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의 불복종
헨리 데이빗 소로우 지음, 강승영 옮김 / 이레 / 199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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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로우의 '정부觀 & 국민觀'쯤 되겠다. 그에게 이상적인 정부란, 국민 개개인이 각자의 '양심'과 '정의'에 따라 살 수 있게끔 하는 정부다. 만약, 정부가 국민에게 불의를 행하는 하수인이 되라 요구 하면, 법을 어기라고도 한다. 납세 거부로써, 불복종 의지를 확실하게 정부에 보여주라 한다. 

노예해방과 멕시코 전쟁의 1940년대에, 이라크 파병, 양심적 병역기피의 오늘날이 자연스레 겹쳐졌다. 정의가 아닌건 알겠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군대도 가지 말고, 파병도 말아야 하나. 소로우 자신, 인두세를 내지 않고, 감방에서 달랑 하루 살다 나온걸로 신념을 실천하기 충분했을지 모르나, 오늘날엔, 그게 다가 아닌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하나? 어렵다. 소로우 자신조차 인두세를 내지 않은 입장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내적 갈등의 흔적이 묻어나는 걸 보면 역시, 그에게도 쉽지 않은 문제였던 것 같다.  

그의 말대로, 우리는 현존하는 정부의 보호 없이는 살 수 없으며 정부에 불복종하는 경우, 우리의 재산과 가정에 미칠 결과가 두렵다. 이는 비단 국가와 국민만의 문제는 아닐꺼다. 독립적이지 못한 다른 모든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리라. 국가든, 개인이든, 그 어느 것으로부터도 영향을 받거나 이익을 취하지 않는, 완벽히 독립적인 삶을 우리는 살 수 있나?    

언뜻 보이는 그의 엘리트 주의 - '많은 사람들이 당신처럼 선하게 되는 것이 중요한 일은 아니다. 그보다는 단 몇 사람이라도 '절대적으로 선한 사람'이 어디엔가 있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이 전체를 발효시킬 효모이기 때문이다.', 맞다 그가 하버드 출신임을 잠시 잊었다-와 머지 않아 여러 나라들 사이에서 그 지위를 잃어 버리고 말 미국에 대한 그의 뜬금없는 '애국심'이 살짝 거슬리기도 했으나, 투표에 대한 그의 지적은 너무나 예리했다.   

"오늘날 정직한 애국자의 시세는 얼마인가? 사람들은 망설이고 후회하는가 하면 때로는 탄원서를 내기도 한다. 그러나 진지하게 추진하여 효과를 거둘 정도의 일은 하지 않는다. 그들은 남들이 악을 몰아내어 더 이상 자신이 그 문제로 고민하지 않게 되기를 호의적인 자세로 기다린다. 기껏해야 그들은 선거 때 값싼 표 하나를 던져주고, 정의가 그들 옆을 지나갈 때 허약한 안색으로 성공을 빌 뿐이다. 덕을 찬양하는 사람이 999명이라면 진짜 덕인은 한 사람뿐이다. 그러나 어떤 물건을 잠시 보관하는 사람과 거래하기보다는 그 물건의 실제 주인과 거래하는 것이 더 나은 것이다. 투표는 일종의 도박이다. 장기나 주사위 놀이와 같아. 단지 약간의 도덕적 색채를 띠었을 뿐이다."    

*책 접기

" 내가 다른 사업이나 계획에 전념하고 있더라도, 내가 다른 사람의 어깨 위에 올라타고 앉아 그를 괴롭히면서 내 일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먼저 살펴야 할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먼저 그 사람의 어깨에서 내려와야 할 것이다. 그 사람 역시 자신의 계획을 추진할 수 있도록 말이다." 

