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떻게 설득당하는가 - FBI에서 배우는 비즈니스 심리학
조 내버로 & 토니 시아라 포인터 지음, 장세현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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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읽기 전에는 잘 몰랐지만 목회자인 저로서는 반드시 읽어야 했던 책이었습니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만 해도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말'만 제대로 하면 된다고 생각했지, '비언어적인 요소'까지도 제대로 사용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사람들이 '말'보다도 '비언어적인 요소'를 통해 자신의 본심을 더 분명하게 드러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사람들이 상대의 '말'보다는 상대의 '비언어적인 요소'를 보면서 상대의 진심을 파악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던 신념 가운데 한 가지는 '진심은 반드시 통한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진심을 담아 이야기하면 상대가 반드시 그 진심을 알고 언젠가는 긍정적으로 반응해 올 것이라는 믿음이 제게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상대가 그 진심을 오해하고 끝까지 그 오해를 풀지 못할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상대는 내가 별로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나의 비언어적 행동을 보면서 내 마음을 왜곡해 받아들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상대로 하여금 내 마음을 오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자신의 마음을 비언어적 요소를 통해 올바로 표현하는 방식을 꼭 배워 두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것 가운데 중요한 사실 한 가지는 악수를 할 때에 양손으로 감싸쥐는 정치인 스타일의 악수가 상대에게 불편함을 느끼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전에 보았던 어떤 영화 속에서 그러한 악수법이 시각장애인들의 악수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일이 있었는데, 저로서는 그러한 악수법이 상대에게 포근함과 따뜻함을 느끼게 해 줄 것이라 생각해 왔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성도들과 악수할 때에 항상 그런 방식으로 악수를 해왔습니다. 그런데 저자의 지적을 통해서 그러한 악수법이 오히려 상대에게 불편함을 느끼게 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저자는 친밀함을 표현하고 싶으면 악수를 하면서 다른 손으로 상대의 팔 위쪽이나 팔꿈치를 가볍게 터치하라고 가르쳐 주고 있었는데, 저에게 꼭 필요한 정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저자가 소개한 '자신의 확신을 표현할 때 하는 손 동작'은 설교할 때의 제스처로 사용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남자들의 업무 복장에 대한 조언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예전에 설교학을 배우면서 설교자의 복장에 대해서 배운 적이 있는데, 그 때에 배웠던 내용과 많은 점에서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마도 상대에게 신뢰감을 주어야 한다는 점에서는 목회자나 비즈니스맨이나 똑같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부분에서 특별히 눈에 들어왔던 것은 갈색 정장을 피하라는 조언이었습니다. 한 동안 갈색 옷을 좋아했었기 때문에 양복 중에 갈색 정장이 있는데, 저자의 말을 듣고 나니 더 이상 입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제가 옷이 많은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그 옷이 이제는 그만 입어도 될 정도로 낡고 오래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신발도 항상 깨끗하게 관리하라는 저자의 지적을 보며 한동안 구두 닦는 것을 게을리 해 왔던 제 모습을 반성하였습니다. 


