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다 비유 : 돌아온 탕자 이야기 예수님의 비유 시리즈 2
류모세 지음 / 두란노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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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전 권인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통해서 그때까지 알지 못했던 다양한 사실들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2권이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이번에는 또 얼마나 풍성한 내용이 소개되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책을 읽어 가면서 그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솔직히 이 책을 읽기 전까지만 해도 '탕자의 비유'에 관한 책이라면 충분히 읽어 보았다고 생각했고, 더 이상 읽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었습니다. 특히 헨리 나우웬의 '탕자의 귀환'과 잭 윈터의 '아버지의 집으로', 이 두 권이면 충분하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아직도 내가 알지 못하던 사실들이 이렇게나 많았구나 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먼저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현대의 저자들이 탕자에 대해 '탕자'라고 인식하는 이유와,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 탕자에 대해 '탕자'라고 인식하는 이유가 무척이나 달랐다는 것이었습니다. 전혀 몰랐던 사실은 아니었지만 그것이 그렇게나 중요한 사실이라고 생각하지는 못했었습니다. 그것은 둘째 아들이 아버지가 살아 계시는 동안 유산을 달라고 하였던 것과, 그 재산을 아버지가 살아계신 동안 처분하였던 것과, 그 처분한 재산을 가지고 고향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옮겨갔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 세 가지 사실이 유대인들의 문화에 있어서 아버지와 가족과 동족을 배반하는 일로 여겨졌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 아들이 떠났던 먼 나라가 사실은 거리적으로 먼 나라가 아니라 문화적으로 먼 나라, 곧 성경에서 '데가볼리'라고 부르는 헬라인 거주지역을 의미할 수도 있다는 저자의 지억은 탕자가 꿈꾸던 삶이 어떤 삶이었는지를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큰 아들 역시 탕자였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몰랐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를 탕자로 보아야 하는 근거가 동생의 부당한 요구에 대해 아버지 편에 서지 않았던 것이라는 사실은 지금까지 한 번도 생각해 본 바가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큰 아들의 마음 속에도 어서 유산을 물려 받고 싶다는 욕망, 그래서 내 마음대로 살아 보고 싶다는 욕망이 있었지만 용기가 없어서 가만히 있었을 뿐이지, 속마음은 동생과 다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동생이 그와 같이 불효막심한 요구를 할 때에 나서서 가로막지 않고 곁에서 지켜 보기만 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저자의 설명에 그렇구나 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저자는 현대에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는 사실에 대해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라면 이렇게 생각하고, 이렇게 반응했을 것이라는 식으로 지적해 주고 있었는데, 참으로 예리한 지적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그 외에도 아버지가 둘째 아들을 향해 '달려' 나갔던 이유와, 종들에게 내렸던 명령의 이유에 대한 저자의 설명에서도 지금까지 생각하지 못해 보았던 것들을 많이 배울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그 모든 행동이 동네 사람들로부터 둘째 아들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다는 저자의 설명에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통해 소개하고자 하셨던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 것인가 하는 것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저자의 책을 한 권 한 권 더 읽어 가면서 성경에 대해 더 깊이 알아가는 기쁨이 무척이나 큽니다. '탕자의 비유'를 더 깊이 이해하고, 그 가운데 나타나 있는 인간의 죄성과, 그 악함의 깊이 만큼이나 깊고도 깊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알고자 하는 분들이라면 꼭 읽어 보아야 할 책이라 생각됩니다.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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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노그래피로부터의 자유 - 남자의 뇌, 중독에서 거룩으로 회로를 바꾸다
