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플라스틱을 먹었습니다 - 환경과학자가 경고하는 화학물질의 위험
롤프 할든 지음, 조용빈 옮김 / 한문화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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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플라스틱을 먹었습니다


"일주일에 신용카드 한 장 분량의 플라스틱을 먹고 있다면,

그래도 괜찮은 걸까?"


얼마 전 보았던 인터넷 뉴스 기사를 공유하고 싶습니다. 


"우리나라 사람은 음식을 섭취하면서 하루 16.3개의 미세 플라스틱을 먹는 것으로 조사됐다. 다만, 이 정도의 미세 플라스틱으로는 건강상 위해가 되지 않는다고 식품의약품안전처는 분석했다."



식약 의약품 안전처가 무엇을 근거로 이와 같은 결론을 내렸는지 궁금합니다. 하루가 아니라 일주일, 한 달, 일 년, 십 년으로 확장해 보아도 건강상 위해가 없다고 볼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다른 기사도 하나 더 스크랩했습니다.




"전 세계가 플라스틱 폐기물로 골머리를 앓는 가운데 한 사람이 일주일간 평균적으로 섭취하는 미세 플라스틱 양이 신용카드 한 장 분량이라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12일 세계자연기금(WWF)이 호주의 뉴캐슬 대학과 함께 연구해 발표한 '플라스틱의 인체 섭취 평가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한 사람이 일주일간 섭취하는 미세 플라스틱은 약 2천 개로 집계됐다. 이를 무게로 환산하면 신용카드 한 장 무게인 5g에 달한다. 월간으로 환산하면 칫솔 한 개 무게인 21g이며 연간으로 보면 250g을 넘는 양이다.


이 같은 미세 플라스틱을 섭취하는 주된 경로는 음용수로, 한 사람당 매주 미세 플라스틱 1천769개를 마시는 물을 통해 섭취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어 갑각류(182개), 소금(11개), 맥주(10개) 등이 미세 플라스틱을 섭취하는 경로로 지목됐다.








조사 결과가 보여주듯 지금 우리 삶은 플라스틱으로 얼룩진 삶이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아 보입니다. 플라스틱 문제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며, 경고와 경종도 어제오늘 일이 아닙니다. 지금 당장 중단한다고 해도 앞으로도 수 천년 이상 플라스틱의 흔적을 지워내지 못합니다. 썩지 않기 때문입니다. 플라스틱 문제와 지구 환경에 대해 오랜 시간 연구하고 그 결과를 토대로 다시금 경종을 울리기 위해 애쓰는 학자이자 저자 롤프 할든의 책이 나왔습니다. [오늘도 플라스틱을 먹었습니다] 입니다.








지금 이대로의 방식을 고수하며 살아간다면 우리 후손에게 독성 화학 물질로 가득한 지구를 물려줄 뿐 아니라 온갖 먹거리에서도 미세 플라스틱을 공급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고전이라 불리기에 충분한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을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지구 환경은 심각한 수준을 향해 치닫고 있습니다. 소고기를 소비한다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환경 파괴에 동참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보여줍니다. 일회용 렌즈를 제대로 처리하지 않는 것 역시 엄청난 양의 미세 플라스틱을 식탁으로 올리는 행렬에 동참하는 일임을 보여줍니다.



인구가 무서운 속도로 증가하는 것 역시 먹거리와 관련하여 심각한 문제가 될 수밖에 없음을 지적합니다. 인구를 제한할 수 없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식량 문제를 어떤 식으로 해결할 수 있을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연구가 필요할 뿐 아니라 범국가적인 담론으로 삼아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환경을 무시하고 외면하는 것은 결국 생명을 무시하고 외면하는 것과 다르지 않으며, 자신의 생명을 가볍게 여기는 일이며, 더 나아가 자기 자녀와 다음 세대를 학대하는 처사라는 사실도 직시하게 만들었습니다.









