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유물론 - 니체, 마르크스, 비트겐슈타인, 프로이트의 신체적 유물론
테리 이글턴 지음, 전대호 옮김 / 갈마바람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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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퀴나스를 향한 이글턴의 팬심은 ˝유물론˝에서도 여전하다. 잘 모르는 나도 아퀴나스 말이라면 일단 믿는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사족.
에른스트 페터 피셔의 ˝밤을 가로질러˝
한나 모니어 ˝ 기억은 미래를 향한다˝
마르쿠스 가브리엘 ˝나는 뇌가 아니다˝

꽤나 번역이 잘 읽혀 역자의 역서를 찾아봤더니 책이름들이 제법 낯설고 흥미가 돈다.

서울대 물리학과 철학 전공
독일 쾰른대 철학 유학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등단
길담서원 헤겔 강독회 진행중
전문번역가로 활동중

그의 이력 중에 눈에 띈 점은 시인이라는(이었다는?) 것. 그래선지 문장이 두툼하다.

본인 저서라던데 ˝철학은 뿔이다˝도 읽어볼만할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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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신형철 지음 / 한겨레출판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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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에서 시작해서 우뚝 선 인류의 모습을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일렬로 늘어세움으로써 진화란 어떤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해답을 생생한 이미지로 각인시킨 저 유명한 그림은 오류로 가득하다. 흔히 ‘진보의 행진‘이라고 표현되는 이 그림은 ‘진화=진보‘라는 사고에 암묵적으로 동의하도록 유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림에는 생략되어 있으나 원핵동물부터 포유류 전반에 걸치는 생물의 역사가 마치 인간의 탄생을 위해 예비된 시간들이었으며 동물에서 인간으로 나아가는 어떤 경향성을 상상하게 만들고 있다.

그러나 진화에는 어떤 경향성도 없다, 는 것이 고생물학자 굴드의 의견이다. 다시 말해 생명의 ‘방향‘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우리가 진화해왔다고 믿는 원핵생물이 아직도 생명 전체의 70%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므로 다수/소수의 개념을 빌어와도 인류는 생명의 특징을 다른 생물보다더 대변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인간의 의식이 매우 유니크한 현상임에 틀림없으나 그것은 용암이 들끓는 화산분화구나 심해의 해저에 살고 있는 생물들의 적응력도 마찬가지이다. 다시 말해 적어도 생물학적 관점에서 보면 ‘방향‘같은 건 어디에도 없다.

이 뿌리깊은 오해는 상당히 널리 퍼져 있어 신형철의 글 ‘당신의 (역)진화 - 얼굴, 음성, 그리고 문자‘에 드러난 논리 구조에서도 엿볼 수 있을 정도다. 이 글에서 그는 매체의 발달로 인한 타자와의 대면 양식과 그에 대한 주체의 태도가 변화해온 흔적을 살피는데 진화/역진화라는 개념을 암암리에 좋음/나쁨과 같은 가치 판단의 도구로 활용하고 있다.

과학적 개념을 인문학적 도구로 활용하는 일은 환영받을 만하지만 새로운 시선을 획득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러할 따름이며 편견과 곡해를 공고히 하는 상황이라면 좀 다를 것이다.

그러니 그의 주장에 대한 타당성을 검토해 볼 겸 진화라는 개념을 다시 한 번 적용해 보이는 것은 그리 쓸모없는일만은 아닐 것이다.  우선 뒤섞인 개념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그는 “타자와의 대면”과 “다른 소통 수단”을 별다른 구분 없이 하나의 범주로 묶어버리는데, 좀더 엄밀히 말하면 타자와의 대면은 소통 수단의 하위 범주에 속하며 다른 소통 수단들과는 성격이 좀 다르다.

˝소통 수단˝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타자와 직접 시선을 주고 받는 행위는 다른 수단으로 대체가 곤란하지만, 메시지만 주고 받는 여타 소통 수단들은 무한히 확장 가능하다는 점에서 등가 비교할 수 없는 범주들이다. 봉화대, 파발마,전화, 문자, 카톡, 텔레그램, 트위터 등등은 이런 소통 수단에 속하므로 앞으로도 인류가 나름대로의 번영을 구가하는 한은 끝없이 확장될 영역인 반면, 직접 타인과 대면하는 일에는 육체를 이동해야 하는 물리적 제약이 뒤따르기에 (적어도 얼마간은) 그렇지 못할 것이다. 변할 수 없는 범주에 대해 너는 왜 변함이 없냐고 나무라는 것은 그리 현명한 일은 아니다.