" 원칙에 따른 행동, 즉 정의를 알고 실천하는 것은 사물을 변화시키고 관계를 변화시킨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혁명적이며, 과거에 있던 것들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그것은 국가와 교회를 갈라놓으며 가족을 갈라놓는다. 심지어 그것은 한개인 조차도 갈라놓는다. 즉 한 개인 속에 있는 '악마적인 요소'와 '신적인 요소'를 분리시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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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테라
박민규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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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 농장에 출현한 괴수 소설쯤으로 부를 수 있을까? 출연 비중에 차이는 있으나, 각 단편마다 다양한 동물들과 괴수들 출연 하신다. 코끼리, 너구리, 타조, 기러기, 기린, 개복치, 펠리컨, 도도새, 젖소, 흑염소, 돌고래, 달팽이, 열대어 등등 + 외계인, 헐크 호건 그리고 인간 남자.  

어찌해도 고칠 수 없는 엄청난 소음의 냉장고처럼, 작가도 '지금도 뭔가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듯 하다. 힘의 논리로 작동하는 신자유주의의 '스테이지 23' 속에서, 삶의 재미를 박멸 당한 채, '세상이 변하기 보다 직급이 변하'길 바라며 오늘을 살아가는, 가난하고 소외된, 약해서 외로운 자들, 그들 '저렴한 인생들 사이에 흐르는 심야 전기' 같은 것을 이야기 하고 싶었던 것 같다. 모두 다 함께 잘사는, '야쿠르트가 꿈꾸는 세상'이 오길 바라면서.  

맘에 드는 작품도 그렇지 않은 작품도 있었지만, 대체로 후반부로 갈 수록 더 몰입해서 읽었다. 너구리가 지하로 걸어 들어갈 때는 갑자기 하루키가 불쑥 튀어 나와 깜짝 놀랬고, - 해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지만, 소설의 형식,구성,분위기도 피라미드 같단 생각을 했다. 독창성 1차 생산자, 2차 생산자, 1차 소비자, 최종 소비자 뭐 이런 식 아닐까?-  개복치의 고차원 퐌타지를 쫒아가기 힘들었고, 기하 형의 '실상리' 정착기는 너무 뻔하게 노골적이라 민망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기린의 무릎을 흔들며 아버지 맞죠? 라고 외치던 시급 삼천원의 '나', 헐크에게 당한 그대로, 무고한 약자들에게 헤드락의 폭력을 가했던 '나', 갑을 고시원의 좁은 방에서 발도 제대로 뻗지 못하고 소리없이 웅크려 자야했던 '나'의 이미지는 강렬하고 슬펐다.       

무거운 주제를 무겁지 않게 이야기 할 수 있는 능력, 그게 작가의 최고 변별력 아닐까. 삼미보다 약한 유머에 살짝 실망하면서 방심하다가 한 두군데선 빵 터졌다. 똥 이야기류의 가벼운 '빵'도 있었지만, 그보다 ㅋㅋㅋ + ㅠ.ㅠ가 더 많았다. 

그가 만든 카스테라의 맛이 어떻다고, 아직은 뭐라 말하기 어렵다. 일단 첫 한 입은 노골적이고 퐌타지하다. 근데 그 맛이 조미료의 맛인지, 자연의 맛인지는 아직은 잘 모르겠다. 아직 먹어보지 못한 분들에겐, 그래서 일단 먹어는 보시라 권한다. 그리고, 그 맛에 은근 중독성이 있다는 것도 알려 드린다. 맛의 비결이 뭐든간에.   

그리고, 삼미의 왕팬으로서, 그 마법의 가루가 조미료가 아니길 진심으로 바란다.

* 책 접기 

"인간에겐 누구나 자신만의 산수가 있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것을 발견하게 마련이다. 물론 세상엔 수학 정도가 필요한 인생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삶은 산수에서 끝장이다. 즉 높은 가지의 잎을 따먹듯- 균등하고 소소한 돈을 가까스로 더하고 빼다보면, 어느새 삶은 저물기 마련이다. 디 엔드다. 어쩌면 그날 나는 <아버지의 산수>를 목격했거나, 그 연산의 답을 보았거나, 혹 그것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즉 그런 셈이었다. 도시락을 건네주고, 산수를 받는다. 도시락을 건네주고, 산수를 받았다. 그리고 느낌만으로 <아버지 돈 좀 줘>와 같은 말을 두 번 다시 하지 않는 인간이 되었다." 