얼마 전 [당신의 쓰레기는 재활용되지 않았다]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그 책에서도 플라스틱 재활용의 허술함과 문제점을 고발했습니다. 이 책에서도 재활용 수치가 현저히 낮을 뿐 아니라 플라스틱 재활용은 업그레이드가 아니라 다운그레이드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적극적인 자세로 플라스틱에 대처해야 할 필요성을 인식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개인의 노력은 물론이거니와 국가와 기업의 노력이 절실한 때입니다. 무한 성장, 끝없는 경제 성장은 환상입니다. 지구라는 자원의 한계가 명확하고, 인구의 증가도 한몫합니다. 결코 채울 수 없는 무저갱과 같은 탐욕을 추구하면서 지구를 훼손하고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까지 몰고 가서는 안 될 것입니다. 경제 성장만 부르짖을 것이 아니라 공존 가능한 세상을 꿈꾸어야 할 것입니다. 환경을 생각하는 것이 곧 생명을 생각하는 것이고, 인류를 생각하는 것이며 지구를 생각하는 일임을 자각해야 합니다.







이번 9월 




* 같이 읽으면 좋을 책과 리뷰 덧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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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크 - 2021 BBC 블루피터 북 어워드 수상작 다산어린이문학
엘 맥니콜 지음, 심연희 옮김 / 요요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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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처럼 생긴 애가 아니라도 친구 할 수 있어. 나 같은 말씨를 쓰는 애가 아니라도 친구 할 수 있어. 내가 좋아하는 걸 다 좋아해 주지 않아도 친구 할 수 있어. 나랑 생각이 똑같은 애가 아니라도 친구 할 수 있어. 하지만 언니가 선물로 준 책에 끔찍한 말을 써 놓는 사람에게 그러지 말라고 맞서 주는 사람이 아니라면, 난 친구 할 수 없어. 진심이야." - 스파크 245쪽

"다르다는 건 좋은 거라고 생각해요. 누구도 해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말이에요.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저마다 다 달라요. 그리고 어떤 분들은 제가 이 일에 너무 심하게 요란을 떤다고 생각하고 계신다는 거, 저도 알아요. 음,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이 있다면, 한 말씀 드릴게요. 자폐를 가진 여자애들은요, 아주 집요해요." 스파크 258쪽.

"여러분은 뇌 기능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저는 그렇지 않은 자폐지만, 한 가지는 분명해요. 우리는 다른 점보다는 비슷한 점이 더 많아요." 스파크 259쪽


"마녀사냥" TV 프로그램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일어난 마녀사냥을 말합니다. 누구라도 이 단어의 의미를 알고 있습니다. 객관적인 사실과 역사 배경, 비교적 정확한 사실을 알고 싶어서 네이버에서 검색해 보았습니다. 충격적이었습니다. 몇몇 사실만 스크랩했습니다. 

마녀사냥은 15세기 초부터 산발적으로 시작되어 16세기 말~17세기가 전성기였다. 당시 유럽 사회는 악마적 마법의 존재, 곧 마법의 집회와 밀교가 존재한다고 믿고 있었다. 초기에는 희생자의 수도 적었고, 종교 재판소가 마녀사냥을 전담하였지만 세속 법정이 마녀사냥을 주관하게 되면서 광기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교도를 박해하기 위한 수단이었던 종교 재판은 악마의 주장을 따르고 다른 사람과 사회를 파괴한다는 마법사와 마녀를 처단하기 위한 지배 수단으로 바뀌게 되었다. 17세기 말 마녀사냥의 중심지였던 북프랑스 지방에서는 3백여 명이 기소되어 절반 정도가 처형되었다. 마녀사냥은 극적이고 교훈적인 효과 덕분에 금방 번졌고, 사람들의 마음을 현혹시켰다.

1582년 바이에른 어느 백작의 한 작은 영지에서 한 명의 마녀가 체포되었다. 이 마녀의 체포에 연속으로 48명이 마녀로 낙인찍혀 화형 당하였다. 1587년 도릴 지방의 약 200여 촌락에서 1587년부터 이후 7년간 368명의 마녀가 적발되어 화형 당하였다. 1590년 남독일의 소도시 네르도링켄에서 시장의 제안에 의하여 시의회는 거리를 나돌아다니는 마녀를 철저히 일소하도록 결의하였다. 이후 3년간 32명의 마녀가 화형 또는 참수되었다.

1590년 소도시 에링켄에서 65명의 마녀가 처형되었고, 1597~1676년에 197명의 마녀가 화형 당하였다. 소소크만텔 승정령(僧正領)에서는 1639년에 2,428명, 1654년에는 102명이 처형되었다. 오늘날 오스트리아 영토가 된 스타이엘마르크 지방에서 1564~1748년에 1,849명이 소추되어 1,160명이 사형에 처해졌다. 나노수 지방에서는 1629년부터 4년간 2,255명이 마녀로 소추되었고, 뷔르튄겐 지방에서는 1633년 이후 3년간 11명이 처형되었다.

