서 내가 선택했을 그 개가 나의 개인 동시에 다른 사람의 개라는 의미가 아니라, 실제로 내가 기르는 개 비글이 다른 사람에 의해 길러지게 되었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즉 이 경우 ‘나의 개’는 고정적 표현인 ‘내가 실제로 기르고 있는 그 개’의 의미로 쓰이고 있다.]
∙ 2차원주의 의미론: 발화의 맥락 對 평가의 환경
5章 말미에서 우리는 Kripke에 관한 논의에 어딘가 미심쩍은 데가 있다는 점을 언급한 바 있다. 이는 Putnam에 관한 논의에서도 마찬가지이다. Putnam의 주장대로 물이 필연적으로 H2O라는 점을 받아들여보자. 아무리 그 점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어떤 의미에서는 물이 H2O가 아니라 XYZ인 것으로 밝혀졌을 수도 있다는 직관을 우리는 여전히 가지고 있다. 물이 XYZ라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분명 상상가능하다imaginable/conceivable[다르게 말해 선험적으로 배제되지 않는다]. 심지어 이는 쌍둥이-지구 사고실험을 상상할 때 우리가 떠올리도록 요구받았던 바로 그 상황인 것이다! 현실세계에서는 물이 필연적으로 H2O이긴 하지만, 만약 XYZ-세계가 현실세계였더라면, 물은 XYZ였을 것이다. 작금에 2차원주의적 의미론Two-Deimensional Semantics이라 널리 칭해지는 이론은 바로 이러한 점을 다루기 위해 제시되었다.
정상적인 조건 하에서라면, 하나의 서술문이 발화됨으로써 한 명제가 표현되며 그 명제는 참이거나 거짓일 수 있다. 명제란 특정 맥락에서 발화된 단어들의 의미이다. 간단히 말해 명제는 말해진 것what is said이다. 바로 앞 節에서 우리는 발화를 통해 무엇이 말해지는지를 결정해주는 맥락적 매개변수contextual parameter들의 목록인 시간, 장소, 화자 및 청자의 동일성 등에 발화가 발생하는 세계를 추가하였다. 그런데 앞 절에서 논의를 진행하면서 우리가 수행했던 또 다른 작업이 있다. 우리는 임의의 명제를 취한 뒤 그것을 하나의 가능세계에서at a possible world, 혹은 한 가능세계와 연관지어with respect to 평가해볼 수 있다. 즉 그 명제가 그 가능세계에서 참인지 여부를 물어볼 수 있다. 한 명제는 [자체적으로 특정 진리치를 갖는 게 아니라] 각 가능세계에 따른 진리치를 갖는다.
이에 우리는 David Kaplan을 따라 다음과 같이 발화의 맥락과 평가의 환경circumstance of evaluation을 구분해야 한다:
문장-의미 | + | 발화의 맥락 | ⇒ | 명제 |
명제 | + | 평가의 환경 | ⇒ | 진리치 |
여기서 문장-의미enstence-meaning란, 주어진 문장이 각각의 가능한 발화맥락possible context of utterance에서 발화될 경우 어떤 명제가 표현하는지를 결정하는 언어적 규칙linguistic rule으로서, Kaplan은 이를 문장의 특성character이라 칭하였다. 이에 위 규정의 첫 줄을 Kaplan의 용어법으로 다시 표현해보자면, 한 문장의 특성은 주어진 맥락에 따라 어떤 내용content 즉 명제가 표현되는지를 결정한다. 한 문장 전체의 특성은 그 문장을 구성하는바 지표사를 포함한 개별 표현들의 특성에 의해 결정된다. 예를 들어 지표적 명사 ‘여기’의 특성은 어디가 되었든 그 단어를 말하는 화자가 존재하는 그 장소를 결정하는바, 주어진 화자가 위치 L에 있을 경우 ‘여기’의 내용은 L이 된다.
이렇게 문장의 특성과 구체적인 발화맥락에 의해 한 명제(내용)가 결정되고 나면, 비로소 그 명제가 주어진 하나의 가능세계에서 참인지 여부를 물을 수 있다. 물론 우리가 어떤 명제에 대해 참이라고 말할 때 통상적으로는 현실세계에서 참임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 명제가 현실세계가 아닌 다른 가능세계에서 참일지를 물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참이란 절대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세계에 따라 상대적인 것이며, 단순히 한 명제가 자체적으로 지니는 속성이 아니라 세계에 따라 달리 지니는 속성이라 할 수 있다. 요컨대 참이란 [명제가 갖는 단순한 1항속성이 아니라] 명제와 세계 간에 성립하는 2항관계이다.
명제와 진리치에 대한 이러한 도식은 꽤나 흥미로운 몇몇 귀결을 가져온다. Jones가 다음 문장을 발화했다고 해보자:
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
이 문장에 대한 그 어떤 발화도 거짓일 수 없다. 우리의 언어적 규칙에 따르면 이 문장에 대한 실제 발화에 의해 그 어떤 명제가 표현되든, 그 명제는 현실세계에서 반드시 참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찰에 따라 혹자는 ‘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가 필연적 참을 표현한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Jones는 그 문장을 특정 시점에 특정 장소에서 발화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가 말한 바는 Jones는 그 시점에 그 장소에 있다이다. 이 명제는 필연적으로 참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Jones는 그 시점에 다른 장소에 있었을 수도 있다. 즉 다른 가능세계에서 Jones는 그 시점에 그 장소에 있지 않다. Jones에 의해 발화된 이 명제는 그 세계에서는 거짓이다.
