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든
헨리 데이빗 소로우 지음, 강승영 옮김 / 이레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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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 윌든 호숫가에서 2년동안 소로우가 직접 실험한 독립적 삶에 대한 실험 보고서 및 생태 보고서>>쯤으로 정리할 수 있을까? 자신만의 확고한 인생관과,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용기, 그 두 가지가 오롯이 작품에 녹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훌륭하다. 거기에 하나 더하자면 자연풍광에 대한 기막힌 묘사. 특히 술취한 개구리들 소리 부분이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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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먼저 우리의 집이 우리의 삶과 맞닿는 면을 마치 조개의 내부처럼 아름답게 장식하되 집의 겉치레 장식만 하지 말자는 것이다. " 

"문명인이란 보다 경험이 많고, 보다 현명해진 야만인일 따름이다."  

"나는 사람의 꽃과 열매를 원한다. 나는 사람에게서 어떤 향기 같은 것이 나에게로 풍겨오기를 바라면,우리의 교제가 잘 익은 과일의 풍미를 띠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의 '착함'은 부분적이거나 일시적인 것이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끊임없이 흘러 넘치되 아무 비용도 들지 않고, 또 그가 깨닫지 못하는 것이어야 한다."  

"볼 가치가 있는 것을 그때그때 놓치지 않고 보는 훈련에 비하면 아무리 잘 선택된 역사나 철학이나 시의 공부도, 훌륭한 교제도 가장 모범적인 생활 습관도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다. 당신은 단순한 독자나 학생이 되겠는가. 아니면 제대로 보는 사람이 되겠는가? 당신앞에 놓여진 것들을 보고 당신의 운명을 읽으라, 그리고 미래를 향하여 발을 내디뎌라."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지내는 것이 심신에 좋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좋은 사람들이라도 같이 있으면 곧 싫증이 나고 주의가 산만해진다." 

"대체로 사람들의 사교는 값이 너무 싸다. 너무 자주 만나기 때문에 각자 새로운 가치를 획득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 우리는 하루 세끼 식사때마다 만나서 우리 자신이라는 저 곰팡내나는 치즈를 서로에게 맛보인다. 이렇게 자주 만나는 것이 견딜 수 없게 되어 서로 치고받는 싸움판이 벌어지지 않도록 우리는 예의범절이라는 일정한 규칙들을 협의해 놓아야 했다." 

"그대 정치하는 사람들이여, 형벌을 쓸 필요가 어디 있는가? 그대들이 덕을 사랑하면 백성들도 덕을 사랑할 것이다. 윗사람의 덕은 바람과 같고 평민의 덕은 풀잎과 같다. 풀잎들은 그 위에 바람이 불면 반드시 고개를 숙이게 되어 있다." 

"진취성과 신념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들이 지금 있는 곳에 머무르면서 사고 팔고 농노처럼 인생을 보내는 것이다." 

"각자는 육체라고 불리는 신전의 건축가이다. 이 신전은 자기 나름대로의 양식에 의거해 건축되며 자기가 숭배하는 신에게 바쳐진다. 이 육체 대신 대리석 신전을 지음으로써 빠져나갈 수는 없다. 우리는 모두 조각가인 동시에 화가이며, 우리 자신의 피와 살과 뼈를 작품의 재료로 쓴다. 어떤 사람의 내적 고귀성은 즉각적으로 그의 겉모습을 정교하게 만들기 시작하며, 비열함이나 관능은 그를 짐승처럼 추하게 보이도록 한다." 

"우리는 항상 사고를 당할 위험을 안고 있지만 거기에 대한 해명은 불충분하다는 것을 깨닫지 않으면 안된다. 현명한 사람이 여기서 받는 인상은 보편적인 결백이다. 독이란 것도 알고 보면 위험한 것이 아니며, 어떤 상처도 치명적인 것은 없다. 연민이란 지지할 수 없는 감정이다. 그것은 임시변통적인 감정임이 틀림없다." 

