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학기 밀리언셀러 클럽 63
기리노 나쓰오 지음, 김수현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5월
평점 :
품절


기리노 나쓰오 여사님은 독자의 감정을 건드리는데 능숙합니다. 때문에 글을 읽고 나면 여운이 상당히 오래 갑니다. 해서 즐겁게 읽고 잠깐 사이에 잊어버릴 수 있는 여타 쟝르 소설들과는 다른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아마 등장인물의 감정과 욕망을 밑바닥까지 들여다 본 후에 고스란히 건져올려서 독자에게 불친절하게 던져버리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다른 작가 같으면 예쁘게 혹은 정반대로 추하게 포장을 할 텐데, 기리노 여사님은 그런 게 없습니다. 그냥 날 것 그대로의 욕망을 적나라하게 표현합니다. 자기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그 인물을 읽어나가는 독자에 대한 배려가 없다고 볼 수 있지요. 그런 독특함이 여사님을 베스트셀러 작가의 위치까지 끌어올리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래서 팬이 많은가 봅니다. 저도 그 팬 중의 한 명입니다만 가끔은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글을 읽다가 차갑다는 느낌을 받을 때 종종 그런 감정을 느낍니다. 그렇다고 작가가 특별히 차갑게 서술하고 묘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데 그게 차갑게 보일 뿐입니다.

있는 사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데 왜 차갑게 느껴지는 걸까요?
우리가 포장하는 삶에 익숙해졌기 때문이 아닐까요? 전 그렇게 생각합니다.
잔학기에 나오는 사람들의 삶이 비루하게 느껴지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요.

잔학기의 줄거리는 상당히 자극적입니다. 이 책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장 흉악한 범죄로 꼽는 유괴를 다루고 있습니다. 유괴 중에서도 가장 악질적인 유괴는 성적인 쾌락을 위해 미성년자를 유괴하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는 성이 결부되어서 돈을 노린 유괴보다 더욱 끔찍하게 느껴집니다. 잔학기에 나오는 유괴가 바로 그런 유형의 유괴입니다.

우부카타 게이코는 10살 때 아베카와 겐지라는 25살짜리 공장 노동자에게 유괴되어 그의 방에 1년간 감금이 됩니다. 게이코는 일 년 후에 우여곡절 끝에 풀려나고, 겐지는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복역을 합니다. 게이코의 삶은 그 유괴 때문에 온통 뒤틀려 버립니다. 그러나 다행히 잔학한 범죄의 희생자로만 머물러 있지는 않습니다. 그녀는 글을 통해 감정을 쏟아내는 것으로 유괴를 극복합니다. 게이코는 16살 때 고미 나루미로 데뷔를 해서 인기를 끕니다. 나름 유명한 여류작가로 그럭저럭 꾸려가던 삶은 어느날 날아온 한 통의 편지로 뒤흔들립니다. 30대 중반이 된 그녀에게 범인 아베카와 겐지가 편지를 보낸 겁니다. 편지에 쓰인 문구가 실로 묘합니다.

'날 용서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나도 당신을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굉장히 뻔뻔한 문구입니다. 사람이 얼마나 뻔뻔해지면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저 따위 말을 적어 보낼 수 있을까요. 그런 감정이 드는 동시에 이상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범인이 피해자를 용서하지 않겠다고? 뭔가 숨겨진 사실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죠.

게이코는 유괴에서 풀려난 후 아무에게도 진상을 털어놓은 적이 없습니다. 어른들도 나어린 피해자에게 꼬치꼬치 캐묻기가 어려워서 그냥 넘겼죠. 이제 게이코는 처음으로, 사건이 일어난 지 25년이나 지난 시점에서 그 사건에 대한 글을 남겨놓고 집을 나가 버립니다. 우리는 그 자서전 같은 소설을 통해서 유괴사건의 진실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이 소설이 진실 그대로일까요. 글을 읽는 와중에도 계속 의심이 생깁니다. 왜냐하면 작가는 근본적으로 거짓말쟁이니까요.

게이코의 소설을 통해서 몇몇 부분은 선명하게 해명이 됩니다만 몇몇 부분은 여전히 의문으로 남습니다. 그 미진한 부분은 남편의 이야기에서 조금씩 풀려나갑니다. 그래도 끝까지 걸리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완벽한 해명을 위해 머리를 굴릴 수도 있습니다만 전 여기서 만족합니다.
왜냐구요?
타인의 감정과 욕망을 훤히 들여다 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닌 한 모두 진실을 알아낼 수는 없는 법이니까요. 그건 글을 창조해낸 기리노 나쓰오 여사님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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