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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 무엇이 가치를 결정하는가
마이클 샌델 지음, 안기순 옮김, 김선욱 감수 / 와이즈베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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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으로 우리는 무엇을 사야 하나?'



앞선 글의 제목에 대해 코웃음을 치는 사람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돈의 소유가 이미 모든 것의 소유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시장만능주의 속에서 돈으로는 세상에서 못할 것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이 책을 바로 그러한 사람들에게 일격을 가하고 있다. 


돈으로 살 수 있는 것과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의 경계를 끊임없이 일깨워주는 이 책은 시장경제의 뿌리가 생활영역에까지 확장돼 시장사회로 뻗어나가는 시장주의의 일방통행에 세워진 이정표와 같다. 수요와 공급의 법칙으로 재화가 생산되고 구매되는 시장에 속한 영역이 건강, 교육, 가정생활, 자연, 예술, 시민의 의무와 같은 비시장적 영역에까지 그 세력을 키워나가려 할 때, 이 책의 저자는 넌지시 우리에게 주의를 준다. 과거엔 상상하지도 못했던 비시장적인 것들의 시장화를 성급히 하려하기 앞서서, 그것의 가치를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이나 잣대를 진지하게 고민해보라고 말이다. 그래서 앞선 '돈으로 우리는 무엇을 사야 하나?' 라는 질문에는 만능처럼 보이는 돈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감히 건드릴 수 없는 성역과도 같은 것이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합리성과 효율성이라는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그 성역들은 시장에 대해 적절한 기준과 잣대를 통해 그 윤곽을 뚜렷하게 드러내게 된다. 저자는 그 기준과 잣대를 도덕성과 공정성을 꼽는다. 잃어버렸던 혹은 놓쳐버린 시장의 도덕성과 공정성을 되살린다면 우리는 돈으로 무엇을 사야하는지, 무엇을 살 수 없는지가 보다 뚜렷하게 보일 것이다. 


저자는 이 책의 일관된 질문을 서두에 제시하면서, 5개의 챕터에 걸쳐 구체적인 일상 영역을 포착해내고 곳곳에서 그 질문을 적용하고 있다. 새치기와 줄서기의 도덕에 대해, 인센티브와 도덕적 혼란에 대해, 시장과 도덕, 삶과 죽음의 시장, 상업주의라는 큰 틀 속에서 구체적인 실사례를 곁들어 자칫 추상적으로 겉돌 수 있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질문에 숨을 불어 넣는다. 그가 미리 제시하고 준비해 놓은 질문과 사례들을 따라가다 보면, 읽는 독자들에게도 어느 새 어떤 '의견'이라는 것이 생성된다. 그리고 어느덧 우리는 당장 저자와 불러놓고 이런 저런 토론을 하고싶어진다. 이것이 바로 지난해 붐을 일으켰던 'JUSTICE정의란 무엇인가'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던 저자의 토론진행 능력이다. 저자는 책이라는 어쩌면 간접적인 수단을 이용해 독자와의 활발한 소통을 꾀하는 재주를 가지고 있다. 이 책에서도 역시 그 면모가 숨김없이 드러난 덕분에, 어찌되었든 독자들은 말하고 싶은 의견과 생각으로 입이 근질근질해진다.


책은 그 흔한 맺음말이나 결론을 내리고 있지 않다. 하지만 저자가 풀어놓은 풍부한 일상 속의 생각거리를 따라가다 보면, 독자들 나름의 의견이 생겨난다. 뜬금없이 책이 끊겼다는 느낌을 받았던 나와 같은 독자들은 내가 속한 일상에서의 시장과 사회에 대해 생각해보고 나만의 결론이라는 걸 가지게 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저자가 의도한 바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책은 돈을 가진 사람들이 던질 수 있는 유일한 질문이 "얼마죠?" 이 되어버린 지금의 시장만능주의 속에서 우리가 시장을 향해 그리고 사회를 향해 던질 수 있는 질문을 계속 추가하기를 주문한다. 


