롱기누스의 창
아르노 들랄랑드 지음, 허지은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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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어김 없이 크리스마스는 돌아왔다. 저기 중동의 한 나라에서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 죄를 대속하고 죽었다는 한 남자는 그 후로 신의 아들이 되어 남겨진 사람들에게 영원히 기억되고 그이의 태어난날을 기억하기 위해 12월 25일을 생일날로 현재의 많은 이들이 기념한다고 한다. 바로 그날이 오늘이다.

 

사실 서른 세 해를 살다 죽은 그이가 말한 것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자주 말한 것은 아마도 사랑이 아니었을까? 불특정다수에 대한 한없이 베푸는 사랑 흔히들 아가페적 사랑이라고 하는 그것 말이다. 눈으로 보아야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을 위해 직접 모든 것을 보여주고 가버린 남자는 그 후로 아가페적 사랑의 기호가 되기보다는 변질되어 영원한 삶과 어마어마한 권능의 기호가 되었다.

 

인간들은 신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으나 과학이라는 것을 접하고 가설을 세우고 증명하는 단계를 지나고 신의 영역이라고 했던 일련의 것들을 고학과 인간의 이성을 통해 밝혀낼 수 있게되면서 또 다시 신화시대의 바베랍을 다시 쌓기 시작하는 것이다. 욕망의 극점을 향해 달려가는 인간의 모습은 유리판 위에 쌓는 모래성과 같다.

 

<롱기누스의 창>은 신과 과학과 미디어의 혼합물이다. 서른 세 해를 살다간 청년이 이 세상에 알리고 싶어했던 것이 무엇이고 과학은어떤 식으로 바벨탑을 쌓기 시작했으며 미디어는 어떤 식으로 과학을 부추겼는가라는 점에서 이 이야기를 읽어봐도 재미있을 것 같다. 소설에서 이런 무거운 주제를 이야기하게 되다니 성탄절 이벤트치고는 좀 무거운 일이 될지도 모르겠다.

 

<롱기누스의 창>을 읽다보면 한국인이라면 한 번 쯤 들어봤음직한 사람의 이름이 떠오른다. 황씨 아저씨의 캐릭터가 <롱기누스의 창>에 녹아내린 것 같다. 박이원이란 인물은 배아 복제의 권위자이지만 한국 과학계와 국제 과학계에서 축출되어 오로지 과학에 대한 호기심으로 악수스 문디의 일원이 되어 위험한 '인간복제'실험에 참가한 사람이다. 한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이 세계로 퍼져나가 일련의 굴절을 거쳐 나타나게 된 것일까?

 

서른 세 해를 살다간 청년이 골고다 언덕에서 죽음에 처했을 때 마지막으로 죽음을 확인한 창을 소재로 과학의 발전으로 청년을 아기 상태로 복제해내려고 하는 집단과 교황청의 대결이 가장 큰 포인트다. 상업성과  도덕성의 대결이라고 봐도 무방하 것 같다. 복제가 합법화된다면 개인은 개인을 무한히 복제하므로써 영생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인간은 유일한 존재라는 것이다. 대량 복제를 통해서 여럿이 존재한다는 것은 도덕적으로 결함을 드러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서 악수스 문디라는 집단이 등장하는데 사실 악수스 문디의 수장은 언론과 연관이 있는 모양이다. 어디서 많이 본 포멧이다. 007영화를 케이블을 통해 보다보면 나오는데 미디어 대박을 위해 전쟁을 일으키려는 즉 미디어의 선점을 위해 이슈거리를 스스로 생산하는 것이다. 요즘 한국에서도 많은 사건이 있었지만 원색적이고 도발적인 제목만 있고 내용은 없는 시선 끌기식의 기사들의 생산과 궤를 같이한다. 배아복제가 성공하면 미디어에 정보를 흘려 미디어 대박을 노린다는 것이다. 배아복제가 되면 특허출원을 해서 일석 이조의 득을 얻는다는 계산이 깔려 있다.

 

보통의 소설은 새로운 인간복제품이 세상에 나오는 것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거나 동귀어진의 형태로 이야기를 마무리하게 마련인데 이 <롱기누스의 창>에서는 그 복제품이 태어나 사람의 손에 키워지게 된다. 아이를 세상에 태어나게 하면서 이루어진 성선설과 성악설의 혼란이다. 아마도 작가는 성선설도 성악설도 아닌 백지론 - 내 마음대로 붙인 이름인데 길들이기 나름이라는 의미를 포함한다 환경 결정론이라고 해야하나? - 을 믿는 것 같다.  환경에 따라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서른 세해를 살다간 청년이 이 세상에 인간으로 오신 날을 기념하면서 그가 등장하는 이야기를 읽어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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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에서 여행을 멈추다 - 멈추는 순간 시작된 메이의 진짜 여행기
메이 지음 / 삼성출판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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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부터였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아주 어렸을 적부터 인도를 여행하기를 열망했다. 책을 보다가도 '인도'라는 국가명만 들어도 '인도 여행'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가슴이 벌렁벌렁거렸던 시기를 지나 지금은 그 열망의 불씨를 마음 속에 사그려트리고 살아내고 있는데 , 그 후로는 인도 여행이 내 인생의 한 가지 목표가 아니라 어떻게 들리지 모르겠지만 '인도 여행에서 자발적 국제 미아되기'가 한 목표가 되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가고 있다가 '인도에서 여행을 멈추다'라는 개인적으로 아주 매혹적인 제목의 책을 만나기에 이르렀다.
 

