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면 아래
이주란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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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그 깨가 눈에 들어온 순간에 겨우 안도감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해인씨가 그래도 깨를 뿌린 음식을 한 번은 먹었구나. 깨라는 건 가만히 생각해보면 안 뿌리려면 안 뿌릴 수 있는데, 깨를 뿌릴 마음이 남아 있구나. 그도 아니라면 해인씨가 뿌렸던 남이 뿌렸든 어쨌든 깨를 부린 음식을 먹긴 했구나. 잠시나마 안도했다는 것. 집에 가서도 얼마간 불안한 마음은 가시지 않았지만 그럴 때마다 방 한구석에 떨어진 깨를 생각하며 너무 걱정하지 않으려고, 아니 너무 미안해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는 이야기. 깨라니. 그 얘길 전해들으면서 어쩐지 시시하다 생각했고 참 슬펐습니다. 저는 시시한 것들을 사랑하고 시시한 것은 대체로 슬프니까요. Ι p.124 <수면 아래>

이 작품은 도드라지는 사건이 없다. 들여다보면 인물 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있지만 그것이 전면에 드러나지 않는다. 단조로운 듯하지만 단단하게도 느껴지는 그 특유의 분위기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한 친구와 결혼을 하고 아이를 잃은 후 결별한 해인과 우경. 이 책에서 그들은 헤어짐을 선택했지만 사건이 일어나고, 슬픔이나 미움, 원망 같은 이야기는 다뤄지지 않는다. 그 이후에 찾아오는 이야기, 그러니까 상처 이후 다시 일상을 회복하는 이야기다. 일을 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 관계를 이어나가고, 또 다른 사람의 상처를 볼 줄 알고, 그리고 각자의 자리에서 많은 순간에, 정말로 괜찮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길 바라는 것.

이 작품은 <주간 문학동네>에서 연재했던 이야기라고 한다. 처음 연재된 원고는 원고지 820매의 분량이었으나 퇴고 후 480매 분량으로 줄었다고 들었다. 거의 절반에 가까운 분량으로 퇴고를 했다는 것이 놀랍게 느껴졌다. 읽는 내내 느껴졌던 느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생각하다가 문득 TTS가 떠올랐다. 오디오북보다 감정이 없는 TTS 기능으로 듣는 걸 좋아한다. 사람들은 감정 없는 그 느낌이 적응이 안 된다고 하지만 나에겐 오히려 오디오북이 조금 거북하다. 그건 내 감정이 아니지라는 생각부터 든다. 그에 비해 단조로운 TTS는 가만히 듣다 보면 어느 순간엔 약간 감정이 느껴지는 것이다. 내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굳이 사람들이 잘 모르는 TTS까지 생각이 발전할 즈음 박연준 작가의 추천사를 읽었다. 

「나는 이주란의 소설을 사랑한다. 그의 소설은 극적인 장면 없이 고루 팽팽하고, 대단한 플롯 없이 완벽하며, 시 없이 시로 가득하고, 청승 없이 슬픔의 끝점을 보여준다. ‘도―’라는 음계만으로 이루어진 음악 같고, 연노랑으로 그린 핏물 같고, 발 없이 멀리 가는 구두 한 켤레 같다. 내가 잘 아는 세계, 잘 아는 사람이 오래 지켜온 비밀을 모아둔 화단 같다.」 박연준

'도ㅡ'라는 음계만으로 이루어진 음악 같다....라....이게 바로 내가 느낀 감정이었다. 저렇게 좋은 추천사가 있는데 나는 이렇게 어렵게 리뷰를 쓰고 있다. 아... 현타 온다.



* 도서지원

* 아침서가 @morning.bookstore



어떻게 지냈어요?

ㅡ 그냥 평범하게 지냈어요.

어려운 거네요.

ㅡ 뭐가요?

평범하게 지내는 것.
- P77

나는 우경의 뒤에 안장 그의 티셔츠를 잡았다. 자전거는 이미 고요해진 마을 길을 달렸다. (...) 나는 처음에는 우경의 등만 바라보고 있다가 얼마간 지난 뒤부터는 그의 뒤통수를, 그다음엔 멀리 해 지는 마을 풍경을 바라보았다.
- P86

일을 열심히 했다는 말을 몇 번을 더 반복해도 모자랄 만큼 최선을 다했어요. 더 많은 시간을 일하면 평범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몇 년을 그렇게 달려오다가 어느 날 야근을 마치고 퇴근하는데 아니, 여기가 어디지? 집까지 가는 길이 너무 먼 거예요. 그날따라 그 길이 왜 그렇게 길었는지 노래를 부르며 아무리 걸어도 도대체 집이 가까워지질 않더군요. 집이, 너무......
- P101

나는 우리가 모르겠다는 말을 너무 많이 해왔구나, 그걸 알게 되었어. 안다고 생각될 때, 더 경계해야 한다는 것도.
- P195

그냥, 난 우리가 괜찮았으면 좋겠어. 각자의 자리에서, 많은 순간에, 정말로 괜찮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 P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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