자칫 돈이 전부가 되어버린 듯한 세상에 갑갑함을 느꼈던 사람들은 이 책에서 한동안 긁지 못했던 등 언저리를 누군가 긁어주는 듯한 시원함을 느낄 것이다. 시장주의의 질주 속에 덩그러니 세워진 이정표같은 이 책을 읽은 후의 우리가 내딛을 한 걸음씩의 방향은 결정하는 것은 이제 읽은 이들의 몫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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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길그레이트북스 81
한나 아렌트 지음, 김선욱 옮김 / 한길사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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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고 혼란스러웠다. 딱딱한 문체와 나치즘이란 이름 아래 행해진 유대인 강제수용과 학살에 대한 내용도 그 한 몫을 하긴 했지만, 책을 읽는 내내 그리고 읽고 난 후에도 혼란스러움이 가시지 않았던 것은 '악의 평범성' 때문이었다. '국가의 행위'와 '상관의 명령에 따른 행위'로서 인간의 보편적인 양심을 가리려 했던, 그리고 자신의 행위는 신 앞에서 유죄라고 느끼지만 법 앞에서는 아니라고 말하는 아이히만은 '악'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준다. 개인의 비틀린 내면적 심리상태에서뿐만 아니라 또 다른 곳에서부터 악이 형성될 수 있다는 관점을 일깨워주는 아이히만은 그래서 더욱 나의 혼란스러움을 가중시켰다.

 

독일의 나치스 친위대 중령으로 제2차 세계대전 중 수백만 유태인을 학살한 혐의를 받은 전범인 아돌프 아이히만. 이 책의 저자 아렌트는 예루살렘 법정에서 이뤄진 아이히만의 재판과정을 취재한 르포와 아이히만의 일생을 적절히 서술해가며 글의 흐름을 이어나간다. 바로 이 점에서 섬뜩함을 느꼈다. '나치스독일의 유대인학살 책임자'로 간결하게 표현되는 그의 위대한 업적과 지위보다 지극히 평범한 생애를 가진 한 인간이 어떻게 그런 '악'을 행하고 아무런 반성과 자책감을 가지지 못하는가. 아이히만, 그는 당시 존재하던 나치 법률 체계 하에서는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고, 그가 기소당한 내용은 범죄가 아니라 '국가적 공식 행위'이므로 복종을 하는 것이 그의 의무였다고 말하는 그에게서 나는 섬뜩한 공포를 느꼈다.

 

저자는 아이히만의 이러한 사고와 행동에 대해 말하기의 무능성, 생각의 무능성, 그리고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기의 무능성과 매우 깊이 연관되어 있다고 분석한다. 세번째의 무능성은 곧 옳고 그름을 가리는 능력인 판단의 무능성을 의미한다. 아이히만의 경우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렇게 개인의 생각과 판단의 무능함에 일조하는 것은 어쩌면 개개인이 만들어낸 국가라는 허울과 상상이 아닐까 한다. 나치즘으로 표방되는 전체주의는 국기, 국가, 자극적인 슬로건으로 소위 '국민'을 호도하고 선동했다. 이로 인해 "국민의 이상인 국가를 위해서라면 어떤 것, 특히 어떤 사람이라도 다 희생시킬 각오가 되어있는" 아이히만적 이상주의자가 양산되는 것이다. 이는 개개인은 생각과 판단의 능력뿐만 아니라 인간됨의 기본적 근거조차 상실하게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독일이라는 국가와 아이히만이라는 개인은 서로간의 합리성으로 비합리성을 초래했다고 볼 수 있다. 법의 통치가 비록 폭력과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상태를 제거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기는 하지만 그 자신의 존립을 위해서는 항상 폭력적 도구를 필요로 하는 것처럼, 국가는 자신의 생존과 합법성의 생존을 확고히 하기 위해 일반적으로 범죄로 간주되는 행위를 하도록 개인에게 강요한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존경받을만한 사회 전체가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히틀러에 굴복했기 때문에 사회적 행위를 결정할 도덕적 준칙들과 양심을 인도할 종교적 계명들은 사실상 소멸해버린 것이기도 하다. 이처럼 국가적 이유는 필연성에 호소하며, 그 이름으로 저질러진 국가적 범죄들- 전쟁이나 대학살-은 권력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문명화된 나라들의 법에서 양심의 소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살인하지 말라"고 말하지만 그 시대 히틀러의 땅의 법은 양심의 소리가 모든 사람에게 "너는 살인할 지어다"라고 말하기를 요구한다. 비록 살인이 대부분의 사람들의 정상적인 욕구와 성향에 반한다는 것을 대량학살 조직자가 아주 잘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아이히만은 자신이 명령받은 일, 즉 수백만 명의 남녀와 아이들을 상당한 열정과 가장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죽음으로 보내는 일을 하지 않았다면 양심의 가책을 받았을 거라고 말한다. 시대와 역사는 실체적으로 지각될 수 있는 아이히만 개인에게서 특수화된 악마의 모습을 부각시키지만 평범한 악의 모습은 실체없는 국가라는 이름아래 숨어 있다.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근원에서 나오는 악의 평범성은 그래서 파랑새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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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만원 세대 - 절망의 시대에 쓰는 희망의 경제학 우석훈 한국경제대안 1
우석훈.박권일 지음 / 레디앙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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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유신정권을 겪은 20대 젊은이의 부모세대이기도 한 유신세대, 그리고 베이비 붐 세대이자 정치적 단결성이 높은 386세대는 현대의 10대와 20대를 어떻게 바라보고 정의내릴까? '집단적 성향보다는 개인적 성향이 강하고, 자기만의 색깔이 뚜렷한, 남보다 나에 집중하는 세대'라고 바라본다면,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잘못 짚으셔도 한참 잘못 짚으셨습니다' 하고 말이다. 물론 세대간의 차이와 갈등이 일어나는 것은 세대간서로 자라온 성장배경과 역사경험이 다르기 때문이고, 또한 이러한 서로의 경험들을 '직접' 경험해보지 못한 윗세대는 아랫세대에 대해 그저 막연히 '유추'할 뿐이다. 그들이 처해있는 진짜 상황이 어떤 것인지, 이러한 지경이 되도록 한 것에 자신의 세대들이 상당 부분 일조했다는 사실조차 제대로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요즘 젊은 세대에겐 낭만이란 것이 없다'고 진단한다면, 그나마 앞선 대답보다는 훨씬 정답에 근접하다고 말할 수 있다. 낭만이 없다는 것이 단순히 제멋대로인 삶을 사는 재미를 말하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다양한 사람들간의 만남이 줄어들고 다양한 생각들간의 교류가 원활하지 않게 되는 것에서 '낭만이 없어졌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명제의 물음에서 이 책은 출발하게 되지 않았을까. 성실하게 살기를 강요받으면서 꼼짝할 수 없이 공부라는 틀에 묶여있는 지금의 10대, 20대와, 젊은 시절에 낭만을 한껏 누렸던 사람들 -소위 유신세대와 386세대-이 같은 사회, 같은 국민경제 속에 살면서 발생하게 되는 '불균형'에 대해 이 책은 말하고 있다. 10대, 20대가 처해있는 상황에 대해 비교적 객관적인 시각으로 해석하고 이들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 사회적 배경을 낱낱이 해부하는 책의 저자는 지금의 10대, 20대에게 어울릴 만한 이름으로 '88만원 세대'를 붙여준다.