조명에 대한 이야기도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큰동서가 병원을 개업해서 축하차 가 보았을 때 병원 로비가 너무 어둡게 느껴져서 좀 더 밝게 했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심리적인 안정감을 주기 위해서 그리했다고 하더군요. 저로서는 조금 답답하고 불편하게 느껴졌기 때문에 그 말에 동의가 되지 않았는데, 저자도 저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저자는 현명한 주유소 운영자들은 조명을 많이 켜둘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주유소에 들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하면서, 그 이유를 조명이 밝으면 안전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라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조명이 어두운 교내 주차장보다는 환한 가로등이 있는 거리에 주차하는 것을 선호하는 대학생들의 이야기를 예로 들면서 그 이유 역시 '안전감' 때문이라 하였습니다. 조명은 단지 '편안함'만의 문제가 아니라 '안전감'의 문제이며, '안전'은 언제나 환영받는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었습니다. 큰동서의 병원 로비는 아직도 어두운 편인데, 이 책을 읽어보도록 한다면 앞으로 좀 달라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외에도 상대의 비언어적 행동을 분석하는 방법이라던가, 비언어적 요소를 통해 자신의 의사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방법들을 다양하게 배울 수 있었는데, 그 중에 목회에 실제로 적용할 수 있을 만한 내용들도 많았습니다. 그러니 비즈니스맨들에게는 적용해 볼 만한 내용이 더 많지 않을까 싶습니다. 앞으로 세 네 번 정도 더 읽으면서 실제적인 적용점을 찾아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저자의 전작인 'FBI 행동의 심리학'도 꼭 읽어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커뮤니케이션에서 비언어적 요소가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확실히 배울 수 있었던 유익한 독서였습니다. 저와 같은 목회자들을 비롯해서 사람들을 상대하는 일이 많은 분들에게 꼭 읽어보시라고 권해 드리고 싶은 책입니다. 강력하게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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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예수 - 어떻게 우리는 2천 년 전 인물을 지금 만날 수 있는가
루크 티머시 존슨 지음, 손혜숙 옮김 / 청림출판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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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처음에는 역사적 예수 논쟁에 관한 책이라고 해서 신학적인 깊이가 매우 깊은 변증서 계열의 책일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물론 책의 전체 내용 중에서 절반 정도는 변증적인 내용에 해당하는 것 같았고, 그 깊이도 낮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나머지 절반은 영성 훈련과 관련된 내용이었습니다. 저자가 서문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이 책의 전작인 '누가 예수를 부인하는가'야말로 제가 상상했던 신학적이고 논쟁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었고, 이 책은 그 책에서 내린 결론을 어떻게 신앙생활에 적용할 것인가를 다루고 있는 책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의 성격을 변증서와 영성서 중 한 가지에 속하는 것으로 정의하기는 조금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찌 보면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으려는 시도였다고 보이는데, 나름대로 성공하지 않았나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저자는 이 책의 앞 부분에서 역사적으로 재구성한 예수는 실재했던 예수가 아니라 역사가들의 머릿속에서 만들어진 예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증명해 내고 있습니다. 성경이 소개하고 있는 예수님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과 더불어 교제하면서 알게(배우게) 된 예수님인데, 제자들마다 서로 다른 시각을 가지고 예수님과 교제했기 때문에 각각의 시각으로 본 다양한 모습의 예수님이 각각의 복음서에 기록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다양한 시각으로 기록된 여러 복음서에서, 하나로 통일된 시각을 인위적으로 추출해 내려는 것은 오만하면서도 어리석은 태도라는 것입니다. 게다가 예수님을 여전히 살아 계신 예수님으로 본다면, 교회의 전통 속에서 신앙의 선배들이 교제해 온 예수님에 관한 증언을 존중하지 않을 수 없고, 현재에도 살아계신 예수님과의 교제를 통해 그분을 알아가려는 노력을 하지 않을 수 없는데, 예수님을 과거에 돌아가신 어떤 분으로만 생각한다면 예수님을 제대로 알 수(배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자는 성경에 기록된 다양한 관점을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단지 그분에 대한 성경의 기록을 보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만나 그분과 인격적으로 교제하는 가운데 그분을 알아가야(배워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복음서의 기록자들인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을 배워가는 과정 속에서 복음서를 기록했기 때문에 복음서를 통해 예수님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며, 따라서 살아계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 그분을 배워가는 노력이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저자의 말에 전적으로 공감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이유는 제가 성경을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사람들에게 소개함으로써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도구에 불과하다고 생각해 왔기 때문입니다. 저로서는 성경 자체를 하나님처럼 떠받드는 사람들이나, 또는 성경을 일반 문학 작품처럼 취급하는 사람들이나 모두 잘못되었다고 생각해 왔기 때문에 저자의 시각이 올바르다고 느껴졌습니다.