"어쩌면 피라미드의 건설 비결도 <억울함>이었는지 모른다. 지금 관두면 너무 억울해. 아마도 노예들의 산수란, 보다 그런 것이었겠지." 

"결국 우주는 하나의 사유입니다. 오래전 지구가 네모라고 믿었던 때에 이 지구는 정말 네모난 것이었다는 얘깁니다." 

"건너온 세계는 반드시 사라진다."  

"인간은 서로에게, 누구나 외계인이다." 

"세계란 어떤 곳인가? 당신이 만약 이십일 년에 걸쳐 준비를 해나간다면-더불어 그 태도의 차이에 따라 세계는 한 권의 <괴수대백과사전>이 될 수도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인간이란, 생존의 문제를 해결한 생물만이 비로소 얻게 되는 이름이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인간이 별게 아니란 생각이 그때 들었다. 맞으면 -아프고, 뉘우치고,숙이고, 무섭고, 궁리하고, 포기하고, 빌붙고, 헤매고, 재빨라지고, 갈라지고, 참담하고, 슬프고, 후련하고, 그립고, 분하고, 못 잊고, 죽고 싶고, 쓰라리지만 이를테면 몇 알의 약, 그 미약한 몇 밀리그램의 화학물질만 있어도 아무렇지 않게 삶을 영위해나가는 것이었다." 

"글쎄 그정도의 체격 차라면 이미 기술의 문제 따위 넘어선 거겠지." 

"인간은 결국 혼자라는 사실과, 이 세상은 혼자만 사는 게 아니란 사실을 동시에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모순 같은 말이지만 지금도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즉, 어쩌면 인간은 -혼자서 세상을 사는게 아니기 때문에, 혼자인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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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1/2장으로 쓴 세계 역사 열린책들 세계문학 104
줄리언 반스 지음, 신재실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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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알리미 신청까지 해놓고 기다린 줄리언 반즈의 책. 아껴두고 꼬르는 혼자만의 재미를 즐기다 드디어 읽었다.'플로베르의 앵무새'가 준 신선한 충격 -사실과 허구를 넘나드는 현란한 글빨! 타가다 정도는 아니라도, 눈알이 핑핑 돌아간다-에 그의 다른 작품들도 읽기 시작했고, '내 말 좀 들어봐'에 완전 반해선 -등장 인물들의 라쇼몽식 사랑 이야기에 안 빠질 재간이 있나!- 전작 읽기. 작품들 마다 각기 다른 소재와 형식미가 있으면서도, 사랑과 질투, 사실과 허구, 성장과 죽음을 이야기하는 그의 목소리는 시종일관 깊고, 재밌고, 입이 쫙 벌려질 만큼, 그러나 거슬리지 않게 똑똑하다. 뜬금없지만, 그 박학다식함이 경탄스러운 이 작가, 64살 먹은 할배라도 엄청 섹시할 것 같다. 이런 남자랑 사귀면 어떨까? 흠.   

연대순으로 정리해 볼까. 메트로랜드(1980), 나를 만나기 전 그녀는 (1981), 플로베르의 앵무새(1984), 태양을 바라보며 (1986), 10 1/2장으로 쓴 세계 역사(1989), 내 말 좀 들어봐(1991), 고슴도치(1992), 사랑 그리고(2000), 레몬테이블 (2004).  