윌리엄 M. 스트러더스 지음, 황혜숙 옮김 / 코리아닷컴(Korea.com)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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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들어 저희 교회가 속해 있는 교단 소속의 대형교회 세 곳의 담임목사들이 성문제로 인해 담임목사직을 내려 놓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건들을 지켜 보면서 성문제라는 것이 결코 만만한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저로서는 그 목회자들이 자신의 성적인 연약함에 대해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도 목회자로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고 넘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그들이 목회직을 밥벌이 수단으로만 생각해 왔고, 목회자로서 본이 되는 삶을 살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인 바가 전혀 없었다고 한다면, 그들은 기독교인이라고 볼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들이 넘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들의 위치 자체가 그러한 유혹에 쉽게 노출될 수 있는 자리였기도 했지만, 남자들에게 있어서 성적인 영역만큼 넘어지기 쉬운 영역이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 책은 남자들의 성문제에 대해 신앙적인 관점에서만 다루고 있는 다른 기독교 도서들과 달리, 남자들의 성문제를 신경생리학적인 측면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여자들의 벌거벗은 몸에 대한 영상이 어떤 과정을 통해 남자들의 뇌에 새겨지며, 그러한 신호를 받아들일  때에 남자들이 느끼는 쾌락은 어떤 과정을 통해 경험되는가 하는 것을 저자는 매우 자세하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약간은 학문적인 입장에서 접근하고 있기 때문에 선이해가 없었다면 조금 어려웠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래도 저자가 쉽게 설명하기 위해 기울인 노력 덕분에 대부분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에 그리 큰 어려움을 느끼지는 않았습니다.

저자는 이 책에서 포르노그래피를 보는 것을 죄로 보느냐 죄로 보지 않느냐 하는 것보다, 포르노그래피를 보는 것이 거룩에 도움이 되느냐 아니냐의 문제로 보는 '시각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저자가 '거룩'이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인간이 마땅히 살아야 할 '선하고 고귀하고 옳은 것'을 추구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자신의 욕구를 충족하는 데에 있어서 건강한 수단을 선택하는 삶'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자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느끼는 성적 본능은 친밀함, 즉 상대를 알고 나를 알리고 싶은 욕구의 일부분이다.. 많은 사람이 성적 친밀함을 두 사람이 공유할 수 있는 최고의 친밀함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친밀함은 세밀한 부분을 많이 아는 것 이상의 의미다. 진정한 친밀함은 두 사람 사이에 감정적 연결이 있어야 얻을 수 있다(195쪽).." "타인을 알고 자신을 알리고 싶다는 친밀함의 욕구가 주기적으로 충족되면, 성적 욕구가 감소한다. 그 욕구를 주기적으로 충족시키지 못하면 성적 욕구는 증가한다. 성적 욕구가 강해질 수록 현명한 대처 방안을 결정하는 능력을 떨어진다.. 친밀함을 찾지 못한 남자는 타인을 알고 자신을 알리 수만 있다면 아무 기회나 잡으려고 할 것이다. 친밀함에 대한 욕구는 감정적 연결없이 커져만 가고, 건강하고 생산적이지 못한 것, 예를 들면 포르노 그래피나 매춘부 등에서 이러한 감정적 연결을 구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장소와 경험은 친밀함에 대한 욕구를 진정으로 만족시키지 못한다. 그래서 욕구는 곧 재발할 것이다. 포르노그래피를 보거나 매춘부를 찾는 것은 욕구를 일시적으로 진정시킬 수 있을 뿐이다(196쪽).."