다만 위 문장에 대한 임의의 발화에 의해 표현되는 명제가 필연적 참이 아니라면, 적어도 분석적 참이라고는 할 수 있을 듯하다. 왜냐하면 우리의 언어적 규칙, 즉 언어사용을 지배하는 규약convention은 그 문장이 사용될 경우 표현되는 임의의 명제에 대해 참을 보증하기 때문이다. [즉 위 문장에 의해 표현되는 명제는 오로지 언어적 의미에 의해서만 참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쨌든 위 문장이 발화될 경우 표현되는 임의의 명제가 필연적으로가 아니라 우연적으로만 참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이러한 고찰은 분석적 참을 곧 필연적 참과 동일시하는 전통적인 철학적 관점이 잘못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번에는 내가 다음 문장을 말했다고 해보자: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표현한 명제는 물론 거짓이지만, 그 명제가 참이 되는 환경, 즉 내가 존재하지 않는 가능세계가 존재한다. 따라서 앞 사례와 유사하게, 이 문장에 대한 모든 발화가 거짓이긴 하지만, 그 발화에 의해 표현되는 명제가 필연적으로 거짓인 것은 아니다. 이러한 고찰은 사유하는 자아cogito라는 개념으로부터 자아의 존재를 도출해낸 Descartes의 생각이 어느 지점에서 혼동과 오류를 범했는지 설명해준다. 우리의 언어적 규칙에 따르면 ‘나는 존재한다’에 대한 임의의 발화는 발화가 이뤄진 그 세계에서 참인 명제를 표현한다. 하지만 아무리 이 점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 명제는 다른 가능세계에서는 거짓일 수 있다. 따라서 ‘나는 존재한다’는 문장은 분석적으로 참이지만, 그 문장이 잠재적으로 표현하는 명제들은 필연적 참이 아니다. [그러니 Descartes가 ‘나는 생각한다’로부터 ‘나는 존재한다’를 도출한 것은, 분석적으로 참인 결론을 도출한 것일 뿐 필연적으로 참인 결론을 도출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분석적 참이 형이상학적인 존재를 보증해주지는 않는다. ‘모든 날아다니는 코끼리는 코끼리이다’가 분석적으로 참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날아다니는 코끼리의 존재를 보증해주지는 않는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요약해보자. 발화의 맥락은 문장이 발화됨으로써 표현되는 명제를 결정하며, 평가의 환경은 그렇게 결정된 명제가 주어진 가능세계에서 갖는 진리치를 결정한다. 발화의 맥락이란 하나의 상황(狀況)situation으로서, 우리는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묻는다: 이 문장은 이 상황 하에서 어떤 명제를 표현하는가? 평가의 환경이란 하나의 가능세계로서, 우리는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묻는다: 이 명제는 이 가능세계에서 참인가?
이러한 그림에 따르면 임의의 문장이 갖는 양상적 특징modal characteristic을 결정하는 데에는 발화맥락과 평가환경이라는 두 종류 내지 두 차원two dimension의 평가기준이 적용되는 셈이다. 우리가 ‘물 = H2O’가 우연적이라고 할 때 고려되는 양상성[(쌍둥이-지구 사고실험에서 물 = XYZ일 수도 있었다고 할 때의 가능성은)]은 첫 번째 차원 즉 발화맥락이라는 기준에 따른 개념으로서, 이 경우 우리는 현실 지구와는 다른 발화맥락에서 이 문장이 말해질 경우를 고려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우리가 ‘물 = H2O’가 필연적이라고 할 때 고려되는 양상성은 두 번째 차원 즉 평가환경이라는 기준에 따른 개념으로서, 이 경우 우리는 현실 지구와는 다른 평가환경에서 이 문장의 진리치가 평가될 경우를 고려하고 있는 것이다. 이 중 첫 번째 차원은 종종 상상가능성(생각가능성)conceivability이라 칭해지기도 한다. 이에 이 용어를 활용하여 다시 말해보자면 물 ≠ H2O가 상상가능하긴 하지만, 물 = H2O는 필연적이다.
아래의 표 6.1은 이러한 2차원주의 의미론을 이해하는 데 매우 유용하다고 평가된다. 여기서 ‘물 같은 것watery stuff’이라는 표현은 고정 지시어로서, 그 무엇이 되었든 H2O가 실제로 만족하는 전형적인 속성stereotype들, 가령 100℃에서 끓는 투명한 액체임 등의 속성들을, 고려되고 있는 특정 가능세계에서 만족하는 대상을 지시한다. ‘CU1’과 ‘CU2’로 축약된 각 가로행은 가능한 발화맥락(또는 종종 말해지듯이 ‘현실로 간주되는 세계’)을 나타내며, ‘CE1’과 ‘CE2’로 축약된 각 세로열은 가능한 평가환경([문장이 평가되는] 가능세계)를 나타낸다.
표 6.1 ‘물 = H2O’에 대한 2차원주의적 도표
| CE1: 물 같은 것 = H2O | CE2: 물 같은 것 = XYZ |
CU1: 물 같은 것 = H2O | ‘물 = H2O’는 참이다 | ‘물 = H2O’는 참이다 |
‘물 = XYZ’는 거짓이다 | ‘물 = XYZ’는 거짓이다 |
CU2: 물 같은 것 = XYZ | ‘물 = H2O’는 거짓이다 | ‘물 = H2O’는 거짓이다 |
‘물 = XYZ’는 참이다 | ‘물 = XYZ’는 참이다 |
도표 상단의 두 가로행 CU1/CE1과 CU1/CE2는 Kripke와 Putnam이 주로 고려했던 사항이다. 현실세계에서 ‘물 = H2O’에 의해 표현되는 명제가 거짓인 가능세계는 존재하는가? [다르게 말해, 현실 지구의 발화맥락에서 ‘물 = H2O’가 발화됨으로써 표현되는 명제에 거짓값이 부여되는 평가환경이 존재하는가?] 이는 형이상학적인 물음으로서 그 답은 ‘아니오’이다. 좌측의 두 세로열 CU1/CE1과 CU2/CE1은 대안적인[즉 현실 발화맥락과는 다른] 발화맥락에 대한 상상가능성imaginability 내지 생각가능성conceivability을 나타내고 있다. ‘물 = H2O’가 거짓으로 판명되었을 수도 있다는 것은 상상가능한가? [다르게 말해, ‘물 = H2O’가 발화되었을 때 표현되는 명제에 거짓값이 부여되는 발화맥락을 생각해볼 수 있는가?] 이는 인식론적인 물음으로서 그 답은 ‘그렇다’이다.
특별히 흥미를 끄는 것은 좌측 상단에서 우측 하단으로 사선 방향에 있는 CU1/CE1과 CU2/CE2 두 칸이다. 전자는 단순히 ‘물 = H2O’에 의해 표현되는 현실적인 非-양상적non-modal 명제를 나타낸다. 반면 후자는 만일 XYZ-세계가 현실세계였다면 [(즉 물 같은 것 = XYZ인 발화맥락에서라면], 非-양상적 문장인 ‘물 = H2O’에 의해 어떤 명제가 표현되었을지를 보여준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사선 방향에 있는 칸들은 그 상황[(발화맥락)]이 현실세계였다면 한 문장에 의해 표현되었을 非-양상적 명제를 나타낸다. XYZ-세계가 현실세계였다면 ‘물 = H2O’라는 발화는 필연적으로 거짓일 것이다. 즉 물 같은 것 = XYZ5)인 세계에서 ‘물 = H2O’라는 발화는 거짓일 것이다. CU2/CE1 칸은 바로 이러한 상황을 나타내고 있다.
