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길에서 나를 만나다 - 나의 야고보 길 여행
하페 케르켈링 지음, 박민숙 옮김 / 은행나무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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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길에서 나를 만나다>는 두 단어에 혹해서 읽어보기 시작한 글입니다. 두 단어는 '길'과 '나'라는 단어입니다. 길이라는 것은 인간이 이동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은 이동경로를 '길'이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뭐 항간에 사람이 가는 것이 길이다라는 카피도 있더군요. 이렇게 인간의 삶에서 길이란 것은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는가 봅니다.
 

    독일의 유명한 연예인이 병에 걸리고 그러는 동안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 충전을 하기 위해 선택한 것이 여행이었더랩니다. 즉흥적으로 결정된 여행이 도보로 <야고보의 길>을 순례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카우치 포테이토인 하페 아저씨가 길을 걷는다고 하는군요. 길에서 나를 발견하는 것이란 말은 자신을 되돌아보고 반성한다는 말로 들리는데 어떤 일들이 펼쳐지고 어떤 깨달음을 얻게 될지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사실 참 연예인답다라는 생각을 하게됩니다. 돈도 많이 벌었겠다. 도보 여행이라고 시작은 해두고 버스로 이동하고 기차를 타고 이동하고 초반에서 중반까지의 순례여행은 그다지 순례자 여행자의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갖고 있지 못한 것 같습니다. 게다가 독일에서 한 몸에 스포트라이트를 받던 우스갯소리꾼이었으니 자만심과 거만함도 베어나오는 것 같은언행이 눈에 거슬리게 나열되어 있기도 합니다.

 

   길이란 것을 걸어보신 분은 아실 것입니다만은 처음에는모든 자만심과 아집 고집으로 똘똘뭉쳐서 그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베낭도 크고 자질구레한 것들을 많이 넣어서 무겁기만 합니다. 길을 가다가 결국은 하나씩 둘씩 정말 필요한 것이 아니면 버리기 시작하고 길이 끝날 때 진정으로 가벼운 베낭을 메고 있는 자신을 만나게 되는 것과 같이 하페 아저씨도 마찬가지인가봅니다. 자만심이 가득하여 보입니다. 순례자들을 위한 숙소가 있지만 좁고 더럽고 여러사람이 사용해야한다고 싫어하며 오로지 호텔을 사용할 것을 선언합니다. 

    "이건 아니다! 나느 호텔 이외에는 용납할 수 없다. 앞으로는 계속 호텔에서 자겠다. 가난한 사람들을 흉내 내지 않겠다 한스 패터 너 자신을 찾아라 지금의 너는 네가 아니다" (89~90)라고 선언하지요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처음 길을 떠났던 사람의 기분을 느끼는 것이 순례의 도보 여행의 맛이라고 생각하는데 말입니다. 초반부터 틀려먹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직 울어보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길에서 만난 라리사가 한 마디를 거듭니다,

    "어느 때부터인가 누구나 길에서 울기 시작합니다. 길이 사람을 그 어느 때에 이르게 하죠. 그러면 그냥 서서 울부짖게 돼요. 당신도  보게 될 거에요" (97)

    아직 하페 아저씨는 길 위에서 울어보지 못해서 그런가 봅니다.

 

   하페 아저씨는 길의 중반에 이런 깨달음을 얻기도 합니다.

    " 내가 정말로 걸어서 산티아고까지 갈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남은 길은 여전히 힘들고 이 경험은 산책 정도와는 차원이 다르다. 그리고 내가 마침내 성공한다면 내 인생이 변하게 될까? 어쩌면 나는 너무나 많은 것을 기대하고 있는지 모른다! 담담함을 배워야 한다. " (107)

     담담함이라 하페 아저씨보다 먼저 길 (道)에 대해서 논했던 동양의 늙은이가 있었더랬는데 도덕경이란 글에서 길에 대해서 이런 말을 했던 것 같기도 합니다. 에너지 가득한 물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上善若水'라는 네 단어로 귀결되는 것입니다.  물이란 것이 모든 생명을 살리는 역할도 하고 모든 생명을 파괴하는 역할도 하지만 그저 평상시에는 고요하여 그 힘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으로 제 나름대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바로 물의 고요함이 사람의 심성으로 치자면 담담함이겠지요 이 담담함이 변형을 이루어내면 겸손과 겸양이란 말로 바뀌어지는 것으로 압니다. 하페 아저씨는 이제서야 길위에서 배워야 할 것이 담담함이라는 것을 알아가는 것 같습니다.

