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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하녀의 일기
옥타브 미르보 지음, 이재형 옮김 / 책세상 / 2015년 8월
평점 :
지난번 `세일즈맨의 죽음` 리뷰에 언급한 남자의 본성을 이해할 수 있는 작품들의 반대로 이렇게 여자의 본성을 이해할 수 있는 책도 많지는 않을거야. 읽으면서 내내 `마감 보바리`같다는 인상을 받았어. 여자의 욕망과 감정에 솔직한 것. 특유의 변덕스러움을 굳이 부끄러워하지 않고 감정의 기복을 당연하게 기록하는 것도.
일기처럼 끝없이 솔직하게 자잘하게 거침없이 쓰여진 한 여자의 삶을 보며 그 안에 언급된 주변인물들의 부끄럽고 한심하기 짝이없는 `일반적인 여자`의 지저분한 진실을 구경하는 재미가 있어. 물론 화자인 하녀 셀레스틴은 본인 이야기이고 주관이 꼈기 때문에 가장 문제 없는 영리한 여성으로 나와. 그래서 무슨 짓을 한들 다 어느정도 이해가 되고 캐릭터 자체에 애정이 생겨. 아무리 일기 형식이라지만 엄연히 소설인데 본인 변호가 무의식 중에 되고있는 상태라는 것이 재밌다. 본인이 사실 본인도 아닌 것인데 두둔하고 있고 포장하고 있어. 나 역시 내 일기 안에선 제일 괜찮은 사람인걸.
셀레스틴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하녀이지만 니들과 같은 하녀가 아니다. 하는 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도도한 하녀야. 이유는 당연히 훌륭한 외모 때문이고 덕분에 나리들의 예쁨을 받기도 하고 부인들의 관심을 받기도하고. 여성성을 잘 이용해먹어. 그걸 굳이 윤리적으로 변명할 생각 없고 활용할 수 있는 것이 있으니 한다는 식. 그렇다고 창녀도 아니고 본인의 필요나 기분에 따라 정말 내키는대로 하는 식이라서 뭐 나빠보이지 않아. 결국 같은 하녀라고 느낄 법도 한데 그렇게 유난스럽게 구는 것도 아니고 대단한 혜택을 누리는 것도 아니고 같이 고생하고 같은 주인을 모시는데 500페이지 넘게 나오면서 끝까지 고고해. 아.. 발췌 옮기다보니까 저 여자가 행여 여성성을 이용한다고 하더라도 사랑의 감정이 섞일 때 와르르 무너졌던 모습을 봐서 내가 얘를 비난하지 않는거구나. 보통 사람이다. 보통 영리한 여자. 되게 힘든 삶이고 끝도 안보이는 비극적 삶인데 당차고 쿨하고 강해. 행동이 아니고 정신이. 그게 ... 그러지 않으면 끝없이 무너질 환경이라 그런 것 같아. 살기 위해 무반응하는 것.
크게 보면, 간단히 보자면 1900년 프랑스 배경에 부르주아 주인집을 전전하며 일을 하는 하녀의 삶을 보면서 그들이 고발하는 부르주아의 행태와 진실을 볼 수 있어. 파장이 컸을 것으로 예상되는 고발인데 실존인물이 나오지 않으니 ˝어머어머 이게 무슨 당치도 않은 소리야. 교양없이. 남사스럽게.˝ 하고 모른척 아닌척 낯선척 했겠지.
기승전결이 없어서 중간까진 재밌다가 그냥 하루하루의 에피소드와 주인집들의 우스꽝스러움을 조잘대는 느낌이라서 중간 이후부터 속도가 느려졌어. 그래도 고전의 느낌과 셀레스틴의 캐릭터가 좋아서 제대로 끝내고 싶어서 다 읽었네. 반만 읽든 앞에 20%만 읽든 감상은 같았을거야. 스토리도 그랬을거고.
발췌
이 여자는 수다를 떨고 싶은 욕구가 너무나 강한 나머지 자신의 고통도 잊어버렸다. 악의가 천식을 제압한 것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어머니에 관해서는 얻어맞은 기억밖에 없지만, 그 소식을 듣자 마음이 아파져서 울고 또 울었다.
나는 내가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는, 그리고 잘 안 알려진 나의 무언가가 드러나는 것을 시시각각 목격하고 있다는, 말로 표현하기 힘들 만큼 달콤한 기분을 느꼈다.
-사랑을 받을 때. 진정한 관심을 받을 때. 난생 처음 내 영혼을 보고자하는 참사랑을 참탐색자를 만났을 때의 그 달콤한. 지금 내가 자주 느끼는 하루하루 탐색자를 통한 나의 재발견.
나는 이제 더 이상 그가 너무 못생겼다거나 너무 늙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습관은 사물과 존재에 마치 안개처럼 작용한다. 그것은 결국 얼굴윤곽을 조금씩 지우고, 변형된 부분을 희미하게 만든다.
나는 지나칠 정도로 사랑에 약하기 때문에, 지나칠 정도로 사랑을 좋아하기 때문에, 사랑으로부터 그 어떤 이득도 얻어낼 수가 없다.
˝당신은 몸을 함부로 굴렸지요? 그러면 안 돼요, 결단코! 그러나 죄를 저지르기 위해 죄를 저지를 거라면 주인이랑 저지르는 게 낫지요. 주인이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라면요. 혼자서 죄를 저지르거나, 아니면 자기와 똑같은 신분의 남자와 죄를 저지르는 것보다는 그게 낫다는 거지요. 그게 덜 심각하니까. 그러는 게 선하신 신의 감정을 덜 자극하니까. 그리고 아마 주인들은 사면장을 갖고 있을 거예요.˝
-수녀님...말이에요 방구에요?
뼛 속까지 타락한 그녀의 방탕은 명랑하고 천진난만하고 자연스러울 뿐 전혀 혐오스럽지 않았다.
나는 거기서 즐거운 저녁 시간을 보냈다. 울고, 울고, 또 울면서.
무無를 지배할 수도 없고, 허공에 영향을 미칠 수도 없는 법이다.
사랑에 대해서는 결코 깊이 생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사랑이란 얼마나 슬픈 것인지! 사랑에서 남는 게 도대체 뭔가? 우스꽝스러움이, 씁쓸함이 남는다. 혹은 전혀 아무 것도 안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