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과 책의 내력을 모르는 대부분의 독자들이 그러하겠지만 <미국의 송어낚시>를 처음 보게 된다면 소설이 아니라 낚시와 관련된 이야기겠거니 생각하기에 적당하다. - 원판의 표지는 프랭클린 동상에 브라우티건과 한 여인이 웃고 있는 장면이라지만 한국판에서는 물고기 한 마리가 그어져있다.- 한국어로 친절하게 리처드 브라우티건의 소설이라는 말을 명시해두었기에 소설이 되었다. <미국의 송어낚시>는 미국 생태소설의 출발점이라고 한다. 생태소설이라는 말이 조금은 생경하지만 읽고나서 생각해보기에 문명에 반하는 자연으로의 회귀 혹은 자연과 인간이 교감하는 시절을 기억하다와 비슷한 어감일 것 같다. 그러니까 기계와 과학이 지배하는 문명의 시대 한 가운데에서 우리 예전처럼 살면 안되는지를 묻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미국의 송어낚시>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소설이라고 명명되었지만 수많은 에피소드로 분절되어 있고 그 사이에 알 수 없는 - 한국 사람 혹은 미국 사람이 아닌 비미국인들이 알 수 없는 - 상징들을 사용하고 있다. 소설의 한 단락을 보는 것이 아니라 브라우티건이 쓴 한 꼭지의 수필을 보는 듯한 느낌이 강하다. 서로 연관성이 외견상으로는 없어보인다. 하지만 외견상으로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한다. 그 이면에 숨겨진 공통점을 관통해야 한다. 그 숨겨진 의미들을 관통해서 하나의 단어이든 문장이든 뽑아내는 것은 책을 읽는 사람들의 몫으로 남겨두자. 그렇다. 네말이 맞다. 사실 브라우티건의 이야기는 여러가지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읽는 사람이 읽기 나름이므로 개인적 견해는 딱 두가지로 하고싶은 이야기를 마치려고 한다. 책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송어낚시를 하려고 낚시줄을 던졌더니 그곳은 집의 계단이 되었더라는 이야기와 강에서 아내와의 섹스 그리고 질외사정의 경우가 가장 중요한 장면인 것 같은데 이제 더 이상 송어를 잡을 곳 - 강이 사라지고 있다 -이 없는 자연의 자리를 기계문명이 잠식해 들어오고 송어들이 죽어가는 오염된 강에서는 더이상 교미를 하지 않는다 다만 다음 세대는 오염된 강을 따라 흘러간다. 결국 기계문명이 지배하는 미래는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소설의 형식면에서도 독특함이 있었지만 또 눈에 보이는 것은 브라우티건이 사용한 상징이다. 상징에는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상징이 있고 지역적으로 통용되는 상징이 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십자가를 보면 예수를 생각한다는 것은 국제적인 상징이다. 소쩍새는 한국에서 며느리의 설움으로 읽히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그렇지 않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하면 브라우티건이 사용하는 상징이 지역적 상징이라는 말을 하고싶어서다. 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렇다. 왜냐 미국에서만 알아들을 수 있는 말들을 하고 있으니까 브라우티건이 낙동강에 페놀이 방류되어 식겁했다는 이야기를 쓴다거나 동강에서 레프팅을 많이해서 오염되었다거나 하는 이야기를 했다면 한글로 브라우티건의 이야기를 읽는 사람이 더 잘 이해했으리라 최소한 우리가 사는 지역의 이야기고 우리의 정서가 녹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실 이 소설을 한글로 읽고 매우 대단한 작품이다. 엄청나다라고 느낀 사람들이 있담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봐야한다. 내가 한국인이 맞기는 맞는지 말이다.
