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HhH
로랑 비네 지음, 이주영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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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리뷰는 황금가지 서평단 이벤트를 통해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되었습니다. 


악마세계에도 행정직은 필요하다.

 이 책의 제목은 <HHhH>이다. <HHHH>도 아니고, <hhhh>도 아니고, <HHhH>요. 그 뜻은 Himmlers Hirn heißt Heydrich, "히믈러의 두뇌는 하이드리히이다.”이다. 보통사람들이 히틀러도 아니고, 히믈러에 대해 많이들 들어보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런데 이 책은 그 히믈러도 아니고 그의 두뇌라고 불렸던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라는 사람을 소재로 다루고 있다. 그럼 우선 이 하이드리히라는 사람에 대해 알아보자.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는 어쩌면 한국에서 대단히 선호하는 인물상일지도 모른다. 1차대전 이후 헬독일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혼란했던 바이마르공화국 시대에 유년기와 청년기를 보낸 그는, 성공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오오력 했다. 그리고 결국 히믈러를 사로잡은 프레젠테이션 실력으로 면접을 통과한 뒤, 각종 음모와 숙청에서 천재적인 능력을 발휘했다. 나치가 원하던 준비된‘인재’였던 것이다. 소설 속에서는 ‘장검의 밤’ 사건에서 그의 천재성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여기서 하이드리히는 조직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많은 음모와 살인을 지휘한다. 그리고 살인을 지휘하는 그의 행동은 미치광이나 무식한 과격주의자와는 거리가 멀어보였다. 오히려 매우 유능한 관료 또는 경영자의 모습에 가까웠다. 이 장면은 후일 그가 보여줄 체계적 인종청소, 포디즘을 적용한 대량학살의 예고였던 것이다.
 
 어쨌든 하이드리히라는 사람을 가장 잘 설명하는 하나의 장면은 바로 이것이다. 능력있는 관료, 조직을 위해 어떠한 일도 서슴치 않는 냉철한 인간. 그러나 동시에 그는 자기애에 가득차있는 인물이기도 했다. 체코의 총독으로 있으면서 하급자들에게 했던 일장연설이나 펜싱, 전투기 조종 당시 있었던 에피소드만 봐도 짐작할 수 있다. 한마디로 하이드리히는 전형적인 나치이면서, 실무적 능력은 갖춘 인물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흔히 나치의 악행을 생각할 때, 현장에서 그것을 직접 수행한 사람들만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보니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나치는 대마왕 히틀러와 졸개 행동대원들로 이뤄진 악마집단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학살을 더욱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던 데에는 행정관료적인 악마들의 공이 더 컸다. 조금이라도 더 빠르게 많은 사람을 죽이기 위한 그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학살은 더디게 진행되었을 것이다. 수용자들을 더 많이 실어나르기 위해 열차시간표를 짜고, 어떻게 하면 더 효율적인 살인이 가능할까 고민하고, 어디서 누구를 죽일까 고민했던 그 모든 노력들이 모여서 거대한 악을 이루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수행했던 인간들에게는 그 행동이 악마적인 행동이라는 인식도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현장에서 학살을 직접 집행한 인간들의 경우, 극심한 정신적 트라우마를 호소하는 경우도 많았지만 학살의 관리자들은 그렇지 않았다. 


소설의 주인공이 작가

 그렇다면 <HHhH>라는 소설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하이드리히? 유인원 작전의 낙하산병들? 아니면 히틀러? 내가 느끼기에 이 책의 진정한 주인공은 작가인 로랑 비네이다. 처음 이 책을 읽을 때는 하이드리히가 주인공인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당시의 나치에 대해 설명하면서 하이드리히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계속해서 알려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서술에 불과하다. 소설에서 가장 핵심적인 소품으로 사용되는 하이드리히라는 인간에 대해 설명하는 과정인 것이다. 
 소설 중반부부터는 낙하산병들이 중심인물로 떠오른다. 그러나 이들도 주인공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존재감이 크지는 않다. 그리고 후반부에 들어서면 그제서야 이 책의 주인공이 작가 자신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작가가 이러한 효과를 노렸을지는 모르겠다. 또, 다른사람들도 이렇게 느끼는지도 알 수 없다. 하지만 내가 느낀바로는 그랬다. 
 작가인 로랑 비네는 계속해서 한 가지에 대해 집착한다. 혹시 자신이 말 그대로 ‘소설’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닐까, 흔히 소설에서 나타나는 작가의 상상에 의존한 서술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다. 작가가 묘사하는 사건 당시 하이드리히가 아침에 콧노래를 불렀는지 아닌지는 기록이나 증언이 없는 한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소설가들은 거기서 소설가의 특권을 행사한다. 자신의 머릿속에 그려지는 장면을 수려한 문장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작가가 원하는 방향으로 인물이나 사건의 이미지를 증폭시킨다. 
 하지만 로랑 비네는 그러지 않는다. 만약 그런 서술을 했더라도, 뒤에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 자신의 상상임을 분명히 드러낸다. 예를들어 “알 게 뭔가?”, “그것은 모를 일이다”, 이런 식으로 사실과 자신의 상상 사이에 분명한 선을 긋는 것이다. 이 때문에도 이 소설의 주인공이 작가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게된다. 여기서 독자는 작가가 제시한 소설 속 세계와 서사를 직접 체험하거나 상상하지 않는다. 서술되는 작가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게 된다. 이렇게 작가 본인의 생각을 서술하는 간접적 방식때문에 작가는 계속해서 독자에게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게 된다. 


