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원의 비망록
주제 사라마구 지음, 최인자 외 옮김 / 해냄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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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표현력의 한계 너머에 있는 작품. 블리문다와 발타자르의 평생에 걸친 아름다운 사랑 - 둘은 부부라기 보단, 같은 목표를 향해 조력하며 나아가는, 정신적 동반자의 관계에 가깝다 - 수도자이면서 과학자인 로렌수 신부의 '하늘을 나는 기계'를 향한 열정, 오직 하느님만이 절대 진리인 중세의 이념적 독재하에서의 좌절. 오로지 왕을 위해, 수도원 건설에 동원된 힘없는 백성들의 고통. 이 모든 이야기들이 씨줄 날줄 처럼 엮이며 한 편의 아름답고 환상적인 이야기로 완성된다.     

공복 상태에서 사람의 의지를 읽는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 눈빛이 수시로 변하는 신비한 눈을 지닌 여인 블리문다와 전쟁에서 한 손을 잃고 귀향한 병사 발타자르는, 블리문다 어머니의 종교 재판 현장에서 만나 부부가 되면서, 로렌수 신부의 '하늘을 나는 기계" (파사롤라) 제작에 합류하게 된다.  

파사롤라는 살아있는 영혼들의 의지로 만든 에테르가 있어야만 날 수가 있다. 블리문다는 자신의 신비한 힘을 이용해, 사람들로부터 충분한 양의 에테르를 모으고, 종교재판소에서 신부에게 체포영장을 발부한 순간, 세 사람은 하늘을 나는데 성공하고 몬트 준투에 착륙한다. 하지만 신부는 파사롤라를 태우려 하고, 발타자르와 블리문다가 이를 알아채고, 왜 기계장치를 없애려 하냐고 묻자 내가 불속에 들어 가려고 하면 적어도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어야지 라고 하고는 숲 쪽으로 걸어 들어가 영원히 사라져 버린다. 인간의 의지는 보지 않고, 오직 인간의 영혼만 보려하는 종교 재판이 두려웠을까? 그래서 파사롤라와 함께 차라리 불속으로 사라져 버리려 했던 걸까? 조금 더 용기있는 로렌수 신부의 모습을 기대했다. 적어도 그런 식으로 사라지는 것은 너무 무책임하지 않은가. 비겁한 지식인의 모습을 여기서도 본다.  

한편 주앙 5세는 왕위 승계자가 태어나지 않아 걱정 하던 중, 프란시스쿠 수도회의 수사가 만약 마프라에 수도원을 세워 준다면 후계자를 얻을꺼라 약속하고, 그대로 이루어지자 마프라에 수도원을 건설하는 20년에 걸친 대대적인 역사를 시작한다. 가족과 헤어져 강제 징집된 백성들은 힘든 노역에 시달리며 다치거나 죽어간다. 개인의 삶은 깡그리 무시된다. 오직 왕을 위한 삶인 것이다. 그들 하나 하나의 고달픈 삶의 이야기가 시공을 초월하여 아리게 다가왔다. 왜 이토록, 약한 자들은 끝없이 착취 당해야만 하는가. 신권과 왕권, 자본가로 모습만 달리 할 뿐, 착취의 역사는 반복된다.   

고향 마프라로 돌아온 발타자르와 블리문다는 수도원 건설에 참여하는 틈틈이, 몬트 준투로 가서 파사롤라를 돌보는데, 수도원 봉헌식을 앞두고, 파사롤라를 손보고 오겠다며 떠난 발타자르는 실수로, 파사롤라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게 되고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 사이 발타자르에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왜 블리문다에게 돌아올 수 없었던 것일까? 후에 주앙 엘바스와 한 남자의 대화를 통해 추측만 할 뿐이다. 로렌수 신부는 4년 전 스페인에서 죽었고, 종교재판소의 교리성청에서 조사를 받았는데 그 사건에 발타자르가 연루 되었을 것이라는 것. 분명한 것은 발타자르가 태양 가까이에 다녀왔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9년 동안 발타자르를 찾아 헤멘 블리문다는 종교재판의 화형식장에서, 왼손이 없는 이미 몸에 불붙은 한 남자를 발견한다. 남자의 몸 한가운데 모여 있던 검은 구름은 서서히 그의 몸에서 빠져 나왔으나 하늘로 올라가지 않았다. 발타자르의 의지는 지상의 것이었고, 블리문다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한 손으로 세상을 만드셨듯, 발타자르와 블리문다도 한 손과 갈고리로 그들만의 세상을 만들려 했다. 그들에게는 파사롤라가 바로 그 세상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세계는 신의 세계 가까이(태양 가까이)에 다녀 온 것이다. 발타자르는 죽음의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파사롤라를 부정하지 않았다. 파사롤라를 부정한다는 것은 자신과, 블리문다의 삶 자체를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였을테니.   

작가의 힘이 대단하다. 덕분에 포르투칼에 가 보고 싶어졌다. 마프라의 수도원을 보기 위해.      