이 책은 출판 순서로 따지면 중간쯤 되는데, 마지막에 읽은 탓인지, 형식,소재,주제 면에서 다른 작품들을 짬뽕한 후,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킨, 잘 차려진 뷔페 같았다고나 할까. 10과 1/2장의 각 챕터들은 스토리만 봤을 때, 다른 장들과 어떤 유기성도 없이 개별적으로 전개되며, 편지 형식, 관점 바꿔 말하기, 미술 평론, 역사적 사실과 허구의 경계를 헷갈리게 하는 애매모호함, 작가의 독자적 개입(삽입장), 역사의 허구과 진실에 대해 이야기 하는가 싶다가, 하느님의 독단을 비판하고, 소외와 차별에 대해 이야기하다, 다시 사랑으로 이 모두를 극복해야 한다더니 -뜬금없긴 했다-, 반복의 지겨움으로 마무리. 그나마 작품에 통일성을 부여 하는게 있다면, 각 챕터에 공통 등장하는 노아, 방주, 배, 뗏목, 표류, 나무좀, 임종벌레 정도이다. 평소엔 먹기 힘든 다양한 음식을 한 번에 조금씩 맛 볼 수 있는 엄청난 장점이 있으나, 배 터지게 먹고 트림하며 이쑤시고 나와도 왠지 제대로 된 일품요리 하나를 먹은 것 만 못해, 뷔페가 싫다는 우리 신랑처럼, 이 뷔페식 작품에 대한 호불호도 독자에 따라 확실히 나뉘지 않을까 싶다.  

그럼 나는 어땠나? 나는 일단 그의 다양한 진수성찬을 껄떡 거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물론, 해산물 코너라든지, 면 코너라든지, 샐러드 바 처럼 정체가 구분되지 않는 중구난방에 짜증이 살짝 나기도 했지만, 이런 진기한 퓨전 뷔페 식당을 찾아내기가 어디 쉽나. 그리고 소화 불량으로 속이 껍껍하더라도, 그것은 작가 탓은 아닌 것이다.     

*책 접기   

"또 당신네 종은 진실에 너무 소홀합니다. 당슨들은 계속 일들을 잊어버리거나, 잊는 척합니다. 중략. 나쁜 일을 외면해 버리면 일의 계속적 수행을 용이하게 하거든요. 그러나 나쁜 일을 무시하면 결국 나쁜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고 믿게 됩니다. 당신들은 항상 나쁜 일들로 놀랍니다. 총이 사람을 죽이고, 돈이 사람을 부패시키고, 겨울에 눈이 내리는 것을 당신들은 놀라워하지요. 그런 순진성은 매력일 수 있지만, 슬프게도,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이게 바로 세상의 어딘가가 잘못된 것이라고 그 여자는 생각했다. 우리는 망루 설치를 포기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구조하겠다고 생각지 않고, 그저 기계에 의지하여 항해할 뿐이다. 모두가 갑판 아래로 내려가서, 그레그와 함께 맥주를 마시면서." 

"사람들은 늘 척척 외우는데, 이름, 날짜, 업적, 나는 날짜를 증오한다." 

"실로 역사는 우리의 동정심을 민주화시키고 있다. 병사들은 그들의 전쟁 경험때문에 잔인한 사람들이 되지 않았는가? 대장은 응석받이로 자란 사람으로서 자신도 하나의 피해자가 되지 않았는가? 비슷한 상황에서 우리는 영웅적으로 행동할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는가? 세월이 가면 이야기는 용해되어 하나의 형태, 색깔, 느낌이 되고 만다."  

"영화도 그렇고 여행도 모두 그렇다오. 모든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가지만, 멈춰 서서 음미해 보면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에 결국 모든 사람이 의미가 있는 척하니까 우선 그것이 의미 있는 것으로 보였을 뿐이구나 하고 생각하지." 