5) 원문에는 ‘watery stuff = H2O’라고 되어 있으나 착오인 듯하다.
∙ 추가적인 논의: 고정지시 再考
다음 두 문장을 보자:
(3) 100미터 달리기 세계기록 보유자는 자메이카인이다.
(4) 1990년에 100미터 세계기록 보유자는 미국인이었다.
현실의 발화맥락인 지금(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시점)이 2017년 3월 12일임을 고려하건대 (3)은 참이다. 그 문장에서 ‘100미터 달리기 세계기록 보유자the world record holder’라는 한정 기술구는 현재 세계기록 보유자인 자메이카사람 Usain Bolt를 지칭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4)에 나타나는 그와 동일한 기술구는 Bolt를 가리키지 않는다. (4)는 Bolt에 대해 그가 1990년에 미국인이었다(이는 거짓이다)고 말하고 있는 문장이 아니다. (4)에서 그 기술구는 1990년의 세계기록 보유자인 Carl Lewis를 가리키는바, (4)는 그가 미국사람이라는 참인 사실을 말하고 있다.
이번에는 두 문장을 다음 문장과 비교해보라:
(5) 1990년에 현재 100미터 달리기 세계기록 보유자는 미국인이었다.
(5)는 Bolt에 대해 그가 1990년에 미국인이었다고 말하고 있으며 이는 거짓이다. 즉 이 문장은 현재 100미터 달리기 세계기록 보유자인 사람이 1990년에는 미국인이었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혹자가 (4)에 의해 표현되는 명제를 표현할 의도로 (5)를 발화한다면, 그 사람은 ‘현재’라는 단어를 잘못 사용하는 셈이다.
‘100미터 달리기 세계기록 보유자’와 같은 한정 기술구는 보통 시간적으로 非-고정적temporally non-rigid인 방식으로 사용된다. 이는 우리가 그러한 기술구를 사용하여 각기 다른 시점에 관해 말할 경우, 그 기술구의 지시체는 말해지고 있는 그 시점에 기술구를 만족하는 대상이 무엇이냐에 따라 달라짐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 기술구는 (3)에서는 Bolt를 가리키지만 (4)에서는 Lewis를 가리킨다.
반면 (5)에 나타나는 ‘현재 100미터 달리기 세계기록 보유자’는 이와 대조된다. 이 기술구는 시간적으로 고정적temporally rigid이다. 이 기술구가 지칭하는 대상은 발화되는 문장에서 어떤 시간에 관해 말해지느냐와 무관하게 발화맥락(즉 발화가 이뤄지는 시점)에 따라 고정된다. 즉 발화되는 문장에 ‘내년에 …’, ‘1990년에 …’ 등의 표현이 나타나더라도, 그와는 무관하게 오로지 발화가 이뤄지는 시점에 따라 동일한 대상을 가리킨다. (4)와 (5)가 지금 발화될 경우 다른 진리치를 갖게 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현재 맥락에서 100미터 달리기 세계기록 보유자는 Bolt이기 때문에, (5)에 있는 한정 기술구는 Bolt를 지칭하며 문장 전체는 Bolt에 관해 올바르게 말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 기록 보유자의 동일성은 (4)와는 무관하다. (4)의 진리치는 누가 되었든 1990년에 기록 보유자였던 사람의 국적에 따라서만 결정된다. 다시 말해 시간상 非-고정적으로 사용되는 한정 기술구는 발화가 이뤄지는 시간과는 무관하며, 오로지 어떤 시간에 관해 말해지고 있느냐와만 연관된다.
이렇듯 시간적으로 고정적/非-고정적인 용어를 구분해볼 수 있는 것과 유사하게, 양상적으로 고정적/非-고정적인modally rigid/non-rigid 용어를 구분해볼 수 있다. 앞서 ‘하나의 맥락으로서의 현실세계’ 節에서 들었던 예가 살짝 변형된 다음 문장을 보자:
(6) 저 개that dog에게는 벼룩이 있다.
어떤 사람이 Fido에 대해 이 문장을 말하고 있다 해보자. 즉 Fido는 그 화자에 의해 實지시된 demonstrated(직접 가리켜진) 개다. 이번에는 그 사람이 Fido를 가리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7) 저 개에게 벼룩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었을 수도 있다.
여기서 나타나는 ‘저 개에게 벼룩이 있다는 것’이라는 절에 의해 표현된 명제가 어떤 가능세계에서 참인 경우에만, 문장 (7) 전체는 참이다. 우리가 그 가능세계에서 그 명제가 참인지 판정하고자 한다 해보자. 그 세계에서 벼룩이 있는지 여부를 조사해보아야 할 개는 어떤 개이겠는가? 분명 우리는 (7)에 대한 발화맥락에서 實지시된 개인 Fido를 조사해 보아야 한다. 그 외의 개들은 이 문장의 진리치와 무관하다.
이에서 알 수 있듯이 (6)과 (7)에서 나타나는 ‘저 개’라는 표현은 양상적으로 고정적인 지시어modally rigid designator, 혹은 짧게 줄여서 고정 지시어이다. 양상적인 고정 지시어의 적절한 지시체를 결정하는 것은 발화맥락이며, 심지어 反-사실적인 환경 즉 非-현실적인 가능세계에 관해 말해지더라도 양상적 고정 지시어의 유관 지시체는 동일하게 유지된다. 그렇기에 (7) 역시 (6)이 발화되는 맥락에 의해 결정된 개인 FIdo에 관해 말하고 있는 문장이다.
이러한 상황을 다음 두 예시와 비교해보자:
(8) 1966년 크러프트 대회6)의 우승견은 흰색이었다.
(9) 1966년 크러프트 대회의 우승견이 검은색이었다는 것은 사실이었을 수도 있다.
6) 런던에서 열리는 개 경연대회.
두 문장 모두 참이다. 하지만 (6)과 (7)에서 본 ‘저 개’와는 달리, ‘1966년 크러프트 대회 우승견’은 非-고정 지시어이다. 우선 실제로 1966년에 크러프트 대회에서 우승했던 개는 흰색 푸들인 Oakington Puckshill Amber Sunblush(OPAS)였다. 그런데 (9)를 참이게 하는 요인은, 1966년의 실제 우승견이 OPAS였다는 사실과는 무관하게, 어떤 가능세계에서는 검은색 개가 우승한다는 점이다. 즉 OPAS가 아닌 다른 개, 가령 검은 털을 가진 대형 슈나우저가 1966년 크러프트 대회에서 우승했을 수도 있다.
이번에는 (9)를 다음 문장과 비교해보자:
(10) 1966년 크러프트 대회의 실제 우승견the actual winner이 검은색이었다는 것은 사실이었을 19수도 있다.
