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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장하준 지음, 김희정.안세민 옮김 / 부키 / 201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장하준 교수님의 책은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교수님의 전작 '나쁜 사마리아인들'이 국방부에서 선정된 금서에 들어갔다는 소문을 듣고 한 번 읽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는데(원래 하지 말라는 짓은 더 하고 싶어지니까 어쩔 수가 없더군요), 이 책을 먼저 읽게 되었네요.
저자가 경제학자인데다가 영어로 먼저 쓰여진 책을 다른 역자가 번역해 놓은 책이라 혹시나 이해하기 어렵지 않을까 염려도 했었는데, 막상 읽어 보니 그다지 어렵지 않았습니다. 어려운 경제 용어도 거의 등장하지 않았고, 혹시 등장한다 하더라도 내용을 읽다 보면 무슨 뜻인지 저절로 이해가 되는 수준이었습니다.
저자는 2008년 이후에 찾아온 세계적인 경제 위기가 자유시장 경제학자들의 잘못된 이론을 따라 간 결과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23개로 이루어진 각각의 장에서 자유시장 경제학자들의 주장과 그들의 주장에서 간과되고 있는 내용을 먼저 제시한 뒤에 이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확실한 증거와 함께 차근 차근 펼쳐 가고 있습니다. 저자가 사용하고 있는 증거는 과거 각국의 역사와 다양한 통계 자료들을 근거로 하고 있는데, 이러한 증거들을 보면 저자의 주장을 옳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런데 저자의 주장을 따라가다 보면 자유시장 경제학자들은 정말로 멍청하기 짝이 없거나 또는 대단히 나쁜 놈들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근 30년 동안 곪을 대로 곪아 온 것이 터진 이 시점에서 누군가 이 문제에 대한 책임을 져야할 사람들을 찾아 보자고 한다면 그 30년 동안 자기들의 뜻대로 세계 경제를 주도해 온 그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렇다고 해서 저자의 주장이 편협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자유시장 경제학자들의 주장에 대해서 무조건 잘못 되었다 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이런 점에 대해서 간과했다거나 중요한 사실을 놓쳐 버렸다 는 점을 지적하며 균형을 잡을 것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라는 이 책의 제목은 책의 분위기에 비해 조금은 강한 느낌을 주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점에서 '그들이 간과한 23가지', '그들이 놓치고 있었던 23가지' 와 같은 제목이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비판을 위한 비판이 아니라 대안이 병행되는 비판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고,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균형잡힌 입장에서 자신의 주장을 펴나가고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깊이 공감이 되었던 것은 7장과 21장이었습니다. '7장 자유 시장 정책으로 부자가 된 나라는 거의 없다'를 통해서는 자국의 산업을 보호하기 위한 규제가 얼마나 중요하고 필요한 것인지에 대해 알게 되었고, '21장 큰 정부는 사람들이 변화를 더 쉽게 받아들이도록 만든다'를 통해서는 복지 정책은 사람들을 게으르게 만들기도 하지만 사람들로 하여금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도전할 수 있게 해 주는 기반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자는 결론부에서 이 책의 전체적인 내용을 요약하는 동시에, 현재의 문제있는 경제시스템을 재설계할 때에 명심해야 할 8가지 원칙을 짚어 주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 둘째 원칙이 가장 중요한 부분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자는 여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진정으로 2008년의 세계 경제 위기 같은 사태를 막고자 한다면, 장기적으로 사회에 이롭다는 명백한 증거가 없는 한 복잡한 금융 상품의 발행을 금지해야 한다.. (식품, 약품, 자동차, 비행기 같은 상품이 안전 기준에 맞추어 생산되어야 하는 것처럼) 로켓 사이언티스트들이 새로운 금융 상품을 개발하면 그 상품이 금융 회사의 단기적 이윤이 아니라 경제 시스템 전체에 장기적으로 어떤 위험과 이익을 미치는지 평가한 뒤에 출시를 허용하는 승인 절차를 만들 필요가 있다."
또 여섯째 원칙도 매우 중요하게 생각되었습니다. 저자는 금융 부분의 속도가 지나치게 높아지면서 장기적인 금융지원이 필요한 실물 부분의 성장에 금융 부분이 기여하지 못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는데,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저자는 일곱째 원칙에서 정부의 적극적인 경제 개입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있었는데, 이 또한 앞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내용이라 생각되었습니다.
문제는 금융 부분을 통해 단기간의 고수익을 얻고자 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저자가 주장하는 이러한 원칙들이 국가 정책에 반영되는 것을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대다수의 국민들이 이러한 실상을 제대로 깨닫고 정치인들과 관료들에게 압력을 가하는 것 외에는 없다고 생각됩니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이 많은 독자들의 호응을 얻고 있다는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처럼 경제에 대해 문외한이라 할 수 있는 사람도 그리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는 책이기에 더 많은 분들에게 읽혀 졌으면 하는 기대가 있습니다. 이 책을 통해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것들, 우리가 오해하고 있는 것들을 제대로 이해하는 분들이 늘어난다면 앞으로 많은 한국경제의 많은 부분이 달라지게 되지 않을까 싶은 기대가 있습니다.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