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친코 2 - 개정판 코리안 디아스포라 3부작
이민진 지음, 신승미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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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자가 그리워하는 것은 한수도, 심지어 이삭도 아니었다. 선자가 꿈에서 다시 보고 있는 것은 자신의 젊음과 시작, 소망이었다. 선자는 그렇게 여자가 됐다. 한수와 이삭과 노아가 없었다면 이 땅으로 이어지는 순례의 길도 시작되지 않았으리라. 이 아줌마의 삶에도 평범한 일상 너머에 반짝이는 아름다움과 영광의 순간들이 있었다. 아무도 몰라준다고 해도 그것은 사실이었다. p.362-363

노아와 모자수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노아는 계속 공부하여 와세다 대학에 진학했다. 모자수는 파친코에서 일하기 시작한다. 조선에서 태어나 자라고, 살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간 선자나 경희 세대와는 달리 노아와 모자수는 그 어려운 시절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절대 인정받을 수 없는 존재임을 몸으로 느끼며 성장했다. 노아는 일본인처럼 살 수 있기를 바랐다. 일본인이 혐오하는 조선인이 아니라 일본에서 나고 자라 일본인과 다름없는 일본인. 모자수는 모자수대로 파친코에서 부를 그러모아 무시할 수 없는 조선인이 되기를 바랐다. 그런 이야기가 이어지는 와중에 대 충격의 222페이지였다. 너무 놀라서 그날은 책을 더 이상 읽지 않았다. 노아는 도저히 자신의 뿌리를 감당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어떻게 그렇게 홀연히 떠나고 또 그런 결정을 할 수 있었던 걸까. 노아처럼 외골수적인 사람이 가장 무서운 것 같다.

모자수의 아들 솔로몬은 또 다르다. 자신의 뿌리가 조선임을 알고, 조선인에 대한 일본인의 차별적 시선도 분명 여전히 남아있다는 걸 알지만 모자수나 노아만큼 일본에 대한 반감은 크지 않다. 그의 세상은 애초에 그런 일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솔로몬은 선한 일본인을 알고 있다. 고로상과 하루키, 그리고 에쓰코 같은 사람들. 2권은 이렇게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의 정서로 자란 재일의 정서적 혼란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인이라는 느낌도, 일본인이라는 느낌도 온전히 느낄 수 없는 이방인으로서의 정서. 많이 배우고 외국도 다녀오면 일본인처럼 살 수 있을 줄 알았지만 솔로몬의 세대에서도 차별은 여전했다. 차별적 시선을 받도록 일조했던 파친코를 결국 솔로몬이 함께 하게 되는 결말도 결국은 그런 거 아닌가. 그는 피비와도 함께 할 수 없었다. 그가 조선의 핏줄이긴 하지만 일본에서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일본에 대한 피비의 날 선 적대감에 완전히 동의할 수 없었고 그런 자신의 혼돈을 완전히 이해받을 수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거다. 

재일들의 삶에 대해 생각해 보게 했던 <당신이 나를 죽창으로 찔러 죽이기 전에>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함께 읽어봐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누구도 원하지 않은 채 일본으로 건너간 선자부터 솔로몬까지 이어지는 그들의 삶을 우리도 알아야 한다. 

* 창호, 하루키의 아내가 하루키의 비밀에 대해 알게 된 후, 그리고 노아의 아이들, 그리고 한수의 말년을 조금 더 알고 싶다.

* 개인적으로 하나같은 캐릭터 참 안 좋아함...

* 이제 드라마 봐야지.



