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 너머 어렴풋이
신유진 지음 / 시간의흐름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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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신유진은 서문이다. 다른 책의 서문을 읽을 때도 나는 매번 신유진을 떠올린다. 이 얘기를 조금 해보자면, 작가의 <열다섯 번의 낮>, <열다섯 번의 밤> 을 산 날이다. 빨리 읽고 싶어 꾸역꾸역 일을 끝낸 밤에 <열다섯 번의 밤>을 펼쳤다. 그때까지 나에게 책의 서문이란, 지금 꼭 읽어야 할까? 책을 다 읽고 나서 읽어야 할까? 고민하게 하는 조금 귀찮은 것이었는데 그날 읽은 책의 서문은... 뭐라 설명할 수도 없다. 나는 서문만 여러 번 읽다 책을 덮었고 아직까지 펼치지 못했다. (여기저기 읽어보라고 하고, 노트에 옮겨 적어도 보았는데 책은 못 읽겠더라) 그때부터였다. 작가님을 좋아한 게. 

다정스럽다. 조금 서늘할 때마저 다정스럽다.('다정하다'가 아니라 '다정스럽다'라고 하고 싶다) 서문과 함께 나는 작가의 집을 천천히 둘러보고 이 창, 저 창에 드는 색색의 빛을 느껴본다. 그 빛은 독단적으로 들어와 여기저기 흔적을 남겼을 테고, 그 흔적은 작가의 눈과 마음과 손으로부터 글이 되었음을 느낀다. 허락 하에 나는 작가의 많은 기억을 들여다보았다. 서문의 글을 빌려 말하고 싶다. 창가에서 보는 모든 풍경이 그렇듯 적절한 거리를 두고 알맞게 그리웠습니다. 라고.

<창문 하나, 기억> 속 글들이 참 좋았다. 바로 얼마 전에 읽은 박연준 작가의 <여름과 루비>로 내가 아직 유년의 기억에서 헤어 나오지 못해서 그런 걸까. 다 좋았다. <엄마의 창문>이 특히 기억에 남는데 이 글 속에서 작가는 '나는 잘 모르겠다'라는 말을 여러 번 쓰고 있다. 이 애매모호한 표현이 글에서만큼은 무책임하게 느껴지지 않았고, 정말... 좋았다. 누구라도 공감하지 않을까. 엄마라는 존재에 대해서 '나는 잘 알겠다'라고 표현하는 글이 있다면 나는 읽지 않겠다.

자두주는 어떤 맛일까? 자두나무, 체리나무, 노간주나무, 사과나무의 향기를 나도 맡고 싶다. 프랑스, 마르땅과 이안의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작가의 정체성과도 같은 연극과 글쓰기, 뒤라스와 한트케까지, 그녀를 이루는 조각조각을 따라 함께 여행했다. 아, <창문처럼 나를 열면>의 표현대로 우리는 글을 읽음으로써 신유진이란 창을 열고 사랑한 것, 외로운 것, 슬픈 것, 기쁜 것, 얻은 것, 잃은 것들을 들여다본 것이겠다. 그렇겠다. 그렇지만... 창을 열어 보아도 자두주만큼은 먹어보지 않고는 어떤 맛인지 모르겠다. 내가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자두주의 맛이 아니라 그냥 자두의 맛이라서 혀 양 옆에서 자꾸만 침이 솟아난다. (아쉬운 대로 자두를 사러 마트에 갔는데 너무 비싸서 내려놓았다. 내가 아는 그 자두가 아닌가 봐, 금두인가 봐.) 서문만 읽고 덮어둔 책은 이제 읽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제 아끼지 않을 거다.



아침서가 - @morning.bookstore


아무도 다녀가지 않은 얼룩 없는 하얀 세상보다 누군가 통과한 흔적이 남은 얼룩진 세계가 좋습니다. 표백되지 않은, 무늬 가득한 삶을 살고 싶습니다.
- P13

좋다‘라는 말, 지금 우리에게 얼마나 어울리는 온도인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우리가 여전히 좋아하는 쪽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다는 게, 무언가를 더 유연하게 꾸준히 좋아하고 있다는 게 정말 좋았다.
- P56

지영이는 배시시 웃었고 나는 여기, 우리가 마주한 이 시간이 과거와 미래 사이에 있는, 그러나 현재라고 딱 잘라 말할 수 없는 모호한 어디쯤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 P56

엄마는 웃었다. 아이 같기도 하고, 노인 같기도 했다. 나와 닮기도 했고, 나와 다르기도 했다. 엄마는 내게 가장 어려운 타인이다. 아주 타인일 수도 완전히 나일 수도 없어서 힘든 사람.
- P65

어떻게 늙고 싶어?

나는 그냥 얻고 잃은 것이 잘 흘러가면 좋겠어. 흐르는 걸 내가 잘 받아들일 수 있으면 좋겠고.
- P88

빈 마음이 텅텅 소리를 낼 때면 걸었던 길들을 곱씹어본다. 그 기억을 풍경처럼 바라본다. 그러니 나를 열면 그런 것들이 있지 않을까. 사랑한 것, 외로운 것, 슬픈 것, 기쁜 것, 얻은 것, 잃은 것 모두.
-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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