소설이냐, 수필이냐, 정체를 밝혀라

 위에서도 밝혔듯이 이 소설에서 작가는 소설을 쓰되, “소설”이고 싶지는 않다는 의지를 계속해서 내보인다. 그러기위해서 미친듯이 자료를 수집했던 이야기도 들려주고, 다른 소설에서 “구라”를 섞은 것 같은 내용에 대해서도 말한다. 이러한 서술방식의 효과는, 역사소설의 부정적 효과를 방지하는 것이다. 역사소설 역시 소설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갖고 있다. 즉, 책의 내용에 일정정도의 허구가 섞여있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독자는 어떤 것이 허구이고 어떤 것이 사실인지 파악하기 어렵다. 결국 독자에게 있어서 역사소설은 단지 역사를 소재로 한 소설에 불과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로랑 비네는 <HHhH>와 ‘유인원 작전’이 그런 방식으로만 소비되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 같다. 특히 소설 말미에 작가가 등장인물들을 향해 드러낸 감정을 생각해보면 더더욱 그렇다. 

410쪽
 -용감한 무비시, 영웅 얀 쿠비시, 하이드리히를 죽인 사람, 쿠비시가 죽는 장면을 쓰기까지 힘들게 몇 주가 걸렸지만 전혀 즐겁지가 않다. 남는 게 무엇일까?

414쪽
 -사실대로 말하면 이 이야기를 끝내고 싶지 않다. 지하실에 있는 낙하산병 네 명이 포기하지 않고 터널을 파기로 하는 순간에서 이야기를 영원히 멈추고 싶다.

 그리고 나치게 희생당한 사람들에 대한 서술에도 작가의 안타까운 감정이 드러난다. 로랑 비네가 유인원 작전을 다룬 소설을 쓰기로 마음먹었던 이유는 이러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자신의 글로 표현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두께는 중요하지 않아요

 <HHhH>를 읽기 전에 두께만 봤을 떄에는 순간적으로 엄청나게 겁이났다. 거기다가 이렇게 두꺼운 책을 줘놓고 2주안에 다 읽고 서평까지 쓸 생각을 하니 눈 앞이 캄캄했다. 그런데 막상 읽다보니 페이지가 굉장히 빠르게 넘어갔다. 우선, 작가가 자신이 겪은 일들과 스스로의 생각을 적어놓은 부분이 굉장히 쉽게 읽혔다. 그리고 250개가 넘는 챕터로 이뤄져 있어서 책의 밀도가 낮았기 때문에 그다지 부담스럽지도 않았다.  또, 페이지가 빠르게 넘어가다보니 성취감이 들어서 더욱 신나게 책을 읽었던 것 같다. 앞으로 책을 고를 때 페이지 밀도를 참고해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하이드리히 암살사건이라는 소재를 알고 있는 독자로서는 책이 다 끝나가는데도 하이드리히 암살작전이 나오지 않아서 뭐지?하며 불안한 마음으로 읽어나가기도 했다. 그렇다고해서 그 과정이 지루하지는 않았다. 워낙 관심있는 분야를 소재로 하고 있는데다가 문장도 매끄러워서 걸리적 거리는 부분이 많지 않았고, 스토리 자체도 흥미로웠다.

 하지만 이 책에서 아쉬운 점도 물론 있었다. 우선 작가가 얀 쿠비시, 요제프 가브치크,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세 사람에게 말하는 듯한 장면이 있었다. 그런데 프랑스어로는 어떻게 되는지 모르겠지만 한국어판에서는 그대는...그대는...그대는...이런식으로 문장이 이어졌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문장에서 불편함을 굉장히 많이 느꼈다. '그대는'이라는 말이 반복되면서 답답하고 목에서 단어가 걸리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그랬던 것 같다. 그밖에는 그다지 불만이 없었다.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가장 내 마음속에 남은 문장은 하이드리히의 죽음을 서술한 장면에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해서 유인원 작전의 영웅들과 관련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와 관련있는 문장이었다. 죽은자를 기억해야하는 이유를 우리에게 말해주는 문장이었다.

238쪽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다.우리가 아무리 경의를 표해도 죽은 사람들은 모른다. 하지만 우리,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는 의미 있는 일이다. 기억은 당사자인 죽은 사람들에게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지만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는 도움이 된다. 

