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휴가 중에 평소 가보고 싶던 파주 지혜의 숲에 갔어. 한참 높은 천장과 모든 벽면을 빼곡히 채운 책장. 아마 찾는 모든 책이 있을 듯한 규모의 도서관에서 이왕이면 한 권을 다 읽고 기억하고 싶어서 얇은거 얇은거 찾다가 선택한 인간실격. 에곤쉴래가 표지에 있는 게 싫었는데 읽고 나니 에곤쉴레와 인간실격의 이미지가 참 많이 닮아있다. 이제야 이해가 가네. 서문에 묘사되던 세 장의 사진 중 하나를 그럴싸하게 그림으로 옮겨내어 표지에 썼어도 좋았을 것 같은데. 어쨌든 얇아서 읽었고 지혜의 숲에서 90p까지 읽었고 이후에 잠깐 텀이 생겼었다가 오빠가 빌려줘서 어제 다 읽었어. 재미있다고 말하면 안 될 것 같은데 정말이지 1초도 멈추지 않고 보고 싶은 책이고.. 다 읽고 오늘 오빠한테 주려고 오늘 가지고 나왔는데 출근길 버스에서 다시 첫 장부터 중간까지 읽었을 정도로 이 책의 내용과 문장과 분위기가 좋아. 언제고 다시 읽고 싶어질거야.
서문에 세장의 사진 속 남자에 대한 인상이 나와. 익살 스럽게 웃고 있어 둔한 사람이라면 귀엽다 미남이다 하고 지나치겠지만 미추에 감식안이 있는 사람이라면 기분 나쁘다며 사진을 치울 것이라는. 그 사진 속 남자인 요조의 독백으로 이루어진 그의 삶 이야기야. 도무지 인간의 행동과 감정에 대한 이해가 되지 않아 인간답게 보이려 어릴적부터 안간힘을 써온 공포로 가득찬 삶. 망상과 겁이 많지만 수려한 외모에 절제된(혹은 없는) 감정 덕분에 본인이 겁내는 모든 사람이 사랑하는 남자 요조.
발췌가 좀 많은데 어느 페이지를 램점으로 펼쳐도 아마 옮겨적고 싶을거다.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저는 인간의 삶이라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여자는 자기가 먼저 유인했다가도 내치고, 또 남이 있는 곳에서는 저를 경멸하고 함부로 대하다가고 아무도 없으면 꼭 끌어안고, 죽은 것처럼 깊이 잠들고. 여자란 잠자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닐까 등등.
˝어디 좀 보여줘 봐요.˝ 죽어도 안 보고 싶은 마음으로 이렇게 말하면 아이 싫어. 어머나 싫어요 하면서 좋아하는 꼴이라니. 정말 역겹고 흥이 깨질 뿐입니다.
기뻐하며 일어섭니다. 심부름을 시킨다는 것은 결코 여자를 실망시키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여자를 기쁘게 하는 일이라는 사실 또한 저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돈 떨어지는 날이 인연 끊어지는 날`이라는 속담은 말이야. 세상에서 하는 해석처럼 돈이 떨어지면 여자한테 버림받는다는 뜻이 아니란 말이야. 남자가 돈이 떨어지면 자연히 의기소침해지고 못쓰게 되고 웃는 소리에도 힘이 없어지고 괜히 비뚤어지거나 해서 말이야. 끝내는 자포자기해져서 남자 쪽에서 여자를 버리게 되거든˝
아아, 인간은 서로를 전혀 모릅니다. 완전히 잘못 알고 있으면서도 둘도 없는 친구라고 평생 믿고 지내다가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상대방이 죽으면 울면서 조사 따위를 읽는 건 아닐까요.
이것은 제가 발명한 놀이로, 명사에는 모두 남성 명사, 여성 명사, 중성 명사 등의 구별이 있는데 그렇다면 희극 명사, 비극 명사의 구별도 있어야 마땅하다. 예컨대 증기선과 기차는 둘 다 비극 명사고 전철과 버스는 둘 다 희극 명사다. 왜 그런지를 이해 못하는 자는 예술을 논할 자격이 없다. 희극에 하나라도 비극 명사를 삽입하는 극작가는 이미 그것만으로도 낙제, 비극의 경우도 똑같다는 논법입니다.
요시코가 더럽혀졌다는 사실보다도 요시코의 신뢰가 더럽혀졌다는 사실이 그 뒤에도 오래오래, 저에게는 살아갈 수 없을 만큼 큰 고뇌의 씨앗이 되었습니다.(중략)요시코는 그날 밤부터 제 일비일소에조차 신경을 쓰게 되었습니다.
서양 글씨를 못 읽기 때문에 그것으로 됐다고 생각했던 겁니다.(너한테는 죄가없어)
죽고 싶다. 숫제 죽고 싶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어. 무슨 짓을 해도, 무얼 해도 잘못될 뿐이다. 창피에 창피를 더할 뿐이다.
제가 지금까지 아비규환으로 살아온 소위 `인간`의 세계에서 단 한 가지 진리처럼 느껴지는 것은 그것뿐입니다. 모든 것은 그저 지나갈 뿐입니다.
그리고 나를 충격에 빠트렸던 인간실격에 대한 소개글
우울증을 유발하는 소설로 잘 알려진 이 책은 저자 다자이 오사무가 자살을 앞두고 써내려간 유서이며 자신의 일생을 압축한 자서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간 세강에 적응하지 못하고 한평생을 공포와 후회 속에서 살다가 자신에게 인간실격을 선언하고 자취를 감춘 나마 요조. 독자들은 처음엔 그를 미워하다가 동정하다가 마지막에는 독자 자신과 동일시하게 되죠. 차마 끝까지 읽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60% 정도를 읽은 상태에서 저 소개글을 우연히 인스타그램에서 봤는데 난 저 글을 읽기 전까지 우울한 기운을 아예 감지하지 못했거든. 요조가 불행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어. 가난하고 굶주리고 혹은 잇따른 실패를 겪는다는지 하면 우울하겠다 살기 싫겠다 싶었을텐데 내 눈에 요조는 비소 띄고 세상을 관찰하는 천재로 보였거든. 너무 영리하다보니 시니컬해서 그 사이에 껴들기 싫은 독고다이 캐릭터라고 생각했어. 근데 아니구나. 진심으로 세상 속에 흡수될래야 될 수 없는 사람이었나봐. 이 책을 다 읽을 쯤엔 그 우울함을 느꼈고 동정했고 슬펐어(저 소개글 영향은 아니라고 믿지만 장담은 못하겠다). 안쓰러운 마음에 그럼 그만 죽어버리지 왜. 하는 마음이 드는데 정말 저걸 쓰고 자살했구나. 아 마음 아프다. 속하지 못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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