바야흐로 봄의 언저리이고 여름의 초입이다. 대학가 근처에서 있다가 보니 대학의 봄은 , 내가 두어달 살펴본 바로는 대학의 움직임은 입학을 전후로한 그들만이 알 수 있을 것 같은 구호들이 술에 취한 음성에 실려 건물들을 휘청거리게 했다. 분출하지 못하는 젊은은 불안정한 그들의 발걸음을 닮았다. 젊음은 길을 잃고 방황한다. 젊음이란 것은 무엇일까? 고등학교까지 12년 생고생 개고생한 것에 대한 시간과 사회규범의 보상이 젊은이들의 젊음 그 한 때인가? 방종과 방탕이 허용되는 시기인가? 이어령옹은 젊음은 탄생되는 것이며 그 탄생의 장소가 대학이라고 말한다. 젊음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대학생들에게 이 어령 옹이 아홉 가지의 키워드를 가지고 이야기를 한다. 그 시기를 지내 본 자만이 할 수 있는 시기의 중요성에 대해서 말하는 책이 바로 < 젊음의 탄생>이다. 젊음이 탄생하는 대학교 - 뭐 꼭 대학생이 아니어도 좋다. 물론 이 말은 이 어령옹은 하지 않았다. 오로지 내 생각이다. 대학가야 공부하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그 속에서 살아가는 청춘이라는 이름의 젊은 영혼들에게 각성을 하라고 말하지는 못하고 대학 그 곳에서 무엇을 해야하는지를 이 옹은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격정적으로 다그치지 않고 조곤조곤 아이들을 얼르듯이.............. 아홉 가지의 키워드로 이야기를 하는데 내 귀에는 그저 두어가지 겨우 주워 담을 뿐이다. 젊음이 탄생하는 대학이라는 공간은 독창성 - 하이브리드를 능가하는 - 을 가지고 학문을 낙지자의 관점에서 즐기는 곳이라고 이야기하고 계시는 것 같은데 자세한 이야기가 궁금하면 책 사보시길 바란다. 음 이런 이야기를 이 옹께서 하는 이유는 아마도 지금의 대학이 그러하지 못하기 때문에 대학의 이정표를 말해주는 것이리라. 오죽 답답하셨으면 이야기를 해야했을까? 물론 대학이 공부를 하기는 한다. 토익공부 취직공부 지지자 - 앎을 단순히 추종하는 자 - 들이 넘쳐나는 것이 문제다. 대학은 호지자 낙지자들이 차고 넘쳐야 할 곳에는 지지자들만이 넘쳐난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이 없다. 어이 대학생들 책 좀 일고 반성 좀 해라 사실 더 반성해야하는 사람들은 그 대학 시절은 그냥 보내버린 나 같은 사람들이다.
이번 작가정신에서 <인연>이라는 이름을 달고 책이 출간되었다. 이 책은 정찬주 작가가 일타 스님의 일대기를 소설적 감수성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소설적 감수성으로 재구성했다는 이야기는 일타스님의 일생을 함께하지 못했으며 그 당시 심리상태를 일타스님이 아니므로 알 수 없다는 전기 작가의 어쩔 수 없는 상상력의 개입을 이야기한다. 전기문의 어쩔 수 없는 한계다. 스님의 이야기다. 선승의 이야기라고 해야할 것이다 이러한 타인의 삶을 봐야할 대 우리는 큰 숨 한 번 쉬고 읽어야 한다. 물론 이야기의 중심에 있는 인물에 대해서 익히 들어 알고있거나 한 번 쯤 친견한 기억이 있는 사람이라면 - 등장인물에 관심과 존경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 그냥 읽어도 좋을 것이지만 사전에 전혀 배경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글을 읽게 된다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그 경계가 모호해진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일반인도 아니고 예술가도 아닌 종교와 관련된 신성과 관련된 부분이 틈입하기 쉬운 분야는 더욱 그렇다. 편향되는 기술은 미혹이다. 덤덤하게 종교인의 일생을 펼쳐내야 하는 것이 작가의 본분이다. 한 종교인의 일대기를 따라 읽는 것은 힘들다. 간간히 눈물도 적셔주고 간간히 목도 막히고 간간히 코끝도 찡해지고 말이다. 감정의 틈입이 많은 책이다. 한 사람의 일생에서 발심을얻어낼 수 있을까 ? 그렇다면 왜 우리는 발심을 얻으려하는가. 왜 지표를 삼아야 하는가? 삼기를 바라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표는 삼으라고 삼는 것이 아니며 스스로 찾는 것이다. 