"진실로 바라건대 당신 내부에 있는 신대륙과 신세계를 발견하는 콜럼버스가 되라. 그리하여 무역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상을 위한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라. 각자는 하나의 왕국의 주인이며 그에 비하면 러시아 황제의 대국은 보잘것없는 작은 나라, 얼음에 의해 남겨진 풀 더미에 불과하다. 그러나 자기 자신에 대하여 아무런 존경심을 갖지 않는 사람이 애국심에 불타서 소를 위해 대를 희생시키는 일이 있다. 그들은 자기의 무덤이 될 땅은 사랑하지만, 지금 당장 자신의 육신에 활력을 줄 정신에 대해서는 아무런 공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이런 사람들에게 애국심은 그들의 머리를 파먹고 있는 구더기라고 할 수 있으리라" 

"왜 우리는 성공하려고 그처럼 필사적으로 서두르며, 그처럼 무모하게 일을 추진하는 것일까? 어떤 사람이 자기의 또래들과 보조를 맞추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마 그가 그들과는 다른 고수의 북소리를 듣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듣는 음악에 맞추어 걸어가도록 내버려두라. 그 북소리의 음율이 어떻든, 또 그 소리가 얼마나 먼 곳에서 들리든 말이다. 그가 꼭 사과나무나 떡갈나무와 같은 속도로 성숙해야 한다는 법칙은 없다. 그가 남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자신의 봄을 여름으로 바꾸어야 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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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리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권택영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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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해설에 줄거리가 상세히 나와 있어 구지 따로 정리할 필요는 없고.  

험버트가 롤리타를 발견(?)하는 부분 부터, 롤리타와 처음 성관계를 가질 때까지, 부끄럽지만, 야릇하게 흥분됬다. 별다른 야한 장면도 묘사도 없었는데, 나는 쉽게 흥분하는 스탈인가? ㅋㅋㅋ 임신한 롤리타에게 찾아가, 같이 떠나자고 애원하는 험버트의 모습은 의외였다. 어린 소녀들에게서만 애정을 느끼는 험버트의 성애욕을 생각하면, 험버트 자신이 늘 불안해 했듯, 롤리타가 나이를 먹게 되면 그 광적인 애정 또한 자연스레 식고 또 다른 롤리타를 찾아 나서리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서문대로 험버트는 끔찍하고 비열하다. 그는 도덕적인 타락자의 비열한 예다. 그는 비정상이다. 그는 신사가 아니다. 그러나, 험버트의 사랑을 인정하기로 한다. 만약 그가 <도취된 사냥꾼들>에서 롤리타를 강제로 취했다면, 욕정만을 위해 또 다른 롤리타를 찾아 헤맸다면, 이야기는 또 달라졌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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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주 문학 작품 속의 전형을 독자가 마음에 새기듯 우리들의 친구에게도 그렇게 한다고 생각해 왔었다. 중략. 잘 알려진 인물이 소설이 진행되는 동안 이런저런 발전을 거친다 해도 그의 운명은 우리의 마음속에 새겨져 있고,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친구들이 우리가 그들을 위해 마련해 준 논리적이고 관습적인 패턴에 따라 움직여 주기를 바란다. 그러므로 X는 그가 늘 우리에게 들려주었던 이류 교향악과 전혀 다른 불멸의 음악을 만들 수 없다. Y는 결코 살인을 할 사람이 아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Z는 결코 우리를 배반하지 않는다. 우릴는 그런 것들을 속으로 미리 다 정해놓고는 어떤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그가 우리 생각을 얼마나 잘 따르고 있는지 확인하며 만족해 한다. 덜 만날수록 더 그렇게 된다. 우리가 정해 준 운명에서 빗나가는 경우 반윤리적이고 변칙적이라고까지 생각하단. 은퇴한 핫도그 장사가 가장 위대한 시집을 출간해 내었다고 밝혀질 경우 우리는 차라리 그 이웃을 모르는 편이 나을 뻔했다고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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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원의 비망록
주제 사라마구 지음, 최인자 외 옮김 / 해냄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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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표현력의 한계 너머에 있는 작품. 블리문다와 발타자르의 평생에 걸친 아름다운 사랑 - 둘은 부부라기 보단, 같은 목표를 향해 조력하며 나아가는, 정신적 동반자의 관계에 가깝다 - 수도자이면서 과학자인 로렌수 신부의 '하늘을 나는 기계'를 향한 열정, 오직 하느님만이 절대 진리인 중세의 이념적 독재하에서의 좌절. 오로지 왕을 위해, 수도원 건설에 동원된 힘없는 백성들의 고통. 이 모든 이야기들이 씨줄 날줄 처럼 엮이며 한 편의 아름답고 환상적인 이야기로 완성된다.     