 

    길을 걷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가요?

    "내 삶에서 일어난 모든 일들이 여기 이 길에서 다시 나ㅏ나고 거기서 갈라져 나온 가지들이 지금여기서 나와 함께 걷고 있는 것처럼 보"(213)는 것이 길의 의미일까요? "나에겐 길이 마치 학교 같다. 놀면서 여러 가지를재미있게 배운다. 운이 좋으면 좋아하는 선생님을 만날 수도 있다 내가 이해를 못했거나 또는 선생님이 나빠서 어려운 것들이나 나에게 맞지않는것들은 기억하지 못한 채 사라"(257)지는 것이 길의 의미일까요 ?

 

   길을 걸으면서 가장 좋은 것은 자신을 되돌아 보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또 좋은 점은 삶의 스승을 만날 지도 몰느다는 것입니다. 옛말에 사람 셋이 가면 그 중에 한 사람은 스승이 있다고 했던가요? 하페 아저씨는 아마도 앤 양과 쉴라 아줌마와 함께 여행의 마지막을 함께 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을 것 같기도 합니다. 여러분들도 길 위를 걸으면서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헤어지면서 스스로를 찾아가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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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고통 이후 오퍼스 10
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 이후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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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어느 책인 것 같은데 아프리카 지역의 난민들 중에서 어린아이들의 사진을 찍을 때 조금 더 임팩트가 강한 사진을 얻기 위해서 연출된 사진을 찍는데 되도록이면 찍고 싶지 않지만 모금을 용이하게 하기 때문에 보도자료로 쓸 사진을 찍는다는 문장을 읽은 적이 있다. - 내 기억으로는 한비야의 <지구 밖으로 행군하라>가 틀림없다.-사진이 진실만을 말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하던 문장이었다.
 

     수잔 선생이 이 문제에 대해서 더욱 엄밀히 말하면 전쟁과 사진의 관계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 이야기했다라고 쓰는 것은 이미 이 책 나온지가 꽤 지난 탓이다. - 사진이란 사진기가 처음 만들어져서 이동성이 제한되던 때의 진실을 비추는 도구였지만 사진기가 삼각대를 버리고 이동성을 획득하면서 사진이 가지고 있던 진실성에서 벗어난다.

 

     신문에 사진이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전쟁을 알리는 역할을 하면서 사진은 사실의 전달 기능을 넘어서서 이미지의 재생산의 영역까지 확장된다. 피사체는 사실만을 이야기하지만 피사체를 보는 사람들에게는 많은 의미의 - 전쟁, 기아 , 배고픔 살육 등의  - 공포와 두려움을 생산한다. 하지만 한 가지 주의할 것은 앞에서도 말한 것과 같이 계산된 - 혹은 연출된 사진 - 사진이 생산해낸 이미지라는 것이다. 수잔 선생은 여러 전쟁의 사진의 예를 들어 이러한 가정을 논리적으로 뒷받침해준다.

 

     무감각해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이미지에 노출되면서 생소한 것을 경험할 때 문화적 충격을 겪게 되고 문화적 충격은 노출되는 횟수에 따라 차츰 무감각해지게 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사진에 노출되면 처음에는 경악하짐나 그 빈도가 많아지면 무덤덤하게 외면하고 넘어가게 되는 것이 바로 이미지에 대한 무감각이 아닐까?