 

개인적으로 생각할 때 역사적 예수에 관한 논쟁을 다루고 있는 1부는 일반 성도들이 보기에는 조금 딱딱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2부는 목회자들은 물론 일반 성도들에게 커다란 통찰력을 갖게 해 줄 만하다고 생각했습니다. 2부에서 저자는 네 개의 복음서에서 소개하고 있는 예수님에 대한 각각의 시각에 대해 깊이 있은 통찰력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 대해서도 각각의 복음서가 어떻게 서로 다른 모습으로 소개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보여주고 있었는데, 평소에 생각해 보지 않았던 부분이라 무척이나 신선하고 유익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예수님을 부르는 호칭에서도 각각의 복음서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도 소개되고 있습니다. 특히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을 토라의 화신으로 그리고 있다는 지적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믿지 않는 자들만이 예수님을 선생이라 부르고, 제자들이나 다른 믿는 자들은 예수님을 주님이라 불렀다는 지적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저자가 베네딕트 수도원 수사 출신의 감리교 목회자라는 점 때문인지 저자가 권면하는 '예수 배우기'라는 개념에서 카톨릭적인 영성훈련의 냄새가 나기는 하지만, 방법론적인 면에서 볼 때 침묵과 묵상을 넘어서는 신비주의적인 방법은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자가 '예수 배우기'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겸손한 태도와 지속성입니다. 예수님을 다 알 수 없고, 또 예수님이 계속해서 일하고 계신 이상, 우리의 배움 역시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는 예수님을 어떤 고정된 틀에 가두려는 시도를 포기하고 그분의 역동적인 활동에 동참함으로써(제자도의 실천을 통해) 예수님을 계속해서 배워가고, 닮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영성서들이 신비주의적인 방식의 영성훈련을 강조하면서 방법론에 치중하고 있다면 이 책은 이론적인 면을 더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벼운 느낌이 들지 않아 좋습니다. 그렇다고 너무 무겁지도 않고 적당한 수준에서 지성과 감성을 자극하는 괜찮은 책이었습니다. 사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에 대해 공부하기를 원하는 분들이나, 영성훈련에 관한 책 중에 좀 더 깊이 있는 책을 기다려 왔던 분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책이 아닌가 싶습니다.

 

 

[네이버 북카페를 통해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된 서평입니다. 본 서평은 작성자 본인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하여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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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아프다 - 김영미 세계 분쟁 전문 PD의 휴먼 다큐 에세이
김영미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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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나는 알게 됐다. 어떤 이념도 아이들의 밥 한 끼보다 중요하지 않음을, 어떤 종교도 한 여성의 자유보다 소중하지 않음을.."이라는 김미화씨의 추천사가 눈에 들어와 읽어 보게 되었습니다. 얼마 전 읽었던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신은 위대하지 않다'라는 책을 통해 세계의 수많은 분쟁이 바로 '종교'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한 사람의 종교인으로써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또 다시 종교로 인해 고통을 받는 여성들에 대해 듣게 되니 무슨 내용인지 살펴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읽는 동안 계속해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눈물이 고이기도 여러 차례였습니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벌어진 비참한 상황이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느껴졌습니다. 전쟁으로 인해, 그리고 종교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남의 일 같지 않게 느껴졌습니다. 특히 아프가니스탄의 여성들이 겪고 있는 고통이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모든 교육의 기회를 박탈당해야 한다는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19세기도 아니고 21세기에 이런 일이 여전히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었습니다. 또한 여성이라는 이유로 남편의 다른 소유물보다 전혀나을 것 없는 비인격적인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도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더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은 사소한 이유로 아내를 때려 죽여도 남편은 마땅한 처벌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단지 아내가 시를 써서 출판했다는 이유만으로 남편이 아내를 살해했던 사건을 보면서 정말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딸, 자신의 여동생이 비참하게 맞아 죽었는데도 그것에 대해 아무런 문제제기도 하지 않는(오히려 잘 됐다는 반응을 보이는) 부모 형제에 대해 극도의 분노를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종교' 때문이라는 사실에 더 더욱 분노를 느꼈습니다. 