(9)와 달리 (10)은 명백히 OPAS에 관해 말하고 있다. (10)의 진리치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1966년에 크러프트 대회에서 실제로 우승한 개(즉 OPAS)를 찾아내어, 평가환경으로 고려되고 있는 그 세계에서 바로 그 개가 검은색인지 여부를 확인해야 한다. 이에서 알 수 있듯이, ‘현재’라는 단어가 시간성temporality의 측면에서 고정성을 만들어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실제(현실의)actual’라는 단어는 양상성modality 측면에서 고정성을 만들어낸다. 즉 문장에서 ‘현재’, ‘실제’라는 단어가 발화될 경우 그 단어가 수식하는 용어의 지시체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현실의 발화맥락(전자의 경우엔 시간, 후자의 경우엔 세계)을 고려해야 한다. 간단히 말해 두 단어는 非-고정적인 단칭용어를 [시간성, 양상성의 측면에서] 고정화한다rigidify.
∙ 지표사의 필수불가결성
지표사가 이론상으로는 불필요한 요소라 생각하기 쉽다. 즉 순수하게 개념적인 단칭용어들만으로도 언어를 사용하는 데에는 원리적으로 별다른 무리가 없는 것처럼 여겨진다. 여기서 순수하게 개념적인 단칭용어란, 전적으로 기술적인 개념들만으로 그 의미가 구성되기에 발화맥락과는 무관한 방식으로 지시체가 결정되는 단칭용어를 말한다. 하지만 세심히 고찰해보면 언어에 대한 이런 그림은 설득력 있게 유지되지 못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첫 번째로, ‘여기’와 같은 단순한 순수 지표사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숲 속 어딘가에서 내가 ‘여긴 버섯이 하나도 없네’ 하고 말한다. 이 경우 나는 내가 있는 곳을 기술할 다른 방도가 없더라도, 즉 발화가 이뤄지는 맥락과 무관하게 오로지 일반개념들만을 활용하여 그 장소를 개별화individuate하거나 짚어내지 못하더라도, 어쨌든 ‘여기’를 사용함으로써 내가 지금 있는 곳을 분명 성공적으로 지시하고 있다. 설사 숲 속에서 길을 잃어버려서 ‘숲 속 어딘가’라는 식의 표현을 사용하는 것 이외에는 내가 있는 장소를 정확하게 기술할 아무런 방도가 없더라도, ‘여기’를 통해 내가 있는 곳을 지시할 수는 있는 것이다. 그 경우 ‘숲 속 어딘가’가 가리킬 수 있는 범위는 ‘여기’가 가리킬 수 있는 범위보다는 확실히 더 좁고 더 부정확하다.
두 번째로, 지표사의 필수성은 철학적인 관점에서 더욱 체계적인 방식으로 옹호될 수 있다. ‘태양계’, ‘오후 네 시’, ‘1986년 1월 12일’ 등과 같이, 우리가 시간이나 장소를 가리키기 위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대부분의 용어들은 非-지표적non-indexical이다. 그런데 ‘태양계’를 예로 들어 생각해보자. 우주에는 하나의 천체를 중심으로 공전하는 행성들이 엄청나게 많다. 하지만 우리가 ‘태양계’라고 말할 때 실제로 의미하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가 속한 바로 이 태양계이다. [즉 외견상 非-지표적인 용어들마저 보다 근본적인 층위에서는 지표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 셈이다.] 좀 더 일반적으로, 지도상에서 한 위치를 정확히 짚어내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해보자. 만약 내가 지도 위 한 지점에 ‘샹그릴라’라고 표기한다면 이는 그 지점이 어디인지를 정확히 드러내어준다 할 수 있겠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당신의 현재 위치가 그 지도상에서 어디인지를 알 경우에만 그 지도상에서 ‘샹그릴라’가 어디인지 역시 알 수 있다. 요컨대 그 지도가 당신에게 소용 있는 것이 되기 위해서는 여기가 어디인지를 알고 있어야 한다.
이는 시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당신이 Zog라는 행성에 방문하여 Zog曆으로 34909년에 여차여차한 역사적 사건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해보자. Zog의 월력체계상으로 지금이 몇 년도인지(그리고 Zog 행성에서 한 해의 시간적 길이가 어느 정도인지) 모르는 한, 당신은 그 사건이 정확히 언제 일어났다는 것인지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굳이 이러한 가상적인 상황까지 떠올려볼 필요 없이, 우리의 월력체계에 대해서도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다. 단지 우리는 우리의 월력체계에 익숙하기에 이러한 점이 좀체 두드러지지 않을 뿐이다. 1986년 1월 12일 모모한 특정 사건이 발생했다는 말을 들으면, 당신은 그 시점이 서기 1985년 하고도 열두 달 열이틀이 지난 날짜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이 정보만으로는 그 사건이 정확히 언제 발생했는지 알 수 없다. 심지어 그 사건이 과거에 발생한 것인지 현재 발생한 것인지 미래에 발생할 것인지조차 알 수 없다. 당신에게는 지금이 언제인지에 대한 정보가 필요한 것이다.7) 따라서 과거 사건이 발생했던 날짜에 관한 정보는, 그 사건이 지금 즉 현재로부터 일정 기간 이전에 발생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셈이다. 이렇듯 외견상 非-지표적인 것처럼 여겨지는 기술구들이 실제로는 지표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는 한 그 표현들을 적절하게 사용하거나 이해할 수 없다. 언어를 적절하게 사용하기 위해서는 지표적인 고정점indexical anchor point이 요구되는 것이다.
7) 유적 발굴지에서 ‘전하께서 哲年 315년에 모모한 칙령을 반포하시었다’고 기록된 석판이 출토되었다고 해보자. 현재 통용되는 월력체계와 비교했을 때 ‘哲年 315년’이 어느 시점을 가리키는지, 즉 현재 시점으로부터 정확히 몇백년 전인지가 밝혀지지 않는 한, 그 칙령이 반포된 역사적 시점을 특정하기란 불가능하다.
이와 관련하여 John Perry는 1인칭 대명사의 지표성과 연관된 충격적인 사례를 제시한다. 당신이 범죄조직에게 피랍된 상황에서 납치된 사람들 중 한명이 고문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해보자. 전해지는 바로는 고문 받게 될 사람이 ‘X하고 Y하고 Z한 사람’으로 묘사되었다고 한다. 당신은 X하고 Y하고 Z하다고 간주되는 그 사람이 정확히 누구인지 모른다. 자연스레 당신은 다음과 같이 생각하며 초조해하기 시작할 것이다: X하고 Y하고 Z한 그 사람이 혹시 나인가? 곧 벌어질 고문에 대한 당신의 태도는 결국 이에 대한 답이 무엇인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혹여 고문 받을 예정인 사람에 대해 ‘여차여차한 사람’이라는 형태의 여타 기술구들이 아무리 더 추가되더라도, 여차여차한 그 사람이 도대체 당신인지 여부를 확신할 수 없는 한, 그 정보들은 당신의 불안감을 불식시키기에는 여전히 부족할 것이다.
