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률사무소 김앤장 - 신자유주의를 성공 사업으로 만든 변호사 집단의 이야기 우리시대의 논리 10
임종인.장화식 지음 / 후마니타스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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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철 변호사가 기자회견을 하면서 삼성이 세간에 회자되기 시작했다. 삼성의 비리와 의혹들이 붉어져 나오면서 비리와 의혹의 저 뒤편에 있던 법률 회사의 법률회사 김앤장이 표면으로 등장했다. 사실 법과 관련이 없는 환경에서 살아가는 일반인들이 알아야 할 필요성이 없는 회사다. 법으로 밥 먹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기업계의 삼성처럼 선망의 대상이 된 신화적인 회사라고 한다.

 

법이라는 것에 대해서 일반인은 로망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법이란 것은 정의를 위한 것이고 약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있는 최소한의 장치가 법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그것인데 , 그 로망을 무참히 부수는 집단이 바로 법률회사 <김앤장>이다. 물론 여기서 여타의 다른 로펌들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말하려고 김앤장을 거명한 것은 아니다. 로펌이라는 것을 생각해보시라 변호사들이 모인 곳이다.모여서 팀을 이루는 회사다. 회사라는 것을 생각해보자 이익을 위해 일하는 집단이다 변호사들도 의뢰인을 변호해서 수임료를 획득하여 이익을 창출하는 사람이다. 법은 멀고 돈은 가깝다.

 

김앤장은 여타의 로펌들보다 좀더 얄궂다. 자기증식을 해서 거대화한 기업형 로펌이라고 보면 되겠다. 여기서 자기증식이라는 말을 외 쓰냐고 물으면 철의 3각 동맹을 통해 더욱더 견고해지는 그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본이라는 거대 담론 뒤에 법 정의가 고개 숙일 때 어떤 일들이 벌어질 수 있는지 김앤장의 행보에서 그것을 확인하기에 충분한 것 같다. 너무 둘러 왔으니 다시 책으로 돌아가자

 

<법률회사 김앤장>은 임종인 정화식이라는 사람이 썼다. 이 둘의 조합은 언밸런스한 조합이ㅏ. 한 사람은 국회의원이고 또 한사람은 노동운동가다. 궁합이 맞지 않을 법도 한데 이 책에서는 죽이 잘 맞는다. 아 이 두 분에게 요정도의 경박한 언어로 찬사를 드릴 수 밖에 없음을 글을 쓰고 있는 자는 언어의 취사선택의 폭을 넓혀야 겠다고 반성하고 있다. 특히 국회의원이 자서전이 아니고 치적보고를 빙자한 출간이 아니고 이런 글을 쓴다는 것이 생경하다.

 

김앤장은 영리집단이다. 그러므로 김앤장에겐 법정의라는 것이 없다. 법윤리라는 것도 없다. 오로지 법이라는 것은 돈을 벌기위한 수단이다. 그러므로 법은 김앤장에게 묻매를 맞기도 하고 어두운 방에 끌려가서 강간을 당하기도 하고 윤간을 당하기도 한다. 폭력적 칼질 앞에서 법은 김앤장 앞에서 무력했다. 길들여진 법이란 것은 곱게 화장하고 손님들에게 손짓을 하는 집창촌의 창녀가 되었다. 김앤장은 그런 법들을 손님들의 취향에 맞게 꾸며서 팔아 먹었다. 당연히 그 몸값은 포주가 부르는 게 값이다. 이렇듯 손님들의 취향에 맞는 상품들을 내놓으니 손님들이 문전성시를 이룬다. 더욱더 포주들의 행악은 그칠줄을 모르고 되려 포주를 비호하게 되는 지경에 이른다.