"우리는 <사랑한다>는 말을 유리 안쪽의 상자속에 넣어 두어야 한다. 우리가 이말을 꺼내 온다면 조심해서 다루지 않으면 안된다. 남자들은 여자들을 침대로 끌어들이기 위해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하고, 또 남녀는 두려움이 다가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말로써 자신의 행위를 확인하기 위해서, 약속한 사랑의 조건이 성숙됐음을 다짐하기 위해, 그런 조건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고 자신을 기만하기 위해서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이 말을 이런 용도로 사용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이 세상으로 나가서 통화또는 사고파는 주식이 되어 우리에게 이익을 남겨 주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우리가 내버려 두면 이 말은 그런 일을 하낟. 그러나 고분고분한 이 말은, 없는 머리를 방금 쓸어 올려 버린 목덜미에 대고 속삭일 때를 위해 남겨두자." 

"역사는 일어난 사실이 아니다. 역사는 역사가가 우리에게 전하는 것일 뿐이다. 어떤 패턴, 어떤 계획, 어떤 운동, 팽창 민주주의의 행진이 있었다. 그것은 하나의 태피스트리, 사건의 흐름, 하나의 복잡한 이야기로서, 서로 관련이 있고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중략. 그러나 역사는 항상 여러 미디어의 콜라주, 낙타털 그림붓이 아닌 실내 장식업자의 롤러로 물감을 칠한 그림과 비슷하다. 중략.우리가 모르거나 수락할 수 없는 사실들을 호도하기 위해 이야기를 꾸며낸다. 몇 가지 진짜 사실을 남겨 놓고 그 주위에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우리의 공포와 우리의 고통은 마음을 달래 주는 우화화에 의해서만 덜어진다. 우리는 그것을 역사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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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실 탐닉
세노 갓파 지음, 송수진 옮김 / 씨네21북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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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노 갓파에 대한 사전 지식이 있어 책을 읽게 된 건 아니고, 오히려 책을 통해 세노 갓파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의 다양한 직업과 별난 이름과 재주는 접어 두고서라도, 1930년생 할아버지가 쓴 25년 전의 글이라니. 한참 읽고서야, 이 책이 1985년 즈음해서 아사히 신문에 연재된 시리즈를 모은 것이라는 것을 알고 놀랐다. 25년전에 벌써, 일본에서는 이렇게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한 작업자들(?)이 다양한 자기만의 작업들(?) -우주 음악, 태양열 보트, 조각 전시회, 전 일본 냉중화 요리 동호회 등등- 을 앞서 하고 있었다는 거 아닌가. 1985년 즈음이라면, 정치적으로는 전두환 대통령 재임기간,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당시 사회/과학/문화/예술 활동의 영역과 수준을 알 수 없었지만 -사실 지금도 모른다- 다들 먹고 살기 바빴고, 데모하기 바빴던 시대였지 않나. 열등감을 느끼지 않으려 애썼지만 솔직히 기가 많이 죽었다. 헉. 1980년대에 벌써 이런 것들을 실험 했었나? 이런 분야에도 관심을 가진 사람이 있었고 또 대중적으로도 인정 받았단 말이지? 흠... 말로만 흘려 듣던 '일본 문화의 다양성'이 이런 거였나? '일본을 새롭게 봐야 겠네'라고 생각 했는데 마지막 저자의 글을 보고 또 놀랬다. " 과장되게 이야기 하면 '현대풍 일본 만다라' 같은 느낌으로 일본이 보이면 재미있을 거 같아요." 적어도 나에게는 저자의 집필 의도가 백프로 먹힌 것이다.  

저자 자신의 작업실까지 포함해 - 그럼 정작 본인의 작업실은 공개하지 않나하고 중반부쯤 생각했는데, 역시나 나 같은 사람이 많았나 보다 -  49개의 작업실이 공개 되는데 - 그 중, 내가 아는 사람은 가와바타 야스나리 한 명 뿐. 다른 작업자들도 알았더라면, 훨씬 재밌었을텐데 아쉽다.-  그 다양한 직업군에 또 놀랐다. 흔히 작업실이라고 하면, 서재나 아뜨리에, 공방등이 얼핏 떠오르지만, 이에 국한되지 않고, 외과병원의 수술실, 기상청, 요리 연구가의 부엌, 인공심장 제작실, 항공 우주기술 연구소, 의원 사무실, 태양열 보트, 심지어 농부의 논까지, 다양한 분야의 대가들의 작업 현장이 저자의 세밀한 펜끝에서 복원된다.  

