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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을 넘어 ㅣ 민음사 모던 클래식 65
코맥 매카시 지음, 김시현 옮김 / 민음사 / 2009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사전정보 없이 코맥 매카시 글이라는 것만 알고 읽기 시작했다. 서지정보도 표지의 소개글도 읽어보지 않았다.
소년과 아버지가 늑대 잡으러 다닐 때, 흠 무뚝뚝한 부자지간이군. 겉으로는 저래 보여도 속정이 깊을 테고 갈등 끝에 화해하는 이야기일 거리고 예상했다. 잡은 늑대를 멕시코에 풀어주기 위해서 소년이 멕시코로 갈 때는 아, 이거 성장소설이군. 소년은 모험 끝에 무사히 늑대를 돌려보내고 집으로 돌아와서 아버지와 악수, 혹은 포옹을 할 거라고 생각했다.
늑대가 죽었다.
이런, 생각이 틀렸네. 뭐 그럴 수도 있지. 소년은 성장했고 이제 돌아가서 즐겁게 살겠구나 싶었다. 아니었다. 소년은 차가운 현실에 내동댕이쳐진다.
소년은 도둑맞은 말을 찾기 위해서 또 다시 멕시코 국경을 넘는다. 전과 다른 점은 있다면 이번에는 늑대가 아니라 동생이 동행하고 있다. 늑대가 동생으로 바뀐 점이 나에게는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는데 머리 한구석으로 밀쳐두고 글을 계속 읽었다.
나는 이 순간에도 낙관적인 시선을 잃지 않았다. 한 번 호되게 걷어차였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형제는 용감했다, 유의 이야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형제는 모험 끝에 원수를 갚고 말을 되찾아 귀향한다. 그리고 행복하게 살았다. 이렇게 끝나겠지.
나는 또 한 번 걷어차였다. 현실은 판타지가 아니다. 현실은 형제 앞에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물어뜯는다. 물론 세상에는 좋은 사람들도 많이 있다. 선의와 호의를 품은 사람들이 손을 내밀어 형제에게 도움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타인이다. 형제가 뭘 하든 어떻게 되든 신경 쓰는 사람은 별로 없다. 형제는 자기들의 힘으로 세상의 파고를 헤쳐 나가야 한다. 세상살이가 쉽지 않은 건 이 때문이다.
엄밀히 따지면 소년들에게 적대적인 사람은 소수이다. 하지만 그 소수의 사람은 힘, 그게 폭력이 되었든, 권력이 되었든, 자본이 되었든, 형제의 삶을 근본적으로 뒤흔들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대중소설을 너무 많이 읽었나 보다. 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화끈한 총격전을 기대하고 있었다. 적의 심장에 총탄을 박아넣고 총구의 연기를 후 부는 장면을 기대했다. 국경을 넘어는 마지막 순간까지 내 예상을 걷어차버렸고 마지막 장면에서 나는 소년과 비슷한 심정으로 먹먹함을 느꼈다. 쿵 하고 심장을 때리는 느낌이 들어서 긴 한숨을 내쉬었다.
대중소설은 독자에게 쾌락을 주고 순문한은 고통을 준다는 글을 읽은 기억이 난다. 정확하게 말하면 이런 표현은 아니었는데 왜 그런지 내 머릿속에는 이런 뉘앙스로 남아있다. 이런 식의 구분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이걸 기준으로 하면 국경을 넘어는 순문학이다. 국경을 넘어가 고통스러울 정도는 아니다만 그렇다고 신나는 모험담은 분명 아니니까.
책장을 덮은 후 의문이 떠올랐다. 나는 분명히 사전정보 없이 이 책을 읽었다. 그런데 왜 내가 많이 접했던 수많은 대중소설들처럼 이야기가 전개될 거라고 기대했을까. 코맥 매카시는 미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의 한 명이고 퓰리처상까지 수상한 작가가 아닌가. 오락소설을 쓰는 작가라고 볼 수 없는데 왜 그랬을까.
한참 만에 해답이 떠올랐다. 예전에 읽었던, 코맥 매카시는 서부 소설의 전통을 훌륭하게 계승하고 뛰어넘었다, 라는 구절이 기억에 박혀서 영향을 미친 모양이다. 마지막까지 헐리우드 서부극의 화끈한 총격전을 기대한 건 그 때문인 듯하다.
서부 소설을 읽은 적이 없어서 이 말이 맞는지는 잘 모르겠다만 이거 하나는 확실하다. 코맥 매카시는 글을 잘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