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친코 2 - 개정판 코리안 디아스포라 3부작
이민진 지음, 신승미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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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일본인일까? 한국인일까?

그 경계선 어디쯤에 속한 사람일까?

일본의 독특한 정서와 문화,

그 안에서 나고 자란 한국 사람이 겪을 수밖에 없는

비극과 회복 이야기.

그들의 삶을 통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이야기를 엿보게 하는 명품 소설 [파친코 2]


파친코. 일확천금을 노리거나 두려움과 외로움을 벗어나기 위해 찾거나, 조작과 조장을 해서라도 움켜쥐려는 마음을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곳일 게다. 파친코를 찾는 사람의 마음 그 깊숙한 곳을 파헤치는 소설 파친코는 파친코라는 제목을 달고 있지만 실상은 비극으로 읽히는 한 가족의 이야기이며, 그 한 가족이 대표하는 시대와 문화를 가로지르는 아픔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일본을 좋아하지 않는다. 원색적으로 표현한다면 일본을 향한 거부감과 불편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영화 [항거]를 보면서 일본에 대한 미운 마음은 한 뼘은 더 깊어지고 자란 것 같기도 했다. 역사를 공부하고 읽을 때면, 특별히 일제강점기의 참상을 대면할 때면 불편한 마음의 농도는 고도로 농밀해진다. 역사를 해석하는 저들의 시선은 도대체 왜 그따위인지 이해하기 어렵기도 하다. 어쩌면 나 역시 왜곡과 편향된 시선의 소유자일지도 모른다. 이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면서도 여전히 나는 일본이 불편하다. 




소설 파친코를 읽으면서 뭉뚱그려진 나의 시선은 일본이라는 나라에서 나고 자란 한국 사람의 이야기와 그들의 삶의 무게로 옮겨졌다. 일본에서 나고 자랐지만 그들은 여전히 일본인이 아니다. 일본인으로 간주되지 않고 받아들여지지도 않는다. 색안경을 끼고 조선인을 바라보는 일본인의 마음은 어떨까? 그런 따가운 시선과 편견 속에서 성공적인 삶이란 도대체 어떤 삶일까? 제대로 된 직장조차 잡을 수 없었던 사람이 적지 않았고, 그래서 파친코를 운영할 수밖에 없었으며, 파친코를 운영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쁜 사람, 야쿠자로 인식되어버린 저들의 삶의 무게는 어느 정도이며, 그들의 세상은 도대체 어떤 색깔일까. 

사람의 삶이란 참 복잡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삶을 살아가지만 여전히 삶이다. 그 안에서도 여전히 사랑이 있고 미움과 시기와 질투가 있으며, 동경과 그리움은 여전하다. 아니 어쩌면 삶의 무게가 무겁고 그들의 삶의 배경이 어두침침하기에 삶은 더 짙은 여운을 남기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떻게 이렇게나 사실적으로 게다가 깊은 시선으로 이들의 삶을 담아냈는지 궁금했다. 책 맨 마지막에 덧붙여 놓은 감사의 글을 읽으면서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작가 이민진은 1989년에 이 이야기의 착상을 얻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예일대학교에서 초청 강연을 받은 한 선교사로부터 조선계 일본인(자이니치-일본에 머무르고 있는 외국인 거주자라는 뜻을 가진 일본어이다)의 이야기를 들으며 착상된 이야기는 더 깊이 뿌리를 내렸다. 

결혼 후 남편이 도쿄의 일자리를 제안받았고 이민진은 남편과 함께 일본으로 향했다. 일본에 거주하는 동안 그간 자신의 마음에 뿌리박은 이야기를 다시금 돌아보게 되었고, 처음부터 방향이 잘못되었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쓰고 고치기를 수없이 반복하면서 거의 30여 년이 지난 후에 소설 파친코는 세상에 태어났다. 30년 넘는 시간을 품에 안고 다녔고, 일본에 살면서 온몸으로 자이니치의 삶을 톺아보면서 쓰고 고치기를 반복했으니 깊어질 수밖에 없고 날카로워질 수밖에 없었을 게다. 그렇게 우리에게 찾아온 소설 파친코는 읽는 이의 생각과 마음을 찌르고 파고든다. 경계인의 삶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라면, 그 삶을 조금이라도 맛본 사람이라면 공감할 수밖에 없고, 이해할 수밖에 없는 방식으로 다가와 마음을 무장해제시킨다.