 그렇다. 죽은사람들을 기억하는 것은 죽은사람보다도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더욱 필요한 일이다. 그들을 기억함으로써 우리는 위로받을 수 있고, 우리의 과거를 되짚어 볼 수 있다. 역사라는 것이 원래 죽은자들을 기억하는 방법에 관한 것이 아닐까 싶어졌다. 죽음이 오래되었다고 해서, 너무 많이 회자되었다고 해서 기억할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기억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를 위한 일이기 때문이다. 2016년이 끝나가는 지금, 우리는 또다시 죽음과 관련된 증언들을 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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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10
잭 골드스톤 지음, 노승영 옮김 / 교유서가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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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에게 2016년은 어떤 해였는가. 그것은 매년 연말마다 선정되는 올해의 고사성어를 보면 알 수 있을까? 한 해를 정리해보는 무난한 평가라는 점에서 모든 언론이 올해의 고사성어를 기다리지만, 나는 몇 권의 책을 통해 올해를 정리해보고자 한다. 이것은 순전히 나의 시각이며, 책에 대한 해석도 근본없는 것임을 미리 말해두고 싶다.


더럽혀진 단어들을 다시 찾을 수 있을 것인가? <혁명> -잭 A. 골드스톤

우리는 '혁명'을 잃고 있다

 2016년은 혁명의 해였다. 사실 이렇게 될 상황은 아니었는데, 연말이 되자 갑자기 정권이 온 국민을 혁명가로 육성하기 시작했다. 국가단위의 혁명 시뮬레이션 훈련을 통해 30년만에 다시 온국민을 투사로 만들어준 최 선생님과 정 선생님, (주)청와대 서열 3위님께 우선 깊은 감사를 표한다. 

 한국에서 혁명이라는 단어는 그다지 좋은 이미지를 갖지 못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얼마전 모 국회의원께서도 중고등학생들이 혁명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며, 이것이 종북주의적 사고라고 말씀하기까지 하셨다. 혁명에 대한 고정관념은 이런 양반들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보통 사람들도 혁명이라고 하면 붉은 색, 깃발, 과격한 행동(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등을 떠올린다. 따라서 한국에서는 혁명이라는 말을 꺼내는 것니 곧 이 사회체제를 쳐부수고, 배부른 자본가들을 목매달거나, 적어도 대기업이나 국가기관 몇 곳 정도는 공중분해시켜야 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렇기때문에 혁명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는 것은 매우 조심스러운 일이 되었고, '혁명'이라는 단어는 '개혁', '혁신' 처럼 좀 더 양순한 단어들로 대체되었다. 하지만 혁명이 이렇게 터부시 될만한 단어인가? 우리는 '인민'이라는 단어를 잃었고, 이제 '혁명'마저 잃고 있다. 

 우리는 왜 이렇게 혁명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는것조차 거북스러워하게 되었을까? 나는 이것이 무관심에 뒤따른 무지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학교에서도 혁명이 무엇인지, 역사상 등장하는 수많은 혁명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왜 일어났는지를 가르쳐주지 않는다. 혁명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하니, 혁명은 우리 머릿속에 단편적인 이미지로만 남게된다. 주로 붉은 깃발의 모습으로. 

설명서는 간결할수록 좋다

 나는 교유서가에서 출간되는 첫단추 시리즈가 매우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일단 크기가 작은 판형을 선호하는 내 취향에 딱 맞고, 디자인도 심플하고 예쁘다. 옥스퍼드대 출판부에서 펴낸 책을 번역한 것이라고 하니, 잘은 몰라도 퀄리티에 대한 검증도 충분히 된 것 같다. 결정적으로, 한 권의 분량이 대체로 200쪽 정도에 불과해서 부담없이 읽기도 좋다. 하지만 분량은 적어도 내용은 가볍지 않다. "최소한 이건 알아야 해!"하며 핵심만 쉽게 짚어주기 때문에 책의 밀도가 높으면서 각각의 내용이 짜임새있게 배치되어 있다. 그럼 이 간결한 인문 입문서를 통해 혁명을 들여다 보자.



혁명개론
 
17쪽
 혁명은 사회정의의 이름으로 대중을 동원하여 정부를 강제로 무너뜨리고 새로운 정치제도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혁명이란 정부를 강제로 무너뜨리고 새로운 정치제도를 만드는 것이라고 한다. 이것이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혁명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혁명에 대해 갖고 있는 인식은 이 단계에 이 단계에도 이르지 못하고, 혁명과 폭동조차 구분하지 못하는 수준이다. 한국인의 대다수는 혁명이란 가난에 찌는 대중이 사회를 뒤엎기 위해 집단적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때문에 항상 혁명과 시위는 사회불만세력, 빈곤층, 종북세력이 일으키는 것이라고 여겨져 왔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않다. 오히려 생활고의 강도가 강해질수록 사람들은 변화를 포기하고 체념에 빠지게 된다. 실제로 사회변혁의 핵심이 되는것은 기본적인 생활이 가능한 계층이고, 그들의 참여가 있을때만이 혁명의 가능성도 커진다.

