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고 반가운 민음사 문학전집! 모래의 여자가 마지막이었던가. 파스칼의 팡세 읽다 GG치고 몇 권의 소설을 떠돌다가 아 좀 좋은 책 좀 읽자! 하고 아껴뒀던 삶의 한가운데를 꺼냈다. 좋은 책인 건 현이 리뷰를 보고 알았다. 스포 때문에 읽지 않았지만 아마 현이가 좋아했었던 듯? 일주일 정도 들고 있었다. 요즘은 집 오면 잠자기 바빠서 책을 빨리 못 읽는다. 출퇴근 때 1번 환승하는 것도 무시 못하는 듯. 읽힐 법 하면 갈아타야하고 다시 읽힐 법 하면 내려야해. 어쨌든 오늘 끝냈다. 니나라는 여자가 그녀의 열 살 많은 언니를 불러. 나이 차도 크고 성향도 엄청 달랐던 자매여서 도통 가까운 적이 없었고 언니가 결혼까지 하면서 남보다도 못할만큼 소식도 모르고 살던 사이였는데 먼저 언니를 필요로하는 동생의 갑작스런 부름에 언니는 의아함과 반가움을 안고 한달음에 동생 니나에게 달려가. 현재 생활을 다 정리하고 떠나기로 결정했다며 떠나기 전 하루만 같이 있어 달라는 요구에 엉겹결에 둘이 평생해보지 않은 긴 대화를 긴 시간 동안 나누게 돼. 이 대화가 소설의 전체이고 언니가 관찰자 혹은 관객같은 역할로 니나의 이야기를 전해줘. 그리고 그 대화는 니나를 18년 동안 끊임없이 아프게 사랑한 슈타인박사의 일기 혹은 편지를 순차적으로 읽어내려가며 진행돼. 형식이 독특하다. 언니의 관점은 전혀 중요하지 않은데 그 일반적인 시선이란 게 필요해서 앉혀놓은 듯해. 슈타인과 니나만이 중앙에 있고 저 구석에 상황을 지켜보며 하나하나에 반응하는 관객이 있는 무대 같아.니나 부슈만이라는 여자 주인공 캐릭터가 독일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고 책 표지에 소개가 되어있던데 음.... 스스로 강인하고 빛나면서도 타인으로 하여금 보호본능을 자아내는 빈틈없이 매력있는 캐릭터야. 어릴적부터 쭉 많은 남자들의 흠모의 대상인 여자인데 정작 본인은 생각이 다른 곳에 가있어. 정치적 신념이나 커리어에도 꽤 집중하지만 무엇보다 그녀가 몰두한 것은 `삶`이야. 본인이 주인공인 인생이 아니고 모든 사람에게 통용되는 그냥 살아가는 것 `삶`. 니나가 필요로 하는 게 없기 때문에 줄 수도 없어서 그녀를 갖는 건 불가능해. 그냥 멀지 않은 곳에서 찾으면 눈에 띌 정도의 거리에서 서성이다가 니나가 부를 때 슥 나타나서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을 해주고 슥 떠나고 다시 또 나가와서 도움을 주고 또 한발치 물러서고 그렇게 18년을 사랑한 슈타인의 순애보가 아마 이 소설의 줄거리겠지.읽으면서 의아했어. 진짜 이런 걸 사랑이라고 말하는거야? 그리고 이런 종류의 사랑이 존재하기는 하는거야? 남녀간의 사랑은 둘이 즐거우라고 하는 건데 니나는 다른 곳을 보며 혼자 흥얼거리고 있고 슈타인은 그런 니나만 뚫어지 듯 쳐다보며 마음 졸이고 기뻐하고 분노하고 그게 뭐야. 남자는 정말 못 가졌을 때의 아쉬움을 이거야 말로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변태바보들인건가. 아이리쉬 머독의 `바다여 바다여`안에서 어릴적 사랑했던 여자에게 삶을 바칠 듯 집착하는 남자보면서 히힉 이게 뭐야 대체....했거든. 엇? 그러고 보니 둘다 여성작가다. 어멋 이거 혹시 여자들의 판타지인가. `너의 모습이 어떻든 난 너만 바라봐.` 이런건가... 이상해... 좀! 좋으면! 손 잡고 홍홍대고! 뽀뽀 쪽 하고!! 청혼하고! 눈물 한 방울 흘리고! 서로 어깨도 주물러주고! 섭섭하다고 가슴팍도 치며! 