 

김앤장에게 법은 돈벌이의 방법이다. 국가에서 법심판을 위해 교육시킨 자들을 규합하고 되려 법을 수호해야할 사람들이 그 법의 헛점을 찔러들어가게 한다. 이용자가 바라는 것을 얻어준다. 어떠한 방법을 써서라도 말이다. 고위관리를 고문이라는 제도의 헛점을 이용해 매수하고 로비의 창구로 이용하고 특정집단  - 사법고시생 그들은 기수로 이합집산한다. 그만큼 연대가 강할 수 밖에 그러므로 상명하복 전관예우에 강할 수 밖에 없다-을 기수마다 한 명씩 심어둠으로서 전 기수를 아울러 관리한다. 인맥관리에서 전방위적이다. 법률 전문가이다보니 법을 이리저리 비켜가는 것은 당연지사 합법과 탈법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들면서 집단화된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 달린다. 돈과 권력과 법이 만났을 때 그 결과는 참혹하다.

 

참혹함이란 말로 할 수 없을 지경이다. 양지에 있어야 할 법들이 음지로 숨어들어 돈 앞에서 무릎을 꿇고 신하가 되었다. 스스로 포기하고 강간범에게 다리를 벌린 꼴이다. 자 그렇다면 저 눈물 흘리는 법의 눈물을 누가 닦아주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봐야 한다. 이제 강간범이든 윤간범이든 가해자의 얼굴을 바로 봐야할 때이다 눈을 감는다고 일이 지워지거나 없었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또다시 눈을 감을 것인가? 선택은 자유다. 그대의 선택에 돌을 던질 사람은 아무도 없다. 빨간약을 먹을지 파란약을 먹을지 선택은 약을 먹을 사람의 몫으로 남겨두자

 

아 사족으로 한 마디 더 덧붙이보자면 정말 임종인 장화식의 말처럼 이 책이 출간되었지만 김앤장에서 출판물 출판정지처분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소송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뭐 우리는 알지 않는가? 구린 것이 있는 것들이 더 지랄발광을 떤다는 것을 체득하고 있으니 까짓거 소송당한다면 자신들의 구린 면을 더욱 드러내놓는 방증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그들에게 말해주지 않아도 머리좋은 그들이 모를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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캥거루가 있는 사막
해이수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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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해 전이었던 모양이다. 온라인에서 만나 교우하던 이들이 온라인에서 벗어나 세상에 나와서 해후한 적이 있었다. 온라인 속에서 살아온 닉네임만큼이나 다양한 외양과 성격을 가진 이들과의 만남이었다. 그 곳에서 만난 지인이 소개했던 책이 <캥거루가 있는 사막>이었다. 책을 구입하고 그렇게 시간은 흘렀다.
 

    글쓴 이는 해이수라는 이름으로 글을 쓴 모양이다. 설핏 그의 존재는 해이수라는 이름 속으로 감추어졌다. 어떠한 의미인지 알 수 없으나 글을 읽으면서 필명 아래로 자신의 존재를 감추기는 했으나 글에서는 자신의 존재를 감추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다. 그의 세계로 이제 들어갈 준비가 되었다.

 

    <캥거루가 있는 사막>은 표제작인 ' 캥거루가 있는 사막'을 포함해서 총 여덟편의 글이 모여있는 소설집이다. 소설집은 분절된 의식의 편린들이 모여있다. 각자의 이야기를 풀어놓았지만 소설집의 묘미는 분절된 의식의 개별적 혼합에 의한 재구성이다. 편린들을 주워모아서 진실인지 허상일지 알 수 없는 존재를 재구성하는 맛이 있다.

 

    해이수의 소설집에서 중심에 있는 것은 아버지의 이미지 , 형의 이미지 , 이방인의 냉철한 이미지 정도가 아닐까? 아버지에게서 어쩔 수 없이 피내림한 낭만주의는 표면에 드러나지 않고 혈관 아래로 유유히 흐른다. 형에게서는 현실을 살아가는 방법 혹은 현실의 갑갑하고 팍팍함을 수혈받았다. 아버지와 형에게서 받은 것들을 포장한 것은 투박하지도 세련되지도 않은 타자 혹은 이방인이 겪는 냉혹한 시선으로 갈무리 했다. 이러한 편린들이 해이수의 의식을 반영한다.