튜링겐 숲에 인접한 게오르겐탈이라는 인구 4천 명에 불과한 작은 도시에서 1652~1700년에 64회의 마녀재판이 실시되었다. 반베르크 승정령에서는 1627년 이후 4년간 화형 당한 마녀가 285명이었고, 그 이후 30년에 걸쳐 이 재판소에 계류된 마녀재판은 900건을 넘었다. 이 승정령의 인구는 겨우 10만 명을 넘지 않았다.

뷰르스부르크 승정령에서는 1623~1631년에 화형 당한 마녀가 900명에 달하였다. 1627년부터 이후 연간 29회의 재판에서 화형 당한 157명의 희생자를 보면 잡다한 연령과 계급, 직업의 사람들이 혼재해 있었다. 시의회 의원, 고급 관리의 부인, 시의회 의원의 처자, 그 지방의 가장 아름다운 자매, 8, 9, 12세의 아이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후루다에 살고 있는 바루다세르 후스라는 마녀재판관은 19년간 700명의 마녀를 화형 시켰는데, 자신의 일생 동안 1천 명을 처형하기를 소원하였다고 한다. 로트링겐에 살고 있던 니콜라스 레미라는 사람도 재직 15년간 화형 시킨 마녀가 900명에 달한다고 하였다.

마녀사냥의 물결은 15세기 이후 이교도의 침입과 종교개혁으로 분열되었던 종교적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다. 마법과 마녀는 그 시대가 겪었던 종교적 번민에서 탈출하는 비상구였던 동시에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이러한 종교적 배경과 함께 마녀사냥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마녀사냥 ]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길고 복잡한 이야기에서 일부만 발췌한 내용입니다. 충격적이었습니다. 이 길고 긴 내용을 한 줄로 요약해 두었더라고요. 그 한 줄이 더 충격적이었을 뿐 아니라 인류의 민낯을 까발리고 있었습니다. 

"15세기 이후 기독교를 절대화하여

권력과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종교적 상황에서 비롯된 광신도적인 현상."

참고로 저는 개신교 목사입니다. 이 글을 보는 순간 낯이 뜨뜻해졌습니다. 역사 속에서 일어난 기독교의 부끄러운 면면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입니다. 저 문장에 담겨 있는 '절대화', '권력과 기득권 유지', '광신도'와 같은 단어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참된 기독교가 아닐뿐더러, 예수의 뒤를 따르는 길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청소년 소설 스파크 서평에 마녀사냥 이야기를 이렇게나 잔뜩 쏟아놓는 것은 이 책이 그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입니다. 저자 엘 맥니콜이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사람입니다. 소설 속 주인공 아델린(아델린은 '애디'라 불리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역시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사람입니다.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자녀나 가족을 가진 사람이라면 자신이 자폐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다면 '마녀사냥'이란 단어가 남의 이야기로만은 들리지 않을 겁니다. 부끄럽고 어이없게도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사람을 볼 때면 뭔가 다른 종류의 사람인 냥 생각하고 대합니다. 비정상적이라고 생각하고, 불쌍하다는 생각이 앞섭니다. 뇌가 정상(이런 단어를 쓰는 것조차 조금은 불편합니다)적으로 작동하지 못하고 조금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일 따름인데, 우리는 마치 자폐 스펙트럼을 질병으로 생각합니다. 시간이 지나고 어른이 되면 자폐 스펙트럼이 나을 수 있다는 식으로 생각하며 우리의 무지함을 쏟아내기도 합니다. 




주인공 애디는 남다른 청각과 시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주 작은 소리도 크게 들리지요. 어떤 것은 너무나 자세하게 보여서 느리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요. 글쎄요. 어떤 면에서는 초능력이 가깝지 않나 생각해도 지나친 표현은 아닌 것 같아요. 시력이나 청력이 나쁜 분이라면 이 능력이 대단히 부러울지도 모르겠습니다. 