그의 우려대로 바로 앞에 사람을 두고도 직접 이야기를 하는 대신 전화, 문자, 카톡을 주고 받는 사람들이 다수가 되었다면 그의 실망감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면 여전히 우리가 물리적 제약이 뒤따르지 않는 거리에서 사람과의 소통에 굳이 ‘불편한 시선’을 감당하고 인내하는 이유가 따로 있을까? 법적인 제약이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도 말이다.

육체의 현현이라는 수단은 텔레포트 기술이 완벽히 성공하기 전까지는 누구도 감히 시험해볼 생각을 하지 않을 위험한 기술로 알려져 있으므로(영화 ‘플라이’를 본 사람이라면 특히나 여기에 동의할 것이다), 그 외의 소통 수단은 어쩔 수 없이 원거리에 있는 타자와의 소통 수단이며 이는 “소통수단”이라는 전체 집단의 크기가 증가하여 ‘직접 대면’이라는 과거 집단 내에서 비교적 큰 모수를 차지했던 영역이 상대적으로 작아진 것처럼 보이는 효과를 오인한 것에 가깝다. (우리가 어른이 되면서 아버지가 급격히 작아진 것처럼 보이지만 정말로 그런 것은 아니다. 물론 나이가 들면 몇 센치 쯤 키가 작아지긴 하지만 우려할 만큼은 아니다.)

다시 말해 직접 사람을 마주 하는 행위도 분명히 증가했지만, 다른 원격 소통 수단이 워낙 급증하는 바람에, 우리가 그 사람들과 카톡을 하는 것 만큼 그 사람들을 마주하지 않게 되었다는 서술이 실상에 더 근접하며, 이것은 실망스런 일이 아니라 당연한 일이다.

문학작품의 해석에서와 달리 그가 이런 기초적인 오류의 함정에 빠진 데에는 앞서 언급한 ‘진보의 행진’ 관념이 그만큼 해악이 크다는 점을 그 이유로 언급해 둘 필요가 있다.

인류의 역사는 생명의 발달 과정 중에서도 말의 역사와 비슷하다. 대체로 성공보다는 실패가 많았다는 점에서 그렇다. 말과 인류의 인척 종들은 생명의 역사에서 줄줄이 멸종하는 과정의 연속이었는데, 따라서 그 역사의 흐름은 마치 직선으로 그을 수 있을 정도다. 하지만 대개는 그렇지 않다.(단 한 명의 자손만 가지는 어떤 집안의 가계를 상상하면 쉬울 것이다. 이모나 삼촌도 없고 아버지, 어머니만 존재하는 집. 그런 집에서 태어나 자랐다면 세상에는 친척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겨질 법도 하지만, 사실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다행히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가 “진화해 왔다고” 믿는 박테리아가 지금도 생명 전체의 70%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 척추동물의 80%가 바다에 산다는 사실(맞다, 물고기다)등을 떠올릴 때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생명의 그림이 상당히 엉망진창에 제멋대로라는 점이다. 우리는 생명이라는 개념에서 보면 지극히 소소한 존재들이며 어떤 의미에서도 생명이라는 범주를 대표할만한 특성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심지어 지질학적 시간의 단위로 보자면, 얼마 뒤에는 인간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그 어떤 생명체도 개의치 않는 시기가 찾아올 가능성도 많다.

고작 300만년쯤 생존한 생명체가 수십 억 년째 지구에서 살아가고 있는 다른 생명들 앞에 보이는 오만함이야말로 내가 실망감을 느끼는 부분이며 우려스럽게 생각하는 지점이다. 따라서 인류가 시선을 피하고 있는 대상이 같은 인류가 아니라 지구에서 동거 중인 다른 룸메이트들이라는 주장이 이 경우에 비추어 그리 지나친 것은 아니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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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좋은 책(일단 길이로만 봐도 그렇다)은 심각한 오해를 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 우선 이글턴의 만담이 알아먹기 힘들다는 것(사실이다), 다음으로 하나마나한 고리타분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인데(이건 좀 생각해볼 문제다), 도움이 될지 불난 집에 석유를 들이붓는 일이 될 지는 모르지만 일단 양동이에 뭘 좀 담아서 부어보기로 했다.