 

아버지의 로망은 '몽구 형의 한 계절'과 '출악어기'에서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몽구 형의 한 계절'에서 나를 몽구 형에게 보내면서 글쟁이로 거듭나길 바라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소설가로서의 로망을 기대하는 모습을 그려내고 '출악어기'에서 아버지는 고전을 강독하면서 길 위의 삶을 동경하고 길 위에서 살고 길 위에서 생을 마감하는 무엇인가를 갈구하는 낭만주의자의 삶을 그려내기도 한다. 해이수는 아버지의 이미지에서 피내림을 했지만 그것을 순순히 받아들이지는 않는 것 같다. 고상해 보이던 아버지는 몽구 형과의 대화에서 저급한 언어들로  이제까지의 언사들이 허식이었음을 폭로하고 출악어기에서도 길 위의 삶이 어떠한 의미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숨겨둔 아이들을 보기 위한 여정이었으며 고전을 강독하는 것도 허식었음을 까발린다. 아버지에게서 받은 낭만이지만 자기복제에 앞서서 철저히 깨부수는 자기부정의 의식을 행한다.

 

    '몽구 형의 한 계절' '어느 하오의 빈집털이' '돌베개 위의 나날'에 나타난 형 혹은 선배의 이미지는 소설가 혹은 소설의 임무인 현실에 대한 직시를 보여준다. 몽구 형은 '삐루 꼬뿌'를 깨고 다시 자신이 간직한 매실 장독을 나를 통해 깨어버리게 함으로써 외면했던 현실로 귀환을 하고 , '돌베개 위의 나날'에서 호주 유학생의 삶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호락호락하거나 판타스틱하지 않음을 불자(불법체류자)이면서 청소업을 하는 선배의 입과 행동을 통해서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어느 하오의 빈집털이'에서도 선배의 모습은 안정되어있지 않고 뒤틀어진 모습으로 형상화된다. 낭만이 결여된 현실적인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낭만의 핏톨을 가진 사람들이 보기엔 마음이 일그러진 장애처럼 보인다. 그러나 더 슬픈 것은 그렇게 살지 않으면 현실을 살아낼 재간이 없다는 점을 인식하는데서 온다.

 

    이방인의 냉혹함이란 형의 현실인식과 궤를 같이한다. 호주 유학생 , 유학생 청소원 , 여행 가이드 등으이 해이수의 중심인물이지만 그들이 속한 사회에서는 이방인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것은 독자가 가질지 모르는 판타지를 일말의 망설임 없이 부순다. 현실은 판타지로 가득한 곳이 아니라 판타지 포장된 사살성과 인과의 법칙으로 움직이는 곳임을 해이수는 보여준다. 해이수가 선택한 글쓰기는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글쓰기 전략을 구사한다. 극단적 리얼리즘도  아니고 리얼리즘이라고 규정하기도 힘들다. 굳이 말하자면 해이수의 리얼리즘이라고 해두어야한다. 적당하게 사실적으로 보여주기 중도적 리얼리즘이라고 해두어도 좋겠다. 

 

    '환원기'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봐야한다. '환원기'는 해이수의 글쓰기에 대한 자기 고민의 토로이다. 스승의 글을 훔쳐 등단한 작가는 스승의 화두를 다시 생각한다. 호리병 속의 새에 대한 화두다. '너는 네 안의 칼자루를 두고 왜 남의 칼자루를 들려고 하느냐'는 스승의 일갈은 글을 쓰는 자라면 꼭 한 번 이상은 고민해왔을 문제다. 자신의 칼로 자기 글 속에 허상과 허깨비 우상들을 베어낼 수 있을 때 즉 자기 자신에게 할복을 행할 수 있을 때 타인의 칼자루를 빌리지 않아도 스스로의 글로 타인을 죽일 수 있는  경지에 이를 수 있지 않을까하는 고민이다. '줄탁지기'라는 고사가 인용된다. 병아리가 쪼는 지점을 어미닭이 정확히 쪼아주어야 병아리가 세상으로 나올 수 있다는  고사인데 어긋나면 세상 빛을 볼 수 없다는 이야기다. 사제의 관계라고 해야하나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미가 병아리의 울림을 듣고 거기에 반응할 수는 있어도 어미가 먼저 껍질을 쪼아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어미와 병아리의 관계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 변형되기도 하고 다시 글쓴이와 독자와의 관계로도 변형될 수 있지 않을까? 작가가 쓴 글에 독자가 반응하는 것 공명이 일어났을 때 좋은 글은 세상에 나오는 것이 아닐까 잠시 상념에 잠겨본다.