27쪽
 -실제로 혁명은 최빈국보다 중간 소득 국가에서 일어나는 경우가 더 많다. 미국 독립혁명이 일어났을 때 미국 식민지 주민은 유럽 농민보다 훨씬 잘살았다. 심지어 유럽에서도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프랑스의 농민은 러시아 농민보다 대체로잘살았다.... 이것은 가난한 농민과 노동자가 정권 수호의 의지로 충만한 전문 군사 조직에 맞서 정부를 무너뜨릴 수 없기 때문이다. 혁명이 일어나려면 상당수의 엘리트가 이탈하거나 혁명의 편에 서야한다.

 그렇다면 혁명이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저자가 말하는 혁명의 제1조건은 사회구성원들이 정의의 부재를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한다. 
 
-빈곤만으로는 대중 봉기는 몰라도 혁명은 일어나지 않음을 인식한 일부 연구자들은 상대적 박탈이야말로 혁명의 원동력이라고 주장했다. 불평등이나 계급 격차가 용납할 수 없을 만큼 커지거나, 더 나아지리라는 기대가 좌절될 때 사람들은 떨쳐 일어선다. 하지만 극단적 불평등은 혁명이 아니라 체념이나 절망으로 이어지기도 쉽다.

45쪽
-이런 정권에서는 통치자가 권좌에 오래 머물수록 정권이 부패한다. 가족 구성원과 패거리가 지위를 더 많이 악용하기 때문이다. 통치자는 인의 장막에 둘러싸이며, 자신의 경제정책 때문에 대다수 국민이 고통받더라도 개의치 않는다.

 사회의 빈부격차가 심화되고, 현상유지를 선호하는 중산층이 붕괴하고, 통치자의 주변인물들이 자기들 배만 불릴 수 있게 정부를 움직이는 상황. 이러한 상황이 혁명을 촉발시키는 것이다. 2016년 대한민국의 상황은 이 조건에 부합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어떻게 지금까지는 정권이 유지될 수 있었는가. 그 대답 역시 여기에 담겨있다.

47쪽
 -저항 세력이 대다수 사람들에게 극단주의자로 간주되고 정부 대응의 고립된 표적이라면, 탄압이 대체로 효과를 발휘한다. 하지만 저항 세력이 사회의 평범한 구성원으로 간주되면, 마구잡이식 탄압은 엘리트와 인민을 격분시켜 정권이 위험하고 위법하고 불골정하다는 인식을 심는다.

 정부는 지금까지 분할 통치에 전력을 다해왔다. 피해자들을 고립시키고, 노조를 고립시키고, 특정지역을 고립시켰다. 강정, 밀양, 세월호.... 그리고 절반가량의 국민들은 이러한 정부의 전략에 매우 적극적으로 동조했고, 정부의 편에 서서 피해자들을 극단주의자로 몰아붙이는데 협조했다. 하지만 이번 사건에서는 그럴 수가 없었다. 정부가 그동안 고작 몇명의 사람들의 편에 서서 온국민을 등쳐먹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국민들은 즉각 정의의 구현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정부가 편을 가르기에는 절대다수의 국민들이 너무 견고하게 뭉쳐버렸다. 이제 사람들은 이 정권이 위험하고 위법하고 불공정하다고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제 혁명의 조건이 다 갖추어졌다.


앞으로의 혁명

 지금까지의 혁명은 폭력을 동반한 경우가 많았고, 그 결과도 항상 좋지는 않았다. 원래 혁명은 그런 것이었다. 혁명가들은 폭력에 의한 희생이 새로운 세상을 위한 비용이라고 주장했고, 추종자들은 혁명완수를 위해 거리낌없이 희생했다. 그러나 지금 우리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혁명은 이전과는 다르다. 이것은 비폭력이 효과적인 수단이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가 수많은 희생을 통해 폭력없이도 혁명이 가능한 시스템을 갖췄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우리사회가 그동안에 흘린 피로써 앞으로 지불해야 할 민주주의의 희생을 모두 치렀다고 믿고싶다. 이제는 누구도 피흘릴 필요없이, 평화로운 움직임을 통해 혁명을 이룰 수 있을만큼 성숙한 사회가 된 것이기를 바란다.