한 사람의 개인적 삶이 모두에게 지표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네 손가락을 연비했다는 일타의 가족들의 태반 이상이 불가에 귀의한 인물들이다. 결국 환겨이 그러했다는 이야기다. 싹수가 노란집에서 태어났다고 이야기하면 험한 말일 수 있겠지만 그만큼 환경은 중요하고 더 중요한 것은 그 환경을 받아들이는 개인의 재량이 아닐까 인생사 공수레 공수거라하였으나 일타라는 이름을 남기고 한 한 유정과 어떤 인연이 있어 나는 또 그의 이야기를 이렇게 읽고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들리는 말에 옷깃이 스치는 데에도 많은 억겁의 시간에 걸린다고 해던데 글로나마 만나는 나는 그 억겁보다는 짧은 시간을 한 세상 일타라는 스님으로 살고간 유정과 인연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오래된 일이다. 매설가 김종광의 < 경찰서여 안녕>을 만났다. 늘어지는 엿가락을 굳혀놓은 언어 - 표준어이 폭압에 시달리는 한국문단에서 지역의 탯말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것은 말과 글로 이야기를 해서 먹고 살아가야 하는 천형 혹은 살기의 지난함이다. - 와 소설의 허구성을 뒤집어버린 괄호의 작난(어지러움을 만들다) - 등장 인물 옆에 괄호로 나이와 지역을 밝혀서 그 지역에 가면 정말로 인물이 살아 숨쉬고 있을 것 같은 확인되지 않은 사실성을 획득한다. - 이 눈에 띄었던 매설이었다. 김종광의 소설은 내 주변에서 한국을 떠나는 지인들에게 두어 번 선물을 하기도 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책 속의 내용은 사라지고 김종광이라는 이름 석자와 그의 이야기에서 느꼈던 이미지만 남았다. 그렇게 곳 속에서 백골이 되어 누워있던 매설가를 깨워낸 것은 근래에 한국문학읽기에 천착해온 지인이 '김종광'을 읽은 것을 본 탓이었다.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 몇 몇의 이야기를 생산해내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짧은 글 묶음과 긴 글의 형태로 김종광의 이름을 달고 세상에 나와 있었다. 긴 글 혹은 짧은 글을 읽어오면서 긴 글보다는 짧은 글이 매설가들의 개성을 맛깔나게 표현한다는 체험적 선입견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장편 소설과 소설집을 두고 선택해야한다면 으례 단편 소설집을 선택하게 되는데 이번에 선택한 < 모내기 블루스>도 그랬다. 장편 <71년 생 다인이>가 있었지만 과감히 그의 두번 째 소설집을 선택했다. <모내기 블루스>는 소설집이므로 짧은 글들 , < 모내기 블루스> <노래를 못하면 , 아 미운 사람> <윷을 던져라><언론낙서 백인장> <서점 , 네시> <당구장 십 이시> <서울 , 눈 거의 내리지 않음 > <열쇠가 없는 사람들> <배신>까지 해서 총 아홉 편의 이야기들이 있다. 각각 이야기를 해보자면 끝이 없어 보인다. 다양한 이야기들을 다양한 시선으로 풀어냈다. <모내기 블루스>는 '서해'의 좌충우돌 - 서해는 가출 이후로 몸으로 하는 일이라고는 섹스말고는 없어 보인다. - 농촌 생활 적응기다. 대춘과 서해는 외관상 보기에는부부처럼 보인다. 서로는 그런 관계가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밤에 일어나는 신음소리는 노부부에게 매우 낙관적인 소리로 들린다. 어떻게 되었든 농촌의 미래는 생산적(?)이라는 메세지를 남긴다. 모판에서 다함께 블루스 한 판 추자. <노래를 못하면 아 미운 사람>은 노래를 못하면 사람구실을 할 수 없다는 한국사회의 한 단면을 잘 보여주는 노래를 못하는 사람이라면 싱크로율 1000%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다. 자신을적당히 알면 남앞에 나서지 않게 되는데 꼭 불러라 불러라 요구하는 소리에 한 곡 뽑으면 들리는건 환호가 아니라 야유다. 아 노래를 못하면 정말 미운 사람이 되고 맥을 자르는 사람이 된다. 