* 도서지원

아침서가 @morning.bookstore

자는 경희가 창호한테 기다려달라고 하기를 바랐지만, 그랬다면 경희답지 않았을 것이다. 창호는 남편을 배신하지 않을 사람을 사랑했고 어쩌면 그것이 경희를 사랑한 이유일 터였다. 경희는 자신의 본질을 훼손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 P53

모자수는 인생이 파친코 게임과 같다고 믿었다. 다이얼을 돌려서 조정할 수 있지만, 통제할 수 없는 요인들로 생긴 불확실성 또한 기대한다는 점에서 비슷했다. 모자수는 고정돼 보이지만 무작위성과 희망의 여지가 남아 있는 파친코를 왜 손님들이 계속 찾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 P80

유미에게 조선인이라는 것은 벗어날 수 없는 가난이나 수치스러운 가족과 마찬가지로 또 다른 끔찍한 멍에일 뿐이었다. 왜 거기 가서 살아야 한단 말인가?
- P84

우리가 어디로 가겠어? 고국으로 돌아간 조선인들도 다를 바 없어. 서울에서는 나 같은 사람을 일본 놈이라고 불러. 일본에서는 내가 얼마나 돈을 많이 벌든, 얼마나 좋은 사람이든 더러운 조선인일 뿐이야.
- P209

삶에는 모욕당하고 상처받을 일들이 너무 많았고, 에쓰코는 자기 몫을 감당하기에도 벅찼다. 하지만 이미 수많은 치욕이 쌓여 있는 처지이면서도 솔로몬의 치욕을 가져다가 자신이 떠안고 싶었다.
- P238

일본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지라도 어떤 면에서는 솔로몬도 일본인이었다. 피비는 그 점을 이해하지 못했다. 핏줄보다 중요한 무엇인가가 있었다. 두 사람 사이의 간극을 좁힐 수 없었다. 솔로몬이 괜찮은 사람이라면 피비를 집에 보내주어야 했다.
- P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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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면 아래
이주란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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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그 깨가 눈에 들어온 순간에 겨우 안도감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해인씨가 그래도 깨를 뿌린 음식을 한 번은 먹었구나. 깨라는 건 가만히 생각해보면 안 뿌리려면 안 뿌릴 수 있는데, 깨를 뿌릴 마음이 남아 있구나. 그도 아니라면 해인씨가 뿌렸던 남이 뿌렸든 어쨌든 깨를 부린 음식을 먹긴 했구나. 잠시나마 안도했다는 것. 집에 가서도 얼마간 불안한 마음은 가시지 않았지만 그럴 때마다 방 한구석에 떨어진 깨를 생각하며 너무 걱정하지 않으려고, 아니 너무 미안해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는 이야기. 깨라니. 그 얘길 전해들으면서 어쩐지 시시하다 생각했고 참 슬펐습니다. 저는 시시한 것들을 사랑하고 시시한 것은 대체로 슬프니까요. Ι p.124 <수면 아래>

이 작품은 도드라지는 사건이 없다. 들여다보면 인물 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있지만 그것이 전면에 드러나지 않는다. 단조로운 듯하지만 단단하게도 느껴지는 그 특유의 분위기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한 친구와 결혼을 하고 아이를 잃은 후 결별한 해인과 우경. 이 책에서 그들은 헤어짐을 선택했지만 사건이 일어나고, 슬픔이나 미움, 원망 같은 이야기는 다뤄지지 않는다. 그 이후에 찾아오는 이야기, 그러니까 상처 이후 다시 일상을 회복하는 이야기다. 일을 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 관계를 이어나가고, 또 다른 사람의 상처를 볼 줄 알고, 그리고 각자의 자리에서 많은 순간에, 정말로 괜찮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길 바라는 것.

이 작품은 <주간 문학동네>에서 연재했던 이야기라고 한다. 처음 연재된 원고는 원고지 820매의 분량이었으나 퇴고 후 480매 분량으로 줄었다고 들었다. 거의 절반에 가까운 분량으로 퇴고를 했다는 것이 놀랍게 느껴졌다. 읽는 내내 느껴졌던 느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생각하다가 문득 TTS가 떠올랐다. 오디오북보다 감정이 없는 TTS 기능으로 듣는 걸 좋아한다. 사람들은 감정 없는 그 느낌이 적응이 안 된다고 하지만 나에겐 오히려 오디오북이 조금 거북하다. 그건 내 감정이 아니지라는 생각부터 든다. 그에 비해 단조로운 TTS는 가만히 듣다 보면 어느 순간엔 약간 감정이 느껴지는 것이다. 내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굳이 사람들이 잘 모르는 TTS까지 생각이 발전할 즈음 박연준 작가의 추천사를 읽었다. 

