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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ㅣ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10
잭 골드스톤 지음, 노승영 옮김 / 교유서가 / 2016년 9월
평점 :
한국인에게 2016년은 어떤 해였는가. 그것은 매년 연말마다 선정되는 올해의 고사성어를 보면 알 수 있을까? 한 해를 정리해보는 무난한 평가라는 점에서 모든 언론이 올해의 고사성어를 기다리지만, 나는 몇 권의 책을 통해 올해를 정리해보고자 한다. 이것은 순전히 나의 시각이며, 책에 대한 해석도 근본없는 것임을 미리 말해두고 싶다.
더럽혀진 단어들을 다시 찾을 수 있을 것인가? <혁명> -잭 A. 골드스톤
우리는 '혁명'을 잃고 있다
2016년은 혁명의 해였다. 사실 이렇게 될 상황은 아니었는데, 연말이 되자 갑자기 정권이 온 국민을 혁명가로 육성하기 시작했다. 국가단위의 혁명 시뮬레이션 훈련을 통해 30년만에 다시 온국민을 투사로 만들어준 최 선생님과 정 선생님, (주)청와대 서열 3위님께 우선 깊은 감사를 표한다.
한국에서 혁명이라는 단어는 그다지 좋은 이미지를 갖지 못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얼마전 모 국회의원께서도 중고등학생들이 혁명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며, 이것이 종북주의적 사고라고 말씀하기까지 하셨다. 혁명에 대한 고정관념은 이런 양반들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보통 사람들도 혁명이라고 하면 붉은 색, 깃발, 과격한 행동(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등을 떠올린다. 따라서 한국에서는 혁명이라는 말을 꺼내는 것니 곧 이 사회체제를 쳐부수고, 배부른 자본가들을 목매달거나, 적어도 대기업이나 국가기관 몇 곳 정도는 공중분해시켜야 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렇기때문에 혁명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는 것은 매우 조심스러운 일이 되었고, '혁명'이라는 단어는 '개혁', '혁신' 처럼 좀 더 양순한 단어들로 대체되었다. 하지만 혁명이 이렇게 터부시 될만한 단어인가? 우리는 '인민'이라는 단어를 잃었고, 이제 '혁명'마저 잃고 있다.
우리는 왜 이렇게 혁명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는것조차 거북스러워하게 되었을까? 나는 이것이 무관심에 뒤따른 무지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학교에서도 혁명이 무엇인지, 역사상 등장하는 수많은 혁명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왜 일어났는지를 가르쳐주지 않는다. 혁명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하니, 혁명은 우리 머릿속에 단편적인 이미지로만 남게된다. 주로 붉은 깃발의 모습으로.
설명서는 간결할수록 좋다
나는 교유서가에서 출간되는 첫단추 시리즈가 매우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일단 크기가 작은 판형을 선호하는 내 취향에 딱 맞고, 디자인도 심플하고 예쁘다. 옥스퍼드대 출판부에서 펴낸 책을 번역한 것이라고 하니, 잘은 몰라도 퀄리티에 대한 검증도 충분히 된 것 같다. 결정적으로, 한 권의 분량이 대체로 200쪽 정도에 불과해서 부담없이 읽기도 좋다. 하지만 분량은 적어도 내용은 가볍지 않다. "최소한 이건 알아야 해!"하며 핵심만 쉽게 짚어주기 때문에 책의 밀도가 높으면서 각각의 내용이 짜임새있게 배치되어 있다. 그럼 이 간결한 인문 입문서를 통해 혁명을 들여다 보자.
혁명개론
17쪽
혁명은 사회정의의 이름으로 대중을 동원하여 정부를 강제로 무너뜨리고 새로운 정치제도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혁명이란 정부를 강제로 무너뜨리고 새로운 정치제도를 만드는 것이라고 한다. 이것이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혁명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혁명에 대해 갖고 있는 인식은 이 단계에 이 단계에도 이르지 못하고, 혁명과 폭동조차 구분하지 못하는 수준이다. 한국인의 대다수는 혁명이란 가난에 찌는 대중이 사회를 뒤엎기 위해 집단적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때문에 항상 혁명과 시위는 사회불만세력, 빈곤층, 종북세력이 일으키는 것이라고 여겨져 왔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않다. 오히려 생활고의 강도가 강해질수록 사람들은 변화를 포기하고 체념에 빠지게 된다. 실제로 사회변혁의 핵심이 되는것은 기본적인 생활이 가능한 계층이고, 그들의 참여가 있을때만이 혁명의 가능성도 커진다.
