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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슴도치의 우아함
뮈리엘 바르베리 지음, 김관오 옮김 / 아르테 / 200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고슴도치의 우아함]
정말 오래전에 대학생 때에 샀는데 초반 읽다가 어려워서 덮었었다. 그래서 거의 10년 가까이 내 방 책장에 있었는데도 고슴도치가 나오는지 안나오는지도 몰랐다. 그 후 어디선가 철학적인 고민을 담은 책이라는 팁을 보고 한번 마음잡고 읽어야겠다 벼르다 이제 읽었다. 그리고 결론은 십점만점에 십저엄(팔을 위로 아래로 들썩이며)! 자꾸 올해의 책 거려서 점점 신뢰가 없어지는 것 같은데 거의 그 수준로 좋게 읽었다.
응당 수위아줌마가 갖춰야하는 태도(게으르고 티비 연속극을 즐겨보고 슬리퍼를 질질 끌며 느릿하게 걷는)를 연기하며 이웃을 속이고 있는 르네. 하지만 밖으로 흘러나오는 티비 소리는 훼이크일 뿐이고 사실 그 수위 아줌마 르네는 정돈된 서재에 앉아 고급 과자에 티를 마시며 오만과 편견을 읽는 교양인이다. 그리고 또 다른 주인공은 르네가 수위로 있는 건물에 사는 열두살 짜리 소녀로, 너무 똑똑한 탓에 현실의 부조리와 부모 자매를 포함한 부자들의 역겨운 위선에 질려 열세살이 되는 생일에 방화와 자살을 계획 중이다. 이 둘의 타인 관찰과 삶과 세상에 대한 고찰이 번갈아가며 다뤄진다.
진정한 교양인의 가짜 교양인 후려치기가 너무 공감되기도 하고 재치있어서 키득대며 읽었다. 병신들 간파 잘하는 똘똘이들의 예리한 시선 너무 좋아한다.
읽으면서 문장이 쏙쏙 들어오지 않아서 10년 전에 이래서 포기했었구나 싶었다. 딱히 다루고 있는 이야기가 어려워서라기보단 아무래도 실체가 없는 사상에 대한 고민을 혼자 쏟아내는 형식이다보니 누구에게 들려주는 정돈된 주장이 아니라 스스로 자연스레 하는 생각이기 때문에 당연히 정돈도 되지 않은 문장이 쉴 새 없이 나와서 산만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어쩌면 번역의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난 아르테 출판사 것으로 읽었는데 문학동네 것으로도 읽어보고싶다.
그렇다할 줄거리가 없이 독특한 두 캐릭터의 독백이 이어지다가 후반부에 정말 의외로 로맨스와 우정과 감동이 막 튀어나오다가 마지막 20페이지에서 너무 슬퍼서 정말 오랜만에 책 읽다가 엉엉 울었다. 네 오늘 저녁 8시 교대 폴바셋에서 울던 애 저예요. 그 마지막 20페이지 울며 읽으면서 작가도 이거 쓰면서 엄청 울었겠다 싶었다.
고슴도치의 우아함을 읽으면 특별할 일 없어 보이는 개인의 삶도 각기 다른 향기를 갖고 있고 사뭇 지루하게 느껴지던 세상도 조금만 살펴보면 재밌는 장면 투성이구나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한번의 사랑과 한번의 우정을 위해 사는 삶 같기도 하고. 늦은 때라는 것도, 우울할 일이라는 것도 없고 언제 올지 모르는 즐거운 순간을 기다리는게 삶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발췌
발과 슬리퍼는 너무 잘 어울려서 오직 바게트 빵과 베레모의 찰떡궁합만이 그에 맞설 상투적 이미지일 것이다.
세계는 도달할 수 없는 현실이므로 알려고 애써봐야 소용없다. 우리는 세계에 대해 무얼 아는가? 전혀 모른다. 모든 앎은 반성적 의식이 스스로하는 자기 탐색일 뿐이기 때문에 이제 세계를 악마에게 던져주어도 좋다.
카피와 신문 대 차와 망가.
우아함과 매력 대 어른들의 권력 놀이의 슬픈 공격성
학교는 날 태어나게 했기 때문에, 나는 학교의 호의에 빚졌고, 얌전하게 문명화된 인간이 되어가면서 나는 선생님들의 의도에 복종했다.
입 안에서 씹는 방식을 바꾸는 것은 새로운 요리를 맛보는 것과 같다.
여러분, 친구는 하나만 사귀세요. 하지만 잘 선택하세요.
저녁 파티에서 마약에 빠지고 성관계를 가지면 여러분이 어른으로 전격 임명될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은, 변장하면 인디언이 된다고 믿는 것과 똑같다. 어른들의 습관 중에서 제일 끔찍한 것들을 흉내 내면서 어른이 되고 싶어 한다는 것은 어쨌든 웃기는 인생관이다.
내 삶을 내 부모의 정원이 아닌 다른 정원으로 가꿀 수 있을까?
나는 과연 두 존재 사이에 취향과 심리적 흐름에서 이런 일치가 있을 수 있을까?라고 생각해봤지만 믿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