이렇듯 언어를 통해 전달되는 내용 내지 언어적으로 부호화된 암묵적인 인지적 정보cognitive import encoded를 명확하게 파악하는 데에는, 용어의 지시체 및 그와 결부된 개념적 사항만으로는 부족하며, 도입되는 용어의 지표적 특성이 반드시 고려되어야 한다. 따라서 지표사는 우리가 언어를 이해하는 능력 및 언어를 사용하여 사물을 지시하는 능력에 필수적인 요소이다. 맥락-의존성context-dependance은 우리의 직관적인 생각과는 달리 언어의 결함이나 결점이 결코 아닌 것이다.
∙ 지표사와 Frege의 뜻
Frege 역시 지표사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에 이를 자신의 뜻-지시 이론으로 편입시켜 설명하고자 시도한 바 있다. (지금에 의해 표현되는 바를 암묵적으로 포함하고 있는) 현재시제에 관해 설명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시간-지시time-indication가 현재시제에 의해 수행된다면, 문장에 의해 표현되는 사고(思考)thought를 온전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문장이 언제 발화되었는가를 알아야 한다. 따라서 발화의 시점은 사고에 대한 표현의 일부이다. … 이는 ‘여기’라든가 ‘저기’와 같은 단어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한 단어들이 사용되는 경우, 마치 글로 쓰여 있을 때 그러하듯이, 단어를 그저 사용하는 것만으로는 사고가 온전히 표현되지 않는다. 그러한 경우 사고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발화에 수반되는 특정 조건을 알아야 하는바, 발화가 이뤄지는 조건 역시 사고를 표현하는 수단으로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손가락으로 가리키기, 손짓이나 눈짓 등의 행위 역시 이에 [즉 발화에서 지표사가 사용될 경우 사고가 온전하게 표현되기 위해 동반되는 맥락-의존적 수단에] 포함될 것이다.
(「사고Thoughts」, Frege, 1997[(M. Beany 編, 『Frege 選集Frege Reader』)], 33쪽에 수록.)
Frege가 말하는 뜻sense이란 지시체가 제시되는(현상하는) 방식mode of presentation 또는 지시체를 짚어내는 규칙rule that picks out이라는 점을 다시 떠올려보자. 지표사에 관한 위 인용문에서 드러나는 Frege의 아이디어를 요약해보자면, 지표사의 언어적 의미란 지표사가 사용되는 각각의 가능한 경우에 어떤 뜻이 표현되는지를 결정하는 규칙이며, 그렇게 표현되는 뜻은 지표사가 어떤 대상을 가리키게 되는지를 결정한다. 따라서 지표사가 사용되는 경우 지시체의 제시방식은 지표사가 사용되는 맥락과 결부되어 있다. 가령 ‘현재 기온’이 발화될 때 그 대상을 결정하는 규칙은 ‘시점 T에 위치 L의 기온’과 같은 식이 될 것이며, 여기서 T와 L은 발화가 이뤄지는 시점과 장소이다.
같은 구절에서 Frege는 또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만약 어떤 사람이 어제 ‘오늘’이라는 단어를 사용해 표현했던 바를 오늘 말하고자 한다면, 그 단어를 ‘어제’로 대체하여 말해야 할 것이다.”(같은 책).
그러나 Frege는 여기서 한 가지 문제를 애써 피하고 있다. 먼젓번의 더 긴 인용문에 따르면 ‘오늘’과 ‘어제’에 대한 각 발화는 동일한 날[日]을 지시하긴 하지만 그것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제시한다. 즉 [동일한 사고가 표현되는 것처럼 여겨지는 경우에도,] “사고에 대한 표현의 일부”를 이루는바 “발화에 수반되는 특정 조건”[(발화의 시점이나 장소 등)]이 각기 다른 것이다. 이에 화요일에 말해진 ‘오늘은 화요일이다’의 뜻은 수요일에 말해진 ‘어제는 화요일이었다’의 뜻과 달라야만 한다. 따라서 어제가 일단 지나가고 나면, 어제 표현했던 바를 오늘 동일하게 표현하기란 불가능하다.
두 번째 인용문에서 ‘오늘’과 ‘어제’에 대해 Frege가 언급한 바가 좀 더 나은 견해인 듯하다. 첫 번째 인용문에서 제안된 그림은 너무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이후의 구절에서 ‘나’와 같은 1인칭 대명사를 고찰하면서 Frege는 “모든 사람은 특별하고 원초적인 방식으로 자신에게 제시된다”고 말한다. 즉 어떤 사람이 ‘나’를 사용하여 표현하는 바는 오로지 그 사람 자신에 의해서만 파악될 수 있다는 것이다. 화자가 표현하는 그 사고를 청자가 다시 표현하기 위해서는 ‘너’라든가 ‘그 사람’과 같은 단어를 사용하여 표현되는 사고로 대체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지금’과 ‘여기’에 대해서도 다소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 물론 ‘지금’의 경우 ‘나’와는 다르게, 주어진 한 시점이 복수의 사람들에게 제시될 수 있기에 여러 사람들이 그 시점을 지금으로 파악할 수 있긴 하지만, 일단 시간이 경과하고 나면 그 시점은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는 다시 제시될 수 없다. ‘여기’ 역시 마찬가지로서, 특정 지점에 있는 경우에만 그곳을 여기로 파악할 수 있다.
지표사와 그 뜻에 관한 이러한 고찰들이 참이라면, 지표사가 포함된 문장이 발화됨으로써 표현되는 사고는 발화맥락을 떠나서는 파악될 수 없는 게 되어버린다. ‘나는 배고프다’가 표현하는 사고는 화자가 아닌 이상 파악될 수 없으며, ‘여기 비가 온다’는 그 장소에 있지 않는 이상 파악될 수 없으며, ‘지금 비가 온다’는 그 시점이 지나가버린 이상 파악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는 우리의 일상적인 언어생활에 비추었을 때 잘못된 귀결인 듯하다.] 그러나 Frege가 말하듯이 이는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어제’와 ‘오늘’에 대해 언급하는 과정에서 Frege는 다음과 같은 요지의 말을 덧붙인다: 우리가 올바른 대상을 지시하고 있음을 아는 한, 우리는 그 대상이 제시되는 방식에는 그다지 개의치 않는다8). 그렇다면, 적어도 지표사가 연관되는 경우엔 뜻 개념이 의사소통에 대한 설명과는 무관한 셈이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8장에서 다시 살펴보게 될 것이다.
