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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둘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유혜자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하루에 두 권의 책을 끝낼 줄은 몰랐는데. 두 권의 리뷰도 쓸 줄 몰랐고. 자라섬 여행 다녀와서 서울에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는데 편안한 소파 조용한 카페에서 따뜻한 커피가 너무 마시고 싶은거야. 중곡역 난생 처음 가본 중곡역 할리스에 갔는데 지하가 북카페야. 모든 사람들이 소리 죽여 말하고 BGM 죽이고.. 음량도 완벽해. 구비해 놓은 책이 수는 적은데 읽고 싶은 것 투성이. 뭐야 할리스 너. 자주 갈거야. 굳이 그 먼 곳에 자주 가고싶어. 세일즈맨의 죽음 끝내고 리뷰 쓰고 한 시간 정도 더 앉아있고 싶어서 문학 중에 얇고 끌리는 `비둘기`를 집었어. 파트리크 쥐스킨트. 워낙 유명한 작가고 워낙 인상깊은 작가이지. 총 세 권의 책을 쓴 건 오늘 알았는데 `좀머씨 이야기`는 중학생 때 읽고 하도 그 인상이 묘해서 몇 번이나 더 읽었었어. 그리고 `향수`는 고등학생 때 읽었었고 서른이 되어 비둘기로 쥐스킨트 클리어구나. 세 권으로 클리어라니 기분 좋군.
바라는 거라곤 타인과 섞이고 싶지 않고 본인의 의지 안에서 컨트롤되는 소박하고 안정적인 삶을 살고 싶은 오십대 남성의 하루야. 젊을 적 자타의로 인해 겪었던 혼돈, 트러블에서 벗어나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꽤나 만족스러운 삶을 꾸려가고 있던 남자에게 위기가 닥쳐. 바로 비둘기. 자그마하고 가득 찼지만 이 세계에 유일하게 본인이 평온함을 느끼는 집 복도에서 비둘기를 마주쳐. 그 공포스러운 존재로 정돈된 그의 삶이 모두 엉망이 돼.
와. 어떻게 그림자처럼 배경처럼 눈에 들어오지 않는 존재감없는 인물의 하루 동안의 감정을 이렇게 흥미진진하게 쓸 수 있지?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소설은 긴박하고 절박하게 진행됐고 마무리까지 되었다. 고전이라고 불릴 연배가 안되겠지만 고전이라 불리는 명작들의 냄새를 맡았다. 이건 고전급이고 명작급이다.
주인공이 얼마나 난처한지 절망스러운지 그냥 내가 파리로 날아가서 새총으로 비둘기 처리해주고 싶었다. 아무 일도 아닌 것이 누군가에겐 아무 일인 거지. 그 감정의 흐름에서 또 다시 다른 사람의 감정을 감히 내가 판단하고 이해하려 하는 것은 욕심이고 오만임을 깨닫는다.
발췌
이제는 죽음이 아니고는 그 어떤 심각한 일도 결코 일어날 수가 없으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남들이 다 지켜보는 자리에서 엉덩이를 까고, 용변을 볼 수 밖에 없는 사정보다 더 비참한 일이 그의 생각으로는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었다.........부득이하게 보는 용변! 그 말 자체가 이미 모든 괴로움을 다 말해 주고 있었다.
질문 가운데는 어차피 묻는 사람조차 그렇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묻는 것의 내용에 이미 부정적인 의미가 숨겨져 있는 것이 있다. 그리고 말을 꺼내자마자 상대방의 눈을 쳐다보면 아무것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부탁도 있다.
-오늘 가평에서 짜장면 시키려고 5km넘게 떨어진 중화요리집 대여섯 군데에 전화할 때. 이미 거절 당할 것음 알고 있었다
그의 몸 속에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자기 혐오가 모자챙 밖으로 점점 더 험악하게 노려보던 눈을 통하여 그의 몸 밖으로 빠져나가 완벽한 증오가 되어 바깥 세상으로 퍼져 나갔다. 시선 안에 들어오는 것들을 그는 모두 자기 자신에 대한 증오와 추악한 찌꺼기로 덮어씌웠다.
˝내일 자살해야지.˝ 그렇게 말하고 그는 잠 속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