애디 주변에는 애디를 이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무런 편견 없이 친구로 다가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애디를 이해하고 애디가 가진 능력과 장점에 시선을 맞추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면 어떤 사람은 이해하려는 노력을 조금도 기울이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을 중심에다 놓고 자신과 다른 애디를 나쁜 시선을 봅니다. 자기 마음대로 해석해 버립니다. 심지어 놀리기도 하고 괴롭히기도 합니다. 애디는 견디고 참아냅니다. 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결국엔 자기 목소리를 찾고, 목소리를 냅니다. 다름은 틀림이 아니라고, 다양하기 때문에 더 아름다운 것이라고, 서로 존중하는 삶이야말로 사람이 마땅히 살아가야 할 삶이라고 말입니다. 


자폐 스펙트럼을 안고 태어난 애디는 늘 다른 사람의 따가운 시선을 받습니다. 무시당하기 일쑤였고, 환자 취급을 당할 때도 있었습니다. 남과 다르다는 이유 하나, 독특하다는 이유 하나 때문입니다. 애디가 마녀사냥을 당한 사람에게 관심을 갖게 된 배경이자 이유입니다. 남과 다르다는 이유 하나로 마녀로 몰려 온갖 비난과 수모를 겪고, 심지어 목숨까지 잃은 그들에게서 자신을 보았으니까요. 

애디는 자신이 사는 마을에서 자행된 부끄러운 역사를 알리려고 합니다. 마녀사냥의 희생자를 추모하는 기념비를 세우고, 더 이상의 차별과 폭력이 없는 세상을 꿈꾸었습니다. 이 일이 얼마나 많은 반대를 겪어야 했을지, 얼마나 무겁고 심각한 편견에 시달렸을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애디는 이 모든 편견과 난관에도 마녀사냥 희생자를 기리는 기념비 건축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포기할 수 없으니까요. 




소설을 읽으면서 부끄러웠습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편견이 생기고, 한 번 들러붙은 편견은 쉽게 떨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굳은살처럼 더 딱딱해지기도 합니다. 어쩌면 나에게 이런 편견과 왜곡된 시선이 있다는 것조차 모르는 경우도 적지 않을 테니까요. 

"다름은 틀림이 아니다"라는 아포리즘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기억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더 깊은 열정으로 피어올라야 할 아포리즘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여러 가지 문제를 끌어안고 살아가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나와 다르다는 이유 하나로 차별하거나 차등한다는 것은 지나친 오만과 독선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내 생각, 내 뜻, 내가 가진 기준에 다른 사람을 욱여넣는 일은 독재와 독선에 지나지 않습니다. 물리적인 폭력이 아닐지 몰라도 그 어느 폭력에도 뒤지지 않는 잔인한 폭력임에 틀림없습니다. 


조금이라도 더 부드럽고 넓고 열린 마음을 갖기 위해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호연지기랑 청소년 시절에만 외쳐야 할 단어가 아닌 것 같습니다. 마음을 키워가고 다름을 다름으로 존중할 수 있는 용기를 길러가는 일이야말로 보다 나은 세상을 위해 우리가 품어야 할 높고 거룩한 뜻이 아닐까 싶습니다. 

여기에 방향성을 두고 살아갈 때 비로소 또 다른 마녀사냥이 일어나는 일을 막을 수 있을 테니까요. 차별과 차등, 분열과 갈등으로 점철된 우리의 부끄러운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을 수 있을 테니까요. 성장소설 스파크를 읽으며 나의 부끄러운 모습과 우리 사는 세상의 부족한 부분을 직면할 수 있었습니다. 다름이라는 특징을 가진 분이라면 꼭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남과 다른 특징을 가지고 태어나 살아가난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도 이 책을 꼭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다양성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우리가 꿈꾸고 바라고 만들어 가야 할 세상의 모습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이해하게 될 테니까요. 



몇 해 전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청소년이 모든 용기를 다 끌어내 법정에 서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변호사가 되길 꿈꾸지만 자신은 변호사가 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청소년. 하지만 정의와 공의를 세우기 위해,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을 변호하기 위해 모든 공포와 두려움에 맞서 법정으로 향하는 자폐 청소년의 이야기를 담은 가슴 벅찬 영화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스파크를 읽고 난 후 영화 "증인"을 함께 보시면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사람에 대한 우리의 잘못된 시선과 편견을 바로잡는데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영화 "증인"도 즐겁게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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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만나러 왔니? 동시만세
염연화 지음, 서미경 그림 / 국민서관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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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에서 자랐습니다. 산과 바다가 어우러진 시골에서 자라서인지 제법 나이가 든 지금도 여전히 자연을 좋아합니다. 그때의 이야기가 마음 여기저기에 흩뿌려져 있고, 추억하기도 합니다. 조금 고른 언어로 표현했지만 쉽게 말해 촌에서 자란 촌놈입니다. 그래서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시골에서 태어난 작가 염연화. 그녀의 마음을 가득 채운 추억과 아름다움을 소복하게 담은 동시집 [나를 만나러 왔니?]를 만났을 때 참 반가웠습니다.