공복 상태에서 사람의 의지를 읽는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 눈빛이 수시로 변하는 신비한 눈을 지닌 여인 블리문다와 전쟁에서 한 손을 잃고 귀향한 병사 발타자르는, 블리문다 어머니의 종교 재판 현장에서 만나 부부가 되면서, 로렌수 신부의 '하늘을 나는 기계" (파사롤라) 제작에 합류하게 된다.  

파사롤라는 살아있는 영혼들의 의지로 만든 에테르가 있어야만 날 수가 있다. 블리문다는 자신의 신비한 힘을 이용해, 사람들로부터 충분한 양의 에테르를 모으고, 종교재판소에서 신부에게 체포영장을 발부한 순간, 세 사람은 하늘을 나는데 성공하고 몬트 준투에 착륙한다. 하지만 신부는 파사롤라를 태우려 하고, 발타자르와 블리문다가 이를 알아채고, 왜 기계장치를 없애려 하냐고 묻자 내가 불속에 들어 가려고 하면 적어도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어야지 라고 하고는 숲 쪽으로 걸어 들어가 영원히 사라져 버린다. 인간의 의지는 보지 않고, 오직 인간의 영혼만 보려하는 종교 재판이 두려웠을까? 그래서 파사롤라와 함께 차라리 불속으로 사라져 버리려 했던 걸까? 조금 더 용기있는 로렌수 신부의 모습을 기대했다. 적어도 그런 식으로 사라지는 것은 너무 무책임하지 않은가. 비겁한 지식인의 모습을 여기서도 본다.  

한편 주앙 5세는 왕위 승계자가 태어나지 않아 걱정 하던 중, 프란시스쿠 수도회의 수사가 만약 마프라에 수도원을 세워 준다면 후계자를 얻을꺼라 약속하고, 그대로 이루어지자 마프라에 수도원을 건설하는 20년에 걸친 대대적인 역사를 시작한다. 가족과 헤어져 강제 징집된 백성들은 힘든 노역에 시달리며 다치거나 죽어간다. 개인의 삶은 깡그리 무시된다. 오직 왕을 위한 삶인 것이다. 그들 하나 하나의 고달픈 삶의 이야기가 시공을 초월하여 아리게 다가왔다. 왜 이토록, 약한 자들은 끝없이 착취 당해야만 하는가. 신권과 왕권, 자본가로 모습만 달리 할 뿐, 착취의 역사는 반복된다.   

고향 마프라로 돌아온 발타자르와 블리문다는 수도원 건설에 참여하는 틈틈이, 몬트 준투로 가서 파사롤라를 돌보는데, 수도원 봉헌식을 앞두고, 파사롤라를 손보고 오겠다며 떠난 발타자르는 실수로, 파사롤라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게 되고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 사이 발타자르에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왜 블리문다에게 돌아올 수 없었던 것일까? 후에 주앙 엘바스와 한 남자의 대화를 통해 추측만 할 뿐이다. 로렌수 신부는 4년 전 스페인에서 죽었고, 종교재판소의 교리성청에서 조사를 받았는데 그 사건에 발타자르가 연루 되었을 것이라는 것. 분명한 것은 발타자르가 태양 가까이에 다녀왔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9년 동안 발타자르를 찾아 헤멘 블리문다는 종교재판의 화형식장에서, 왼손이 없는 이미 몸에 불붙은 한 남자를 발견한다. 남자의 몸 한가운데 모여 있던 검은 구름은 서서히 그의 몸에서 빠져 나왔으나 하늘로 올라가지 않았다. 발타자르의 의지는 지상의 것이었고, 블리문다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한 손으로 세상을 만드셨듯, 발타자르와 블리문다도 한 손과 갈고리로 그들만의 세상을 만들려 했다. 그들에게는 파사롤라가 바로 그 세상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세계는 신의 세계 가까이(태양 가까이)에 다녀 온 것이다. 발타자르는 죽음의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파사롤라를 부정하지 않았다. 파사롤라를 부정한다는 것은 자신과, 블리문다의 삶 자체를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였을테니.   