27쪽
-실제로 혁명은 최빈국보다 중간 소득 국가에서 일어나는 경우가 더 많다. 미국 독립혁명이 일어났을 때 미국 식민지 주민은 유럽 농민보다 훨씬 잘살았다. 심지어 유럽에서도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프랑스의 농민은 러시아 농민보다 대체로잘살았다.... 이것은 가난한 농민과 노동자가 정권 수호의 의지로 충만한 전문 군사 조직에 맞서 정부를 무너뜨릴 수 없기 때문이다. 혁명이 일어나려면 상당수의 엘리트가 이탈하거나 혁명의 편에 서야한다.
그렇다면 혁명이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저자가 말하는 혁명의 제1조건은 사회구성원들이 정의의 부재를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한다.
-빈곤만으로는 대중 봉기는 몰라도 혁명은 일어나지 않음을 인식한 일부 연구자들은 상대적 박탈이야말로 혁명의 원동력이라고 주장했다. 불평등이나 계급 격차가 용납할 수 없을 만큼 커지거나, 더 나아지리라는 기대가 좌절될 때 사람들은 떨쳐 일어선다. 하지만 극단적 불평등은 혁명이 아니라 체념이나 절망으로 이어지기도 쉽다.
45쪽
-이런 정권에서는 통치자가 권좌에 오래 머물수록 정권이 부패한다. 가족 구성원과 패거리가 지위를 더 많이 악용하기 때문이다. 통치자는 인의 장막에 둘러싸이며, 자신의 경제정책 때문에 대다수 국민이 고통받더라도 개의치 않는다.
사회의 빈부격차가 심화되고, 현상유지를 선호하는 중산층이 붕괴하고, 통치자의 주변인물들이 자기들 배만 불릴 수 있게 정부를 움직이는 상황. 이러한 상황이 혁명을 촉발시키는 것이다. 2016년 대한민국의 상황은 이 조건에 부합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어떻게 지금까지는 정권이 유지될 수 있었는가. 그 대답 역시 여기에 담겨있다.
47쪽
-저항 세력이 대다수 사람들에게 극단주의자로 간주되고 정부 대응의 고립된 표적이라면, 탄압이 대체로 효과를 발휘한다. 하지만 저항 세력이 사회의 평범한 구성원으로 간주되면, 마구잡이식 탄압은 엘리트와 인민을 격분시켜 정권이 위험하고 위법하고 불골정하다는 인식을 심는다.
정부는 지금까지 분할 통치에 전력을 다해왔다. 피해자들을 고립시키고, 노조를 고립시키고, 특정지역을 고립시켰다. 강정, 밀양, 세월호.... 그리고 절반가량의 국민들은 이러한 정부의 전략에 매우 적극적으로 동조했고, 정부의 편에 서서 피해자들을 극단주의자로 몰아붙이는데 협조했다. 하지만 이번 사건에서는 그럴 수가 없었다. 정부가 그동안 고작 몇명의 사람들의 편에 서서 온국민을 등쳐먹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국민들은 즉각 정의의 구현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정부가 편을 가르기에는 절대다수의 국민들이 너무 견고하게 뭉쳐버렸다. 이제 사람들은 이 정권이 위험하고 위법하고 불공정하다고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제 혁명의 조건이 다 갖추어졌다.
앞으로의 혁명
지금까지의 혁명은 폭력을 동반한 경우가 많았고, 그 결과도 항상 좋지는 않았다. 원래 혁명은 그런 것이었다. 혁명가들은 폭력에 의한 희생이 새로운 세상을 위한 비용이라고 주장했고, 추종자들은 혁명완수를 위해 거리낌없이 희생했다. 그러나 지금 우리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혁명은 이전과는 다르다. 이것은 비폭력이 효과적인 수단이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가 수많은 희생을 통해 폭력없이도 혁명이 가능한 시스템을 갖췄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우리사회가 그동안에 흘린 피로써 앞으로 지불해야 할 민주주의의 희생을 모두 치렀다고 믿고싶다. 이제는 누구도 피흘릴 필요없이, 평화로운 움직임을 통해 혁명을 이룰 수 있을만큼 성숙한 사회가 된 것이기를 바란다.
219쪽
-지난 30년간의 추세가 계속된다면 앞으로 비폭력 저항의 비중이 점차 커지고, 이념적 순수성을 사람의 목숨보다 중시하는 급진적 혁명의 공포를 점차 멀리하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곡해되어 온 또 하나의 단어, 개인주의자. <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
개인주의자의 지옥, 한국
내가 생각하기에 나를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지독한 개인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사람많은 곳에서는 정신력이 급속히 떨어지고, 대부분의 사람들과 무엇을 함께 하는 것을 싫어한다. 하지만 한국이라는 사회는 개인주의자들에게는 사막과 같다. 한국은 사회 곳곳의 크고작은 집단들이 개인을 구속하고, 강요하는 것이 일상인 곳이다. 강요의 주체도 다양하다. 가깝게는 가정 내의 부모에서부터, 멀게는 국가의 행정부까지 모든 이가 자신보다 조금이라도 약한 개체를 향해 구속력을 발휘하려하고, 그럼으로써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확인하려고 한다.