「나는 이주란의 소설을 사랑한다. 그의 소설은 극적인 장면 없이 고루 팽팽하고, 대단한 플롯 없이 완벽하며, 시 없이 시로 가득하고, 청승 없이 슬픔의 끝점을 보여준다. ‘도―’라는 음계만으로 이루어진 음악 같고, 연노랑으로 그린 핏물 같고, 발 없이 멀리 가는 구두 한 켤레 같다. 내가 잘 아는 세계, 잘 아는 사람이 오래 지켜온 비밀을 모아둔 화단 같다.」 박연준

'도ㅡ'라는 음계만으로 이루어진 음악 같다....라....이게 바로 내가 느낀 감정이었다. 저렇게 좋은 추천사가 있는데 나는 이렇게 어렵게 리뷰를 쓰고 있다. 아... 현타 온다.



* 도서지원

* 아침서가 @morning.bookstore



어떻게 지냈어요?

ㅡ 그냥 평범하게 지냈어요.

어려운 거네요.

ㅡ 뭐가요?

평범하게 지내는 것.
- P77

나는 우경의 뒤에 안장 그의 티셔츠를 잡았다. 자전거는 이미 고요해진 마을 길을 달렸다. (...) 나는 처음에는 우경의 등만 바라보고 있다가 얼마간 지난 뒤부터는 그의 뒤통수를, 그다음엔 멀리 해 지는 마을 풍경을 바라보았다.
- P86

일을 열심히 했다는 말을 몇 번을 더 반복해도 모자랄 만큼 최선을 다했어요. 더 많은 시간을 일하면 평범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몇 년을 그렇게 달려오다가 어느 날 야근을 마치고 퇴근하는데 아니, 여기가 어디지? 집까지 가는 길이 너무 먼 거예요. 그날따라 그 길이 왜 그렇게 길었는지 노래를 부르며 아무리 걸어도 도대체 집이 가까워지질 않더군요. 집이, 너무......
- P101

나는 우리가 모르겠다는 말을 너무 많이 해왔구나, 그걸 알게 되었어. 안다고 생각될 때, 더 경계해야 한다는 것도.
- P195

그냥, 난 우리가 괜찮았으면 좋겠어. 각자의 자리에서, 많은 순간에, 정말로 괜찮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 P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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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 너머 어렴풋이
신유진 지음 / 시간의흐름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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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신유진은 서문이다. 다른 책의 서문을 읽을 때도 나는 매번 신유진을 떠올린다. 이 얘기를 조금 해보자면, 작가의 <열다섯 번의 낮>, <열다섯 번의 밤> 을 산 날이다. 빨리 읽고 싶어 꾸역꾸역 일을 끝낸 밤에 <열다섯 번의 밤>을 펼쳤다. 그때까지 나에게 책의 서문이란, 지금 꼭 읽어야 할까? 책을 다 읽고 나서 읽어야 할까? 고민하게 하는 조금 귀찮은 것이었는데 그날 읽은 책의 서문은... 뭐라 설명할 수도 없다. 나는 서문만 여러 번 읽다 책을 덮었고 아직까지 펼치지 못했다. (여기저기 읽어보라고 하고, 노트에 옮겨 적어도 보았는데 책은 못 읽겠더라) 그때부터였다. 작가님을 좋아한 게. 