 

  사진을 바라보면서 관음증을 생각하게 되는데 수잔 선생도 관음에 대해서 논하고 있다. 관음이라는 것 타인의 고통을 숨어서 지켜보면서 - 여기서 숨어서 지켜본다는 것은 직접 그 현장에 가서 피사체의 상황을 보는 것이 아니라 사진이라는 것을 통해서 본다는 의미다 - 알 수 없는 고통을 체감하면서 느끼는 어쩔 수 없는 쾌감에 대해서 대면하게 된다? 우리는 사진을 통해서 고통스럽고 괴롭운 사람들이 자신이 아니라는 것에서 안도감 획득한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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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초차 - 산과 들을 마신다
이용성 지음 / 시골생활(도솔)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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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추워진다. 날이 더우면 차 생각이 간절하지 않지만 날이 추워지면 추워지는 것과 비례하여 차 생각이 간절해진다. 아쉬운대로 인스턴트 커피나 녹차 티백이 있으면 한 잔 마시고 우려 마시는 차가 있으면 금상첨화다. 녹차도 좋고 백련잎차도 좋고 , 두충차도 좋고 보이차도 좋고 허브차도 좋다. 차라면 다 좋다.  마른 찻잎에서 베어나오는 향을 음미하는 것은.
 
    차라고 하면 이름난 차들만 생각한다. 녹차의 다양한 종류들과 중국차 홍차들이 그 대표적인 차가 아닐까? 하지만 우리 곁에는 우리가 마시는 물도 보리차라고 부를만큼 친숙한 것이 차인지도 모르겠다.차의 개념을 조금만 확대해 간다면 물에 우려내어 마실 수 있는 것이 차의 범주가 되지 않을까?
 
    <애샹초 차>를 읽어보면 이용성은 차를 만드는 사람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철에 맞는 주변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야생초들로 차를 만든다. 어떤 것들은 찌고 , 데치고 , 덖고 해서 차를 만든다. 차는 쉽게 만들 수 있다. 재료를 채취하고 ,  씻고 말리고 보관하면 된다. 히긴 말이 쉽지 쉬운 일이 하나도 없다. 꽃은 하나 하나 따야하고 적당한 시간을 맞추어야 하고 , 말릴 때 채반이나 한지에 붇지 않도록 시간이 날 때마다 아니 지키고 서서 뒤적여주어야 한다. 차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차는 탄생한다. 아  한송이 차가 탄생하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을 참고 견뎌내야 하는가?
 
    이용성은 차를 만들 때 배웠을까? 그의 글에는 과욕에 대해서 경계하고 공생을 이야기한다. 차를 만들 때 그저 즐기만큼만 만들어야 한다고 말하고, 자연은 벌레들과 함께 하는 밥상과 같아서 재료를 채취할 때 벌레들이나 곤충들이 먼저 차지하고 있으면 다른 재료를 찾는다고 했다.그는 "꽃을 채취하다가 이미 나보다 먼저 다른 곤충들이 그 자리에 앉아 꽃들과 모종의 거래를 성사시키고 있는중이라면 자리를 피해주는 것이 예의다. 그들을 힘으로 쫓아내면서까지 꽃잎을 채취한다는  차를 만드는 사람으로서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차를 만든다는 건 내가 몸으로 행할 수 있는 사람과 자연에 대한 지극한 사랑의 행위라고 나는 믿는다. 그 사랑의 과정에서 오로지 예쁘고 아름다운 생각과 행동만이 첨가되어야 한다. 욕심과 폭력이 첨가되어서는 제대로 된 차 맛이 나지 않는다(238) 고 말하는데 . 그의 마음에서 차를 한 잔 마셨을 때의 훈훈함과 그 담담한 맛이 베어나온다. 차를 만들고 차를 즐기는 사람은 차를 닮는 모양이다.
 