 

    마지막으로 표제작 이야기를 해야할 시간이다. 호주의 사막을 여행하는 나는 코바와 우미코를 차례로 만난다. 나는 동성동본 애인 때문에 고민이다. 현실과 도덕적 윤리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다. 관념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이다. 현실과 관념의 싸움에서 형체가 없는 관념이 현실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코바와의 여행에서 캥거루는 후진이라는 것을 모르게 운명지어졌다는 소리를 듣는다. 자신이 죽을 것을 알면서도 멈추지 않고 버스를 향해 뛰어드는 캥거루는 그렇게 운명지어졌다는 것이다. 우미코와의 만남을 통해서 나는 비밀에 대한 것을 묻어두는데 나는 그 비밀을 마지막에 풀어본다. 동성동본의 문제보다 더 윤리적으로 지탄받을 형국의 근친상간의 문제가 우미코의 비밀이었던 것이다. 세상에서 자신이 처한 문제만이 가장 큰 문제로 부각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더 큰 문제를 부각시키므로써 다시 사막과도 같은 현실로 돌아가서 사막이 아무리 덥고 힘들거 살기 힘든 환경일지라도 캥거루가 태어나면서 피내림한 운명이라는 것을 향해 돌진한다. 관념이 지배하는 세상에 당당히 도전장을 내미는 것이다. 그렇게 운명지어졌다면 캥거루처럼 부딪혀 죽으면 그뿐 후진은 없다. 이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이다. 캥거루는 사막을 가로질러 지금도 뛴다. 버스는 캥거루를 조심하고 비켜간다. 그렇게 현실은 진행된다.

 

    해이수는 자신이 만들어낸 관념도 쓸만치 써먹었고 경험도 쓸만치 써먹었으니 이제 어떻게 칼자루를 들고 설칠 것인지가 궁금해진다. 자신 속에 있는 칼자루를 들어 허상과 관념을 까부수고 독자들에게 위협적이지만 그 위험성 때문에 오르가즘을 느낄만큼의 흥분을 전해줄지 궁금해진다. 아니면 타인의 칼자루를 빌어 관념과 허상들 사이에서 칼질을 할 것인가? 해이수의 다음 글들은 언제 소설집이 되어 나올지 소설이 되어 나올지 은근히 기다려진다. 그 오르가즘에 카타르시스에 죽음을 맞으면 나로서는 가장 아름다운 죽음이라 말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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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의 만감일기 - 나, 너, 우리, 그리고 경계를 넘어
박노자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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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감일기라 ......

 

박노자의 이름을 처음 접한 것은 <당신들의 대한민국>이라는 책을 통해서였다. 이안(異眼)의 외국인이 바라본 한국에 대한 단상을 적어 놓은 글이었다. 한국 사람으로 한국에 대한 단상을 외부에서 타자의 시선으로 풀어낸 신선한 책이었다. 그를 <만감 일기>에서 다시 만났다. 10년의 시간이 지났다. 다시 박노자가 말을 걸어왔다. 만가지 기묘막측한 느낌이 언어를 통해 틈입한다.