노래를 못하는 사람은 위안 받으라 <윷을 던져라> <당구장 십이시>는 김종광 첫 소설집에서 보여주었던 괄호를 이용한 소설이면서 소설이 아닌 것 되기와 변화무쌍하고 다양한 인물의 등장을 선보인다. 각각의 인물 - 하물며 귀신까지 등장한다. - 이 얽히면서 조합되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서점 , 네시>는 중소 도시의 대학 서점이라는 밀폐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방적 폭력에 일방적으로 무너지는 상황을 적나라하게 집어낸 글이다. 인간은 폭력 앞에서 무력하게 무너진다. 하지만 그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도 사실은 다른 폭력 앞에서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던 것 중에 하나를 잃는다. 폭력은 누구에게나 행사되고 당한다. 혹력의 악순환이라고 하면 좋을 것 같다. 허위와 위선은 무너져 내린다. 발가벗겨진 인간은 그 자체로만 진실한지도 모를 일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이다. 세부적으로는 각각의 이야기가 흐르지만 전체로 묶어두고 보면 주목받지 못한 사람의 시선이 느껴진다. 중소도시의 한 지점이라든가 눈여겨 보지 못한 농촌의 한 지점을 무겁지 않은 시선으로 하지만 그러므로 더욱 눈물나는 시선을 김종광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슬픔으로 웃음만들어내기 지독하지만 매설가라면 해야할 천형을 김종광은 넉살좋게 견뎌내고 있는 모양이다.
반 고흐하면 모네를 존경했고 , 고갱과 잠시 함께 작업을 했고 , 동생 테오가 물질적 지원을 했다는 것 정도로 알려진 화가다. 글에게 붙여진 수식어를 열거해보라면 많은 말들이 있겠지만 '광기의 화가; '노란색의 화가'가 그 중 대표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광기는 그가 말년에 정신병원에 입원했었다는 기록이 만들어낸 것이고 노란색의 화가는 아마도 해바라기 그림에서 유래된 것이 아닐까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책의 제목은<노란색의 화가 , 반 고흐>다. 노란색을 즐겨 썻으니 당연하다. 그러나 책표지를 꼼꼼히 읽어보면 '머리가 좋아지는 명화 감상 '이라고 쓰여있고 출판사를 보면 시공아트주니어라고 되어있다. 이제 알았다. 어린이를 위한 책이다.논술의 시대 감성을 깨우는 훈련을 위한 책일까? 그 속으로 들어가보자 책은 어린이에게 직접 읽히는 것보다는 차라리 어른들이 먼저 읽고 아이들에게 그림을 보여주면서 이야기하는 편이 더 좋을 것 같다. 결국 어린이 전문 출판사에세 나왔지만 선생님을위한 교재같은 느낌이 든다. 이렇게 아이를 지도해보시겠어요 비교하기 ,그리기 추측하기 표현하기 관찰하기 그리기 유추하기 느낌말하기 거리기 숨은 그림 찾기 , 표현하기 비교하기 이해하기의 순으로 진행된다. 이외수 씨가 예술을 예술로 문학을 문학으로 이해하고 감상하자고 하셨던 것 같은데 - 이외수의 <하악하악>참고 - 그렇다 이 책에는 오롯한 감상이 없다. 즉 시를 읽으면서 밑줄 박박 그어가면서 시르 해부하는 것과 같이 고흐의 작품과 생을 해부하고 있는 것이다.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한다면 좀더 부드러워져야하지 않을까 물론 부드럽지 않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림을 좀더 부드럽게 왜 명화인지가 아니라 어떤 그림인지를 설명해주는 것이 그림을 감상하는 방법을 제대로 알려주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책의 판본이 제법 크고 올칼라 화판인데 , 아쉽게도 속에 들어있는 그림의 판본이 증명사진만한 크기로 된 것들이 많아서 고흐가그린 그 그림의 맛을 그 색을 잘 살려내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고흐의 초기작과 판화의 질감이나 선은 그만두더라도 후기 그림들의 점묘화법이 수용된 그림들의 그 질감을 느낄 수 있는 그림들을 제대로 볼 수 없음이 안타깝다. 교육은 있고 감상은 없는 책이 되어버린 것 같아 안타깝다 .