작가의 힘이 대단하다. 덕분에 포르투칼에 가 보고 싶어졌다. 마프라의 수도원을 보기 위해.      

*책 접기   

"하지만 그 한손과 갈고리를 가지고 자네는 모든 일을 다 할 수 있지 않은가? 이 일을 하다 보면, 사람의 손보다 차라리 갈고리가 더 필요할 때가 있다네. 철사조각이나 금속조각을 다룰 때에도 갈고리는 아픈 것을 모르잖아. 칼에 베이거나 불에 델 염려도 없고 말이야. 내가 분명히 확신하건대 전능하신 하느님도 한 손 밖에는 없으실거야. 그렇지만 그 분은 이 세상을 만드셨지."

"아무도 그런 말을 한 적은 없다네. 성경의 그 어디에도 그런 말은 적혀 있지 않아. 다만 하느님은 왼손이 없는 것이 아닐까 하고 한 번 생각해 보았던 것 뿐일세. 하느님은 항상 오른손을 쓰시고 오른편에만 앉게 하시니까 말이야. 자네 혹시 성경이나 교회 신부들이 쓴 글에서 하느님의 왼손에 대해 언급하는 글귀를 본 적이 있나? 어느 누구도 하느님의 왼편에는 앉아 있지 않아. 그곳은 텅 비어 있기 때문이지. 그곳은 공허한 장소라고 할 수 있다네. 아무곳도 아닌 곳이지. 그러니까 하느님은 한 손 잡이라고 할 수 밖에. 바르톨로메우 로렌수 신부는 깊은 한숨을 쉬면서 단정짓듯 말했다. 하느님에게는 왼손이 없어."

"아무리 걸어가도 항상 제자리에서 맴돌고 이쓴 당나귀들은 두 눈을 껌벅이면서 자신들이 똑바로 나 있는 길을 걸어가고 있다고 상상하는 것 같았다. 계속 똑바로 걷다 보면 결국에는 처음 시작했던 자리로 되돌아온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그들의 주인들처럼 말이다. 이 지구는 마치 물수레와 같아서 대지를 발로 밟으면서 계속 걸어가면 처음 출발했던 곳으로 다시 돌아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왕이나 병사나 수도사나 암살자나 바르바도스에 있는 영국인 창녀나 호시오에서 처형을 당한 여자나, 그들이 결국 대면하게 될 세상은 똑같은 세상인 것이다. 결코 모든 것이 다 같거나 모든 것이 다 다르거나 한 것은 아니지만 어떤 것은 항상 같은 법이다. 우리가 이 세상 모든 것을 회피할 수 있다 하더라도, 우리 자신만큼은 결코 회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인생이 변할 때는 단순한 한 마디의 말조차 장황한 것이 되면, 우리 자신이 변할 때는 더더욱 그러하다." 

"확신에 차서 혹은 그저 이름만으로 자신이 예수님에게 속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위선자에 지나지 않아. 그러니까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게." 

"하지만 우리가 마프라의 그 아이와 왕위계승자인 동 페드루 왕자의 죽음에서 본 것처럼, 세상의 모든 것들은 결국 균형을 이루고 보상을 받기 마련이며, 오늘 그 믿음은 다시 확인받게 된다. " 

"어떻게 나는 긍정과 부정, 곧 부정이 긍정을 의미하고 긍정이 부정을 의미하는 상반되는 유사적ㅁ과 결합된 모순이라는 이러한 미로 속에서 나 자신을 찾을 수 있을까? 어떻게 나는 안전하게 날카로운 칼날 위를 지날 수 있을까?" 