그러므로 진정한 '친밀함'에 이르기 위해서는 진정한 '관계 맺음'이 필요하며, 이러한 '관계 맺음'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리고 주변의 다양한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건강하게 누릴 때에, 포르노그래피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특히 포르노그래피에 중독되는 과정에서 사용되었던 신경 통로를 대신할 수 있는 '새로운 신경 통로'를 만드는 일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건강한 삶의 방식에 대한 중독이 필요하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자는 이것을 '거룩에 중독되는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포르노그래피 중독에서 벗어나는 데에 도움이 되는 다양한 노력 중에서, 특별히 남성들과 더불어 건강한 관계를 맺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양한 남성들 가운데에서도 인격적으로 성숙한 사람을 멘토로 삼아 그로부터 도움을 받을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자가 이 책에서 그 무엇보다 강조하고 있는 것은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건강한 신경 배선을 새롭게 구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건강한 관계 맺음을 통해 기쁨을 얻는 태도를 습관화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저자가 이 책을 통해 우리에게 말해 주고자 하는 이러한 결론은 중독에 관한 다른 책들이 말하고 있는 결론과 그리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중독이라는 것이 어떻게 형성되는가 하는 것을 신경생리학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었기 때문에, 이 책을 통해 중독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얻을 수 있었고, 더 나은 것에 중독됨으로써 질 낮은 것에 중독되었던 삶을 새롭게 할 수 있다는 저자의 견해를 통해 '중독은 치료될 수 없다'고 하는 부정적인 생각도 버릴 수 있었습니다. 얼마 전 읽었던 래리 크랩의 책에서 '하나님께 중독되고 싶다'는 고백을 보면서 커다란 도전을 받은 바 있는데, 저자를 통해서도 그와 비슷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거룩에 중독된다'는 표현을 접하고 보니 이러한 중독(하나님에 대한 중독, 거룩에 대한 중독)이야말로 모든 잘못된 중독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요, 모든 기독교인들이 추구해야 할 일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중독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기를 바라는 분들이나 중독성향을 가진 배우자나 자녀들로 인해 고민하는 분들에게 권해 드리고 싶은 책입니다.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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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신비 - 하나님의 자기 계시인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
이창헌 지음 / 대장간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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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적인 교단에서 신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현대신학자들은 거의 대부분 자유주의자들이라고 배웠고, 또 그들에 대해 깊이있게 공부할 수 있는 기회도 얻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몰트만이라는 학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저자가 들어가는 글에서 '나는 몰트만의 입장에서 존 스토트를 비판하려 한다'고 밝혀 놓은 것을 보면서 몰트만이 과연 무슨 주장을 펼쳤는지 들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읽어 가면서 제가 배워왔던 것들과는 다른 입장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확인할 수 있었습니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대속이 아니라 속량이라는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이었습니다. 저자는 성경에 '대속'이라는 말이 한 마디도 나오지 않지만, '속량'이라는 말은 적잖이 등장한다고 지적하면서, '속량' 개념의 가장 큰 장점은 아무도 만족시킬 필요가 없다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피를 흘리신 사랑의 힘으로 인류를 건져내는 것은 아무도 만족하게 할 필요가 없지만, 역설적으로 모두가 만족하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저자는 원죄의 교리에 대해서도 반대하고 있었습니다. 저자는 에스겔18:2,20,25가 원죄 교리에 반대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아담의 죄는 아담의 죄고, 우리의 죄는 우리의 죄라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원죄의 문제는 반드시 대속을 필요로 하는데, 하나님의 아들이 대속을 통해 우리를 대신해서 죄에 대한 형벌을 다 받았다고 한다면 이제 우리는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해서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는 우스꽝스러운 결론이 도출된다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자는 기독교의 주요한 교리들은 니케아 공의회, 칼케돈 공의회와 같은 공의회를 통해 확정되어 왔는데, 대속과 원죄의 교리는 공의회의 확정을 받은 바 없는 교리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었습니다. 