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실 탐닉
세노 갓파 지음, 송수진 옮김 / 씨네21북스 / 2010년 2월
평점 :
절판


세노 갓파에 대한 사전 지식이 있어 책을 읽게 된 건 아니고, 오히려 책을 통해 세노 갓파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의 다양한 직업과 별난 이름과 재주는 접어 두고서라도, 1930년생 할아버지가 쓴 25년 전의 글이라니. 한참 읽고서야, 이 책이 1985년 즈음해서 아사히 신문에 연재된 시리즈를 모은 것이라는 것을 알고 놀랐다. 25년전에 벌써, 일본에서는 이렇게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한 작업자들(?)이 다양한 자기만의 작업들(?) -우주 음악, 태양열 보트, 조각 전시회, 전 일본 냉중화 요리 동호회 등등- 을 앞서 하고 있었다는 거 아닌가. 1985년 즈음이라면, 정치적으로는 전두환 대통령 재임기간,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당시 사회/과학/문화/예술 활동의 영역과 수준을 알 수 없었지만 -사실 지금도 모른다- 다들 먹고 살기 바빴고, 데모하기 바빴던 시대였지 않나. 열등감을 느끼지 않으려 애썼지만 솔직히 기가 많이 죽었다. 헉. 1980년대에 벌써 이런 것들을 실험 했었나? 이런 분야에도 관심을 가진 사람이 있었고 또 대중적으로도 인정 받았단 말이지? 흠... 말로만 흘려 듣던 '일본 문화의 다양성'이 이런 거였나? '일본을 새롭게 봐야 겠네'라고 생각 했는데 마지막 저자의 글을 보고 또 놀랬다. " 과장되게 이야기 하면 '현대풍 일본 만다라' 같은 느낌으로 일본이 보이면 재미있을 거 같아요." 적어도 나에게는 저자의 집필 의도가 백프로 먹힌 것이다.  

저자 자신의 작업실까지 포함해 - 그럼 정작 본인의 작업실은 공개하지 않나하고 중반부쯤 생각했는데, 역시나 나 같은 사람이 많았나 보다 -  49개의 작업실이 공개 되는데 - 그 중, 내가 아는 사람은 가와바타 야스나리 한 명 뿐. 다른 작업자들도 알았더라면, 훨씬 재밌었을텐데 아쉽다.-  그 다양한 직업군에 또 놀랐다. 흔히 작업실이라고 하면, 서재나 아뜨리에, 공방등이 얼핏 떠오르지만, 이에 국한되지 않고, 외과병원의 수술실, 기상청, 요리 연구가의 부엌, 인공심장 제작실, 항공 우주기술 연구소, 의원 사무실, 태양열 보트, 심지어 농부의 논까지, 다양한 분야의 대가들의 작업 현장이 저자의 세밀한 펜끝에서 복원된다.  

흥미로운 것은, 작업실을 바라보는 각도인데, 모든 그림들이 마치 위에서 사진을 찍은 듯, 내려다 보는 구도로 되어 있다. '신'의 눈으로 내려다 보는 듯해서 뭔가 거만한 느낌이 살짝 풍겼지만, 전체를 한 눈에 파악하는데 효과 있다.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이런 생각 하기 쉽지 않았을텐데. 이 사람 머릿속엔 각도 자동 변환 장치가 장착된 초정밀 특수 렌즈가 박혀 있지 않을까? 그렇지 않고서야 우찌 이리 그리노.  

그 중, 삿포로 교향악단을 그린 것이 가장 인상 깊었다. 소리의 순간을 그림으로 붙잡아 두려는 시도가 좋았고, 각 단원들 그룹에 덧붙인 설명이 재미 있고 -트라이앵글을 연주하는 사람은 기다리는 시간이 길기 때문에 책을 읽고 있다.ㅋㅋ- 놀랍도록 세밀한 저자의 관찰력과, 그 순간을 최대한 생생하게 전달하고자 하는 고민의 흔적이 보였기 때문이다. 이런 그림을 글까지 덧붙여 일주일마다 한 편씩 연재했다 하니, 시간적 압박감이 만만찮았겠다.  

그림이 이 책의 핵심이겠지만, 다양한 분야의 대가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도 좋았다. 자기분야에 대한 전문적인 이야기도 있고, 일상적인 이야기도 있었지만, 장르를 불문하고, 자기가 정말 좋아하는 일을 즐겁게 하는 것이 - 물론, 초소수의 축복받은 자들만 누릴 수 있는 복이긴 하다- 정말 잘 할 수 있는 비결이구나 하는, 식상한 결론에 다시 한 번 다다르며, 저자도 작업자들의 작업실을 엿보지만, 작업자들도 그들을 관찰하는 저자를 관찰하며 서로가 서로를 탐색하는 상호 발견(?)의 과정 또한 재밌었다. 나는 그런 저자와 작업자들을 동시에 엿보면서, 만약 세노 갓파가 나를 취재한다면 - 좆도 내세울 것 없지만- 나는 어떤 모습으로 그려질지, 말도 안되는 상상도 해봤다.   

대부분의 작업실은 정리정돈과는 거리가 멀었다. 일본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 다 정리정돈하길 좋아하는 건 아닌가 보다. 내 책상이 항상 엉망진창인것과 그것과는 아무 개연성도 없건만, 왠지 든든한 느낌이 들었다. 사무실이 아닌, 자신만의 작업실에서 일할 수 있는 그들에게, 역시나 아무 개연성도 없건만, 강한 질투심을 느꼈다.   

* 책 접기 

"어려운 것을 쉽게, 쉬운 것을 깊게, 깊은 것을 유쾌하게"   

"인간의 따뜻함이라는 것은 모든 '생명'을 대등하게 바라보는 것에서 시작된다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대단한 사람은 대부분 대단산 사람인 것에서 더 나아가거나 또는 마지못해 남들에게 인정 받는다. 가장 꼴불견의 전형이 다자이 오사무가 인용한 '선택받은 자로서의 황홀과 불안 이 두 가지가 내게 있으니'와 같은 정신일지도 모른다. 대단한 사람은 남들을 피곤하게 만든다. 그리고 대단한 사람 자기 자신도 결국 피곤해 진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만 하는 사람의 가족들은 얼마나 힘들까 싶었다."   

"본인이 그림을 그리고 즐거워 하는 게 중요해요. 나는 그림을 잘 못 그리니까 하면서 그리지 않는 건 말을 잘 못한다면서 아무하고도 말하지 않고 입을 꾹 닫고 있는 것과 같아요."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의 작업실을 들여다 보면 분명 그 너머에 보이는게 있을거예요. 옹이구멍으로 들여다 보는 정도로 봤다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사람에 따른 차이가 보이거나 혹은 공통된 점이 보일지도 몰라요. 실제로 들여다 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지만, 49면의 작업실로부터 무언가 '지금 이 순간'을 감지할 수 잇는 것이 보일 것 같은 예감이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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