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자(1941~2008)
한국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의 생존자로, 종전 후 살아남기 위해 기지촌에서 일하다 상선 선원이었던 백인 미국 남성을 만나 미국으로 이주했다. 양공주나 튀기라는 말을 서슴지 않는 동족의 차별적 시선을 벗어나 이주한 미국이지만 그곳은 또 다른 차별의 시작이었다. 다양성이라곤 없는 보수적인 남편의 고향 마을에서 또다시 살아남기 위해 한국인 특유의 생활력과 강인한 의지로 남편 대신 생계를 책임지기도 하며 두 아이를 키워냈다. 딸이 열다섯 살 되던 해, 조현병이 시작되어 모든 것을 접고 소파에 틀어박힌 채 은둔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군자의 과거는 오랫동안 침묵으로 가려져 있었지만 사회학자로 공부하던 딸 그레이스(저자)는 과거 엄마 군자가 겪었을 사회적인 맥락과 그녀를 조현병으로 몰고 갔던 온갖 인종차별적 언어와 폭력들을 되짚어 나간다. 이 책은 딸 그레이스가 쓴 엄마의 회고록이자, 전쟁 생존자, 한국계 미국인 가족에 대한 사회학적 탐구인 동시에 디아스포라 문학 그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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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에게도 그런 상차림은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가능성의 세계를 상징했다. 다른 사람을 먹이면서 엄마는 당신의 출신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것은 살아남았다는 증거였고, 미래에 대한 희망이기도 했다. | p.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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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가 경상도 사람이어서 이 책에는 '답답어라', '함 묵자' 같은 방언을 볼 수 있다. '한번 주면 정 없다'라는 뜻으로 사용한 '원 타임, 노 러브' 같은 말들을 발견할 때마다 어쩐지 마음이 찌르르했다. 그 시절 여러 이유로 미국으로 건너온 1세대 한인에게 팔을 걷어붙이고 김치와 한국 음식을 만들어 나누어주었던 군자. 음식이란 군자에게 어떤 의미일까. 기지촌에서 일할 때 처음 먹어보았던 미군들의 음식 '치즈 버거'는 기회와 가능성이었고 미국에서 힘들게 만들어 먹었던 김치는 군자의 고향과도 같았다. 그렇게나 몰두해 만들었던 쿠키와 애플파이는 미국에 녹아들기 위한 도전이었고 강인한 채집인이 되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질 때 만들었던 블랙베리 파이는 오롯한 자기 의지이자 삶의 의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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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섯 여자>라는 장은 군자의 빛나는 매력과 강인함을 느낄 수 있었던 장이고 웃음도 많이 났다. 그래서 더 슬펐다. 심장이 안 좋아 힘든 일을 할 수 없는 아버지를 대신해 군자는 여러 가지 일을 했는데 어느 날 집 근처 숲에서 가능성을 발견한다. 바로 어마어마한 블랙베리를 발견한 것. 블랙베리를 채집하는 과정은 힘들어서 다른 사람들은 엄두도 못 냈지만 군자는 특유의 억척스러움으로 매일매일 채집량을 갱신했고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물량과 가격으로 블랙베리 여사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블랙베리 철이 지나고는 버섯 채집에 나선다. 버섯은 독성이 있기에 버섯에 대한 치밀한 공부를 마친 후 온갖 버섯을 채집하기 시작했고 블랙베리 여사답게 이번엔 진정한 '버섯 여사'가 되기에 이르는데 읽는 동안 너무 재밌고 웃음이 나왔다. 개인적으로는 추억에 잠기기도 했다. 그야말로 너무 한국적인 대목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어릴 때 우리 대가족은 주말에 야외로 나갈 때가 많았는데 목적지에 가는 동안 여러 번 내려야 했다. 누구 하나가 '여기 쑥 많겠는데.' 하면 언제 그렇게 챙겼는지 각자 50원짜리 칼과 검은 봉다리를 주섬주섬 꺼내서 쑥을 캐기 시작했다. 요즘엔 무분별한 채집은 금지되어 있지만 그 당시엔 그런 일이 예삿일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많았지만 채집량은 우리집 식구들을 따라올 수가 없었다. 고모들에 삼촌들에 고모부들까지 있었으니까. 쪼그리고 앉아서 땅만 바라보며 쑥을 캐고 있던 식구들이 생각났고, 그 생각은 봉다리에 가득 찬 쑥으로 쑥떡을 해먹고 쑥국을 해먹었던 기억으로 이어졌다. 책에서 군자도 '지천에 쑥이 널렸네, 국 끓이기에 최고지'라고 했다. 너무도 한국적인 군자의 모습을 보니 미국에서의 생활이 그녀에겐 얼마나 큰 싸움이었을까 싶어 마음이 무거웠다.
