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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부러진 경첩
존 딕슨 카 지음, 이정임 옮김, 장경현 감수 / 고려원북스 / 2009년 1월
평점 :
어렸을 때 아동용 축쇄본을 통해서 추리소설에 입문했습니다. 아이들이 읽기에 민망한 내용을 약간 삭제한(홈즈가 마약을 하는 장면이 대표적이었죠) 축쇄본부터 아주 짧게 줄인 것까지 축쇄본 범위도 꽤 다양했는데, 그때는 그게 축쇄본인 줄 모르고 읽었습니다. 나중에 알게된 후 완역본을 하나씩 구해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어릴 때는 그렇게 재밌던 책이 다시 읽으니 그다지 재미가 없는 겁니다. 그런 책들이 늘어나면서 이유를 알게 됐어요. 탐정의 말과 행동이 짜증났던 겁니다. 범인을 눈치 챘으면 빨리 말해서 해결해야 할 텐데 혼자만 알고 있다가 끝에 가서야 겨우 설명해 주는 게 답답했어요. 축쇄본에서는 그런 과정이 짧게 줄어 있어서 짜증이 나지 않았던 겁니다. 홈즈가 여전히 재밌었던 것도 단편 위주여서 짜증이 날 여지가 적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장황하게 다가왔던 반 다인의 파일로 반스는 재미의 격차가 큰 편에 속합니다. 어릴 때 가장 좋아했던 탐정이 파일로 반스였는데 지금은 아닙니다.
존 딕슨 카의 작품은 그 격차가 작습니다. 짜증이 덜 나요. 카 특유의 괴기스런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그렇습니다.^^
동서문고가 재간되어 나왔을 때 환영하는 입장이었습니다. 읽고 싶은 책은 많은데 전부 절판이라 헌책방을 뒤지고 다니던 때였거든요. 구하던 작품이 쏟아져 나와서 참 좋았는데, 지금은 좀 그렇습니다. 일어 중역과 옛날식 표현의 답답함이 어우려져서 고약한 느낌이 드는 경우가 꽤 있어서요. 사람 마음이 간사하죠.^^
동서문고에 딕슨 카 작품이 다섯 작품 포함되어 있습니다. 황제의 코 담뱃갑, 화형법정, 모자 수집광 사건, 세 개의 관, 연속 살인사건, 해골성. 카의 대표작이라고 하더군요. 대표작 나왔으니 딕슨 카 작품이 더 나올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나왔습니다. 고려원북스에서 구부러진 경첩이 나왔고 벨벳의 악마도 이어서 나온다고 합니다. 그리고 노블우드 클럽에서 다섯 작품이 출간대기 중입니다.
구부러진 경첩은 카의 대표적인 걸작이고 독자들이 뽑은 베스트 5안에 드는 명편이라고 해설에 적혀 있습니다. 이런 대표작은 누가 선정하는 걸가요. 세계 3대 추리소설이니 하는 것들도 그렇고 가끔 궁금해요. 혼자서 뽑는 건 아닐 테고 말이죠.
카의 작품을 읽을 때는 기대하는 점이 있습니다. 밀실, 트릭, 괴기 같은 요소 말입니다. 구부러진 경첩도 그런 요소가 들어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좋았던 것은 그것보다는 드라마적 요소였습니다. 도입부가 특히 마음에 들었습니다. 존 판리는 어렸을 때 사고를 쳐서 미국으로 보내집니다. 그 후 오랫동안 미국에서 살았는데 형이 후손을 남기지 않고 죽는 바람에 영국으로 돌아와 영지를 물려받고 아름다운 부인까지 얻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자기가 진짜 존 판리라는 자가 등장합니다. 그는 변호사를 대동하고 장원을 방문합니다. 그가 털어놓는 사연이 그럴 듯합니다. 개인적으로 그 사연과 진짜를 가리기 위해서 벌어졌던 문답이 좋았습니다. 뒤이어 발생한 사건도 흥미롭습니다. 등장인물도 지적 했듯이 의외의 사람이 죽었거든요.
구부러진 경첩이 카의 최고걸작이란 생각은 안 듭니다. 하지만 충분히 좋은 작품이고 5위 안에 넣어도 무방할 것 같네요. 재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