*책 접기   

"하지만 그 한손과 갈고리를 가지고 자네는 모든 일을 다 할 수 있지 않은가? 이 일을 하다 보면, 사람의 손보다 차라리 갈고리가 더 필요할 때가 있다네. 철사조각이나 금속조각을 다룰 때에도 갈고리는 아픈 것을 모르잖아. 칼에 베이거나 불에 델 염려도 없고 말이야. 내가 분명히 확신하건대 전능하신 하느님도 한 손 밖에는 없으실거야. 그렇지만 그 분은 이 세상을 만드셨지."

"아무도 그런 말을 한 적은 없다네. 성경의 그 어디에도 그런 말은 적혀 있지 않아. 다만 하느님은 왼손이 없는 것이 아닐까 하고 한 번 생각해 보았던 것 뿐일세. 하느님은 항상 오른손을 쓰시고 오른편에만 앉게 하시니까 말이야. 자네 혹시 성경이나 교회 신부들이 쓴 글에서 하느님의 왼손에 대해 언급하는 글귀를 본 적이 있나? 어느 누구도 하느님의 왼편에는 앉아 있지 않아. 그곳은 텅 비어 있기 때문이지. 그곳은 공허한 장소라고 할 수 있다네. 아무곳도 아닌 곳이지. 그러니까 하느님은 한 손 잡이라고 할 수 밖에. 바르톨로메우 로렌수 신부는 깊은 한숨을 쉬면서 단정짓듯 말했다. 하느님에게는 왼손이 없어."

"아무리 걸어가도 항상 제자리에서 맴돌고 이쓴 당나귀들은 두 눈을 껌벅이면서 자신들이 똑바로 나 있는 길을 걸어가고 있다고 상상하는 것 같았다. 계속 똑바로 걷다 보면 결국에는 처음 시작했던 자리로 되돌아온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그들의 주인들처럼 말이다. 이 지구는 마치 물수레와 같아서 대지를 발로 밟으면서 계속 걸어가면 처음 출발했던 곳으로 다시 돌아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왕이나 병사나 수도사나 암살자나 바르바도스에 있는 영국인 창녀나 호시오에서 처형을 당한 여자나, 그들이 결국 대면하게 될 세상은 똑같은 세상인 것이다. 결코 모든 것이 다 같거나 모든 것이 다 다르거나 한 것은 아니지만 어떤 것은 항상 같은 법이다. 우리가 이 세상 모든 것을 회피할 수 있다 하더라도, 우리 자신만큼은 결코 회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인생이 변할 때는 단순한 한 마디의 말조차 장황한 것이 되면, 우리 자신이 변할 때는 더더욱 그러하다." 

"확신에 차서 혹은 그저 이름만으로 자신이 예수님에게 속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위선자에 지나지 않아. 그러니까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게." 

"하지만 우리가 마프라의 그 아이와 왕위계승자인 동 페드루 왕자의 죽음에서 본 것처럼, 세상의 모든 것들은 결국 균형을 이루고 보상을 받기 마련이며, 오늘 그 믿음은 다시 확인받게 된다. " 

"어떻게 나는 긍정과 부정, 곧 부정이 긍정을 의미하고 긍정이 부정을 의미하는 상반되는 유사적ㅁ과 결합된 모순이라는 이러한 미로 속에서 나 자신을 찾을 수 있을까? 어떻게 나는 안전하게 날카로운 칼날 위를 지날 수 있을까?" 

"사람은 누구나 아름다운 것을 찾아 자신만의 길을 걸어가는 법이다. 그 아름다움이 무엇이든 머리 위로 하늘이 펼쳐져 있는 소박한 전원이든 낮이나 밤의 어느 한때이든 혹은 렘브란트가 그려 놓았음직한 나무 두세 그루이든 혹은 한숨이든간에 말이다. 우리는 그 길이 막혀 있는지 혹은 우리를 어디로 인도할지, 또 다른 전원과 시간과 나무와 한숨으로도 인도할지 알지 못한다. 중략..그러므로 사람이란 삶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잘 모르는 것이다." 

"신부님 우리에게 축복을 내려주세요. 아니야 나는 할 수 없어. 어떤 하느님의 이름으로 그대들을 축복해 주어야 할지 더 이상 알지 못하기 때문이지. 그러니 서로가 서로에게 축복해 주는 것으로 만족하도록 하게. 그게 자네들이 필요로 하는 축복의 전부야. 사실 난 이 세상 모든 축복이 그런 것이기를 간절히 바란다네." 

"하지만 그들이 어느 누구의 눈에도 뜨이지 않게 자기들끼리만 이야기를 나눈다면 우리에게 그들이 왜 필요한지 물어볼 수가 없어요. 성자는 우리를 구원해 주기 위해 필요하다고 나는 항상 들어왔어요. 중략. 아무도 구원을 받지 않으며, 아무도 길을 잃지 않는다는 사실이죠. 그런 생각은 죄를 짓는 일이야. 죄라는 것은 없어요. 오직 죽음과 삶이 있을 뿐이죠. 살이 있고 나서 죽음이 오는 거야. 발타자르 당신은 지금 잘못 생각하고 있어요. 죽음이 있고나서 삶이 있는 거예요. 과거의 우리가 죽고나서, 지금의 우리가 태어난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전부 한꺼번에 죽지 않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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