첫장의 제목은 ˝질문들과 답변들˝인데 통상 강연의 마지막순서에 해당하는 Q&A를 앞자리에 놓음으로써 풋웃음을 유발하고, 여기서 진짜 문제는 질문들과 답들 그 자체라는 사실을 공표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인생의 의미란 무엇인가˝는 진짜 질문일까? 이글턴은 아닐 수도 있다고 답한다. 이런 종류의 질문은 질문인 척하는 사이비 질문인데, 예를 들어, “너 진짜 죽고 싶니?” 라는 말이 예, 아니오의 대답을 요구하는 문장이 아니라는 맥락에서 그렇다.

대체로 이 질문은 “나 요즘 왜 사는지 모르겠다”와 같은 푸념에 가까운 표현으로, 철학의 영역에서는 늘상 존재했지만 늘상 같은 것을 뜻하지는 않았다. 중세 시대에 인생의 의미란 ‘무엇’인가, 보다 ‘누구’인가? 에 가까웠으며, (대체로 그 대답은 ‘신’이었다고 한다), 종교가 삶의 중요한 가치(헌신, 희생, 공감, 연대, 포용, 베풂, 실천)를 독점하던 시기에는 영토 분쟁이나 전쟁도 그러한 이유로 발생했다.

최근의 경향은 인생의 의미를 제공하던 공적 영역의 생산라인이 붕괴하여 사이언톨로지같은 유사 종교 불량품이 출하되거나 좀더 친근한 민속 종교의 형태를 띈 ‘축구’와 같은 공산품이 출시되기도 하는데, 이제 그것들은 누구나 뒤따라야 할 공공의 가치가 아닌 개인의 기호의 영역으로 찌그러 들고 있는 실정이다(맨유 팬들은 동의하지 않겠지만 누구나 맨유의 팬이 되어야 하는 건 아니다).

결국, 처음으로 돌아가 ‘인생의 의미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1,2차 대전, 핵무기 확산, 기상이변, 국가/민족 간 갈등, 자본주의 심화에 따른 빈부격차, 계층/인종/성별/성적 기호 등에 따른 갈등이 촉발하는 삶의 ‘위기’ 하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이 쏟아내는 집단적 푸념(왜 사는지 모르겠다) 의 일종이라는 게 이글턴의 주장. 

그렇다면 우리가 할 일은 저 질문의 해답을 구하려고 애쓰는 대신 저 질문이 성립하는 역사적 맥락을 다시 검토할 때에 제대로 ˝의미있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는 얘기이니 그 다음 장의 제목들이 ˝의미의 문제˝와 ˝의미의 퇴색˝을 거쳐 ˝어떻게 살 것인가˝로 이어지는 건 당연한 귀결에 가까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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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리 이글턴의 글은 철학적 만담에 가까운데 대체로 번역에서는 그 점이 간과되는 듯 하다. 의미와 감정의 유발(풋웃음)이 이렇게 착 달라붙어 있는 경우에 둘 사이를 갈라놓는 일은, 본의가 아니었다하더라도 피같은 웃음의 대량출혈이 원인이 되어, 의미의 심장이 맥박을 멈추고, 오역이라는 오욕마저 뒤따르는 불운한 처지에 빠질 가능성이 농후한 어려운 작업이다.

이 책 역시 그런 혐의에서 자유롭진 못하지만 그나마 다른 책에 비해 두께가 얇고 주제가 명확해 출혈도 미미한 편이고 나는 아직 도랑에 빠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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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신형철 지음 / 한겨레출판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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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한 사랑의 실험˝을 띄엄띄엄 읽고 ˝몰락의 에티카˝와 ˝느낌의 공동체˝는 패스. 비평이 ‘취향에 개입하는 권력‘이라서기보다 ‘취향에 1도 개입 못하는 무능력함‘에 가깝다고 느껴서, 실망스럽기도 했고 답답했다. 차라리 정신분석학을 공부하고 말지 싶게.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은 정신분석용어를 찾아볼 수 없다. 대체로 짧은 글로 구성되었고 글 하나에 하고 싶은 이야기 하나 정도로 배분해서인지 집중도 잘 된다. 이건 독자의 수준 저하라기보단 매체의 변화라는 환경 탓이 클 것이다. (다음 세대의 지적 능력을 걱정하는 앞선 세대의 이야기는 이미 지겹지 않나요?)