그런데 '종교'를 통해 벌어지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은 여성차별에 국한된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탈레반)은 여성이 교육을 받는 것만을 금지했을 뿐만 아니라, 남성이든 여성이든 시를 쓰거나 가요를 부르는 것까지도 금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악기점과 레코드 가게가 폭탄 테러를 당하고, 가수들도 테러를 당할 뿐만 아니라, 결혼식이 벌어지고 있는 곳까지도 테러를 당하는(세상적인 음악을 연주했다는 이유로)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솔직히 탈레반의 이러한 극단적인 모습을 보면서 최근 들어 한국 기독교 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근본주의로의 회귀 바람이 자연스럽게 떠올랐습니다. 그들은 가요는 물론이고 가스펠, 또는 CCM까지도 세속적이고 악마적이라면서 자신도 듣지 않을 뿐 아니라 자녀들은 물론이고, 주변 교인들에게도 듣지 말라고 권유하는 극단적인 태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 뿐만 아니라 같은 기독교인이라도 교리적으로 다르다고 판단되면 이단이라 정죄하면서 사람 취급도 하지 않는 태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슬람 근본주의나 기독교 근본주의나 별반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은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으로써 대접받아야 마땅한데, 단지 경전에 대한 해석이 다르고, 세상을 대하는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사람 취급도 하지 않는 것은 참으로 옳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종교가 참 된 종교라 할 수 있는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사람'의 소중함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삶'이 얼마나 소중한 지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정'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비록 치열한 분쟁이 벌이지고 있는 지역이었지만 저자의 따뜻한 시선을 통해 '사람 사는 모습'을 제대로 들여다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발견되는 가족 간의 사랑과 이웃 간의 사랑, 그리고 손님에 대한 따뜻한 환대를 통해 깊은 감동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특히 딸 아이가 더 나은 세상에서 살기를 바라면서 저자에게 딸아이를 억지로 떠맡기고 갔다가 밤새 잠을 못 이루면서 울다가 새벽같이 찾아와 딸을 돌려달라고 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면서, '아, 엄마란 저런 것이지'라는 감동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책의 말미에서 저자가 소개하고 있는 여러 구호 단체에 대한 소개에서도 커다란 감동을 느꼈습니다. 특히 소아마비 예방 주사에 대한 오해를 풀기 위해 탈레반 사령관을 직접 찾아가 추천서를 받아낸 유니세프 직원의 이야기나, 적십자사 직원들의 희생적인 섬김에 관한 이야기는 역시 마음을 울려 왔습니다.


2000년 대에는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가 있었다면, 2010년 대에는 '사람이 아프다'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이 책은 감동적이며 또한 도전적인 책입니다. 특히 종교적으로는 열심이 있지만 정서적으로 메말라 있는 분들에게 권해드리고 싶은 책입니다. 사람 사이에 따뜻한 정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세상은 살만한 곳이며, 그러한 따뜻한 정을 나누어 주는 일이야말로 사람으로써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강력하게 추천합니다.