 

<만감일기>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글은 개인의 의견이 강한 일기이다. 일기는 자신의 감정이 어쩔 수 없이 베어나오므로 주관적일 수 밖에 없다.게다가 이 일기들이 실린 곳은 박노자의 종이로 된 노트 깊숙한 부분이 아니라 인터넷이라는 개방된 노트에 쓰여졌다. 자신의 생각을 묻어두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슬쩍 까발리는 통로다. 읽는이가 동의하든 하지 않든 간에

 

박노자는 나를 넘고 우리를 넘고 민족을 넘고 경계를 넘는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넘는다는 말보다 지운다는 낱말이 더 적절한 단어다. 박노자의 관심은 하나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에 존재하면서 모든것에 존재한다. 박노자의 감각의 촉수는 기민하게 모든 것에 반응하는데 이 기민함은 국내에 사는 일반 대중이거나 혹은 교양인의 촉각 범위를 아우르고 있다. 한국이라는 조직이 돌아가는 것을 한 발 떨어져서 직시하고 있다.

 

박노자를 읽으면서 개인적이지만 몇 개의 키워드를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양심적 병역거부 , 폭력 반대 , 불교적 사유관 정도가 아닐까 하는데 지극히 개인적인 감각의 결론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밝혀둔다.

 

박노자가 세상을 보는 것은 폭력의 세상이다. 모든 것이 폭력적으로 이루어진다. 여기서 폭력이라는 것은 물리적 폭력의 협소한 의미를 벗어나 있음을 알아야 한다. 거대권력과 개인의 관계에서 폭력은 난무한다. 폭력을 넘어서 폭압의 시대다. 개인은 집단의 광기 앞에 무력하다.

 

박노자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양심적 병역 거부자에 대해서 다시 생각한다. 한국은 군대에 복무하는 것을 의무로 정하고 있어 거부할 수 없다. 강제 징집이다. 대한미국은 자유민주주의국가라고 알고 있는데 대한민국에 태어난 남성은 군대에 가지 않을 자유는 없는 모양이다. 대한민국의 군대는 방위의 개념봐 살상용으로 수출된 것은 아닐까? 국가에 대한 허울 좋은 위기의식과 애국심을 이용하는 것이 국가라는 권력이 아닐까? 군대가서 뭘 배울까 총쏘고 수류탄 던지고 사람 죽이는 기술만 배우는 것이 아닐까? 아니 타인을 죽이지 못해 자기를 죽이는지도 모르겠다. 군대에서 총을 들기 싫고 살상무기를 들고 싶지 않다는 사람들에게 꼭 징집을 해야할까? 다른 방법은 정녕 없을까?

 

박노자를 읽으면서 흥미로웠던 것은 불교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있을 것 같은 느낌 아니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불교에 대한 사상적 심취가 돋보인다. 고등학교 때부터 읽었다는 법구경이 어떤 책인지 궁금해지기까지 한다. 불교적 사유관에서 인간을 사랑하는 대자대비한 시선을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사상적 토대가 되었다고 해도 비판의 범주에서 성역이 아니어서 박노자가 아름답다.

 

박노자의 글들을 읽으면서 눈에 들어오는 것은 '우리'라는 대명사다 . 박노자는 한국인이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고 있고 노르웨이에 머물고 있지만 한국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너희들의 나라가 아니라 당신들의 나라가 아니라 우리의 나라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타자가 아니라 스스로의 치부를 드러내는 심정이지 않았을까? 개인을 집단에 귀속시켜서 박노자가 싫어할지도 모르겠다. 이미 한국인이면서 외부 타자의 시선을 유지한다. 긴장성을 늘이지 않는다. 잘 쟁여진 가야금의 활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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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문장을 쓰기 위한 우리말 풀이사전
박남일 지음 / 서해문집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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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이란 것을 말한다는 것이 참 우스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한 번 해보련다. 그것도 우리말이다. 고유어에 대한 뜻 풀이 사전이다. 고유어라고 쉽게 보지 말기를 바란다. 낮선 고유어는 익숙한 외국어의 뉘앙스보다 더 이국적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개인적인 소회지만 나는 사전이라는 말을 기억할 때 <눈 속의 검은 항아리>로 처음 대면했떤 김소진을 기억한다. 사전의 어휘를 다 외워버렸던 사나이 , 안타깝게도 그는 지금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그가 남기고 간 글과 사람들만이 존재할 뿐이다.