곱게 담아놓은 언어는 마음까지 곱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시를 읽는 이유겠지요. 동시라면 더 말할 것이 없습니다. 동시를 읽으면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부드러워집니다. 포근해집니다. 나에게도 이런 생각을 했던 때가 있었지... 나도 한때는 어린아이였었지...라는 생각이 저절로 듭니다.



답답한 세상, 마음이 무뎌지고 퍽퍽해지는 세상,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간격이 생기고 거리가 멀어지는 세상, 돈이라면 무엇이든 하는 세상을 살다 보니 상상력이 쪼그라듭니다. 인간성이 사라집니다. 언어가 거칠어지고 생각이 투박해집니다.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우리 모두가 겪는 일입니다. 이런 시간을 보내고 있다면 동시를 읽어야 할 때입니다. 여기서 동시 한 편 소개하고 싶습니다. "불똥 튀겠다"라는 제목의 동시입니다.



불똥 튀겠다


아빠와 다툰 뒤

문을 쾅 닫고

안방에서 나오는 엄마


두 눈에

불꽃이 활활


큰일 났다!


일주일째 청소 안 한 내 방

엉망진창인데


밀린 학원 숙제

하나도 안 했는데





이 시를 읽으면서 나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습니다. 가끔 부모님이 다투시면 마음이 오그라들었던 기억. 슬그머니 방으로 들어가 책을 펼쳤던 기억(혼나지 않으려는 뻔한 수작)이.... 동시에 나의 아들과 딸의 얼굴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아내와 갈등하고 다투고 나면 마음이 움츠려들고, 불편해지고, 두려웠을 나의 아들과 딸. 아내의 두 눈에 불꽃이 활활 타오르게 만들었던 나의 모습이 겹치기도 했습니다.



부끄럽기도 하고, 아프기도 했습니다. 희한하게 나의 어린 시절 기억은 왜곡된 것인지 그것마저 소중하게 다가오기도 했습니다(나의 아들딸도 나와 같은 마음을 갖게 되길 바라는 도둑놈 심보까지 발동했습니다). 동시를 읽으면서 마음이 보들보들해졌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들과 딸에게 동시집을 슬그머니 내밀었습니다. 아들은 무관심 반면 딸은 호기심 뚝뚝. 동시집을 열어보고 읽어보고 페이지마다 수를 놓은 그림까지 꾹꾹 눌러 담아 보았습니다. 자기 마음을 닮은 시를 찾아냈는지, 자기 생각을 담아낸 시어를 골라냈는지 궁금합니다. 질문해 보아도 묵묵부답. 그마저 귀엽고 사랑스럽게 보이는 것은 아빠의 마음이겠지요.



염연화 시인의 동시를 따라가면서 나의 어린 시절이 많이 떠올랐습니다. 아궁이에서 소 여물 끓이던 일과 잉걸불에 군고구마 구워 먹던 일까지. 동시가 기억 저 너머에 숨어 있던 추억을 돋아나게 해주어서 더욱 고마웠습니다. 염연화 시인의 동시집 [나를 만나러 왔니?], 마음 텁텁하신 분, 자녀와 함께 사시는 부모님에게 즐겁게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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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친코 2 - 개정판 코리안 디아스포라 3부작
이민진 지음, 신승미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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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일본인일까? 한국인일까?

그 경계선 어디쯤에 속한 사람일까?

일본의 독특한 정서와 문화,

그 안에서 나고 자란 한국 사람이 겪을 수밖에 없는

비극과 회복 이야기.