원죄의 교리는 어거스틴이 펠라기우스와의 논쟁을 통해 도입한 것이며, 대속의 교리 역시 소수의 카톨릭 신학자들과 종교개혁자들이 도입한 것일 뿐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저자는 대속의 교리는 하나님께서 인신제사를 미워하신다는 사실에도 반대되는 교리라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결코 하나님을 만족시키는 인신제사와 같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희생의 자리에 섬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준 사건이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위한 희생이었지, 우리를 대신한 희생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이 사실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아들의 죽으심은 하나님을 위한 우리를 대신한 하나님 아들의 희생 제사가 아닐, 우리를 위한 하나님을 대신한 하나님 아들의 희생 제사였다." 또 저자는 대속의 교리가 유럽의 개신교회들에 의해 폐기되었음을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로서는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5:12]"라는 말씀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아담의 죄가 가지고 있는 특수성이 그렇게 가볍고 단순하게 취급되는 것은 곤란하지 않은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편으로 십자가의 의미가 '대속'과 '희생' 중에 오직 한 가지 의미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둘 다를 포함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은가 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저자는 또한 개신교의 예수상 없는 십자가에 대해서도 비판하고 있었습니다. 일반적인 개신교인들의 주장 - 예수상 있는 십자가는 우상과 같다, 예수상 없는 십자가야말로 부활의 상징이다, 예수상 있는 십자가는 혐오감을 준다는 - 에 대해 저자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상은 결코 우상이 아니며, 예수상 없는 십자가는 결코 부활의 상징이 될 수 없으며(부활의 상징은 빈 무덤이지 빈 십자가가 아니라는 이유로), 예수상이 없는 십자가는 단지 사형틀의 의미밖에 남지 않기 때문에 혐오감을 줄 지 몰라도, 예수상 있는 십자가는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양한 예수상 있는 십자가 사진들을 함께 실어 놓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저자의 주장에서 '예수상 없는 십자가가 부활의 상징이 될 수 없다'는 말에는 공감이 되었습니다. 또한 예수상 있는 십자가를 보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예수상 있는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껴 온 사람은 그 십자가가 없으면 하나님의 사랑을 잘 느끼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카톨릭에서 사용하는 묵주나 목걸이에 달린 십자가들이 그 소유자들에게 주는 안정감은 그것이 하나님을 대신하는 도구들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동차 앞 좌석 유리창 앞에 매달아 놓은 십자가가 단지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사고를 막아 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라는 것을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또한 칭의 교리에 대해서도 다른 입장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저자는 한글 성경에서 '정의, 공의, 의'라고 다양하게 번역된 단어가 헬라어로는 '디카이오쉬네'라는 단 하나의 단어라는 점을 지적하면서, 원래는 모두 다 '정의'라는 단어로 번역해야 옳다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어 성경에는 모두 '정의'라고 번역되어 있다고 하였습니다. 저자는 또한 종교개혁자들이 카톨릭에 반대하기 위해 수동적 의만을 주장함으로써 야고보서가 말하고 있는 능동적 의까지도 포기해 버렸다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에 의하면 '믿음'은 '불신앙'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불의'에 대한 반대어로써, '하나님의 정의를 행하는 삶을 의미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믿음'은 '순종'과 동의어로써 '믿음은 결코 순종의 행위와 분리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저자의 주장은 최근들어 논란이 되고 있는 바울 신학의 새관점과 어느 정도 통하는 부분이 있는 주장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저자의 주장 가운데 충분히 옳다고 할 만한 근거들이 있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해서는 더 공부해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외에 장래 일을 말하는 예언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이나 종말론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도 들어볼 수 있었는데, 저자의 설명은 이해할 수 있었지만, 심정적으로 인정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저로서는 장래 일에 대한 예언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믿으며, 세상의 종말이 반드시 오리라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저자의 주장 중에서 '사랑'이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주장들은 거의 대부분 인정하고 수용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저자가 임마누엘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사랑의 본질은 연대'라고 표현 것에 대해서는 깊은 공감을 느꼈습니다. 