 

사전을 읽으면서 갈음해서 쓰면 좋을 고유어를 하나 둘 발견하게 될 때마다 살려 쓰고 싶은 말들을 만날 때마다 작은 포스트잇을 붙여 보았다. 책의 절반이 포스트잇이다. 그러나 살려 쓰고 싶은 말들은 이미 우리네 입말에서도 사라지고 글자말에서도 사라져가고 있어서 생경하다.

 

1710여개의 낱말들이 작은 사전 안에서 정연하게 줄을 섰다. 표제어가 등장하고 해설이 덧붙여지고 다시 저자의 설명과 실제로 쓰인 글을 실어놓아 사용하기에 적확한 상황을 밝혀둔다. 여줄가리 올림말을 통해서 큰 분류에 관련된 말들을 짧게 뜻만일도 소개해두었다. 개인적인 생각에 불과하지만 짧게 설명된 여줄가리 올림말에 더 애착이 간다. 살려 써야 할 말들의 무덤이었다. 힘을 잃어 죽어가고 있는 노인의 방이었다.

 

말이라는 것이 사전에 실리기 시작하면 죽어간다고 봐야하지 않을까? 그러나 사전에 실려있어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어 좋은 것도 있지 않을까 그 존재가 스스로 증거하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으니 사람들이 불편하더라도 생경하더라도 사라져가는 말들을 자주 쓰면 그 말은 의미의 뼈에 살을 붙이고 노년의 생기에서 다시 청년의 향기를 가진 단어로 회춘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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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만원 세대 - 절망의 시대에 쓰는 희망의 경제학 우석훈 한국경제대안 1
우석훈.박권일 지음 / 레디앙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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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만원 세대라는 말이 2007년의 화두라고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88만원 세대라는 말은 우석훈과 박권일이 이야기하듯이 막장 세대의 완곡한 표현입니다. 대부분이 비정규직으로 살아가야하는 20대 청춘들에게 보낸는 애사라고 해두어도 좋겠습니다.

 

이 책은 읽어보려고 했던 책이기도 했고 , 주위에서 평도 좋고 , 어떤 이는 꼭 한 번 읽고 지나가야할 책이라고 했고 , 어떤 이는 이 책을 읽고 철망을 보았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읽은 사람의 반응은 각기 달랐습니다만 결국 가리키는 지점은 똑 같았던 모양입니다.

 

제 1장에서는 세계의 20대의 상황을 살핍니다. 일본의 경우와 미국 프랑스 독일의 경우를 두루 살펴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유럽과 한국의 환경 차이를 인식하는 것부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버블세대 베이붐 세대 68세대들이 한국의 88만원 세대의 경험을 먼저 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만 한국의 경우 다른 나라와 같이 합리적인 해결방안을 찾지 못하고 표류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러한 미궁에 빠진 상황은 협력과 이해 대화라는 기본적인 개념을 인지하지 않고 신자유주의의 기조아래 펼쳐진 무책임한 정책들의 농간으로 20대들은 세대 간 경쟁이 아니라 세대 내 경쟁이라는 빠져나올 수 없는 개미지옥으로 내몰리게 됩니다. 일본 영화 베틀로얄의 생존방식처럼 오직 승자만이 모든 것을 가지는 승자독식의 기운이 세상을 지배하고 그러한 구조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우리네 20대 청춘은 오늘도 고시원에 틀어박혀 있습니다.

 

2장에서는 다안성을 크리스마스 캐롤에 나오는 스쿠루지 영감이 여행했던 과거와 현대를 넘나드는 구성을 이용해서 작금의 20대가 처한 상황을 제시합니다. 연공서열제가 무너지고 난 후의 승자독식의 사회 구조와 20대들이 내몰린 편의점과 주유소 그리고 프렌차이즈 업체의 아르바이트 현장들을 두루 살핍니다. 절망의 편린들이 독자들에게 꽂혀드는 시간입니다. 가랑비 같이 젖어들 수도 있고 우박같이 내려꽂힐 수도 있습니다. 부디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숨막혀 죽음 직전까지 가보시길 바랍니다. 그것은 현실을 직시하고 인식하는 다른 비유이기 때문입니다. 20대의 삶은 풍운의 꿈과 판타스틱함으로 가득한 삶이 아니라 먼저 산 세대들이 뿌려놓은 지뢰밭을 아무런 장비 없이 지나가야하는 군인의 공포감과 다를 바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 가는 길이 지뢰밭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과 모르는 것은 천양지차이지 않겠습니까?