88만원 세대-전체 비정규직의 평균 인금과 전체 임금에 대한 20대의 임금 비율을 곱한 숫자인 88만원이라는 이름은 그 숫자가 의미하는 급여의 높고 낮음을 떠나, 아무리 노력해도 한국사회에서 계속되는 악순환의 굴레 속에 얽매여 살아가야 하는 그들의 음울한 현실상을 적나라하게 들추어내고 있다. 지금의 10대는 바로 옆에 앉은 친구를 가까운 적으로 두고서 공부로, 시험점수와 등급으로 경쟁해야 하는 배틀 로얄에 처해있고, 그러한 과정을 이미 겪어온 20대는 곧 그들이 직접 맞부딪히게 될 사회가 강압하는 살벌하고 무자비함 속에서 그 전보다 더한 경쟁을 겪게 된다. 더욱 무서운 것은 표면적으로 이것이 세대 내의 경쟁으로 보이지만 더 깊게 파고들어 보면 세대 간의 경쟁, 그것도 경쟁이라 일컫기도 무색한 승자독식의 게임으로 변질돼 있다는 것이다. 경쟁이라 함은 동위상에 놓여진 수많은 남들과의 선의의 교류 속에서 더 나은, 더 좋은 무언가를 도출할 수 있도록 해야함을 의미하는 것 같지만, 적어도 지금의 한국사회에서는 긍정적 의미의 경쟁은 통하지 않을 것 같다. 이것이 당분간 지속되다 그칠 현상이라면, 이것이 이 사회가 선진국으로 나아갈 마지막 난관이라면 다행이지만 지금의 10, 20대뿐만 아니라 앞으로의 10, 20대에게도 이 현상이 되물림되고 10, 20대를 칭하는 용어로 88만원 세대가 굳어져 버린다면 이 사회에 과연 앞으로의 미래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을까.