 

 

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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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4.0 로드맵 - 모두가 행복한 자본주의는 꿈이 아니다
김덕한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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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에는 날마다 조선일보를 읽으면서(주로 이규태 코너나 토픽 위주였지만) 자랐지만, 청년기를 지나면서부터는 조선일보를 거의 읽지 않았습니다. 소위 '조중동'이라는 세 글자로 대변되는 메이저급 신문사들에 대한 반감이 청년기를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몸에 배어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던 시리즈 기사를 묶어 펴낸 책 따위에 관심을 가질 이유는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출판사 카페에 들어갔다가 이 책의 표지 시안 중에 출판사에서 선택한 시안을 맞춰 보는 이벤트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두 가지 표지 시안 중 하나는 당연히 현재의 책으로 출판되어 나온 표지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주변에 다양한 동물들(병아리, 토끼, 다람쥐)을 품고 있는 사자를 그려놓은 것이었습니다. 저로서는 그 그림을 보자마자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출판사에서도 그 표지를 최종적으로 선택했을 것이라 생각하고 그쪽에 표를 던졌는데 결과는 현재 출간되어 나온 책 표지가 말해 주고 있습니다.

 

어쨋거나 제가 이 책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바로 그 그림 때문이었습니다. 맹수와 순한 짐승(강자와 약자)들이 함께 어울려 살 수 있는 사회의 모습을 그 표지는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그 표지를 보면서 이사야 11장에 묘사된 천국의 모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는데, 바로 그 점이 제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 이사야 11:6-8)

 

그런데 한편으로는 "과연 자본주의를 가지고 그러한 천국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신자유주의가 주도하고 있는 현재의 자본주의 시스템은 약육강식의 시스템이요 무한경쟁의 시스템이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승자독식이라는 표현도 자주 사용하고 있더군요. 저로서는 성경에서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는 맘모니즘에 사로잡혀 버린 자본주의 시스템에는 더 이상 소망이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차였습니다. 또한 지금보다 더 빈부격차가 벌어진다면 머지않아 과거의 공산주의 혁명에 못지않은 반작용이 반드시 나타날 것이라 생각하고 있던 차였습니다. 그래서 북유럽 같은 사회민주주의가 대안이 아니겠는가라고 잠정적인 결론을 내리고 있던 차였습니다. (저자는 노무현 정부가 북유럽을 좇아가다 실패했다고 말하는데, 저로서는 거기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국민들의 의식수준이 아직 그만큼 자라지 못했을 뿐이지 앞으로도 그와 같은 시도는 계속될 것이며 결국에는 변화와 진보를 이루어낼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자는 자본주의를 통해서도 '모두가 행복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본주의 4.0 시대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본주의 4.0 이라는 용어는 저자가 처음 만들어낸 용어가 아니었습니다. 아나톨 칼레츠키라는 경제학자가 저술한 책의 제목이라고 하더군요. 그러므로 어떻게 보면 이 책의 초고라 할 수 있는 조선일보의 시리즈 기사들은 아나톨 칼레츠키의 책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들을 한국적 상황에 적용해 본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아나톨 칼레츠키의 책을 읽지 않았기 때문에 짐작일 뿐입니다만 거의 확실해 보입니다.).