219쪽
 -지난 30년간의 추세가 계속된다면 앞으로 비폭력 저항의 비중이 점차 커지고, 이념적 순수성을 사람의 목숨보다 중시하는 급진적 혁명의 공포를 점차 멀리하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곡해되어 온 또 하나의 단어, 개인주의자. <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

 개인주의자의 지옥, 한국

 내가 생각하기에 나를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지독한 개인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사람많은 곳에서는 정신력이 급속히 떨어지고, 대부분의 사람들과 무엇을 함께 하는 것을 싫어한다. 하지만 한국이라는 사회는 개인주의자들에게는 사막과 같다. 한국은 사회 곳곳의 크고작은 집단들이 개인을 구속하고, 강요하는 것이 일상인 곳이다. 강요의 주체도 다양하다. 가깝게는 가정 내의 부모에서부터, 멀게는 국가의 행정부까지 모든 이가 자신보다 조금이라도 약한 개체를 향해 구속력을 발휘하려하고, 그럼으로써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확인하려고 한다. 
 그렇기에 채식주의자나 성적소수자보다는 아니어도 한국에서 개인주의자로 사는 것에는 상당한 어려움이 따른다. 한국의 개인주의자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고 살아야 한다. 어려서부터 개인주의는 나쁜 것이라고 교육을 받으며 자라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국에서 개인주의자라는 말은 거의 욕으로 쓰이고 있다. 하지만 개인주의는 그런 것이 아니다.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자아는 유지하되, 자신의 사생활 영역에서는 다른 사람들의 침범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즉, 사회적 연대는 유지하겠지만 당신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 사항에 있어서는 관심을 끄라는 태도가 개인주의의 기본이다. 


개인주의자의 롤모델

 문유석 판사는 부장판사의 위치에 있다. 학렫은 하버드대학교 로스쿨 석사라고 하고, 중년남성이다. 소위 '스펙'을 보자면 문유석 판사는 대한민국 사회의 상류층에 속한다. 그리고 상류층의 가장 큰 특권아닌 특권은 조직에 속한 개인들을 자기 맘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개인주의자임을 자처한다. 얼핏보면 개인주의자로 사는 것보다 한국사회의 분위기에 맞춰서 사는 것이 훨씬 편할 것 같은데 개인주의자로서의 삶이 더 행복하다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개인주의적 삶을 선택할 수 있는 그가 정말 부러워졌다. 그리고 그 태도가 개인주의자로서 이상적이라고 생각했다.
 개인주의자로서의 삶을 유지하기 가장 힘든 점은 대부분의 경우 개인주의자로 살려고하다가는 밥줄이 끊길 위험이 크다는 것이다. 그래서 힘겹게 조직에 맞춰서 살아가다보면 자신의 사회적 지위가 상승한다. 개인주의자들은 그 시점에서 선택을 해야한다. 꼰대의 기득권을 버리고 드디어 내가 사랑하는 개인주의자로서의 삶을 시작하던지, 기득권을 선택해서 젊은 개인주의자들을 괴롭히던지.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후자를 선택한다. 포기하기에는 한 줌의 권력이 너무 달콤하기도 하고, 조직의 삶이  익숙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유석 판사는 일관된 개인주의자의 삶을 선택했다. 자신의 태도로 얻을 수 있는 이익과 손실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이 행복한 삶의 방식을 살고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의 인격을 보려면 그 사람에게 권력을 줘보라는 말이 있다. 개인주의자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이 정말 개인주의자인지를 알고 싶다면, 그 사람이 권력을 갖고 있을 때를 보면 된다. 진정한 개인주의자는 권력을 가져도 개저씨가 되지 않는다. 

개인주의자 선언

 한국에서 개인주의자로 살 용기가 안난다면, 개인주의자의 삶이 어떤 것인지 모르겠다면, 문유석 판사의 책, 특히 개인주의자 선언을 읽어보기를 권한다. 개인주의자로 살아갈 용기와 그 방법에 대해서 알수 있을 것이다.

 하나의 유령이 한국을 배회하고 있다. 개인주의라는 유령이. 옛 한국의 모든 세력들, 즉 꼰대와 개저씨, 시어머니와 부장, 직장의 사수와 시댁의 시누이가 이 유령을 사냥하려고 신성동맹을 맺었다.
 지금까지 모든 개인주의의 역사는 무시의 역사다.  
 지배계급으로 하여금 개인주의 혁명 앞에서 부들부들 떨게하라! 개인주의자가 혁명에서 잃을 것이라고는 쓸모없는 인간들 뿐이요, 얻을 것은 인생 전체다.
만국의 개인주의자여 단결하라!


