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신형철 지음 / 한겨레출판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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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한 사랑의 실험˝을 띄엄띄엄 읽고 ˝몰락의 에티카˝와 ˝느낌의 공동체˝는 패스. 비평이 ‘취향에 개입하는 권력‘이라서기보다 ‘취향에 1도 개입 못하는 무능력함‘에 가깝다고 느껴서, 실망스럽기도 했고 답답했다. 차라리 정신분석학을 공부하고 말지 싶게.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은 정신분석용어를 찾아볼 수 없다. 대체로 짧은 글로 구성되었고 글 하나에 하고 싶은 이야기 하나 정도로 배분해서인지 집중도 잘 된다. 이건 독자의 수준 저하라기보단 매체의 변화라는 환경 탓이 클 것이다. (다음 세대의 지적 능력을 걱정하는 앞선 세대의 이야기는 이미 지겹지 않나요?)

트위터가 상징적인 예가 될 듯 한데, 140자 안에 하고 싶은 말을 담으려면 효율성을 추구할 수 밖에. 카톡에 장문의 글을 올리는 앞세대의 행태를 조롱하는 짤들이 돌아다니는 걸 보면 ‘장문‘은 확실히 구려진 것 같고, 쩌는 펀치라인이나 응축된 위트, 아포리즘이 대세로 떠오른듯 하다.

하지만 이건 요즘 와서 새롭게 등장한 문화적 경향은 아니다. 만년 꼴찌 야구팀처럼 예전에도 존재했지만 팬덤이 없던 것이 어느 날 문득 리그 1위로 올라선 꼴이다. 그러니 이런 경향을 두고 말세니 문명의 퇴보니 투덜거리는 게 좀 호들갑스러워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장문을 무기로 휘두르는 소설이 주춤하는 현상도 얼마간 납득이 간다. 문체가 구린 것이다. 구리니 안보고 안 보니 망하고 뭐 그런 싸이클이 반복되고 업계의 규모는 축소된다. 규모의 경제라는 논리에 비춰보자면 전투력도 떨어지게 되니 엎친 데 덮친 격.

‘소설이 사라져도 비평가는 사라지지 않는다‘고 한 신형철의 말은 그래서 예언처럼 들리고 그래서 좀 오싹하다. 소설이라는 장르가 문학적인 어떤 것을 구현하는 하나의 매체에 불과하니 매체 하나가 사라진다고 비평가의 할 일이 사라지는 건 아니라는 얘기. 오히려 매체의 수는 증가하고 있으니, 그속에 문학(소설)적인 어떤 것을 담는 매체가 혹은 개별 작품이 등장하리란 건 쉽게 예측할 수 있다. 실제로 소설만큼(보다) 감동적인 웹툰이 여럿 있다. 문체가 소설의 말이듯 그림이 웹툰의 말이다. 멋진 문장에 감탄하듯 주제와 하나가 된듯한 그림은 문학적인 어떤 것에 가까운 깊이를 보여준다. 소설 한 권은 비싸다며 고심고심 고르지만 웹상에서 이미 무료로 본 웹툰을 단행본으로 출간해 달라고 요구하거나 제 값주고 전권을 사는 독자가 충분히 많다는 사실은, 우리가 걱정해야할 사실이 문학의 종말이 아니라 어쩌면 소설이라는 매체의 쇠락일 거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장강명은 한국소설 충분히 재밌다는 잠정적인 결론을 내린 ‘당선..‘에서 따라서 문학공모전은 아직 괜찮은 제도라고 말했다. 한국소설이 충분히 알려지지 못한 탓에, 독자들이 잘 모르는 탓에 안 읽는다는 현실 인식은 좋게 말해 천진하고 단적으로 말해 틀렸다. 아예 책에 관심없는 독자는 차치하고 소설도 읽고 웹툰도 보고 영화도 보는 문화적 매체에 관심을 유지하는 독자층은 최소한 신간으로 등장하는 한국소설이 뭐가 있는지 대체로 어떤 평을 받는지 알고 있을 뿐더러 작가의 이름도 대충이나마 알지만 ˝안땡겨서 안 읽는다˝.

가장 최악인 상황은 읽어봤는데 영 내 스타일 아니다라는 경험이 축적되는 것이다. 한국 소설이 독자의 관심 영역 밖으로 아웃포커스되는 이유에는 그나마 경험 부족이 아니라 불만족스러운 경험의 축적이 두껍게 자리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한국 소설은 충분히 재밌지가 않다. 그리고 더 나아질 점이 아직 많다. 한국어 문장 자체가 개발도상형이다. 깨야할 퀘스트가 산적한 가운데 자신들이 만렙이라 착각하고 돌아다닌다면 고렙 몬스터에게 킬당하는 게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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