    이용성은 차를 마시는 것이 아니라 계절을 마시고 그 재료 자체를 마신다. 차를 마시면서 차가 담고 있던 계절의 기운과 꽃과 잎들이 가지고 있던 녹음을 즐긴다. 한 잔의 차로 계절을 즐긴다는 것 이용성은 행복한 사람이다. 우리는 차 한잔으로 자연과 마주 않기엔느 아직은 그 깜냥이 부족해 보이지만 <야생초 차>를 한 번 혹은 열 번 가량 읽으면  신선의 '도술비기'를 훔쳐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조금은 자연과 가까워질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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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와 책 - 지상에서 가장 관능적인 독서기
정혜윤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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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즐겨 읽는 사람이라면 '~~책'이라는 이름이 붙은 책이라면 한 번 쯤 눈길을 주기 마련인데 이번 침대와 책도 그 범주를 벗어나지 않고 습관적으로 골라 본다. 책에 대한 책 , 독서기라고 했다. 독서기라는 이름은 서평집의 다른 이름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서평집이라면 제법 유명한 책이 장석주의 <강철로 된 책들>이 번뜩 들긴하는데 , 딱딱하고 지난했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좋은 책은 많은 것 같았는데 책에 대한 설명과 내용에 할애된 면이 많아 지루했던 기억들이다.

 

  침대와 책은 이제까지의 서평집과는 다른 스팩트럼을 보여준다. 이런 책이 있으니 읽어봐라 식의 진행이 아니라 책 제목처럼 침대에서 읽은 책이다. 자신의 감정들의 증상에 맞게 읽은 책이라고 하는 편이 좋겠다.  천만변화의 상황에 맞는 책들이 베어나온다.

 

  '관능적'이라는 말은 의미의 전치를 치르게 될지도 모르는데 글쓴이 정혜윤의 문체가 관능적이다. 섹시하다는 그 관능적이 아니라 매력적인 문체를 가졌다는 말을 하고 싶다. 관능적이라는게 뭔가? 보고 또 보고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것이 관능적인 것이 아닐까 ?섹시하다는 것은 쉽게 질린다. 하지만 관능적이라는 것은 질리지 않는 것에 묘한 매력이 있다. 관능은 관음이 되고 정혜윤의 문체에서 베어나오는 감성의 육즙을 탐닉하게 만들어 글을 보고 또 보게 만들어낸다.

 

  정혜윤의 글은 " 누군가 내가 잘 모르는 책이야기를 하면 무관심한 척 있다가 득달같이 서점에 달려가 일단 사놓고 보는 충동적인 쇼핑광이고 그 결과 가방 속에는 온갖 잡동사니와 함께 언제나 책이 한 권씩 들어 있게 되었다. 내 자동차 바닥엔 읽고 던져놓은 책이 하도 많아서 내 차를 타려는 사람은 모두 두 발을 들고 타야하고 결국은 사람들이 내 차에 동승하는 걸 거절하게 되었다. 운전하다가 빨간 신호등에 걸려 있을 때 그 새를 못 참고 책을 읽다가 뒤차의 우렁찬 클래슨 소리에 놀란 적이 있고 (나에게만) 아주 재미있느 책을 읽다가 주위 사람들에게 맥락 없이 말해서 분위기가 썰렁해진 적도 한 두 번이 '(71~72)  아닌 상황에서 만들어진 글이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글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병적이든 병적이지 않는 관음의 기벽이 있지 않을까?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쓴 글을 읽는 것은 이미 타인의 생각을 읽는 넓은 의미에서 관음이기 때문이다. 자기의 독서에 만족하지 못할 때 ,  무엇인가 부족한 것은아닐까? 스스로 의문이 들 때 관음의 더듬이를 들이밀어 한 번쯤 읽어보면 책읽기의 지난함을 타파할 수 있을 것이다.