    인도에서 여행을 멈추었으나 인도를 갔다 왔으니 여행기라고 말하는 것이 정확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멈추었다. 여행을 멈춘다는 것은 여행을 그만둔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이 글의 저자인 메이(본명을 밝히고 있지만 메이가 더 편하다)는 여행을 멈춤으로써 자기가 여행을 통해서 찾고자 했던 것을 찾을 수 있지 않았을까? 메이에게 오르차는 람이라는 소울메이트를 만나 자신의 여행의 의미를 바꾸어버린 것이다. 메이의 친구 지니까지도 오르차에 머물면서 자신을 변화시키기에 이른다.

 

    람과 메이 그리고 지니의 이야기는 엄밀한 의미에서 '여행 에세이'의 범주에서 벗어나 있다. 그러면 어떤가? 여행기라고 어디를 꼭 여행하고 써야한다고 누가 정해둔 것도 아니니까 어딘가를 갔다가 느낀 것을 그리고 자신이 한 행동을 반추할 수 있다면 그것도 여행의 기록이 아닐까? 어디가 좋았고 어떤 풍물이 기다리고 있고 어디가 아름다운지가 중요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것은 뼈와 살을 덮은 피부의 윤기와 잘 짜여진 성형미인 혹은 인조인간의 미소와 다를 것이 없으니까 말이다. 여행에서 여행을 멈춤으로써 그 여행의 아름다운 피부가 아니라 피와 살을 정신을 살필 수 있었다는 것은 어쩌면 정말 잘 된 여행을 한 것일지도 모른다.

 

  람과 메이 그리고 지니는 오르차에서 그 마을을 부유하게하는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시작한다. 돌을 걷어내고 길을 만들고 각자가 가진 능력을 최대한 이용해서 그림을 그리고 사람들을모으면서 난관을 지나서려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마을 사람들과 그 나라 사람들에 의해서 좌절을 맛본다.'인도 사람은 인도 사람을 돕지 않는다'는 자조적인 람의 말과 그것을 넘어서려는 람의 의지는 간디의 저항과 닮아 있다.

 

    람과 메이 그리고 지니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들의 그림도 많은 비가 내리면 빗물에 씻겨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나는 기억한다. 다음에 다시 그리면 된다고 했던 람의 말을 ..... 다음에 다시 람을 어디선가 만날 수 있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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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가게
장 퇼레 지음, 성귀수 옮김 / 열림원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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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였던가? 책세상 문고 우리시대 시리즈 중 한 권의 내용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사람의 죽음에 대한 고찰이었다. 남겨진 자의 시선에서 죽음의 의미를 가늠해 보았던 책이었다. 그 전에도 지금도 그러하지만 내게 죽음이란 단어는 참 오묘한 마력을 가진 말인데 특히 '자살'이라는 말이 가지는 묘한 카타르시스는 기막히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내가 자살중독자라고는 생각하지말길 바란다. 아직 세상은 살아볼만 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에 한 사람으로 스스로를 생각하고 있으니까 죽지 못함으로 죽음을 동경한다고 쓰면 딱 좋은 표현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곳  혹은 존재하지만 알려지지 않은 곳 '잊혀진 종교'단지의 자살가게의 일가에 대한 이야기다. 자살만은 완벽하게 도와준다는 가게의 선전 성공률 100퍼센트를 자랑하면서 몇 대를 걸쳐 음침하게 영업중인데  그 가운데 알랑이 태어나면서 이야기는 시작한다.

 

    자살 , 스스로 심장활동을 정지시키는 일 ,목을 메거나 , 팔의 혈관을 자르거나 대퇴부 정맥을 자르거나 수면유도제를 과다복용하거나 , 옥상에서 뛰어내리는 정도가 아주 고전적인 자살의 방법인데 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목을 메면 목이 막혀 괴로워 참지 못하고 그 끈을 잡기가 일쑤고 동맥을 잘라보려한들 면도칼의 아픔을 참지 못해 얕게 자르면 아니한만 못하고 성공하지 못하면 피바다를 보거나 장소가 더러워지므로 욕먹기 일쑤고 그래서 사람들은 따뜻한 물에서 동맥을 귿기도 한다. 수면제를 과다복용해본들 먹다가 지치고 , 옥상에서 뛰어내려본들 나무에 걸리기도 하고 농약을 마시려고 노력해봤으나 제초제가 아니라 단순한 농약을 마셔서 배만 아프고병원비만 많이 나온다.

