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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의 역사 ㅣ 뫼비우스 서재
케이트 앳킨슨 지음, 임정희 옮김 / 노블마인 / 2007년 11월
평점 :
절판
보통 띠지에 적혀있는 말은 절반 정도 낮춰서 받아들입니다. 출판사 홍보문구를 완전히 믿을 수는 없으니까요. 그래서 아주 재밌다 그러면 조금 재밌겠구나, 하는 식으로 좀 깎아서 생각합니다. 그런데 "최근 십년간 발표된 미스터리 중 최고의 작품이다." 라고 스티븐 킹이 말했다는 살인의 역사 띠지 문구에는 혹했습니다. 얼마나 대단한 작품이기에 스티븐 킹이 그런 격찬을 했을까. 기대가 하늘을 찔렀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재밌었습니다. 그런 평을 들을만 하다,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정말 그렇게 생각하느냐, 라고 묻는다면 솔직히 그 정도는 아니라고 대답하겠습니다. 좋은 작품인 것은 분명하지만 10년 중 최고는 아닙니다^^
살인의 역사 앞부분에는 예전의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의문의 살인, 사고, 실종입니다. 최소 9년 이상의 텀을 두고 일어난 사건들이라, 저 사건들을 어떤 식으로 연결할 지 초반부터 궁금했습니다. 접점이 별로 보이지 않았거든요. 저 사건들을 연결하는 건 사립탐정 잭슨입니다.
살인 같은 사건이 일어나면 수많은 피해자가 발생합니다. 보통 피살당하는 사람만 피해자로 생각하는데, 어쩌면 살아남아서 고통을 겪어야 하는 가족들이 더한 피해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살인의 역사는 그런 강력 범죄가 남은 사람들의 삶을 얼마나 힘겹게 만드는지 잘 보여줍니다.
살인의 역사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심각합니다. 살인, 실종, 성적인 학대. 꽤나 격렬한 사건인데 분위기는 차분합니다. 담담하다는 느낌까지 들 정돕니다. 잭슨이 수사를 하는 과정도 그렇습니다. 대단히 위험한 폭력이 사건을 추적하는 탐정을 위협하는데 그런 폭력까지도 어째 담담하게 느껴집니다. 진행이 긴박하지 않다거나, 흥미롭지 않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뒤가 궁금해서 책장이 계속 넘어가는데도 이상하게 기분은 담담해요. 마지막은 좀 다를 거라 생각했는데 마지막까지 담담합니다.
미스터리의 묘미는 뭐니뭐니 해도 탐정이 트릭을 밝혀내서 범인을 잡아내는 순간, 느낄 수 있는 쾌감입니다. 저는 그 순간의 쾌감 때문에 추리 소설을 읽습니다. 보통 그런 장면들은 격렬하기 마련입니다. 탐정이 범인을 손가락질하면서 네 놈이 범인이다, 라고 소리치면 일대 소동이 벌어지는 식이죠. 쓰고 보니 좀 유치해 보이네요^^ 요즘의 미스터리는 이런 식의 우당탕 쿵쾅은 아니어서 세련돼 보이지만, 그 세련된 포장을 벗기고 나면 기본 속살은 보통 저렇습니다.
그런데 살인의 역사는 사건의 실체를 밝혀내는 과정도 그렇고 그 후의 일들도 그렇고 담담한 편입니다. 책을 다 읽은 후, 왜 그럴까 한 동안 생각해 봤습니다. 일단 담담한게 작가의 의도라고 가정하고 그 이유에 관심을 집중했습니다. 사건이 마무리된 후 상처 받은 사람들이 그 상처를 치유하고 새로운 삶으로 나가는 모습에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상처를 치유하는 데는 담담한 분위기가 도움이 되겠죠.
살인의 역사에서 가장 좋았던 것은 잔잔한 분위기입니다. 잔잔한 가운데 몰려오는 서글픈 느낌은 책장을 덮은 후에도 오랫동안 남아서 여운을 줍니다. 좋은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