그렇기에 채식주의자나 성적소수자보다는 아니어도 한국에서 개인주의자로 사는 것에는 상당한 어려움이 따른다. 한국의 개인주의자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고 살아야 한다. 어려서부터 개인주의는 나쁜 것이라고 교육을 받으며 자라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국에서 개인주의자라는 말은 거의 욕으로 쓰이고 있다. 하지만 개인주의는 그런 것이 아니다.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자아는 유지하되, 자신의 사생활 영역에서는 다른 사람들의 침범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즉, 사회적 연대는 유지하겠지만 당신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 사항에 있어서는 관심을 끄라는 태도가 개인주의의 기본이다.
개인주의자의 롤모델
문유석 판사는 부장판사의 위치에 있다. 학렫은 하버드대학교 로스쿨 석사라고 하고, 중년남성이다. 소위 '스펙'을 보자면 문유석 판사는 대한민국 사회의 상류층에 속한다. 그리고 상류층의 가장 큰 특권아닌 특권은 조직에 속한 개인들을 자기 맘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개인주의자임을 자처한다. 얼핏보면 개인주의자로 사는 것보다 한국사회의 분위기에 맞춰서 사는 것이 훨씬 편할 것 같은데 개인주의자로서의 삶이 더 행복하다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개인주의적 삶을 선택할 수 있는 그가 정말 부러워졌다. 그리고 그 태도가 개인주의자로서 이상적이라고 생각했다.
개인주의자로서의 삶을 유지하기 가장 힘든 점은 대부분의 경우 개인주의자로 살려고하다가는 밥줄이 끊길 위험이 크다는 것이다. 그래서 힘겹게 조직에 맞춰서 살아가다보면 자신의 사회적 지위가 상승한다. 개인주의자들은 그 시점에서 선택을 해야한다. 꼰대의 기득권을 버리고 드디어 내가 사랑하는 개인주의자로서의 삶을 시작하던지, 기득권을 선택해서 젊은 개인주의자들을 괴롭히던지.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후자를 선택한다. 포기하기에는 한 줌의 권력이 너무 달콤하기도 하고, 조직의 삶이 익숙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유석 판사는 일관된 개인주의자의 삶을 선택했다. 자신의 태도로 얻을 수 있는 이익과 손실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이 행복한 삶의 방식을 살고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의 인격을 보려면 그 사람에게 권력을 줘보라는 말이 있다. 개인주의자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이 정말 개인주의자인지를 알고 싶다면, 그 사람이 권력을 갖고 있을 때를 보면 된다. 진정한 개인주의자는 권력을 가져도 개저씨가 되지 않는다.
개인주의자 선언
한국에서 개인주의자로 살 용기가 안난다면, 개인주의자의 삶이 어떤 것인지 모르겠다면, 문유석 판사의 책, 특히 개인주의자 선언을 읽어보기를 권한다. 개인주의자로 살아갈 용기와 그 방법에 대해서 알수 있을 것이다.
하나의 유령이 한국을 배회하고 있다. 개인주의라는 유령이. 옛 한국의 모든 세력들, 즉 꼰대와 개저씨, 시어머니와 부장, 직장의 사수와 시댁의 시누이가 이 유령을 사냥하려고 신성동맹을 맺었다.
지금까지 모든 개인주의의 역사는 무시의 역사다.
지배계급으로 하여금 개인주의 혁명 앞에서 부들부들 떨게하라! 개인주의자가 혁명에서 잃을 것이라고는 쓸모없는 인간들 뿐이요, 얻을 것은 인생 전체다.
만국의 개인주의자여 단결하라!
