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도피 시공사 베른하르트 슐링크 작품선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김재혁 옮김 / 시공사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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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어주는 남자]는 나이어린 남자를 탐하는 육욕에 휩싸인 여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전범으로 형을 사는 것보다 더 숨기고 싶어했던 문맹에 대한 상처가 가득 담긴 이야기였다. 그래서 슬프고 애잔했으며 어리석어 보였다. 부끄러움이 삶에 대한 애착보다 강한 것이었을까. 케이트 윈슬렛이 주연을 맡아 화제가 되었던 영화 [더 리더]의 원작이었던 소설은 충격 그 자체였다.

 

이후 처음 접하는 베른하르트 슐링크는 [사랑의 도피]라는 제목 아래 장편이 아닌 단편 7편을 내밀며 다시 찾아왔는데, 단편들은 짧지만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분명했다. 아버지의 서재에 걸려 있는 그림 속 소녀와 사랑에 빠져 이후 그 어떤 여자를 만나도 만족감을 느낄 수 없었던 소년의 이야기와 아내의 죽음 이후 숨겨진 남자의 편지가 계속 도착되는 것을 읽어야하는 남편의 심정, 베를린 장벽도 막지 못한 체스 친구 등등이 [소녀와 도마뱀],[외도],[다른 남자],[청완두],[할례],[아들],[주유소의 여인]이라는 이름으로 실려있다.

 

법학교수로 재직중에 소설을 쓰기 시작했고 [책 읽어주는 남자],[고르디우스의 매듭],[젤프의 살인]등을 발표한 베른하르트 슐링크가 독일의 역사와 오늘 그리고 역사를 고스란히 받으며 살아가는 오늘의 독일인을 어떤 눈길로 바라보고 있는지는 그의 글을 보면 가장 잘 파악할 수 있다. 외도와 비밀, 배신 등 감추어진 죄들이 들춰지면서 감정에 호소하고 포효하는 것보다는 조용히 분노하고 지긋히 바라보는 그의 주인공들은 감정적인 인물들조차 전달하지 못하는 진한 감동의 여운을 전달한다.

 

글을 쓰면 행복하다는 베른하르트는 진실이 밝혀지는 일이 무조건 행복한 일은 아님을 글을 통해 말하고 있다. 안토니오 반데라스와 리암 니슨이 주연한 [디 아더 맨]의 원작소설이 실린 [사랑의 도피]는 그래서 아주 정직하면서도 인간의 내면 밑바닥까지 헤집어 보인다. 잘 정돈된 집에 첫발을 디딘 이방인처럼 [사랑의 도피]를 읽고 나면 감정을 누른다는 일이 어떤 일인지, 그 조용한 폭발이 어떤 일인지 분명히 깨닫게 만들고 있다. 내게 이런 일들이 닥쳐온다면 어떻게 반응하게 될까. 과연 이들처럼 대처할 수 있을까.

 

그의 진중한 글쓰기가 피부 밑에서 곪고 있었던 상처를 드러내며 그 농하게 익은 고름이 탁터지는 순간을 잘 포착해 단편에 실음으로써 단편은 장편과 다르게 그 순간을 담는다는 것을 여지없이 보여주어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죄의식. 떠나간 사람의 것이든 남겨진 사람의 것이든 간에 서로간의 죄의식이 표면화 되는 순간, 도덕은 이미 차후의 것이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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