"사람은 누구나 아름다운 것을 찾아 자신만의 길을 걸어가는 법이다. 그 아름다움이 무엇이든 머리 위로 하늘이 펼쳐져 있는 소박한 전원이든 낮이나 밤의 어느 한때이든 혹은 렘브란트가 그려 놓았음직한 나무 두세 그루이든 혹은 한숨이든간에 말이다. 우리는 그 길이 막혀 있는지 혹은 우리를 어디로 인도할지, 또 다른 전원과 시간과 나무와 한숨으로도 인도할지 알지 못한다. 중략..그러므로 사람이란 삶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잘 모르는 것이다." 

"신부님 우리에게 축복을 내려주세요. 아니야 나는 할 수 없어. 어떤 하느님의 이름으로 그대들을 축복해 주어야 할지 더 이상 알지 못하기 때문이지. 그러니 서로가 서로에게 축복해 주는 것으로 만족하도록 하게. 그게 자네들이 필요로 하는 축복의 전부야. 사실 난 이 세상 모든 축복이 그런 것이기를 간절히 바란다네." 

"하지만 그들이 어느 누구의 눈에도 뜨이지 않게 자기들끼리만 이야기를 나눈다면 우리에게 그들이 왜 필요한지 물어볼 수가 없어요. 성자는 우리를 구원해 주기 위해 필요하다고 나는 항상 들어왔어요. 중략. 아무도 구원을 받지 않으며, 아무도 길을 잃지 않는다는 사실이죠. 그런 생각은 죄를 짓는 일이야. 죄라는 것은 없어요. 오직 죽음과 삶이 있을 뿐이죠. 살이 있고 나서 죽음이 오는 거야. 발타자르 당신은 지금 잘못 생각하고 있어요. 죽음이 있고나서 삶이 있는 거예요. 과거의 우리가 죽고나서, 지금의 우리가 태어난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전부 한꺼번에 죽지 않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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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마무리
법정(法頂) 지음 / 문학의숲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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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스님 글을 읽노라면, 조용한 법당에서 맑은 차 한 잔 앞에 두고, 스님과 마주 앉아 좋은 말씀 듣고 있는 듯 하다. 물질에 대한 욕심도 다 버릴 수 있을 것만 같고, 누구라도 다 용서할 수 있을 것만 같다. 하나 그도 잠시, 책을 덮으면 다시 세속의 번잡스럽고 탐욕스런 삶으로 돌아온다. 좋은 말씀은 싹 다 잊어 버리고 아귀다툼한다. 누구는 작심삼일 이라면, 사흘마다 새로 결심하면 되지 않는가 하던데, 불쌍하고 어리석은 이 중생. 스님 책도 사흘마다 계속 읽어줘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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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마무리는 삶에 대해 감사하게 여기는 것이다. 내가 걸어온 길 말고는나에게 다른 길이 없었음을 깨닫고 그 길이 나를 성장시켜 주었음을 믿는 것이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과 모든 과정의 의미를 이해하고 나에게 성장의 기회를 준 삻에 대해 감사하는 것이 아름다운 마무리다." 

"돌이켜 보니 나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채 같은 말을 되풀이해 왔다. 같은 말을 되풀이한다는 것은 지나간 시간의 늪에 갇혀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이 또한 노쇠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이유없이 일어나는 일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끊임없이 흐르고 변한다. 사물을 보는 눈도 때에 따라 바뀐다. 정지해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같은 강물에 발을 두 번 담글 수 없다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러기 때문에 집착할 게 아무것도 없다. 삶은 유희와 같다. 행복할 때는 행복에 매달리지 마라. 불행할 때는 이를 피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받아들이라. 그러면서 자신의 삶을 순간순간 지켜보라. 맑은 정신으로 지켜보라." 

"어떤 물질이나 관계속에서도 그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고 적당한 거리를 두고 바라보며 즐길 수도 있어야 한다. 자신을 삶의 변두리가 아닌 중심에 두면 어떤 환경이나 상황에도 크게 흔들림이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삶의 지혜와 따뜻한 가슴을 지녀야 한다." 