8) 이는 3章, ‘직접대면에 의한 인식과 기술구에 의한 인식’ 節 초입에서 Wiggins 씨 사례에 대해 Frege가 제시했던 답변과 마찬가지이다. 언어-사용자들이 한 언어표현에 결부시키는 뜻이 각기 다르더라도, 그 표현의 지시체가 동일한 한 일상적인 의사소통이 이뤄지는 데에는 무리가 없다는 것이다. 해당 절의 첫 두 문단 참조.
∙ 역사적 사항
내포 의미론의 요소들은 Frege와 Russell에게서 본격적으로 발견되었으며, 그 일반적인 착상의 기원은 그 이전으로 더 멀리 소급해간다. 내포 의미론을 구체적으로 정립하고자 기도한 보다 현대적인 접근은 Carnap의 『의미론 序說Introduction to Semantics』(1942)에서 시작되었다. 그 저서에서 Carnap은 ‘L-상태L-state’ 개념을 의미론 체계에 도입하였는데, 이는 작금의 가능세계 개념과 유사한 것으로서 거칠게 말해 하나의 L-상태란 형식언어formal language에 대한 하나의 해석interpretation이라 할 수 있다.9)
9) “의미론적 체계 S가 주어진다고 하자. S의 언어적 수단을 통해 표현가능한 완전하게 확정적인 상태는 (S에 관한) L-상태라 불린다. L-상태를 기술하는 S의 (대체로 매우 복잡한) 문장은 상태기술Zustandsbeschreibung이라 불린다. ㅇ리반적으로 S의 문장은 어떤 L-상태일 때 참이고 다른 상태일 때는 거짓이다. 한 문장이 참이 될 때, L-상태들 (또는 그에 상응하는 상태기술들) 전체는 이 문장의 L-공간이라 불린다. Leibniz의 표현을 사용한다면, L-상태 개념은 가능세계 개념을 의미론적으로 정확히 기술하며, 그래서 한 문장의 L-공간은 그 문장이 적용되는 모든 가능세계들에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한 문장의 L-공간이 S의 L-상태들 전체집합과 일치할 경우, 그 문장은 S에서 L-참(즉 순수하게 논리적인 근거에서 참)이다. 이는 원리상 다시 Leibniz의 이념을 정확하게 포착한다. 즉 논리적으로 참인 문장들은 모든 가능세계에서 통용된다는 점에 의해 구별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문장 A의 L-공간이 문장 B의 L-공간 안에 포함된다면, A는 B를 L-함축한다(즉 A로부터 B가 논리적으로 연역된다)고 말해진다. / L-개념은 내포나 의미개념을 엄밀하게 함으로써 의미분석의 기초를 확고히 다지는 데에 활용될 수도 있다. 두 문장의 진리치가 일치한다면 두 문장은 동치라고 말해진다. 이런 일치가 순수하게 논리적으로 확정될 수 있다면, 즉 두 문장 간의 동치명제가 L-참이라면, 그 문장들은 L-동치이다. L-동치인 문장들은 동일내포를 갖는다고 규정된다. 이 내포가 명제를 나타낸다면, 문장들이 L-동치일 때 그 문장들은 정확히 동일 내포를 갖는바 같은 내용을 가진다고 말할 수 있다. Carnap이 보여주었듯이 이러한 L-동치 개념을 확장하여 여타 종류의 두 지시사인 술어 및 개체상항에도 적용할 수 있으며, 그에 대해서도 내포개념의 정확한 정의를 얻을 수 있다.” (Wolfgang Stegmüller, 『현대 경험주의와 분석철학』(『현대철학의 주류사상Hauptströmungen der Gegenwartsphilosophie』, 卷1 부분), 이초식 外 譯, 고려대학교출판부, 1995, 83-4쪽.)
지표사에 관한 이론 역시 Frege의 저서에서 그 선구적인 면모를 찾아볼 수 있으며, 더욱 실질적으로 이뤄진 작업은 Russell의 1940년 저서 『의미와 진리에 관한 탐구Inquiry into Meaning and Truth』(1950년에 출간)에서 그가 칭한바 “자기중심적 특수사(特殊詞)egocentric particulars”에 관한 이론에서 발견된다.10) 이후 Kaplan의 「지시사Demonstratives」가 1989년에 공식적으로 출간되기 전까지, Tyler Burge, Hector-Neri Castañeda, Gareth Evans, David Lewis, Barbara Partee, Frank Vlach 등 많은 인물들이 지표사에 관한 논의에 기여하였다. 하지만 지표사에 관한 탐구는 Kaplan의 저서가 출현함과 더불어 폭발적으로 확장되었다(기실 「지시사」의 비공식 사본은 1989년 훨씬 이전부터 유포되고 있었다).
10) “이 章에서 고찰하고자 하는 언어표현은 그 표현이 지시하는 바가 말하는 사람과 관계있는 단어들이다. ‘이것’, ‘저것’, ‘나’, ‘너’, ‘여기’, ‘저기’, ‘지금’, ‘그 때’, ‘과거’, ‘현재’, ‘미래’ 등이 그러한 말들이다. 동사의 시제 역시 함께 고찰되어야 한다. ‘나는 덥다’라든지 ‘Jones는 덥다’와 같은 진술은 그 진술이 발언된 시간을 알아야만 일정한 의미를 갖게 된다. (中略) 모든 자기중심적 특수사들은 ‘이것’이라는 표현에 의해 정의될 수 있다. ‘나’는 ‘이것의 일대기’를 의미하며 ‘여기’는 ‘이것의 장소’, ‘지금’은 ‘이것의 시간’을 각각 의미한다. ‘여기’ 이외의 다른 자기중심적 표현을 기본적인 것으로 삼아 그것을 통해 ‘이것’을 정의하기란 가능할 것 같지 않다.”(Bertrand Russell, 『의미와 진리에 관한 탐구』, 「7章, 자기중심적 특수사」, 박병수 譯, 삼성출판사, 1982, 131-2쪽.) 이렇듯 Russell은 모든 지표사가 ‘이것’에 의해 정의가능하다고 규정한 뒤, 감각지각에 의해 야기되는 두뇌 자극을 통해 언어적 반응이 산출되는 인과과정이 최소한인지 혹은 지연되었는지 여부에 따라, ‘이것’으로부터 파생된 지표사들이 발화된다고 지적한다. 연후에 ‘지금의-나I-now’와 ‘이것’이 밀접하게 연관된다는 고찰에 따라 ‘이것’을 지금의-나가 지각하는 감각자료를 통해 분석해냄으로써, 최종적으로 모든 지표사가 “물리적 세계이든 심리적 세계이든 간에 세계를 기술하는 데에는 사용될 필요가 없는 표현들”이라고 결론짓는다. 이는 이번 章에서 살펴본바 지표사가 언어에 필수불가결하다는 생각과 상반되는 귀결이다. (또한 3章에서 살펴본바, 지각주체가 현재 직접대면하고 있는 감각자료들을 지시하는 ‘이것’, ‘저것’ 등의 표현만이 진정한 고유명 즉 논리적 고유명이라는 이전의 Russell의 입장과도 비교될 법한 관점이다.)