어린 시절에 거리를 두게 되면서, 나는 부모님의 모습을 지나칠 정도로 냉정하게 보게 되었다. 우리 가족 내 권력 역학에 더 넓은 사회적 불평등이 반영돼 있다는 걸 알아차린 뒤로, 아버지는 내 주요 비판 대상이 되었다. 아버지가 그토록 열심히 일해서 얻고자 했던 바로 그것, 내가 누리는 최상의 교육으로 인해, 우리 사이의 거리는 아주 깊고 넓게 벌어져서, 다시는 같은 땅을 딛고 눈을 맞추며 설 수 없게 되었다. p.276
아버지에 대해서는 그레이스만큼이나 읽는 나도 참 혼란스러웠다. 아버지가 집에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았고 그레이스 자신도 어렸기에 자각할 수 없었겠지만 기지촌에서 어머니를 만나 미국에 데려와 아이까지 낳고 가족을 이루었지만 정작 그 자신은 보수적인 시각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 세대가 속해 있는 사회적인 맥락 자체가 그러하기도 했겠으나 사회학을 공부하는 그레이스가 가족이 침묵해왔던 과거에 몰두할수록 아버지에 대한 혼돈은 분명 아픔이었을 것이다. 한국에서도 미국에서도 기회나 희망은커녕 온전히 자신을 인정해 주는 사람 하나 없는 채로, 어쩌면 평생을 생존자로 살아남는 데 힘을 다 써버린 군자는 더 이상 아무 기력이 남지 않았던 걸까?
나는 국에 밥을 말아 소파 앞 커피 테이블에 상을 차렸다. 엄마는 바닥에 내려와 앉았고, 우리는 마주 보고 앉아 국밥을 떠먹었다. p.374
이후 집 안에서 은둔생활을 한 군자는 음식을 거부할 때가 많았고 강인한 매력으로 휘어잡았던 주방은 그대로 방치됐다. 그레이스는 어머니에게 찾아갈 때마다 H마트에 들러 한국 식재료를 산 후 엄마가 먹고 싶은 한국 음식을 만들었다. 소고기국, 콩국수, 찹쌀떡, 생태찌개를 해서 둘이 같이 먹었다. 소파에 앉지 않고 소파 앞 바닥에 앉아 국에 밥을 말아 후루룩 먹는 장면이 나오는데 나는 이게 그렇게 슬펐다. 그레이스가 자신을 더러워하는 게 아니라 사랑한다는 것을 이젠 안다고 할 때도, 그레이스가 사회학자로서 엄마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꼭 써달라고 부탁할 때도, 함께 마지막 생태찌개를 먹고 한국식 이불을 덮은 채 딸의 발을 조물조물 만져줄 때도 마음이 먹먹했다. 가족사인 동시에 어머니에 대한 회고록이라는 점에서 개인적이기도 하지만 전후의 한국 상황과 이민자에 대한 미국인의 인종차별주의, 젠더화된 노동과 폭력, 정신건강 불평등과 같은 사회적인 맥락까지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정말 좋았다. 다음에 다시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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