"만나는 대상마다 그가 곧 내 '복 밭'이고 '선지식'임을 알아야 한다. 그때 그곳에 그가 있어 내게 친절을 일깨우고 따뜻한 배려를 낳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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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태엽 오렌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12
앤소니 버제스 지음, 박시영 옮김 / 민음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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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뒷 표지에서 몇 자 옮겨 본다.  

' 폭력과 무질서가 난무하는 암울한 미래의 런던을 배경으로, 열다섯 살 소년이 극단적인 비행을 저지르다 체포되고, 새로운 범죄 교화 수술에 자원한 후 욕망과 감정을 통제받는 무기력한 인간이 되는 과정을 그렸다. 폭력과 죄악에 대한 성찰 속에서 국가 권력의 억압을 비판하고 인간의 자유의지를 옹호하는 이 작품은 조지 오웰과 헉슬리의 위대한 전통을 계승한다.'  

'머리카락이 쭈뻣 서게 만드는 속도감과 에너지. 오웰의 미래상을 다루고 있으면서도 흥미진진한 소설이다 - <<뉴욕타임스>>' 

읽는 동안 내내 불쾌하고 불편했다. 아무런 죄의식 없이 마치 놀이를 즐기듯, 잔인한 폭력을 행사하는 알렉스와 그 일당들. 잔인하고 태연한 묘사. 읽을수록, 정체가 확실하지 않은 언짢음에 불쾌하면서도 묘하게 알렉스의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속도감과 에너지 있게 전개한  작가의 역량과, 끔찍한줄 알면서도 계속 보고 싶은 인간의 은밀한 호기심 때문이겠지.  

알렉스 일당은, 마약을 하고, 가게를 털고, 노인을 폭행하고, "시계 태엽 오렌지"라는 소설을 쓰고 있는 어느 작가의 집에 가면을 쓰고 무단 침입해, 남자를 무자비하게 폭행하고 남자가 보는 앞에서 그의 아내를 윤간한다. - 실제로 작가 앤서니 버지스의 아내는 군인 4명에게 윤간 당했다고 한다- 다시 또 홀로 사는 노파의 집을 털다가, 독선적 대장 노릇을 할려는 알렉스를 못마땅하게 여긴 친구들의 배신으로 알렉스는 체포되고 교도소에서 복역 중, 다툼끝에 동료 재소자를 살인하게 되고, 아직 실험 단계에 있던 교화 요법을 두 주간 받게된다.  

그 요법은 알렉스의 몸에 루도비코 약물 투여 후, 알렉스가 좋아하는 베토벤 음악과 함께 끔찍한 폭력과 성폭행 장면이 담긴 영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영상을 보는 동안 알렉스의 눈은 기계장치에 고정되어 있어 본인이 보고 싶지 않더라도 절대 눈을 감을 수 없다. 마치 파블로프의 개처럼, 폭력을 행사하거나 폭력적인 생각만 하더라도 조건 반사로 두통 복통 같은 엄청난 고통을 느끼게 된다. 결국 알렉스는 정부가 시계태엽을 감아야만 움직이는 오렌지 - 인간은 모두 기계로 변해버렸지만, 신이 이 세상 과수원에 심은 세상이라는 나무에서, 과일처럼 자연스럽게 자라난다, 말레이말로, 오랑은 인간을 뜻하는데, 발음이 비슷한 이유로, 그 과일중 오렌지가 쓰였다 한다.- 아니, 인간이 된 것이다.  

출옥한 알렉스는 집으로 돌아가나, 가족에게 외면 당하고 방황하다 예전에 구타한 적 있는 노인과 그 친구들에게 일방적인 폭력을 당하다, 경찰이 출동하나, 그 경찰들 역시, 알렉스를 배신한 친구 딤과, 오랜 적수 빌리보이였다. 정부는 정치 사상범의 수용을 위해, 일반 범죄자들을 교화(??)하여 교도소에서 내보내고, 질서와 치안 유지 명목으로, 어린 깡패들을 경찰로 모집한 것이다. 개로 하여금 개 사냥을 시키는 것과 같다고 할까?  