지구촌에는 나라를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사람이 많다. 타인에 의해 강제로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도 적지 않다. 터잡고 살아가는 곳에서 거주민으로 받아들여지는 경우는 흔치 않다. 어느 곳에 자리 잡든지 반강제로 자이니치가 되고 만다. 아무리 그곳에 오래 살았다고 해도 여전히 자이니치로 살아가는 사람도 많다. 일본이 유별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쩌면 우리나라는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이주민 노동자나 국제결혼을 통해 이 땅에 자리 잡은 사람을 향한 나의 시선 우리의 시선은 부끄러울 정도로 편협하고 왜곡되어 있다는 것은 비밀이 아니다. 

나는 가끔 생각한다. 내가 자이니치가 아닐까라고. 나는 한국에서 태어났고 5년 정도 미국에서 산 시간 외에는 한국에서 살고 있다. 미국에 살 때도 나는 한국 사람이라는 의식이 분명했다. 전쟁의 소문이 무성할 때 아내에게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여보, 전쟁 나면 당신과 애들은 이곳에 있어. 난 한국에 다녀올게" 내가 뭐라고, 나 한 명 때문에 전쟁의 승패가 좌우되는 것도 아닌데 나는 내 민족이 있는 한국에 가서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뼛속 깊이 한국 사람이다. 그런데도 종종 나는 스스로를 자이니치로 느끼곤 한다. 이상한 일이다. 


이 책을 읽는 동안 곳곳에 예수와 교회 이야기가 등장한다. 내가 자이니치라고 느끼는 결정적인 이유가 거기에 있다. 예수 믿는 사람으로 살아가면 누구나 느끼는 바가 있다. 피곤함이다. 예수 믿으면 이상하게 피곤함을 느낀다. 코로나가 우리 일상을 빼앗아갔다. 교회가 시발점이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교회는 도매금으로 매도당했다. 코로나 시대 속에서 빠르게 온라인 예배로 전환했지만 여전히 예배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손가락질 당하고 비난당하기 일쑤다. 성경을 보면 기가 막힌 말씀이 있다.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면 박해받는다는 말씀과 세상이 너희를 미워해도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는 말씀이 그것이다. 

자이니치로 살아가면 미움받는다. 손가락질 당할 때가 있다. 예수쟁이로 사는 것도 다르지 않다. 이 땅에 발 딛고 살아가지만 이 땅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는 정체성. 경계선에 머무는 삶이란 피곤할 따름이다. 소설 파친코는 경계인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삶을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피곤하고 어렵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사랑하며 살아가야 할 이유가 있다는 것,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 편견 없는 세상을 동경하고 사람답게 살아가는 삶을 바라보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꼭 종교인이 아니어도 다르지 않다. 우리는 지구에 발 딛고 살아간다. 지구의 유구한 역사에 비추어보면 우리는 자이니치이다. 하지만 눈치 보며 사는 자이니치, 차별받는 자이니치, 편견의 시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이니치가 아니길 바랄 따름이다. 우리의 시선을 바꿀 수 있다면 우리는 자이니치로 살지만 꽤나 근사한 노매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 부조리한 세상, 그 안에서 겪는 피곤함과 안타까움은 더 나은 삶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표지판일지도 모를 일이므로. 

소설 파친코는 드라마로 나왔다. 아직 보지 않았지만 등장인물을 상상하며 읽었다. 영상으로는 어떻게 담아냈을지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지 궁금하다. 기회가 닿으면 소설을 떠올려보면서 감사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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