혼돈, 파괴, 망각! <마스터스 오브 로마> -콜린 매컬로
공화국은 언제나 스스로 무너진다
콜린 매컬로의 <마스터스 오브 로마> 시리즈의 배경은 공화정 말기 로마이다. 모든 시대의 말기가 그렇듯이 이 시대 역시 엄청난 혼란에 휩싸여있었다. 야심가들은 로마를 집어삼키려고 하고, 무능한 기득권층은 공화정이 무너지는 것을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민중은 지배계급의 의도에 철저히 이용 당하면서도 그것이 자신들의 의지라고 믿고 있었다. 이 모든 세력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 로마의 공화정을 무너뜨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공화정 로마가 이지경까지 이르게 된 것일까. 그것은 인민이 각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 시대의 인민은 적절하게 교육받지도 못했고, 제대로 조직되지도 못했다. 특히 교육되지 않은 민중은 공화국을 위협하는 잠재적인 위험요소이다. 이들은 언제든 공화국을 공중분해 시킬 수 있는 폭탄과 같다. 인민대중의 가장 위험한 점은 엄청난 수가 조직되어 있다는 것, 그 물리력이 어디로 향할지 모른다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대중의 위험성을 가장 잘 보여준 인물이 바로 마리우스다. 마리우스는 권력을 되찾기위해 인민을 조직하고 자신을 위해 봉사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인민들이 가진 물리력은 파괴적인 방식으로 발현되었다. 피가 흐르고 집이 불타는 이 혼란의 도가니 와중에 공화정은 점점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우리는 백성이 아니다
2016년의 한국을 돌아보면, 이 당시 로마의 상황과 비슷한 점이 상당히 보인다. 부패한 기득권, 외부로부터의 혼란, 극심한 경제난, 거기다가 대규모 민중집회까지…. 그럼에도 로마와 한국이 다른 점이 있다면, 사회 구성원들의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적어도 한국의 인민, 시민은 민주주의에 대한 교육을 받았고 자신의 권리 역시 인식하고 있다. 대부분의 국민은 고등교육까지 받고 있고, 문명화되어있다.
이것이 바로 로마와 달리 한국이 붕괴되지 않을 수 있게 해주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다. 로마는 몇명의 인물이 자의식없는 인민을 쥐고 자신의 목적에 따라 그들을 휘둘렀다. 로마의 인민은 야심가들의 몽둥이였던 것이다. 그러나 인민들은 통제되지 않는 무기였다. 인민을 쥐고 휘두르던 인물이 통제권을 잃거나 사라지는 순간, 그 엄청난 물리력은 방향을 잃고 로마를 떠돌았다.
그러나 현대의 인민은 이들과 다르다. 백성이라고 불리던 때와 달리, 현대국가의 시민들은 자신들의 위치를 자각하고 있다. 이들은 국가가 자신들을 위해 존재하며, 자신들의 힘으로 국가를 바꿀 수 있다는 것도 안다. 물론 아직 그렇지 않은 국민들이 다수 있지만, 세대가 바뀌어가면서 점점 더 나아질 것이다. 그렇기때문에 한국이 로마처럼 스스로 붕괴될 가능성은 세대가 지남에 따라 점점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우리는 수 많은 역사 속 사건들을 통해 붕괴를 사전에 막을 수 있다. <마스터스 오브 로마>는 우리에게 공화국이란 무엇인가, 인민이란 무엇인가, 우리의 운명을 소수의 인간에게 맡겨도 되는가 하는 고민을 던진다.
영웅주의에 경도된 <로마인 이야기>는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적절치 않다고 본다. 영웅을 숭배하고, 백마탄 초인을 기다리는 인간을 시민이라고 보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시민과 백성의 차이는 자신의 운명을 누군가에게 맡기느냐, 아니면 스스로 결정하느냐다. 영웅주의자는 자신의 운명을 영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맡기는 백성에 불과하다. 물론, 비범하고 유능한 인물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의 손에 자신의 삶을 맡기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마스터스 오브 로마>를 보면 영웅이라고 여겨졌던 인물들이 어떻게 변해가는지 잘 드러난다. 타락하고, 비뚤어지고, 결국에는 죽는다. 미쳐버린 마리우스, 잔혹한 술라에게 당신의 삶을 맡기고 싶은가? 나는 아니다.
조금만 참아보시죠
<마스터스 오브 로마>의 가장 큰 문제점은 책의 두께이다. 3권분량 1부가 약 1500페이지 정도니, 가볍게 덤벼볼만한 분량은 아니다. 특히 1권 후반부~2권 전반부를 읽는 순간이 가장 힘들다. 하지만 마지막 권을 읽을 때 쯤이 되면 줄어드는 분량이 아쉬워지는 상태가 된다. 1500페이지 전부가 흥미로울 수는 없지만, 지루해질쯤 되면 재밌어지고, 다시 지루해질쯤되면 재밌어지는 것이 반복된다. 그러니 역사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조금만 참고 꾸준히 읽어보기 바란다. 이정도로 재밌는 역사 소설 시리즈는 만나기 힘들다. 그리고 공화국이란 무엇이며, 거기서 개인의 역할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고민해보면 좋을 것이다.
77쪽
-'공화국'이라는 용어의 어원은 '공공의 일'을 뜻하는 라틴어 '레스 푸블리카'다. 이는 정치라는 것이 왕과 귀족의 사적인 일이 아니라 공공의 관심사가 되었다는 뜻이다.
-교유서가 첫단추 <혁명>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