혼돈, 파괴, 망각! <마스터스 오브 로마> -콜린 매컬로


공화국은 언제나 스스로 무너진다

 콜린 매컬로의 <마스터스 오브 로마> 시리즈의 배경은 공화정 말기 로마이다. 모든 시대의 말기가 그렇듯이 이 시대 역시 엄청난 혼란에 휩싸여있었다. 야심가들은 로마를 집어삼키려고 하고, 무능한 기득권층은 공화정이 무너지는 것을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민중은 지배계급의 의도에 철저히 이용 당하면서도 그것이 자신들의 의지라고 믿고 있었다. 이 모든 세력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 로마의 공화정을 무너뜨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공화정 로마가 이지경까지 이르게 된 것일까. 그것은 인민이 각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 시대의 인민은 적절하게 교육받지도 못했고, 제대로 조직되지도 못했다. 특히 교육되지 않은 민중은 공화국을 위협하는 잠재적인 위험요소이다. 이들은 언제든 공화국을 공중분해 시킬 수 있는 폭탄과 같다. 인민대중의 가장 위험한 점은  엄청난 수가 조직되어 있다는 것, 그 물리력이 어디로 향할지 모른다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대중의 위험성을 가장 잘 보여준 인물이 바로 마리우스다. 마리우스는 권력을 되찾기위해 인민을 조직하고 자신을 위해 봉사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인민들이 가진 물리력은 파괴적인 방식으로 발현되었다. 피가 흐르고 집이 불타는 이 혼란의 도가니 와중에 공화정은 점점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우리는 백성이 아니다

 2016년의 한국을 돌아보면, 이 당시 로마의 상황과 비슷한 점이 상당히 보인다. 부패한 기득권, 외부로부터의 혼란, 극심한 경제난, 거기다가 대규모 민중집회까지…. 그럼에도 로마와 한국이 다른 점이 있다면, 사회 구성원들의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적어도 한국의 인민, 시민은 민주주의에 대한 교육을 받았고 자신의 권리 역시 인식하고 있다. 대부분의 국민은 고등교육까지 받고 있고, 문명화되어있다. 
 이것이 바로 로마와 달리 한국이 붕괴되지 않을 수 있게 해주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다. 로마는 몇명의 인물이 자의식없는 인민을 쥐고 자신의 목적에 따라 그들을 휘둘렀다. 로마의 인민은 야심가들의 몽둥이였던 것이다. 그러나 인민들은 통제되지 않는 무기였다. 인민을 쥐고 휘두르던 인물이 통제권을 잃거나 사라지는 순간, 그 엄청난 물리력은 방향을 잃고 로마를 떠돌았다. 

 그러나 현대의 인민은 이들과 다르다. 백성이라고 불리던 때와 달리, 현대국가의 시민들은 자신들의 위치를 자각하고 있다. 이들은 국가가 자신들을 위해 존재하며, 자신들의 힘으로 국가를 바꿀 수 있다는 것도 안다. 물론 아직 그렇지 않은 국민들이 다수 있지만, 세대가 바뀌어가면서 점점 더 나아질 것이다. 그렇기때문에 한국이 로마처럼 스스로 붕괴될 가능성은 세대가 지남에 따라 점점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우리는 수 많은 역사 속 사건들을 통해 붕괴를 사전에 막을 수 있다. <마스터스 오브 로마>는 우리에게 공화국이란 무엇인가, 인민이란 무엇인가, 우리의 운명을 소수의 인간에게 맡겨도 되는가 하는 고민을 던진다.

 영웅주의에 경도된 <로마인 이야기>는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적절치 않다고 본다. 영웅을 숭배하고, 백마탄 초인을 기다리는 인간을 시민이라고 보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시민과 백성의 차이는 자신의 운명을 누군가에게 맡기느냐, 아니면 스스로 결정하느냐다. 영웅주의자는 자신의 운명을 영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맡기는 백성에 불과하다. 물론, 비범하고 유능한 인물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의 손에 자신의 삶을 맡기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마스터스 오브 로마>를 보면 영웅이라고 여겨졌던 인물들이 어떻게 변해가는지 잘 드러난다. 타락하고, 비뚤어지고, 결국에는 죽는다. 미쳐버린 마리우스, 잔혹한 술라에게 당신의 삶을 맡기고 싶은가? 나는 아니다.

조금만 참아보시죠

 <마스터스 오브 로마>의 가장 큰 문제점은 책의 두께이다. 3권분량 1부가 약 1500페이지 정도니, 가볍게 덤벼볼만한 분량은 아니다. 특히 1권 후반부~2권 전반부를 읽는 순간이 가장 힘들다. 하지만 마지막 권을 읽을 때 쯤이 되면 줄어드는 분량이 아쉬워지는 상태가 된다. 1500페이지 전부가 흥미로울 수는 없지만, 지루해질쯤 되면 재밌어지고, 다시 지루해질쯤되면 재밌어지는 것이 반복된다. 그러니 역사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조금만 참고 꾸준히 읽어보기 바란다. 이정도로 재밌는 역사 소설 시리즈는 만나기 힘들다. 그리고 공화국이란 무엇이며, 거기서 개인의 역할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고민해보면 좋을 것이다.

