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HhH
로랑 비네 지음, 이주영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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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리뷰는 황금가지 서평단 이벤트를 통해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되었습니다. 


악마세계에도 행정직은 필요하다.

 이 책의 제목은 <HHhH>이다. <HHHH>도 아니고, <hhhh>도 아니고, <HHhH>요. 그 뜻은 Himmlers Hirn heißt Heydrich, "히믈러의 두뇌는 하이드리히이다.”이다. 보통사람들이 히틀러도 아니고, 히믈러에 대해 많이들 들어보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런데 이 책은 그 히믈러도 아니고 그의 두뇌라고 불렸던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라는 사람을 소재로 다루고 있다. 그럼 우선 이 하이드리히라는 사람에 대해 알아보자.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는 어쩌면 한국에서 대단히 선호하는 인물상일지도 모른다. 1차대전 이후 헬독일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혼란했던 바이마르공화국 시대에 유년기와 청년기를 보낸 그는, 성공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오오력 했다. 그리고 결국 히믈러를 사로잡은 프레젠테이션 실력으로 면접을 통과한 뒤, 각종 음모와 숙청에서 천재적인 능력을 발휘했다. 나치가 원하던 준비된‘인재’였던 것이다. 소설 속에서는 ‘장검의 밤’ 사건에서 그의 천재성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여기서 하이드리히는 조직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많은 음모와 살인을 지휘한다. 그리고 살인을 지휘하는 그의 행동은 미치광이나 무식한 과격주의자와는 거리가 멀어보였다. 오히려 매우 유능한 관료 또는 경영자의 모습에 가까웠다. 이 장면은 후일 그가 보여줄 체계적 인종청소, 포디즘을 적용한 대량학살의 예고였던 것이다.
 
 어쨌든 하이드리히라는 사람을 가장 잘 설명하는 하나의 장면은 바로 이것이다. 능력있는 관료, 조직을 위해 어떠한 일도 서슴치 않는 냉철한 인간. 그러나 동시에 그는 자기애에 가득차있는 인물이기도 했다. 체코의 총독으로 있으면서 하급자들에게 했던 일장연설이나 펜싱, 전투기 조종 당시 있었던 에피소드만 봐도 짐작할 수 있다. 한마디로 하이드리히는 전형적인 나치이면서, 실무적 능력은 갖춘 인물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흔히 나치의 악행을 생각할 때, 현장에서 그것을 직접 수행한 사람들만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보니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나치는 대마왕 히틀러와 졸개 행동대원들로 이뤄진 악마집단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학살을 더욱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던 데에는 행정관료적인 악마들의 공이 더 컸다. 조금이라도 더 빠르게 많은 사람을 죽이기 위한 그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학살은 더디게 진행되었을 것이다. 수용자들을 더 많이 실어나르기 위해 열차시간표를 짜고, 어떻게 하면 더 효율적인 살인이 가능할까 고민하고, 어디서 누구를 죽일까 고민했던 그 모든 노력들이 모여서 거대한 악을 이루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수행했던 인간들에게는 그 행동이 악마적인 행동이라는 인식도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현장에서 학살을 직접 집행한 인간들의 경우, 극심한 정신적 트라우마를 호소하는 경우도 많았지만 학살의 관리자들은 그렇지 않았다. 


소설의 주인공이 작가

 그렇다면 <HHhH>라는 소설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하이드리히? 유인원 작전의 낙하산병들? 아니면 히틀러? 내가 느끼기에 이 책의 진정한 주인공은 작가인 로랑 비네이다. 처음 이 책을 읽을 때는 하이드리히가 주인공인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당시의 나치에 대해 설명하면서 하이드리히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계속해서 알려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서술에 불과하다. 소설에서 가장 핵심적인 소품으로 사용되는 하이드리히라는 인간에 대해 설명하는 과정인 것이다. 
 소설 중반부부터는 낙하산병들이 중심인물로 떠오른다. 그러나 이들도 주인공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존재감이 크지는 않다. 그리고 후반부에 들어서면 그제서야 이 책의 주인공이 작가 자신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작가가 이러한 효과를 노렸을지는 모르겠다. 또, 다른사람들도 이렇게 느끼는지도 알 수 없다. 하지만 내가 느낀바로는 그랬다. 
 작가인 로랑 비네는 계속해서 한 가지에 대해 집착한다. 혹시 자신이 말 그대로 ‘소설’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닐까, 흔히 소설에서 나타나는 작가의 상상에 의존한 서술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다. 작가가 묘사하는 사건 당시 하이드리히가 아침에 콧노래를 불렀는지 아닌지는 기록이나 증언이 없는 한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소설가들은 거기서 소설가의 특권을 행사한다. 자신의 머릿속에 그려지는 장면을 수려한 문장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작가가 원하는 방향으로 인물이나 사건의 이미지를 증폭시킨다. 
 하지만 로랑 비네는 그러지 않는다. 만약 그런 서술을 했더라도, 뒤에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 자신의 상상임을 분명히 드러낸다. 예를들어 “알 게 뭔가?”, “그것은 모를 일이다”, 이런 식으로 사실과 자신의 상상 사이에 분명한 선을 긋는 것이다. 이 때문에도 이 소설의 주인공이 작가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게된다. 여기서 독자는 작가가 제시한 소설 속 세계와 서사를 직접 체험하거나 상상하지 않는다. 서술되는 작가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게 된다. 이렇게 작가 본인의 생각을 서술하는 간접적 방식때문에 작가는 계속해서 독자에게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게 된다. 


