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문학이거나 혹은 아니거나

구덩이 ㅣ 창비청소년문학 2
루이스 새커 지음, 김영선 옮김 / 창비 / 2007년 8월

' 청소년문학'. 어쩌면 꽤 위험한(?) 뉘앙스의 꼬리표일지도 모르겠다. 왠지 성인이 읽기엔 유치할 것 같기도 하고, 조금은 교육적일 것만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며, 청개구리 근성이 있는 편인 광서방같은 사람들에게는 약간의 거부감이 들기도 한다. 청소년 시절의 나는 똑같은 책이 '청소년' 버전과 '성인' 버전으로 나와있는 경우 유독 '성인' 버전을 골라서 읽기도 했으니까(왠지 18금스러운 이야기지만, 저런 경우 청소년버전은 내용을 순화하고 줄이고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마치 teen버전 게임스럽달까).
하지만, 저런 '청소년' 혹은 '어린이'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는 책들 중에서는 가끔씩 어린이나 청소년 뿐만 아니라 성인이 읽어도 충분한 그런 작품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해리포터'나 '나르니아전기'같은 책들은 분명 그런 매력을 갖고 있는 책들의 예로 충분할 것 같다.
그리고 이 책, '구덩이'. '창비청소년문학'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는 이 책 역시 그렇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책, 물건이다.

스 탠리 옐네츠(Stanley Yelnats). 앞으로 읽어도, 뒤로 읽어도 똑같은 재미있는 이름을 가진 주인공은, '적절하지 않은 시간에, 적절하지 않은 장소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감옥 대신 '초록호수 캠프'라는 발랄한(?) 이름의 강제노동소에 끌려와 뙤악볕 아래에서 끝없이 구덩이를 파게 된다.

엘리야 옐네츠. 한 여인을 미치도록 사랑했던 그. 하지만 그녀를 얻기 위해서는 튼실한 돼지 한 마리를 가져와야 하는 상황에 빠졌고... 점장이인 제로니 할머니의 도움으로 돼지를 얻게 되지만, 그 대신 해주기로한 약속 하나를 지키지 않는다.

너무나 착하고 성실한 흑인 양파장수 쌤(그리고 양파를 너무나 사랑하는). 착하고 현명하며 아름다운 백인 여선생님 케이트. 그들 둘은 서로를 사랑하게 되지만 인종문제에 의해 쌤은 살해당하고 이에 분노한 케이트는 '키스하는 케이트 버로우'라는 이름의 악명높은 무법자가 된다.

이상의 세 가지 이야기는 이 '구덩이'라는 소설을 구성하고 있는 세 개의 큰 이야기 줄기다. 이 전혀 상관없는 듯한 세 가지 이야기는 작가 루이스 쌔커의 뛰어난 구성력에 의해 점점 하나로 모여간다. 각각의 이야기 자체가 재미있기도 하거니와 서로의 접합점을 찾기 위한 수많은 암시와 복선들은 읽어나갈수록 점점 더 큰 재미요소로 작용하며, 결국 후반부로 가서는 그 접합선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매끈한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어진다.
전혀 다른 시기, 전혀 다른 장소에서 벌어진 세 가지 이야기가 서로 뛰어난 점착력으로 하나가 되어가는 모습은 그야말로 기술적이나, 구성력이란 면에서 놀라운 수준이며 그렇기에 이런 접합점이 하나씩 발견되면서 그 흡입력은 점점 높아지고 나도 모르게 단번에 읽게 된다. 그러면서 앞부분에 나왔던 그 접합점에 대한 복선을 다시 한 번 발견하기 위해 앞 페이지를 뒤적이게 되고.

이 책은 분명 '청소년문학'이다. 글 자체도 매우 읽기 쉽고, 성장소설로서 청소년에게 줄 수 있는 다양한 교훈도 담겨있다. 항상 남만 탓하던(정확히는 '아무짝에도-쓸모없고-지저분하고-냄새-풀풀-나는-돼지도둑-고조할아버지') 주인공이 점차 책임의식과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갖게 되기도 하며, 인종 문제 등의 사회 비판적인 요소들도 눈에 띈다.
하지만, 하나하나의 이야기가 갖는 높은 재미를 기반으로, 그 이야기들이 서로와 융합하며 생겨나는 추리소설적인 재미, 소품 하나하나 의미없는 것이 없을 정도로 치밀한 구성력 등은 결코 청소년에게만 빼앗길(?) 수 없는 그런 보기 드문 재미였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런 책이 진정한 '청소년 문학'이 아닐까?

여담이지만, 이 책을 통해 관심을 갖게 된 '창비청소년문학' 시리즈. 앞으로도 꽤 기대된다. 장르문학 전문잡지 '판타스틱'의 박상준 편집장님이 엮는 SF 단편집도 눈에 띄는 등, 꽤 다양한 장르의 다양한 작품이 발간 예정이다.

초판 한정으로 들어있는 '구덩이' 스티커. 어쩌면 '이게 뭐야!'라고 할만한, 이것만으로는 절대 책의 정체(?)를 알 수 없을만한 그런 소재들이지만, 책을 읽고 나면 이 것 하나하나가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지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