그들의 삶을 통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이야기를 엿보게 하는 명품 소설 [파친코 2]


파친코. 일확천금을 노리거나 두려움과 외로움을 벗어나기 위해 찾거나, 조작과 조장을 해서라도 움켜쥐려는 마음을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곳일 게다. 파친코를 찾는 사람의 마음 그 깊숙한 곳을 파헤치는 소설 파친코는 파친코라는 제목을 달고 있지만 실상은 비극으로 읽히는 한 가족의 이야기이며, 그 한 가족이 대표하는 시대와 문화를 가로지르는 아픔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일본을 좋아하지 않는다. 원색적으로 표현한다면 일본을 향한 거부감과 불편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영화 [항거]를 보면서 일본에 대한 미운 마음은 한 뼘은 더 깊어지고 자란 것 같기도 했다. 역사를 공부하고 읽을 때면, 특별히 일제강점기의 참상을 대면할 때면 불편한 마음의 농도는 고도로 농밀해진다. 역사를 해석하는 저들의 시선은 도대체 왜 그따위인지 이해하기 어렵기도 하다. 어쩌면 나 역시 왜곡과 편향된 시선의 소유자일지도 모른다. 이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면서도 여전히 나는 일본이 불편하다. 




소설 파친코를 읽으면서 뭉뚱그려진 나의 시선은 일본이라는 나라에서 나고 자란 한국 사람의 이야기와 그들의 삶의 무게로 옮겨졌다. 일본에서 나고 자랐지만 그들은 여전히 일본인이 아니다. 일본인으로 간주되지 않고 받아들여지지도 않는다. 색안경을 끼고 조선인을 바라보는 일본인의 마음은 어떨까? 그런 따가운 시선과 편견 속에서 성공적인 삶이란 도대체 어떤 삶일까? 제대로 된 직장조차 잡을 수 없었던 사람이 적지 않았고, 그래서 파친코를 운영할 수밖에 없었으며, 파친코를 운영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쁜 사람, 야쿠자로 인식되어버린 저들의 삶의 무게는 어느 정도이며, 그들의 세상은 도대체 어떤 색깔일까. 

사람의 삶이란 참 복잡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삶을 살아가지만 여전히 삶이다. 그 안에서도 여전히 사랑이 있고 미움과 시기와 질투가 있으며, 동경과 그리움은 여전하다. 아니 어쩌면 삶의 무게가 무겁고 그들의 삶의 배경이 어두침침하기에 삶은 더 짙은 여운을 남기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떻게 이렇게나 사실적으로 게다가 깊은 시선으로 이들의 삶을 담아냈는지 궁금했다. 책 맨 마지막에 덧붙여 놓은 감사의 글을 읽으면서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작가 이민진은 1989년에 이 이야기의 착상을 얻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예일대학교에서 초청 강연을 받은 한 선교사로부터 조선계 일본인(자이니치-일본에 머무르고 있는 외국인 거주자라는 뜻을 가진 일본어이다)의 이야기를 들으며 착상된 이야기는 더 깊이 뿌리를 내렸다. 

결혼 후 남편이 도쿄의 일자리를 제안받았고 이민진은 남편과 함께 일본으로 향했다. 일본에 거주하는 동안 그간 자신의 마음에 뿌리박은 이야기를 다시금 돌아보게 되었고, 처음부터 방향이 잘못되었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쓰고 고치기를 수없이 반복하면서 거의 30여 년이 지난 후에 소설 파친코는 세상에 태어났다. 30년 넘는 시간을 품에 안고 다녔고, 일본에 살면서 온몸으로 자이니치의 삶을 톺아보면서 쓰고 고치기를 반복했으니 깊어질 수밖에 없고 날카로워질 수밖에 없었을 게다. 그렇게 우리에게 찾아온 소설 파친코는 읽는 이의 생각과 마음을 찌르고 파고든다. 경계인의 삶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라면, 그 삶을 조금이라도 맛본 사람이라면 공감할 수밖에 없고, 이해할 수밖에 없는 방식으로 다가와 마음을 무장해제시킨다.




지구촌에는 나라를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사람이 많다. 타인에 의해 강제로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도 적지 않다. 터잡고 살아가는 곳에서 거주민으로 받아들여지는 경우는 흔치 않다. 어느 곳에 자리 잡든지 반강제로 자이니치가 되고 만다. 아무리 그곳에 오래 살았다고 해도 여전히 자이니치로 살아가는 사람도 많다. 일본이 유별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쩌면 우리나라는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이주민 노동자나 국제결혼을 통해 이 땅에 자리 잡은 사람을 향한 나의 시선 우리의 시선은 부끄러울 정도로 편협하고 왜곡되어 있다는 것은 비밀이 아니다. 