또한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에 대한 저자의 설명에서도 참으로 중요한 사실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저자는 '나라가 임하는 것'과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 같은 말의 반복임을 지적하면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이 '삼위 안에서 이루어진 사랑'을 의미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은 바로 '삼위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진 사랑이 사람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로서 기능하기 위해서는 교회 안에서 이와 같은 사랑의 연대가 이루어져야 하고, 그렇지 못한다고 한다면 거기에는 하나님 나라가 없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저자의 설명을 통해 기독교에 있어서 '사랑'이 차지하는 위치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기존에 가지고 있던 생각과 다른 입장에서의 이야기를 듣는 가운데 많은 깨달음도 얻었고, 저자의 정당한 비판을 통해 시원함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신학적인 전제가 많이 다르기는 했지만, 생각해 보아야 할 내용들이 많았기 때문에 시간을 낭비했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습니다. 특히 위에서 언급했듯이 '사랑의 본질은 연대'라는 지적과 '하나님 나라의 본질은 사랑'이라는 교훈은 이 책을 통해 얻은 가장 큰 유익이었다고 생각됩니다. 보수적인 신앙 환경에서 자란 분들이라면 아주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만한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거부감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고 자신의 신앙이 흔들리는 듯한 두려움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지만 열린 마음으로 읽어 본다면 지금까지 생각해 본 바 없는 새로운 관점에서 자신의 신앙을 돌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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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학교는 불행한가 - 전 거창고 교장 전성은, 대한민국 교육을 말하다 전 거창고 교장 전성은 교육 3부작 시리즈 1
전성은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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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교장으로 섬겼던 거창고등학교에 대한 좋은 소문을 많이 들었던 터라 주저없이 선택했던 책이었습니다. 이 책을 읽어 가는 동안 교육에 관해 많은 것을 배우고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저자는 학교라는 것이 원래 국가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기관으로써 국가가 필요로 하는 관리를 키워내는 데에 그 목적을 두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학교 교육은 언제나 국가에 의해 통제되어 왔으며, 오직 국익에 도움이 되는 학문(주로 이공계)만을 중시해 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회가 발전하면서 학교는 '국가'보다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재를 양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인재'라고 하는 것은 엘리트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재를 양성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경쟁을 유도할 수밖에 없다는 하였습니다.

저자는 이러한 지적에 이어 이러한 흐름이 결코 바르지 않은 것임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저자의 주장은 학생이 국가를 위해 존재한느 것이 아니라 국가가 학생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학교는 경쟁이 아니라 공존(함께 살아가는 법)을 가르치는 곳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학교교육이 빈부의 격차를 줄이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야 평화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라 하였습니다.

저자의 말 중에 기억에 남는 말 한 가지를 옮겨 보고자 합니다. "어떤 부모도 자녀들끼리 싸울 때 '그래 그래 잘한다, 싸워라 싸워, 사회는 냉혹하다. 이기는 놈만 살아남는다. 자꾸 싸워 힘을 길러야지' 하면서 싸움을 독려하지 않는다. 어떤 교사도 학생들이 싸우면 뜯어 말리지, 세상은 경쟁이니까 열심히 싸워서 이기는 연습을 하라고 부채질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왜 교육의 목표가 싸움을 말리는 일이라는 생각은 못하는 걸까."