77쪽
 -'공화국'이라는 용어의 어원은 '공공의 일'을 뜻하는 라틴어 '레스 푸블리카'다. 이는 정치라는 것이 왕과 귀족의 사적인 일이 아니라 공공의 관심사가 되었다는 뜻이다.
-교유서가 첫단추 <혁명>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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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12-16 16: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내년에는 러시아 혁명과 관련된 책을 읽어 볼 생각입니다. 내년이 러시아 혁명 100주년이에요. ^^

Postumus 2016-12-16 16:19   좋아요 0 | URL
저도 러시아 혁명에 관심이 많아요! 그런데 한국에는 러시아 혁명을 자세히 다룬 책이 없는 것 같은데, 봐두신 책이 있나요?

cyrus 2016-12-16 18:18   좋아요 1 | URL
네. 맞아요. 좋은 책은 출간연도가 오래됐고, 도서관에 구하기도 어려워요.

지금 제가 구한 책이 시공 디스커버리 시리즈의 《러시아 혁명》, 알렉 노브의 《소련경제사》, E. H. 카의 《볼셰비키 혁명사》입니다. 알렉 노브와 카의 책은 운 좋게 헌책방에서 구했습니다.

cyrus 2016-12-16 18:18   좋아요 0 | URL
책 이름 수정했습니다. 알렉 노브의 《소련경제사》, 카의 《볼셰비키 혁명사》입니다.
 

얼마전 이벤트로 e북 리더기를 하나 장만해서 열심히 책을 읽고 있습니다. e북 리더기가 있으니까 확실히 독서량은 늘어나는 것 같더군요.
그런데 저는 e북의 가장 큰 장점이 물리적인 무게가 엄청나게 줄어듬으로 인해서 무거운 책을 밖에서도 읽을 수 있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e북을 검색해보면 만화책, 장르소설, 라이트노벨 같은 책이 대부분이더라구요. 오히려 두꺼운 교양서적은 e북으로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정작 두꺼운 책은 무겁게 들고 다녀야 하는 것이죠.
여러분은 이 사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리고 혹시 이유를 아시는 분이 계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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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6-07-22 14: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Postumus님 말씀대로 아직까지는 제가 보고 싶은 책이 e북으로 나오지 않아 선택의 폭이 좁은 것 같아요.
다만, 제가 구세대여서인지 종이책에 연필로 밑줄 긋는 것이 제겐 더 자연스럽고 머리에 많이 남네요.

Postumus 2016-07-22 14:40   좋아요 1 | URL
저도 원래 전자책을 좀 꺼렸는데, 지하철에서 서서도 책을 편하게 읽을 수 있다는게 어무 편하더라구요.

cyrus 2016-07-22 18: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장르문학 마니아들만 아는 작품들은 종이책이 아닌 전자책으로 출간되는 경우가 있어요. 페가나북스라는 전자책 출판사 사장님이 혼자서 번역하고, 출간 일을 맡고 있습니다. 종이책으로 나오기 힘든 장르문학 작품이 전자북으로 나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마음이 들어요. 가격도 정말 싸요. 많아봤자 3천 원 정도이고, 적으면 1500~2000원 정도 합니다. 절판된 종이책이 전자책으로 나오기도 합니다. 두꺼운 책을 전자책으로 만드는 과정이 간단하지 않을 것 같아요. 특히 외국 저자의 책을 전자책으로 만들려면 저자와의 상의도 있어야 하고요. 저도 확실한 이유가 뭔지 모르겠어요. ^^;;
 

글을 쓰면서 가장 힘든 점은 내 형편없는 글솜씨를 계속 봐야하는 것이다. 가뜩이나 넘쳐나는 쓰레기같은 텍스트의 홍수에 괜히 한문장 더하는건 아닌가 하는 자괴감은 덤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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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07-15 13: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에고 심한 자기비하입니다. 형편없는 글솜씨라뇨....글에 무슨 솜씨 때문에 글 보는게 아닌 담에야 어떤 글이든 진정성있는 글은 언제든 환영입니다...(그나마 글 잘 쓰고 못쓰고를 떠나 글쓴 분들이 대부분 겸손이죠..)

Postumus 2016-07-15 15:48   좋아요 2 | URL
읽고쓰는걸 좋아해서 계속 쓰려고 노력하는데 글솜씨가 늘지 않아서요;

2016-07-15 16: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7-15 16: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07-15 16:1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Postumus님의 글이 형편없다고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유레카님의 말씀처럼 저도 정성이 들어간 글을 좋아합니다. 저도 매번 글을 쓸 때마다 Postumus님처럼 부정적인 생각을 여러 번 했습니다. 잊으려고 해도 가끔 그런 마음이 불쑥 생겨요. 제가 문장을 멋있게 쓰는 편이 아니라서 자괴감이 생깁니다. 그래도 책에 대한 감상을 꾸밈없이 솔직하게 밝히려고 합니다. ‘좋아요’ 수와 댓글 수가 글에 대한 반응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저도 여기에 민감합니다. 자꾸 여기에 신경 쓰이면 정신적으로 피곤해집니다.