경찰의 무차별 폭력 후, 근처 집으로 들어가 도움을 청하게 되는데, 그 집은 바로 시계태엽 오렌지 작가 - F.알렉산더-의 집이었다. 알렉스는 그의 소설 표지에서 이름을 보고 말한다. '맙소사 또 다른 알렉스잖아.' 이를 맘대로 해석해 본다. 결국 아내를 죽게 한 것은, 두 명의 알렉스였다 면 확대 해석 이려나? 물리적 폭력을 행사한 것은 알렉스였지만, 정신적 폭력을 행사하여 아내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알렉산더였다는 의미는 아닐런지. - 물론 책에는, 윤간 당한 후 아내와 알렉산더에 대한 언급은 없다 - 앤서니의 잠재된 죄책감의 표현은 아닐런지... 

알렉산더는 처음엔 알렉스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를 범죄 통제 정책의 산 증인으로서, 현 정부를 다음 선거에서 복귀하지 못하게 만들 무기로 사용 하기로 한다. 그러던 중 알렉산더는 알렉스가 그날의 알렉스임을 눈치재게 되고, 알렉스를 방에 가둔 후, 음악을 크게 틀어 알렉스를 고문한다. 여기서 알렉산더, 아니 인간의 이중성이 드러난다. 아내를 잃은 복수를 자신이 그렇게 혐오하고 비난하던 바로 그 루도비코 조건 반사법을 이용하여, 알렉스를 괴롭히는 것이다. 나라도 그랬을 것이다. 알렉산더를 비난할 맘 없다. 그러나 그 방법은 야비한 것이다. 인간의 그 야비한 속성에 있어서는, 결국 알렉산더나 알렉스나 동일 인물인 것이다.  

알렉스는 고통에 못이겨, 창 밖으로 뛰어내리고,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동안 루도비코 요법 이전의 상태로 회복되고, 다시 현 정부의 선전물이 되는 댓가로,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을 아무런 고통없이 듣고, 취직을 하고, 어느날 갑자기 청춘은 가버려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새사람이 된 듯한다. 사람 죽이고, 오만 나쁜 짓 실컷 하다가, 아무런 자각, 반성, 죄책감도 없이 현정부에 빌붙어 살다가 어느날 갑자기, 청춘은 가버려야 한다며, 미래 자신의 아내, 자신의 아들에 대해 지껄인다. 이런 혐오스런 캐릭터를 통해 우리 스스로를 다잡게 하는 것이 작가의 의도였나? 결말까지 불쾌하다.     

자유의지로 선택한 악이 가치 있는가? 태엽감긴 오렌지로 강요된 선이 가치 있는가? 어렵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죄의식 없이 범죄를 저지르는 자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반드시 처벌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설사 그것이 자유의지라 하더라도, 타인의 삶에 위해를 가할 권리는 아무에게도 없다. 물론 그 "위해"라는 것이 자의적 판단이어서는 안된다.  

* 책 접기  

"난 이런 일에 동의를 하지 않는다. 내가 제일 강하게 반대했을 거다. 눈에는 눈으로 응징해야 한다고 했지. 누가 너를 때리면 너도 반격을 하겠지. 그렇지 않겠나? 그런데 너 같은 야만적인 깡패 놈들에게 정말 심하게 타격을 받은 국가는 왜 반격을 할 수 없다는 게야? 그러나 이 새로운 견해에 따른다면 안 된다는군. 새로운 견해에 따르면 악당을 착한 사람으로 바꿔야 한다는 거지. 이 모든 이야기가 나한테는 정말 부당하게 들려." 

"착하게 된다는 것은 끔찍한 일일 수도 있어. 말하고 보니 자기모순이라는 생각이 드는구나. 이번 일 때문에 며칠 동한 잠 못 들어 할 거야. 신은 무엇을 원하시는 걸까? 신은 선 그 자체와 선을 선택하는 것 중에서 어떤 것을 원하시는 걸까? 어떤 의미에서는 악을 선택하는 사람이 강요된 선을 받아들여야 하는 사람보다는 낫지 않을까? 심오하고 어려운 질문들이구나" 

"현 정부는 무엇이 범죄인지 자의적으로 결정하고 자기들을 언짢게 만드는 사람둘이면 누구든 생명력과 용기와 의지력을 빼앗아 버리려고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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