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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4.0 로드맵 - 모두가 행복한 자본주의는 꿈이 아니다
김덕한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2년 2월
평점 :
품절
어렸을 때에는 날마다 조선일보를 읽으면서(주로 이규태 코너나 토픽 위주였지만) 자랐지만, 청년기를 지나면서부터는 조선일보를 거의 읽지 않았습니다. 소위 '조중동'이라는 세 글자로 대변되는 메이저급 신문사들에 대한 반감이 청년기를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몸에 배어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던 시리즈 기사를 묶어 펴낸 책 따위에 관심을 가질 이유는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출판사 카페에 들어갔다가 이 책의 표지 시안 중에 출판사에서 선택한 시안을 맞춰 보는 이벤트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두 가지 표지 시안 중 하나는 당연히 현재의 책으로 출판되어 나온 표지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주변에 다양한 동물들(병아리, 토끼, 다람쥐)을 품고 있는 사자를 그려놓은 것이었습니다. 저로서는 그 그림을 보자마자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출판사에서도 그 표지를 최종적으로 선택했을 것이라 생각하고 그쪽에 표를 던졌는데 결과는 현재 출간되어 나온 책 표지가 말해 주고 있습니다.
어쨋거나 제가 이 책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바로 그 그림 때문이었습니다. 맹수와 순한 짐승(강자와 약자)들이 함께 어울려 살 수 있는 사회의 모습을 그 표지는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그 표지를 보면서 이사야 11장에 묘사된 천국의 모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는데, 바로 그 점이 제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 이사야 11:6-8)
그런데 한편으로는 "과연 자본주의를 가지고 그러한 천국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신자유주의가 주도하고 있는 현재의 자본주의 시스템은 약육강식의 시스템이요 무한경쟁의 시스템이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승자독식이라는 표현도 자주 사용하고 있더군요. 저로서는 성경에서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는 맘모니즘에 사로잡혀 버린 자본주의 시스템에는 더 이상 소망이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차였습니다. 또한 지금보다 더 빈부격차가 벌어진다면 머지않아 과거의 공산주의 혁명에 못지않은 반작용이 반드시 나타날 것이라 생각하고 있던 차였습니다. 그래서 북유럽 같은 사회민주주의가 대안이 아니겠는가라고 잠정적인 결론을 내리고 있던 차였습니다. (저자는 노무현 정부가 북유럽을 좇아가다 실패했다고 말하는데, 저로서는 거기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국민들의 의식수준이 아직 그만큼 자라지 못했을 뿐이지 앞으로도 그와 같은 시도는 계속될 것이며 결국에는 변화와 진보를 이루어낼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자는 자본주의를 통해서도 '모두가 행복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본주의 4.0 시대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본주의 4.0 이라는 용어는 저자가 처음 만들어낸 용어가 아니었습니다. 아나톨 칼레츠키라는 경제학자가 저술한 책의 제목이라고 하더군요. 그러므로 어떻게 보면 이 책의 초고라 할 수 있는 조선일보의 시리즈 기사들은 아나톨 칼레츠키의 책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들을 한국적 상황에 적용해 본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아나톨 칼레츠키의 책을 읽지 않았기 때문에 짐작일 뿐입니다만 거의 확실해 보입니다.).