나는 가끔 생각한다. 내가 자이니치가 아닐까라고. 나는 한국에서 태어났고 5년 정도 미국에서 산 시간 외에는 한국에서 살고 있다. 미국에 살 때도 나는 한국 사람이라는 의식이 분명했다. 전쟁의 소문이 무성할 때 아내에게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여보, 전쟁 나면 당신과 애들은 이곳에 있어. 난 한국에 다녀올게" 내가 뭐라고, 나 한 명 때문에 전쟁의 승패가 좌우되는 것도 아닌데 나는 내 민족이 있는 한국에 가서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뼛속 깊이 한국 사람이다. 그런데도 종종 나는 스스로를 자이니치로 느끼곤 한다. 이상한 일이다. 


이 책을 읽는 동안 곳곳에 예수와 교회 이야기가 등장한다. 내가 자이니치라고 느끼는 결정적인 이유가 거기에 있다. 예수 믿는 사람으로 살아가면 누구나 느끼는 바가 있다. 피곤함이다. 예수 믿으면 이상하게 피곤함을 느낀다. 코로나가 우리 일상을 빼앗아갔다. 교회가 시발점이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교회는 도매금으로 매도당했다. 코로나 시대 속에서 빠르게 온라인 예배로 전환했지만 여전히 예배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손가락질 당하고 비난당하기 일쑤다. 성경을 보면 기가 막힌 말씀이 있다.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면 박해받는다는 말씀과 세상이 너희를 미워해도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는 말씀이 그것이다. 

자이니치로 살아가면 미움받는다. 손가락질 당할 때가 있다. 예수쟁이로 사는 것도 다르지 않다. 이 땅에 발 딛고 살아가지만 이 땅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는 정체성. 경계선에 머무는 삶이란 피곤할 따름이다. 소설 파친코는 경계인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삶을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피곤하고 어렵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사랑하며 살아가야 할 이유가 있다는 것,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 편견 없는 세상을 동경하고 사람답게 살아가는 삶을 바라보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꼭 종교인이 아니어도 다르지 않다. 우리는 지구에 발 딛고 살아간다. 지구의 유구한 역사에 비추어보면 우리는 자이니치이다. 하지만 눈치 보며 사는 자이니치, 차별받는 자이니치, 편견의 시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이니치가 아니길 바랄 따름이다. 우리의 시선을 바꿀 수 있다면 우리는 자이니치로 살지만 꽤나 근사한 노매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 부조리한 세상, 그 안에서 겪는 피곤함과 안타까움은 더 나은 삶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표지판일지도 모를 일이므로. 

소설 파친코는 드라마로 나왔다. 아직 보지 않았지만 등장인물을 상상하며 읽었다. 영상으로는 어떻게 담아냈을지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지 궁금하다. 기회가 닿으면 소설을 떠올려보면서 감사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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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 허풍담 5 - 휴가
요른 릴 지음, 지연리 옮김 / 열림원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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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 남자들이 유머 코드가 궁금하세요?

허풍 심한 남자들이 세상이 궁금하세요?

그렇다면 북극 허풍담을 읽으실 때입니다.


처음엔 낯설었습니다. 1권부터 읽은 것이 아니라 느닷없이 5권째부터 읽어서 그런가 싶었습니다. 읽다 보니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재밌기까지 했으니 1~6권 시리즈 중 어느 것을 먼저 읽는다고 해도 큰 어려움은 없을 것 같습니다. 바로 북극 허풍담 시리즈입니다.




북극 허풍담이지만 허풍치지 않고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덴마크식 농담일까? 추운 극지방 가까운 곳에 사는 사람의 일상에서 이런 농담과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라는 상상까지 겹쳐서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소설이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현실을 담아낸 것인지 헷갈리기도 했습니다. 아무렴 어때요. 재밌게 읽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 아니겠습니까.

무엇보다 모든 소설이 사람 사는 세상 풍경을 묘사하기도 하고, 고발하기도 하고, 비유와 은유로 은근히 드러내기도 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북극 허풍담 역시 허풍이 가미된 이야기지만 덴마크와 북유럽, 또는 북극 지방을 살아가는 사람의 문화와 생활방식과 사고방식을 풍자적으로 담아냈으리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발견한 점은 이 농담과 이 분위기와 정서가 극지방을 사는 사람의 것일까 아닐까가 아니었습니다. 이 이야기가 너무나 사실적으로 남자들의 이야기처럼 읽힌다는 점입니다. 일단 등장인물이 남자 중심입니다. 물론 여성이 나오기는 하지만 중심축에서 비켜나가 있습니다. 그만큼 남자의 이야기로 그만큼 남자의 이야기로 가득하다는 뜻입니다.