다정스럽다. 조금 서늘할 때마저 다정스럽다.('다정하다'가 아니라 '다정스럽다'라고 하고 싶다) 서문과 함께 나는 작가의 집을 천천히 둘러보고 이 창, 저 창에 드는 색색의 빛을 느껴본다. 그 빛은 독단적으로 들어와 여기저기 흔적을 남겼을 테고, 그 흔적은 작가의 눈과 마음과 손으로부터 글이 되었음을 느낀다. 허락 하에 나는 작가의 많은 기억을 들여다보았다. 서문의 글을 빌려 말하고 싶다. 창가에서 보는 모든 풍경이 그렇듯 적절한 거리를 두고 알맞게 그리웠습니다. 라고.

<창문 하나, 기억> 속 글들이 참 좋았다. 바로 얼마 전에 읽은 박연준 작가의 <여름과 루비>로 내가 아직 유년의 기억에서 헤어 나오지 못해서 그런 걸까. 다 좋았다. <엄마의 창문>이 특히 기억에 남는데 이 글 속에서 작가는 '나는 잘 모르겠다'라는 말을 여러 번 쓰고 있다. 이 애매모호한 표현이 글에서만큼은 무책임하게 느껴지지 않았고, 정말... 좋았다. 누구라도 공감하지 않을까. 엄마라는 존재에 대해서 '나는 잘 알겠다'라고 표현하는 글이 있다면 나는 읽지 않겠다.

자두주는 어떤 맛일까? 자두나무, 체리나무, 노간주나무, 사과나무의 향기를 나도 맡고 싶다. 프랑스, 마르땅과 이안의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작가의 정체성과도 같은 연극과 글쓰기, 뒤라스와 한트케까지, 그녀를 이루는 조각조각을 따라 함께 여행했다. 아, <창문처럼 나를 열면>의 표현대로 우리는 글을 읽음으로써 신유진이란 창을 열고 사랑한 것, 외로운 것, 슬픈 것, 기쁜 것, 얻은 것, 잃은 것들을 들여다본 것이겠다. 그렇겠다. 그렇지만... 창을 열어 보아도 자두주만큼은 먹어보지 않고는 어떤 맛인지 모르겠다. 내가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자두주의 맛이 아니라 그냥 자두의 맛이라서 혀 양 옆에서 자꾸만 침이 솟아난다. (아쉬운 대로 자두를 사러 마트에 갔는데 너무 비싸서 내려놓았다. 내가 아는 그 자두가 아닌가 봐, 금두인가 봐.) 서문만 읽고 덮어둔 책은 이제 읽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제 아끼지 않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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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다녀가지 않은 얼룩 없는 하얀 세상보다 누군가 통과한 흔적이 남은 얼룩진 세계가 좋습니다. 표백되지 않은, 무늬 가득한 삶을 살고 싶습니다.
- P13

좋다‘라는 말, 지금 우리에게 얼마나 어울리는 온도인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우리가 여전히 좋아하는 쪽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다는 게, 무언가를 더 유연하게 꾸준히 좋아하고 있다는 게 정말 좋았다.
- P56

지영이는 배시시 웃었고 나는 여기, 우리가 마주한 이 시간이 과거와 미래 사이에 있는, 그러나 현재라고 딱 잘라 말할 수 없는 모호한 어디쯤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 P56

엄마는 웃었다. 아이 같기도 하고, 노인 같기도 했다. 나와 닮기도 했고, 나와 다르기도 했다. 엄마는 내게 가장 어려운 타인이다. 아주 타인일 수도 완전히 나일 수도 없어서 힘든 사람.
- P65

어떻게 늙고 싶어?

나는 그냥 얻고 잃은 것이 잘 흘러가면 좋겠어. 흐르는 걸 내가 잘 받아들일 수 있으면 좋겠고.
- P88

빈 마음이 텅텅 소리를 낼 때면 걸었던 길들을 곱씹어본다. 그 기억을 풍경처럼 바라본다. 그러니 나를 열면 그런 것들이 있지 않을까. 사랑한 것, 외로운 것, 슬픈 것, 기쁜 것, 얻은 것, 잃은 것 모두.
-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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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서핑 - 그대, 패들링을 멈추지 말아요 아무튼 시리즈 51
안수향 지음 / 위고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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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선 모든 게 분명하지 않아서 좋다. 버텼던 마음은 다시 나아갈 수 있는 힘이 되기도 하고, 끝은 다시 시작이 될 수도 있으므로. 나는 오늘도 바다에서 나이를 먹고도 울 수 있는 마음과 처음과 끝 사이를 오가는 길을 배운다. p.11 <아무튼, 서핑>

