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유튜브 채널 <괴테할머니TV>를 보다가 괴테의 배움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전영애 교수님이 안 계셨더라면 알기 어려웠을 게 분명합니다. 괴테의 자서전에는 26세까지의 삶이 들어있다고 합니다. 전 교수님은 여기에 담겨있는 괴테의 배움에 대해 말씀해주셨어요. 무엇을 하나 접하고 어떤 사건을 겪으면 그것들을 어떻게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지에 대해서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도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 괴테가 상대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고 나서,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상대를 억지로 데리고 올 수도 없고, 연인을 죽일 수도 없고, 자살을 할 수도 없어서 방에 틀어박혀서 써내려간 소설이라고 합니다. 현실의 자신은 연애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마음과 머리는 극복을 했다구요.

<손석희의 질문들>을 봤습니다. 최민식 배우와 황석영 작가가 나오는 회차를 봤습니다.

영화와 책을 좋아합니다. 아주 어릴 때부터 나의 구성 요소의 특정 비율을 이루고 있습니다. 꾸준하게 지속하고 있는 행위입니다. 눈 뜨고 씻고 밥 먹고, 출근하는 것 처럼요. 남들과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자신의 삶 속에서 그렇다는 말입니다.

현실을 극복하고 이겨내기 위해 연기를 하고 글을 쓰는 것은 아닐지. 미치지 않고 품위를 지키며 살기 위해 예술작품에 온갖 기괴한 것들이 들어가 있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그걸 쓰거나 만드는 사람들 뿐 아니라 보는 사람들에게도 다른 가능성을 선택할 경우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 지, 그 끝은 어떻게 될지를 대신 알려주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일부터는 좀 더 관찰 모드로 돌아서서, 너무 빠르지 않게 반응하며 일을 하다가, 그래도 해소되지 않는 게 남는다면 글로 옮겨봐야겠습니다.

오늘에서야 픽션의 힘 혹은 효용이라는 걸 알게 된 것 같은 기분입니다. ’모두 나처럼 생각하고 행동할 거야‘라는 비극을 뛰어넘을 수 있는 효용 말입니다. 상대의 말과 행동을 상대의 프리즘으로 이해할 수 있고, 그것에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반응할지 정할 수 있는 효용 말입니다.

* 그러니까 글쓰기는 살기 위해 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입니다.
살기 위해서는, 나답게 살기 위해서는,
한 번 뿐인 삶을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글을 써야합니다.

** 각자가 포착한 세상, 그것들이 이어지는 서사.
등장인물들이 살아내는 방식.
픽션의 힘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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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소개된 책들도 제목을 모르거나
못 읽은 책이 대부분입니다.

두루 읽으려고 하지만
어쩔 수 없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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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봤습니다.
소설이 원작인 줄 몰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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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세 살의 삶을 이렇게 꽉 채워서 살고
중요한 의사결정을 내려왔다니...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에겐 너무 멀게 느껴집니다.

1918년, 서른 세 살의 김 알렉산드라가
마지막 변론에서 했던 말이 기억에 남습니다.

“만약 내가 당신의 말대로
여성으로서 자신의 범죄를 뉘우친다면,
나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배신하고
전 세계 여성 앞에
죄를 범하게 될 것이다.”

”내 눈을 천으로 가리지 마라.
나는 죽음을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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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워서 나중에 다시 읽어야겠어요.

읽다가 졸다가 해도 되는 휴가 중이 적당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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