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1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진욱 옮김 / 문학사상사 / 1996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언제나 리뷰 쓸 때 가장 신경쓰는 부분은 소제목. 내가 정하는 이 책의 이미지인데. `분간이 힘든 선과 악 세력에서 싸움 중`이라니. 총 두 권 짜리 소설이라 결국 어떤 소설이 될 것인가에 대한 감이 없다. 말 그대로 돌아가는 상황 파악만 한 상태에서 1권이 끝났다. 정말 흔치 않게 오프라인 서점에서 산 책이야. 약속 시간이 떴는데 마침 그 건물에 반디앤루니스가 있었어. 평소 사고싶던 줄리언 반스 10과 1/2장으로 쓴 세계역사가 품절이었고 읽었지만 소장하고 싶었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도 품절. 어쩌라고....하다가 은희가 `인생책`이라며 추천해줬던 게 생각나서 샀어. 1권을 읽은 지금. 인생책이라고 불리기 엄한데.. 하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확실히 재밌고 하루키는 특별하다.

우선. 판타지야. 프리랜서로 계산사라는 직업을 가진 남자가 소리, 동물뼈, 구기 연구를 하는 박사 일에 고용 돼. 일만 하고 돈만 받음 되는 거였는데 그 연구라는 것이 세상을 바꿔놓을 힘을 가진 것이어서 선이라 느끼지는 정부와 악이라 느껴지는 암흑세계 사이의 추적을 받게 돼. 그런데 그 선과 악의 분간이 상황에 따라 입장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어서 주인공 나름 혼자 싸워내고 있어. 그리고 하루키 대부분의 소설 답게(적어도 내가 읽은 다섯 편의 소설 중에선 상실의 시대를 제외한 네 편이 해당) 연관은 있겠지만 당장 무슨 연관인지 모르겠는 두 이야기가 장 별로 번갈아가며 나와. 그 나머지 이야기는 세계의 끝인데 여긴 정말 존재하지 않는 가상세계이고 그림자와 마음을 잃은 사람들의 세상에서 꿈을 읽는 사내가 주인공이야. 두 이야기의 공통점은 동물 머리뼈. 제목이 길고 거창하다 생각했는데 정말 딱 저 이야기야.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ㅋㅋㅋ

참. 소설이고 참 성의 넘치는 소설이야. 무라카미 하루키는 정말 독특한 작가야. 생긴 건 중국 우화 작가처럼 생겨서 내용은 다른 세력, 다른 차원, 비현실과 현실 사이 그 와중에 섹스. 독특해. 집중을 못하면 아..뭐라는거야. 하고 읽다 질릴 수 있는 소설인데 다행히 흥미가 붙어서 재밌게 읽고 있어. 이게 두 이야기 중 하나만 호감이 안가도 번갈아 나오는 다른 이야기가 집중력도 흥미도 떨어뜨릴 수 있거든. 1Q84는 무려 두 권 읽고(그것도 권당 600페이지 거뜬 넘을 두께 두 권) 대체 무슨 내용이야... 파악도 못한 채 3권에서 포기했고. 어둠의 저편도 다 읽어도 어리둥절 할 것 같아서 조금 남기고 덮었는데. 지금 이 책을 읽고나니 초반에 집중해서 흥미를 느껴놓음 그 뒤는 술술 읽히는 게 하루키 특징인 것 같기도. 뜬구름 잡으니까 대강 슥슥 읽으면 나중엔 뭘 읽었는지 모른 채 이야기가 산으로 가고 있는거지. 아마 다시 마음 잡고 읽음 앞에 저 두 편도 재밌을 것 같아.

스토리도 스토리지만 문장이 참 재밌다. 관찰력과 그 상황이나 태도를 문장으로 옮기는 데 탁월한 재주가 있는 작가란 생각이 들어. 얼른 2권까지 읽고 그저 적절한 제목을 붙이고 싶다. 어떤 책으로 나에게 남을는지.

재밌는 발췌!

나는 어느 쪽이냐 하면, 다양한 세상의 사상과 사물과 존재를 너무 편의적으로 생각하는 쪽이 아닌가 스스로 생각하고 있다. 그건 곧 내가 편의적인 성격의 소유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아니라(물론 어느 정도 그런 경향이 있다는 건 인정하지만) 사물을 편의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정통적인 해석보다 그 사물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훨씬 근접해 있는 듯한 경우를 세상에서 흔히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샌드위치를 먹고 있을 때의 노인은 어딘지 모르게 예의바른 귀뚜라미처럼 보였다.
- 알 .... 것 같아....ㅋㅋㅋ 오이 마요네즈 햄 샌드위치 먹고싶다.​

˝진화은 늘 괴롭고 그리고 외롭지. 즐거운 진화란 있을 수 없네.˝

주머니에서 칼을 꺼내 날카로운 칼날 끝을 그림자와 땅 사이에 쑤셔넣고 좌우로 몇 번 흔들어 딱 들어맞게 한 후, 그림자를 요령 있게 땅에서 뜯어냈다. 그림자는 저항하듯 아주 작게 몸을 떨었지만, 결국 땅에서 떨어져서 힘을 잃고 벤치에 주저앉고 말았다. 몸에서 떨어져나간 그림자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볼품없었고무척 지쳐 있는 듯이 보였다.
-이런 상상력.​

눈을 감자,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검은색의 거대한 그물 같은 잠이 공중에서 마구 쏟아져 내려왔다.
-이런 간단하고 담백한데 적절한 표현​

˝그건 그렇고, 아가씨에게 개인적으로 뭔가 답례를 하고 싶은데, 뭐가 좋을까요?˝
˝맞은편에 `서티원 아이스크림`이 있으니까 그걸 사다 주실래요? 콘 베이스 더블로, 아래는 피스타치오, 위는 커피럼으로. 기억할 수 있어요?˝
-매강에 나올 법한 대화였다. 괜찮아요 보다는 말하고 찡긋하자. 얼마나 건강해!​

사실 옷을 벗는 모습이 매력적인 여자는 수없이 많아도, 옷을 입는 모습이 매력적인 여자는 그리 많지 않다.

과일 광고 사진에는 언제나 금발의 아가씨가 등장한다. 그것도 아무리 오랫동안 들여다보아도 뒤돌아서면 어떤 얼굴이었는지 전혀 생각나지 않는 그런 타입의 미녀다. 이 세상에는 그런 타입의 아름다움이 존재한다. 그래이프푸르트와 흡사해서 전혀 구분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요즘 남자들이 성형미인에게 질려가는 이유가 아닌가 싶다. 분명 미녀인데 기억이 안나는. 향기를 잃은.

올라간 것은 반드시 내려가고, 형태가 있는 것은 반드시 파괴되는 법이다.˝

사람은 자신의 결점을 바로잡을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의 성향이란 대략 스물다섯 살까지 정해져버리고, 그 뒤부터는 아무리 노력해도 그 본질을 바꿀 수 없다. 문제는 외부 세계가 그 성향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느냐 하는 것으로 압축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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