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나운 애착»은 1987년, 그러니까 41년 전에 출간된 책입니다. 이미 41년 전에 40대 초반이었던 작가와 ‘엄마’의 삶의 이야기입니다. 더불어 ‘엄마’의 이웃들의 삶도 담겨있습니다. 엄마와 나의 삶을 기억하는 책입니다.

이 책을 읽고, 비비언 고닉 작가의 다른 책들도 찾아봤는데, 어느 신문에 실린 작가의 사진이 멋있습니다. 2024년, 89세 작가의 사진은 전혀 그렇게 보이질 않습니다. 형형한 눈빛. (물론 몇 년 쯤 전에 찍은 사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끝나지 않은 일»을 읽고 싶어졌습니다. 평생 책을 읽고 글을 써온 작가가 인생 초년에 읽었던 책을 다시 읽으면서 쓴 글인 것 같습니다.

“성장기를 함께한 책들을 펼쳐 들고 그제야 처음으로 보았다. 그 책들에 나오는 대다수 여자가 피도 살도 없는 뻣뻣한 막대기이고, 오로지 주인공의 운명에 좌절을 안기거나 행운을 선사하기 위해 등장할 뿐이라는 걸.” “독자로 살아온 일평생 나는 그 남자들과 나를 동일시해왔던 것이다.”

- «끝나지 않은 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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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맘대로 하든지." 나하는 짓이 어찌나 마음에 안 드는지 목소리까지 떨린다. 엄마의 오만, 엄마의 경멸. 엄마에게서 결코 떨어지지 않을 기질. 절대적으로 엄마 곁에 머물러 있을 것들. 언어의 상징이요 존재의 숙어로 이것들이야말로 엄마의 자아를 완성한다고 믿는다. 타인을 경멸하고 무시하는 건 불쾌한 일에서 헤어나는 엄마만의 방식, 당신과 타인을 분리하는 방법, 옳고 그름을 아는 방법, 당신의 주장이 잘못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방식이다. 그 순간 엄마의 삶이 이해되면서 묵직한 돌이 가슴을 짓누르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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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비언 고닉 작가는 이 책을 왜 쓰게 됐을까, 궁금했습니다.

그날 저녁 내내 슬프고 고요하고 무거운 무언가가 줄곧 엄마에게 내려앉아 있는 것만 같았다. 오늘 밤 엄마는 무척 어여쁘게 보인다. 결이 고운 흰머리, 보드라운 피부, 그 자체로 완벽한 작품처럼 보이는 주름지고 지친 노인의 얼굴. 하지만 지난 세월은 엄마를 엄마만의 세계로 끌고 가고 눈에는 다시 그 혼란이 찾아온다. 엄마를 놓아주지 않는 저 끈질긴 삶이라는 혼란.

"인생이 연기처럼 사라지네." 엄마는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저미는 듯해 그 고통을 감히 느낄 수조차 없을 것 같다. "정말 그렇네." 하는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제대로 살지도 않았는데. 세월만 가버려."

엄마의 부드러운 얼굴이 결심이라도 선 듯 확고하고 단단해진다. 나를 보더니 강철 같은 목소리로, 이디시어로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네가 다 써봐라. 처음부터 끝까지, 잃어버린 걸 다 써야 해."

우리는 말없이 앉아 있다. 우리는 끈끈하게 얽힌 혈육이 아니다. 살면서 놓친 그 모든 것과 연기 같은 인생을 그저 바라보는 두 여자다. 엄마는 젊어 보이지도 늙어 보이지도 않고 그저 당신이 목도하고 있는 바, 그 혹독한 진실에 깊이 침윤되어 있다. 엄마한테 내가 어떻게 보일는지는 나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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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티칼리지에 다니는 학생 대부분이 그랬을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지하철을 타고 공강 시간이면 익히 아는 거리를 걷고 매일 저녁 익히 아는 동네로 돌아가 고등학교 때 친구와 만난 다음 자던 침대로 들어가서 잠을 잔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도 모르게 머릿속 세상 안에서 살아가기 시작했다. 머리가 읽고 말하고 생각하는 방식은 부모나 집에서의 생활, 그 익숙한 거리의 삶과 철저하게 멀어지고 있었다. 우리는 속으로 숨기는 생각과 겉으로 표현하는 생각의 차이를 처음 소개받았고 하나씩 익혀 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각자의 집안에서 불순분자가 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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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성당이 가톨릭 교회였다면
“단상”은 “제대”가 아닐까,
“성찬을 하는 건”은 “영성체를 하는 건” 혹은 “성체를 모시는 건”이 아닐까 합니다.

중독자가 다시 중독물을 찾듯이 성당찾기는 몇 번씩 반복되곤 했으나 단상 가까이 가서 무릎을 꿇는다거나 성찬을 하는 건 자신의 권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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