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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집 맏아들 - 대한민국 경제정의를 말하다
유진수 지음 / 한국경제신문 / 2012년 1월
평점 :
이 책에 대한 소개글을 읽으면서 1996년 10월부터 1997년 4월까지 SBS에서 방영되었던 '형제의 강'이라는 드라마가 생각났습니다. 박근형시와 김영애씨가 부모로 나오고, 김주승씨가 맏아들, 박상민씨가 둘째 아들, 임상아씨가 딸(셋째), 그리고 김정현씨가 막내 아들로 나왔던 기억이 납니다. 부모는 큰 아들에게 모든 것을 걸고 그를 성공시키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습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나머지 자식들이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맏이는 좋은 대학을 나와 좋은 직업을 갖게 되지만 결국에는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위해 가족들을 버리고 말지요. 대학원에 다니며 기숙사에서 생활할 때라 제대로 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열심히 보려고 노력했던 드라마였습니다. 민주화 운동의 불기가 사그라져 가고 있을 때에 대학을 다녔기 때문에 이 드라마를 통해서라도 이전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알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책에서도 그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 시절에 정부에서 재벌들에게 얼마나 많은 특혜(일제의 귀속재산 불하, 외화 배정, 낮은 이자율, 투자 인가정책, 차관 배분 등등)를 베풀었는지, 그리고 또 강남을 개발하기 위해 강북 개발금지 조치를 비롯해 어떤 특혜를 강남에 베풀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들을 상세하게 들을 수 있었습니다.
저자는 이와 같은 정부의 특혜를 '맏아들에게 올인했던 과거의 부모들의 모습'에 비유하면서, 부모의 전적인 지원을 받고 사회적 성공을 이룬 맏아들에게 동생들에 대한 도덕적 책임이 요구되는 것처럼, 정부의 전적인 지원을 통해 지금까지 성장해 온 재벌들에게도 사회에 대한 도덕적 책임이 요구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적절한 비유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자는 먼저 이러한 부모의 지원이 바른 것이었는가에 대한 논의에서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에 소개된 벤담의 공리주의와 롤스의 정의론에 근거해 각각 다른 결정을 내리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과, 또 그 결정의 결과들 역시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설명해 주고 있었습니다. 또한 '성공한 맏아들은 얼마를 갚아야 할까'와 같은 '도덕적 책임의 수준'에 관해서도 설명하고 있었는데, 상당히 설득력 있게 느껴졌습니다. 저자는 여기에서 '맏아들은 부모로부터 지원받은 금액보다 더 많은 금액을 동생들에게 베풀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 논리적으로 조리있게 설명해 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국의 재벌들이 정부로부터 어떠한 지원을 받아 성공을 이룰 수 있었는지, 그리고 강남의 부자들은 어떻게 부자가 될 수 있었는지, 그리고 대한민국이 주변국가들에 지고 있는 도덕적 책임은 무엇인지, 선진국들의 과오는 무엇이며 재벌들이 저질러 온 잘못은 무엇인지, 그리고 서브 프라임 사태 때 공적자금을 지원받은 금융기관들이 어떤 부도덕한 짓들을 저질렀는지에 대해서도 세세하게 소개해 주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내용들 가운데 특별히 기억에 남았던 것은 선물이나 옵션과 같은 파생상품에 대한 저자의 평가였습니다. 저자는 선물과 옵션 같은 파생상품은 그것을 통해 내가 돈을 벌면 다른 누군가는 손해를 보아야 하는 제로섬 게임 같은 것으로써 마치 도박과 같은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저 역시 오래 전에 선물과 옵션이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 이건 도박이나 다름없다고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는데, 경제학자인 저자가 동일한 판단을 내리고 있는 것을 보면서 파생상품의 위험성에 대해 더 분명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자는 이런 이야기들을 흡족한 결론으로 이끌어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문제 제기는 잘 했지만, 분명한 해답을 내 놓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저자의 문제제기는 회사를 망쳐 놓고도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 재벌 총수들이나 금융기관 직원들을 이렇게 처벌해야 한다던가, 또는 사회적으로 기여도가 낮은 재벌들에게 이런 식으로 불이익을 주어야 한다던가 하는 결론으로 이어졌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저자는 결론부에서 상당히 움츠러든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자는 심지어 이렇게 말하기까지 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 책이 부자들에 대한 전반적인 반감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그런데 이런 식의 말은 무책임한 재벌들과 이기적인 부자들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늘어놓은 이후에 균형을 잡기 위해 덧붙여 놓으면 어룰릴 말이지 그러한 비판이 전혀 없는 가운데 할 말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무책임한 재벌들이나 이기적인 부자들에 대한 정부의 분명한 대처를 촉구하기보다는 그저 재벌들이 스스로 알아서 지금까지 사회로부터 덕을 본 만큼 조금이라도 베풀어 주었으면 좋겠다라는 애걸하는 듯한 결론으로 끝낼 것이었다면 무엇하러 이 책을 쓰셨나 싶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후주에서 '정부가 기업들의 사회 기여도를 공개함으로써 기업을 압박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언급해 놓은 것을 보면서, '그런 방법이 있구나'하는 마음이 들기는 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이야기를 결론부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그리고 좀 더 다양하게 제안해 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습니다.
어쨌거나 결론부가 많이 아쉬웠던 책입니다. 용두사미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책이 아닌가 싶습니다. 다음에 결론부가 더 보강된 책으로 만나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용머리에 해당하는 내용이 너무 좋아 별 다섯개를 매겼습니다. 읽어 볼만한 가치는 충분하고도 남는다고 생각합니다.)
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