 

3장에서는 88만원 세대들이 가져야할 마음가짐에 대한 고찰이 진행됩니다. 뭘까요 바리케이트와 짱돌을 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바리케이트는 이미 먼저 산 세대들이 모두 걷어버린 상태이니 허허벌판에서 협공당하기 좋은 상황에 내몰려 있습니다. 그렇다면 짱돌과 화염병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단결된 의사 발현이 아닐까 합니다? 스스로 자신들의 의견을 모아 당당히 발현하는 것이지요. 스웨던의 경우처럼 말입니다. 스웨던의 경우 자국의 산업과 경제를 지키기 위해서 정부 혹은 지자체가 지방의 상권을 보호하고 활성화합니다만. 이것은 외국의 경우일 뿐 한국은 되려 지자체가 대형 프렌차이즈 유치에 두 발을 벋고 나서고 있는 형편입니다 20대를 두 번 죽이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20대의 의견을 모으는 것도 좋지만 사실 20대를 막연한 세대로 인식하려는 윗 세대들의 인식의 틀도 문제가 됩니다. 아직 미숙한 정체성이 정해지지 않은 세대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감시하고 처벌하는 꼰대 - 선생님 혹은 아버지를 가리키는 은어로 알고 있습니다. -의 시선을 잠시 접어두고 한 세대의 주체로 당당히 인정하고 서로 교류해야함을 역설합니다. 지금 세간에 문제가 되고 있는 S그룹이 20대를 한 세대로 인정하였던  적이 있다는 것을 자료를 통해서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에필로그에서는 현실에 안주할 것인가 ? 현실을 인식할 것인가를 묻습니다. 모피어스처럼 말입니다. 선택은 여러분의 자유입니다. 빨간 약을 먹든 파란 약을 먹든 말입니다. 하지만 기억하십시요. 희망고문은 정말이지 할 짓이 못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야기가 끝나면 안되겠지요 그렇습니다. 문제가 발생하면 그것에 대한 원인이 있게 마련이고 그 원인을 해결하려는 대안이 등장하게 마련입니다. 작금의 88만원 세대들이 처한 문제의 대안은 어떤 것이 있을 수 있을까요?

 

88만원 세대와 386세대 유신 세대들이 서로를 베타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대화를 통한 이해와 상호 교류가 그 대안이지 않을까 합니다. 단지 윗 세대들이 쓸모 없는 세대다라고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원인을 분석하고 책임을 통감하고 함께 -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강조해야할 말 같았습니다 - 해결해 나가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0대들의 주머니를 착취하는 수단인 1318 광고로 이야기해보자면 최근에 어느 광고인지 휴대폰 광고인데요 머리모양이 뭐냐고 핀잔을 주는 아버지의 휴대폰을 찾아주면서 액정화면에 뜨는 '나의 희망'이라는 글시를 보여주는 광고가 있었어요 그렇습니다. 윗세대들이 절망의 세대라고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아들 딸들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희망을 가지고 대하여야하지 않을까요? 다시 한 가지 광고 이야기를 더 해보려고 합니다. 밤 늦게 들어온 여학생이 책상 위에서 힘없이 음악을 듣고 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들어오셔서 함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마음의 문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세대간 마음의 벽을 허물 수 있는 것은 함께 하는 대화가 아닐까합니다.

 

결국 서로에게 희망을 가지고 함께 대화를 통해서 인정하고 이해하면서 상호보완적인 관계에서 공존공생하는 세대가 된다면 절망적인 세대를 살아나갈 수 있지 않겠냐는 생각입니다만 이것 또한 제가 오독해버린 희망고문의 잔가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에 머뭇거리면서 말씀드리는 처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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