그냥 그렇게 즐겁고 소소하게 늙어가면 안되는거야? 왜 매번 그 역할을 하는 주인공의 본처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인간으로 만들어버리는 거야? 난 슈타인을 희망고문에 벌떡벌떡 놀아난 바보 아저씨라고 하겠어. 어디 사랑이야 그게. 집착이고 병이지. 그리고 니나. 이게 진짜 매력있다고? 위에 빈틈없이 매력있는 캐릭터라고했지만 그건 뭐 소설 속 캐릭터로서의 평가고 사실... 되게 피곤한 스타일 같지 않아? 중2병같아. 왜 안정적일 수 있는 상황에 아무 문제도 없는 상황에 이건 아니야! 하고 제동을 걸고 떠나고 등장하기를 반복하는 거지? 혼자 특별한 척하는거 진짜 꼴불견이야. 나는 이걸 사랑이라고 부르지 않겠네. 그리고 내가 열심히 먹이고 만져주고 응원해주고 함께 살아온 남자가 중2병 걸린 여전사에게 홀려있다면 뺨때기 세 대 세게 때리고 그 관계에서 빠져줄거야. 어딜 감히. 그.럼.에.도.불.구.하.고. 나도 여자인지라 슈타인의 사랑(혹은 니나에 대한 몰입)이 변태적이든 뭐든 니나가 받은 그 한결같고 집요한 관심은 부럽다. 그리고 보고싶은 대로만 보는 게 아니고 진짜 니나에 대한 이해가 잘되어있는 남자라 그 단점도 사랑스런 너의 것이라는 그 시선이 부럽다. 나도 누가 내 표정, 행동거지, 삶의 변화 하나하나 글에 적어가며 날 관찰해주면 좋겠다. 맨날 나 스스로 관찰하는데 질린다. 나 좋다는 남자들도 막상 만나보면 내 시큰둥한 표정은 안중에도 없이 지들 이야기만하고 있고.... 난 내 이야기 들려주고싶은데. 발췌여자 형제들은 서로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든지 혹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든지 둘 중 하나다.그녀는, 내 생각인데, 거짓말하지 않고도 세상을 살 수 있다는 것을 본인 자신은 의식하지 못하면서도 몸으로 보여주는 사람이오.만약 어떤 사람이 인생의 의미에 대해 묻는다면 그는 그 의미를 결코 알게 되지 못할 거예요.사랑이란 누군가에게 속해 있다는 감정이야. 오로지, 그리고 철저하게 말야.나는 아직 살아 있었어. 그리고 나는 삶 속으로 다시 내던져졌던 거야.내 생각에 사람들이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계속해서 생기에 차 있을 때야. 그리고 마치 미친 자가 자기의 고정 관념에 몰두하듯이 무언가에 몰두하고 있을 때야.내 시가 형편없다면, 정말로 형편없어서 형식뿐만 아니라 내용에도 감상적이고 싸구려라면, 나 자신의 내부에도 감상벽과 싸구려 경향이 있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거야.그녀는 집시 같은 데가 있었다. 그러므로 그녀의 삶은 잠정적이었다.우리는 위험과 위험 사이를 조용하고 조심스럽게 살고 있다고. 특히 사랑은 훨씬 더 그렇지.아무도 공적에 따라 보답을 받지 못한다. 아무도 한 인간의 노력에 주의하지 않는다.전혀 없는 것보다는 그것을 잃고 슬퍼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처음으로 나는 슬픔도 재산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지금 내 나이는 마흔여덟이다.친구여, 여자들은 우리를 항상 실망시킨다네. 그러나 우리도 여자들을 실망시킨다네. 진정한 결혼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네. 체념만 있을 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