 

  침대에서 우리는 잠을 잔다. 하루 종일 고단했던 육신을 뉘이고 잠을 청하거나 그대로 가만히 있음으로써 태아의 자궁을 모사해내어 피로를 털어낸다. 책은 자신이 알지 못했거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글을 읽음으로써 채워준다. 책과 침대는 정신이든 육신이든 고갈된 것을 다시 채워주는 공통점이 있는 것 같다. 한 번쯤 피곤한 육신을 침대에 뉘고, 정혜윤의 <침대와 책>을 읽으면서 정신의 공허함을 채워보는 것도 즐거운 경험이 될 것이다. 감성의 피폐함 속에서 감성의 싹이 들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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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거 푸시 작가정신 소설향 20
이명랑 지음 / 작가정신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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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가을의 관통해서 겨울로 접어드는 모양입니다. 병원 뒷길을 걸었습니다. 이름없는 무성한 나무들이 푸르기도하고 일 년을 살아온 흔적인냥 떨궈내는 낙엽들 사이에 난 오솔길을 걸으며 한 여인의 삶의 전환을 이야기하는 <슈거 푸시>를 읽습니다. 떨어지는 낙엽은 밟혀서 바스라지고 사라져버릴테지만 그 낙엽은 또 다른 나무의 양분이 되겠지요
 

  <슈거 푸시>는 무엇일까요. 책에서 본 바로는 라틴 댄스의 베이직 중에 하나라고 합니다. 책에도 잘 설명되어있으니 그 문장을 한 번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 슈거 푸시(suger push) 오늘 라틴 댄스 시간에 배운 동작이다. 내 앞에 서 있는 누군가의 손바닥과 나의 손바닥을 맞댄 상태에서 그래로 팔을 쭉 뻗는다. 서로의 몸이 뒤로 밀려나간다. 이제 손바닥은 여전히 서로 맞댄 채로 팔만 가슴 옆으로 벌린다. 그러며서 서로 멀어졌던 두 사람의 몸이 다시 하나로 겹쳐진다 "(89)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화자인 소희는 "지금까지 배운 동작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작이다"고 평가를 하고 있습니다.

 

  소설의 화자인 나(소희)는 아이가 하나 있는 평범한 가정의 주부다. 정해진 생활비에서 빠듯하게 한 달 생활을 꾸려나가야 하는 일상적인 주부입니다. 아이에 치이고 가정에 치이던 나는 어느날 백화점에서 문화강좌 '라틴 댄스'를 수강합니다. 이것이 사건의 시작입니다. 소극적인 일탈이 시작된 것입니다.. 꽉 짜여진 일상에서 일주일에 한 번 마법에 걸리듯이 일상을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이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어머니와 나는 대립점에 서 있습니다. 어머니는 할머니에게서 양육되었다는 것에서부터 마음에 들지 않아하며 나의 행동에 대한 불신과 억측으로 나에 대한 생을 지배합니다. 믿음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계모보다도 더 한 , 혹은 당연히 그러하다는 듯이 딸을 믿지 않습니다. 내가 찬이라는 소위 집안 좋은 남자와 사귈 때도 보통 부모면 딸의 행복을 빌어주기 위해서라도 과거를 덮어주는 것이라고 합니다만 어머니는 과거를 찬에게 까발림으로써 나와 찬의 결혼을 일순간에 허물어트려버립니다.  어머니의 뜻에 따라 지금의 남편과 결혼을 하긴 하지만 그리 재미난 결혼 생활을 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장모님에게 예쁜 옷을 고르는 행동 , 목욕탕을 당연히 고쳐야 한다는 말을 할 때의 이유모를 미소 등은 어머니와 남편이 어쩌면 동류의 인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도 가지게 만듭니다.

 