<아무튼, 뜨개> 이후로 오랜만에 읽는 시리즈다. 한여름에 딱 맞춰 나온 <아무튼, 서핑>. 물빛 서프보드를 들고 햇볕에 탄 건지 상기된 건지 모를 붉은 뺨을 한 뾰쪽 뾰족 젖은 머리의 남자가 인상적인 표지는 사진을 찍고 글도 쓰는 저자가 직접 찍은 사진이다. 언젠가부터 바닷가에 가면 서퍼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서퍼들은 외국에서나 볼 수 있다고 생각했고 백사장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서프보드만 봐도 이국적으로 느껴졌는데 이제는 우리나라 사람들도 많이 즐기는 스포츠가 되었나 보다. 어릴 때부터 스포츠와 가까웠던 저자가 지금 가장 좋아하는 서핑에 대한 예찬을 기록한 글들을 읽으니 그동안 궁금했던 서퍼들의 마음이 생생히 다가온다. 바다에서 무언가를 하는 것 자체가 힘든데 얼마 서보지도 못하고 물에 빠지길 반복하는 것의 매력이 대체 무엇인가 내심 궁금했다. 나는 수영도 못하고 어릴 때 여름휴가로 해수욕장에서 튜브 타고 노는 게 다였던 사람이니까 궁금할 수밖에.

여름에 하는 서핑, 겨울에 하는 서핑, 바다마다 날씨마다 다른 파도들에 대해 알 수 있었고, 서퍼들만의 예의나 규칙 같은 것들도 알 수 있어서 좋았다. 뭐든 좋아하게 되고 잘 하고 싶다면 어렵더라도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에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웻수트를 벗으며 씨름하는 작가나, 겨울 서핑을 즐기는 사람으로 뉴스에 보도된 일화들은 피식거리게 만든다. 서핑을 즐기고 있는 사람만이 알려줄 수 있는 장비를 구비할 때에 대한 팁은 아무것도 모르는 나도 이해하기에 어렵지 않게 쓰여있어 좋았다. 특히 좋았던 것은 '바다 사용료'에 대한 언급이다. 서퍼들 사이에서 쓰는 말인데 바다를 대가 없이 자유롭게 이용한 만큼 서핑을 마친 뒤 해변의 쓰레기를 치우는 일로 사용료를 대신한다는 표현이라고 한다. 우리가 공짜로 누리는 바다라는 자연 속에서 파도를 이용해 즐기는 스포츠인만큼 자연을 지키려는 마음과 멀지 않아야 할 것이다. 최근에 여러 책을 읽으며 느낀 것인데, (당연하겠지만) 환경과 관련한 책이 아니라도 이젠 모든 이야기들이 결국 환경문제로 연결된다는 거다. 고사해 하얗게 변한 구상나무들, 그리고 산호의 백화현상을 찍은 항공 샷을 보았을 때 받았던 충격을 기억한다. 여름이면 해변에 쓰레기가 넘쳐난다는 것도, 환경이 많이 훼손되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나에게 나무나 해변은 항상 존재하는 것이었으니까. 그리고 이런 결과를 초래한 데에 나라는 인간이 전혀 무관하지 않으니까. 인간에 대해선 유난히 회의적인 나지만, 자신의 자리에서 노력하는 사람들이나 브랜드를 보면 나 같은 인간도 가슴속에 간질간질 거리는 조그마한 희망이 느껴진다. 자연에 이로운 쪽으로 살아가는 일이 우리 시대의 교양이라고 믿는다는 저자의 마지막 말에 적극 동의한다.