저자에 의하면 아나톨 칼레츠키는 자본주의를 1.0에서부터 시작하여 4.0까지 모두 네 개의 시기로 나누고 있는데, 1.0의 시기는 고전적 자본주의 시대를, 2.0의 시기는 수정자본주의 시대를, 3.0의 시기는 신자유주의 시대를, 그리고 4.0은 이제 앞으로 자본주의가 나아가야 할 시대를 의미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저자는 보이지 않는 시장의 손과 보이는 정부의 손이 균형을 이루는 시대가 바로 자본주의 4.0 시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자의 그러한 지적은 참으로 합당해 보였습니다. 실제로 시장의 손에 모든 것을 맡겨 놓으면 탐욕이 모든 것을 지배하게 되면서 비윤리적인 사회로 흘러버릴 가능성이 크고, 정부의 손에 모든 것을 맡겨 놓으면 이상만 좇다 현실을 놓쳐 버리는 가운데 정체되고 발전없는 사회가 되어버릴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저자는 기업이 공정하게 경쟁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와 함께 정부가 철저히 원칙에 따라 시장을 감독(개입이 아니라)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미국의 여러 기업들과 비교해서, 불공정 경쟁을 통해서라도 실적을 올리고, 오너십을 지키려 하는 한국의 대기업들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을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솔직히 조선일보 기자가 이런 글을 쓰다니 하고 많이 놀랐을 정도입니다.) 특히 기아자동차의 협력업체인 동희오토가 저지르고 있는 편법적인 방식들과 롯데백화점의 1억 CMD 제도의 문제점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두드러졌습니다. 그러나 뉴스에서 크게 떠들었던 유성기업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에는 관련 완성차 회사를 (현대자동차라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는데도) ‘A자동차’라고 표기한 것을 보면 역시 조선일보 기자라 어쩔 수 없구나 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대기업의 소유와 경영을 분리해야 한다는 주장이나, 공정한 경쟁을 유도하고 정확하게 평가해야 한다는 주장, 그리고 생산과 분배 중 어느 한 편을 들어서는 안 되며, 경쟁과 배려가 공존하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얼마 전 읽었던 '이승훈 교수의 경제학 멘토링'이라는 책에서도 똑같은 주장을 접했었는데, 이렇게 비슷한 주장을 다시 접하게 되면서 보수적 입장(자유시장주의)에 서 있는 분들도 현재의 문제를 결코 가볍게 보고 있지는 않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책에서 특별히 눈에 들어왔던 내용 가운데 하나가 프랑스에서 만든 ‘경제성과와 사회진보의 계측을 위한 위원회'에서 내린 “No More GDP(국내총생산)”이라는 결론이었습니다. 이 위원회는 지금까지 국가의 능력과 국민들의 행복 척도척럼 활용됐던 GDP 대신 GNH(국가행복지수)를 높이는데 국가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고 지적했다는데, 이는 경제와 사회 진보의 측정지표가 다양한 삶의 요소들을 반영하지 못하고 오로지 생산지표에만 얽매여서 ’무한 경쟁‘의 정글 자본주의를 잉태했다는 반성을 내놓은 것이라 하였습니다.


저로서는 이러한 내용을 보면서 ‘자연적 교회 성장’ 이론을 떠올렸습니다. 이는 '건강한 교회는 자연적으로 성장하지 않을 수 없으며, 교회를 건강하게 하기 위해서는 여덟 가지 요소들이 바로 작동하도록 만들어 놓아야 한다'는 이론입니다. 특히 여덟 가지 요소들 가운데 하나라도 질이 떨어지면 그만큼 교회 성장이 지체되며, 그러한 요소가 발견되는 대로 그 요소에 핵심역량을 투입하여 그 수준을 끌어 올리기만 하면 교회 성장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이론의 주창자인 크리스티안 A. 슈바르츠는 교회를 '여덟 개의 나무판으로 둘러싸인 물통'에 비유해서 아무리 많은 물(교인들)을 붓더라도 그 여덟 조각의 나무판 중에 가장 짧은 판(질 낮은 요소)의 높이(수준)만큼 밖에는 수위(교회의 규모)가 차오르지 않는다는 점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생산지표 역시 그러한 여러 가지 요소 중의 하나일 뿐인데, 그것 하나에만 집중해 보았자 전체적인 수위를 높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간단한 사실을 찾아내기 위해 그렇게도 많은 수의 세계적인 전문가들이 동원되어야 했다는 사실이 우습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제라도 방향을 바로 잡게 되었다는 점에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한 새누리당의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이 “앞으로 (성장률이 아니라) 고용률을 경제정책 중심 지표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던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보아야 할 것이라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나 성장률이 하나의 요소일 뿐인 것처럼, 고용률도 하나의 요소일 뿐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얻은 유익 가운데 한 가지는 다양한 경제학자들과 그들의 저서들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이 책의 모티프가 된 아나톨 칼레츠키의 ‘자본주의 4.0’과 로버트 라이시의 ‘위기는 왜 반복되는가’라는 책은 꼭 읽어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금 더 젊었을 때에는 극단적인 입장에 서서 "모두 다 싹 갈아엎어야 하지 않나"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나이가 점점 들어가면서는 "균형을 위해 나아가되 점진적으로 변화되어 가는 것이 더 나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 저에게 있어 이 책은 ‘점진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입장에 서 있는 것으로 보였고, 보수주의자들의 입장에서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정도로 ‘부드러운’ 어조를 통해 ‘좀 더 진보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충분히 만족할 만큼 강한 톤은 아니었지만 이 나라의 경제 현실에 대해 깊이 있는 사정까지 들여다 볼 수 있었고, 세계적인 학자들의 주장도 들어볼 수 있었던 점이 커다란 유익이 되었습니다.