적자생존이 아닌 강자생존의 사회는 젊음과 패기로 뭉친 젊은이를 떠들어대지만 실상 그러한 젊은이들이 마음껏 기량을 펼칠 수 있는 최소한의 안전망조차도 마련해두지 않고 있다. 아니, 이 사회를 주름잡고 있는 윗세대들은 아랫세대에 대한 관심이 부재하다. 관심을 기울일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다.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와 예의를 문제해결의 첫 단추로 삼아 모든 사회의 구성원이 이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고 해결의 의지와 행동을 보인다면 대한민국의 10대와 20대는 그저 살아남기 위한 비정상적인 획일적 반복에서 벗어나 말그대로 젊은이들이 될 수 있을 것이다. 10대의 첫 섹스가 슬프지 않은 다른 여느 나라의 젊은이들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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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지성이란 무엇인가 - 우리는 나보다 똑똑하다
찰스 리드비터 지음, 이순희 옮김 / 21세기북스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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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생각하는 것,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


지금까지 내가 받아왔던 교육은 7차교육과정에 입각한 교육이었고, 그 교육과정이 표방하던 다양한 인재상 중에서 가장 강조되었던 것은 바로 '창의성'이었다. 어떤 과목에서든, 어떤 문제에서든 학생에게 요구하는 것은 창의적인 사고와 대답이었고, 선생님들은 한결같이 창의적으로 생각하고 발표할 것을 당부했다. 그러나 '창의적인 인재'를 요구하는 교육은 구시대적 사고가 아직 만연한, 주입식 교육의 경직된 분위기가 채 가시지 않은 시대에서 이뤄졌다. 그리고 그 어떤 것도 왜 우리가 '창의적'이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가르쳐 주지 않았다. 자기 내면으로만 창의성을 옭아매고 누가 더 창의적인가를 저울질하는, 한마디로 '창의성'으로 서로 경쟁하던 그 때의 교육은 창의성을 공유하지 못했다. 생각이 생각을 낳고 그러한 생각들이 모여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집단지성. 바로 이 책에서 강조하고 있는 '생각과 공유함'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있던 것이다.


그 시대에는 왜 창의성을 공유하지 못했는가에 대해 이 책은 비교적 명쾌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바로 모든 사회현상을 '사적 소유'라는 경제관념의 논리를 잣대로 해석하려했기 때문이다. 자산이 사적 소유 형태가 되지 못하면 끊임없이 경제를 움직이는 원동력이 되지 못한다는 경제논리가 교육과 문화, 예술 등의 영역에까지도 확장되어 적용되어 온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아이디어 경제에서는 경제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자본 대부분이 공유된다고 반박한다. 단순히 어떤 생산품을 구매하고 소비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던 구매·소비자는 이제 '객체'라는 범주의 틀에서 벗어나 생산품을 이용하고 피드백을 주고 더 나아가 생산품을 만들어내는 prosumer, 생비자로서 '주체'화 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이 가장 활발히 이루어지는 공간으로서 웹 커뮤니티를 중점으로 이 책은 집단지성을 말하고 있다. 웹 커뮤니티를 흔히 가상공간이라 일컫는 것도 점차 어색해지고 있다. 현 시대의 인류는 컴퓨터라는 개인통신기기로 인터넷이라는 공간에서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 자신의 삶을 확장시키고 연결시켜 나가며, 아고라를 통해 표현의 자유를 누리며 다양한 사람들과 토론의 장을 실현시켜 나가고 온라인 게임을 통해 자신과 전혀 다른 아바타로 또 다른 삶을 살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웹 커뮤니티의 기반을 구축해나가는 이들은 이것이 바로 자신의 삶 전부일지도 모른다. 보이지 않지만 실재하는 공간은 더 이상 가상이 아니라 또 다른 진짜 세상인 것이다.


책에서는 이렇듯 급진적이고 전혀 새로워 보이는 웹 커뮤니티를 통한 집단지성의 발현이 사실 더 오랜 연륜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집단지성을 이루는 핵심 근간인 공유와 상호의존은 사적 소유와 마찬가지로 생산 활동의 토대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뒷받침하고 있으며 자원의 공동 저장고를 이용하던 마을과 공동체에서 이미 오래전에 확립된 전통을 부흥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시대의 웹 커뮤니티의 시초를 이룩한 이들은 시대에서 한참을 뒤처져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그 시대를 앞서간 셈이 된다. 또한 집단지성의 미래에 대해 건전한 비판을 수용하면서도 그로부터 비롯되는 우려를 극복해나갈 방향을 제시해주는 이 책의 저자는 집단지성이 민주주의와 평등, 자유에 이익이 되도록 스스로와 더불어 확장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모든 것에 빛과 그림자가 존재하듯 보이지 않는 '웹' 현실에서 부정적인 결과가 초래될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다. 그러나 지성을 이룩하는 집단은 더 이상 주어진 현실을 비판없이 받아들이는 수동적인 객체가 아니라 생각을 말하고 공유함으로써 또 다른 현실을 만들어나가는 능동적인 주체로 본다는 것이 이 책이 시사하는 가장 중요한 핵심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이는 나아가 지금의 현 시대와 미래를 꿰뚫어 볼 수 있는 새로운 시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10년이 지난 지금의 교실은 어떨까. 그 곳에서 창의성을 생각해내기 위해 '혼자서' 끙끙대며 마치 시험을 풀 듯 창의성을 풀고 있는 그 때의 내 모습이 아니라 스스로 혹은 다르게 생각하는 학생들이 모여 '함께' 생각을 나누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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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인한 국가 외면하는 대중 - 왜 국가와 사회는 인권침해를 부인하는가
스탠리 코언 지음, 조효제 옮김 / 창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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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표지의 앞뒤에 그려진 두 손은 무엇인가를 가리고 혹은 막고 있다. 번역된 제목에서는 잘 읽어낼 수 없는 책의 주제와 가려져있는 그 무언가는 바로 부정, 'States of Denial'이다. 원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국가의 잔인함과 외면하는 대중을 '부정'이라는 핵심 틀로 풀어나간다. 진실을 보려하지 않는 국가와 대중은 자신과 서로의 눈을 가리고, 혹여 진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입을 막은 채 말하지 않는다.