흥미로운 것은, 작업실을 바라보는 각도인데, 모든 그림들이 마치 위에서 사진을 찍은 듯, 내려다 보는 구도로 되어 있다. '신'의 눈으로 내려다 보는 듯해서 뭔가 거만한 느낌이 살짝 풍겼지만, 전체를 한 눈에 파악하는데 효과 있다.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이런 생각 하기 쉽지 않았을텐데. 이 사람 머릿속엔 각도 자동 변환 장치가 장착된 초정밀 특수 렌즈가 박혀 있지 않을까? 그렇지 않고서야 우찌 이리 그리노.  

그 중, 삿포로 교향악단을 그린 것이 가장 인상 깊었다. 소리의 순간을 그림으로 붙잡아 두려는 시도가 좋았고, 각 단원들 그룹에 덧붙인 설명이 재미 있고 -트라이앵글을 연주하는 사람은 기다리는 시간이 길기 때문에 책을 읽고 있다.ㅋㅋ- 놀랍도록 세밀한 저자의 관찰력과, 그 순간을 최대한 생생하게 전달하고자 하는 고민의 흔적이 보였기 때문이다. 이런 그림을 글까지 덧붙여 일주일마다 한 편씩 연재했다 하니, 시간적 압박감이 만만찮았겠다.  

그림이 이 책의 핵심이겠지만, 다양한 분야의 대가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도 좋았다. 자기분야에 대한 전문적인 이야기도 있고, 일상적인 이야기도 있었지만, 장르를 불문하고, 자기가 정말 좋아하는 일을 즐겁게 하는 것이 - 물론, 초소수의 축복받은 자들만 누릴 수 있는 복이긴 하다- 정말 잘 할 수 있는 비결이구나 하는, 식상한 결론에 다시 한 번 다다르며, 저자도 작업자들의 작업실을 엿보지만, 작업자들도 그들을 관찰하는 저자를 관찰하며 서로가 서로를 탐색하는 상호 발견(?)의 과정 또한 재밌었다. 나는 그런 저자와 작업자들을 동시에 엿보면서, 만약 세노 갓파가 나를 취재한다면 - 좆도 내세울 것 없지만- 나는 어떤 모습으로 그려질지, 말도 안되는 상상도 해봤다.   

대부분의 작업실은 정리정돈과는 거리가 멀었다. 일본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 다 정리정돈하길 좋아하는 건 아닌가 보다. 내 책상이 항상 엉망진창인것과 그것과는 아무 개연성도 없건만, 왠지 든든한 느낌이 들었다. 사무실이 아닌, 자신만의 작업실에서 일할 수 있는 그들에게, 역시나 아무 개연성도 없건만, 강한 질투심을 느꼈다.   

* 책 접기 

"어려운 것을 쉽게, 쉬운 것을 깊게, 깊은 것을 유쾌하게"   

"인간의 따뜻함이라는 것은 모든 '생명'을 대등하게 바라보는 것에서 시작된다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대단한 사람은 대부분 대단산 사람인 것에서 더 나아가거나 또는 마지못해 남들에게 인정 받는다. 가장 꼴불견의 전형이 다자이 오사무가 인용한 '선택받은 자로서의 황홀과 불안 이 두 가지가 내게 있으니'와 같은 정신일지도 모른다. 대단한 사람은 남들을 피곤하게 만든다. 그리고 대단한 사람 자기 자신도 결국 피곤해 진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만 하는 사람의 가족들은 얼마나 힘들까 싶었다."   