소설이냐, 수필이냐, 정체를 밝혀라

 위에서도 밝혔듯이 이 소설에서 작가는 소설을 쓰되, “소설”이고 싶지는 않다는 의지를 계속해서 내보인다. 그러기위해서 미친듯이 자료를 수집했던 이야기도 들려주고, 다른 소설에서 “구라”를 섞은 것 같은 내용에 대해서도 말한다. 이러한 서술방식의 효과는, 역사소설의 부정적 효과를 방지하는 것이다. 역사소설 역시 소설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갖고 있다. 즉, 책의 내용에 일정정도의 허구가 섞여있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독자는 어떤 것이 허구이고 어떤 것이 사실인지 파악하기 어렵다. 결국 독자에게 있어서 역사소설은 단지 역사를 소재로 한 소설에 불과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로랑 비네는 <HHhH>와 ‘유인원 작전’이 그런 방식으로만 소비되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 같다. 특히 소설 말미에 작가가 등장인물들을 향해 드러낸 감정을 생각해보면 더더욱 그렇다. 

410쪽
 -용감한 무비시, 영웅 얀 쿠비시, 하이드리히를 죽인 사람, 쿠비시가 죽는 장면을 쓰기까지 힘들게 몇 주가 걸렸지만 전혀 즐겁지가 않다. 남는 게 무엇일까?

414쪽
 -사실대로 말하면 이 이야기를 끝내고 싶지 않다. 지하실에 있는 낙하산병 네 명이 포기하지 않고 터널을 파기로 하는 순간에서 이야기를 영원히 멈추고 싶다.

 그리고 나치게 희생당한 사람들에 대한 서술에도 작가의 안타까운 감정이 드러난다. 로랑 비네가 유인원 작전을 다룬 소설을 쓰기로 마음먹었던 이유는 이러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자신의 글로 표현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두께는 중요하지 않아요

 <HHhH>를 읽기 전에 두께만 봤을 떄에는 순간적으로 엄청나게 겁이났다. 거기다가 이렇게 두꺼운 책을 줘놓고 2주안에 다 읽고 서평까지 쓸 생각을 하니 눈 앞이 캄캄했다. 그런데 막상 읽다보니 페이지가 굉장히 빠르게 넘어갔다. 우선, 작가가 자신이 겪은 일들과 스스로의 생각을 적어놓은 부분이 굉장히 쉽게 읽혔다. 그리고 250개가 넘는 챕터로 이뤄져 있어서 책의 밀도가 낮았기 때문에 그다지 부담스럽지도 않았다.  또, 페이지가 빠르게 넘어가다보니 성취감이 들어서 더욱 신나게 책을 읽었던 것 같다. 앞으로 책을 고를 때 페이지 밀도를 참고해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하이드리히 암살사건이라는 소재를 알고 있는 독자로서는 책이 다 끝나가는데도 하이드리히 암살작전이 나오지 않아서 뭐지?하며 불안한 마음으로 읽어나가기도 했다. 그렇다고해서 그 과정이 지루하지는 않았다. 워낙 관심있는 분야를 소재로 하고 있는데다가 문장도 매끄러워서 걸리적 거리는 부분이 많지 않았고, 스토리 자체도 흥미로웠다.

 하지만 이 책에서 아쉬운 점도 물론 있었다. 우선 작가가 얀 쿠비시, 요제프 가브치크,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세 사람에게 말하는 듯한 장면이 있었다. 그런데 프랑스어로는 어떻게 되는지 모르겠지만 한국어판에서는 그대는...그대는...그대는...이런식으로 문장이 이어졌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문장에서 불편함을 굉장히 많이 느꼈다. '그대는'이라는 말이 반복되면서 답답하고 목에서 단어가 걸리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그랬던 것 같다. 그밖에는 그다지 불만이 없었다.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가장 내 마음속에 남은 문장은 하이드리히의 죽음을 서술한 장면에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해서 유인원 작전의 영웅들과 관련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와 관련있는 문장이었다. 죽은자를 기억해야하는 이유를 우리에게 말해주는 문장이었다.

238쪽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다.우리가 아무리 경의를 표해도 죽은 사람들은 모른다. 하지만 우리,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는 의미 있는 일이다. 기억은 당사자인 죽은 사람들에게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지만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는 도움이 된다. 

 그렇다. 죽은사람들을 기억하는 것은 죽은사람보다도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더욱 필요한 일이다. 그들을 기억함으로써 우리는 위로받을 수 있고, 우리의 과거를 되짚어 볼 수 있다. 역사라는 것이 원래 죽은자들을 기억하는 방법에 관한 것이 아닐까 싶어졌다. 죽음이 오래되었다고 해서, 너무 많이 회자되었다고 해서 기억할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기억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를 위한 일이기 때문이다. 2016년이 끝나가는 지금, 우리는 또다시 죽음과 관련된 증언들을 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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