저자는 학교교육의 목표를 '평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평화는 '평등, 자유, 공존'을 의미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없는데, 이러한 인간 존중은 평화를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저자는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서로 다르다고 죽고 죽이는 일은 중단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또한 학생들에 대해서도 다양한 재능, 소질, 관심에 따른 다양한 교육을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재능과 소질과 관심에 따라 한 번 밖에 주어지지 않은 삶을 살 권리가 있는데, 이는 천부의 권리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또한 모든 아이들의 재능과 소질을 최대화했을 때 국력도 극대화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국가의 통제에 의해 획일화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교육은 중단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저자는 평화를 목적으로 하는 학교교육을 위해 국가의 교육정책은 '평등과 자율', 곧 '분권과 자치'의 원칙 가운데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학교교육과 학교행정(교육부)과 학교평가(국가)가 서로 수평적 관계 가운데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육에 대한 국가의 평가(시험)는 학교를 통제하고 상벌을 주기 위한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조언을 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기업체에서 사용하는 컨설팅과 같은 목적을 위한 평가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개선은 법이 아니라 제도의 개선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또한 평화를 위한 학교교육은 스파르타식보다는 소크라테스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주입식 교육은 고정 관념을 낳고, 고정 관념은 더 이상 성장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도 죽이고 남도 죽인다는 것입니다. 또한 저자는 자율적인 학생활동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자율만이 윤리적, 인격적 힘을 기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데,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결정권이 주어졌을 때, 스스로 판단, 결정하고 그 결정에 대해 책임을 지는 힘이 생기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저자가 교사로서의 바른 자세에 대해 말하고 있었던 내용은 제 마음에 특별히 더 깊게 다가왔습니다. 저자가 말하고 있었던 것은 "사상, 신앙을 주입하지 말아야 한다. 편애하면 안 된다. 끊임없이 전문성을 길러야 한다. 교사로서 받는 월급으로 만족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목회자인 저로서도 새겨 들어야 할 교훈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자의 주장에 대해 많은 부분에서 공감하였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저자의 주장이 '지나치게 이상주의적인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학교에서 경쟁하기를 중단한다고 쳐도, 사회에 나가서 뒤쳐지는 부분은 어떻게 할 것이며, 국가 간의 경쟁에서 뒤쳐지는 것은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자가 반복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었던 '일제 치하에서 우리나라가 겪어야 했던 교육적 통제'도 결국 '우리나라가 국가경쟁에서 뒤쳐진 결과'였다는 생각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교육을 통해 국가 경쟁력을 높이는 일은 절대로 가볍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저자의 말대로 각자의 재능과 소질, 관심에 따라 자신의 능력을 최대로 발휘하게 해 주기만 한다면 굳이 경쟁을 목적으로 하지 않더라도 경쟁력을 갖추어 주는 데에 부족함은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경쟁없이 발전이 가능할까 하는 염려는 쉽게 사라지지 않더군요.

또한 저자가 소개하고 있는 거창고등학교와 (같은 재단의)샛별중학교에서 일어났던 여러 가지 사건들과 그러한 사건들에 관련하여 내려진 중요한 결정들을 보면서 학교가 어떠해야 하며, 학교 교육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수 있었고, 그와 같은 결정을 내리고 그 결정을 꿋꿋하게 견지할 수 있었던 분들의 이야기라면 믿음을 가지고 따라가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습니다. 앞으로 거창고등학교의 졸업생들을 통해 이 사회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를 살펴보면 저자의 생각이 옳았는지 아니면 틀렸는지가 분명하게 밝혀지게 될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저로서는 좋은 결과가 나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저자와 같은 교육 철학과 신념을 가지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많은 교사들을 지지하며 응원하고 싶습니다. 적어도 저자가 주장이 가지고 있는 방향성은 정확히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오직 그것이 목표로 하는 것이 실현 가능한 것이냐 아니냐 하는 것이라 생각되는데, 저는 그것이 실제로 실현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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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거룩한 순례
이동원 지음 / 두란노 / 2011년 5월
평점 :
품절


제목만 보고서 성지 순례와 관련된 책이라고 짐작했었는데 실제로 읽어보니 예수님의 행적에 대해 설교한 설교집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머무셨거나 지나가셨던 장소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기대했던 것보다 많이 짧았습니다. 사진이나 그림이라도 좀 더 많았다면 좋았을텐데 그렇지도 않았습니다. 책의 앞 부분에 예수님 당시의 예루살렘 지도와 이스라엘 전체의 지도가 있었을 뿐, 다른 지도는 전혀 없었습니다. 사진도 각 장의 첫 페이지에 단 한 장만 실려 있었을 뿐입니다. 저자가 성지 순례를 열 일곱 차례나 다녀왔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풀어 놓을 내용이 더 많지 않았을까 싶은 마음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장소에 대한 소개보다는 성경 본문을 풀어 설교하는 데에 더 많은 비중을 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자가 워낙에 설교 잘하기로 유명한 분이라 설교 내용만으로도 얻을 수 있었던 것이 적지 않았습니다.