트위터가 상징적인 예가 될 듯 한데, 140자 안에 하고 싶은 말을 담으려면 효율성을 추구할 수 밖에. 카톡에 장문의 글을 올리는 앞세대의 행태를 조롱하는 짤들이 돌아다니는 걸 보면 ‘장문‘은 확실히 구려진 것 같고, 쩌는 펀치라인이나 응축된 위트, 아포리즘이 대세로 떠오른듯 하다.

하지만 이건 요즘 와서 새롭게 등장한 문화적 경향은 아니다. 만년 꼴찌 야구팀처럼 예전에도 존재했지만 팬덤이 없던 것이 어느 날 문득 리그 1위로 올라선 꼴이다. 그러니 이런 경향을 두고 말세니 문명의 퇴보니 투덜거리는 게 좀 호들갑스러워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장문을 무기로 휘두르는 소설이 주춤하는 현상도 얼마간 납득이 간다. 문체가 구린 것이다. 구리니 안보고 안 보니 망하고 뭐 그런 싸이클이 반복되고 업계의 규모는 축소된다. 규모의 경제라는 논리에 비춰보자면 전투력도 떨어지게 되니 엎친 데 덮친 격.

‘소설이 사라져도 비평가는 사라지지 않는다‘고 한 신형철의 말은 그래서 예언처럼 들리고 그래서 좀 오싹하다. 소설이라는 장르가 문학적인 어떤 것을 구현하는 하나의 매체에 불과하니 매체 하나가 사라진다고 비평가의 할 일이 사라지는 건 아니라는 얘기. 오히려 매체의 수는 증가하고 있으니, 그속에 문학(소설)적인 어떤 것을 담는 매체가 혹은 개별 작품이 등장하리란 건 쉽게 예측할 수 있다. 실제로 소설만큼(보다) 감동적인 웹툰이 여럿 있다. 문체가 소설의 말이듯 그림이 웹툰의 말이다. 멋진 문장에 감탄하듯 주제와 하나가 된듯한 그림은 문학적인 어떤 것에 가까운 깊이를 보여준다. 소설 한 권은 비싸다며 고심고심 고르지만 웹상에서 이미 무료로 본 웹툰을 단행본으로 출간해 달라고 요구하거나 제 값주고 전권을 사는 독자가 충분히 많다는 사실은, 우리가 걱정해야할 사실이 문학의 종말이 아니라 어쩌면 소설이라는 매체의 쇠락일 거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장강명은 한국소설 충분히 재밌다는 잠정적인 결론을 내린 ‘당선..‘에서 따라서 문학공모전은 아직 괜찮은 제도라고 말했다. 한국소설이 충분히 알려지지 못한 탓에, 독자들이 잘 모르는 탓에 안 읽는다는 현실 인식은 좋게 말해 천진하고 단적으로 말해 틀렸다. 아예 책에 관심없는 독자는 차치하고 소설도 읽고 웹툰도 보고 영화도 보는 문화적 매체에 관심을 유지하는 독자층은 최소한 신간으로 등장하는 한국소설이 뭐가 있는지 대체로 어떤 평을 받는지 알고 있을 뿐더러 작가의 이름도 대충이나마 알지만 ˝안땡겨서 안 읽는다˝.

가장 최악인 상황은 읽어봤는데 영 내 스타일 아니다라는 경험이 축적되는 것이다. 한국 소설이 독자의 관심 영역 밖으로 아웃포커스되는 이유에는 그나마 경험 부족이 아니라 불만족스러운 경험의 축적이 두껍게 자리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한국 소설은 충분히 재밌지가 않다. 그리고 더 나아질 점이 아직 많다. 한국어 문장 자체가 개발도상형이다. 깨야할 퀘스트가 산적한 가운데 자신들이 만렙이라 착각하고 돌아다닌다면 고렙 몬스터에게 킬당하는 게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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