아무튼 시리즈가 사랑받는 이유는 대상에 상관없이 무언가를 좋아하는 마음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다루는 내용은 저마다 다 다를지라도 <아무튼, 00> 에 내가 좋아하는 그 어떤 것을 넣어보면 바로 내 마음이 되어버린다. 그렇기에 서핑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사람도 무언가에 푹 빠질 수밖에 없는 그 마음과 여러 감정에 공감할 수 있는 것이다. 좋아하는 마음을 잠시 잊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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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핑은 선을 긋지 않는 스포츠다. 프로 서퍼가 아닌 이상 경쟁자도, 시간제한도 없다. 그저 파도를 만나거든 딛고 일어서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서핑을 시작할 때 가장 처음으로 맞닥뜨리게 되는 불안 역시 이 ‘선 없음‘에 있다.
- P9

무엇보다 비를 맞으며 서핑을 하면 연약하고 보드랍던 시절의 마음을 다시 만날 수 있어서 좋다. 물과 모래는 움켜쥘 수 없기 때문일까, 쉼 없이 흔들리기 때문일까, 서핑을 할 땐 모든 것이 물렁물렁해진다. 세계가 흐트러진다.
- P50

평범한 일상을 살며 파도를 기다릴 수 있을 때, 기다리던 파도가 왔을 때 곧장 바다로 뛰어들 수 있는 마음을 품고 살 때, 우리는 여전히 서핑하는 삶을 살 수 있다. 조급함을 버리는 순간 파도는 온다.
- P65

그저 재미 삼아 하는 운동이라기에는 내 삶을 너무나 크게 뒤흔들고, 삶을 대하는 태도라고 하기에는 아드레날린으로 나를 너무나 쉽게 휘두르는, 서핑은 너무나 까탈스러운 상대다. 그러나 무엇이어도 좋고 무엇이 아니어도 좋다. 언제라도 좋으니 그저, 나는 바다에 갈 수만 있다면 좋겠다.
- P69

나는 여러 운동을 경험한 덕분이라고 믿는다. 그 덕에 마음이 열린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에겐 다양한 게임의 룰을 경험하는 것이 필요하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각각 다른 조각들로 채워지고 세워질 우리의 세계는 꽤 근사할 것이다.
- P98

우리는 자연으로부터 취해온 많은 것들을 생각하며 사용료를 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연에 이로운 쪽으로 살아가는 일, 그것이 우리 시대의 교양이라고 믿는다. 우리가 자연을 아낄 때, 자연도 여전히 우리를 아끼고 품어줄 것이다.
- P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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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친코 1 - 개정판 코리안 디아스포라 3부작
이민진 지음, 신승미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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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우리를 저버렸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드디어 읽어보게 된 파친코. 사실 이전에 출간되었을 때 나는 전자책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 절판이 되었고 다행히 인플루엔셜에서 발 빠르게 개정판을 내어주어 읽어보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2권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무엇보다도 마음이 급한 건 출판사일 테니 더 이상 징징거리지 않기로 한다.


이전부터 읽어본 사람들로부터 재밌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읽기 시작하니 엄청난 속도감에 푹 빠져들지 않을 수 없는 책이란 걸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이 이야기는 독립운동가들의 위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나라가 어찌 돌아가든, 정치가 어떻게 되든 그보다 지켜야 할 생과 가족이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바로 이 점이 이 책이 좋은 이유다. 부산을 터전으로 하고 있는 선자네 이야기는 일제 식민지 하의 조선인의 삶을, 북으로부터 내려온 백씨 집안이나 경희, 창호 같은 인물들로 남북의 이념 문제까지, 역사적 배경이 이야기 속에서 굉장히 유려하게 흐른다는 점이 좋았다. 그 속에서 삶의 터전을 벗어나 오사카에서 억척같이 자신과 가족들의 삶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냈던 이야기에 어떻게 주목하지 않을 수 있겠나.