저자에 의하면 아나톨 칼레츠키는 자본주의를 1.0에서부터 시작하여 4.0까지 모두 네 개의 시기로 나누고 있는데, 1.0의 시기는 고전적 자본주의 시대를, 2.0의 시기는 수정자본주의 시대를, 3.0의 시기는 신자유주의 시대를, 그리고 4.0은 이제 앞으로 자본주의가 나아가야 할 시대를 의미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저자는 보이지 않는 시장의 손과 보이는 정부의 손이 균형을 이루는 시대가 바로 자본주의 4.0 시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자의 그러한 지적은 참으로 합당해 보였습니다. 실제로 시장의 손에 모든 것을 맡겨 놓으면 탐욕이 모든 것을 지배하게 되면서 비윤리적인 사회로 흘러버릴 가능성이 크고, 정부의 손에 모든 것을 맡겨 놓으면 이상만 좇다 현실을 놓쳐 버리는 가운데 정체되고 발전없는 사회가 되어버릴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저자는 기업이 공정하게 경쟁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와 함께 정부가 철저히 원칙에 따라 시장을 감독(개입이 아니라)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미국의 여러 기업들과 비교해서, 불공정 경쟁을 통해서라도 실적을 올리고, 오너십을 지키려 하는 한국의 대기업들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을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솔직히 조선일보 기자가 이런 글을 쓰다니 하고 많이 놀랐을 정도입니다.) 특히 기아자동차의 협력업체인 동희오토가 저지르고 있는 편법적인 방식들과 롯데백화점의 1억 CMD 제도의 문제점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두드러졌습니다. 그러나 뉴스에서 크게 떠들었던 유성기업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에는 관련 완성차 회사를 (현대자동차라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는데도) ‘A자동차’라고 표기한 것을 보면 역시 조선일보 기자라 어쩔 수 없구나 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대기업의 소유와 경영을 분리해야 한다는 주장이나, 공정한 경쟁을 유도하고 정확하게 평가해야 한다는 주장, 그리고 생산과 분배 중 어느 한 편을 들어서는 안 되며, 경쟁과 배려가 공존하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얼마 전 읽었던 '이승훈 교수의 경제학 멘토링'이라는 책에서도 똑같은 주장을 접했었는데, 이렇게 비슷한 주장을 다시 접하게 되면서 보수적 입장(자유시장주의)에 서 있는 분들도 현재의 문제를 결코 가볍게 보고 있지는 않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책에서 특별히 눈에 들어왔던 내용 가운데 하나가 프랑스에서 만든 ‘경제성과와 사회진보의 계측을 위한 위원회'에서 내린 “No More GDP(국내총생산)”이라는 결론이었습니다. 이 위원회는 지금까지 국가의 능력과 국민들의 행복 척도척럼 활용됐던 GDP 대신 GNH(국가행복지수)를 높이는데 국가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고 지적했다는데, 이는 경제와 사회 진보의 측정지표가 다양한 삶의 요소들을 반영하지 못하고 오로지 생산지표에만 얽매여서 ’무한 경쟁‘의 정글 자본주의를 잉태했다는 반성을 내놓은 것이라 하였습니다.
저로서는 이러한 내용을 보면서 ‘자연적 교회 성장’ 이론을 떠올렸습니다. 이는 '건강한 교회는 자연적으로 성장하지 않을 수 없으며, 교회를 건강하게 하기 위해서는 여덟 가지 요소들이 바로 작동하도록 만들어 놓아야 한다'는 이론입니다. 특히 여덟 가지 요소들 가운데 하나라도 질이 떨어지면 그만큼 교회 성장이 지체되며, 그러한 요소가 발견되는 대로 그 요소에 핵심역량을 투입하여 그 수준을 끌어 올리기만 하면 교회 성장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이론의 주창자인 크리스티안 A. 슈바르츠는 교회를 '여덟 개의 나무판으로 둘러싸인 물통'에 비유해서 아무리 많은 물(교인들)을 붓더라도 그 여덟 조각의 나무판 중에 가장 짧은 판(질 낮은 요소)의 높이(수준)만큼 밖에는 수위(교회의 규모)가 차오르지 않는다는 점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생산지표 역시 그러한 여러 가지 요소 중의 하나일 뿐인데, 그것 하나에만 집중해 보았자 전체적인 수위를 높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간단한 사실을 찾아내기 위해 그렇게도 많은 수의 세계적인 전문가들이 동원되어야 했다는 사실이 우습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제라도 방향을 바로 잡게 되었다는 점에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한 새누리당의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이 “앞으로 (성장률이 아니라) 고용률을 경제정책 중심 지표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던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보아야 할 것이라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나 성장률이 하나의 요소일 뿐인 것처럼, 고용률도 하나의 요소일 뿐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얻은 유익 가운데 한 가지는 다양한 경제학자들과 그들의 저서들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이 책의 모티프가 된 아나톨 칼레츠키의 ‘자본주의 4.0’과 로버트 라이시의 ‘위기는 왜 반복되는가’라는 책은 꼭 읽어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금 더 젊었을 때에는 극단적인 입장에 서서 "모두 다 싹 갈아엎어야 하지 않나"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나이가 점점 들어가면서는 "균형을 위해 나아가되 점진적으로 변화되어 가는 것이 더 나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 저에게 있어 이 책은 ‘점진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입장에 서 있는 것으로 보였고, 보수주의자들의 입장에서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정도로 ‘부드러운’ 어조를 통해 ‘좀 더 진보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충분히 만족할 만큼 강한 톤은 아니었지만 이 나라의 경제 현실에 대해 깊이 있는 사정까지 들여다 볼 수 있었고, 세계적인 학자들의 주장도 들어볼 수 있었던 점이 커다란 유익이 되었습니다.