 

    자살가게의 자살도구들은 진화를 해서 죽음도 하나의 상품이 되었다. 죽음이란 것이 초반부에 자살도구의 아름답고 은유적인 이름들에서 죽음이란 것이 생을 마감하는 것이 아니라 한 가지 일을 마무리해야하는 것으로 그 결과물이 명확하게 나와야하는 것으로 치부되다가 후반부에 가면 죽음은 그 철학적 의미라든지 , 사무적인 의미를 벗어버리고 , 의미를 전성하여 죽음이란 칙칙한 키워드는 웃고 즐기는 하나의 문화 키워드가 되어 사람들에게 소비된다. 현대는 이미지 소비의 시대이기도 해서인지 죽음이란 추상적 이미지까지도 현실 속으로 이끌어내어 대중들에게 판매한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소설을 일고 이런 소리를 하지 않으려 했으나 이미 제목에서 예고되었듯이 하지 않고는 넘어갈 수 없을 것 같다. 가장 잔인하게 자신을 각인시키고 죽어버린 사람 이야기가 그로테스크하지만 유쾌한 이야기 속에 숨어 있으니 말이다.

 

    죽음은 스스로 죽음에 임할 사람은 자신이 죽은 다음 남겨진 자가 생각할 자신의 죽음의 의미와 무게를 생각해봐야한다. 만약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후에 남겨진 사람들이 아무런 기억도 없이 , 아무런 느낌도 없고 오히려 잘 죽었다고 생각하는 죽음이라면 스스로 죽어야 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그렇다면 위에서 언급한 가장 잔인하게 자신을 각인시키는 방법은 무엇일까? 공포와 두려움일까? 아니라면 죽음에 처한 자와 함께한 행복한 기억을 심어주는 것일까? 나는 후자라고 생각하는데 , 사람은 죽어 말이 없으나 죽지 못하고 그 사람을 기억해야하는 것은 남겨진 자들의 행복이 아니라 지독한 고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책에도 내가 생각하는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자살한 사람이 있다. 자살가게의 진정한 계승자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죽음을 준비하는 자라면 읽지 말기를 바란다. 너무나도 명징하고 완벽한 죽음을 성취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질 것이거든. 그것도 아주 잔인한 방법으로 살아가야 할 자들에게 자신의 의미를 각인시키면서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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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뒤흔든 최대 역모사건 - 조선 천재 1000명이 죽음으로 내몰린 사건의 재구성
신정일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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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라는 것은 항상 아킬레스건을 가진다. 무슨 말인고 하니 역사는 현재를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지나고 난 이후그 시대를 살아낸 - 여기서 살아낸 사람이란 말은 살아남은 혹은 승자 -자들이 그 시대를 추억하며 기록한 것이다. 물론 기록자들은 사실을 기록한다고 하지만 그 사실이라는 것이 승자의 입장에서 본 사실에 불과하다. 승자의 관점이 곧 역사가 된다는 것이 역사의 가장 아킬레스건이다.

 

'기축사화'는 조선 최대의 역모사건이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보기로하자 사실이라는 것 다른 말로는 현상인데 이 사실과 현상이라는 것이 재미있다. 매우 결과론적인 이야기만 한다는 것이다. 과정이 생략되고 눈에 나타나는 결과만을 좆는다. 원인을 제거한 그러니까이런 말을 하면 맞을지 모르겠지만 보모없는 자식의 혀애라고 해야한다. 그러나  여러분들도 생물학을 배웠다면 알고 있을 것이다. 정자와 난자가 만나야 생명이 잉태되는 것 아닌가? 역사라는 것은 좁게 말해 사실이라는 것은 생명은 없지만 이상하게도 생명의 수태와 닮았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듯이 사실이라는 것도 원인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기축사화의 원인은 무엇이며 그 결과는 무엇이었을까?

 

    하나의 사건에는 또 하나의 원인만 있으란 법은 없다. 하나의 원인은 뭐 고전소설에서나 찾아봐야하는 것이고 현대의 소설에서는 수많은 원인들이 인과적이거나 복잡다단하게 얽히고 엮겨서 하나의 사실 혹은 결과를 생산해 낸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기축사화도 당시의 정치상황과 왕이라는 키워드 혹은 당이라는 키워드가 복합적으로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말이다.

