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1/2장으로 쓴 세계 역사 열린책들 세계문학 104
줄리언 반스 지음, 신재실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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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알리미 신청까지 해놓고 기다린 줄리언 반즈의 책. 아껴두고 꼬르는 혼자만의 재미를 즐기다 드디어 읽었다.'플로베르의 앵무새'가 준 신선한 충격 -사실과 허구를 넘나드는 현란한 글빨! 타가다 정도는 아니라도, 눈알이 핑핑 돌아간다-에 그의 다른 작품들도 읽기 시작했고, '내 말 좀 들어봐'에 완전 반해선 -등장 인물들의 라쇼몽식 사랑 이야기에 안 빠질 재간이 있나!- 전작 읽기. 작품들 마다 각기 다른 소재와 형식미가 있으면서도, 사랑과 질투, 사실과 허구, 성장과 죽음을 이야기하는 그의 목소리는 시종일관 깊고, 재밌고, 입이 쫙 벌려질 만큼, 그러나 거슬리지 않게 똑똑하다. 뜬금없지만, 그 박학다식함이 경탄스러운 이 작가, 64살 먹은 할배라도 엄청 섹시할 것 같다. 이런 남자랑 사귀면 어떨까? 흠.   

연대순으로 정리해 볼까. 메트로랜드(1980), 나를 만나기 전 그녀는 (1981), 플로베르의 앵무새(1984), 태양을 바라보며 (1986), 10 1/2장으로 쓴 세계 역사(1989), 내 말 좀 들어봐(1991), 고슴도치(1992), 사랑 그리고(2000), 레몬테이블 (2004).  

이 책은 출판 순서로 따지면 중간쯤 되는데, 마지막에 읽은 탓인지, 형식,소재,주제 면에서 다른 작품들을 짬뽕한 후,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킨, 잘 차려진 뷔페 같았다고나 할까. 10과 1/2장의 각 챕터들은 스토리만 봤을 때, 다른 장들과 어떤 유기성도 없이 개별적으로 전개되며, 편지 형식, 관점 바꿔 말하기, 미술 평론, 역사적 사실과 허구의 경계를 헷갈리게 하는 애매모호함, 작가의 독자적 개입(삽입장), 역사의 허구과 진실에 대해 이야기 하는가 싶다가, 하느님의 독단을 비판하고, 소외와 차별에 대해 이야기하다, 다시 사랑으로 이 모두를 극복해야 한다더니 -뜬금없긴 했다-, 반복의 지겨움으로 마무리. 그나마 작품에 통일성을 부여 하는게 있다면, 각 챕터에 공통 등장하는 노아, 방주, 배, 뗏목, 표류, 나무좀, 임종벌레 정도이다. 평소엔 먹기 힘든 다양한 음식을 한 번에 조금씩 맛 볼 수 있는 엄청난 장점이 있으나, 배 터지게 먹고 트림하며 이쑤시고 나와도 왠지 제대로 된 일품요리 하나를 먹은 것 만 못해, 뷔페가 싫다는 우리 신랑처럼, 이 뷔페식 작품에 대한 호불호도 독자에 따라 확실히 나뉘지 않을까 싶다.  

그럼 나는 어땠나? 나는 일단 그의 다양한 진수성찬을 껄떡 거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물론, 해산물 코너라든지, 면 코너라든지, 샐러드 바 처럼 정체가 구분되지 않는 중구난방에 짜증이 살짝 나기도 했지만, 이런 진기한 퓨전 뷔페 식당을 찾아내기가 어디 쉽나. 그리고 소화 불량으로 속이 껍껍하더라도, 그것은 작가 탓은 아닌 것이다.     

*책 접기   

"또 당신네 종은 진실에 너무 소홀합니다. 당슨들은 계속 일들을 잊어버리거나, 잊는 척합니다. 중략. 나쁜 일을 외면해 버리면 일의 계속적 수행을 용이하게 하거든요. 그러나 나쁜 일을 무시하면 결국 나쁜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고 믿게 됩니다. 당신들은 항상 나쁜 일들로 놀랍니다. 총이 사람을 죽이고, 돈이 사람을 부패시키고, 겨울에 눈이 내리는 것을 당신들은 놀라워하지요. 그런 순진성은 매력일 수 있지만, 슬프게도,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이게 바로 세상의 어딘가가 잘못된 것이라고 그 여자는 생각했다. 우리는 망루 설치를 포기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구조하겠다고 생각지 않고, 그저 기계에 의지하여 항해할 뿐이다. 모두가 갑판 아래로 내려가서, 그레그와 함께 맥주를 마시면서." 

"사람들은 늘 척척 외우는데, 이름, 날짜, 업적, 나는 날짜를 증오한다." 

"실로 역사는 우리의 동정심을 민주화시키고 있다. 병사들은 그들의 전쟁 경험때문에 잔인한 사람들이 되지 않았는가? 대장은 응석받이로 자란 사람으로서 자신도 하나의 피해자가 되지 않았는가? 비슷한 상황에서 우리는 영웅적으로 행동할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는가? 세월이 가면 이야기는 용해되어 하나의 형태, 색깔, 느낌이 되고 만다."  

"영화도 그렇고 여행도 모두 그렇다오. 모든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가지만, 멈춰 서서 음미해 보면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에 결국 모든 사람이 의미가 있는 척하니까 우선 그것이 의미 있는 것으로 보였을 뿐이구나 하고 생각하지." 

"우리는 <사랑한다>는 말을 유리 안쪽의 상자속에 넣어 두어야 한다. 우리가 이말을 꺼내 온다면 조심해서 다루지 않으면 안된다. 남자들은 여자들을 침대로 끌어들이기 위해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하고, 또 남녀는 두려움이 다가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말로써 자신의 행위를 확인하기 위해서, 약속한 사랑의 조건이 성숙됐음을 다짐하기 위해, 그런 조건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고 자신을 기만하기 위해서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이 말을 이런 용도로 사용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이 세상으로 나가서 통화또는 사고파는 주식이 되어 우리에게 이익을 남겨 주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우리가 내버려 두면 이 말은 그런 일을 하낟. 그러나 고분고분한 이 말은, 없는 머리를 방금 쓸어 올려 버린 목덜미에 대고 속삭일 때를 위해 남겨두자." 

"역사는 일어난 사실이 아니다. 역사는 역사가가 우리에게 전하는 것일 뿐이다. 어떤 패턴, 어떤 계획, 어떤 운동, 팽창 민주주의의 행진이 있었다. 그것은 하나의 태피스트리, 사건의 흐름, 하나의 복잡한 이야기로서, 서로 관련이 있고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중략. 그러나 역사는 항상 여러 미디어의 콜라주, 낙타털 그림붓이 아닌 실내 장식업자의 롤러로 물감을 칠한 그림과 비슷하다. 중략.우리가 모르거나 수락할 수 없는 사실들을 호도하기 위해 이야기를 꾸며낸다. 몇 가지 진짜 사실을 남겨 놓고 그 주위에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우리의 공포와 우리의 고통은 마음을 달래 주는 우화화에 의해서만 덜어진다. 우리는 그것을 역사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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