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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화
이경자 지음 / 생각의나무 / 2005년 12월
평점 :
품절
내가 굿이라고 제대로 판을 벌인 것을 처음 본 것이 아마도 <계화>의 모델이 된 나라만신 김금화 선생의 굿판이 아니었던가 싶은데 수원에서 늦은 저녁 3시간 정도 이루어졌던 굿이었다. 사실 3시간 정도는 굿 거리 중에서 짧은 것에 불과하다. 보통 굿은 새벽부터 저녁 늦은 시간까지 혹은 저녁부터 새벽까지 이루어졌다. 최소한 한나절은 보내야 굿판을 제대로 볼 수 있다고 노름마치를 썼던 진옥섭 선생이 통영 새남 오구굿판에서 이야기했던 것이 기억난다.
이 소설은 김금화라는 한 인물을 모델로 삼아서 신어미와 신애기 사이에 내림굿을 하는 장면을 담았다. 새벽부터 시작해서 늦은 저녁 신애기가 작두를 타고 신을 모시는 것까지 찬찬히 풀어내었다. 굿은 여러 거리로 나누어져 있었으나 종국에는 한 굿판으로 이어지게 마련인 모양이었다. 부르는 신 먹이는 신 대접하는 모습은 각각 달라도 결국 복을 얻고 한을 푸는 거의 연속이고 집적이었다.
이 글은 계화라는 제목으로 세상에 나왔지만 계화의 개인사적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사실 계화는 주요인물에서 한 발 물러나 있다. 그저 어머니의 시선으로 신애기 혹은 신딸이라고 불려질 지연주의 내림굿을 한다. 내림굿이라는 것은 새로 태어남이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처럼 무당도 이세상 사람이었다가 무당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계화의 이야기를 하지 않더라도 지연주의 이야기가 계화의 이야기며 영순과 덕자의 삶이 곧 계화의 삶이다.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이면서 사람이 아니고 귀신이 아니면서 귀신이어야하는 무당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신병에 걸리고 신병을 떼내는 내림굿을 하고 무당이 되기 위해 신어미 곁에서 배우는 것이 무당의 삶이다.
'巫'지를 잘 살펴 보면 사람과 사람이 사는 인세에 하늘과 땅을 연결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무당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귀신과 인간의 중계자 역할이 무당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무당이라고 하면 미신적이라고 생각하거나 괴기스럽고 타파해야할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계화>를 읽어보면 그런 생각은 잠시 접어두어도 좋을것 같다.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과 귀신의 언저리에 살면서 귀신의 억눌림과 사람의 억눌림을 그 사이에서 풀어내는 것이 무당이다.
무당은 사람의 복을 빌어준다. 사람이 잘 되기를 바라면서 굿판을 벌인다. 신병에 걸려 세상을 살아올제 다양한 경험들을 통해 세상 저 아래의 것들을 경험하고 자신과 같은 아픔을 겪을 사람들을 위해 공수를 내리는 것이다. 무당은 사람들의 어미일지도 모르겠다. 세상에 흩어진 인간들의 불안한 심리를 어루만져 사랑갈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무당의 공수 한 마디에 잠시 위안을 삼거나 기뻐하는 것은 어미니가 아이를 달래는 거과 다르지 않았다.
<계화>는 문화사적 자료로 이용될 수 있을 것 같다. 굿판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는 요즘 굿판의 순서라든지 복색 그리고 무가들이 소설 전반에 흩어져 있어 사라져버릴지도 모르는 굿판의 흔적을 붙잡아두었다. 이 소설을 읽다가 보면 음악이 생동하고 리듬감에 울렁거리는 몸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문장과 문장 속에 행간도 넉넉하여 그 사이에서 어깨춤이라도 추어도 좋을 것이다. 글을 읽으면서 언젠가 보았던 무당들의 신명으로 추는 춤이 매번 눈 앞에 삼삼였다.그 휘몰아침은 내게 전이되고 글 속에 인물들이 느꼈을 것들도 내 속으로 몰아친다.
무당의 길이 좋거나 영화롭거나 한 것은 절대 아니라는 것을 안다. 세상 사람들의 이유없는 멸시를 받아야하지만 결국은 그 사람들이 필요할 때 답을 주고 상담을 하는 존재가 무당이다. 천하다고 사회 저 밑에 존재하고 있지만 사라지지 않고 계화에게서 연주에로 이어진다. 끝없는 이어짐인 것이다. 무당으로 짊어져야 할 고뇌와 불행과 고통을 묵묵히 받아내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유전하는 것이다 . 무당은 그렇게 세상 사람들 곁에서 사람들을 보듬어낸 것이다.
언젠가 굿판을 보고 나오던 내게 기자가 물었던 적이 있다. 굿판을 어떻게 보셨나고 물었다. 재미있게 봤다고 말했던 것 같다. 굿판이 점점줄어들고 굿판이 산 사람들과 귀신들이 어울어질 판이고 산 사람들의 대동의 판이 되어야 하는 것이었으나 점점 그 자리가 좁아지고 죽어가ㅓ 공연의 형식으로 간소화되고 정례화되어 가는 것이 슬프다고 이야기하려고 했으나 하지 못했다. 이제 어쩌면 굿판도 박물관에 가서 마네킨으로 시연되는 정지 화면을 보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점점 살아있는 문화가 말라죽어간다. 생동하던 문화가 책소ㄱ으로 녹아들어 문자의 감옥에 갖혔다. 복은 나누고 한은 풀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