선자와 경희의 삶에 대한 강인한 의지는 단연 돋보였다. 가족들의 생계 앞에서 그녀들은 누구보다도 현명했다. 생의 위기 앞에서 백요셉의 가부장적인 태도는 답답하기는 했지만 가족을 책임지려는 그 마음만은 이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들 드라마를 볼 때 나는 일부러 정보를 많이 찾아보지 않았다. 알고 있는 것은 젊은 선자를 맡은 배우, 나이 든 선자를 맡은 배우, 그리고 한수를 맡은 배우 딱 이것만 아는 상태에서 책을 읽었는데 처음에 한수와 선자의 러브스토리에 흠뻑 빠졌다가 급 실망했다. 한수라는 남자가 러브스토리의 정석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한수가 가장 똑똑한 사람이란 생각이 들어서 미워할 수가 없었다. 인간의 바닥에 대한 치떨림, 정치나 이념에 대한 생각에 동조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매거진 책 <끼니 너머의 세계>에서 파친코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한국인의 정서가 담긴 음식을 주제로 쓴 글이었는데 그 글을 읽고 파친코가 더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원한 보리차, 흰쌀밥, 보리밥, 떡, 뽀얗게 우려낸 설렁탕, 김치와 장아찌 같은 것들이 파친코의 또 다른 매력이 아닐까 한다. 선자가 백이삭과 결혼을 하여 어떻게든 쌀밥 한 그릇 먹이고자 했던 모친 양진이 조 씨에게 찾아간 장면은 눈시울이 시큰했다. 양진의 간절한 마음도 그랬지만 시대가 그렇다 보니 떡을 한다는 소리가 반가워 쌀을 내어주러 가는 조 씨도 마음 아리긴 매한가지였다. 또 한 번 마음이 쓰렸던 장면은 오사카에서 생계를 위해 일을 해야 했던 선자가 리어카를 끌고 장에 나가 처음으로 '김치 사이소'를 부르짖을 때였다. 부끄러움과 서러움과 그럼에도 살아남아야 한다는 마음이 절실히 느껴졌다. 선자의 어린 시절에 자갈치 시장에 다니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나도 어릴 때 토성동에 살았기 때문에 매일 할머니 손잡고 자갈치 시장에 따라다녔다. 때문에 어린 선자가 머릿속에 그려지는 듯했다. 페이지가 쉴 새 없이 넘어간다 싶더니 어느새 마지막 페이지였다. 2권에서는 노아와 모자수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펼쳐질 듯해서 너무 궁금하다. 창호의 이야기도, 또 한수의 이야기도 더 궁금하다.


* 도서지원

* 아침서가 - @morning.bookstore

가질 수 없는 것을 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누구나 그렇게 주어진 삶을 받아들이며, 참고 견뎠다. - P18

중국이 항복을 하든 대갚음하든, 채소밭에서 잡초를 뽑아야 했고 식구들이 신발을 신고 다니려면 짚신을 삼아야 했고 몇 마리 안 되는 닭을 훔치려고 하는 도둑들을 쫓아야 했다. - P30

어딜 가든 사람들은 썩었어. 형편없는 사람들이지. 아주 나쁜 사람들을 보고 싶어? 평범한 사람을 상상 이상으로 성공시켜높으면 돼. 뭐든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을 때 그 사람의 본 모습이 드러나는 법이거든. - P74

오사카에서 살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다 나아지기 마련이었다. 가진 것이 돌멩이와 쓰디쓴 고난뿐이라도 얼마든지 맛있는 국을 끓여 낼 수 있을 것이다. - P171

넌 내 밑에서 일하면서 잘 먹고 잘 벌었어. 그래서 이런저런 이념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지. 당연한 일이야. 애국심은 그저 이념이야. 자본주의나 공산주의도 마찬가지고. 하지만 이념에 빠진 사람은 자신의 이익을 잊게 돼. 그리고 높은 자리에 있는 지도자들은 그 이념에 지나치게 심취한 사람을 이용하지. 넌 조선을 바로잡을 수 없어 - P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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