"본인이 그림을 그리고 즐거워 하는 게 중요해요. 나는 그림을 잘 못 그리니까 하면서 그리지 않는 건 말을 잘 못한다면서 아무하고도 말하지 않고 입을 꾹 닫고 있는 것과 같아요."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의 작업실을 들여다 보면 분명 그 너머에 보이는게 있을거예요. 옹이구멍으로 들여다 보는 정도로 봤다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사람에 따른 차이가 보이거나 혹은 공통된 점이 보일지도 몰라요. 실제로 들여다 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지만, 49면의 작업실로부터 무언가 '지금 이 순간'을 감지할 수 잇는 것이 보일 것 같은 예감이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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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사람들, 혜원의 그림 밖으로 걸어나오다
강명관 지음 / 푸른역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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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3대 풍속화가중 한 사람. 혜원 신윤복. 이 책은, 그의 화첩 <<혜원전신첩>>에 실린 30장의 그림에 대한 풍속사적 해설이다. - 세어보니 책에 실린 그의 작품은 춘화까지 포함하여 정확하게 33장이다.- 저자는 그의 그림을 '성'과 '유희'에 초점을 맞추어, 다른 화가의 작품들 및 관련 문헌, 복식, 풍습등 다양한 이야기들과 함께 엮어가며, 혜원의 풍속화가 담고 있는 내용과 그것이 그려진 사회적 컨텍스트가 무엇인지 따져 본다.  

혜원의 작품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작가의 친절한 길 안내를 받으며, 국사책에서는 듣도 보도 못했던 사실들도 알게 되고 -통금 시간이 저녁 8시부터 아침 4시라니, 조선은 아침형 인간들만 살아갈 수 있는, 더러운(?) 세상이었네- 강요된 도덕 관념 '정절'과 그 폭력의 희생자들- 요즘도 뭐 방송을 통해 알게 모르게 주입되고 있다. '전설의 고향'이 퍼뜩 생각났다.- 오늘의 밤문화와 조선의 밤문화(선술집, 내외주점,색주가)를 비교도 해가면서 - 역시나, 일차에서 흥이 돋워지면, 이차로 노래를, 마지막으로 여자를 찾는 코스에는 변함이 없더군, 화장 짙게 한 여자들이 가게 앞에 앉아 손님들 꼬시는 것도 똑같고, 포주가 포교들에게 정기 상납하는 건 또 어떻고- 그림 속, 주인공들의 사연을 멋대로 상상하다 보니- 특히 '삼각관계'가 그랬다. 기생은 인물좋고 늠름한 단골 포교를 어느덧 사랑하게 된다. 포교도 살갑다. 그러나 그도 잠시. 그의 발걸음이 뜸해지고 사랑도 예전같지 않다. 달 밝은 어느 밤. 기생은, 짧은 밤 보내고 서둘러 떠나는 포교의 뒤를 몰래 밟는다. 우리의 포교는, 타고난 카사노바. 역시나, 새로운 여인과 밀회중. 기생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무심한 눈길로 이들의 키스를 담담히 바라본다.- 어느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33장이 훌쩍 되버렸더라는... 편집상의 문제이겠으나, 각 장 첫 머리에 그림을 먼저 두어, 독자 스스로 생각할 시간을 주고, 저자의 해석과 비교해 볼 수 있게끔 하는 배려가 아쉬웠다.      

예나 지금이나 "노는 인간" 과 "떡치는 인간"으로서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구나.    

* 책 접기 

"그림은 그림 내부의 미학적 장치뿐 아니라, 그것을 산생한 사회적 컨텍스트에서 읽어낼 때 좀 더 정확한 이해와 감상이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그 이면에는 열녀가 난 집안이라는 명예와 세금의 감면이라는 달콤한 유혹이 있었다. 죽은 자는 흙으로 돌아가지만, 남은 자들은 혜택을 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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