Hilary Putnam(1926-2016)은 철학의 다양한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다. 이번 章에서 살펴보았듯이 언어철학 및 지시론 분야에서 특출한 이론을 정립했을 뿐만 아니라, 심리철학philosophy of mind 분야에서는 다수실현가능성multiple realisability 논제 및 그에 기반한 기능주의functionalism 이론을 정식화함으로써 이후의 심리철학 및 인지과학이 발전해간 향방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형이상학과 과학철학에서는 모형-이론적model-theoretic 논증을 통해 그의 독특한 관점인 내재적 실재론internal realism을 정립하는 등, 이외에도 철학의 여타 분야들에서 많은 업적을 이루었다.
John Perry는 형이상학과 심리철학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의 저작들 중 특별히 지표사를 다루고 있는 것으로는 「지시사에 관한 Frege의 견해Frege on demonstratives」(1977)와 「본질적 지표사에 관한 문제The Problem of the Essential Indexicals」(1979)를 들 수 있다.
∙ 이번 章의 요약
지표사란 ‘지금’, ‘여기’와 같이 지시적으로 맥락-의존적referentially context-dependent인 표현이다. 각 지표사는 가능한 발화맥락에 대해 지시체를 결정한다는 특징을 갖는바, 지표사의 지시체는 지표사가 발화되는 맥락에 따라 달라진다. 일부 지표사는 지시체가 결정되는 데에 實지시화가 요구되는 지시사로서, 실지시 행위는 발화가 이뤄지는 맥락에 따라 암묵적일 수도 있다.
고유명에 대한 직접지시론적인 관점은 ‘물’이나 ‘호랑이’와 같은 이른바 자연종 용어들에게도 자연스럽게 확장될 수 있다. 만약 어떤 것이 물이라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물이다. 하지만 물이 지닌바 관찰가능한 속성 내지 표면적 속성에 관한 기술구는 그 어느 것도 물에 대해 필연적으로 참이지는 않다. 단, H2O와 같이 물을 여타 물질들로부터 구분해주는 요소에 대한 기술구는 모든 가능세계에서 동일한 물질을 지시한다. 따라서 ‘물 = H2O’는 후험적이면서 종합적인 문장이긴 하지만 필연적으로 참이다. 이러한 고찰에 따라 모든 물질들은 각각에 고유한 본질을 갖는다는 결론이 얻어진다.
지표적으로 지시하는 표현들 대부분은 대상을 고정적으로 지시하는 방식으로 사용된다. 어떤 사람이 물을 가리키면서 ‘저것은 물이다’하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그런 식으로 사용될 경우 필연적 참을 표현하는 문장을 발화한 셈이다. [즉 특정 맥락에서 발화된 지표사는 모든 가능세계에서 동일한 대상을 지시한다.] 이는 언어표현의 고정성이 가장 뚜렷하게 부각되는 사례로서, 그 말을 들은 청자는 설사 화자가 지시하는 대상에 대해 아무런 개념도 알고 있지 못하더라도 그 대상이 바로 저것이라는 점만은 알아차릴 것이다.
우리는 분명 다음과 같은 한 쌍의 가능적인 상황을 떠올려볼 수 있다: 한 상황에서는 물이 H2O를 포함하고 있고, 다른 한 상황에서는 물이 앞 상황의 것과 외견상 식별되지는 않지만 명백히 그와 다른 물질인 XYZ를 포함하고 있다. 각 상황 ‘내부로부터의 관점’에서는 이 차이를 알아챌 수 없겠지만, 양자는 각기 다른 물질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 다르다. 첫 번째 상황의 언어공동체에 속하는 사람은 ‘물’이라는 단어에 대한 발화나 표기를 통해 H2O를 지시하는 반면, 두 번째 상황의 언어공동체에 속하는 사람은 그와 동일한 단어에 대한 발화나 표기를 통해 XYZ를 지시한다. 이러한 사고실험에 따르면 발화의 맥락과 평가의 환경이라는 두 가지 사안을 구분해야 한다. 먼저 언어표현의 특성 즉 언어적 의미에 특정 발화맥락이 주어지면, 그 표현이 실제로 발화됨으로써 표현되는 내용이 산출된다. 다음으로 그렇게 산출된 내용에 특정 평가환경이 주어지면, 발화의 진리치, 외연, 지시체가 산출된다. 이렇듯 언어표현이 갖는 특성과 내용 간의 차이점은 명시적 지표사의 경우에 두드러지는 편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Putnam은 자연종 용어가 암묵적으로 지표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다고 제언하는바, 그에 따르면 ‘물’과 같은 자연종 용어의 경우에도 특성과 내용이 명백히 구분된다. 현실세계가 발화맥락으로 주어질 경우 ‘물’은 H2O를 그 내용으로 갖는다. 즉 현실세계에서 발화된 ‘물’은 (평가환경으로서의) 모든 가능세계에 걸쳐서 H2O를 가리킨다. 하지만 현실세계가 아닌 다른 가능세계가 발화맥락으로 주어질 경우 ‘물’은 예컨대 XYZ를 그 내용으로 갖는다. 이러한 의미론적 ‘2차원주의’의 관점은, ‘물 = H2O’가 [형이상학적으로] 필연적임에도 불구하고 그와 달리 ‘물 = XYZ’가 필연적인 것으로 판명되었을 수도 있다는 [인식론적인] 직관이 가능한 이유를 명료하게 포착해낸다.
양상성 개념은 시간성 개념과 매우 유사한 데가 있다. 특히 양상적인 고정성/非-고정성 간의 구분은 시간적인 고정성/非-고정성 간의 구분과 유사하다. 가령 ‘실제 그 F’가 그 지시체를 양상적으로 고정지시함과 유사하게, ‘현재의 그 F’는 그 지시체를 시간적으로 고정지시한다.
