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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자기만의 방 - 문예 세계문학선 090 ㅣ 문예 세계문학선 90
버지니아 울프 지음, 정윤조 옮김 / 문예출판사 / 2013년 4월
평점 :
소설만 파고 있었는데 우연히 에세이가 얻어걸렸다. 읽기 전까진 자기만의 방을 소설로 알고 있었다. 짧고 힘 있는 대화체의 에세이를 읽고 나니 인상깊은 테드 연설 한 편을 본 듯한 기분이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버지니아 울프가 소설가로서 의심할 바 없이 성공을 한 후 여대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여성과 문학을 주제로 한 몇 차례의 강연들을 정리하여 발간한 책이라고 한다.
내 성향상 어투와 감성이 다소 오글오글한 면이 없지 않았는데, 그것만 극복해내면 남녀 불평등이 여성 문학에 끼친 영향에 대한 차분한 추적과 그 나름의 논거 그리고 한 유명 소설가의 문학 창작에 대한 철학을 쉽고 재밌게 이해할 수 있어 페미니즘 문학의 입문으로 읽으면 좋을 책이다.
페미니즘이 몇 해 전부터 한참 핫한데 그것이 여성우월주의 혹은 남성혐오로 오해 받고 때로는 변질되는 것이 지켜보기 안타깝고 답답할 때가 많다. 두 개의 성이 같은 선상에서 시작할 수 있도록 의식 개선을 하자는 단순 명료한 목표에 이해 단계부터 난잡하고 혼란하게 되는 걸 보며 얼마나 깊이 뒤틀려있던 건가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된다.
때로는 아니 지금까지도 여성성을 무기로 나 좋은 것을 취해온 입장으로 감히 페미니스트 흉내를 낼 자격도 없는 나이지만, 옳은 페미니즘이 매너로 널리 인식되어가고 나쁜 페미니스트가 언론과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며, 말 한마디 ‘전’처럼 했다가 몰매 맞는 상황이 갖춰진 요즘이 흥미롭고 흥분된다. 나쁜 것은 교육되고 옳은 것은 안착될 것이니 이 모든 혼란이 고맙기만 하다. 응원한다 모든 옳고 그른 페미니스트들.
나부터 좀 바뀌어야할텐데 왜 이렇게 편하게만 살고 싶을까.
발췌
국물이 얼마나 맑은지 그릇 바닥에 있는 무늬가 다 보일 정도였으니까요. 하지만 실제로는 무늬가 보이지 않았어요. 원래 아무런 무늬도 없는 그릇이었거든요.
진리는 제 손가락 사이로 모두 빠져 나갔어요. 한방울도 남김 없이 말이에요.
그들이 받은 교육은 어떤 측면에서는 제가 받은 교육 만큼이나 그릇된 것이었지요.
저는 문을 열며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보호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사라지면 무슨 일이든지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천재성을 타고난 키츠와 플로베르 같은 남성들은 세상의 무관심이 매우 견디기 힘들다고 토로 했지만, 여성은 단순한 무관심이 아닌 적의에 맞서야 했어요.
‘ 여자가 작곡을 하는 건 개가 뒷 발로 걸어 다니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잘 하지는 못하지만, 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놀랍기는 합니다.’
우리에 기억에서 잊힌 옛 시인들이 앞서 길을 닦고 자연 상태인 언어의 야만성을 길들이지 않았다면 초서도 없었을지도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걸작은 외딴 곳에서 홀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에 걸쳐 사회 전체가 공유한 생각의 결과물이며, 그 하나의 목소리 속에는 집단의 경험이 녹아 있으니까요.
-하이라이트 쳐놓은 문장을 아이폰 음성인식 기능으로 블로그에 옮겨 쓰느라 위 문장을 소리내 읽는데 읽다 울컥했다. 우리의 모든 것이 과거의 누군가들과 연결되어있다는 생각을 하면 언제나 묘한 전율이 흐른다.
존재하는 떨림, 즉 분노에 주목하면 그녀가 자신의 재능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깨달을 겁니다. 그녀의 책들은 비틀거리고 변형되고 말 거예요. 차분하게 써야 할 때 분노에 사로잡혀 쓸 거예요. 슬기롭게 써야 할 때 어리석게 쓰고 말 거예요. 작중 인물에 대해서 써야 할 때 자기 자신에 대해 쓸 거예요.
책을 읽을 때 우리는 모든 구절과 장면 하나 하나를 빛을 비추어가며 꼼꼼히 들여다보는데, 이상하게 들릴지는 몰라도, 그건 아마 대자연이 우리 안에 소설가의 성실과 불성실 구분할 수 있는 빛을 넣어두었기 때문일 거예요. 아니, 어쩌면 잠시 이성을 잃은 대자연이 위대한 예술가들만이 확인해 줄 수 있는 벽화를, 비범한 재능의 불빛을 비춰야 보이는 스케치를 우리 마음에 벽에 투명한 잉크로 그려놓았기 때문인 지도 몰라요. 누군가가 그 마음 속 벽화를 밖으로 드러내서 생명력을 부여하면, 다른 누군가는 환희에 사로잡혀 외치지요. 이건 내가 항상 느끼고, 알고, 바라던 바로 그것이잖아!
-재미있는 상상이다. 정말이지 진정성을 캐치하는 감각은 언제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된 걸까?
“아이들을 전혀 원치 않는 다면 여성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을 것 “ 존랭던 데이비스 <여성사 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