    나는 '어떤 소유'를 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어떤 소유도 소유 나름이어서 내가 필요로 하는 '어떤 소유'에는 토악질이라는 댓가가 따르지만 '내게 필요없는 소유는'토악질'이라는 결과물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소유'란 도벽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의 도벽은 " 나는 그 허름한 구멍가게에서 호빵 대신 허기를 달래는 데는 아무 쓸모도 없는 풍선껌을 훔쳤다. 배고픔은 여전했지만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한 통의 풍선껌을 만지작거릴 때마다 손바닥을 타고 짜릿한 전율이 전해져 왔다. 추위와 배고픔에 떨면서도 나는 그 생생하고 이상한 쾌감을 놓치지 않으려고 밤이 이슥하도록 동네를 배회하고 다녔다. 내 생에 최초의 자회전이었다"이라고 고백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어떤 소유'는 심리학자들이 흔히들 이야기하는 '결여 결핍에 대한 충족'을 바라는 심리적 욕구의 물화로 읽었다면 너무 과장된 해석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허기를 달래기 위해 필요했던 찐빵이 아니라 껌을 소유하게 되면서 느끼는 아짤한 쾌감은 배고픔 즉 허기 결여의 고통까지도 잊게 만들기에 충분하게 만들었으니 말입니다. 이러한 부도덕한 충족 현상은 그 이후로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이러한 결여를 채워 줄 수 있는 온전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것은 존재하는 것일까요?

 

  채울 수 없는 존재의 일 부분을 채워 온 것이 담배였을까요? 책의 한 부분을 담배가 차지하고 있긴 합니다. 나는 매번 화장실이나 집에서 담배를 피우더라도 집 밖 멀리 있는 휴지통에 담배꽁초를 가져다 버립니다. 하지만 오롯하게 혼자일 수 있고 개인적이고 내밀한 생각을 할 수 있는 시간은 담배를 두 세 개피를 피울 때 뿐인 것 같습니다. 담배를 피운다는 이유로 이혼을 한 친구의 이야기며 , 맞담배를 피울 수 있을 것 같아 조건을 무시하고 결혼한 친구이야기가 나옵니다. 담배는 그저 기호 식품을 넘어서서 상징으로 전이를 치릅니다. 담배를 피우는 행위가 자존감과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으로 세상에 존재하게 하는 상징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유일한 자존의 방법도 남편과 일련의 남성들에 의해서 무참하게 중지 당하게 됩니다.

 

  춤을 추면서 나는 앞에서 가르치는 강사를 나비 같다고 표현합니다. 어느 순간이라도 날개를 접는 일이 없는 나비의 춤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나비 선생님은 아름다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자신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는 의미로 들립니다. 춤의 기초를 마치면서 나비 선생님은 이런 말을 합니다.

  " 춤은 내가 나 스스로에게 거는 마법이에요  (중략) 이제부터 집에서도 스텝을 밟는 것처럼 흥겹게 ! 아름답게! 그렇게 생활해보세요 나도 즐겁고 나를 바라보는 주위 사람도 즐거워져요.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까지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거 그게 바로 아름다움의 파워가 아닐까요?"(212)라고 말입니다.

  이러한 말은 있으면서도 부재하고 있는나의 어머니의 결핍을 채워주는 어머니와 같은 멘토의 역할을 하는 말을 하는 것 같아서 나는 어쩌면 어머니의 결여를 강사에게서 찾아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춤을 추는 시간은 오롯하게 혼자일 수 있고 일상에서 벗어나와 정해진 사회의 틀을 벗어나는 시간입니다만 댄스를 배우는 그 공간에서조차 많은 사람들이 만나고 서로에게 가면을 쓰고 생활하고 제 1열을 향한 암투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작용들을 볼 때 나는 일탈에서는 성공했는지 모르지만 또 다른 형태의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가정이나 라틴 댄스 시간이나 다를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아름다움은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말합니다.

  "난 어설픈 프로는 실헝 진짜 프로가 될꺼야 그때까진 이 속에 숨죽이고 들어앉아서 내 삶의 베이직을 충실하겠어 뒤꿈치로 음흉스럽게! 발끝으로 조심스럽게!"라고 말입니다. 나는 이제 달라질 것입니다. 배추애벌레가 고치가 되고 번데기가 되어 나비가 되듯이 나는 변해갈 것입니다. 변화 중에서 가장 무서운 변화는 하루 아침에 벼락 같이 이루어지는 변화가 아니라 가랑비처럼 젖어들어가는 점진적인 변화입니다. 나는 그런 변화를 자신의 마음 한 구석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점진적인 변화는 아주 쉽습니다 자 따라해보세요

  토우 , 힐 , 볼의 순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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