저자가 죄를 중독과 연결해서 설명하고 있었던 점에 대해 깊이 공감하였습니다. 저자는 죄라는 중독에 포로 된 인생에게 과연 희망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요8:36)"는 말씀으로 대답하고 있었는데, 이것이 제게는 커다란 은혜가 되었습니다. 평소에 잘 의식하지 못하고 지나치던 구절이었는데, 저자의 질문과 연결해서 살펴 보니 이상하게 마음 깊이 와서 박히더군요. 저자의 지적을 통해 예수님께서 자유케 하시면 그 어떤 중독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는 소망이 생겼습니다. 예전에도 어떤 목사님이 자신의 저서에서 제랄드 메이의 '중독과 은혜'라는 책을 추천하시는 것을 보았는데, 저자 역시 동일하게 이 책에 대해 소개하고 있더군요. 꼭 한 번 읽어 보아야 할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가 선포한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에 관한 메시지를 인용하시면서 "보복의 날"을 일부러 생략하시고 "은혜의 날"을 선포하러 왔다고만 말씀하신 것에 대해 저자는 은혜의 날은 예수님의 초림 때로부터 시작되고, 보복의 날은 예수님의 재림 때에 성취된다는 점을 가르쳐 주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었는데 중요한 지적이었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저자가 스튜어트 브리스코의 말을 빌어 크리스챤(Christian)이 제자(Disciple)가 되기 위해서는 호기심(Curiosity), 확신(Conviction), 희생적 헌신(Commitment)이라는 3C를 거쳐야 한다고 설명한 것에도 깊이 공감하였습니다. 제 자신에 대해 적용해 보았을 때 호기심과 확신의 과정은 거쳤으니 이제 희생적 헌신으로 나아갈 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자가 중풍병에 걸린 친구의 침상을 메고 예수님을 찾아온 네 명에 대해 "이런 친구가 한 명 뿐이었다면 과연 중풍병자가 예수님께 나오 수 있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네 명이었으니까 함께 기도하면서 믿고 행동했기에 이런 결과가 일어났을 것이라"고 답변하는 것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한 사람이었다면 업고 가면 되지 않았겠는가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만일 침상이 아니라 관이었다면 한 명이 아니라 네 명은 있어야 했으리라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또한 그런 이유 때문에라도 교회 안에서 중풍병자의 친구들과 같은 믿음의 친구들을 네 명 정도만 만들 수 있다면 얼마나 복된 사람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자가 오병이어 사건과 칠병이어 사건을 비교해 놓은 내용도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각각의 사건에서 남은 떡이 각각 열 두 바구니와 일곱 광주리였는데, 바구니는 말 그대로 품 안에 안을 수 있는 크기의 바구니일 뿐이지만 광주리는 사람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크기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이 중에서 열 두 바구니는 유대인 선교의 책임을, 일곱 광주리(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와 연결지어)는 이방인 선교에 대한 책임을 의미한다고 하는 메시아닉 유대인 학자의 설명을 소개해 주고 있었는데 매우 설득력이 있게 느껴졌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였던 사도 요한이 예수님의 어머니를 자기의 어머니처럼 잘 모셨던 것과 그가 오랫동안 장수하였던 것을 연결지어 십계명의 오계명의 성취로 설명한 것도 좋았습니다. 십계명을 강해 할 때 좋은 예화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많은 항목의 내용을 짧은 책에 담으려다 보니 성지에 대한 소개가 그리 충분하지 않았고, 설교 내용도 그리 길지 않았고, 그 깊이도 그리 깊지 않았습니다만, 그래도 많은 것을 건질 수 있었던 책이었습니다. 그러나 성지에 관한 깊은 소개를 원하는 분이라는 다른 책을 보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책은 예수님의 행적(생애와 사역)과 그 지리적, 시대적 배경에 대해 부담없이 공부해 보고 싶은 초신자분들에게 추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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