한편으로 저자는 자신의 주장이 보수주의자들에 의한 반대에 부딪칠 것을 염려하고 있는 듯이 보이기도 했습니다. 자본주의가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사회주의로부터 취한 장점들을 통해 계속해서 진보해 왔기 때문이라는 것을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었던 것이나, 유럽의 복지제도가 가장 보수적인 정권에 의해 처음으로 시행되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었던 것을 보면서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또한 복지의 중요성을 말하면서도 보편 복지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밝히고 있는 것을 보면서 보수주의자들의 주장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앞에서는 기초생활급여 예산을 줄일 수 있었던 것이 부정 수급자들을 걸러 낸 결과라고 이야기하면서도 뒤에 가서는 마치 보육예산(보편적 복지 차원의)을 늘리기 위해 기초생활급여 예산을 줄인 것처럼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저자가 여전히 균형점에 서 있기 보다는 보수주의적인 입장에 기울어 있다는 느낌을 받게 하였습니다.


솔직히 말해 가난한 사람들보다는 부자들이 더 많은 세금을 내고 있는데, “왜 울트라 부자들에게까지 보육료를 지원하느냐”고 말하는 것은 “너희는 부자니까 세금만 내라. 그리고 혜택은 꿈도 꾸지 말아라”하는 이야기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는 결코 공정한 입장에 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세금을 냈으면 조금이라도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 공정한 처사입니다. 그 부자들에게는 껌값에 불과한 보육료일지 몰라도, 그런 지원이라도 받아 보아야 “내가 낸 세금이 이렇게 사용되는구나, 내가 낸 세금이 이렇게 돌아오는구나”라는 것을 체감할 수 있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어야 세금 낼 기분도 생기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의무만 부과하고 권리는 전혀 주지 않는다면 그러한 제도는 절대로 지속될 수 없을 것입니다.


저자가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복지는 '사회안전망이 제대로 기능하고 있느냐'와 '지속 가능하냐'의 차원에서 보아야지, 보편적 복지냐 선별적 복지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데 저자는 앞에서는 그렇게 이야기해 놓고 뒤에 가서는 이처럼 '보편적 복지는 잘못된 것이다'라는 식으로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저자의 치우친 성향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쨌거나 이 책은 '사회주의를 쫓아가자'는 취지의 책이 아니고, '자본주의를 더 잘 발전시키자'는 취지의 책이니 그런 입장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닙니다. 그러나 완전히 동의할 수 없는 주장도 전혀 없지는 않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었습니다.