사람은 누구건 간에 따뜻하고 좋은 것, 선한 것에 마음이 끌린다. 반대로 차갑거나 무서운 것, 악한 것은 멀리 한다. 그것이 인간 본성에 의한 것이든, 이분법적 기준을 학습하고 체득한 것이든 간에 '권선징악'을 따르게 마련이다. 하지만 이것이 타인과 함께 사회를 이루며 살아가는 곳에서의 특정한 객관적인 사실, 진실로서 옮겨간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가난하고 불안정하고 폭력으로 찌든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삶의 조건이 유난히 잔혹하고 고통스러운 곳에서 군대와 난민, 암살대와 기근을 매일 대면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명백한 사실들을 접하게 되면 사람들은 나와 상관없는 그들로 타자화해 먼 거리에서 지켜볼 뿐이다. 그들의 삶이 안타깝고 딱하더라도 그러한 사실을 눈감아버리고 외면한다. 관점과 해석의 차이로 묘사되는 사회적 고통은 의식의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 자체로 악한 것은 피해야 한다. 하지만 악한 누군가의 행위로 인해 고통받는 인간과 삶마저 악한 것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러한 진실을 외면해버리기 일쑤다. 이런 행동이 오히려 더욱 큰 악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한 채로 말이다.


이 책은 인간이 외면하고 싶은 고통스런 행위와 그로 인한 현상을 인권침해로 간주하고, 인권침해의 가해자이면서도 그러한 행위를 부인하는 국가와 가해자, 그리고 인간의 사회적 고통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부인하는 일반대중의 경향을 사회심리학적 분석과 역사적 진실 속에서 파헤치고 있다. 일반대중의 부인, 무관심, 소극성에 대해 비써르트 호프트는 '아는 것 knowing'과 '모르는 것not knowing' 사이의 어스름한 상태로 규정한다. 이에 저자는 우리가 이런 일을 '알려고만' 했다면 모든 일을 이해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부정이 아닌 시인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골치아픈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현실을 직시해야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폭로하고 도전하고 허물어뜨려야 할 어떤 것에 있어 일종의 정도를 벗어난 부인의 상태를 허물 수 있는 첫걸음이 될 수 있다. 고통을 대변하는 표현들을 많이 접할수록 이 문제에 접근하는 올바른 방법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부인이 일으킬 수 있는 정말 위험한 상태는 바로 '소통의 부재'가 아닐까 한다. 무지의 상태에서의 부인이 아니라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의 부인은 어떠한 변화도 이끌어낼 수 없다. 말하지 않고 외치지 않는 것은 불통을 넘어선 소통 자체의 부재를 뜻한다. 외면하고픈 사실이라 할지라도 이를 고쳐나가기 위한 움직임을 이끌어가기 위해선 시인을 통한 소통의 트임을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그러한 일들은 개개인의 의식에 등재되고 소화될 수 있으며 정책이나 여론을 만들어내고 바꾸어나갈 수 있는 단초가 될 수 있다.


알고 있는 것에 대해 눈감아버리지 않고 떳떳하게 인정할 수 있는 용기, 그리고 더 나아가 이에 대해 끊임없이 소통하고 갈등하면서 변화의 움직임을 만들어가려는 관심과 태도를 국가와 대중 모두가 가진다면 외면하고픈 진실 속 존재들-어쩌면 나 자신이 되어있을지도 모르는-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덜어줄 수 있지 않을까. 이제 눈을 가린 손을 떼어내어 사실을 직시하고 입을 열어 사실을 이야기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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