Postumus 2016-07-15 16:20   좋아요 1 | URL
저도 의식적으로라도 구런 부담감을 좀 내려 놓아야겠네요. 좋아서 하는 글쓰기인데 말이죠

겨울호랑이 2016-07-15 22: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Postumus 님. 덕분에 몰랐던「 우크라이나 역사」와 「북유럽 역사」 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좋은 책을 알려 주셔서 감사하단 말씀 뒤늦게 드립니다^^.제가 다양하게 알지는 못하지만「포르투나의 선택」리뷰를 보면서 술라에 의해 공화정이 붕괴되어가는 로마시대에 다른 TV 프로그램(제가 제목을 잘 몰라서... 죄송합니다)을 비교하여 주셔서 재밌게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저도 글을 잘 쓰지 못합니다. 그래서 말씀드리기가 조심스럽습니다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Postumus님께서 불만족하신 글일지라도 모든 사람이 불만족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 글을 읽고 감사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적어도 한 명이상 있다고 생각하세요. 저를 포함해서요^^

Postumus 2016-07-15 22:21   좋아요 2 | URL
이렇게 말씀해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이 말씀을 들으니, 지금까지 쓴 날보다 앞으로 쓸 날이 더 많으니 계속 노력 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겨울호랑이 2016-07-15 22: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 행복한 주말 되세요. 좋은 글에 감사드립니다.
 
[eBook] 표현의 기술
유시민 지음, 정훈이 그림 / 생각의길 / 2016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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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 유시민 작가의 글을 접한 것은 고등학교 3학년 때였다. 그때만해도 나는 지금처럼 사회에 관심이 있지도 않았고, 모바일 조선일보로 스포츠 기사도 재미있게 읽던 학생이었다. 어쩌면 그렇기때문에 유시민 작가의 저서를 아무 편견없이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처음 그의 글을 읽고 든 생각은 “참 글을 조리있게 잘 쓴다”는 것이었다. 글 잘쓰는 사람이 흔하지 않은 한국에서, 매끈하고 조곤조곤 하면서도 재미까지 갖춘 그의 글은 정말 매력적이었다. 그리고 나중에 토론프로그램에서 그를 다시 봤을 때는 “이 사람 말도 조리있게 잘하네”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어쨌든 유시민이라는 사람의 글은 대번에 나를 사로잡았다. 나는 당장 그의 예전 저서들을 구해서 읽었고, 읽으면 읽을수록 예의 그 “매끈한”문장에 빠져들었다. 그런데 그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했을때 가장 많이 나온 말은 소위 “싸가지가 없다”는 것이었다. 나야 고급진 문장으로 상대방을 살살 비꼬고 약점을 꼬집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었지만, 다른 사람들, 특히 나이든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뭐, 그의 말과 태도가 좀 “껄렁”했던 것은 사실이다. 거친말로 깡마른 안경잡이가 말로 사람을 줘 패는데 상대방 입장에서는 얼마나 얄미웠겠는가.


그리고 세월이 빠르게 흘렀다. 내가 세월에 떠내려가던 와중에 세상에는 많은 일이 있었고, 유 작가에게도 커다란 사건들이 찾아왔다. 특히 “그 사건” 당시 그의 모습은 한마리 야수 같았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다시는 껄렁한 유시민을 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세월은 생각보다 힘이 센 모양이다. 몇 년후에 활동을 다시 시작한 그의 모습은 예전보다 훨씬 유해져있었다. 그가 싸가지 없음을 벗어던진 것이었다. 변화는 글에서도 나타났다. 그의 글은 예전에 비해 훨씬 부드러워졌고, 곳곳에 숨어서 읽는 사람을 약간 긴장하게 만들었던 가시도 사라져 있었다. 나는 세월이 마사지 해놓은 유시민 작가의 글이 예전보다 더욱 마음에 들었다. 


이번에 출간된 <표현의 기술>은 부드러워진 유시민을 잘 보여준다. 그 날카롭던 정치인 유시민이 은퇴하고 나자 진짜 부드러운 작가 유시민으로 돌아온 것이다. 물론 그의 글이 힐링전도사들의 것처럼 흐물흐물 해진것은 아니다. 단지 그의 글이 좀 더 소화가 잘 되는 조리법으로 바뀐 것이다. 


 

*책을 다 읽고 나자, 이 책의 공동저자인 정훈이(?)를 오해했던 것이 미안했다. 나는 공동저자를 보고 그냥 분량채우기용 삽화나 그리겠거니 하고 생각했다. 유작가의 신작에 왠 이상한 양반이 끼어드는게 싫기도 했던 것 같다. 씨네21을 구독했을 때 그의 만화를 재미있게 읽었는데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정훈이 파트는 생각보다 훨씬 만족스러웠다. 메인인 유작가에 얹혀져 있는 떨거지가 아니라, 책의 지분을 당당히 나누고 있는 독립적인 파트로 볼 수 있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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