저처럼 보수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해 조금의 고려할 만한 가치도 없다고 치부해 왔던 분들이 읽어 보면 좋을 것 같은 책입니다. 그리고 보수적인 입장에 서 계신 분들이라면 이 책의 내용 가운데 마음에 와 닿는 부분이 저보다는 더 많을 것 같습니다. 진보적인 입장이든 보수적인 입장이든 극단적인 입장을 피하고 조심스럽게 균형점을 찾아가려는 노력이 요구되는 이 시점에, 이 책은 그러한 노력의 바람직한 예로써 부족함이 없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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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가슴을 다시 뛰게 할 잊혀진 질문 - 절망의 한복판에서 부르는 차동엽 신부의 생의 찬가
차동엽 지음 / 명진출판사 / 2011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이병철 회장이 세상을 뜨기 한 달 전에 남긴 24가지 질문에 대한 답변이라니 목회자로서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특히 삶과 죽음, 그리고 신에 관한 질문이라는 점에서 반드시 읽어두어야 할 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책을 펼치자마자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병철 회장이 남긴 질문은 24가지인데 이 책에서는 겨우 15가지 질문에 대한 답만을 이야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15가지 질문에 저자가 덧붙여 놓은 몇 가지 부수적인 질문도 있었는데, 그보다는 차라리 24가지 질문에 대해서만 충실하게 답변해 주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중앙일보(2011.12.17)에 실렸던 저자의 대담이야말로 이병철 회장의 질문에 대한 더 성실한 답변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목도 그렇게 마음에 와 닿지는 않았었는데, '잊혀진 질문'이라기보다는 '잊혀졌던 질문'이고, '내 가슴을 다시 뛰게 할'이라기보다는 '내 가슴을 다시 뛰게 한' 질문이라 보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내용 역시 그렇게 깊이있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특히 '고통은 신의 조화가 아니라 철저히 자연현상'이라는 저자의 대답은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저자의 말대로라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수많은 고통 역시 하나님과 상관없이 우연히 벌어진 일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데, 그러한 견해는 결코 성경적이라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많은 신앙인들이 하나님의 현세적 심판을 부인하면서 오직 내세의 심판만을 강조하는 것을 보게 되는데, 성경은 결코 그렇게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에 대한 기록을 보면 하나님께서 직접 그들을 죽이셨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역시 사도행전에 기록된 바예수의 경우 바울의 기도와 그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으로 인해 즉시로 소경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만들어 놓고 멀리서 구경만 하시다가 마지막에 심판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세상 일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시는 분이십니다. (구약 시대의 소돔과 고모라에 관한 기록은 이에 대한 더 분명한 증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창조론과 진화론에 대한 입장에서도 지나치게 진화론 편으로 기울어 있는 듯한 모습도 조금은 불편하게 느껴졌습니다. 저 역시 저자와 마찬가지로 소진화를 인정하는 입장에 서 있지만, 젊은 지구론에 대해 단정적으로 틀렸다고 말하는 저자의 태도에 대해서는 조금 더 유보적인 자세를 보여주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고통에 대한 해석, 행복에 대한 해석, 가룟 유다의 행동에 대한 해석, 좋아하는 일을 선택하라는 조언과 같은 내용은 상당히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게다가 저자의 문학적 소양과 글솜씨는 참으로 대단하다고 느껴졌습니다. 다양한 시와 기타 문학 작품들을 자연스레 인용하는 솜씨와 다양한 통계자료들을 적절히 사용해서 설명하는 솜씨는 참으로 탁월하다고 느껴졌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어령 교수의 글과 많이 비슷하다고 느껴졌는데, 쉽게 읽히면서도 은근히 마음을 움직이는 무엇인가가 글에서 느껴졌습니다.

 

개인적으로 저자의 답변이 성경에 충실한 답변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 내에서 충분히 고려해 볼 만한 답변이라는 생각은 듭니다. 또한 이병철 회장의 24가지 질문에 대한 '묵직한 대답'을 원하는 분들에게는 지나치게 가볍다고 느껴질 수도 있을 만한 책이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무지개 원리'를 읽고 저자에 대해 호감을 가지게 되신 분들이라면 '하나님'과 '인생'과 '고난'에 관한 저자의 답변에 충분히 만족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저자는 저를 근본주의적이고 문자주의적인 성경 해석에 묶여 있는 사람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한 개신교 목회자라고해서 모두 다 저와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저자의 글에 나타난 견해가 저와 비슷한 입장에 서 있는 개신교인들에게는 많이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겠다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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