한편으로 저자는 자신의 주장이 보수주의자들에 의한 반대에 부딪칠 것을 염려하고 있는 듯이 보이기도 했습니다. 자본주의가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사회주의로부터 취한 장점들을 통해 계속해서 진보해 왔기 때문이라는 것을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었던 것이나, 유럽의 복지제도가 가장 보수적인 정권에 의해 처음으로 시행되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었던 것을 보면서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또한 복지의 중요성을 말하면서도 보편 복지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밝히고 있는 것을 보면서 보수주의자들의 주장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앞에서는 기초생활급여 예산을 줄일 수 있었던 것이 부정 수급자들을 걸러 낸 결과라고 이야기하면서도 뒤에 가서는 마치 보육예산(보편적 복지 차원의)을 늘리기 위해 기초생활급여 예산을 줄인 것처럼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저자가 여전히 균형점에 서 있기 보다는 보수주의적인 입장에 기울어 있다는 느낌을 받게 하였습니다.
솔직히 말해 가난한 사람들보다는 부자들이 더 많은 세금을 내고 있는데, “왜 울트라 부자들에게까지 보육료를 지원하느냐”고 말하는 것은 “너희는 부자니까 세금만 내라. 그리고 혜택은 꿈도 꾸지 말아라”하는 이야기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는 결코 공정한 입장에 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세금을 냈으면 조금이라도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 공정한 처사입니다. 그 부자들에게는 껌값에 불과한 보육료일지 몰라도, 그런 지원이라도 받아 보아야 “내가 낸 세금이 이렇게 사용되는구나, 내가 낸 세금이 이렇게 돌아오는구나”라는 것을 체감할 수 있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어야 세금 낼 기분도 생기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의무만 부과하고 권리는 전혀 주지 않는다면 그러한 제도는 절대로 지속될 수 없을 것입니다.
저자가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복지는 '사회안전망이 제대로 기능하고 있느냐'와 '지속 가능하냐'의 차원에서 보아야지, 보편적 복지냐 선별적 복지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데 저자는 앞에서는 그렇게 이야기해 놓고 뒤에 가서는 이처럼 '보편적 복지는 잘못된 것이다'라는 식으로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저자의 치우친 성향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쨌거나 이 책은 '사회주의를 쫓아가자'는 취지의 책이 아니고, '자본주의를 더 잘 발전시키자'는 취지의 책이니 그런 입장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닙니다. 그러나 완전히 동의할 수 없는 주장도 전혀 없지는 않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었습니다.
저처럼 보수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해 조금의 고려할 만한 가치도 없다고 치부해 왔던 분들이 읽어 보면 좋을 것 같은 책입니다. 그리고 보수적인 입장에 서 계신 분들이라면 이 책의 내용 가운데 마음에 와 닿는 부분이 저보다는 더 많을 것 같습니다. 진보적인 입장이든 보수적인 입장이든 극단적인 입장을 피하고 조심스럽게 균형점을 찾아가려는 노력이 요구되는 이 시점에, 이 책은 그러한 노력의 바람직한 예로써 부족함이 없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