어처구니없고 황당한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격한 공감과 손뼉 치며 맞장구칠 수밖에 없는 대목들이 나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 몇몇을 열거해 본다면 파이프 담배 하나 때문에 별별 짓을 다하다 결국 주먹다짐까지 하고 서로 잡아죽일 듯 싸운 남자 이야기. 화해하는 방식도 빼놓을 수 없죠. 화해하는 방식도 심할 정도로 남성미 뚝뚝 떨어집니다(꿀이 떨어지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주먹다짐이죠. 서로 잡아죽일 듯 주먹다짐을 하고 더 이상 움직일 여력조차 없을 만큼 싸운 후에 언제 그랬냐는 듯 화해합니다. 이 지점은 여자로서는 도무지 상상도 할 수 없는 남자들의 이야기이자 허풍처럼 들리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어요.

목축업을 개척하는 남자들의 이야기도 읽다 보면 배꼽을 잡을 수밖에 없습니다. 소를 잡으러 갔다가 소 흉내나 내고 있는 모습이라니. 아무 준비 없이 일단 저지르고 보는 남자의 단면을 보여주는 이야기 중 하나입니다. 느닷없이 휴가를 떠나는 이야기나, 스키를 타고 길을 가다 거의 죽을 뻔한 이야기, 혼자서는 해결할 수 없는 은밀한 부분을 해결하기 위해 힘을 모으는 남자들의 이야기, 어울리지 않게 뜨개질을 하는 남자와 그 남자에게 얽혀 있고 숨어 있는 입을 다물 수 없는 무용담까지. 북극 허풍담은 오롯이 남성의 세상을 탐구하고 탐험하며 소개하는 소설로 다가왔습니다. 허풍과 진지함과 유머가 절묘하게 뒤범벅 댄 채로...




처음엔 호기심에 이끌리며 읽었습니다. 두 번째는 남자 이야기에 공감하며 읽었습니다. 세 번째는 좀 더 각별하게 다가온 깨우침입니다. 소설에 등장하는 남자들이 하나같이 큰 욕심이 없다는 점입니다. 대단한 계획을 세우고 거창한 일에 도전하지 않습니다. 그저 자신이 살아가는 자리에서 즐겁게 살아갈 뿐입니다. 자신이 살아가는 자리를 사랑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과 진지하면서도 유쾌한 관계를 맺고, 가진 것이 얼마든 그것에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의 이야기로 읽었습니다.

소탈함과 단출한 멋을 재발견하게 해준 소설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 같습니다. 단순하고 만족할 줄 알며 주변의 소소한 것(우리가 일상이라 부르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이들은 말도 안 되는 기후와 지독한 외로움을 뚫어냅니다. 이런 삶을 추구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많아진다면 적어도 그 사람이 사는 곳의 풍경은 지금처럼 욕심과 이기심에 찌든 모습은 아닐 거란 확신도 생기더군요.




북극 허풍담을 소개한 어느 글귀가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읽다 보면 전권을 다 구매하게 될 것이라는 소개 글입니다. "설마 그렇기까지야 하겠어!"라는 것이 저의 첫 소감이었습니다. 책을 다 읽고 난 후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궁금하거든요. 재밌기도 하고, 우리 삶을 단순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만들어 주기도 하고요(이것 역시 통상적인 의미에서 남자 이야기, 남자의 시선이라 생각합니다).

소탈하고 털털하게 사는 남자를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개인적으로 딱 제 취향입니다. 복잡한 세상 속에서 복잡한 수 싸움과 계산으로 자판을 두드리지 않고, 온갖 계획을 세우는 일에 진빼지 않고 소박하고 소탈하고, 작은 것에 만족할 줄 알면서도 무용담을 가진 삶을 사는 남자라면 충분히 매력적이라 생각합니다. 소설을 읽으며 별별 생각을 다해보았습니다. 어려운 말 아닙니다. 읽어도 좋을 좋은 책이란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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