 

  이 책은 당시의 상황과 사건의 원인이 되는 인물과 그 사건을 통해서 피해를 본 사람이라든지 , 연관된 사람들을 중심으로 서술하고 챕터형식으로 나누어서 정리한다.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고 많은 문헌들이 등장한다.많은 문헌들이 등장한다는 것은 사실에 기대어 쓰려고 노력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행위이긴한데 마지막 부분에서 대체역사론이라고 해야하나? 가정 역사론이라고 해야할지 모르겠지만 - 사실 if 역사관은 역사에서 가장 조심해야 될 부분이기도 하다는 소리를 어디선가 들었던 것 같다. - 앞의 사실의 서술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라는 식의 뒷통수치기를 시도하고 있어서 정확한 노선을 잡아주지 못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 부분도 있기는 하다.

 

이미 굳어진 사실을 다른 시각으로 재해석하는 것은 이미 여러번 시도 되었고 이러한 과정에서 인정받지 못한자들이 다시 재조명된 사례는 많다. 이 글을 이도 기축사화를 이제까지 고정된 승자의 시선이 아니라 전반적 시대상황과 정치상황을 고려해서 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역시 역사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현대의 다양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써도 좋을 분석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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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를 만나다
빈센트 반 고흐 그림, 메릴린 챈들러 맥엔타이어 시, 문지혁 옮김, 노경실 글 / 가치창조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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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흐를 처음 알게 된 것은 귀를 자르고 난 다음 그렸다는 자화상을 책에서보면서이다. 자신의 귀를 어쩌면 저리도 자르고 그것을 다시 그림으로 남길 생각을 했을까?라는 물음으로 빈세느 반 고흐는 내게 각인되었다. 광기의 화가로 내게는 기억된다.
 

    '빈센트 반 고흐'의 이름은  대량복제되어 대중들의 기억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고흐를 만나다는 것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할까? 그림으로 자신을 표현 할 수 밖에 없었던 천형을 받은 화가였으니 그의 그림들에서 그를 만나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고흐를 만나다>에는 22점의 그림을 제시하고 있다. 노 작가는 그림을 보고 자신의 생각을  한 구석에 써두고는 빈센트가 동생 테오에게 보냈던 편지의 한 구절을 덧붙인다. 마지막으로 멜릴린 챈들어 맥엔타이어의 시로 그림에 대한 감상을 마무리한다. 이제까지 그림을 읽어주는 것과는 좀 다른 방식이다. 어떤 의미와 상징과 삶의 한 구절을 잘라서 이어 붙여서 프랑켄슈타인의 모습으로 주악거리던 이제까지의 그림 말하기에서 벗어나있다. 그림이라는 것은 독자들에게 감상되어질 때 그림이 가진 진정한 가치가 보이고 이야기가 들리지 않을까? 노 작가는 자신의 말을 줄이고 천상의 말을 한다는 시인의 언어를 빌어 그림을 이야기한다. 독자와 그림과의 거리가 그만큼 좁아지는 것은 당연하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고 살아온 배경이 다르다. 동일한 텍스트는 그 텍스트를 읽는 - 그림의 경우에는 보는 - 사람의 경험과 배경에 따라 다양한 변주를 일으킨다. 그러므로 노작가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아도 된다. ㅡ림과 이야기가 가능하다면 자신의 경험과 배경을 풀어놓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고흐의 그림에서 나는 갇힌 열정을 본다. 이 같힌 열정은 경계가 분명한 선들 안에서 그 부분을 이루고 있는 것들은 곡선으로 끊어져서 약동하듯 힘있게 응집하거나 산개한다. 그러나 이러한 에너지는 그 테두리로 그어진 선 밖으로 절대 표출될 수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에너지는 나갈 곳을 잃어 그 제한된 공간에서만 치열하게 움직인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긴장감들이 고흐의 그림에는 가득하다. 숨막히고 눈물이 날 것 같다.

 

   사람을 알아보는데는 그 사람이 쓴 글을 읽어보는 것이 최고의 방법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림은 화가를 표현하는 최고의 수단이라면 빈센트의 경우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 여러편이 남아 있어 이미 사라져버린 빈센트를 구성하는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편지에서 사소하게 쓰인 문장과 당시의 생각들이 가슴에 유리조각처럼 박힌다. 비수야 꽂히면 피분수를 뿜으면 한 번에 죽으면 그만이지만 유리조각은 넓게 퍼져 움직일 때마다 아리고 피는 베어나오게 마련이다. 빈센트의 편지에서 갇힌 열정과 또 다시 대면할 때 손수건을 준비해야할지도 모른다.  빈센트를 만나는 것의 처음이 그림이었다면 두번 째는 단연 테오에게 썼던 편지를 읽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고흐 , 영혼의 편지>를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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