지표성을 단순히 언어사용의 편의를 위한 장치로 볼 수만은 없는 듯하다. 예를 들어 여기가 어디인지 혹은 지금이 언제인지를 모르는 이상, 그 어떤 상세한 지도나 달력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더욱 강렬한 예시를 들자면, 어떤 행위가 가해질 대상에 당신이 포함되는에 대한 정보를 당신이 알고 있는지 여부에 따라, 그 행위에 대한 기술구가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은 천양지차일 것이다. ‘그 F는 G하다’라는 사실을 아는 것과 ‘나는 G하다’를 아는 것은 나에게 동일한 정도로 유의미하지는 않다.
지표성은 Frege가 품었던 이상적인 의사소통 개념에 문제를 일으키는 것처럼 여겨진다. Frege의 생각에 따르면 온전한 의사소통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대화 참여자들이 동일한 뜻(동일한 사고 혹은 명제)을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예컨대 ‘지금’이라는 지표사에 의해 가리켜지는 시간이 제시되는 방식은 그 단어가 발화되거나 표시됨과 함께 순간적으로 지나가 버리기에, 그 시점 이후에는 그와 동일한 방식으로 제시될 수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한 시점 이후에 앞선 그 시점에 관해 의사소통하는 우리의 능력이 심각하게 손상된다고는 할 수 없을 듯하다.
∙ 탐구문제
1. 고유명에 관한 Kripke의 설명을 받아들였다고 해보자. Brown이 ‘나는 죽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 말은 ‘Brown은 죽지 않았다’와 동일한 것을 의미하는가?
2. ‘추가적인 논의: 고정지시 再考’ 節에서 제시되었던 (9) ‘1966년 크러프트 대회 우승견이 검은색이었다는 것은 사실이었을 수도 있다’와 (10) ‘1966년 크러프트 대회의 실제 우승견이 검은색이었다는 것은 사실이었을 19수도 있다’가, ‘실제’라는 단어에 의해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그 F가 G하다는 것이 사실이었을 수도 있다’와 ‘그 F는, 그것이 G하다는 것이 사실이었을 수도 있는 그러한 것이다’와 같은 식으로, 한정 기술구의 범위에 의해 구분될 수도 있겠는가? 우리의 예시를 활용하여 생각해보라.
3. 시제가 일종의 지표사임을 받아들인다면, 모든 현실적인 문장들이 지표사를 포함하고 있는 셈이라고 결론지어야 하는가?
4. 의미론적 외재론은 과연 어느 범위까지 적용될 수 있는가? ‘물’과 같은 자연종 용어들에 대한 Kripke-Putnam의 노선을 받아들인다면, 가령 탁자의 개념에 대해서도 외재론적 관점을 적용해야 하는가? 음식의 개념은 어떠한가?
5. 『命名과 필연Naming and Necessity』의 3講에서 Kripke는 심리철학 분야에서 논의되는 물리주의physicalism를 논박하고자 다음과 같이 본질적으로 2차원주의적인 논증을 제시한다: ‘물’이라는 단어가 물의 기저를 이루는 본성underlyng nature을 지시한다는 점을 받아들여보자. 따라서 물은 그것이 지닌 표면적 속성superficial property들에 대한 기술구를 단지 우연적으로만 만족한다. 이제 그 기술구를 만족하면서도 현실의 물이 지닌 바와는 다른 본성을 갖는 어떤 물질이 존재하는 세계를 생각해보라. 그 경우 우리가 실제로 생각하고 있는 대상은 물이 아니다. ‘고통(苦痛)pain’이라는 단어 역시 이와 마찬가지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즉 ‘고통’은 신경계의 특정 상태a state of nervous system를, 가령 C-신경섬유의 자극C-fibre stimulation을 지시하는데, 이 신경상태가 아프게 느껴지는hurtful 것은 단지 우연적으로만 그러할 뿐이다. [즉 물리주의가 주장하는바 ‘고통’이 가리키는 상태의 기저를 이루는 본성인 C-신경섬유자극 상태는, ‘아프게 느껴지는 바로 그것’이라는 기술구를 단지 우연적으로만 만족한다.] 현실이 아닌 어떤 가능세계에서는 C-신경섬유자극이 아닌 여타 물리적 기저상태에서 아픔이 느껴지겠지만, 그 상태가 [현실세계에서 우리가 말하는 바로 그] 고통은 아니다. [따라서 고통이란 바로 C-신경섬유자극과 동일하다.] Kripke는 이렇듯 고통과 특정한 물리적 신경상태를 동일시하는 물리주의 논증이 틀렸다고 지적한다. Kripke에 따르면 만약 어떤 것이 고통으로서 느껴진다면, 즉 아프게 느껴진다면, 그 기저를 이루는 것이 무엇이건 간에 그 어떤 것은 바로 고통이다. [요컨대 고통은 그것을 실현하는 기저상태와 동일시될 수 없는바, 그렇게 실현되는 현상적 속성 자체가 바로 고통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통은 그 어떤 특정 신경상태로도 “환원reduce”될 수 없다.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의식(意識)(의식적임)consciousness의 환원불가능성에 관한 논증을 제시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Kripke의 논증은 올바른가?
6. 양쯔강에 있는 물은 안타깝게도 매우 오염되어있는 상태이다. 특히 샹하이에 있는 양쯔강 하구에는 말하기에도 역겨운 온갖 오염물질들이 H2O와 뒤섞여있다. 실제로 샹하이의 양쯔강 하구 근처에서 측정된 H2O의 비율은 차[茶] 한 잔에서 H2O가 차지하는 비율보다도 훨씬 적다고 한다. 그런데 차는 차일 뿐 물이 아닌 반면, 강물은 아무리 오염되었더라도 어쨌든 물이다. 이러한 사례는 자연종 용어에 대한 Putnam의 주장에 문제가 된다고 할 수 있는가?
∙ 주요 읽을거리
Kaplan, D. (1989), 「지시사: 지시사 및 여타 지표사에 관한 의미론⋅논리학⋅형이상학⋅인식론적인 小論Demonstratives: An Essay on the Semantics, Logic, Metaphysics, and Epistemology of Demonstratives and Other Indexicals」: 『Kaplan의 논제들Themes from Kaplan』, 481-564쪽에 수록.
Perry, J. (1979), 「본질적 지표사에 관한 문제The Problem of the Essential Indexicals」.
Putnam, H. (1975), 「‘의미’의 의미The Meaning of ‘Mean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